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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김동호 목사
성경본문 : 잠언 22: 6
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인간은 태어날 때 세상에서 가장 미숙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일년이 되어야 겨우 걷는 동물은 아마 사람 밖에 없을 것입니다. 웬만한 동물은 일년이 되면 성숙한 어른이 되는데, 사람은 성숙한 어른이 되려면 20년 가까이를, 혹은 그 이상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세상에 사람만큼 뛰어난 하나님의 피조물은 없습니다. 세상에 사람보다 빨리 달리는 동물은 없습니다. 세상에 사람보다 빨리 그리고 멀리 바다를 건너는 동물도 없고, 세상에 사람보다 빨리 멀리 하늘을 나는 동물도 없습니다. 사람은 하늘을 날다 못해 이제는 우주를 납니다.
진화론자들은 우리 사람이 원숭이에게서 진화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하지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진화는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원숭이에게서 진화 되었다면 원숭이 중에는 거의 사람 비슷한 능력을 가진 원숭이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숭이가 동물 중에는 그래도 가장 사람 비슷하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 능력의 차이는 인간과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은 인간으로 창조하셨고, 원숭이는 원숭이로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냥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인간과 비교할 수 있는 동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는 인간이 하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세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 뛰어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 인간에게 주신 능력 중에 하나는 학습 능력입니다. 인간은 학습 능력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동물이 좇아 올 수 없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동물들에게도 학습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도 그와 같은 교육과 학습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동물들의 학습은 모두가 다 생존을 위한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유능함에 대한 교육과 학습입니다. 물론 우리 사람에게도 그와 같은 교육과 학습이 있고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보다 중요한 교육과 학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훌륭함에 대한 교육과 학습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유능함이 그 동물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유능함은 매우 중요한 면입니다만 사람에게는 유능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훌륭함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동물과 달리 유능함만만을 교육하고 학습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과 동시에 훌륭함을 교육하고 학습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 잠언 22장 6절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이 바로 그 훌륭함에 대한 교육을 아이들에게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옛날 어른들의 자녀 교육과 아이 교육에는 이와 같은 교육이 있었습니다. 옛날의 부모와 어른들은 아이와 자녀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법도(마땅히 행할 길)를 가르쳤습니다. 엄히 가르쳤습니다. 옛날의 교육은 유능함에 대한 교육보다 훌륭함에 대한 교육이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자녀교육과 아이교육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육은 대부분 유능함에 대한 교육 뿐입니다.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인간적인 수준의 교육이라기 보다는 동물적인 수준의 교육입니다. 때문에 요즘 우리들의 자녀들과 아이들을 보면 옛날의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똑똑하고 유능합니다. 그러나 비교도 되지 않게 옛날 사람들보다 훌륭하지 못합니다. 옛날 교육을 받은 분들은 요즘 교육을 받은 우리들보다 유능하지 못했지만 훨씬 더 훌륭했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요즘 우리들보다 유능하지 못하셨음으로 우리보다 가난하고 우리보다 불편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보다 못사시고 불행한 삶을 사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보다 좀 가난하고 불편한 삶을 사신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곧 못살고 불행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보다 오히려 더 인간답게 잘 사시고 행복하셨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우리의 아이들이 정말 잘 살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유능함에 대한 교육만이 아닌 훌륭함에 대한 교육을 하여야만 합니다. 아이들에게 사람의 법도를 가르쳐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우리는 최근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함께 생각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고, 자녀에게 가르치고 싶어했던 것들은 거의 모두가 다 훌륭함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됨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하고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훌륭함을 고려하지 않고 유능함만을 강조하는 교육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훌륭하지 못한 유능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훌륭하지 못한 존재가 유능하다는 것은 재앙입니다. 유능하려면 반듯이 훌륭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축복이 되시는 까닭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훌륭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의 가장 큰 골치꺼리가 되고 화가 되는 까닭은 인간은 제법 유능한데 전혀 훌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훌륭함에 대한 교육이 부족한 인간이 상상을 초월하게 유능하기 때문에 세상은 멸망 직전으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이에게 마땅히 행할 길 즉 사람답게 사는 법도를 가르쳐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법도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옛날의 어른들을 그것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동양의 선조들은 도를 닦았고 서양의 선조들은 진리를 찾아 철학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태어나지 않았고 또한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의 이치와 삶의 법도를 모릅니다. 그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가상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길은 찾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입니다. 세상에 길을 묻지 않고 찾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오실 때 여러분은 길을 찾으셨습니까 물으셨습니까? 누구나 다 길을 물으셨을 것이고 가르쳐 주는 길을 믿고 오셨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길을 찾지 않고 묻습니다. 길을 아는 사람에게 묻고 그가 가르쳐 주는 길을 믿고 찾아 오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마땅히 행할 길 즉 삶의 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찾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입니다. 길을 아는 분에게 물어야 합니다. 인생과 세상의 길과 법도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분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께 배우지 않고 우리는 절대로 삶의 길과 법도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고, 우리가 가르쳐야 할 ‘마땅히 행할 길’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말 아이들을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아이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땅히 행할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빛과 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리는 아이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칠 수 없고,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훌륭함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교육에는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이 있습니다. 물론 가정교육이 중요합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가르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그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의 모든 교육은 부모가 가정에서 다 시킬 수는 없습니다. 학교에서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유능함에 대한 교육과 훌륭함에 대한 교육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유능함에 대한 교육에도 학교가 필요하듯 훌륭함에 대한 교육, 마땅히 행할 길에 대한 교육, 삶의 법도 대한 교육에도 학교가 필요합니다. 그 학교가 바로 교회학교입니다.
학교에는 좋은 학교가 있고 그렇지 못한 학교가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보모들은 어떻게 하든지 사랑하는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교회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학교가 있고, 그렇지 못한 학교가 있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정말 좋은 모델 교회가 되려면, 우리가 기도하고 바라는 것처럼 건강하고 바른 교회가 되려고 할 때 민주적인 정치 시스템과 직제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정말 우리 교회가 건강하고 바른 교회가 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좋은 교회학교를 가지고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10월 25일(월)에 바른교회 아카데미 창립대회를 가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바른교회 아카데미를 위하여 이사회와 연구위원회를 가졌습니다. 각 교단의 뜻있는 신학대학교수들로 연구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는 윤리를 전공한 교수, 여성학을 전공한 교수, 교회사를 전공한 교수, 사회봉사를 전공한 교수등 각 분야의 교수들이 다 모였습니다. 건강하고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하여 다 필요한 분야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른교회 아카데미 연구교수 중에는 반드시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교수를 모시려고 합니다. 건강하고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독교교육과 교회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건강하고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하여 정말 기독교교육과 교회교육에 사명감을 가지고 실력이 있는 목회자를 모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구제도 중요하고 선교도 중요하고 바른 교회 직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이들과 청소년 그리고 청년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칠 기독교교육과 교회교육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를 위하여 기도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교육에 정말 실력있고 소명감이 있는 전문목회자가 오셔서 인생을 걸고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교회학교와 기독교교육을 맡아 줄 목회자가 있어서 연구하고 투자하고 훈련하여 드디어 그리고 마침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교회학교가 명문 교회학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교육과 교회교육에 있어서 실력있고 소명감이 있는 전문목회자가 물론 중요하지만, 그 한 사람의 힘만으로 좋은 교회학교가 다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실력있고 소명감있는 부교역자들과 그리고 선생님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미 그와 같은 좋은 교역자들과 특히 소명감이 있는 교사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자체 건물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학교를 빌려서 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아이들의 교육환경과 여건은 그다지 좋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영아부와 같은 부서는 장소가 없어서 본당 로비에서 칸막이를 하고 교육을 하고 예배를 지금도 드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과 전도사님들 그리고 여러교사들이 정말 최선을 다하여 교회학교와 아이들을 섬겨주시는 것에 대하여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얼마나 감사한지 이루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사명 중에 하나는 바른교회 운동과 건강한 교회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불편하고 심지어는 열악하기까지 한 환경 속에서도 교회학교와 아이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시는 여러 선생님들과 교역자님들은 자신들의 헌신과 수고가 바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건강하고 바른 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부분 중에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더욱 더 힘써 아이들과 교회학교를 섬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도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당회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모든 정책에 우선하여 교회학교와 우리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에게 보다 많은 지원을 우선적으로 할 수 있도록 뒤에서 최선을 다하여 돕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하여서 언제나 지혜로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남에게 뒤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 아이들을 유능한 아이로 교육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교육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 아이에게 유능함을 위한 교육만이 아닌 훌륭함에 대한 교육을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많이 잊고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마땅히 행할 삶의 길과 법도를 가르쳐야만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우리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할 세상을 나쁘게 그리고 위험하게 만드는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 우리나라 경제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이 교회 재정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육관 구입을 위하여 많은 예산을 써야 하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많이 위축을 받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부담이 누구보다 저에게 많습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마음의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이들에 대한 교육적 투자를 게을리하거나 뒤로 미루지 말아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높은 뜻 숭의교회는 한 두 사람의 힘으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인 모두가 힘을 합하여 최선을 다함으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교회가 바르고 건강하고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하여 좋은 교회학교를 가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시고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 하면 교회교육과 교회학교가 좋은 교회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희 교회의 출석교인을 연령별로 분석해 본다면 영아부로부터 중고등부까지가 약 400명 정도, 청년들이 약 1,000명 정도, 그리고 장년들이 약 1,400명 정도입니다. 청년과 장년의 수에 비해 아직까지 아이들의 수가 많이 적은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여건상 아이들이 많이 모이기는 힘들고 어려운 교회입니다.
때문에 얼마든지 핑계할 수 있고, 합리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번 최선을 다하여 이 핑계를 뛰어 넘어 보십시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정말 한국에서 내세울만한 좋은 교회학교를 한번 만들어 보십시다. 그리하여 부모들이 앞 다투어 자신들의 아이들을 주일날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회학교로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 보십시다.
좋은 교회는, 건강한 교회는 지금보다 5년 후가 좋은 교회입니다. 5년 후 보다 10년 후가 더 좋은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하여서는 보통 교회들보다 5년, 10년 밑의 교인들에게 투자하는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청년과 청소년 그리고 어린 아이들에게 투자하고 좋은 교회학교를 만들어주어 지금 보다 5년후가 더 좋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5년 후 보다 10년 후가 더 좋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2) 성경은 우리 삶의 나아갈 길
성경본문: 잠언 22: 6; 디모데후서 3: 16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2)교육하기에 유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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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햇볕에 잘 여문 곡식이 속이 알차듯이 사람도 사람다우려면 마음이 알차게 익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알찬 사람은 말과 행동에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삶의 지혜가 녹아 있습니다. 성경은 펼치기만 해도 이로운 책입니다. 그래서 개권유익(開卷有益)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좋은 가르침이 있고, 넉넉한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곧 수불석권(手不釋卷)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우리가 미래에 나아갈 길이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또는 미래에 어떻게 대처할까?” 하는 질문은 인간의 역사를 알고, 역사의 의미와 본질을 찾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삶의 의미를 묻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문제 삼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역사상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나 흥미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에 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인간관과 역사관에서 인간과 자아에 대한 통찰을 깊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사는 인간에 의해서 이룩됩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그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부르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큰 사명을 맡기시는 것을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서 자명하게 보아 왔습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예수님의 생애, 그리고 사도들의 활동을 기록한 글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의 네 복음서에 나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으며, 최후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줄거리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방법에 있어서 우리들의 관심은, “성경이 우리들의 현실과 현존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리고 우리들의 삶 우리들의 영혼에 관해서 어떤 진리를 말해 주는가?”를 듣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통적인 구약성경의 인간관을 간직하고 창조의 질서에 따라 사는 인간과 현실의 질서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인간을 바라보시면서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연민의 정으로 주님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인간이 살아야 할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파란 많은 인간들과 사귐을 가지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새로운 삶을 함께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창세기의 기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으심을 받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했고, 따라서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과 사귐을 갖고, 그 안에 모든 자유를 부여했고, 만물을 지배하도록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또한 “인간이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 인간은 어떻습니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위선(僞善)과 거만(倨慢)으로 하나님을 적대하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교만해 있지는 않습니까? 때로는 이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재물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비참한 인간의 현실을 가난한 자, 죄 지은 자, 세리, 귀신 들린 자, 병자, 사회의 밑바닥에 사는 억눌린 서민들에게서만 본 것이 아니라, 부자,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 그리고 학자들 속에서도 찾아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있다.”고 하는 소위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중병에 걸린 자임을 상기시켜 주시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육체만의 문제나, 혹은 마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사회적 존재인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이 찾아온 것을 알렸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 누구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참다운 인간관계는 그저 인간적으로 형성된 인간 관계가 아니고, 주님 안에서 거듭난 인간들의 새로운 삶의 참된 존재 방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간들의 새로운 사귐과 새로운 공동체가 참된 인간 관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인간의 모습과 새로운 삶의 길”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무엇을 소유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물질과 같은 어떤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나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무엇이 삶의 만족이며, 어디에 삶의 목적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물을 때, 우리는 보다 중대한 내용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살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물건이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살려고 하는 의욕” “살겠다는 의욕”이 있을 때, 그 사람에게는 모든 물건은 필요한 것이지만, 생명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돈이나 지위나 명예가 아무 소용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과 자신의 인격의 근본적인 회의와 질문을 던질 때 찾아오는 불안과 정신적 고통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정신적 과제를 해결 짓지 못한 데서 오는 불안은 무엇입니까? 소유나 물질적인 것에 비하여 인간의 문제에서 오는 불안, 곧 인간학적 불안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모든 예술도 그것을 해명하기 위하여 나타났으며, 온갖 학문과 사상도 그 해결을 위하여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역사에 존경받는 모든 인물들이 이 인간학적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구출될 수 있을까 하는 데 그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를 비롯한 오늘의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중심에 있는 불안을 문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서 오는 불안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위하여 살다가 장차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라고 하는 문제에 귀착(歸着) 됩니다. 만일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다른 모든 문제들은 의의를 잃을 것이며, 인생의 깊은 불안을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별로 큰 뜻을 갖지 않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정신적 깊이가 없는 자연인이며, 물질적인 것을 소유하는 데 온갖 의의가 있다고 믿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뜻 있는 삶을 추스릴 줄 아는 사람은 가치 있는 문제를 가진 사람입니다. 가치 있는 문제란, 모든 인간들이 그 깊이와 영원한 데서 느끼는 정신적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얻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 보지만, 어느 누구도 그 문제에 근본적인 해결을 얻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인간 됨의 문제이며, 모든 인간이 다 같이 생각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그리스에 재미있는 신화가 있습니다. 그 신화는 인간의 일생은 불안의 일생이며, 우리들의 삶은 끝없는 불안의 연속임을 알려주는 인간의 운명을 비유한 신화입니다.
그 그리스 신화를 읽어 보면, 아득히 먼 옛날 이 세상에는 신들만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불안’이라는 한 신이 사람을 한 번 만들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료가 없으니까 땅을 차지하고 있는 신에게로 가서 흙을 좀 빌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흙을 빚어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은 형성되었지만, 생명과 활동을 못하기 때문에 불안이라는 신은 다시 ‘영혼’을 맡아 취급하는 신에게로 가서 생명과 호흡을 빌어 인간을 완성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별로 말이 없던 땅을 차지한 신과 영혼을 맡은 신들이 불안이라는 신에게 그 만들어진 사람을 각각 자기가 갖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안이라는 신은 다 되어진 사람을 보니까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할 수 없이 세 신은 가장 높은 신에게 재판을 청했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소유할 것인가?”에 대한 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진술을 끝까지 다 들은 재판관은 “지금 너희들이 서로 이 사람을 가지겠다고 싸우지만, 아직은 그대로 참고 있어라. 이 다음에 이 사람이 살다가 죽으면 ‘흙의 신’ 너는 이 사람의 몸뚱이를 도로 찾아 가고, ‘영혼의 신’ 너는 그 영혼을 되찾아 가거라. 그러나 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은 ‘불안의 신’ 네가 차지하거라.” 하고 판결했습니다.
그 때부터 오늘까지 “인간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혼은 영계로 돌아가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불안 속에 머물게 되었다.”고 전래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아니고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인간적인 불안을 해결지어 주며, 모든 근본적인 회의에서 풀어 줄 수 있는 책임을 맡은 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 것입니다. 예술이 그 문제를 취급하였으나 설명하는 데 그쳤고, 철학이 그 뜻을 계승하였으나 문제의 해결을 주지 못했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요소로 믿음, 곧 신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일, 즉 신앙은 기독교인의 문제이지만, 지식의 과제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지식을 무시하거나 도덕을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이상과 학문, 자유와 도덕을 초월하는 신앙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우리들의 지성, 감정, 의지를 종합한 전인격이 성경적 실재, 즉 하나님과의 인격적 접촉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체험, 전 생명을 바쳐 얻은 생활의 결과가 신앙의 바탕, 믿음의 근원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신앙인들이 생활과 체험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게 보여 준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인간들이 지켜야 할 떳떳한 교훈과 진리이기 때문에, 에수님의 교훈과 말씀에 따라 절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나갈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같이 해 주시는가에 따라 얻는 체험과 확실한 증거가 신앙의 내용이 되며, 그 뜻을 이웃과 사회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어지도록 인간에게 믿음과 목적이 되게 하는 말씀이 곧 성경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항상 창조적이고 기여적인 삶을 갖도록 하게 해 주는 힘이 있으며, 인생 행로에 새 소망이 되어줍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늘 성경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이 그 마음에 가득 차서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천국의 백성인 것입니다. 성경은 읽을수록 그 마음이 맑아지고, 거룩하여지고, 높아지고, 깊어지고, 넓어지고, 지혜로워지고, 의로워지고, 덕스러워져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 인물들은, 성경은 꿀 송이 같이 달고, 음식 같이 탐하여 애독하고 탐독한 사람들입니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는 매일 13장씩 1년에 신구약을 네 번씩 읽었고, 그의 91회 생일 기념일에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지금까지 150회 이상 읽었는데, 어느 때나 큰 기쁨으로 읽었고, 다 읽으면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영국 왕 조지 5세는 전 국민의 신망을 받은 왕이었는데, 그는 즉위 5주년 기념식에서 “나는 어머니 알렉산드리아 여왕의 교훈과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나는 55년간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제2대 대통령 애덤스는 자기의 경험을 말하며 “성경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읽어야 할 책이요, 한 두 번 읽고 말 책이 아니라, 분주할지라도 매일 한 장씩 읽어야 할 책이다.”라고 했습니다.
길선주 목사가 감옥에서 묵시록을 3만독을 해서 외웠다는 말은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는 구약 30회, 신약 100회, 요한1서를 500회 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많은 위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지 않고는 신앙뿐만 아니라 근대 문명 전반을 이해하지 못하며, 무식함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 밀턴의 “실낙원,” 괴테의 “파우스트,”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세익스피어의 모든 작품 등 최고 걸작품들은 다 성경에 그 근거를 둔 것이며, 성경 지식이 없이는 이것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외에도 음악가, 화가, 조각가 등의 예술 작품이 다 성경을 바탕으로 한 걸작들임을 재삼 음미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성경는 본질적으로 증거의 책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 편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일깨워진 예언자와 사도들의 마음들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라고 인식한 사건들에 대한 인간의 증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 성경은 성령이 우리의 심령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방법이 된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사람의 말인데, 이 두 가지가 모두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즉 성경만이 그에 대한 유일한 권위 있는 역사적 기록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엄격하게 신학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이차적인 의미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 즉, 그의 “뜻”이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위해 기도하라고 그리스도를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해 온 숱한 일꾼들을 예로 보여 주면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자유를 잃고 인권을 유린 당한 애굽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가자.”고 용감하게 나섰던 모세, “불의와 퇴폐의 땅을 벗어나 의와 사랑의 밝은 땅으로 가자.”고 간곡하게 외쳤던 아모스와 호세아, 그리고 “죄와 죽음, 불안과 공포의 땅을 벗어나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따라 나가자.”고 외친 희망과 사랑의 사도 요한 등을 보이면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교육시키시고 훈련시키시고 계십니다. 여기에 성경이 우리를 강하게 끄는 힘이 있으며, 신기하게도 많은 사람들로 읽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국가가 잘 되려면 경제 부흥이 되어야 하고, 경제 부흥이 되려면 정치가 안정되어야 하며, 정치가 안정되려면 사회 질서가 잘 되어야 하고, 사회 질서가 잘 되려면 도덕적 의식이 있어야 하고, 도덕적 의식을 가지려면 삶의 질이 높아져야 합니다. 삶의 질이 높아지려면 성경이 그 삶의 바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성경을 우리 전 생애의 삶의 길잡이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우리 삶의 길잡이로 삼아서 하나님의 지혜와 축복을 받고 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