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서구는 서해안을 면하고 있어 과거 여러 개의 섬이 있었고,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갯벌과 바닷물이 드나들었습니다. 하지만 간척사업, 경인고속도로 개통, 발전소 건립 등 빠른 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다만 변치 않는 것은, 사라져버린 섬과 바다 위에도 새로운 마을이 생겨났고, 여전히 서구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선사시대 검단 고인돌부터 고려의 경서동 녹청자 가마터, 500여년 신현동을 지켜온 회화나무와 같은 서구 지역 곳곳에 숨어있는 보물 같은 이야기를 담아 전하고자 합니다. |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미국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시티, 서울 마포의 염리동과 강서구 염창동의 공통점은? 소금(salt)이다. 이들은 모두 소금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조금 생뚱맞은 것 같지만, 샐러리맨이라는 어휘도 소금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로마시대에는 나라에서 군사들에게 돈이나 곡물 대신 소금을 봉급으로 지급한데서 유래된 비영어권 조어가 바로 샐러리맨이다. 일본식 영어다. 소금은 조선시대에도 전매품으로 지정하여 취급할 정도로 나라의 중요한 자원이었다.
사실 수렵, 채집생활을 하던 원시시대에는 소금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포획된 동물의 고기에는 기본적으로 염분이 들어있기 때문에 육식을 하던 시대에는 따로 소금을 섭취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인간이 수렵생활을 청산하고 이른바 정주형 농경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소금은 아주 중요한 물품으로 떠올랐다.
▲시천동의 농악대(청년단) 1938년
인천서구문화원, ‘인천서구 그리고 사람들’ - 류회택님 제공
부평의 변방, 북서곶 지역은‘모월곶면’이라는 옛 지명이 시사하듯, 신생대 제4기 후빙기의 해수면 상승으로 침수되면서 형성된 리아스식 해안을 가져 바닷물의 드나듦이 매우 복잡하고 반도와 섬이 많을 뿐, 농촌이면서도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다. 대신 갯벌이 발달했다.
난지염은 물론, 청라도도 썰물 때 걸어서 다녔다. 이런 북서곶의 독특한 자연과 인문지리적 환경에 위축되거나 좌절하지 않고,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 경제적 자유를 누리며 신분상승의 꿈까지 이룬 분들이 있었다. 그들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비밀의 열쇠, 키워드는 무엇일까?
▲시천동 모내는 모습(1960년대 초)
인천서구문화원, ‘인천서구 그리고 사람들 ’ - 류충규님 제공
첫 번째 키워드는 ‘마름’이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마름은 요즘 같은 산업사회에서 대기업의 중역이나 지역 책임자의 위상에 견줄 수 있다. 대기업 중역이 주주나 오너를 대신하여 자기가 맡은 분야의 경영전반을 챙기듯 마름은 땅 주인인 대지주를 대신하여 지주의 토지가 있는 현지에 거주하면서 추수기의 작황을 조사하고 직접 각 소작인으로부터 소작료를 거둬드려 지주에게 올려 보냈다.
북서곶의 마름은 어느 정도의 재산과 학식은 물론, 완력까지 갖춘 사람으로서 농사일에 정통하고 대지주와 일정한 사회관계를 가진 인물들이 발탁되었다.
그런데 북서곶의 대지주는 토박이 북서곶 사람들이 아니었다. 부평의 변방이었던 그 지역은 산이 많고 지형이 남북으로 좁고 길어 농토가 넓지 않았다. 굴포천과 그 지류인 직포, 귤현, 계산, 청천, 목수, 오쇠, 여월천과 금륜천으로 생성된 넓고 비옥한 평야에서 거둔 막대한 소출을 확대재생산하여 이른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었던 부평읍내의 대지주들에 비하여 부를 축적해나가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농경사회의 부익부 빈익빈의 기제가 이 지역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작인이 땅 주인과 수확물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는 방식을 병작반수제라고 한다. 병작반수제는 수확량에 따라 지주가 받는 지대에 영향을 미치므로 지주는 소작농에게 간섭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지주를 대신하여 농사를 관리하는 마름의 위세가 간단치 않았다. 마름은 대체로 토박이 자작농이나 자소작농 중에서 위촉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대지주가 찍어서 내려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곡물인 쌀과 보리의 경우 대지주에게 올려 보내기 전에 껍질을 벗겨내는 도정까지 필요했으므로 마름들이 직접 정미소를 세워 운영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설 금융업 진출의 교두보까지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북서곶 지역에서 정미소까지 경영했던 마름들이 소작인이나 빈곤층에게 고리대금업으로 횡포를 부리거나, 이른바‘갑질’을 했다는 흔적은 거의 없다.
▲태안군 마금리 앞바다 자염 생산 재현 - 태안문화원 제공
두 번째 키워드는 ‘제염’사업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이 대만에서 들여온 천일염 생산방식이 인천의 주안염전을 중심으로 보편화하기 전, 북서곶의 일부 기업가 마인드를 가진 분들은 자염생산으로 돈을 벌어 부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바닷물을 큰 가마솥에 끓여 생산한 소금을 화염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써레질한 갯벌 흙을 잘 말려 염도가 높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흙을 통과한 농축된 바닷물을 졸여서, 효율적으로 소금을 만드는 방식을 전오염 또는 자염이라고 한다.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는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토지, 자본, 노동을 생산의 3요소라고 했지만, 북서곶의 자연 환경과 인문지리적 환경은 자염의 생산은 물론, 판매에도 아주 적합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드넓은 갯벌이 있고, 인근에 한남정맥이 지나가 산이 발달하여 땔나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숲이 많은 지역적 특성과 서울이라는 큰 배후시장까지 근처에 있다는 인문지리적 특성에 착안하여 큰돈을 벌었다.
▲인천 서구 백석염전 - 천일염 생산(1970년대)
육상운송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북서곶 해안에서 자본과 노동을 투여하여 생산된 자염을 배에 싣고 강화해협인 염하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 서울 마포나루에까지 가져다 직접 소비자들에게 판매까지 했으니, 가격 경쟁력 또한 떼어 놓은 당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천일염의 경우도 그렇지만, 자염을 생산하기 가장 좋은 계절은 한여름 장마철도 아니고 고추잠자리 마당에 어지럽게 맴도는 고즈넉한 가을도 아니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햇살이 퍼지면서 산들바람 부는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의 기간이었다. 농번기와 딱 겹친다. 특히 화목으로 쓸 나무를 산에서 베어 갯벌까지 소달구지로 운반해야 했으므로, 농사일과는 별도로 운용할 수 있는 인력의 확보가 가능한 재력가, 부자들만 이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높은 진입장벽이 있었다.
북서곶 지역에서 송범식 집안은 자작농 경영과 함께 겸업수입원인 마름 업무에 종사하면서, 최길성 집안은 자작영농 및 정미소 운영, 마름 업무를 통하여 돈을 벌었다.
김기현 집안은 자염생산 및 판매업과 자작영농으로, 허석 집안은 자염 생산 및 판매업과 자작영농, 정미소 운영, 마름 활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사대부(노론) 집안으로 대를 이어서 벼슬길에 나가 알짜 재산을 많이 보유했던 시천동 진주 류씨 집안의 흥망성쇠는 또 다른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