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는 통일교의 오션 파크 리조트 건설’과 ‘화양지구 300만평 개발’ 사업으로 이슈화되고 있어 여수하면 통일교가 생각날 정도다.
그러나 여수는 ‘선교와 순교의 성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큰 지역이다. 손양원 목사의 순교기념관이 자리하고 있고, 버림받은 수많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던 애양원 병원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통일교 메카로 자리잡고자 하는 이 시점에서 여수지역이 어떤 선교와 순교 역사가 흐르는 곳인지 살펴보자.
애양원의 아름다운 역사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04년 2월, 목포 선교부에서 광주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하고 벨 목사와 오웬 목사를 파송하여 광주 선교부를 만들게 하였고, 1904년 12월 25일 오전 11시 드디어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림으로써 광주 선교가 시작되었다.
12월 25일 첫 예배를 드린 후 목사이자 의사였던 오웬(Clenemt C.Owen)은 전라남도 동부지역의 능주, 남평, 화순, 장흥, 보성, 강진, 순천, 여수 등지를 맡아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몸을 돌보지 않고 선교활동에 전념하던 오웬은 1909년 4월 3일 급성 폐렴으로 순교하고 만다. 당시 오웬 의사의 폐렴을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활동중이던 의사 포사이트(Wiley H.Forsythe)는 급히 광주로 떠났다. 그가 길을 재촉하며 광주로 오던 중 광주에서 13마일 정도 떨어진 남평부근에서 길가에 버려진 여자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위험은 생각지 않고 올지 주님께서 하신대로 행하려는 마음에서 그녀를 안아 말에 태우고 광주까지 걸어서 왔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10장 25-37절까지의 말씀에서 비유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그대로 실천한 아름다운 사건이었다.
이 한센병 여인은 1908년 3월에 부임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윌신(Rovert M.Wilson)과 선교사들에 의해 치료받게 된다. 윌슨과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사택 건축을 위하여 벽돌을 굽던 가마터를 단장하고 그곳에 여자 한센병 환자를 거처하게 하면서 치료를 돕고 복음을 전했다. 이 치료의 역사는 우리 나라에서 서양의학으로 한센병을 치료한 효시가 된 것이다.
선교사들의 정성을 다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 한센병 환자는 수주일 후에 주님을 영접한 자의 평안한 얼굴로 생을 마감한다. 그때 이 여인을 정성껏 치료해 주던 광경을 지켜 보던 윌슨은 1909년 여름 인근 봉선리에 작은 집을 짓고 한센병 환자 20여 명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나병원인 광주나병원의 시작이었고, 1925년 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터를 마련하고, 1928년 한센병자 600여 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 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여수 애양원의 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애양원 환자와 선교사, 의사의 신앙적 터전이었던 애양원교회(現 성산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여수노회 소속 교회로서 애양원의 부속 전도실로 출발하였다. 애양원 교회의 제2대 담임목사인 손양원 목사는 1939년 7월 14일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했으며, 1945년 9월 10일부터 10월 15일까지 여수애양원 병원 원장을 겸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