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향한 욥의 탄식(13:20-28)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인간이 영광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은혜를 얻은 성도는 영적 지위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들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20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21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22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23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24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25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라게 하시며 마른 검불을 뒤쫓으시나이까 26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27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 28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20-28)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아서라고 진단했습니다. 문제의 원인이 그러하니 문제의 해결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5:8, 엘리바스);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8:5, 빌닷),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11:13, 소발). 친구들의 진단과 처방이 무색하게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고 탄원했습니다. 세 친구들과의 첫 번째 논쟁을 마치면서도 욥은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합니다.
욥의 눈은 이제 친구들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향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두 가지를 부탁합니다: (1) 저에게 손을 대지 말아주시고 저를 무섭게 하지 말아주십시오(21); (2) 대체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제게 말씀해주십시오(23). 21a절을 직역하면 '당신의 손이 나로부터 멀어지게 하소서'인데,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치다’가 역병 등의 재앙을 나타내는 숙어적 표현이므로 ‘하나님의 손이 멀어지다’라는 표현은 욥이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을 멈춰달라는 부탁입니다. 이러한 부탁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 숨지 않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20b)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기 위함입니다(22). 22절의 ‘당신은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는 ‘내가 당신께 드리는 말씀을 듣고 내게 대답하소서’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욥은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만약 자신이 잘못을 했다면 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23),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원수”로 여기시는지(24) 알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원수”는 히브리어로 ‘오예브’인데 ‘대적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오예브’는 욥기에서 총 세 번 나오는데, 이 구절(13:24)과 이 구절을 인용한 엘리후의 말(33:10), 그리고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이 곧 악인이고 불의한 자라는 욥의 말(27:7)에서 쓰입니다. 이 세 번의 용례 모두 욥이 누군가를 (능동적으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욥 자신이 친구들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수동적으로 대적을 당하고 있는 경우를 지칭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26). 욥은 그 크신 하나님에 비해 보잘것없이 작고 하찮은 인간을 대비시킵니다. 친구들도 이런 대비를 하는데, 친구들은 이 대비를 욥에게만 적용하고 정작 친구들 자신은 하나님의 운행 원리를 다 알고 있는 존재인 것처럼 여기지만, 욥은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합니다. 욥 자신은 ‘떨어지는 낙엽 하나’ 혹은 ‘바짝 마른지푸라기’(25)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한다’고 하소연합니다. 욥은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처럼 하찮은 존재에게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발바닥에 ‘노예’라는 표식을 새겨 넣어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막으시는지를 묻습니다(27). ‘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처분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나는 썩은 물건이 낡아지듯 낡아졌으며, 좀 먹은 의복처럼 너덜너덜해졌다’면서 욥은 그 이유를 간절히 알고 싶어 합니다(28).
하나님을 향한 탄원(14:1-2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다 아십니다. 우리 마음의 쓴 뿌리, 상처, 가시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 앞에 주저하지 말고 마음에 있는 바를 정직하게 아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십니다.
1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2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3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4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5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6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가 품꾼 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 7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8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9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10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11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12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13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14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15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 16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감찰하지 아니하시나이까 17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18무너지는 산은 반드시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19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 20주께서 사람을 영원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보내시오니 21그의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도 그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22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1-22)
욥기 14장은 전체가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 혹은 탄원이므로 14장을 두 단락이나 혹은 세 단락으로 나누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13장에서 욥은 하나님과 법적 분쟁을 하고 싶고(3절 “변론하려 하노라”), 자신이 그분의 뜻에 맞게 올바르게 살아온 것을 입증하는 변론을 다 준비했다고 말하지만(18), 그러나 13:20부터 14장까지 이어지는 욥의 말에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법정적 증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3장의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라는 주제로 회귀합니다. 물론 단순히 논리가 아니라 감정에 호소하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의 탄식은 그의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반성적 지혜의) 이해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욥의 탄식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자유)을 배경으로 합니다: (1) 하나님의 크심과 인간의 작음을 극명하게 대비; (2)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행하시는 것처럼, (까닭 없는) 고통을 주시는 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13장에서 욥이 자신을 낙엽과 지푸라기, 벌레 먹은 옷에 비유한 것처럼, 14장의 탄식 역시 자신을 포함한 인간 전체의 보잘것없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의 위엄과 유한한 인간의 잠정성과 유약함을 대조합니다. 인간은 한번 피었다가 금세 시드는 꽃 한 송이나,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그림자 같이(2) 짧은 인생을 살 뿐입니다(1).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할 것은 꽃이 피고 지는 것이나 그림자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에 어떤 선악 개념을 기반으로 한 인과응보의 원리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꽃이 선한 일을 해서 피고 악한 일을 해서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자가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 역시 선악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런 인간을 굳이 눈여겨 보시고 재판까지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3).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신적 정결에 미치지 못하는 더러운 피조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4). 꽃과 그림자처럼 인간이 탄생했다 죽게 되는 날을 정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5).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5b절)이라는 표현에서 “규례”는 ‘호끄’를 번역한 것인데, 어원적으로 ‘한계’(limit)를 뜻합니다. 넘어서는 안 되는 선입니다. 문맥상 하나님께서 정하신 각 인간의 수명을 의미합니다. 13절에서도 동일한 단어가 나옵니다: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13).
7-12절에서 욥이 사람과 자연을 대비하는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나무의 질긴 생장력과 부활 갱생을 예찬하고(7-9), 나무에 비해 이승의 삶으로 끝나는 인생은 비참하고 허무하다고 말합니다(10-12). 나무는 비록 찍혀서 죽더라도 “물 기운(원문은 ‘물 냄새’)에” 다시 싹이 트고 가지가 자라 새 생명을 얻습니다(7-9). 아무리 힘이 센 사람(“장정”)도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며(10)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날 수 없습니다(12).
13-15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자신을 스올에 잠시 감춰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 세 절은 가정법입니다: “아, 나를 감춰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6절에서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라는 문장은 ‘그를 죽게 해주소서’라는 의미였는데, 욥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문맥을 제하고 보면 규범적 지혜에서 흔히 사용하는 어휘들입니다: “감추시며”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13),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14),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15). 이런 표현들은 일반적인 경우라면 죄를 용서해달라거나 자신을 선대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무엇이 바른 길인지 알려달라는 의미로 쓰일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 표현들 모두 이제 그만 죽여 달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스올에 감춘다’(13)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고난을 피해서 잠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은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이 욥의 이해입니다(10,12).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 고통을 끝내는 길은 죽음뿐이라는 절망감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15)라는 표현도 표면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직접 대면을 요청하는 말이지만, 그 실제 내용은 죽어서 하나님께로 가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고통 당하는 자들의 마음에 공감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름을 통해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깨닫게도 하시고, 사람들의 연약함을 보듬고 그들의 아픔을 나의 것처럼 느끼지도 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한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위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