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4] 이소담(李小淡) - 내 인생 외길에 걸고 2. 해방과 피난생활 1 1949년 때는 국가적으로 보나 개인적으로 보나, 또 육적 정신적 모든 면에서 혼란과 방황의 때라고 할 수 있다. 2 나는 당시 내가 창설한 한복 연구원에서, 재단형 B와 동정 특허를 받고 바로 재단형 A를 제작하였으며, 한편 고려 문화사에서 재봉 책을 출판하여 각 여학생에게 배부하고 개량복 30여 종을 만들어 미국 공보원에서 발표회를 열었다. 3 서울시에서는 신생활복 디자인을 내 것으로 채택하여 디자인 그대로 여자는 여름 옷으로 반소매 적삼에 짧은 통치마, 남자는 노타이에 반바지, 대•중•소로 만들어 각 동에 분배하였다. 4 이렇게 되고 보니 발명협회에서는 이사로, 보건사회부에서는 생활개선의복분과위원으로 위촉했고, 문교부에서는 최현배 편수국장이 교과서 편찬위원으로 위촉하여 왔다. 5 이때 박순천 여사가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을 알고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누구의 부탁도 없었지만 나 혼자 협조하느라 피곤이 겹쳐서 그것이 원인이 돼 급성 간장염을 않아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병상 생활 가운데 6.25사변이 일어나 친정으로 피신하였는데 인민군에게 끌려갈 운명이었지만 다행히 면했다. 6 그 후 부산에 피난하여 남편 친구의 덕으로 방과 부엌을 마련하였고 남편은 다행히 직장이 마련되었고 나는 향복산 전시 고아원 수예부 주임으로 취직하였다. 7 그 후 서울대학 강사로 취직이 되었다. 대학 가정과에서 복식(데코레이손)과 이미 서울에서 개량복 30여 종 만든 것으로 패션쇼도 하고 창작과 발명에 대한 강의를 하니 가정과 학생들이 좋아하였다. 8 그러나 나의 마음은 초조한 가운데 공허감을 메꿀 수 없었다. 왜 이럴까! 준비한 재단형 C도 특허를 받아야 되고 신발명도 계속해야 될 텐데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9 나의 생각은 바뀌어 가고 있었다. 전시에 의복 보따리를 들고 다닐 것인가? 급선무가 정신교육이다. 의복 대신 정신병을 치료할 약과 주사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비정상적인 모습이다.
10 이 싸늘한 현실에 따스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없는가? 심령의 공허를 메꾸기 위해 거리를 헤매다 미국에서 왔다는 유명한 박사도 만나 대화해 보았으나 신통한 답을 얻지 못했다.
11 한번은 서울 승동교회 주일학교 반사를 하던 이태영씨를 만났다. 반가운 김에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옛날과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 당돌하고 자신 있게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나보고 의복 관계를 잠시 미루어 놓고 여자 베드로가 되어 자기와 같이 일해줄 것을 은근히 비추었다. 그러나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12 그 후 좀처럼 시간을 낼 수 없어 만나지 못하다가 환도 후 노인대학 강의를 하고 나오다 그 부인을 만났다. 그는 ‘우리 선생님께서 타계하셨는데 늘 이 선생님에 대해 말씀하셨다’라고 하면서 제자들이 아직 모여 있다고 했다. 13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문선명 선생님은 부산 범일동 산등성이에 움막을 짓고 계실 때다. 나는 기도를 해보지 않고 무조건 훌륭하고 유명한 곳만 찾아 3년을 헤매었다. 성서에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준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