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2. 유리왕 국내 위나암성 시대bc19~ad18
유리왕은 부여의 예씨부인 아들이다. 유리왕은 <광개토왕비문>에서 유류왕(儒留王)이라고 하였는데, 유儒는 [설문說文]에서 술사術士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유류왕孺留王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유자孺子는 적장자適長子를 의미하지만 <광개토왕비문>에서는 유儒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도흥치以道興治라고 하였으니, 유리왕은 도술道術을 알았던 것이다.
북부여의 마지막 단제인 고무서는 주술로서 바람과 비를 부르는 호풍환우呼風喚雨를 하였다. 따라서 유리왕은 고무서의 아들일 수도 있다. <동천왕 묘지 벽비문>에 의하면 이 도술은 고구려 동천왕에게 이어진다. 동천왕의 모후가 주통촌(酒桶村)의 여인인데 주술呪術과 통通하는 무당 마을(呪通村)의 여인이고, 군사들도 못잡는 사나운 돼지를 여자 몸으로 앞서서 잡고, 군사들이 죽이러 쫓아와도 잡히지 않고 도망치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
<삼국사기>는 곳곳에서 부여와 동부여를 구분하였는데, 유리왕의 출신지 부여는 동부여가 아니라 졸본부여일 가능성이 높다. 그중에서도 졸본부여 고무서 단군이 영고탑에 옮겨간 뒤에, 영고탑 부여로부터 독자적인 출발을 한 것이 유리왕으로 생각된다. 그후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서 bc19년경에 고주몽의 홀본성을 탈취한 것이다.
이는 <후한서/동이전>에서 고구려와 구려가 각각 다른 나라처럼 기록된 이유가 된다. 또한 <후한서>에서는 고구려보다 구려로 역사 서술의 중심이 이동을 한다.
유리왕에 대한 <북위서北魏書>의 기록이 의미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처가 잉태하여 주몽이 도주한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자는 시려해始閭諧이다. 커서 주몽이 왕이 된 것을 알고 어미와 함께 도망왔다. 그후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고치고 국사를 맡았고 그해 주몽 사후에 여달이 대를 이었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유류왕을 고명세자라고 하였다. 顧命世子 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乘基業 그러나 고대 역사에서는 아들 승계가 아닌 것을 아들 승계로 위장하는 일이 많이 있다. 왕권은 하늘이 내린 순수 혈통(=天孫)이라는 것을 내세워 민간의 왕권 도전을 막으려고 혈통을 위조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만세일계를 내세운 <일본서기>이다.
그러나 유리왕을 고구려 주몽왕의 찬탈자로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후손이 고구려 태조대왕이기 때문이고, 또한 고주몽을 말년의 실패자로 기억되지 않게 하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유리왕의 자字 시려해始閭諧, 이름 여달閭達에서 그의 땅을 알 수 있다. 이는 여달閭達땅을 개척해서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다. 고대 지명으로는 여주閭州이다. <요사지리지>에서 여주閭州는 의무려산 부근에 있고 요주遼州 서쪽 130리다. 또한 서북으로 상경까지 950리다. 한편 순주順州는 서북으로 상경까지 90리로서 여주보다 50리 서쪽이다.
현주顯州는 요녕성 북진시北鎭市이고 요주遼州는 공주둔公州屯 요빈탑이므로 이를 근거로 두 성을 추적할 수 있다.
순주順州는 대략 부신시 창토진(蒼土鎭)이 된다. 고구려 창암성蒼岩城의 위치로 고려돤다.
한편 대파진(大巴鎭) 서쪽 반재탑촌에서 요나라 환주?州 비석이 발굴되었다.
려(閭)는 큰 고을의 입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중국으로부터 의무려산을 넘어오는 사잇 문이 된다.
요나라 환주 동쪽이며 려주의 서쪽 사이에 고대 성터가 보이는데 이곳이 여달(閭達)로 추정된다. 이는 고주몽왕이 유리왕 생전에 살아있었다는 것이고, 유리왕과 여율왕은 고주몽의 후손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대신에 고주몽 사당을 즉위 첫해에 세운 대무신왕이 고주몽의 진짜 아들인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고주몽- 유리왕- 대무신왕으로 승계되는데 , <북위서>에서는 이와 다르다. 1)고주몽 2)여달왕(유리왕) 3)여율왕如栗 4)막래왕(대무신왕)으로 왕위 승계가 된다.
한편 <삼국사기>유리왕기와 대무신왕기에는 다음 기록이 의미가 있다.
<후한서>에서 개마에 대하여 현도군의 땅이고 평양성 서쪽이라고 주해하였다. 蓋馬,縣名,屬玄?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王險城也
대무신왕이 죽인 개마국왕은 바로 두곡의 별궁에 있던 유리왕이다.
유리왕 시대 삼국사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bc9년 유리왕은 선비를 정벌하였다.
위나암성과 국내성 여달성 위치도
위나암성/ 중앙부 고지대가 내성이다.
위나암성은 나한토라는 마을 남쪽에 있다. ad4년 해명을 태자로 삼았다.
ad10년 두곡豆谷에 별궁을 지었다.
ad12년 한漢나라의 왕망王莽이 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구려인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었더니 모두 새외塞外로 도망쳤다. 그래서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였다. 왕망이 엄우에게 명하여 공격하였다. 엄우가 구려의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수도로 보냈다.
ad13년 겨울 11월에 부여인이 쳐들어오자, 왕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ad14년 봄 정월에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가을 8월에 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
ad18년 여름 4월에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은 애통해 하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찾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에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찾아서 알리니, 마침내 예로써 왕골령(王骨嶺)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頃)을 주었다. 비류수의 장수인 제수가 저항하는 유리왕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 가을 7월에 왕은 두곡으로 행차하였다. 겨울 10월에 두곡의 별궁에서 죽었다. [왕을] 두곡의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유리명왕이라고 하였다.
ad13년에 고주몽의 아들 대무신왕이 졸본에서 황룡국왕으로 즉위하여서 북쪽의 부여를 물리치고 또한 대무신왕이 한나라 고구려현을 되찾은 것은 유리왕의 국내위나암성을 빼앗은 것과 같다.
<참고> <수성왕의 천도교서 팔릉갈석>에는 유리왕이 비류에 정도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유리왕이 비류수 홀본성에 살았던 기록이 된다.
[수성왕 천도 교서 팔릉갈석 / 遂成王 遷都敎書 八稜碣石]
시조지손 일월지자 부여고읍의 계승자, 수성왕 10년, 동서남북수는, 현도를 다스리는 가영동백수로서 비류에 도읍했던 유리명제 축다(수성왕의 조부)를 계승하고, 안구태장세의 예악으로서 백제, 고구려왕은 민태국안하려던 천부의 시조 추모왕의 뜻을 대신한다. 백수(수성왕)는 수년 공을 들여 현도군에 국도를 세운다.
始祖之孫日月之子 承故夫余故邑 遂成王十年 東西南北殊 繼 明帝 逐多 假寧東百殊司吏玄? 定邑都沸流 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殊 代天府 繼祖 鄒牟王意 民泰國安 百殊心意□□年功 建國都 玄?郡 ??... <삼국사기>에서 유리왕을 유리명왕이라고 하였으니 명제는 유리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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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익인간/인류공영 원문보기 글쓴이: 솔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