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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맑은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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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여행기 스크랩 아! 장가계.
김석환 추천 0 조회 93 08.01.06 12: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장가 계를 드디어 가게 되었다. 중국에 오기 전부터 장가계는 꼭 가고 싶던 곳이다. 중국의 산수화에 나오는 풍경들이 그냥 생각만으로 그린 것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에 기인해서 그렸다는 것을 장가계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산세가 기묘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란 생각을 했었다. 거기다 내가 관심 가져 왔던 동양화의 심원법의 표현방식이 실제 자연에도 얼마만큼 깊이 있고 웅장하게 나타나는 지를 보고 싶었다.


저번에 어 선생하고 같이 가려고 했었지만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못 갔던 곳이라서 이번에는 신경을 바짝 써서 아예 잠을 어 선생 집에서 자기로 했다. 토요일에 산행을 하기 위해 나올 때 나는 일주일 여행 짐까지 다 싸가지고 나섰다.


별러 오던 여행이라서인지 새벽 세시 반에 눈을 떠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일주일 짐을 챙기려니 만만하지가 않았다. 아무리 신경을 써서 싼다지만 분명 여러 가지를 빼 놓고 갈 것이다. 아무려나 짐을 토요일 산핼 할 짐까지 챙기려니 배낭이 꽉 찼다.


짐을 챙겨 5시 반에 버스 정류장으로 가다가 길거리의 부침개(젠삥.전병)를 파는 리어카 판매대에 들려 하나를 사서 버스를 타고 가며 꺼내 먹으니 중국 와서 내가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이 없다. 어쩐지 그 남자의 솜씨가 영 미덥지 않게 서투르고 주변도 유별나게 지저분하더니 역시 그래서인지 맛이 별로였다. 하긴 이제 끼니를 맛으로 먹을 나이는 지났다. 더더군다나 여기 중국에서는 말할 나위가 없다.


두 시간 가까이 가는 거리인지라 이것저것을 생각하다 마침 이제 어 선생을 중국에서 만날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이 드니 이상하게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별로 살가운 사이도 아니고 그렇게 성격이 딱 떨어지게 맞는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특별한 공간에서 특별한 인연으로 만나 굳은 시간 고운 시간을 서로 갖다 보니 나도 몰래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왕징에 도착해서 일행을 만나 토요 산행을 한 후에 저녁에 어 선생을 만나 콩국수로 저녁을 먹고 어 선생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마루 바닥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어영부영하다 우리는 시내버스를 탔다. 왕의 아들들이 살던 ‘왕푸징’을 지나 천안문을 지나 우리의 종로와 비슷한 ‘시단’을 지나 북경 서역에 도착해서 점심으로 역시 구내에서 ‘젠삥’을 한 개에 10위엔씩 주고 두개를 사 들고 12시 20분 발 장가계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늘 그러 하듯이 이번에도 어 선생이 주선을 해서 가게 된 여행으로 이번에는 중국인 여행 단에 끼어서 같이 가게 되어 있었고 우리 둘은 장가계까지 가서 거기서 여행단과 합류하게 되어 있었다. 마침 앞자리의 중국인 모녀도 같이 장가계로 가는 중이었고 우리가 가기로 한 여행사와 같은 것이어서 일정은 서로 달랐지만 아마도 이번 여행을 내내 같이 할 것 같았다.


북경서 장가계 까지는 기차로 무려 22시간 거리다. 우리는 일층과 이층의 침대칸을 이용 할 수가 있어서 그런대로 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루하기만 한 시간이다. 짐을 챙길 때 책을 안 넣어가지고 온 것이 여간 후회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 내내 술잔치로 피곤하다는 어 선생은 낮부터 이층으로 올라가고 나는 그분이 가지고 온 복사종이를 가지고 혼자 한 두어 시간을 중얼거리며 중국어 공부를 했다. 다시 잠을 깬 어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을 우리나라 농심과 합작한 회사의 중국 컵라면으로 때우고 나서 9시 반에 잠자리에 들었다.


아무리 시간이 길어도 그저 잠자리에 들 때까지다. 그러고 나면 내쳐 잠을 자는 것이고 아침에 일어나 두어 시간 버티면 목적지인 것이다. 나는 역시 귀마개를 짱짱하게 준비해 갔기 때문에 아무런 불편함 없이 깊은 잠을 잔 후에 여섯 시 쯤 일어나서 컵라면과 우유로 아침을 때웠다. 그러나 소화기관이 시원찮은 나는 우유 먹은 것이 좀 문제가 있는 듯 했다.


그렇게 아침을 보내고 나서 10시가 넘어 드디어 장가계 역에 기차가 섰다. 밖으로 나가니  중국인 젊은 여자 가이드가 여행사에서 알려 준대로 노란 깃발을 조그만 손에 움켜쥐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에서 만난 두 모녀도 역시 같은 일행이 되었다. 일행은 열 명이 조금 넘었는데 인원이 워낙 적어서 그 모녀도 같은 일정이 된 모양이다.


우리는 미니버스에 몸을 싣고 장가계 시내를 지나 어딘가로 두어 시간 정도를 갔다. 어느 상점들이 즐비한 곳에서 중국 와서 제일 맛없는 식당의 점심을 먹고 쉬는 짬에 그 곳을 둘러 본 후에 다시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어느 이름 모를 도시의 호텔. 하지만 다른 중국인들은 모두 방이 있었지만 우리의 방은 이상하게 없었다.


가이드 말이 우리는 삼성급 호텔이 아니고 이성급 호텔이란다. 그러자 어 선생이 계약서와 일정표를 내 보이며 언성을 높인다. 그래도 여기는 방이 없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기에 쫓아 나서니 어느 허름한 ‘삥관’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데 형편이 말이 아니다. 어 선생 말이 여기는 후미져서 내일 아침에 밥 먹으로 가려고 택시 잡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돌아 나올 때 한참을 기다려도 택시가 없어 결국 지나는 미니 봉고를 얻어 타야만 했다.


그처럼 어 선생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힌 중국인 가이드는 난감한 표정이 되어 다시 먼저 호텔 근처로 돌아와 바로 옆의 다른 삼성급 호텔에 우리를 묵게 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곳은 침대가 셋이었다. 아마 우리가 늦게(떠나기 이틀 전에 계약) 하는 바람에 갑자기 기존의 여행 단에 끼어들다 보니 일하는 측에서 뭔가 여러 가지로 오차가 생긴 모양이다. 하지만 어 선생의 언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나는 그저 매사에 옆에서 구경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호텔을 잡고 나서 저녁을 먹고 우리는 야간 시내 구경을 나섰다. 역시 봉고 차를 타고 간 곳은 예전의 성곽으로 ‘봉황고성’이란 곳이었다. 어 선생 말에 의하면 이곳도 원래는 한국인 여행단의 경우에는 입장료를 내고 가는 곳으로 몇 백 원의 옵션 상품이지만 이처럼 밤에 옴으로 해서 별도의 비용 없이 둘러보는 것이란다. 말하자면 중국인  낀 덕이라는 것이다. 대체로 어 선생은 모르는 것이 없다.


우리는 그 성안을 둘러보았다. 가게들로 빽빽한 그 곳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그저 산책하는 의미 이상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저 낙조에 물들어 가는 고풍스런 맛을 풍기는 곳을 둘러보는 맛 이상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런대로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는데 ‘천란’이 나하고 어 선생한테 선물이라고 나무에 ‘일생평안’이란 글이 새겨진 나무 알 걸개를 하나씩 준다.


천란은 그녀의 남동생과 ‘양저군’이란 여자 친구와 함께 장가계 여행을 와서 우리와 같은 일행이 된 20살 먹은 중국인여자다. 양저군은 친구이면서도 대학에 다닌다고 했는데 그녀는 대학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언어가 짧으니 자세히 물어 볼 수는 없었지만 1930위엔을 낸 우리와 달리 1590위엔을 낸 그들일지라도 이런 여행이 일반 중국인들로서는 만만한 여행이 아니다.  다시 말해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면 웬만한 사람 한달 월급에 가까운 돈을 일주일 노는데 쓰기가 쉽지 않고 또한 동생과 함께는 더욱 그렇다. 일하는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궁금증을 언어가 더 부채질을 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착했다. 가족이라도 그리하기가 힘들 것이다. 우리가 뒤에 처지기라도 하면 그들은 꼭 우리를 기다려 줬다. 움직임이 굼떠 일행을 놓칠 것 같기라도 할라치면 영락없이 빨리 가자는 사인을 했다. 언어도 서로 짧고 알음도 너무나 짧은 우리에게 그처럼 자상하게 배려한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갔다. 도대체 중국인은 어떤 사람들일까? ‘중국인’이라고 통 털어서 판단하기보다는 역시 개개인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고성의 야경을 구경하다 우리는 코끼리 열차 같은 관광객 전용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곧장 방으로 가지 않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 맥주 한잔과 길거리에서 파는 손 한 움큼 분량의 쌀 국수를 먹고 호텔로 돌아와 씻으며 잠자리를 준비하는데 노크소리가 나면서 안마를 받으란다.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화장실에 있던 어 선생의 단호한 ‘노우!“소리에 난 그만 ’밍티엔!”(내일)하고 그 녀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일주일 여행 중에 여자의 주무름을 당할 수 있었던 처음 기회이면서 절호의 찬스였지만 우리는 놓쳤다.

 이게 '?삥'이란 것으로 우리 나라 말로 전병인가보다. 이렇게 밀가루 죽을 작은 나무 고무래 같은 것으로 넓적하게 한 다음 계란을 깨트려 깔고 다시 향차이와 파 등을 뿌린 후 밀가루 빵 넓적한 것을 올려서 돌돌 말아 먹으면 그 맛이 아주 괜찮고 양도 많아서 나 같은 놈은 남길 정도다. 보통은 2위엔 안 팍이지만 역구내에서는 국물과 중국제 김치와 함께 10위엔. 역 구내의 가게에서.

 '잉워' 기차 침대 칸. 가운데는 복도 겸 삼층이나 이층 사람들이 내려와 앉아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창 밖의 경치를 보며 접이식 조그만 의자에 앉아 이야기도 나눌 수가 있다. 침대는 내 키로는 배낭을 한개 머리 맡에 놓아도 될 정도로 길어서 대충 180센티 정도. 이불도 두툼하고 베개도 푹신해서 귀마개를 해 기차 굴러 가는 소리만 죽이면 호텔과 별반 차이가 없다. 글쎄 잠 버릇이 고약한 사람은 이층, 삼층에서 굴러 떨어 질지도 모르겠다.

 차를 타고 가다 만난 화장실. 사용료가 일 위엔이다. 가급적 참는게 좋다.

 화장실 앞의 낚은 민가.

 화장실이 있는 짐 내부.

 

 어느 고풍스런 상점 지역에 들려 먹은 점심 식사. 

 고풍스런 상가 지역.

 골동품 가게.

 

 바베큐해서 말린 고기인 모양이다. 아니면 소금에 절여 말린 것이거나. 고추 말린 것이 이색적이다.

 

 

 문 위에 놓는 우리나라 북어포 같은 건가보다.

 

 

 봉황고성 내의 상점가.

 티셔츠에 그린 그림들. 예술가는 지천에 널려 있다.

 

 

 

 이게 엿이다. 쇠고리에 엿을 걸어 놓고 잡아 당겨가며 부분적으로 가늘게 만들어 그것을 토막내서 작은 엿가락으로 만들어 봉지에 넣어 판다. 보통 생강 맛이 많이 난다.

 고풍스런 문짝.

 

 이 것도 강정 비슷한 엿 종류.

 장식품 만들고 다듬는 도구들.

 

 고성의 담.

 

 

 

 

 

 

 

 돌 징검다리 비슷한.

 

 

 

 

 

 

 

 이게 우리나라 절구 비슷하면서도 뭔가 용도가 다른 것인 듯

 저녁에 호텔에 돌아와 바로 앞의 길가 야시장에서 쌀국수 한 개를 시켜 놓고 천란이 준 선물로 일 위엔 짜리 돈을 눌러 놓은 장면. 옆의 잔은 맥주 잔. 칼로 파 새긴 '일생평안'이란 글씨가 보인다. 난 그녀의 바램대로 꼭 그리 되고 말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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