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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법,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마 7장 12절)
흔한 말로, 착하게 살고 있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평생 남에게 해를 끼친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법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는 말이지요. 법을 어겨서 경찰에게 잡히거나 제재를 받은 적도 없고, 벌금을 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법을 어김으로써 남에게 해가 되거나 피해를 준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착한 사람입니다. 이쯤 되면 이 사람은 꽤나 괜찮은 사람, 어쩌면 정말로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의미에서는 선한 사람들입니다. 나쁜 사람들이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평생 법을 어기거나 남에게 해를 끼친 일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 번 사기를 당하기도 하시고 동업자에게 속아 사업을 망치기는 하셨지요. 함께 건축 자재상을 하던 동업자가 어느 날 아버지 몰래 건축 자재를 다 싣고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습니다. 유명한 TV드라마 세트장 공사를 하셨는데 공사 대금을 거의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날리셨습니다. 남들은 밑돈이다 향응이다 대접하면서 승승장구 할 때도, 손가락 하나를 절단당하는 사고를 당하면서도 그저 묵묵히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해를 끼치거나 불법 편법을 써가며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렇게만 해도 보통은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황금률이라 일컫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황금률은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뿐만 아니라 고대 헬라와 로마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차이는 매우 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은 다른 곳에서 같은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하고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황금률들은 소극적 형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네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마라.” 유대교 스승 중에 힐렐이라는 유명한 율법선생이 있습니다. 어떤 이방인이 그에게 찾아와 “선생님, 율법전부를 한 마디로 가르쳐 주신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 때 힐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자신에게 싫은 것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그것이 율법의 전부요 나머지는 해설에 불과하다.” 헬라와 로마 철학자들의 황금률도 비슷합니다. “너를 화나게 하는 일은 남에게 하지 말라. 네가 당하기 싫은 고통을 남에게 주지 마라.” 공자의 가르침도 이와 거의 같습니다. 그의 제자 자공이 “생활의 실천율이 될 만한 가르침을 한 마디로 알려주십시오.”라고 하자, 공자는 “인(仁)이 그런 단어가 아니냐? 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지 마라.”고 했답니다. 모두 어떻게 표현되어 있습니까? “하지 마라”입니다. 하지 않음으로써 선해지고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을 가르칩니다. 즉 남에게 해코지를 가하지 않거나 피해를 입히지 않은 정도로도 얼마든 좋은 사람이 되고, 착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생 법을 어긴 일이 없으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면 그것으로도 매우 훌륭한 삶을 살았다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법의 특징입니다. 법은 어떤 행동의 상한선, 즉 한계를 그어놓고 그것을 지키도록 강제합니다. 그래서 법은 ‘하지 못하도록’ 행동을 규제합니다. 법의 규제라고 하지 않습니까? 법을 지키지 않으면 금세 경찰에게 적발되거나 체포당하거나 벌금을 받거나 합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적극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라’고 하십니다. “남을 대접하라” 어떻게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라’는 면에서 예수님의 황금률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혁명적이고 전복적이며 유일하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의 중요한 점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중심이 누구에게 가있습니까? 남입니까, 나입니까? 남이 중심입니다. “남을 대접하라”입니다. 남을 대접하는데 그 부차적인 조건이 ‘내가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입니다. 남이 중심이고, 나는 부연적인 설명입니다. 남에게 대접하는데 어떻게 대접하는가, 하면 그 조건이 ‘내가 대접받고 싶어 하는 나의 욕망’입니다.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가 ‘남을 대접하라’의 조건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이 나에게 하지 말았으면 혹은 남이 나에게 할 때 싫어하는 대로 너도 남에게 그렇게 하지 마라(대접하라)’가 아닙니다. 내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라고 할 때, 그것은 남이 나를 비웃고 욕하는 것이 싫으니 너도 남을 비웃고 욕하지 말라,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남이 나의 돈을 빼앗는 것이 싫으니 너도 남의 것을 빼앗지 말라도, 남이 나를 때리지 말았으면 하니 나도 남을 때리지 말아야지, 정도도 아닙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라고 할 때에는 이 정도의 소극적인 것을 남에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보다 적극적이고 보다 융숭하며 보다 나에게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며 보다 존대를 받고 우월해 지는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남에게서 왕처럼 대접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남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이왕이면 남들보다 더 좋은 집, 더 많은 연봉, 더 귀한 몸으로 대접받고 싶어 합니다. 그저 피해를 안 보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나의 욕망은 말입니다. 우리의 욕망을 살펴보면 우리가 얼마나 나 중심으로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지, 남보다 더 잘 살고 싶어 하는지, 남보다 높아지고 남들 위에 서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황금률은 그러한 나의 욕망이 나 자신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바로 남을 위한 조건이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예수님의 황금률의 기준이요, 중심입니다.
산상설교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절정에 오릅니다. 팔복이 산상설교의 서론적 선언이라고 한다면, 팔복 이후, 5장 17절로부터 시작된 산상설교의 본론은 바로 황금률에서 그 결론을 맺는다 할 수 있습니다. 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가르치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율법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셨고, 그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은 중요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그 율법을 소중히 지키는 나 자신을 위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더욱이 산상설교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서 율법은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고, 하나님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 나라의 법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5장 17절 이후부터 7장에 이르기까지의 상세한 내용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12절의 황금률은 바로 지금까지의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내리신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방식은 바로 이 황금률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율법과 선지자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장 35-40절입니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합니다. 이는 ‘온 율법과 선지자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즉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 두 계명을 가르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과 남을 대접하는 것이 똑같이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대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이요, 하나님처럼 온전케 되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은 사랑의 법인 셈입니다. 사랑의 법, 은혜의 법입니다. 그 법은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하지 말라거나, 법을 어김으로써 남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 법은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 법은 은혜를 베풀라고 합니다. 그 법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합니다.
보통 상식적으로 사랑이 법일 수는 없습니다. 은혜가 법일 수도 없습니다. 법은 강제적입니다. 법은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강압합니다. 그래서 법을 지키지 않거나 법을 교묘히 이용해서 범죄를 저지르면 그 사람을 가두거나 벌금을 물게 하지요. 법의 용도는 대개는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법은 사람들의 행동에 한계를 정해줍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서면 강제력을 동원합니다. 법이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는 많아도 무엇을 하게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법의 기능은 감시와 처벌입니다. 남의 돈을 강제로 빼앗거나 사기를 쳐서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면, 그 사람은 강도죄나 사기죄로 처벌을 받습니다. 반대로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상을 주거나 칭찬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법으로 그렇게 정해 놓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법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 의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과는 다릅니다. 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지만,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처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지탄과 비난은 받겠지요. 교통사고를 내면 법에 의해 처벌을 받습니다. 하지만 교통사고 피해자를 돕지 않았다고 해서 처벌을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는 욕을 먹고 비난은 받겠지요. 길가는 사람에게 돈을 빼앗고 그를 때려서 피투성이로 만들어 길바닥에 버려두면 법에 의해 처벌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 피해자를 돕지 않았다고 감옥에 가두거나 벌금을 부과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비난과 욕은 먹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한계요? 법은 ‘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강력합니다. 법을 정해놓고 이렇게 하지 말라 하면 됩니다. 하지만 법으로 ‘하라’고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남의 월급을 빼앗고 가로채면 처벌 할 수는 있지만, 월급의 절반을 남에게 주라고 법으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남의 따귀를 때리면 법으로 처벌할 수 있지만,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대라고 법으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남의 겉옷을 빼앗으면 감옥에 쳐 넣을 수 있지만, 겉옷 달라는 자에게 속옷도 주라고 법으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법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을 법으로 정하셨습니다. 은혜를 법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당신의 법의 핵심이라고 강조하십니다. 모든 법이 바로 이 사랑에, 은혜에 달려있다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그들을 따르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오해한 것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들은 율법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그저 율법의 세세한 항목들을 기계처럼 지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저 율법이 금하는 것을 하지 않는데 에만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소유하여 그 율법의 감시자가 되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벌주고 저주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데에 율법을 사용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의 선생이 되어 율법으로 사람들을 지배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와 못 지키는 자로 나누어 사람들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데에 율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그 율법이 가리키는 바, 그 율법이 의미하는 바, 율법의 가장 핵심적인 것을 놓쳤습니다. 율법이 가리키는 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놓쳤습니다. 더욱이 율법을 가지고 사람에게 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영광을 받고자 하는 데에서 그들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즉 율법을 남보다 잘 지키는 것이, 남을 유익하게 하고 남을 대접하는 일이 아닌, 남보다 높아 보임으로써 남에게서 박수를 받고 영광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뒷전이요, 자신의 영광을 위한 들러리일 뿐이었습니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욕망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서 영광을 받고 남들로 하여금 ‘나’를 더 잘 대접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법에 의하면 남을 대접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요,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법으로 정하셨습니다. 은혜를 법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지하는 방식이요, 통치 방식이라고 하십니다.
법이란 통치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입니다. 따라서 법은 권력과 힘을 가진 소수의 전유물이 되기도 합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힘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법은 일반적인 국민들보다는 권력과 힘 있는 소수 집단의 기득권과 이익을 위해 잘못 사용되기도 합니다. 힘없고 가난하고 돈 없는 자들에게 유리하도록 법이 제정되고 집행되는 데에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이런 약자들이 법제정 과정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힘 있는 자들의 목소리는 반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들이 가진 돈과 권력을 사용해 법 제정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힘을 쓰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사건의 철저한 진상조사와 이후 비슷한 불행한 사고가 없도록 세월호법을 제정해 달라고 6개월이 넘도록 피켓 들고 싸워야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들의 세금, 대기업과 재벌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법을 제정하자 그러면 아마도 그리 어렵지 않게 통과될 것입니다. 부자가 탈세 등 잘못을 저지르면 법의 제제를 받습니다. 부자는 감옥에 들어가도 널찍한 독방에 넉넉한 영치금으로 안락한 감옥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돈 없고 백 없는 가난한 자가 잘못을 하면 법은 매우 가혹하고 엄중하게 제제를 가합니다. 감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남’은 대접할 대상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과 부를 축적하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남을 자신을 섬기고 대접하기 위해 일하는 노예처럼 부려먹는다면 주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나 중심, 나의 욕망 중심이 되면 ‘남’은 철저하게 소외된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법의 관점에서 떠돌이 부랑자, 노숙인, 범법자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건전하고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힘든 이들입니다. 이들은 사회 변두리 밖으로 소외된 채, 강한 법의 규제를 받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힘 있는 자들이 나를 대접하라고 합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부려먹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법 혹은 은혜의 법)의 법, 사랑이 법인 예수님의 나라에서는 이와 다릅니다. 잘못을 해도 더 해줍니다.(따귀, 희년법을 이용해 돈을 빌림), 오전에 와서 일한 자와 오후 늦게 와서 일한 자가 동일한 임금을 받습니다. 힘과 권력을 가진 소수가 아닌 ‘작은 자’를 주인으로 세웁니다. 그들을 섬긴 것이 주님께 한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닌 남이 기준이 되어 남을 대접합니다. 남에게 내가 대접 받고 싶은 만큼. 사랑의 법을 지킨 자들에게 칭찬과 상급이 있습니다. 법을 잘못 지킨 자에게는 용서와 은혜와 기회가 주어집니다.
<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정위안 푸는 “법은 형벌의 도구이고 공포는 가장 효율적인 정치 통제 수단”이라고 했습니다. 법이 강력하다는 것은 법이 주는 형벌의 두려움이 강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독재권력 일수록 강력한 법으로 사회를 지배하려합니다. 지배논리가 강해집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약자가 강자를 섬깁니다. 어떻게 해서든 남보다 높아지는 것, 남보다 위에서 군림하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사회적인 위치와 힘과 권력을 소유하는 것이 정당화됩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면, 미련하고 손해 보는 행위라고 조롱합니다. 오히려 남에게 대접받기 위해 더 자신을 강하고 힘 있고 부유한 위치에 놓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어디 가서 대접받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요, 남들에게 떵떵거리며 대접받으면 성공한 인생이라 여깁니다.
예수님의 법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이 율법이요, 남을 대접하기 위해 ‘내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내가 아닌 남이 중심입니다. 이것은 노예의 굴종이나 힘없는 자의 비굴한 복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이요, 하나님처럼 온전해 지는 길입니다. 진정으로 삶의 주체가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남이 나에게 최고로 잘 해주기를, 나를 왕처럼 대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욕망대로 남들 위에 왕이 되려고만 한다면, 남들보다 잘 되기만을 바란다면, 그렇게 모두가 나를 위해 섬기기를 바란다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금은보화 쌓아놓고 남들보다 떵떵거리는 부와 권력과 힘을 가졌다 한들, 그 사람은 노예입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노예, 자기 욕망의 노예.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남들의 대접받으며 사는 것을 권장합니다. 힘과 권력 있는 위치에 올라 사람들을 부리며 지배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우리 사는 시장자본주의 사회는 오히려 그러한 개인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무한 경쟁으로 내몹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의 법은 교묘히 또는 공공연하게 힘 있는 자가 되어 남들을 지배하고 군림하라고 합니다.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욕망을 남을 위해 대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욕망을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섬기는 데에 사용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예의 길을 피하고 진정한 아들, 아버지처럼 온전한 아들, 즉 아버지와 같은 주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다른 것을 욕망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욕망,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방식을 따르고자 하는 욕망 말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다른 이를 이해하고 섬기는 데에 사용하십시오. 그래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의 법인 사랑의 법, 은혜의 법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