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문구(072) - 안상이기(安詳而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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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세존께서 삼매에서 조용히 일어나시어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조용히 일어나시어' 라고 옮겨버리기에 아까운 낱말이 한문본에 있습니다.
'안상이기(安詳而起)'가 그것입니다.
편안할 안(安), 자세할 상(詳)을 써서 안상(安詳)하게 일어났다, 편안하고 자세한 모습으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삼매에 들었다가 깨어나는 모습을 안상(安詳)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갑자기 벌컥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또 모양새 없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꽃이 피듯이, 따뜻한 햇살이 들면 꽃이 사악 열리듯 그렇게 아주 조용하게 삼매에서 깨어나는 모양입니다.
옆 사람이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깨어나는 모양입니다.
이 안상(安詳)이라는 말은 스님들의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발우 공양을 할 때 '안상'하게 행동하라고 합니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 보면 “재식시(齋食時)에 음철(飮啜)을 부득작성(不得作聲)하며 집방(執放)에 요수안상(要須安詳)하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공양할 때 먹고 마시는 소리를 내지 말며, 잡고 놓는 일을 안상(安詳)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집방(執放) 즉 잡고 놓는 일이란 숟가락을 잡고 숟가락을 놓고, 젓가락을 잡고 젓가락을 놓고, 밥 바룻대를 잡았다가 놓고, 국 바룻대를 잡았다가 놓고, 반찬 바룻대를 잡았다가 놓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님들은 공양할 때 바룻대를 잡고 공양을 합니다.
수저로 음식을 옮길 때 흘리지 않고, 음식을 입에 넣고 씹는 모양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국이나 반찬, 밥을 담은 바룻대를 들고 공양을 합니다.
아주 편안한 자세로 상세하고 섬세하게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으며, 정확하게 0.Imm도 틀리지 않게 놓을 자리에 놓고 잡을 곳을 잡는 것이 상(詳)의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그 모양새가 흐트러지거나 속도가 너무 느리거나 빠르지 않은 상대가 안(安)의 모양입니다.
집방에 안상하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삼매에서 깨어나는 듯한 자세로 발우 공양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공양하는 일도 수행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발우 공양하는 모양만 안상(安詳)이 아니고, 다도(茶道)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도의 요체를 한마디로 하면 바로 안상입니다.
팔을 어느 정도 높이로 들어라 낮춰라 하고 일률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형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상하게 하라'고 하면 다 됩니다.
다관에 물을 따르고 차를 넣고 하는 모든 행위를 안상하게 하면 됩니다.
또한 대중들이 모여서 법공양을 할 때도 이러한 분위기로 하라는 전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법화경의 '안상이기'하는 모습, 그와 같이 삼매에서 깨어나는 모습에 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삼매에서 안상하게 일어나신 뒤 첫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한량없이 깊고 깊어서 일체 성문이나 벽지불은 알 수 없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법화경은 보살들을 가르치기 위한 설법이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문(聲聞)은 학습주의요, 벽지불 (辟支佛)은 체험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전을 보거나 설법이나 강의를 듣거나 하는 것은 모두 학습주의로 성문에 해당합니다.
벽지불은 이보다 한 단계 높은 체험주의입니다.
직접 경험을 통해서 깨우치는 것입니다.
경전을 펴놓고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실제 생활에서 좌충우돌하며 깨우친 사람들의 소견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생활전선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면서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고 싸워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인생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은 소견이 넓습니다.
스스로 깨우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보살은 행동주의입니다.
보살도 부처님의 가르침 을 공부하고, 실제 체험을 통해서 배우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실천 수행을 그 중심에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살행 즉 보살(菩薩)의 행(行)을 한다고 합니다.
행(行)으로. 실천(實踐)으로 부처님이 깨달으신 자리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가 보살입니다.
부처님께서 최후로 설하신 법화경은 이와 같은 보살이어야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설법입니다.
그래서 성문이나 벽지불은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는 참으로 난신난해,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일체제법의 실상이 믿기 어렵고, 이 못난 중생들이 그대로가 부처님이라는 것이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공부해야 할 일입니다.
수행을 하거나 경전 강독을 하거나 참선이나 기도, 염불을 하거나 간에 모든 불교적 행위는 바로 이것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출처 : 불광출판사 무비스님 법화경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