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적멸보궁 포함 14곳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적멸보궁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 (眞身舍利)를 모신 전각을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로 말씀을 설파한 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 (金剛座)에서 비롯된다.
적멸보궁의 뜻은 모든 바깥 경계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런 궁전이라는 뜻이다.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으니 괴로울 것이 없는 부처님의 경지를 나타낸다. 보통 적멸보궁은 언덕 모양의 계단(戒壇)을 쌓고 진신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진신 사리는 곧 부처와 동일체로 부처가 열반 후 불상이 조성 될 때까지 가장 성스럽고 경건한 숭배 대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사리를 모신 계단을 향해 마당에서 예불을 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법당을 짓게 되었으며, 그 법당은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장소로 건립 되었기 때문에 불상을 따로 안치하지 않고 진신사리가 봉안된 쪽으로 불단을 마련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곳은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율사가 당나라 종남산에서 기도하며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돌아올때 가져온 부처의 사리와 정골(頂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영축산 통도사(通度寺),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함백산 정암사(淨巖寺),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적멸보궁이 대표적이다.
오대적멸보궁 포함 14개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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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대 적멸보궁 경남 영취산 통도사

♣ 영축산 통도사(通度寺) 적멸보궁(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우리나라 불교에는 3보 사찰이 있다. 부처의 말씀인 팔만대장경이 있는 합천 해인사는 법보法寶), 수많은 대승을 배출한 순천 송광사는 승보(僧寶),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양산 통도사는 불보(佛寶)사찰이다.
3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부처를 모신 불보, 통도사이다. 자장율사가 사리를 가장 먼저 봉안한 곳이 바로 통도사이다. 일주문 기둥에 「불교의 종가(佛之宗家)」라고 쓰여진 것도 이런 까닭이다. 5대 적멸보궁 중 참배객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진입로가 운치가 있다. 냇물이 흐르는 길 옆으로 사지를 비튼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절 바로 옆에까지 이르는 주차장이 있지만 가능한 한 절에서 먼 곳에 차를 세우고 걷는 것이 좋다.
일주문과 금강문, 불이문을 차례로 지나면 좌우로 고풍스러운 건물과 탑이 도열한다. 적멸보궁은 정면에 서 있다. 사방으로 적멸보궁, 대웅전, 대방광전, 금강계단이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금강계단 글씨와 일주문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다. 불상이 없는 빈 불단 뒤로 창이 넓게 나 있고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이 보인다.
적멸보궁 옆에는 구룡신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통도사의 터는 원래 큰 호수였고 옛날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한다. 절을 짓느라 호수를 메우면서 여덟 마리의 용이 쫓겨가고 한 마리만이 절을 지키며 남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는다는 신비의 연못이다. 경부고속도로 통도사IC에서 승용차로 5분 거리이다. 종무소 (055)382-7182
(2)
5대 적멸보궁 강원 사자산 법흥사

♣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적멸보궁(강원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422-1)
법흥사는 불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이 문을 열고 위세를 떨쳤던 사찰이다. 그러나 최근까지 그 위세를 느끼기 힘들 정도로 절의 규모가 작았다. 1912년 산불로 소실됐고, 17년의 중건불사를 마치자마자 1931년에는 산사태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939년 적멸보궁만을 중수한 채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최근에 비약적으로 대찰의 모습을 회복해가고 있다. 요즘도 불사가 한창이다.
최근에 중수된 적멸보궁이어서인지 5대 적멸보궁 중 가장 화려한 단청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운치는 떨어진다. 현판을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는 용머리 장식이나 뜰에 서있는 한 쌍의 석등도 아직 세월의 맛을 내지는 못하고 있다. 적멸보궁 뒤로는 자장율사가 기도하던 토굴이 있고 그 옆에 사리를 넣어왔다는 석함이 남아있다.
법흥사에서 또 볼만한 것은 보물 제612호인 징효대사탑비. 탑과 나란히 극락전이 세워져 있다. 사자산 자락으로 저녁해가 넘어갈 때, 겨울숲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서 있는 극락전은 정갈한 아름다움을 내뿜는다. 종무소 (033)374-9177
(3)
5대 적멸보궁 강원 태백산 정암사

♣ 태백산 정암사(淨巖寺) 적멸보궁 (강원 정선군 고한읍)
자장율사가 적멸보궁을 세웠을 당시에는 정말 심산유곡이었을 것이다. 속세의 숨결조차 미치지 않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서 정암사가 있는 정선 사북과 고한의 숨결은 언제나 거칠었다.
석탄 산지로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탄광촌의 찌그러진 판자촌, 계곡의 바위마저 녹슬게 한 폐광의 폐수, 탄좌의 요란한 기계소리…. 탄광의 경기가 사라진 지금은 ‘돈 놓고 돈 먹기’ 카지노가 분주함을 잇고 있다.
정암사는 그 정(淨)하지 않은 기운의 한 가운데에 연꽃처럼 정(淨)하게 피어 있는 절이다. 대찰은 아니지만 위엄이 추상같다. 탄허스님이 현판을 쓴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육화정사, 정면에 범종각이 서있고 범종각 너머 적멸궁이 눈에 들어온다. 적멸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극락교를 건너야 한다. 다리 밑으로 지금은 얼어있지만 맑은 물길이 있다. 천연기념물 열목어가 산다.
적멸궁은 고색창연하고 아름답다. 단청은 색이 바래고 기둥과 서까래는 세월만큼 주름이 졌다. 지붕에만 반짝이는 청기와를 얹고 있다. 잘 정돈된 돌담과 그 안에 좌정한 적멸궁은 예술적 외경심마저 불러 일으킨다. 적멸궁 뒤 언덕에 사리를 모신 수마노탑(보물 제410호)이 있다. 보석의 일종인 마노석 벽돌로 쌓은 7층 모전탑이다. 적멸보궁을 나와 왼쪽의 갈지(之)자 계단길을 100여㎙ 올라야 한다.
5곳의 적멸보궁 중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다. 절 앞에 대로(414번 지방국도)가 나 있다. 정선과 태백을 연결하는 38번 국도를 이용하거나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태백선 열차로 고한까지 간 뒤, 만항행 버스를 타면 된다. 종무소 (033)591-2469
(4)
5대 적멸보궁 강원 오대산 상원사

♣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우리나라의 사찰 중 풍수지리학적으로 가장 좋은 곳에 지어졌다는 평가를 받는 보궁이다. 오대산 주봉인 비로봉 아래에 있다. 이 곳의 모양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연봉이 주위를 호위하고 앞은 시원하게 툭 터졌다. 이 터에 부처님을 모신 덕에 우리나라 스님들은 먹을 것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흔히 ‘상원사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상원사는 적멸보궁을 보필하는 절로 세워졌다. 청량선원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공붓방도 있다. 다른 적멸보궁이 절 안에 들어있는 것과는 달리 상원사 적멸보궁은 산 위로 약 2㎞ 지점에 있다.
오르는 길은 70%가 계단이다. 언덕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짧은 길이지만 제법 땀이 난다. 봉분처럼 생긴 언덕 위에 자리한 적멸보궁은 화려하지 않고 단아하다. 댓돌에는 언제나 서너 켤레의 신발이 놓여있다.염불 소리가 들린다.
(5)
5대 적멸보궁 강원 설악산 봉정암

♣ 설악산 봉정암(강원 인제군 북면 용대2리 690번지)
설악산의 제3봉인 소청봉 바로 아래에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 능선이 있다. 용의 이빨이라는 뜻의 용아장성이다. 봉정암은 그 용아장성의 바위 사이에 들어있다.
해발 1,244㎙의 돌산에 있기 때문에 참배객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과거에는 그랬다. 불자보다는 대청봉에 오르는 산꾼들이 들러 목을 축이곤 했던 곳이다.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영험스런 기도터로 알려지면서 기도하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봉정암은 찻길이 끝나는 백담사에서 6시간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 처음에는 평탄하고 발걸음마다 절경과 만나는 기쁨이 있지만 마지막 1시간은 등산 전문가들도 힘들어하는 코스, 일명 ‘깔딱고개’이다. 절을 찾는 이들 중 건장한 젊은이는 드물다. 중년 이후의 여성이 대부분이다.
도시에서라면 1층 계단도 못 오르겠다고 엄살을 떨 사람들이 아찔한 돌 언덕을 기다시피 하며 오른다. 새삼 종교의 힘이 경외스럽 느껴지는 모습이다.
봉정암은 아름다운 사찰이기도 하다. 절 마당에 서면 그림 같은 설악의 연봉들이 산수화처럼 앞으로 펼쳐진다. 적멸보궁 뒤로 계단이 있고 그 위 언덕에 풍우에 깎인 돌탑이 서 있다. 천하를 내려다보는 탑의 모습에서 신비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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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적멸보궁 강원 금강산 건봉사
520년(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758년에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스님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됩니다. 여기에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습니다.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아미타 도량이 되었습니다. 고려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358년에는 나옹스님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습니다.
1465년에는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이었으며,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습니다.
1802년에는 용허 석민스님이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51년에는 벽오 유총스님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78년 4월 3일에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명부전, 범종각, 향로전, 보안원, 낙서암, 백화암, 청련암을 중건하였습니다.
1881년에는 만화 관준스님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에는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산실인 봉명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1908년 제4회 만일회를 회향한 뒤 금암 의훈스님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설하고 옛부터 있던 돌무더기의 소신대에 31인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1921년 인천포교당과 봉림학교를 세웠으며, 한암스님을 청하여 무차선회를 여는 등 우리나라 4대 사찰의 하나요 31본산의 하나로서 명망을 떨쳤던 곳입니다.
한국전쟁 때 완전히 폐허화 되었으나 중창불사를 통해 사격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7)
적멸보궁 경북 태조산 도리사
도리사 寂 滅 寶 宮 (적멸보궁)
1977년 세존 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사리탑을 새우고불사리 예배소인 寂滅寶宮(적멸보궁)을 1982년에 주지 法燈和尙 (법등화상)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축대를 쌓아 복련문이 새겨진 초석에 나무기둥을 세웠다. 창호는 꽃창살로 짜여져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적멸보궁은 불상을 모시지 않고 법당만 있는 불전(佛殿)을 말한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사리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1982년에 새로 지었고, 안에서 바라다 보이는 석가여래사리탑은 높이 560㎝로, 세존사리탑에서 나온 금동 육각사리함의 모습을 본떠서 1987년에 만들고 불사리를 봉안하였다.
적멸보궁 뒤편에 있는 석가세존사리탑은 1977년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1987년에 법등화상이 조성한 것이다
높이8m로 八角 圓堂形 浮屠(팔각원당형부도)를 본 따서 정방형 지석대 위에 팔각 석탑을 세웠는데 기단에는 용을 조각하고 탑신에는 사천왕상을, 상륜부의 귀꽃에는 여래상을 조각하는 등 전체적으로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8)
적멸보궁 대구 비슬산 용연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914년(신덕왕 3)에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창건했으며, 이 절터는 용이 살았던 곳이라고 해서 절이름을 용연사라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3년(선조 36)에 휴정의 명령으로 인잠(印岑)·탄옥(坦玉) 등이 재건했다. 1650년(효종 1)에 일어난 화재로 보광루(寶光樓)만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으나 다음해에 계환(戒環)·여휘(麗輝) 등이 중건했다.
그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6·25전쟁 때 병화를 입어 겨우 명맥만 유지되던 것을 근래에 복원했다.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영산전·명부전·사명당·선실(禪室)·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석조계단(보물 제539호)이 있고, 이외에도 몇 기의 부도와 3층석탑 등이 있다.
용연사에 관한 고려 시대의 사실은 기록에 보이지 않고 조선시대에 들어서서야 사적이 전한다. 물론 법당 앞의 석탑이 고려시대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 시대에도 가람이 계속 유지되어 왔음에 틀림없으나 기록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1419년(세종 1)에 천일(天日) 스님이 퇴락된 절을 보고 슬픈 마음이 일어나 장엄한 규모로 중창하였으나,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03년(선조 36) 사명 유정(泗溟惟政) 스님이 인잠(印岑)·탄옥(坦玉)·경천(敬天) 스님 등에게 중창하도록 하였다. 이 때 지은 전각이 대웅전을 비롯해서 5동이었고, 거주하는 승려도 2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650년(효종 1)의 어느 날 저녁 등불을 켤 무렵에 별똥이 떨어져 불이 나서 법당과 요사가 다시 소실되는 화를 입었으나, 이듬해 일언(一彦) 스님과 학신(學信) 스님이 동상실(東上室)과 서상실(西上室)을 건립하였다. 1653년에는 홍묵(弘黙) 스님이 대웅전을, 승안(勝安) 스님이 명부전을 세웠고, 이듬해에 일주(一珠) 스님이 만월루(滿月樓)를 세웠다.
이때부터 1661년(현종 2)까지 함허당(含虛堂), 관정료(灌頂寮), 관음전(觀音殿), 반상료(返常寮), 명월당(明月堂), 향로전(香爐殿), 약사전(藥師殿), 두월료(斗月寮) 등을 10여 년 동안 거의 해마다 건립하였다. 1668년에는 대종(大鍾)과 금구(金口)를 주조했고, 다시 중창 불사가 계속되어 18세기 초까지 사리각(舍利閣), 천왕문, 응진전, 영류당(詠流堂), 일주문, 명부전 등이 건립되었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중창 불사가 연이어 이루어져 전각은 무려 200여 칸이 되었다고 한다. 대찰의 면모를 갖춘 용연사는 1673년(현종 14)에 으뜸가는 보배를 경내에 받들게 되었으니, 바로 석가여래 부도탑이 그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통도사에 들어가 석가여래의 진신사리탑을 훼손하려 하자, 사명 대사가 금강산으로 사리를 모시고 갔다가 다시 통도사로 옮겨오던 중에 그 중의 1과를 이곳 용연사에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1676년(숙종 2) 문신인 권해(權瑎, 1648-1723)가 쓴 「파사교주석가여래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이라는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에 석가여래 부도탑을 중수했고, 이어서 1715년에 찬화(粲和) 스님이 여러 사람들의 시주를 모아 대웅전을 비롯하여 종각 등의 여러 건물을 중수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다. 이 중수를 마친 후에 홍문관 교리인 임수간에게 청하여 그 동안의 내역을 새긴 중수비를 세웠다.
이 때가 1722년(경종 2)이다. 당시 용연사에는 경전 공부를 하는 명적암과 은적암이 있었고, 참선 공부를 하는 보제암과 법장암이 있었으며, 절 앞의 시내를 따라 용문교․천태교 등 다섯 개의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은 1726년(영조 2) 정월에 불이 나서 대웅전 및 동서 별실과 좌우 승당이 소실되었다. 그 뒤 혜조(慧照) 스님이 찬화 스님과 더불어 힘을 모아 2년 만인 1728년에 가람을 중건하고, 절의 내력에 밝은 금곡 선청 스님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적기를 쓰게 하였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10년 한일합방 직후 발표된 사찰령(寺刹令)으로 용연사는 동화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었다. 1934년에 석가여래 사리탑의 중수 불사가 있었는데 사리탑 주위에 석주를 세운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후 용연사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전각의 보수와 건립을 통하여 수행과 교화의 성소로서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은적암(隱寂庵), 명적암(明寂庵), 광선암(廣仙庵)이 있다

위사진 송화 사진이 아닙니다 잠시올림니다
(9) 적멸보궁 경남 봉명산 다솔사
다솔사의 창건연대는 503년 설과 511년 설이 있다. 먼저 각종 사전류와 안내 자료에는 511년(신라 지증왕 12) 창건설이 실려 있다.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이 해에 영악사(靈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솔사의 역사를 전하는 대표적 자료로 북지리산영악사중건비?(17세기 후반 진행된 다솔사의 중창 불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1704년)가 있는데, 이 비에서는 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다솔사 관련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비문에 따르면 503년(지증왕 4)에 창건 되었다고 한다. 5북지리산영악사중건비의 자료적 가치로 볼 때 503년 설을 따라야 할 것이다.
사찰명의 변화와 유래
다솔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사찰 이름이 변화되었다. 1704년에 세워진 「북지리산영악사중건비」에 의하면 다솔사는 처음 영악사(靈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며, 이후 다솔사(陀率寺) → 영봉사(靈鳳寺) → 다솔사(多率寺) → 영악사의 잦은 변화를 거쳤다고 한다. 하지만 네 번째 중창주인 도선 국사가 9세기 중후반 경 다시 영악사로 명명한 이후 오랫동안 이 이름을 유지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가람고(伽藍考)』, 『범우고(梵宇攷)』, 『곤양읍지(昆陽邑誌)』 등의 자료에는 모두 영악사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본다면 적어도 18세기 후반 무렵까지는 영악사의 이름으로 존속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뚜렷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18세기 후반 경부터 다솔사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1761년에 편찬된 「다솔사명부전대양루사왕문중건기」의 내용이 현재 전하고 있는데, 이 중건기문의 제목에 다솔사의 명칭이 다시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1779년에 편찬된 「팔상전중수기」에도 다솔사의 이름이 보이고 있어 이 시기 어느 시점부터 다솔사로 이름이 바뀌어지고 있음을 알게 하여준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솔사의 사명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편, 다솔사라는 사찰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글자 그대로 소나무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인데, 이에 대한 문헌적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둘째는 이 절이 자리한 주산이 대장(大將)과도 같아 ‘군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이러한 내용은 「다솔사명부전대양루사왕문중건기」에 전하는데, 그 관련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절의(다솔사) 주악(主嶽)은 마치 전후좌우에 대궐을 지키는 병사들이 둘러처져 있는 것과 같은 대장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사찰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것과 같다’는 데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사찰의 이름은 대개 해당 사찰과 관계된 자연환경과 역사, 사상, 인물 등을 고려하여 붙이게 되는데, 다솔사의 경우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주변의 자연환경과 관련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다솔사를 찾아가는 길에 주변에 소나무가 많이 있는지, 또는 다솔사가자리한 주산이 정말 대장 같은 위용을 갖추고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10)
적멸보궁 경남 미륵산 용화사
신라시대 선덕여왕때 은점스님이 정수사(淨水寺)로 창건하였는데 당시는 지금보다 더 위쪽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943년(태조 26) 도솔선사가 산내암자로 도솔암을 창건하였다. 그 뒤 1260년(원종 1) 큰 비로 산사태가 나서 가람이 무너져버렸고, 3년 뒤 자리를 옮겨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천택사(天澤寺)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 금강산에서 수도한 성화스님이 중창하였다. 그러나 1622년에 심한 폭풍으로 절이 허물어지자 벽담스님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서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용화사로 다시 바꾸었다. 이어서 속종 때(1661~1720) 옛 정수사 터에 산내암자로 관음암(觀音庵)을 지었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되어 발전이라는 성과물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또한 희망은 기다림을 상징하는 그 무엇을 만들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기다림을 가질 수 없지만, 부처님나라를 기다리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중생들의 똑같은 기다림이 하나의 섬이 되고, 그것도 모자랄 산을 이루니 미륵도와 미륵산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경남 통영 앞바다를 해상의 불국세계라고 말합니다. 통영 앞바다에는 부처님의 상호와 부처님나라를 상징하는 세존도(世尊島), 연화도(蓮花島), 욕지도(欲知島), 보리도(菩提島)라는 섬들로 가득합니다. 그중 미륵도(彌勒島)에는 미륵부처님이 상주하시는 미륵산이 있으며, 미륵산에는 미륵불이 용화정토를 구현할 즉 용화사가 있습니다. 용화사는 중생들이 미륵부처님의 하생을 기원하는 도량입니다. 미륵부처님을 기다리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조선 숙종 때 수군통제사 윤천뢰가 통영 미륵도에 내려와 미륵산에 성첩을 크게 쌓는데 성축공사를 가로막는 기운을 진압하기 위해 관립 사찰을 건립하고 사명을 정수사로 했습니다. 관립 사찰 정수사에는 승군들이 상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수사는 영조 때 무너져 산 북쪽으로 이전하여 중수하면서 사명을 천택사로 바꾸었습니다. 천택사도 화재로 전소되자, 다시 동쪽 골짜기에 새 터에 자리를 잡아 지은 절이 용화사입니다. 당시 용화사로 사명을 바꾼 것은 미륵산에 미륵불이 하생하여 용화법회를 베풀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용화사에 미래에 하생하실 미륵부처님대산 봉안한 미륵불은 시민들의 마음을 감싸 안듯 충무시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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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충남 태조산 성불사
충남 천안 성불사 적멸보궁
성불사(成佛寺)는 천안시 안서동 106번지 태조산(太祖山) 청소년 야영장 동북쪽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문화재 소개후면쪽)에는 겨우 형체만 알아 볼 수 있는 불입상이, 우측면에는 석가삼존과 16나한상이 각각 부조로 새겨져 있다. 불입상은 고부
천안시 안서동 소재 성불사(문화재자료 제10호)는 고려 태조 4년 연기 도선 또는 고려 태조때의 혜선국사, 혜조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대웅전 뒤편 산자락 끝에 우뚝 서있는 口꼴 바위의 양측면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는데, 암반의 전면(법당 조(高浮彫)상이나 바위의 절리현상으로 인하여 얼굴부분과 신체의 전면이 크게 떨어져나가 윤곽만 살펴 볼 수 있는데, 어렴풋이 남아있는 육계와 손의 형태, 의문 등은 고려시대의 불상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아래가 넓게 벌어진 대의 하단으로 발가락..
문화재 상세 정보
공식명칭 |
천안성불사마애석가삼존16나한상및불입상 |
주소 |
충남 천안시 안서동 178-8 |
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169 |
전화번호 |
- |
지정일 |
2002.08.10 |
휴무일 |
- |
한자명칭 |
天安成佛寺磨崖釋迦三尊16羅漢像및佛立像 |
이용요금 |
- |
테마 |
유물, 불교조각, 석조, 불상 |
주차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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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 |
찾아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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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충북 구룡산 안심사
안심사는 법주사에 딸린 작은 절이다. 통일신라 혜공왕 11년(775)에 진표율사가 지었다고 하는데 편안한 마음으로 제자를 길렀다 해서 안심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원명국사가 다시 짓고 인조 4년(1626)에 송암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하며 한말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있는 대웅전은 확실하게 지은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979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와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인조 때의 건물로 보인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 놓은 이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원래는 맞배지붕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러 차례 수리를 통해 건물이 축소·변형되면서 지붕 형식도 바뀐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아 만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안심사 세존 사리탑, 사리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
삼성각(三聖閣)의 왼편 뜰에 있는 세존사리탑은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이 절을 창건할 당시 직접 조각하여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리탑 앞에 있는 세존사리비 추기(追記 : 1781, 정조 5년)에 의하면, 탑은 행방을 모른 채 오랜 세월동안 내려오던 중 구룡산에서 발견되어, 광우(廣祐)ㆍ등원(等元) 두 스님이 다시 이 절로 옮겨왔다고 한다.
대웅전 서쪽 뜰에 봉안되어 있는 탑비(塔碑)로서 탑비는 높이 17㎝의 비좌(碑座) 위에 높이 150㎝, 너비 60.5㎝, 두께 26.5㎝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높이 30㎝, 가로 95㎝, 세로 69㎝의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屋蓋石)을 올린 조선후기의 일반적인 비 형식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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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전북 대둔산 안심사
전라북도 도립공원 대둔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안심사는 세월의 무상함을 한껏 느끼게 해주는 고찰이다.
이러한 안심사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무려 30여 채의 전각과 13개의 암자가 세워져 있던 거찰이었는데, 이제 그 번성했던 사찰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고 불에 타다 남은 석재들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때문에 현재의 안심사를 작은 사찰로 여기겠지만, 진신사리가 모셔진 계단과 1759년에 세운 사적비 및 1760년에 제작된 범종 등으로 미루어볼 때 고찰 안심사는 결코 작지 않은 사찰이 아닌 것을 알 게 된다.
특히 안심사는 부처님 진리사리 10과와 치아사리 1과를 안치하고 있는 적멸보궁으로서 그 이름이 높다. 부도탑은 높이 175cm, 탑신 둘레 315cm의 석종형이며 지대석은 연화문으로 장식하였고, 상륜으로 보주를 올려 놓은 형식이다. 그런데 이 진신사리를 모신 석가모니 부처님 사리탑, 즉 안심사 계단의 사방에는 호위신장 역할을 하는 사천왕상을 각각 세워 놓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진신사리탑의 미술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근래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였던 데에서 승격되어 보물 제143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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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전북 모악산 금산사
방등계단 옆의 옛 나한전 자리에 세워진 예배각(禮拜閣)으로 유리벽을 통해 방등계단에 있는 사리탑에 경배하며 예불을 드리는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불전 내부에는 따로 불단을 차려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는 불보사찰(佛寶寺刹)인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경우이다. 즉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사리탑이 곧 부처님을 상징하기 때문에 별도의 불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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