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 고 록
저는 1938년 11월 17일 평안북도 용천군
동하면 삼인동(현 인흥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서 세살 때 저는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민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1945년 8.15 광복을 저는 흑룡강성 무단지앙(牡丹江)
이란 도시에서 맞이 했습니다.
광복과 더불어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저의 아버지가 서울로 기셨다기에
저는 오랫동안 그렇게 믿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두 형님은 팔로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집에 남은 사람은할아버지와 어머니와
저뿐이었습니다.
정부의 배려로 우리는 해림현 중흥촌이란
곳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토지개혁을 실시했습니다.
공산당은 지주와 부농들로부터 몰수한 땅을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했습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집집마다 땅이 있어서
자작농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먹고 사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일은 한집도 없었고
인심도 후했습니다.
저는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공산당과 공산주의가
좋은 줄로 알고 소년시절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1950년 대에 들어서면서
공산당은 호조조(互助組), 합작사(合作社)란
명으로 토지를 국유화 하고 농민들은 집단 영농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단 영농으로 인하여 중국의 농민들은 다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정도 이때부터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끼니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습니다.
저도 학비문제로 잠시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촌의 지도자를 만나려고
촌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마침 당서기가 있어서 찾아온 사유를 얘기했더니
집에 아들은 일할 나이가 되었으니 공부는 그만시키고 일을
하면 안 되겠는가고 했습니다.
이에 어머니는 홧김에
아들 둘을 군에 보내고 집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공부도 시키지 못하는 사회가 좋기는
뭐가 좋은 가고 반발했습니다.
이에 발칵한 당서기와 그 일당들이 어머니를
호되게 비판했습니다.
당신 남편이 남조선에 있으니 당신에게는
이 사회가 좋을 리 없겠지
당신 다시 한번 이런 말을 하면 큰일 날 줄
알라면서 어머니를 협박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한동안 소침해하시다가
비명에 세상을 하직한 것입니다.
갑자기 어머니를 잃자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생활능력이 없기에 할아버지는 사촌 형이
모셔가고 나는 머나먼 내몽고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홍동식이라는 친구를 만나
남조선으로의 밀항을 모의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친구의 밀고로 우리는 같이 수감되었습니다.
수감 당시 압수당한 내가 쓴 일기가 큰 화를 불렀습니다.
그 일기에는 어머니의 억울한 생애와
남조선에 계시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유세계에 대한 동경 등 내용이 있었습니다.
일기는 조선어로 썼기에 조선족 두 명이 나의 심문을 맡았습니다.
실은 같은 동족으로써 조금만 눈을 감아주었다면
문제 될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건을 축소하기보다 더욱 확대시켜
나를 승진의 발판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렇게 나와 홍동식은 감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각각 10년, 7년 형을 언도받고
1962년도 여름에 로까가뚜이(勞改隊)로압송되었습니다.
로까이뚜이란 강제 노역을 통해서 사상을 개조시킨다는 뜻입니다.
강제 노역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늘을 볼 수 있고
햇빛을 쬘 수 있고
나무와 풀을 볼수 있고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배부른 밥을 먹을 수 있어서
감옥에 비하면 천당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만기가 되면
신생대(新生隊)리는 곳에 보내 집니다.
사회에서는 이곳 사람들을 여전히 죄인으로
취급하며 얼로까가(二勞改)라고 부릅니다.
나는 1970년도에 만기 석방이 되어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강교(江橋)라는 곳에 배치받아
철도역에서 화물 상하차 작업공으로 일했습니다.
얼로까이는 구속이 많았지만 그래도 간부들에게 잘만 보이면
휴가를 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1974년도 3월 초에 나는 휴가 차 무단지앙시
온춘(牡丹江市溫泉)에 사는 사촌 누나네 집을 찾아갔습니다.
나는 사촌 누나를 따라 해림현 묘산(廟山)이라는
곳에 선을 보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아내의 아버지는 신장염으로 일 년 내내 누워서
일어나 앉을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가정은 한 명의 환자로 인하여 엉망진창이었습니다.
5남매는 밥도 제대로 얻어 먹지 못했습니다.
장인 될 분은 돈도 없고 성분까지 나쁜 나에게
자기 딸을 맡길 수 없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런데 장모 될 분이 딸이 좋은 대로 하게 놔두라고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이 말 한마디에 장인은 머리맡에 있는 사발과 접시를
집어서 장모를 향해 날렸습니다.
그게 장모의 이마에 명중되어 장모는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누가 봐도 다 끝난 혼사였습니다.
나는 누나와 함께 석산 공사(石山公社 면에 해당)에
버스를 타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한참을 걸었는데 뒤에서 지금의 아내가 오른손에 작은
보자기를 들고 숨가쁘게 우리를 쫓아 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운명적인 만남으로 나도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가정을 이룬 후 우리는 내몽고 성길사한 농장으로 배치받아
그곳에서 아들도 낳아 키우며 행복한 신혼생활을 누렸습니다.
1978년부터 중국은 본격적으로 개혁 개방
노선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족들이
사는 성길사한으로 이사를 나왔습니다.
개방 초기라 나 같은 사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 설움을 많이 겪었지만
그래도 후회 없는 선택이라 자부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1988년도에 저는 허베이 성 친황다오(秦皇島)로
이사를 나왔습니다.
그곳에서 미국에서 오신 한국인 선교사인
이바울 목사님을 만나 그분의 위탁을 받고
회룡(和龍)등 세 곳에 교회 건축 헌금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개방이 되어 자유롭고 살기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1989년 6.4 천안문 시태가 발발하여 기독교인들이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바울 목사님은 중공으로부터 영구 추방을 당하고
저도 당국으로부터 추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위기일발의 시기에 저는 기족을 이끌고
우여곡절 끝에 미얀마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낯선 땅 미얀마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우리는
미얀마에 발을 디딘 날부터 철저하게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살았습니다.
미얀마에서 마약 중독자, 사기꾼, 도적 , 인민군(빨치산)
등등 많은 불량한 사람들을 만났었는데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마진량(馬金亮) 부부였습니다.
우리는 그 집에서 20일간 머물면서 그 부부의
도움을 받아 마방딩(미얀마의 주민등록증)도 취득하여
마씨 부부와 함께 미얀마 내륙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라슈라는 도시의 검문소에서 검문에 걸려
우리를 안내하던 택시 기사와 마 씨 그리고 저의 마방딩을
모두 압수당했습니다.
마씨와 택시기사가 그들이 제기한 거액의 벌금을 사흘 내에
납부하겠다는 조서를 쓰고 가까스로 감금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에
마 씨 부부는 우리를 어느 빠이족 과부네 집으로
안내했습니다.
마씨 부부는 내일 와서 데리고 간다는 약속을 하고는
유유히 떠났습니다.
이 과부는 딸 둘을 데리고 사는 무당이었습니다.
열두어 살 되어 보이는 막내딸은 동승(童僧)처럼
머리를 빡빡 밀어서 사내아이같아 보였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안주인이 절에 가면서 우리에게
용돈도 좀 주고 바나나 이파리로 싼 도시락도 쥐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회적으로 우리를 내쫓는 행위였습니다.
아침에 온다던 마 씨 부부는 저녁 무렵인데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절에 갔던 여주인이 집에 돌아와 우리가 아직도 나가지 않은
것을 보고 화를 내면서 내좇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갑자기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도로가 삽시에 하천으로 변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나로서는 이 난국을 헤쳐 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집 바닥에 꿇어앉아서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머리를 들어 보니 미얀마의 전통 의상인
론지를 입은 예쁜 중국인 여인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말이 통하니 얼마나 기쁜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여주인이 중국 여인에게 남의 일에 왜 와서 참견이냐며
화를 냈습니다.
중국 여인은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고.
집의 막내딸이 이러인 이러한 중국인이 갈 곳이 없어서
우리 집에 있다기에 내가 찾아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은 중국인이니 내가 책임지겠다며 우리를
자기 집으로 안내했습니다.
그새 소나기는 멎고 하늘은 유난히 파랬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중국 여인의 손에 이끌려
그 집에 안착하게 되었습니다.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그 집 막내딸이 엄마의 강압으로 절에 가서 동승으로
살았는데 절이 싫어서 며칠 전에 절을 탈출하여
집으로 왔다고 합니다.
이 소녀가 우리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중국 집에 찾아가서
하소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살면서 고여인을 만난 것은 내 인생에서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그 중국 여인은 고자난(高子鸞)이며 한 남편의
아내이고 다섯 자녀의 어머니였습니다.
자기네 식구들만 해도 버거운데 우리 네 식구까지
받아 주었으니 세상에 이런 여성은 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해 우리는 미얀마 주재 한국 대사관의 도움을 받기 위해
고여인의 안내로 협궤도 열차를 타고 양곤에 갔습니다.
미얀마는 전국이 계엄상태라 수도 양곤의 경계는
더욱 삼엄했습니다.
나는 천주교회의 도움을 받아 대사관과 통화는 할 수
있었지만 대사관에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한 번 앞이 캄캄했습니다.
무엇보다 고 여인을 대할 면목이 없었습니다.
나는 라슈로 돌아가지 않고 양곤에 남아 있으려고 했습니다.
나는 살아 있는 한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고 여인께 마지막
고별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고 여인께서는 자기가 우리를 버려두고 간다면
평생 죄짓는 일이니 그럴 수는 없다고 하여
우리는 다시 라슈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고 여인네 집에서
2년 2개월을 살다가 작으만한 월세집으로 이사를 나왔습니다.
마침 태국의 중국마을에서 교사
두 명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나와 아들이 1992년 2월 1일 날,
태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라슈 검문소에서 나를 대륙에서 온
불법 체류자라고 의심했습니다.
택시 기사가 나서서 아니라고 설명을 했지만
믿지를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검문관 두 명이 내가 라슈에 사는 것이 확실한지
가서 봐야겠다고 하기에 택시기사와
함께 우리 집을 찾은 것입니다.
아내는 시장에 장사하러 나갔고 딸은 학교 갈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딸의 검문관들의 여러 가지 질문에 미얀마어로
완벽하게 대답하자 그들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검문소로 돌아왔습니다.
택시 기사의 말에 의하면 우리 딸이 예쁘고
미얀마 말을 그렇게 잘한다고 극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딸을 봐서라도 통과시켜 주겠다며
점심값이라도 내라며 소정의 금액을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2월 4일 날 우리는 태국 미소야 중국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교장 내외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 했습니다.
교장선생은 구두로 나에게 두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임기는 최소 3년이며
둘째는 임기 내에는 인사발령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이에 이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미얀마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을 태국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장덕재(張德才) 교장선생의
그 어떤 제의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배덕학교를 위해 열심히 일했더니 교장선생은
나에게 무한 신뢰를 보내며 서둘러서 아내와 딸을
데려다 주어서 우리는 이별한 지 한 달
여만에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몇 달 후 내가 kbs 방송국에 국어사전 한 권을
부탁했는데 내가 주소를 잘 못 써서 국어사전이
메홍선의 한국 선교 센터에 전달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나는 방정열 선교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외교관이나 선교사는 국제법상
면책특권이란 것이 있습니다.
외교관과 선교사는 그 나라의 법에 저촉되더라도
추방은 할 수 있지만 그 나라 법에 의해 처벌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면책특권입니다.
교장선생은 이 점을 노리고 나더러 방 선교사를
포섭해 보라고 했습니다.
니는 임기응변으로 되던 안되던 말은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름간의 시간이 흐른 후 교장을 찾아 가
방선교사가 손절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실은 나는 방선교사에게 이런 말을 꺼낸 적도 없었습니다.
미소야에서 몇 달간 살다 보니 전임자가 나에게 전한 말은
다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소야는 마약과 무기의 집산지였습니다.
우리 학교는 밤이면 마약과 무기의 창고로 사용되었습니다.
보통 마약거래는 육지에서 진행되지만
큰 거래는 안전한 공해상에서 진행된다고 합니다.
마을의 젊고 건장한 젊은이들은 마약 운반책으로
일을 하는데 한 번 출타하면 적어도 두 달은 걸렸습니다.
우리 이웃의 젊은이도 이 일을 하므로 내가 잘 알게 되었습니다.
1993년은 쿤사의 60 생일이 되는 해였습니다.
나는 배덕 학교의 전교생을 이끌고 쿤사의
60 생일을 축하할 겸 각 지도자들에게 세배를 드리기 위하여
일주일간 허멍지역에 머물면서 많은 곳을 방문했습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쿤사와 생일 기념사진을 촬영했는데
촬영 사진에는 나의 아들과 딸도 들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에는 대형 회관에서 오락회를 열었습니다.
쿤사가 어떤 미인 여성과 함께 무대에 올라 합창을 하여
현장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습니다.
쿤사가 무대에서 내려오자 사회자가 이번에는 미국에 사는
한국인이 나와서 한국 노래를 불러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오지에에서 동족을 만나게 되어 흥분을 자제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분이 노래를 마친 후 쿤사 쪽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교장을 비롯한 동료 교사들이 그렇게 나를 만류했지만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쿤사 앞에 다가가서 공손히 세배를 드리고 한국인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의외로 쿤사가 통쾌하게 허락해 주어서 나는 그분과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진 기자들이 우리 쪽을 향해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렀습니다.
쿤사는 친히 와인을 따라서 우리 두 사람에게 내 밀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포에게는 두툼한 봉투를 선물했습니다.
그 교포는 무슨 일인지 몰라 머뭇거렸습니다.
내가 사령관께서 특별히 드리는 세뱃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른도 세뱃돈을 받는가며 기쁘게 받았습니다.
나의 경솔하고 무모한 행동은 세상에 나의 정체를
공개하는 결괴를 낳았습니다.
그때부터 교장은 저를 불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태국 거류증을 만들어 주겠다던 약속도
파기해 버렸습니다.
허멍을 비롯한 관련 대표들의
모임에도 저를 배제시켰습니다.
어느 날, 나와 딸이 칭라이에 주민 등록증을 만들러
갔다가 일이 잘 안되어 하루 늦게 오게 되었습니다.
교장선생은 우리 집에 찾아와 아내와 이들에게
엄청 화를 냈다고 합니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교장선생을 찾아가서 사과하고
양해를 받아 내기는 했지만 좀 불안했습니다.
그 와중에 메홍손의 양 씨로부터 내가 사살 명단에
올랐다는 정보를 들은 후에는 호시탐탐 탈출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습니다.
1994년 2월 4일 날,
우리는 드디어 미소야를 탈 출하여 방콕에 오는데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방콕에서 이성우 선생의 보호를 받으며
4평 정도의 방에서 지냈습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 너무 답답하여 미국 대사관을
찾았지만 냉대만 받고 나왔습니다.
그 길로 지프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국 대사관을
찾았지만 귀국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백이면 백이 우리가 귀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실의에 빠져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데 태국의
한국 대사와 영사가 새로 부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께서는 신임 대사에게 부임하면
문충일 일가족의 귀국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내가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때 상황을 보면 탈북자들이 세계 각지에 방랑하면서
한국으로의 귀국을 갈망했지만
정부로써는 아직 대책을 찾지 못하던 중이었습니다.
국제법상 그들을 데려올 아무런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대사관에서는 우리 가정이 난민 판정을
받을 수 있도록 시범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난민 판정이 성공하면 탈북자들이 우리처럼
난민 판정을 받고 귀국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대사관의 구상대로 우리 가정의 난민 판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정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난민
판정을 받고 귀국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탈북자들이게 더없이 큰 희소식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방법으로 귀국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그렇게 귀국한 탈북민이
지금은 무려 3만 5천 명이라고 합니다.
내 일생에 남이 걷지 않았던 험난한 길을 많이 걸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제일 힘들었던 것은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이란 천당과 지옥이 공존하는 곳이었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처럼 가정에서 천당같은 날을
많이 누렸댔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고비 때마다
한 번씩 발작하면 너무 힘들었습니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아내가 배신할 때면
가정은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도 지옥보다 천당 같은 날이 많아서 가정이
유지됐겠지만 한 번씩 지옥을 통과할 때는
사는게 사는거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지옥의 날보다 천당의 날이 훨씬
더 많았으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