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0월8일)은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한로(寒露)입니다. 단풍도 짙어지고 제비같은 여름새가 떠나가며, 기러기 류의 겨울새가 찾아오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하늘도 더 없이 맑고 푸르며 높아졌지요.
이 즈음에 접어들면 농부들은 들녘의 곡식들을 추수하느라 잠시 머뭇거릴 겨를도 없이 바빠집니다. 새벽녘에는 시골 마당 울타리 안 쪽에 자라난 작은 풀이나 국화 꽃잎 위에도 영롱한 보석같은 이슬이 투명하게 맺힙니다.
추억까지 되돌려주는 정겨운 풍경
어릴 적 저희 집 마당 한 켠, 꽃밭 옆에는 어머니께서 찬거리를 위해 심어놓은 몇 그루의 가지줄기, 고춧대, 호박넝쿨 등이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석류나 밤 열매도 익어가고, 구석진 울타리 한 켠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연초록빛 대추열매도 빨갛게 물들어 갔습니다.
어느날 이른 새벽, 그 가지줄기에 대롱대롱 이슬 머금고 익어가는 작고 어린 대추나 가지 하나를 따서 씻지도 않고, 아사삭 얼른 한 입 베어 물면 입 안 가득 달콤 시원했습니다. 그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채 자라지 못한 검붉은 색의 그 가지 맛과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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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와 방아개비(종이에 담채, 33.2x28.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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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립중앙박물관 |
| 오늘은 얼마전 풀벌레 자수병풍 그림을 소개하며 약속했던 그림을 함께 감상하려 합니다. 위에 말씀드린 어릴 적 기억이 선명해서인지 가지를 그린 윗그림과 아래에 소개할 꽃, 풀, 벌레그림을 보는 즐거움이 무척 큽니다. 조선시대 여류문인이자 시서(詩書)화가인 신사임당(1504-1551)의 풀과 벌레를 소재로 한 그림(草蟲圖·초충도) 8점입니다.
한국적 서정과 감각, 세밀한 묘사 돋보여
아래에 보시는 것처럼 엄격하게 말하면 풀과 벌레로만 구성된 그림은 극히 드물며, 대개 채소나 과일, 꽃, 새, 나비, 곤충 등과 함께 조화를 이룬 그림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영모화(翎毛畵), 소과화(蔬果畵), 화훼화(花卉畵)라는 범주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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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임당의 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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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그림들은 <초충 8곡 병풍>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말 그대로 여덟 폭으로 된 병풍 그림입니다. 현재는 열 폭으로 꾸며져 있으며, 양 쪽 가장자리의 나머지 두 면에는 그림이 아닌 '신경'과 '오세창'의 발문(跋文)이 적혀 있습니다.
이 그림은 화면의 중앙에 곡선의 가지가 두 줄기로 좌우 대칭으로 안정적인 구도를 보이며, 줄기에 열려있는 가지의 빛깔도 곱기만 합니다. 여기에 나비와 벌, 방아개비 그리고 개미 등 곤충의 움직임이 생동감 있게 어우러져 있어 화면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각 작품들은 가지, 오이, 수박, 산차조기, 맨드라미, 원추리, 양귀비 등의 식물과 나비, 벌, 매미, 방아깨비, 사마귀, 메뚜기, 쇠똥구리, 잠자리, 하늘소, 개구리, 도마뱀, 들쥐 등과 같은 곤충이나 파충류, 동물들이 아주 단순한 구도로 어우러져 균형과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주제와 간결한 구도, 신사임당 특유의 섬세하고 여성적인 필치와 단정한 채색에 서정 어린 정취가 매우 돋보입니다.
신사임당의 성품과 작품은 잘 알려져 있으므로 그의 약력과 재능, 예술적인 환경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그 작품 세계를 함께 감상하려고 합니다. 조선 중기의 예술가인 신사임당은 시,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로서 사대부 부녀에게 요구되는 덕행과 재능을 겸비한 현모양처이자 어진 부인으로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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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박과 들쥐(종이에 담채, 33.2x28.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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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립중앙박물관 |
| 본관은 평산이며 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명화(名和)이고,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사온(思溫)의 딸입니다. 사임당은 당호(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 최고의 여성상)이며, 그 밖에 시임당(媤任堂), 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임(任)'은 '태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이자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성품을 평가한 결과입니다.
1504년인 연산군 10년,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으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한 아버지와는 16년 간이나 떨어져 살며, 아버지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문장, 바느질, 자수(刺繡)에 능숙하였으며, 특히 시문(詩文)과 그림에도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漢詩) 작품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7세 때에는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렸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와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리는 데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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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숭이와 개구리(종이에 담채, 33.2x28.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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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립중앙박물관 |
| 19세에 덕수이씨 원수(元秀)와 혼인했으며, 그 뒤 남편의 동의를 얻어 아들 없는 친정에 머물면서 서울 시댁과 율곡리를 내왕 하였습니다. 이 때 어머니로부터 여자의 도리와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납니다.
그러던 38세가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게 됩니다. 이 때 사임당은 대관령 고개를 넘으며 시 한 편을 읊으며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달랩니다.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이 시는 사임당이 38세 때 강릉 친정으로 어머님을 찾아뵙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에 오죽헌 쪽을 바라보면서 지은 글입니다.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크게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 뒤, 선조 때부터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습니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이 때 강릉에서 낳았습니다. 이이를 낳으며 꾸었던 태몽의 일화 또한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임당이 33세 되던해 이른 봄 밤, 꿈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바닷 속으로부터 살결이 백옥 같은 옥동자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였으며, 다시 그 해 12월 26일 새벽에도 검은 용이 바다로 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 문머리에 머무르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으니 그가 바로 셋째 아들 율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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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추리와 개구리(종이에 담채, 33.2x28.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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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립중앙박물관 |
| 네 아들과 세 딸을 진정한 사랑으로 키웠고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을 가지도록 엄격한 교육을 하였습니다. 사임당의 자애로운 성품과 행실을 이어 받은 칠 남매는 저마다 훌륭하게 성장하여, 모두들 인격과 학식이 뛰어났습니다. 남편에게도 올바른 길을 가도록 내조하였으며, 시부모와 친정어머니를 잘 모셔 효녀로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은 40폭 정도인데 산수, 포도, 대나무, 매화, 풀과 벌레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를 즐겨 그리고 있습니다. 또한 안견(安堅)의 영향을 받은 그녀의 화풍(畵風)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에 매우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그 관련 일화도 잘 알려져 있는데, 어린 시절의 어느 날, 사임당이 꽈리나무에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닭이 와서 그림 속의 메뚜기를 쪼아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그녀의 그림은 세밀하고 사실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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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귀비와 도마뱀(종이에 담채, 33.2x28.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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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립중앙박물관 |
| 그러나 자신의 실력을 함부로 자랑하지 않았으며 그 뛰어난 실력을 어질게 사용했습니다. 어느 날 신사임당이 잔칫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여러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마침 국을 나르던 하녀가 한 부인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 부인의 치마가 다 젖었다고 합니다.
그 부인은 가난한 사람이었고, 잔치에 입고 올 옷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새 옷을 빌려 입고 왔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그 옷을 버렸으니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이 때 신사임당이 그 부인에게 치마를 잠시 벗어 달라고 했고, 그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옷을 벗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신사임당은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치마에 얼룩져 묻어 있었던 국물 자국이 신사임당의 붓이 지나갈 때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 놀랐으며 그림이 완성되자 신사임당은 치마를 내놓으며 시장에 내다 팔아 그 돈으로 새 치마를 사게 했습니다.
신사임당의 말대로 시장에 내어 치마를 파니 새 비단 치마를 몇 벌이나 살 수 있었습니다. 신사임당의 그림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므로 그림을 사려는 사람도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은 마음을 수양하는 예술이라 생각했던 사임당은 그림을 팔아 돈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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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드라미와 쇠똥벌레(종이에 담채, 33.2x28.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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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립중앙박물관 |
|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온 뒤로, 수진방(壽進坊:지금의 수송동(壽松洞)과 청진동(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러던 이 해 여름인 1551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떠났을 때, 신사임당은 그리 많지 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사임당의 자녀들 가운데 그의 가르침과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셋째 아들 이이입니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현모로서의 사임당은 아들 이이를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을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워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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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차조기와 사마귀(종이에 담채, 33.2x28.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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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립중앙박물관 |
| 또한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습니다. 이 외에 알려진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병풍>등이 있습니다.
풀과 벌레를 소재로한 그림들 외에도 현재 채색화,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후세의 시인과 학자들은 그녀의 그림을 한결같이 극찬하고 있는데, 그윽하고 정갈하다는 평가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명종 때의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안견의 다음 간다'"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좋은 가정 환경과 학문적인 배경
이와 같이,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환경과 배경이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도록 북돋아준 것입니다. 이는 외조부의 학문에 영향을 받은 현명한 어머니의 교육과 경전이나 문집을 탐독할 수 있던 집안배경, 도량 넓은 남편과 시어머니 그리고 7세 때부터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이 신사임당으로 하여금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하게 만들었으며, 그녀의 예술 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고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 생활 속에서의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도 성숙시켰던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점에서 500년이라는 시공을 뛰어 넘어 현대에 와서도 본받을 만한 어진 어머니 상으로 칭송받는 이유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