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규(絶叫)(1부)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울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다. 갓난아기의 첫울음은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원초적인 절규이다. 그 울음이 멈추는 순간 생명은 위태로워지고, 힘찬 울음소리는 살아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된다.
어쩌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절규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기쁨과 행복만을 누리는 일이 아니라, 수많은 상실과 고통을 견디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문명의 역사인 동시에 절규의 역사이기도 하다. 전쟁과 기근, 질병과 재난, 권력의 폭력과 인간의 탐욕은 시대를 달리하며 반복되었다. 부모는 자식을 잃고 절규했고, 자식은 부모를 잃고 하늘을 원망했다. 그 절규는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언어와 모습만 달라졌을 뿐이다.
19세기 말,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겼다. 그의 대표작 절규는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다리 위에 선 한 인물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입을 벌린 채 서 있다.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 인물이 세상을 향해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뭉크」는 자신의 일기에서 “나는 자연을 가로질러 울려 퍼지는 거대한 절규를 들었다.”라고 적었다. 그렇다면 그는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뒤덮은 절규를 듣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한 문장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고통만을 절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오히려 타인의 아픔이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순간이 있다.
전쟁터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의 눈물, 병실에서 생과 사의 경계에 선 환자의 침묵, 가난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젊은이의 한숨, 홀로 남겨진 노인의 외로운 식사,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청년의 공허한 눈빛은 모두 말 없는 절규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소리 없는 울음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날 인류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풍요로운 문명을 이루었다.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인공지능은 인간의 능력을 대신하기 시작했으며, 손바닥만 한 기계 하나로 지구 반대편 사람과도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공동체는 느슨해졌으며, 관계는 편리해졌지만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다. 경제적 풍요는 삶의 의미를 대신하지 못했고, 정보의 홍수는 지혜를 보장하지 않았다. 기술은 인간을 연결했으나 마음까지는 연결하지 못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인류는 또 다른 거대한 절규 앞에 서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난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은 채 국경을 떠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숲을 베어 내고 강을 오염시켰으며, 기후 변화는 이제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일상의 현실이 되었다. 폭염과 홍수, 가뭄과 산불은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또 하나의 경고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자연을 정복했다고 자부했지만, 결국 자연의 신음 앞에서 다시 두려움을 배우고 있다. 인간의 절규와 자연의 절규가 서로 뒤엉켜 하나의 거대한 시대적 비명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절규는 현대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역사는 수많은 절규를 기억하고 있다.
초나라의 명장 「항우」는 사면초가에 몰려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사랑하는 「우희」와 마지막 술잔을 나누며 자신의 운명을 노래하였다. 그 노래는 패장의 탄식이면서도 한 인간이 자신의 생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절규였다.
그가 오강(烏江)에 이르러 끝내 강을 건너지 않은 이유는 패배를 인정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침묵은 오히려 수많은 말보다 더 큰 울림을 남겼다.
후한의 정치가이자 문장가 「가의」(賈誼)는 젊은 나이에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정치적 모함으로 유배되었다. 어느 날 부엉이가 날아드는 모습을 보고 죽음을 예감하며 『복조부』를 지었다. 그의 글에는 세상을 향한 원망보다 인간 운명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절규는 때로 고함보다 조용한 문장 속에서 더욱 절실하게 울려 퍼진다.
삼국시대의 책사 「진궁」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자신의 늙은 어머니를 부탁하는 말을 남겼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보다 가족을 먼저 걱정하는 그의 모습은 인간이 끝까지 붙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절규란 반드시 울부짖는 소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마지막 부탁도 절규가 될 수 있으며, 침묵 속에서 흘리는 눈물 또한 절규일 수 있다.
이러한 장면들을 돌아보면 절규는 인간의 나약함만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돌은 울지 않는다. 기계도 절규하지 않는다.
고통을 느끼고, 상실을 기억하며, 정의를 갈망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눈물을 흘리는 존재만이 절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절규는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언어이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 역시 절규에서 시작된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길가메시」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자각한다. 불멸을 꿈꾸며 길을 떠난 그의 여행은 결국 죽음을 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배우는 여정이었다. 고대 인류 최초의 서사시가 영웅의 승리보다 죽음 앞에서 흘린 눈물로 시작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성경의 『욥기』 역시 절규의 기록이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욥」은 하늘을 향하여 왜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는 신을 저주하기보다 끝없이 질문한다. 그 질문은 단지 한 사람의 탄식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인류가 반복해 온 근원적인 물음이다.
“왜 선한 사람에게도 고난이 찾아오는가?”, “왜 정의는 언제나 늦게 오는가?” 이러한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스 비극에서도 인간은 운명 앞에서 절규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피하려 했던 운명을 결국 스스로 이루고 말았음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눈을 찌른다. 육체의 시력을 잃는 대신 그는 비로소 인간의 한계를 보는 내면의 눈을 얻는다.
그의 절규는 신을 향한 반항이 아니라 인간이 결코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비극적 깨달음이었다.
동서양의 역사와 문학을 돌아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이다. 행복은 우리를 안주하게 만들지만, 절규는 우리를 사유하게 만든다. 평온한 삶은 지나가지만, 깊은 고통은 인간에게 삶과 죽음, 정의와 사랑, 신과 운명에 대해 묻도록 만든다. 그래서 인류의 위대한 철학과 종교, 문학은 대부분 절규의 자리에서 태어났다.
백전의 노장인 「맥아더」는 의사당에서 고별사를 남겼다. 평생을 묵묵히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그는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서서히 사라져 갈 뿐”(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이라고 하였다. 그는 점호를 알리는 병영의 나팔 소리를 떠올리면서 자신이 무대의 중심에서 물러나더라도, 군인의 명예와 국가를 위한 봉사는 영원히 남는다는 의미를 담아 연설을 끝냈다.
사실 전통과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장강(長江)은 모든 주변의 혼탁을 안고 유유히 흐른다. 누구라도 임의의 잣대로 면면히 이어 온 역사를 재단할 수 없다. 오히려 한 삽을 얹혀 소리 없는 역사의 탑을 쌓는 지혜를 발휘할 시점이다. 어떤 누구도 오랜 역사를 왜곡하는 죄인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서울의 동북에 있는 화랑대의 이전 문제로 시끄럽다. 모든 노병이 들고일어나 공감하고 절규하는 대세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격동의 시대에 헌신했던 모든 공적과 헌신을 일부의 실책으로 덮어서는 곤란하다. 「모세」의 율법에도 죄를 지은 자는 그 당사자의 처벌로 끝을 내야지 연좌하여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어떤 경우에도 전통과 교명은 변경의 대상이 아니다.
절규는 끝이 아니라 질문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만나게 된다. 다음으로 우리는 묻게 된다. 모든 절규는 과연 정당한가. 어떤 절규는 세상을 바꾸지만, 어떤 절규는 또 다른 폭력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언제 침묵해야 하며, 언제 침묵을 깨고 외쳐야 하는가. 그 물음은 우리를 절규의 본질에서 양심의 문제로 이끌어 간다.
(2026.7.6.작성/7.7.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