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鶴村公의 北道陵殿誌
1. 학촌 휘 위창조는 누구인가
학촌공 휘 昌祖(1703~1771)는 관북 입조 휘 자공(自恭)의 15대 손(관북 31世)이며 도승지공 정상(定相)의 증손, 부는 태래(泰來)이다. 1731년(영조 8 辛亥) 문과에 급제, 승정원 주서(主書)겸 성균관 학록(學錄)․보안도 찰방(察訪)․성균관 사례(司禮)․개성부 경력(經歷)․성균관 전적(典籍)․통례원 우통례(右通禮)․동부승지(同副承旨)․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 수찬(修撰)․북청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호조정랑(兵曹正郞)․호조참의(戶曹參議) 등의 요직을 거쳤다.
조선 500년 동안 남북의 장흥 위씨 가운데 당상관에 오른 인물이다. 물론 고려 말과 조선 태종 때 별시위패두를 역임한 판사공 휘 충(种)과 심양왕환일기(瀋陽往還日記)의 저자인 병조참판 휘 정철(廷喆)도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당상관은 공이 유일하지 않을까. 공은 이력이 말해주듯 28세에 문과에 급제해서 주로 학문을 관장하는 기관에서 봉직한 것으로 그 학문적 수준을 말해주고 있다. 경연참찬관이라는 직책은 조정에서도 그 지적수준이 높지 않고서는 어렵기 때문이다.
위씨가 북도의 명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통천(通川)군수를 역임하고 관북최초 미완의 족보인 기사보(1689)를 닦은 공의 증조인 정상(定相)과 형 영조(榮祖), 동생 홍조(弘祖)도 문과에 급제하면서 이루진 것이다. 마치 원감국사 3형제를 떠올리게 한 3형제의 문과급제는 보기 드물다. 한편 학촌공은 이보다 3년 전에 영조의 명으로 장헌세자(莊獻世子) 서(序)를 지어 올리니 미재경지철문성수불루(美哉卿之綴文盛水不漏)라며 忠臣이란 휘호(揮毫)를 내렸다. 그는 입조(立朝)생활이 말해주듯 문장이 대단했다.
1) 北道 陵殿誌의 內容
범례에서는 이 책의 작성 및 증보 원칙을 밝히고 있는데, 앞의 여섯 조목은 ≪북도능전지≫의 범례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대개 권4까지는 능에 관한 기록이며, 그 이후는 전과 궁에 대한 기록이다. 능전지는 조선왕조 창업자의 근거지 및 태조 선계에 대한 조선 후기의 관심의 일단을 엿볼 수 있으며, 이후 함경도의 읍지 편찬에 참고 자료로 이용되었다.
권1에 숙묘어제(肅廟御製), 당저어제서(當宁御製序), 덕릉(德陵)·안릉(安陵)·부구덕릉(附舊德陵) 신도비(神道碑), 권2에 지릉(智陵)·숙릉(淑陵) 신도비, 권3에 의릉(義陵)·순릉(純陵) 신도비, 권4에 정릉(定陵)·화릉(和陵) 신도비, 사지기비(四至記碑)가 수록되었다.
권5에 선원전(璿源殿), 권6에 경흥전(慶興殿), 권7에 본궁(本宮:함흥), 권8에 본궁(영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어 당저어필별유비(當宁御筆別諭碑)·신유동반시북민어제별유(辛酉冬頒示北民御製別諭)가 실려 있다.
권1∼4에는 주로 각 능별로 그 위치와 묻힌 사람에 대한 사항을 기재한 뒤, 고실(故實)·상설(象設)·정자각(丁字閣)·홍살문[紅箭門]·비석(碑石)·사전(祀典)·재실(齋室)·능관(陵官)·제기복(祭器服)·수호군(守護軍)·죽책문(竹冊文) 등 항목별로 해당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 중 중심을 이루는 것은 고실로서, 사적·연혁·사초(史草)·수개(修改)·중건(重建) 등의 담당자 및 필요한 물품의 조달·제사·봉심(奉審) 등의 규정과 그 변화 등을 기록하였다.
권 5∼8에서는 각 전이나 궁별로 위치와 연혁을 밝힌 뒤 정전(正殿) 또는 전우(殿宇)·고실·영정봉안(影幀奉安)·의장(儀仗)·이안실(移安室)·홍살문·전사청·사전·재실·전관·제기복·수호군·옥책문(玉冊文)·궁속(宮屬) 등의 항목을 세워 기록하였다. 또한 유적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각 능·전·궁에 대한 사실의 고증을 목적으로 한 책이다. 체재는 ≪여지승람 輿地勝覽≫을 모방했고, ≪선원보략 璿源譜略≫·≪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열성지장 列聖誌狀≫ 등을 참고 자료로 이용했으며, 세주(細註)로 전거를 표시하였다.
끝에는 편찬자인 학촌공의 지(識)와 간기(刊記)가 있는데 지금은 규장각(奎章閣) 장서목록 2794호로 소장돼 있다. 우리 족보에는 1747년(영조 23)에 편찬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2) 御製北道 陵殿誌序
「此誌卽參議魏昌祖所編輯也豐沛古蹟創業休祥開卷瞭然首錄昔年御製奉讀未半不覺涕泗之交頤頃年因儒臣筵奏始覽原本而伊後有更爲纂輯之命今日成書已盡書凡三卷編則共八敬讀釋王寺御製小識奉和篇首宸翰少伸羹墻之慕而因此有興感于心者何則爲嗣王者若念皇天眷佑之意聖祖創業之艱一言一動一政一令莫敢須臾放忽則吁嗟吾東其將永垂千億豈不休哉追慕之中略記篇首仍令編輯之臣繕寫昌祖其誰卽咸州之人也曾於兼史知其人而陞擢矣今覽纂輯其忱可嘉特令道臣鋟梓板本藏府印本封進云爾歲洪武壬申後三百六十六年孟夏中旬七日敬題通政大夫戶曹參議臣魏昌祖奉敎書」
〈해설〉임금이 지은 북도능전지서문
이 지(誌)는 곧 호조참의(戶曹參議) 위창조(魏昌祖)가 편집(編輯)한 것으로 풍패(豊沛)의 고적(古蹟)과 왕업(王業)을 이룬 길하고 상서로움이 책을 펴면서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첫머리에는 예년에 임금께서 지은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절반도 다 읽지 못해서 눈물이 턱에 이르게 되었음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근년에 유신(儒臣)들이 면전(面前)에서 주청(奏請)한 말로 인하여 처음 원본(原本)을 열람하였고 그 후 다시 자료를 모아서 책을 편찬(編纂)하도록 명하였으며 오늘에야 책을 완성하여 편찬한 내용은 여덟 편으로 묶어져 있다. 삼가 석왕사(釋王寺)에 있는 임금이 지은 소지(小識)를 읽고 편 머리에 신한(宸翰:임금의 친필)으로 갱장(羹墻:추모의뜻)의 뜻을 짧게 펴 놓았다.
이로 인해서 나의 마음에 감흥을 일으키게 함이 있었다. 왜냐하면 왕위를 계승하는 분이 만약에 황천(皇天)의 돌보아 주시는 뜻과 성조(聖祖)때 왕업을 이루기 어려웠던 점을 생각한다면 말과 행동, 정책, 명령을 할 때에도 감히 잠시라도 방심하고 소홀히 함이 없다면 아! 우리나라는 장차 그 천억(千億)년이 가도록 영원히 지켜갈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추모하는 가운데 대략 첫머리 편에 기록을 하게 되므로 인하여 편집하는 신(臣)으로 하여금 정서하게 하였으니 창조(昌祖)는 그 어떤 사람인가 하니 곧 함주(咸州)사람이다. 일찍이 겸사(兼史)로 있을 때 그 인품됨을 인증 받고 승진 발탁되었다. 이제 자료를 모아 편찬해 놓은 책을 보니 그 정성이 참으로 가상하다. 특별히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그 판본을 목판에 새기도록 하고 장판 각에 소장할 인본(印本)을 봉진(封進)하였다고 한다.
洪武壬申1392:명태조 25년)후 366년(英祖34년1758) 孟夏(음력4월) 中旬七日
通政大夫戶曹參議 臣 魏昌祖 敎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