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庚戌國恥) : 한국이 일본에 멸망하는 사건-2
7. 해외 반응 ⑴ 한일합방은 한일 외에도 전 세계에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당대는 제국주의 시대라 식민지 팽창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1908년 기준 벨기에 식민제국이나 포르투갈 식민제국보다 더 많은 2천만 인구의 단일국가가 이렇게 단번에 타국과 합병됐던 적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⑵ 물론 인도나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 같이 당대에도 조선보다 인구가 많은 식민지는 많았지만, 이들은 한 번에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아니라 제각각 따로 놀던 지역들을 점령한 뒤 합쳐 놓은 경우 또는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단계별로 잠식해 점령한 경우였다. 대표적으로 영국이 무굴 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 전역을 식민지로 삼기까지는 5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으며, 조선보다 인구가 약간 적었던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경우 일본과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열강이었던 그 프랑스조차 단번에 식민지로 만들지 못 하고 수십년 동안 야금야금 영토를 집어 먹어 베트남 전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⑶ 러시아나 청나라가 전쟁 이후 한국에서 쿨 하게 영향력을 포기한 것은 어차피 한반도 내 일본령이 아직 없는 이상 한국이 아무리 약소국이라 해도 국체나 영토는 온전히 보존할 능력은 있을 것이며 완충지로써 역할 정도는 해낼 역량이 있을 것이라는 오판 때문이었다. 러시아가 조선 분할 안을 일본에 제시한 의도도 '늬들 어차피 한반도를 다 먹지도 못할 테니 전쟁 없이 서로 간 좋게 나눠 먹자'란 바였다.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일본엔 그런 거 없었고 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물론, 전쟁 이후에도 한국의 영토 자체는 일본에 뺏긴 게 없어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고 자위나 했지만 말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 되도 그 의미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 했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한 건지 이상하리만큼 태클이 없었다. 그나마 한국이 일본에 병탄되고 나서야 부랴부랴 대비책을 마련했긴 했지만 이미 사후약방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⑷ 특히 청나라에게 준 충격은 지대했다. 과거 자신의 세력권이었던 조선이 청일전쟁 패전 후 고작 15년 만에 바다 건너 일본 땅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진시황 이래 드문드문 예외도 있긴 했지만 한국은 중국의 조공국이었고 청일전쟁의 패전으로 조선이 자기 내 영향력 휘하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도 그 예외 기간이 다시 도래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중국인 중에선 아무도 영구히 조선이 영향력 밖으로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 했다. 하지만 조선이 일본에 의해 합병 되자 적어도 당시엔 일본이 영구히 조선을 지배하리라는 예측이 팽배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중국 지식인층은 기존의 구체제가 수명이 다함을 깨닫곤 혁명을 통해 신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⑸ 사실 여태 보다시피 한국병탄은 일본에게도 굉장히 부담스러웠던 프로젝트였다. 일단, 자국 내에서도 갑작스러운 합병은 부작용을 야기한다며 갑작스러운 합병에 대해 반대파가 많았고 한국을 병탄하느니 스페인에게 전쟁을 걸어 자원이 많은 필리핀을 영유하는 게 낫다. 라고 주장하는 측도 있었다. 실제로 '갑작스러운 합병 반대파'의 주장처럼 한국이 합병된 그 해에 바로 일본에 불경기가 닥쳐오는 엄청난 부작용이 야기되었고 이는 1차 대전으로 전쟁 특수가 터지기 전까지는 회복하지 못 했다. 게다가 한일합방을 위해 일본은 미국에게 필리핀 영유를 인정하고 영국에게 인도 영유를 인정하는 여러 외교적 절차를 걸쳐야만 했다. 구미 열강이 얼마나 손쉽게 식민지를 차지했는지에 대해 고려해 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이다.
⑹ 다만 이러한 난관과는 달리, 아니 이러한 난관이 있어서 한일합방 직후 일본은 민관 모두가 축제 분위기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한을 풀었다는 등, ‘메이지 덴노는 진구황후의 재림이다’는 등 온갖 (1★)국뽕스러운 (2★)프로파간다가 남발했다. 또한, 한일 합방 이후 구미 열강들은 일본 역시 열강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돼 여태 구미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 폐기됐단 점에서 한일합방으로 인해 일본에게서 실익이 전무하진 않았다. 1★. 국뽕 : 국가와 히로뽕(philopon)의 합성어로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높여 부르는 말 2★. 프로파간다 : 어떤 것의 존재나 효능 또는 주장 따위를 남에게 설명하여 동의를 구하는 일이나 활동. 주로 사상이나 교의 따위의 선전을 이른다.
8. 여담 ⑴ 일본에서도 안중근의 의거가 워낙 유명한 고로, 이토 히로부미가 합병 반대파였으며 안중근의 의거 때문에 대한제국이 합병을 자초하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급격한 합병에 부정적이었을 뿐 합병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며 일본 내각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3개월 전인 1909년 7월에 이미 대한제국의 합병을 의결한 상태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 문서로. 즉, 온건파는 온건하게 한국을 합병하자는 쪽이었지 합병하지 말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어차피 합병은 됐을 거라는 뜻이다.
⑵ 이위종의 아버지인 이범진은 주러시아공사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이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다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자결하였다. 금산 군수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범식도 목을 매 자결하였으며 그 외에도 <매천야록>의 저자 매천 황현 등 많은 선비들이 자결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과 정미 7조약 때와는 달리 현직 고위 관료 중 자결한 이는 없었다. 한편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었다고 한다. 이는 이미 을사조약, 군대 해산, 고종 퇴위 등으로 인해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한 상황이라서다. 대조적으로 을사조약 체결 시에는 온 나라가 뒤집혔고 백성들이 "나라가 망했다"고 공포에 떨며 울부짖었다는 유생들의 기록이 있다.
⑶ 이미 일본은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후, 1907년 정미7조약을 통해 입법권과 인사권, 행정권을 장악하고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까지 장악해 중앙통치권력을 무력화 했으며, 이후 같은 해 보안법을 통해 각종 집회와 모임을 제재하여 조선인들의 회합을 차단하고, 신문지법을 통해 통감부의 방향에 반하는 언론을 원천 차단시켰다.
⑷ 이미 대한제국의 중앙군은 1907년 강제로 해산되었으며 그나마 지방 각지에서 저항하던 의병은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채응언이 이끌던 황해도 의병을 제외하고는 와해되었다. 저항 여력이 있는 세력은 이미 국외로 탈출하여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8월에는 사실상 주권을 박탈하는 서류상의 절차만 남겨둔 셈이었다. 한일병합조약 당일 시점에는 이미 일련의 피탈과정으로 인해 만연한 무력감과, 국내 저항세력부재로 1905년 을사조약 당시보다 저항이 적었으며 이에 일부 해외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아예 1905년을 시작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⑸ 이 조약으로 인하여 한국은 35년간 병합되었으며, 결국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었다. 백범 김구의 생일이기도 한데, 1925년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으로 잡아 김구의 생일상을 차려주자 안 그래도 안 좋은 날이고,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회갑연도 못 챙겨줬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후로는 생일잔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⑹ 2009년 9월에는 이명박이 2010년 "경술국치 100주년 기념으로 일왕을 국내에 초대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기념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대해 논란이 일었는데, 사실 사전에는 ‘기념은 무언가를 축하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닌 뜻 깊은 일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라는 중립적인 단어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억'의 강화 버전 혹은 영어 'commemorate/observe'에 대응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당장 전쟁기념관이나 6.25 전쟁 OO주년 기념식 같은 명칭만 봐도 알 수 있고, 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사전 설명이 그렇다는 것이지 현대 한국인들은 '기념'을 영어의 'celebrate'에 준하는 긍정적인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비율이 압도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이 문제가 될 만한 단어 선택이라는 지적이다.
⑺ 한일병합의 소식은 이웃국가인 청나라에도 상당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청나라 주일공사인 왕대섭(汪大燮)은 일본의 한국 병합이 중국 만주 지역의 정세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면서 그에 대한 대비책 마련을 촉구하는 상주문을 제출하였다. 청나라 외무부에서도 만주 지역의 안전 문제, 특히 만주 거주 한국인 문제를 걱정하면서 길림순무(吉林巡撫) 진소상(陳昭常)에게 타전하여 장춘(長春)・혼춘(渾春)・연길(延吉) 각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한국 병합 반대 움직임에 각별히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였고, 심지어 연길 거주 한국인들의 병합 반대 행동을 엄중 단속해 줄 것에 관한 주청일본공사 이쥬인 히코 키치(伊集院彦吉)의 요청마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⑻ 무엇보다 당시 청나라 황실은 '우리 역시 한국 황실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다'라는 진지한 걱정을 하였다. 이미 당시 청나라 황실도 다 쓰러져 가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선통제의 황태후인 효정경황후는 “삼한은 정말로 망하였다. 우리나라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으니 결코 상관할 수는 없지만 외국 사람들이 우리의 변경 지역을 날로 노리고 있으니 반드시 조정의 신하들과 더불어 대비책을 잘 마련하여 추호의 손실도 없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앞날을 우려했다.
⑼ 경술국치 직전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던 재순(載洵:순친왕 재풍의 동생)은 청 정부 최고 권력기관인 군기처(軍機處)로 타전하여 한일합병 관련 소식을 보고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금 알아본 데 의하면 일본인(日人)이 장차 우리에게 크게 불리한 대거동(大擧動)이 있을 것인즉 위급존망(危急存亡)이 간발(間髮)에 걸려 있다. 아국(我國)이 만약 서정(庶政)을 더 이상 개혁하지 않고 시급히 대비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전철(覆轍)을 밟게 될 것으로 걱정되니 눈앞으로 다가온 화 때문에 두렵고 절박하기가 그지없다. 재순(載洵)은 (한국병합에 대한)견문(見聞)이 누구보다도 더 확실하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진언(陳言)하니 대신 상주(上奏)해 주기 바란다.”(출처-『淸宣統朝外交史料』 卷16, 18쪽.) 이러한 황실의 우려는 바로 다음해인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10) 경술국치의 연도를 아는 한국인의 비율이 낮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14%가 알고 있다. 특히 70대 이상은 아는 사람의 비율이 5%로 극히 낮다.(갤럽 조사)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조례로 경술국치일에 조기를 달도록 규정했다.
9. 병탄 전후 일본의 움직임 9-1. 행정 ⑴ 일본은 1909년 7월의 각의에서 대한제국 병합을 방침으로 잡은 이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우선 건강상으로 골골거리던 통감 소네 아라스케를 대체해서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임명했으며, 부통감직을 신설하여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임명했다.
⑵ 이들이 제일 먼저 준비한 것은 조선을 통치할 엘리트 관료들의 모집이었다. 한일합방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얻은 일본은 즉각 대한제국의 관청과 한국통감부 조직들을 개편하여 10월 1일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직들을 흡수, 통합, 폐지시켰고 1,434명의 직원들을 해고했다.
⑶ 한국인 고등관들을 모조리 해고했으며, 각 도 관찰사들도 6명만 남기고 모두 해고했다. 당연히 빈 자리는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이 중엔 전 대만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 밑에서 대만 통치에 관여했던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었다. 이들의 실무 경력도 경력이었지만, 고다마가 데라우치와 동향 사람이라 같은 파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후일 사이온지 긴모치에 의해 무능하단 이유로 내쫓긴 인물들로 인맥, 지연, 학연으로 등용시킨 무능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고등문관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⑷ 이후 야마모토 내각은 조선의 개발을 위해 감찰관으로 내무성 지방국장 고바시 이치타를 파견했는데, 그는 "일본인 도장관들이 지극히 무능하고 상당수가 대장성 출신이라 이들 밑에선 조선이 개발되지 않을 것"이라 혹평했다. 겨우 남은 한국인 장관들도 실질적으론 허수아비라서 밑의 내무부장, 재무부장이 모든 일을 담당했고, 이에 괜히 한국인 장관들의 기분만 상할 판이니 한국인 도장관을 전폐하잔 주장도 나왔다.
9-2. 구 대한제국 황실 ⑴ 대한제국 황실은 황실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황제도 이왕(李王)이라는 봉호로 강등되었다. 일제에 적극 협력한 기존 지배층들은 조선 귀족령의 선포로 일본의 지배층에 포섭되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체제 선전과 조선인들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종과 순종을 이용했다. 특히 재위 시절 나라를 강탈당한 순종은 한국의 역대 군주 중에서 가장 많은 순행, 행행을 행해야 했다.
⑵ 물론 일제는 암묵적으로 고종과 순종을 이전처럼 일국의 군주로서는 대접을 해주었다. 일제는 경성부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에게 고종과 순종을 알현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1911년 정초와 고종의 탄신일에는 학생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여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는데, 원칙적으로 안 되는 일이었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눈감아주었다. 또한 구황실에 막대한 세비도 지급되어 1911년만 해도 150만 엔의 생활비가 지급되었고, 고종과 순종에게 당구, 담배, 영화 등의 취미 생활을 제공하는가 하면 영친왕의 일본 생활에 대한 영상물을 찍어 보여주기도 했다. 영친왕도 일본에서 일본 귀족 예우를 받으며 살았다. 1919년에는 구황실 지급 세비를 180만 엔으로 증액시켰다.
⑶ 1917년 함흥부 순행은 눈여겨볼 만한데, 이때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제의 깃발들이 휘날리기도 해서 일부 일본인을 놀라게 했다. 순행을 하는 순종도 황제 복식을 갖추었다. 게다가 함흥 주민들도 순종의 함흥 방문이 조선왕조 임금으로서는 태조 이성계 사후 처음이었기 때문에 거의 환영 일색이었다. 그러나 순종이 일본 군함을 타고 도쿄를 방문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여러모로 충격을 주었다. 고종과 순종부터 이왕의 작위와 봉록, 특혜를 거부하지 않자, 많은 구황족들도 대일 항전에 동참하지 않고 일제가 제공한 지위와 특혜에 안주하거나 몇몇은 적극적으로 일제에 부역하기도 했다.
⑷ 그와 별개로 오백년간 조선 왕조의 백성으로 살아온 이상 고종 생전에는 엄연히 복벽(復辟 : 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름.)이 우세했다. 문제는 ‘순종’. 제대로 왕 노릇 해본적도 없고, 독다사건으로 독립해도 정상적인 직무 수행이 불가능한 그가 고종을 대신 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사람은 없었고 고종의 사망을 계기로 벌어진 3.1 운동부터 공화정[共和政 : 君主(군주)가 없을 때 公卿宰相(공경재상)이 서로 和協(화협)하여 행하는 政事(정사)]을 지향하게 된다. 민족대표 33인에 유림 인사가 없는 것을 두고 황실에 실망해서 복벽을 주장하는 유림인사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유림도 당연히 끌어들이려 했다. 간재 전우(艮齋 田愚)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외국 끌어다 외국 물리치는 게 대체 무슨 의미냐며 불참했고, 기꺼이 참여하려 했던 김창숙, 김정호는 모친의 와병으로 기한을 맞추지 못해 민족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 뿐이다.
⑸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령에서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대하는 것이다.
⑹ 한편 근왕의식이 강했던 유생들 사이에서도 고종의 사망 이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해 20세기판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상복 반대파의 대표는 조긍섭으로 고종 무복설(無服說)을 주장하였는데, 명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숭정제를 들며 "망국의 책임이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자결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일제로부터 '이태왕'이라는 작위까지 받았으니 고종을 위해 상복을 입는 건 일본의 신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으로 조긍섭은 최병심 등의 상복 찬성파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되고 제자에게도 절연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 '고종은 일제로부터 독살 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라는 이유로 한발 물러서 상복을 입게 된다.
⑺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정통성이 훼손될 것을 염려해 구 황족 입국을 철저하게 막았다. 황족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보탠 것도 없었는데 증거 없는 소문은 나돌고 있어서, 일제치하에서 독립하자마자 다시 나타나 제국의 부활을 선언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애시 당초 이승만 본인이 민주주의 국가를 위한 첫걸음으로서 '제국'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이승만이 권력욕이 상당했고 실제로 독재를 저질렀으며 스스로를 '과인'이라고 부르는 등 구조선-대한제국의 낡은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그조차도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정'이어야 한다는 의식은 확고했다.
⑻ 결국 구 황족은 한반도에 상륙하지 못했으며, 이로서 구심점이 만들어질 여지조차 남기지 않아 황실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조선-대한제국을 떠난 현재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확고해진 것이다. 이후 영친왕을 비롯한 해외 구황족의 귀국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서야 가능해졌는데, 이것조차도 감사할 일로서 구황족이 그 이상, 즉 황족에게 돈을 내달라거나, 경복궁을 황족에게 제공하는 요구를 할 계제는 못되었다. 귀국조차도 세월이 흘러 구황실에 대한 한국 대중들의 악감정이 사그라들었기에 겨우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 복원에 대해 실제로 행동을 옮길 경우 국가보안법 위반이 될 가능성이 크다.
⑼ 당시의 대한제국 황실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기는 했다. 고종의 비자금도 러시아와 일제에 의해 행방이 묘연해졌기에 독립군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일제가 주는 구황실 지원금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당시 한국의 선진 지식인들 대부분이 공화정을 선호하는 추세였기에 황실과는 대립 관계라, 이들과 연대하는 것 역시 말이 안 되었다. 대표적으로 1917년 발표한 대동단결선언만 봐도 “융희 황제가 삼보( : 토지와 국민과 정치를 이르는 말)를 포기한 8월 29일은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날로서,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곧 민권이 발생한 날입니다”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