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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3편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다윗의 노래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마음을 다해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송하라.”고 합니다. 다윗의 시편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감동이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모든 고백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명령은 내가 누군가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 자신에게도 명령을 합니다.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송하라고 말입니다.
시편 중반부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그분의 사랑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높은 사랑을 묵상하면서 바람이 불면 꽃처럼 떨어지고 흔적조차 남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고 적었습니다. 사실 사람이 죽어서 백 년만 지나도 그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습니다. 사실 역사에서 사라져 간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다윗이 시편에 적은 것처럼 거의 다 마른 풀과 같이 허무하게 사라졌습니다. 5백 년 전, 1천 년 전에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게 살았어도, 우리는 지금 그들의 삶과 이름과 업적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전하고 있는 모세는 다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때가 기원전 1273년이니까 3천년이 더 지난 오늘도 전 세계 사람들은 그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믿음을 사랑하고 본받고 싶어 합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그 큰 일을 감당했어도 여호와께 한 번도 대꾸하지도 않고서 결국 약속의 땅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성품과 믿음이 얼마나 순전하고 온유했을지 정말 지금도 모세의 삶을 본받고 싶습니다.
무엇이 모세를 그렇게 만들어 주었을까요? 모세의 삶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편 103편 15절부터 18절의 말씀입니다.
정말 인간은 없어지는 들풀과 같지만, 그 먼지 같은 인간이 여호와를 경외하면 그 분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는 영원한 생명과 한 인간의 삶 이후에도 영원히 함께 하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같은 영원성에 대해서 가치를 두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믿어야 할 당연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세상 그 어떤 나라도 영원한 가치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올해가 들어서 고작 한 달이 지난 건데, 큰 일들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두렵게까지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지난 11월부터 계속된 호주 산불로 10억 마리 이상의 야생 동물들이 희생됐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중국 우환 폐렴으로 전 세계가 두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천 만의 도시가 하루 아침에 유령의 도시처럼 됐습니다. 정말 인간의 위대함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누가 분명한 회복을 말하고 누가 영원한 가치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시기를 지나면서 특별히 하나님의 지키심을 더 묵상하고 사모하게 됩니다. 성도님들이 국내에 출타하셨을 때도 한 가지 기도만 하게 되더라구요. “하나님, 성도님들을 지켜 주세요. 전염병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비행기에 타고 내리실 때도 지켜 주세요. 길을 갈 때도 지켜 주시고, 잠을 잘 때도 지켜 주세요.”하면서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얼마나 간구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그렇게 간구하게 된 이유는 딱 하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은 가장 큰 능력이 됩니다. 아무리 큰 권력과 부요함도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기적을 행했습니다. 다름 아닌 작은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모세를 부르셨을 때였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할 수 있느냐면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완강하게 하나님께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그때 모세가 대답했습니다. “지팡이입니다.” 양치기 목동들이 사용했던 작은 막대기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다가 다시 지팡이로 변하는 것을 보게 하시면서, 그 지팡이를 잡고서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4장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40년 동안 왕실에서 배운 지식을 가지고 기적을 행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의 입으로 말로 기적을 행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로 기적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막대기였고, 지팡이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지팡이로 나일 강을 쳤을 때, 나일 강 전체가 핏물로 변했습니다. 그 지팡이를 하늘로 쳐들었을 때는 하늘에서 불과 우박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지팡이를 앞으로 번쩍 향했을 때는 폭이 무려 32km 홍해 바다가 양쪽에 벽을 세우고 갈라졌습니다. 또 그 지팡이로 큰 암석을 쳤을 때는 바위가 갈라지고 그곳에서 생수가 터졌습니다. 여러분, 그뿐만이었나요? 모세가 그 지팡이를 손에 쥐고 기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 군대와 싸워서 대승을 했습니다. “지팡이로 기적을 행하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가 보셨을 텐데요. 이스탄불에 있는 톱카프 궁전 안에 가 보면요. 3천년 전 모세의 지팡이라고 해서 전시를 해 놨습니다. 스크린에 보고 계신 사진인데요. 제가 사진을 스크립해서 보여 드리는 이유는 진짜다 가짜다를 말씀 드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꼭 진짜가 아니어도 모세 당시 목동들이 사용했던 지팡이 모습으로는 볼 수 있을 거 같아서 준비를 했습니다.
모세가 사용했을 지팡이는 영화에서 봤던 크고 위엄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1미터도 안 되는 아주 작은 막대기였을 것입니다. 2백만명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가는 모세의 손을 생각해 보면 지도자의 위엄은 커녕 우스깡스럽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절대 믿고 나가지 못했다면 모세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광야에서 놀림거리가 됐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볼품도 없는 막대기 하나를 주면서 기적을 행하라고 하셨으니 모세가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모세에게 그 볼품도 없는 작은 작대기를 가지고 홍해도 가르시고, 하늘에서 만나도 내리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 볼품없는 마른막대기가 유일하게 모세가 가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왕실에서 부족한 것이 없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세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처가살이를 했습니다. 자기 재산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세가 먹고 자는 집도, 그리고 모세가 치는 양도 다 장인 어른의 소유였습니다.
정말 모세의 지팡이는 광야에서 나뭇가지를 꺾어서 만든 것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의 지팡이는 나뭇가지를 꺾어서 다듬은 정말 막대기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막대기로 기적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 막대기는 모세가 가진 전부였고, 모세 자신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집트 왕궁에서 배웠던 학문이나 지식들은 광야에서는 정말 아무 일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왕실에서 입었던 옷도 이제는 누더기 옷이 됐습니다. 그렇게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의지하게 됐을 때, 스스로 작고 볼 푼도 없는 작은 막대기가 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세가 스스로 마른 막대기처럼 되었을 때, 그때 비로서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장 20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움직이는 그 순간부터 성경은 모세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습은 똑 같은 막대기인데,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무 설레고 기쁨이 되는 장면입니다. 비록 모양은 볼 품이 없어도 이제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습니다. 이제 모세는 그 작은 지팡이를 들고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이집트에 갈 것입니다. 80세 다 늙은 노인이 40년 동안 도망자로 광야 생활을 했으니 얼마나 흰머리가 거칠게 자랐겠습니까? 그 볼품 없는 노인이 양을 칠 때나 쓰는 작은 막대기를 손에 달랑 하나 쥐고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의 모습을 성경의 눈으로 보려고 해도 민망하기까지 느껴집니다.
그런데 볼품없어 보이는 노인이 초라한 마른막대기로 나일 강을 치자, 나일 강이 핏물로 변했습니다. 그 우스깡스런 마른 막대기를 앞을 향해 내밀었을 때, 폭 32km의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 깡마른 막대기로 반석을 치자 바위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넘쳤습니다. 이런 기적이 나타난 것은 그 볼품없는 마른 막대기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배우게 됩니다. 예전과 똑같은 지팡이지만 하나님은 모세 자기의 지팡이 말고,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게 하셔서 일하게 하셨습니다. 예전에 모세의 지팡이를 들었을 때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고, 가고 싶은 대로 갔습니다. 날마다 익숙한 길로만 다녔고, 날마다 안전하기 위해서 막대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 길이 익숙하지 않고 자기가 갈 수 없는 길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지팡이가 함께 하심을 믿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하늘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변한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막대기가 상징하는 것은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서 모세는 늘 반복되는 무기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정체성의 혼란이 아주 심했을 것입니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이런 도망자의 삶은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건가? 나는 다시 왕실로 돌아가야 하나? 하면서 하루하루 사는 목적을 잃어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모두 마른 막대기와 같았습니다. 목동의 손에 잡혔을 때야 비로서 목동의 지팡이가 됐었던 것처럼 막대기만으로는 전혀 쓸모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인정받고 자신을 써 줄 수 있는 사람을 위해서 충성하면서 살아갑니다. 마른 막대기는 광야 아무데서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마른 막대기와 같던 모세가 자신의 여생을, 자신의 중심을, 자신의 온몸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을 때,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그 마른 막대기를 쓰시고 영원한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에게 무엇이 있느냐, 없느냐는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게 얼마나 많은가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막대기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이 그 막대기를 쓰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지팡이로 하나님이 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3장 6절-9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 주일 오후 성경통독을 마치고 테페쿄이 교회 온데르(가명) 목사님과 새 가족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보통은 아내가 먼저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남편이 주님을 먼저 영접하고 나온 가정입니다. 남편에게 어떻게 주님을 영접하게 됐는지 궁금해서 물어 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형제도 거룩한 책을 읽고서 주님을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거룩한 책도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과 같은 책들이 많은데요. 그 분의 경우엔 ㅋ란도 그렇고, 주석도 꽤 많이 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거룩한 책을 읽게 됐는데, 성경 속에서 참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가 되던지요. 목사님 내외와 저와 아내는 너무 신이 나서 소리 내어 찬양도 하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하면서 우리에게 너무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가정에서 찬양하고 기도해 준 첫 번째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인이 저희 부부를 계속 뚫어져라 쳐다 보는 겁니다. 저는 그 자매에게 왜 그렇게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기억 안 나세요? 저를 모르시나요?” 하는 겁니다. 사람이 대화하다가 가장 당황하는 질문이 바로 이겁니다. “저를 모르시나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기억 나질 않아서 죄송한데, 우리가 언제 만났었나요?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매는 토르발르 어느 장애인 학교에서 일하는 직원인데, 지난 번에 터키 복지제도에 대해서 취재하기 위해 자기가 일하는 장애인 학교에 왔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갑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우리가 좋은 일로 먼저 만난 적이 있어서 너무 감사했고, 사람의 계획과 프로그램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방법과 시간 안에서 현지인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도 작은 쓰임이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했고, 영이 참 기뻤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오직 하나님께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세상의 악한 것들로부터 지켜 주실 것입니다. 질병으로부터 지켜 주실 줄 믿습니다. 한 주간도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귀하게 쓰임 받는 기쁨이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0.02.09, <터키 이즈미르 한인교회 주일강단>, 설교: 임병인 목사
- 본 교회는 터키 한인교회로서, 터키인들을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매주 한인예배로 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