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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과 충돌의 디지털 미학: 컴퓨터 아트
컴퓨터 아트의 발전
◆ 컴퓨터 아트의 시작과 발전
▲ 정보 미학의 등장
초기 정보 미학과 생성 미학은 당시 쉐논(Shannon)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바탕으로 형성이 되었는데 쉐논의
이론은 모든 것들을 다 신호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이 신호라는 것이 굉장히 넓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유전자 수준에서는 유전자들끼리 서로 정보를 주고받지요. 또, 그 밖에도 통신의 영역에서
사용이 될 수가 있겠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물리학에서도 분명히 존재하고, 그런 현상들이. 아울러 인문, 사회,
과학까지, 굉장히 정보 개념과 커뮤니케이션 개념이 넓게 확산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실제로 쉐논은 상당히 정보 송신의 관점에서 아주 특수한 어떤 이론을 만들어냈지만 그 영역들이
굉장히 넓어졌습니다. 상당히 넓어져갔고, 그런 인제 흐름이 하나가 있었고, 그런 가운데서 정보 미학이라는
것이 등장하는 거죠. 쉽게 말하면 쉐논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낸 정보 개념을 미학의 영역까지 적용
시키면 어떻겠느냐 이런 발상에서 인제 미학이 시작되었던 겁니다.
▲ 컴퓨터를 이용한 예술
근데 여기서도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두 가지 문화, 쉽게 말하면 자연과학의 문화하고 인문과학의 문화를 어떻게
통합시킬까 할 때 이제 하나의 툴이 발견되었는데, 발명되었는데, 그게 바로 컴퓨터입니다. 예를 들어서 컴퓨터
를 가지고 예술을 한다고 하면 일종의 예술이라는 측면들, 정신문화의 측면이 하나가 들어오고요, 또 다른 한편
으로는 컴퓨터는 그 자체가 수학이거든요. 수학이고, 공학이기 때문에 이 둘이 통합이 될 수 있다, 이런 발상이
었겠죠.
그래서 보시면 알겠지만 어떤 경향이 있었냐면 결국 정보 미학이라는 게 1970년대 중반 쯤 되면 이제 포기가
되는데 왜냐면은 강한 환원론이 있습니다. 인문과학, 정신과학 또는 예술, 이런 술어들을 물리학적 술어 또는
수학적인 술어로 번역하는데 따른 어떤 무리가 분명히 있었던 거죠.
우리는 뭐 버코프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이런 경향들, 예를 들어가지고 미적 척도라는 것은 ‘C분의 O다,
complexity 분의 질서다‘라고 하는 것들도 어떻게 보면 사실 아름다움에 대한 척도가 아니라, 미적 척도가
아니라 단지 질서도의 측정에 불과하다는 거죠. 질서 잡힌 게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거든요. 이런 측면이
있겠고, 또, 문제가 됐던 것은 또 한편으로는 미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구별의 문제입니다.
미적인 것이 다 예술적인 것은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 미학 내에서 이런 구별이 없는 거죠.
어떻게 봐서 좀 그럴 듯해 보인다 하면 곧바로 예술로 선언해버리고, 이런 식의 개념적인 오류 같은 것들이
내재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 그래픽이, 생성미학이죠 쉽게 말하면, 컴퓨터를 이용해서 예술 작품을
생성한다는 실험은 아마 70년대에 넘어서게 되면 시들시들해집니다.
오늘날도 물론 그 후예들이 존재하죠. 오늘날 존재하는 후예들로서 예를 들어가지고 소프트웨어 아트 같은
경우에 쉽게 말하면 소프트웨어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소프트웨어가 만들어내는 게 예술작품
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소프트웨어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바라보는 관점들이, 그런 예술
형태가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아트라고요. 심지어는 이 소프트웨어 아트를 가지고 라이브 퍼포먼스를 하기도
합니다. 지금 C++ 같은 언어가 아니라 아주 간단한 프로그램 언어들이 존재합니다. 그런 간단한 프로그램 언어
를 실시간으로 이렇게 짜서 실연하는 소프트웨어 아트의 퍼포먼스까지 가능한 이런 형태가 있고요.
그 밖에도 또 이제 인공지능 아트 같은 경우, 또 인공생명 아트, 이런 것들이 존재하죠. 음렬이라든지, 화상의
분포, 이런 것들이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번식하고 증식하고 이렇게 만들어 놓은 다음에 그것을 이미지로 출력
하거나 아니면 사운드로 출력을 해서 살아서 진화하는 그림을 만들어낸다든지, 아니면 살아서 진화하는 음악
을 만들어내는 이런 방식이라든지. 아직도 여전히 알고리즘 예술이라고 하는 그런 형태로 지금까지 살아있습
니다. 근데 이제 70년대 들어와 가지고 이게 시들시들해진데 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컴퓨터의 성격 자체가 변했습니다.
▲ 컴퓨터 아트의 초기 단계
그래서 컴퓨터 아트를 크게 우리가 세 단계로 나누면 1956년부터 86년까지는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겠죠.
이 단계는 가장 간단한 겁니다. 컴퓨터라는 글자 그대로 계산기를 가지고 어떻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
이런 발상이에요. 컴퓨터라는 것은 일종의 계산기였고 거기서 그림을 그린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은 하기가
굉장히 힘든 겁니다. 도대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신기한 거거든요.
그래서 이것을,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험을 했고요, 그러다 보니까 당시의, 최초의
컴퓨터 예술가들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의 직업이 예술가가 아닙니다. 프로그래머들이에요. 공학자들이고,
엔지니어들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컴퓨터가 굉장히 귀했기 때문에 아무데나 있는 게 아니라 연구소에 한
대씩 있는, 그 다음에 방 한 가득 있거나, 이런 정도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컴퓨터 자체도 많지 않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나아가지고, 컴퓨터에 접근하더
라도 또한 컴퓨터를 다뤄야 하거든요.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극소수였고,
바로 이 극소수 사람들 중의 일부가 컴퓨터 예술을 실험을 했던 겁니다.
우리가 대표적인 사람이 허버트 프랑케 이런 사람 봤고요, 또 게오르그 네스, 프리도 나케, 마이클 노올 같은
소위 컴퓨터 그래픽의 3N. 어떻게 보면 이 사람들이 만든 작품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원시적이고
또, 소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중요하냐면 이 사람들이 컴퓨터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단 말이죠.
이걸 위해서 이 사람들은 프로그램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 이런 실험들을 통해서 뭐가 만들어지냐면,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는 거죠.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면 인간과 컴퓨터 사이에 인터페이스가 생겨버리는 것이고
굳이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아도 소프트웨어만 가지고, 매뉴얼을 가지고,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라는
것이죠. 그런 시대가 이제 80년대에 열리는 겁니다.
▲ 컴퓨터 아트의 발전 단계
이제. 그 다음에 80년대쯤 되면 이미 매킨토시에서 PC라는 게 이미 나온 지 꽤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또 항상
그렇듯이 예술가들, 특히 조형예술가 뿐 아니라 디자이너라든지, 건축가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첨단 미디어의
최초 얼리어댑터의 역할을 합니다. 그 사람들이 제일 먼저 사용을 해요. 굉장히 당시로서는 아직까지도 하드
웨어가 상당히 비싸고, 소프트웨어도 상당히 비쌌지만 우리가 말하는 하이엔드 모델들이죠.
그런 것들을 이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거고, 그래서 인제 이미지 형성의 툴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대충 기점을 보면 1986년도부터인데, 이걸 우리가 흔히 페인트박스단계라고 하죠. 쉽게 말하면 페인트 박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툴들이 소프트웨어의 형태로 개발이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포토샵 같은 경우, 화상처리
소프트웨어로 이제 개발이 됩니다. 그 전에는 이런 걸 하기 위해서 다 뭐해야 하냐면 프로그래밍을 직접 해야
했었는데 이제는 소프트웨어만 가지고 되는 거죠. 상당수의 예술가들이 이제 그걸 끌어들여가지고 자기의 작품
을 만드는데 활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컴퓨터가 비쌌습니다. 하드웨어도 비쌌고요. PC라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소프트웨어도
상당히 비쌌습니다. 오늘에야 뭐 페인트박스라든지 포토샵 같은 거 대충 하나 사면 끼워주잖아요. 번들로.
당시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비싸고요. 지금도 아마 상당히 비싼, 대중들이 이미 어떤 소프트웨어를
사게 됐다, 대중화 됐다, 그러면 아마 제가 볼 때는 기술적으로 3~4년 뒤진 겁니다, 그게. 그 누군가는,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은 지금도, 지금 이미, 3~4년 앞선 어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사용하고 있는 거죠.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1986년부터 96년까지는, 10년 사이에는 대개 아티스트들이 끼어들어요. 그러니까 주력이 바뀌는 거죠.
그전까지만 해도 엔지니어들이 만든 것들은 사실 예술성은 상당히 떨어집니다. 왜냐면 그 프로그램을 직접
하는데 의의를 두었기 때문에 예술성까지 발휘할 여유가 있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 자체가 예술 쪽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잘해야 딜레탕트 수준이었다는 말이죠.
하지만 86년 이후로는 정말로 제대로 훈련을 거친, 예술적 훈련을 거친 예술가들이 들어와서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어내고, 그때부터 우린 비로소 상당히 예술적 가치를 갖는 작품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리고 사실 1956년부터 또 86년까지 사이의 작품들은 많이 보존이 안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왜 그러냐하면
이 사람들이 그것의 예술적 가치를 스스로 인정을 하지 않았고, 또 그들이 출력, 오늘날이야 출력기술도 엄청
나게 발달 되었지만 아카이벌 퀄리티, 쉽게 말하면 작품으로서 보존할만한 퀄러티를 갖는 출력 장치도 많은
경우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일종의 도큐먼트로 남아있거나, 도큐먼트로 남아있지도 않은 상태가 되었
는데, 이제는 아카이벌 퀄리티를 갖고 있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엡손 프린터 같은 것들이 등장해가지고 작품
과 같은 퀄러티를 갖는, 이제 출력이 가능해지면서 본격적인 예술이 시작된 겁니다.
▲ 컴퓨터 아트의 한계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뭔가 아쉬운 점이 있는데 그건 뭐냐면 뭔가 좀 달아나버렸다는 느낌이 좀 들어요.
그건 뭐냐면 초기 컴퓨터 예술은 이 사람들이 프로그래밍을 했거든요. 가장 디지털이라는 게 가장 핵심적인 게
바로 뭐냐면 문자, 숫자를 쳐가지고 그걸 이미지로 실현하는, 문자와.. 알파 뉴머리코드의 변형, 알파 뉴머리
코드를 가지고 거기다 이미지를 얹어내는 이런 측면들. 쉽게 말하면 ‘내가 프로그램 이렇게 짜면 이미지가
어떻게 나올 것이다’ 이런 것의 어떤 직접적인 연결들. 그런 것이 굉장히 매력적인데, 그게 이제 사라져버리는
거죠. 왜냐면 프로그램을 몰라도 이미지를 만들 수가 있다는 겁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것도 있을 수 있겠죠. 쉽게 말하면 초기의 생성 미학 같은 경우에는 컴퓨터가 예술적
인 주체가 되거든요, 상당 부분. 많은 경우 미적 결정을 컴퓨터한테 맡겨버리는데 이제는 철저하게 컴퓨터가
뭐가 되는 겁니까. 예술가가 미적 결정권을 쥐기 때문에 컴퓨터는 그 툴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죠.
컴퓨터가 예술성을 갖는가, 이런 것. 쉽게 말하면 인간의 창조성을 기계를 통해 시뮬레이션 한다는 이런 이론
적인 매력이 상당히 떨어져버린 겁니다. 오늘날까지도 아직까지도 가와노 히로시 같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그렇게 주장을 하죠. “요즘 말하는 컴퓨터 예술을 가짜다.” 왜? 그건 인간이 주체가 되는 거고, 컴퓨터를 툴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가짜고 진짜 컴퓨터 예술은 그 미적 결정을 컴퓨터한테 맡겨버린다는 겁니다.
프로그램은 인간이 했지만 프로그램 자체, 프로그램 내의 미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 의지까지도 입력이 된,
이런 것이야말로 진짜 컴퓨터 예술이라는 것이고요. 그에 반해서 소위 우리가 이제 둘로 나눈다면 컴퓨터
제너레이티드 아트(generated art) 컴퓨터가 생성을 하는 예술작품과 컴퓨터를 그냥 도구로만 사용하는,
컴퓨터 어시스티드 아트(assisted art) 라고 했을 때 86년 이후로 이제 거의 컴퓨터 생성 예술의 시대는 지나고
이제 컴퓨터 어시스티드 아트가 이제 주력으로 등장한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한 어떤 노스탤지가 있는 겁니다.
“이것은 가짜다. 이건 가짜 컴퓨터 예술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게 1986년도의 상황입니다.
▲ 아날로그와 디지털, 디지털 매체의 자각
그리고 1986년도에서 96년도까지 그 10년 사이에는 컴퓨터 예술의 특성들을 가만히 보면 어떤 특성이 있냐면,
이게 디지털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이미지를 보면, 디지털 이미지를 강조 한다기 보다는 가능
한 한 아날로그를 흉내 내려고 해요. 왜 그러냐면 어떤 예술이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으려고 하면 이미 제도권
에서 설정해 놓은 낡은 기준에 맞아야 되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사실상 그 컴퓨터 아트라는 것은, 미디어 아트라는 것은 사실 주변적인 현상입니다. 전체적,
예술적인 풍경 내에서 상당히 주변적인 현상에 불과하거든요. 그런데 당시로서는 오죽했겠냐는 거죠.
그러니까 이걸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아날로그로 그린 그림처럼 보이려고 애를 쓴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디지털의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기 보다도, 오히려 아날로그적 속성들을 내세움으로써 “우리도 작품
이다” 이렇게 주장한다는 겁니다. 우리도 너희와 똑같은 작품이야, 이렇게 주장한다는 거죠.
하지만 1986년에서 뒤로 점점 가면 갈수록 이게 아날로그로 만든 이미지하고 디지털로 만든 이미지가 차이가
분명히 나거든요. 우리는 금방 아실 겁니다. 디지털 느낌이라는 게 뭔가 매끈한 이미지들 있죠. 매끈한 이미지
들. 질감이 없고, 뭔가 매끈하고. 그래서 뭔가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그런 이미지인데, 바로 그런 것들을
오히려 강조하는, 쉽게 말하면 디지털이 자기 자신의 매체성에 대한 자각에 도달하는 거죠 서서히.
굳이 아날로그로 할 수 있다 하면 굳이 뭐 하러 컴퓨터를 이용해서 하느냐는거에요. 한마디로. 예를 들어가지고
컴퓨터를 이용해서 정말 회화처럼 뽑을 수가 있거든요. 수채화처럼 그릴 수 있거든요. 근데 그럴 바에는 정말
수채화로 그림을 그리는 게 비용도 덜 들고 시간도 덜 들어요. 그럼 굳이 컴퓨터로 하려고 하면 굉장히 많은
소프트웨어적인 지식과 거기다 그야말로 흔히 말하는 노가다에 가까운 수작업들이 필요한데, 뭐 하러 그 짓을
하나라는 거거든요. 그럴 바에는 아날로그를 가지고 할 수 없는 쪽으로 나가자, 라고 하면서 후기로 가면 갈수록
디지털스러운 이미지가 강하게, 디지털임을 그대로 주장하는 그런 경향들을 보이게 되는 거죠. 그건 어느 경우
나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뭘 흉내 내요? 연극을 흉내 내죠? 사진도 처음 나왔을 때 뭘 흉내 냅니까?
회화를 흉내 내죠? 그러다 어느 정도 지나면, 아니다, 사진은 회화가 아니다해서 사진의 고유성을 찾아가고.
처음에 영화는 연극 막 올리듯이 막이 내려가면 커트, 이랬거든요. 처음엔 그렇게 찍습니다. 그래서 첫 초기
영화 같은 경우에는 커트가 뭐랑 일치 하냐면 막이 내리는 거랑 일치하거든요.
근데 그게 아니다, 그런 인식을 가지고 영화와 고유의 언어를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트도 처음
에는 아날로그 회화, 아날로그 드로잉, 또는 아날로그 조각 이런 걸 흉내 내다가 나중에 후기로 가면 갈수록
훨씬 더 강하게 디지털 자신의 매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 디지털의 매체성을 부각시키는 예술
그러면 1996년부터는 완전히 또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왜냐하면 1996년부터 우리가 이제 주목해야 될 것은
컴퓨터의 성격이 또 다시 변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1956년부터 변하기 시작했던 것은 뭐냐면 컴퓨터가 단지
계산기가 아니라 컴퓨터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 화상을 처리할 수 있다,
이런 발상이었죠.
1986년도에는 그걸 갖다가 프로그래밍이 아닌 무얼 위해서, 프로그래밍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로 그걸 할 수
있게 됐다라는 거죠. 그 다음에 이제 전문가가 아닌, 컴퓨터 전문가가 아닌, 컴퓨터 공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예술가들까지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측면이었다는 말입니다. 1996년에 들어가면 소위 그
디지털의 특성이라는 게 전면화됩니다. 그럼, 뭐냐면 world wide web, www가 됩니다. 쉽게 말하면 통신매체
가 되는 겁니다.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되어버리거든요, 이게.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띠게 되는 거죠.
그 전의 컴퓨터는 고독하게 뭐였습니까, 계산기였습니다. 또는 문서작성기였어요. 그러다가 이 사람들이,
그 다음에 이제 뭐가 되는 겁니까, 컴퓨터가 영상을 처리하는 그런 장치였죠. 그런데 이게 전화선하고 연결되고,
모뎀으로, 그 다음에 초고속망이 깔리면서 완전 통신수단이 되어버리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 전엔 아날
로그로서는 불가능했던 그런 예술들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웹아트 같은 경우, 오로지 웹상에만 존재하는 아트겠죠. 그 다음에 넷아트, 네트워크를 통해서
아트를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수많은 유저들이 한꺼번에 실시간으로 만나서 작품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한다
든지, 이런 것들. 이런 가능성들.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한마디로 디지털이 갖고 있는 그 특성들이 전면화되는
것이 바로 96년 이후라는 겁니다.
96년까지, 86년에서 96년까지만 해도 주로 컴퓨터를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 그 정도에요. 또는 컴퓨터를 가지고
조각을 한다. 하지만 컴퓨터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고, 컴퓨터를 가지고 조각을 한다라는 것은 작가가 컴퓨터 한
대 가지고 방 안에서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죠? 고립된 겁니다.
그런데 이제 컴퓨터가 고립된 게 아니라, 망으로 네트워크로 하게 되면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가능성들이
열리게 되는 거죠. 1996년도부터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멀티미디어의 특성들이 다 드러납니다. 컴퓨터가 이제
모든 매체들을 다, 컴퓨터는 메타 매체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으로 영화를 볼 수 있죠, 또 그것으로 뭘 할 수 있습
니까, 그것으로 라디오를 들을 수 있고, 텔레비전을 볼 수 있고, 그림을 그릴 수가 있고, 조각을 할 수 있고,
디자인을 할 수 있습니다. 설계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의 성격을 갖고 있고요.
그 다음, 네트워크입니다. 다 연결되어서, 소위 원격 현전과 같은, 원격 텔레 프레전스 같은 것들을 실현할 수가
있게 되는 거구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몰입, 쉽게 말하면 가상현실이라고 그러죠. 가상현실이라든지, 이런 식
으로 96년 이후로는 사실 미디어 아트를 보게 되면 기존의 장르들을 디지털로 바꾸어 놓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이기 때문에 비로소 등장한 장르들이 있어요.
디지털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던 그런 장르들, 좀 전에 얘기했던 데이터베이스 아트, 소프트웨어 아트라든지,
넷 아트라든지, 웹 아트 같은 것들, 또는 가상현실, 이런 것들을 바로 그 디지털이기 때문에 가능한 예술 장르
들이거든요. 1996년 이후로는 그게 막 이제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디지털 아트가, 컴퓨터 아트가 본연의
자기 매체성을 충분히 발휘하는 시대가 되어버린거죠.
그 다음 또 다른 하나의 변화는 뭐냐면 1996년도 이후부터는 컴퓨터가 이게 굉장히 대중화되어서는 쉽게 말
하면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툴이 아니라 뭡니까, 가전제품이 되어버려요. 사실 컴퓨터라는 건 뭡니까, 요즘,
재미있게도 뭐냐면, 이 컴퓨터라는 것은 이 시대에 들어오게 되면 놀이의 도구하고, 노동의 도구가 같아져요.
사람들은 컴퓨터를 가지고 일을 하지만 요즘은 컴퓨터를 가지고 놉니다. 이게 일종의 필수불가결한 가전제품이
되어가지고 대중들이 그걸 다 하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미지를 처리하고, 이미지를 가지고 장난하고
이러는 것들이 소위 웹 2.0 시대죠. 그 이후로는 대중한테 넘어가게 되는 겁니다.
이제. 컴퓨터를 가지고 이미지를 처리한다, 또는 사운드를 처리한다, 이게 이제 과거에는 소수 예술가들만의
일이었다면 이제, 대중의 일상이 되어버렸다는거죠. 그러니까 완벽하게 디지털이 갖고 있는 민주주의적 가능성
이라는 게 완벽하게 실현이 되는 거죠. 96년도 이후로는. 그 다음에 디지털이 갖고 있는 멀티미디어의 속성들,
이런 것들이 전면화 되는게 바로 1996년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시대입니다.
▲ 디지털 시대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시기를 둘 수 있다면, 아마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거예요. 최근에는 포스트 디지털 이어러
(post-digital era)라고, 디지털 시대도 지났다는 거예요. 디지털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
디지털 시대가 지났다라는 것은 더 이상은 디지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디지털이 아닌 게 없기 때문에.
그것은 무슨 얘기냐 하면 초기에 아날로그 매체가 지배하던 시대에 디지털이 나왔을 때는 디지털이 자기 매체의
고유성을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의식을 강하게 해요. ‘나는 왜 쟤랑 다를까’, 그래서 그 열등의식 때문에 아날
로그를 흉내 내려고 하다가 나중엔 자의식을 갖고 ‘아니다, 흉내 낼 필요 없다, 내 길을 가겠다’, 이런 의식이 존재
하거든요. 하지만 이제 전체가 다 디지털화 됐을 경우에는 그런 자의식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는 겁니다.
차이가 이제 사라져버린다는거죠. 그걸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뭐냐면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태어나가지고 본 게 디지털 밖에 없는 그런 시대가 등장하는 겁니다. 아마 지금쯤 미대에 들어와
가지고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에 뛰어드는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아날로그 체험을 안 하고 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어려서부터 컴퓨터 게임하고 자라가지고. 어려서부터 컴퓨터 포토샵을 하고, 이래가지고 미대를 와버렸다는 거죠.
아날로그의 기억이 전혀 없는, 완벽하게 디지털 문화에서만 자란 세대가 등장한다라는 거죠. 그랬을 경우에,
이 세대들 같은 경우에는 아날로그에 대비되는 디지털의 매체적 특성, 이걸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아마 이제 그런 단계가 이제 포스트 디지털 이어러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 디지털을 이용한 아날로그 재현
자, 이제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관점에 대해서 두 가지 입장이 가능하겠죠.
좀 전에 우리가 그런 얘기를 했죠. 하나는, 아날로그를 따라가는 것과, 또 하나는 아날로그와 선을 분명하게 긋고,
디지털 고유의 가능성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거죠.
철학적으로 보면 이제 여기서 두 가지 입장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빌렘 플루서 같은 사람이에요. 빌렘 플루서는
뭐라고 얘기 하냐면, 가상과 실제 사이의 구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라고 얘기합니다. 이 사람은 디지털을
일종의 목적론이라고 봐야 되나요,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갭이 점점 사라
지는 것으로 이렇게 파악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언젠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갭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때 세계는 가상만큼 그 때 현실은 가상만큼 도깨비처럼 유령스러워지고, 그 때 가상은 현실만큼 딱딱해질
것이다. 뒤섞여 버린다는 거죠.
이 사람은 그런 얘기를 하는데 이제 이론적인 바탕이 있습니다. 사실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를 메우는
방법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진의 예를 들어보면, 예컨대, 디지털 사진과 아날로그 사진, 디지털화는 우리
는 픽셀로 처리하기 때문에 픽셀의 거칠음으로 아마 인식이 될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제록스에서, 제록스 로고
있잖아요, X 부분을 픽셀로 처리했죠. 이런 것들.
왜냐면 그 메모리의 문제가 있고, 또, 처리 속도의 문제가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한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디지털로 아날로그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는 한동안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메우는 방법은
뭐냐, 촘촘하게 배치하는 거죠. 아날로그하고 디지털은 원리가 달라요, 이미지 만드는 원리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아날로그 같은 경우에는 이미지를 만드는 원리 자체가 선이에요. 우리가 그러잖아요. 그림을 그릴 때
드로잉을 하잖아요. 드로잉을 한 다음에 보통 채색을 하잖아요. 이게 이제 아날로그적 그림을 만드는 방법입
니다.
그런데 디지털은 특히 그 이전에 뭐, 텔레비전부터 이미 그랬지만 전자매체 같은 경우, 특히 디지털에 들어와
가지고 선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단위가 선이 아니라 그냥 점입니다. 픽셀이거든요. 그러니까 점은 단절돼
있어요. 선은 이어져있지만 점은 단절돼 있단 말이죠. 이 단절된 점을 잇는다는 거예요.
잇는 방법은 뭐냐, 촘촘하게 배치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어떤 그 단위 화상, 단위, 한 단위
내에 대개 500만 픽셀정도면 그렇게 출력을 했을 때 사람이 아날로그로 찍은 것인지 디지털로 찍은 것인지
구별이 안 된다고들 흔히 합니다. 대게 500만 픽셀 정도면 인간이 지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거죠. 물론 필름을 가지고 대형 출력을 하거나 이럴 경우에는 아직까지도 디지털이 상당히 아마 딸릴 거예요.
엄청난 정보량, 그 아마 당해내지를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이미 벌써 우리가 몇 년 전에 1000만 픽셀을 다 도달
했거든요. 요즘 뭐 거의 카메라는 적어도 사진의 영역에서는 상당부분 차이가 사라졌습니다. 단적인 예는
코닥이라든지 아그파라든지. 아날로그 필름을 만드는 회사들이 이제 망해가는 거예요. 그러니깐 쉽게 말하면
셀룰로이드가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셀룰로이드가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필름 사는 사람들 없죠, 다 디지털로
찍는단 말이죠. 사진작가들 뿐 아니라, 물론 아직도 고집스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진은 역시 필름으로 찍
어야 돼’, 이런 사람들. 그건 뭐냐면 CD 나오기 전에, ‘역시 녹음기는, 뭐야 ,음악은 LP로 들어야해’, 그 당시
에는 꽤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 요즘 있어요, 없어요, 거의 없죠.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진도 초기 단계에는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겠지만, 사실은 이제 완전 거의 넘어갔다고
보면 됩니다. 이건 이제 그만큼 메워졌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여길 보면, 세계를 뭐로 보느냐, 컨티뉴이티
(continuity)로 보느냐, 디스컨티뉴이티(dis-continuity)로 보느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아날로그 세계는 컨티뉴이티에요. 쉽게 말하면 세계는 연속량입니다. 반면에 디지털은 0과 1, 딱딱
떨어지거든요. 디스컨티뉴이티입니다. 이 아날로그의 컨티뉴이티와 디지털의 디스컨티뉴이티, 이것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 빌렘 플루서는 이미 17세기에 이론적으로는 계발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뭐냐면 미분하고 적분이에요. 미분, 적분이라는 거죠. 우리가 세계를 갖다가, 세계를 세계 진행을
예측하고 또는 세계 진행에 기술적으로 개입할 수 있으려면 일단은 세계를 수로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하다
못해, 이명박씨처럼 무식하게 삽질을 하다 할지라도, 운하 판다고. 운하의 수심 같은 것 다 수치로 바꾸어 놓
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을 할 수 없는 겁니다. 근데 자연을 수학화 할 때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그거에요. 자연은 연속량인데 반해서 수는 단절적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다 보니깐, 자연에다가 수를 갖다
대면은 이 수의 빈틈으로 자연이 빠져 나가 버려요. 남김없이 파악이 안 되는 거거든요. 그 때, 그 수와 수의
사이를 메우는 방법이 바로 무한히 미소하게 잘라 나가고, 또는 무한히 붙여 나가는, 미분, 적분의 방법이었다는
거죠. 그게 이미 원리적으로 발명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을 컴퓨터를 이용해서 수학화 하는 게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겁니다.
컴퓨터의 등장이라는 것은 또 다른 한편으로 뭐냐면, 옛날에는 미분, 적분 손으로 계산했잖아요, 근데 웬만큼
유의미한 계산들 같은 경우에는 인간이 연필 들고 시작하면 평생 걸려도 안 끝나요, 이 계산이. 그런 계산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컴퓨터가 등장함으로써 사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갭을 메워주는 과제는 이론적
으로도 17세기에 완수되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 실천적으로도 완수가 되었다는 겁니다.
◆ 디지털을 이용한 예술들
▲ 컴퓨터 네트워킹
그 다음에 최근에는 이제 병렬 분산형이라는거 있죠. 컴퓨터 여러 대를 네트워크로 이용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라
든지, 그런 방법이라든지. 왜냐하면 컴퓨터라는 것도 기본적으로 선형적인, 플롯차트에 따라서 움직이거든요.
이게, 쭉 가다 피드백이잖아요. 예스, 노, 그 다음에 다시 올라가고, 이런 식인데. 인간의 사고라는 건 그게
아니라 굉장히, 뭐랄까 공간적으로 무차별적으로 랜덤하게 액세스(access)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것들을
이제 비선형적인 컴퓨터 네트워킹 같은 것들, 그런 기술들을 이제 개발하고 있거든요.
▲ 디지털에 대한 빌렘 플루서의 견해
근데, 이제 문제점은 그게 아니라, 데카르트는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데, 데카르트 같은 경우는 원자론
을 부정한 사람이에요. 데카르트는 원자론을 부정했습니다. 세상은 원자로 나눠져 있는 게 아니라고 하거든요.
그것은 바로 아날로그적 사고방식이에요. 모든게 선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거죠. 하지만은 이 사람, 빌렘 플루서
는 뭐라고 하냐면 데카르트적 세계관은 이미 무너졌다는 겁니다. 왜, 오늘날, 우리는 오래전에 이미 원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원자도 더 쪼개가지고 미립자를 이야기한다는 거거든요. 우리가 볼 때는 다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이것들이 뭐로 되어있는 것 입니까, 미소한 미립자의 조합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세계하고 그 다음에 디지털하고 원리적 차이는 애초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쪽도 입자고
이쪽도 픽셀 아니냐. 입자를 조합해가지고 뭔가 다양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생성된다라고 하면,
픽셀을 조합해가지고 또한 모든 것들을 생성해 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대한 빌렘 플루서의 견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지금 보면, 지금 전송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감각 중에서 쉽게 두 가지입니다.
시각정보하고 뭐에요, 청각정보만이거든요. 거기다가 이제 뭐 최근들어가지고 터칭글라브라고 해서 촉각정보
를 전달한다던지, 심지어는 최근에 들어서는 맛과 냄새, 이런 식으로 그, 전송이 이뤄지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아날로그의 충실성을 디지털이 따라가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빌렘 플루서가 볼 때 이건 계속 시간의 문제라는 거죠. 언젠가 계속 따라갈 것이고, 정말로 그, 촘촘함
들, 쉽게 말하면 아날로그의 그 촘촘함, 디지털의 그 느슨함. 이 사이의 차이는 점점 사라질 것이란 거죠.
그럼 결국 어떻게 되느냐. 이 사람이 얘기할 때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가상과 실제의 차이라는 것은 질적
차이가 절대 아니라는 거죠. 보세요. 어차피 실제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도 픽셀로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점,
미립자로. 그 다음에 가상으로 부르는 이쪽, 디지털도 역시 픽셀로 이루어졌다는 거죠. 원리적으로 같다는 것
입니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 질적 차이가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가상과 실제의 차이라고 우리가
흔히 부르는 것은 뭐냐면, 질적 차이가 아니라 양적 차이라는 것이죠. 뭐냐 해상도 차이라는 것입니다.
해상도 차이라는 것이죠. 밀도의 차이라는 것이고. 기술이 계속 발전하면서 그 밀도를 높여 나가면서 가상과,
디지털 가상과 아날로그 현실 사이에 차이점은 점점 줄어들고 구별할 수가 없게 되는 단계, 거기에 이르게
되면, 그 때는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그 때의 현실은 가상처럼 유령으로 변할 것이며, 가상만큼의 유령으로
변할 것이고, 그 때 가상은 현실만큼 딱딱해 질 것이다. 그런 상태에 도달한다. 이게 빌렘 플루서의 생각입니다.
플루서가 이래가지고 도대체 뭘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서 아마도 여러분들 스타트랙인가 보면,
공간하잖아요, 스캔 미(Scan me)하면 한사람 찌익 스캐닝해가지고 다른 장소로 옮겨 놓잖아요. 그런 것들,
전송들, 이런 것들은 완전 입자 구조를 다 바꿔가지고 스캔해서 그걸 다시 배열해가지고 저쪽에다가 옮겨 놓는.
지금 물리학에서는 입자, 아주 미립자 수준에서는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하나의 미립자를 저쪽으로
옮겨 놓는 것. 전송하는 것. 그 다음에 요걸 하나를 옮겨서 세 군데에 동시에 나타나게 하는 것. 여기까지 가능
하다고 하는데, 뭐 세포 하나를 옮기는 데 지금 시간으로는 10만년 걸린다나 뭐, 그런 사소한 기술적 문제는
있지만. 거기까지 이야기하는 건 모르겠습니다. 빌렘 플루서의 말을 굉장히 강하게 해석하면 거기까지 해석할
수 있는 거예요.
언젠가, 실제로 빌렘 플루서가 그런 말을 합니다. 생물학도 옛날에는 동물 분류에서 쭉 내려왔잖아요. 쭉 내려
와서 지금 어디까지 왔냐면 세포 생물학까지 갔다가 이제 어디까지 갔냐면 분자 생물학까지 갔거든요.
DNA 이런 거 까지. 물리학도 옛날에는 그냥 그렇죠. 뉴턴 물리학만 해도 당구장 물리학이잖아요. 이러다 최근
어디까지 갔냐면 완전 미립자까지 갔단 말이죠. 모든 영역에서 다 미소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건 뭐냐면 지금
도 공학에서는 어디까지 갔습니까, 기계 만드는 수준에서 나노수준까지 갔단 말이에요. 미세조작이 가능해
진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스티븐 홀츠만의 견해
반면에 또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첫 번째 스티븐 홀츠만이라는 사람의 『디지털 모자이크』라는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깐 천구백구십 몇 년에 나왔는데 94년에 나온 책으로 알고 있습
니다. 1994년에 나왔습니다. 바로 그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 주는 거예요. 그건 뭐냐면 디지털이 아날로그와는
다르다는 자의식을 했을 때 있죠. 바로 그 시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책에서 이 사람이 주장하기를 디지털 기술로 아날로그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디지털은 아날로그가 할 수 있는 길을 허겁지겁 따라가서 하는 게 아니라 아날로그가 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나아
가야 된다. 그러니깐 이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하는 데에는 아마도 모더니즘 미술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즘론
클레멘트 그린버그라는 사람이 있어요. 물론 이제 스티븐 홀츠만은 재스퍼 존스의 예를 드는데 재스퍼 존스보다
더 내려가다 보면 이제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즘론입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회화에서, 또는 예술에서
모더니티의 문제, 뭐가 현대적이냐, 그 기준을 뭐라고 하냐면 자기 지시성으로 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칸트가
세계를 탐구하기 이전에 세계를 탐구하는 수단이었던 이성부터 비판하잖아요. 그게 바로 현대성, 현대적 태도인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에서. 회화에서도 회화적인 재료를 가지고, 회화적인 도구를 가지고 형과 색채를 가지고
바깥에 있는 자연을 탐구하기 이전에 형과 색 자체를 탐구하는 것. 그걸 점검하는 것. 모더니티 태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지시성이에요. 또는 반성성, reflexity 라고 하죠, 반성적인 것인. 이걸 갖고 현대 회화의 특성으로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자연을 닮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가 자기 매체성을 인식하고 자기 매체성을 탐구하는,
매체성을 들어내는 가상이라는 느낌보다는 이건 그림이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것. 그렇기 때문에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그렇기 때문에 그림이라는 건 3차원 공간에 환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자연으로 착각
이 되거든요. 그럼 환영이 없고, 회화는 몇 차원 예술이냐면 3차원 예술이 아니라 2차원 예술이다, 평면 예술
이다, 그러니깐 평면성을 강조하는 플랫니스(flatness)를 강조합니다. 회화는 회화여야 된다. 회화는 회화 자기
자신의 매체성을 투명하게 사라져서 자연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매체성을 들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현대 회화다, 라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니깐 디지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죠, 이 사람은. 그걸 받아들여가지고 디지털도 자기
자신을 디지털 기술, 디지털이란 느낌을 사라지게 하고 아날로그 자연의 환영을 준다라기 보다도 디지털의 특성
을 그대로 강하게 드러내라는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온당한 미학이다라고 주장하는 거죠.
▲ 디지털로 할 수 있는 예술 1
디지털로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말했던 것,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 그걸 갖다가 이미 우리는 흔히 결성태로 파악을 하는 겁니다. 즉, 디지털이 아날로그
보다 못해, 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근데 그 결성태를 미학적 장점으로 바꿔놓을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이 사람이 미스트(myst)라는 게임 얘기를 하거든요. 미스트라는 게임을 딱 보게 되면 3차원
공간의 환영이 있는데 이게 아날로그랑 전혀 다릅니다. 어떤 거냐면, 현실감이 안 나요. 왜냐, 아날로그로 딱
찍었을 경우에는 저 멀리서 보이는 것 색원근법에 의해서 뭐가돼요 이게, 색원근법에 의해서 흐려 보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것은 선명해보이거든요. 근데 디지털은 그걸 못하거든요. 왜냐면 공기 중에 있는 그 입자들을
처리해야하는데 아직 그게 안 되니까 미스트 게임을 보면 멀리 있는 거나, 여기 있는 거나 거의 같은 선명도를
가지고 나타나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묘한 공간감을. 그러니까 이 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장점으로 된다는거에요.
아날로그를 따라가지 못한 결함이 아니라 게이머들은 오히려 좋아한다는 거예요, 이게. 묘한,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 와 있다 이런 느낌을 갖게 된다는 거죠.
▲ 디지털로 할 수 있는 예술 2
또 다른 한편으로는 뭐, 그런 것도 가능할 겁니다. 보시게 되면 CG같은 것 할 때 역시 매끈하잖아요, 이렇게.
디지털의 모자이크적 성격은 뭐냐면 특히 매핑할 때 나타나거든요. 매핑을 하려면 하나하나 점마다 다 색깔을 다
다르게 해야 되는데 그게 불가능하니까 보통 폴리곤 단위로 하잖아요. 폴리곤 단위에서 한 폴리곤은 같은 색으로
칠해 버리니깐 결과적으론 매끈하게 나타나서 플라스틱 표면처럼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최초에 디지털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이 다 뭐에요, 로봇, 아니면 곤충, 아니면 또 뭐죠, 로봇과
곤충과 장난감. 토이스토리 이런 거잖아요. 앤츠, 토이스토리. 그리고 사람이 나오면 대머리. 이런 거란 말이죠.
왜냐하면 머리카락 하나하려면, 머리카락이 10만개잖아요. 머리까락 하나하나를 다 잘라야 해요, 요렇게.
그래서 그걸 시뮬레이션 해야 되거든요, 불가능하거든요. 그랬는데 그것이 오히려 결함일수도 있지만은 장점
으로 바꾼 겁니다, 토이스토리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 디지털로 할 수 있는 예술 3
또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의 매끈함들, 예컨대 카림 라쉬드 같은 사람, 디자이너 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 디자
인 할 때, 디지털이 갖고 있는 매끈함, 금속성을 표현한 듯 이런걸 그대로 받아들여 디자인의 원리로 삼아버리
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 작품을 딱 보게 되면 와~ 가상 세계에 있는 물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한 느낌을 준단
말이죠. 새로운 예술 예술언어를 만들어 낸다는 거죠. 그런 거라든지. 또는 디지털로 할 수 있는 게 바로,
그런 거예요. 해상도가 낮다 낮다하는데, 결코 해상도가 낮지 않습니다, 디지털이. 어떤 의미에서냐면, 디지털로
는 무한 줌인과 무한 줌아웃이 가능해요. 아날로그로 찍은 사진은 계속 줌인해가지고 들어가게 되면 나중에
어떻게 되요, 흐려지죠. 근데 디지털은 이게 복제이미지가 아니라 생성이미지거든요. 쑥 들어가도 계속 새롭게
생성하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런 거 아마 많이 보셨을 거예요. 우주 공간에서 쭉 들어가요. 은하계가 나오죠. 은하계에서
태양계로 들어가죠. 태양계에서 지구로 옵니다. 지구에서 미국으로 가죠. 미국의 캘리포니아나 플로리다로 가고,
플로리다에서 쭉 가가지고, 뭐 어디어디 마이애미, 그 해변에 사람이 누워있죠, 그 사람 딱 부딪힌 다음에 그
사람 피부로 들어가서, 피부에서 세포로 들어가고. 쭉 들어갈 수 가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거꾸로 뺄 수도 있고.
왜냐하면 생성해서 해주면 되기 때문에. 또 실제로 그런 작품들이 있습니다, 미디어 아트에서도. 물고기 한 마리
가 헤엄치는데 처음에는 점점 작아져요. 그리고 주변에 다른 물고기들이 나타나죠. 근데 이 물고기 떼가 됩니다.
근데 이 물고기 떼가 나중에 뭐가 되요, 하나의 거대한 물고기가 되요. 그 다음에 그게 또 작아지면서 점점 이렇
게 무한히 간다든지. 이런 게 아날로그로는 불가능하거든요. 디지털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 디지털로 할 수 있는 예술 4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게 있습니다. 아마 아날로그로 시뮬레이션 할 때 중력이 없다는 것. 아마 지금도 CG
같은 거 보면 굉장히, 킹콩도 굉장히 잘 만들었는데, 그렇잖아요. 털이 있는 동물을 완전히 CG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가 동작하는 걸 보면 약간 방정맞아요. 중량감이 떨어지거든요.
이게, 물론 그거 할 때 중력 엔진 같은 거 다 계산해서 하는데 아직까지도 중량감이 떨어집니다.
여러분들 스타워즈에서 로봇들 걸어가는 거 보세요. 이게 금속인데 하나도 무게감이 안 느껴지거든요. 뭐 이런
측면이 있거든요. 중량감이 없다라든지. 또 이런 것들을 장점으로 전환할 수가 있어요. 오히려 중력이 없기
때문에. 어느 예술가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물고기들이 하늘로 떠가는 거거든요. 하늘로 막 물고기 떼가 지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거거든요 공중을 헤엄쳐 다니는 거죠. 근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현실에서 그건 설치 불가능
해요. 왜, 중력이 있기 때문에. 근데 디지털로 딱 들어가니깐 그게 가능하게 됩니다, 그게. 보여 줄 수가 있거든요.
그런 방식이 오히려 단점을 뭐로 바꾸는 겁니까. 장점으로 바꿔 놀 수가 있다라는 거죠. 이게 바로 이제 스티븐
홀츠만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스티븐 홀츠만의 글들은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디지털로 그것을 메운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 사람 말을 그대로 읽을게요.
흔히 우리가 디지털을 가지고 자꾸 현실의 리얼한 시뮬레이션 쪽으로 자꾸 나아가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그걸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이라고 합니다. 그건 왜냐, 불가능하다는거에요.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애초에.
연구에 따르면 실제세계와 질적으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시뮬레이션을 만들려면 초당 85프레임.
지금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게 24프레임이에요, 이게. 근데 이게 85 프레임으로 돌아가야 하고요. 그 다음에 백만
곱하기 백만이에요. 이게 얼마입니까. 이거 계산이 안 나오거든요. 백만 곱하기 백만 픽셀이어야 하고요.
그 다음에 픽셀 당 1600만 컬러를 배정해야 하고, 그 다음에 좌우로 235도, 상하로 100도의 시각 영역이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그걸 갖다가 컴퓨터로. 컴퓨터는 메모리의 한계가 있습니다. 비트의 한계가 있거든요.
비트의 한계라는 건 뭡니까. 메모리의 한계이고요. 그 다음 또 다른 하나는 처리 속도의 한계입니다. 처리 속도
에서 한계고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액세스 속도. 얼마나 빨리 액세스 할 수 있느냐. 이런 한계가 있거든요.
이런 한계를 뚫고 이걸 한다는 것을 ‘그저 언제가 기술이 발달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 디지털이 갖는 한계
한편으로는 사실 우리가 뭐 요즘 나오는 디지털 영화들, 또는 보시면 알겠지만 특히 베오울프라든지 이런 거
보시면 알겠지만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따라가는데 굉장히 많은 진척을 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럼 언젠가 아날로그와 똑같아지지 않을까. 근데 이 사람이 볼 때 그건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왜냐,
기술만 발전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기술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즉 디지털로 아날로그를 재현하는,
시뮬레이션 하는 기술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그에 상응해서 또한 발전하는 게 뭐냐면 대중들의 기대 수준이
에요. 같이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저도 처음에 스타워즈 1970 몇 년에 그걸 보고 놀랐거든요. 쇼킹했
거든요. 근데 지금 여러분 가서 보세요. 다 보여요. 티가 팍팍 납니다. CG라는 게 3년 전 영화를 한 번 보세요.
벌써 아니거든요.
금방 그렇게 사람들이 그 수준이 굉장히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보는 수준이. 그렇기 때문에 이 갭이다라는 것은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결국 아무리 잘라 나간다, 잘라 나간다, 잘라 나간다, 픽셀을
미세하게 배치한다, 배치한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디지털에는 0과 1이 남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0과 1은
단절적이란 거죠. 그렇기 때문에 결코 디지털로 아날로그를 시뮬레이션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라는 거죠.
그러니깐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건 기술적 불가능한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원리적 불가능까지도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 디지털에 대한 빌렘 플루서와 스티븐 홀츠만의 견해 비교
사실은 이 원리적 불가능을 갖다가, 원리적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원리적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빌렘 플루서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물리학을 동원하잖아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날로그의
연속,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세계다 하더라도 그것도 알고 보면 뭐로 되어 있습니까. 불연속의 세계다. 이렇게
이야길 하잖아요. 하지만 이 사람은, 스티븐 홀츠만은 그렇게 뭐 미립자 이런 수준까지 가질 않습니다.
우리가 아주 일상적인 경험에서의 아날로그는 역시 컨티뉴이티 이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디지털은 아무리 미세
하게 배치를 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0과 1이고, 그런 관점에서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디지털을 가지고 아날로그를 대치한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리
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스티븐 홀츠만의 결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학적 결론이 나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 미디어는 아날로그를 흉내 내거나 대체하려거나 한다기보다는 아날로그로 할 수 없는
자기 고유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하고 자기 디지털이라는 매체성을 감추기 보다는 오히려 적나라하게 드러냄으
로써 새로운 미감을 창출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이렇게 본다는 거죠. 그러니깐 우리가 보게 되면, 쉽게 말
하면 제가 볼 때에는, 이 사람은 모더니스트에요, 디지털에 관해서. 모더니스트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
니다. 반면에 스티븐 홀츠만 같은 경우에는 모더니스트적 관점이죠. 매체성에 주목하는 것. 이걸 강조하는 것
이고요.
반면에 누구죠, 빌렘 플루서 같은 경우에는 여기라기보다는 포스트모던 아니면 전 모던입니다. 그러니깐 스티브
홀츠만이 볼 때에는 아마 그렇게 욕을 하겠죠. 너는 모던 이전이야. 디지털의 매체성을 가지고, 매체성을 살리지
않고 디지털을 가지고 자꾸 아날로그를. 그러니깐 누구입니까. 예건데 그것과 비슷한 거예요. 앤디 워홀이,
아니 누구죠,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앤디 워홀을 봤을 때, 황당한 거거든요. 왜냐,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활동할
당시에 미국 모더니즘. 잘 생각해 보세요. 잭슨 폴록이 있죠. 또 바넷 뉴먼 있죠. 마크 로스코 있죠. 또 누가 있
습니까. 등등등등. 즉 추상이잖아요. 근데 갑자기 앤디 워홀이 구상을 들고 나온 거예요, 아예. 마릴린 먼로,
이런 걸 들고 나왔거든요.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러니깐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볼 때, 너는 그러니깐 모더니티가
아니라는 거예요. 프리 모던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왜, 회화를 가지고 회화 매체성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를 가지고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깐 너는 고전적인 회화랑 똑같다고 이야기하는 의미
에서 프리 모던하다라고 욕을 할 것입니다. 그러니깐 넌 모던 이전이다. 현대회화 축에도 못 끼어. 이게 이제
이렇게 한거죠.
▲ 오늘날 빌렘 플루서와 스티브 홀트만의 대립
근데 실제로는 어떻게 되냐면 오늘날 우리는 오늘날 그걸 가지고 뭐라고 부르냐면 포스트라고 부르잖아요.
앤디 워홀 이후를, 1960년대 이후를 다시 실제적인 것이 다시 재규환하거든요. 그러니깐 팝아트가 열린단 말이죠.
팝아트는 이게 재규환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걸 흔히 포스트모던이라고 하잖아요. 그 다음에, 앤디 워홀 바로
다음에 뭐가 있습니까.
포토리얼리즘, 쉽게 말하면 하이퍼리얼리즘이 오잖아요. 척 클로스 같은 사람들. 사진인데, 완전히 그림인데 사진
보다 더 생생한 그림들. 이런 시대라고 한다면 빌렘 플루서의 이론은 어디에도 가능해요. 사실 포스트 모던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 이라는 것에 대해서 디지털 매체성에 대해서 스티브 홀트만은 굉장히 모더니스티
의 태도를 취하는 거고요. 이미 이제 누구입니까, 빌렘 플루서 같은 사람은 굉장히 포스트 모던한 태도를 취하는
거고, 이 둘 사이의 지금, 대립이 있는 거죠.
▲ 최근 디지털의 상황
근데 요즘은 이런 대립 같은 것도 무의미해졌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각자 자기 영역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서
영화 같은 경우는 결국 이리로 가야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하지만 영화에서도 거기만 매달리는 것이 꼭 문제
가 될 수 있어요. 베어울프 같은 경우도 문제가 있잖아요, 왜. 그게 아니라 꼭 디지털을 가지고 저런 식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로도 얼마든지 다른 가능성들이 있거든요. 예컨대 리얼한 게 아니라 쉬러 리얼하게
할 수 도 있고, 그렇잖아요. 하이퍼리얼 할 수도 있고 또는 추상적일 수도 있습니다. 수채화 같은 표현을 갖는.
또는 유화 같은 표현을 갖는. 굉장히 다양한 표현의 영역들이 있는데 오로지 블록버스터, 딱, 그리고 환영효과.
이런 것들은 또 문제가 있습니다.
영화, 디지털이 갖고 있는 뭐랄까, 언어의 한계를 규정할 수가 있거든요. 영역별로 다 다를 것입니다.
특히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뭘 하는 것입니까.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영화처럼 만든단 말이죠. 영화처럼 만든다.
이게 그럼 과연 온당한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은 원래 쿨한 매체거든요. 해상도가 떨어지는
거고. 오히려 상당히 빈 부분을 관객이 집어, 채워 넣는 재미로 보는 건데. 그걸 가지고 아주 실사처럼 만든단
말이죠. 그럴 때 모종의 미학적인 문제가 분명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예컨대, 웨이킹 라이프 같은 경우에는 거꾸로 실사를 찍어서 뭐로 만들어요, 해상도
를 떨어뜨려서 뭐로 만들어요, 만화처럼 만들잖아요. 만화영화처럼. 그런 방식도 있고. 그러니깐 지금은 선택
영역에 따라서, 또는 예술가의 뭐에 따라서, 자기가 추구하는 목표, 또는 자기가 표현하는 바의 성격에 따라서
다양하게 선택하면 된다는 거죠. 이런 게 있죠. 왜냐하면, 따른 한편으론 이 사람이, 스티브 홀츠만이 이야기
했던 아날로그와 이것의 기술적 차이라는 것이 오늘날 상당히 줄어들었거든요.
토이 스토리 예를 들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이미 뭐가 나왔습니까. 베어 울프가 나왔거든요. 베오 울프가 나왔거
든요. 그러니깐 이것도 나름대로 그 당시에, 내가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이, 그 당시에 뭡니까. 아날로그를
흉내 내던 것에서 뭐에요, 아니다, 디지털이 자기의식을 가졌을 때 그 어떤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는 거란 거죠.
그래서 각자 장단점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냐, 이런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도, 그 때 그 때 필요한 틀을 갖다 써야
한다는 거죠.
▲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접점 (레노 마노비치의 관점)
그런데 이 문제를 과연 이렇게 제기하는 게 온당한가란 물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
가 어떻게 이야기했냐면 디지털은 아직까지도 밀도가 떨어지는 것, 그 다음에 아날로그는 밀도가 꽉 찬 것.
그래서 이 밀도의 차이가 극복이 될 수 있느냐, 극복되지 않고 남느냐. 이런 식으로 이야길 했단 말이죠.
과연 이게 이제 올바른 대립이냐. 사실은 이 두 사람이 싸운 적은 없습니다. 제가 지금 대립을 시켜 놓은 거거
든요. 두 사람이 싸운 적은 없는데.
최근 레프 마노비치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뉴미디어의 언어』인가 하는 책을 보니깐 재미있는 구절이 있더라
고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잘못 말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아날로그 해상도가 꽉 차고, 밀도가 높고,
디지털이 해상도가 떨어지고, 밀도가 낮다라고 이해를 하는데 결코 그렇지가 않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봉합을 없앤 최초의 영화가 쥐라기파크 이거든요. 쥐라기파크란 말이죠.
거기 딱 보면, 사실 뭐 디워 같은 경우에는 아직도 꿰맨 자국 다 납니다, 그거. 근데 그걸 없앤 것이 1994년의
쥐라기파크거든요.
재미있게도 뭐냐면, 양자의 이미지 차이를, 이미지의 구결을 지우기 위해서, 아날로그 해상도를 떨어뜨린 게
아니라 디지털 해상도를 떨어뜨렸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더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디지털은 생성 이미지이기
때문에.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생성 이미지는 뭐에요. 무한 줌인과 무한 줌아웃이 가능한 것에요. 오히려 이것
이 훨씬 더 선명했대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실사의 느낌을 주기 위해서 해상도를 높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상도를 떨어뜨려야만 했다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 디지털 미학의 필요성
그런 측면에서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무엇이 되어야 하면
우리가 계속 더 많이 접하게 되는 이미지가 디지털 이미지거든요. 이미 영화도 사실 상당 부분 디지털로 넘어
갔단 말이죠. 디지털로 넘어가게 되면서 점점 더 많은 이미지들을 보는데 거기에 미학이 달라요. 분명히 달라요.
아날로그 미학을 평가하는 기준과 디지털 미학을 평가하는 기준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왜냐하면 이미지 성격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 지고, 다른 방식으로 수용이 되고, 다른 방식으로 편집이 되고.
그런데 이걸 옛날의 아날로그적인 이미지를 보고 조탁 된 이런 미학적 개념들을 적용시킬 수가 있느냐,
이런 문제라는 거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이라는 것을 새로 만들어야 됩니다,
지금. 만들어야 되는 거고.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몇 가지의 개념적인 도구들을 제가 지금 여러분들한테 제시
하고 있는 거예요.
▲ 영화에서 나타나는 변화와 그로 인한 디지털 미학의 필요성
영화 같은 경우에도 지금 굉장히 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디지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카메라가
가상화 되는 거거든요. 카메라 자체가 가상화 되는 거예요. 카메라가 가상화된다. 그건 뭐냐면, 카메라맨이 필요
가 없어요. 카메라맨이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왜냐, 디지털에서, 애니메이션 같은 것들이,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라든지, 실사영화 같은 것들을 보게 되면 카메라가 실제로 찍은 부분도 있지만 상당 부분
안 찍은 거거든요. 근데도 그 퍼스펙티브(perspective)가 있다는 말이죠. 시점이 있단 말이죠. 그건 가상의 시점
입니다.
실제로 저도 지금 작업을 하는데, 그 하늘에서 본 지구를 찍은 사람 있잖아요. 베르튀랑인가, 그 사람이 최근에
뭐를 내냐면 하늘에서 본 한국이라는 책을 내거든요. 그걸 볼 때, 찍습니다. 찍는데, 우리는 사진하면 가장 중요
한 게 뭐예요. 프레임이잖아요. 프레임이 없습니다, 딱 봐서 잘라요. 왜냐하면 물론 이게 화상도 차이는 있겠죠.
자르면 뭐, 자른 다음에 키우게 되면 약간 해상도가 떨어지거나, 그런데 그렇게 티가 안 나거든요.
그러니깐 이렇게 찍은 다음에 이걸 그대로 내는 것이 아니라, 이걸 적절한 미학적으로 또 자르 거거든요.
그러니깐 옛날에 영화 같은 거 찍을 때, 또 사진 찍을 때, 굉장히 현장 자체가 중요했어요. 현장 자체가 중요했
지만, 프로덕션이 중요했지만, 최근에는 대부분 포스트 프로덕션입니다. 그러니깐 옛날에 영화 촬영하는데
6개월 걸렸다, 그러면 요즘에는 6개월이 아니라 딱 6주에 끝나고 나머지 2년을 작업해요. 그런 상황이거든요.
바로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이미지의 성격 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그걸 평가할 수 있는 기준들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 디지털에 대한 세가지 입장 정리
그래서 일단은 크게 3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뭐냐면 빌렘 플루서의, 빌렘 플루서에서 부터
얻어질 수 있는 미학적 전략들. 빌렘 플루서가 이미지는 이래야 한다고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이런 식의 미학적 전략이 추출될 수 있다라는 관점에서 제가 제시를 하는 거고요.
또 하나는 이제, 그건 포스트 모던적이었다고 한다면 스티브 홀츠만과 같은 사람. 상당히 모더니스트적인,
디지털은 그대로 나아가야 된다는 이런 것들. 거기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레프 마노비치 같은 사람이 완전히
새롭게 제시하는.
해상도에 대해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대립을 갖다가 밀도의 차이냐 아니냐,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언급이죠. 그런 게, 그 3가지 입장을 살펴봤고요. 문제는 뭐냐면 다음으로 그런 게 있습
니다. 어떤 문제가 있냐면 디지털은 어설프게 아날로그를 따라가다가, 아까도 이야기 했잖아요. 갭이 있잖아요.
그 갭을 메우지 못할 때, 굉장히, 아니한만 못한 결과를 낳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언캐니 벨리(27:04)라고 하죠, 섬뜩함의 계곡이라다라는 그런 미학적 문제를
낳는데 그건 잠깐 쉬었다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송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