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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마라천력인
“ 놈이 그곳으로 떨어졌습니다.”
느닷없이 올라온 보고에 우담보는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조양궁 궁주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 모셔라.”
“ 무슨 일이죠?”
우담보의 부인 양씨는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 별일 아니오. 부인. 신경쓰지 말고 자시오.”
우담보는 애써 태연하게 말하고는 침실을 나섰다.
일층 접견실에는 범일승이 심각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우담보가 내려서자 시종이 차를 가져와 탁자 앞으로 내려놓았다.
“ 그만 나가보거라.”
“ 알겠습니다. 궁주님.”
시종은 뜨거운 물이 든 주전자를 옆에 놓아두고는 밖으로 나갔다.
“ 어떻게 된 일이오?”
우담보는 찻잔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 놈을 길들이는 중에 난투가 벌어졌다고 하오. 그 와중에 죄수 수십 명이 죽고, 놈은 고문실과 함게 그곳으로 추락했다고 하오.”
“ 그럼 죽었다는 말이오?”
“ 어쩌면...”
“ 허허!”
우담보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무려 삼 년 동안 계획했던 일이다.
삼 년 전 대야벌 수뇌부에서 상궐 조직을 만들기로 결정을 하였고, 창단과 흡수 합병 두 가지 방안을 놓고 검토에 들어갔다.
그 결과, 새롭게 상단을 만드는 것보다 기존 상단을 흡수하는 게 낫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로써 선택된 곳이 바로 연씨 상단이다.
연씨 상단을 선택한 이유는 대야벌에 어울리는 규모를 가졌고, 그보다는 자식이 둘밖에 없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게다가 큰아들인 연우강이 업둥이니 그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다. 만일 작은 아들이자 상속자인 연우진이 불의의 사고 따위로 죽기라도 한다면 연씨 상단의 상속자는 연우강만 남는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가주 연금석의 두 동생은 연우강을 상속자로 인정하지 않을 테고, 재산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날 건 뻔하다.
대야벌의 역할은 그때부터다.
미리 대야벌로 끌어들여 놓은 연우강을 지원하여 완전한 상속자로 만들어 주면서 대야벌에 잡아두게 되면, 상단에 관한 업무를 이곳 대야벌에서 볼 수밖에 없다.
상단 업무가 조금씩 대야벌로 이관될 테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연씨 상단은 대야벌 소속이 될 것이다.
바로 그때 연우강을 제거하면 연씨 상단의 모든 것은 대야벌 소유로 바뀌게 된다.
즉 그 모든 일의 중심엔 연우강이 있고, 그에게 공을 들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 맥이 풀렸다.
“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을 것 같소. 우 궁주.”
“ 어떻게 말이오?”
몸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힘이 없긴 마찬가지다.
“ 연금석의 두 동생들이 파벌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소.”
“ 그들을 이용하잔 말이오?”
“ 연우강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힘들겠지만 지금으로썬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소. 그리고 ... 연우강에 대한 보고는 잠시 미뤘으면 좋겠소.”
“ 연금석의 동생들과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되면 그때 보고를 하잔 말이오?”
“ 그렇소, 우 궁주.”
“ 음!”
우담보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물론 혈악 일잔풍을 끌어들인 사람은 범일승이지만, 천옥의 관리자는 자신이다. 자신 또한 연우강이 죽은 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연우강의 죽음에 대한 문책을 피하기 위해서는 범일승의 말대로 하는 것이 더 나을 듯했다.
“ 그럼 연금석의 동생들과 접촉은....?”
“ 그건 내가 하겠소. 우궁주.”
“ 알았소. 그건 범 궁주가 알아서 처리를 해 주시오.”
“ 그건 그렇고 요즘 지옥은 어떻소?”
연우강에 대한 일이 정리가 되자 비로소 마음이 놓인 듯 범일승은 화제를 돌렸다.
연우강이 떨어진 풍곡이 바로 영원히 격리시켜야 할 죄수들을 가두는 지옥이었던 것이다.
“ 그곳은 내 재량권 밖이오.”
우담보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지옥은 대야벌 무인이면서 반란을 회책했던 자거나, 주화입마 등으로 인해 대량 살인을 저지른 죄수들을 수감하는 곳이다. 그곳은 과거부터 율령궁이 아닌, 무성 무인들의 영역이다.
무성.
그 존재에 대하여 아는 자는 대야벌에서도 그다지 많지 않다. 심지어 그들이 어떤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인원이 어느 정도인지, 그마저도 알려지지 않다.
다만 그들은 안개 그림자, 즉 무영이라 불리고 신분 확인은 ‘안개 속에 서 있는 성이 새겨진’ 무성패로만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안개 속에 숨은 존재들, 그러면서도 벌주와 버금가는 권력을 보유한 자들
그 무영의 본거지가 바로 지옥으로 불리는 풍곡이었던 것이다.
“ 그렇군요. 난 그만 일어나겠소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범일승의 얼굴에도 씁쓸한 기색이 확연하다. 대야벌은 너무 거대하여 어디에 얼마나 많은 무인들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밖으로 나가 친구를 만나면 성공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그럴 수가 없다.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자격지심이라는 응어리를 품고 살아야 하는 곳. 외부에서는 절대 깨뜨릴 수 없는 철옹성이라고 하였던 누군가의 말처럼.
대야벌은 무림이 아니라 중원 자체인 것이다.
범일승은 걸음을 옮겼다.
“ 연씨 상단에 관한 것들은 진행되는 대로 알려주도록 하겠소.”
범일승은 밖으로 나왔다.
오전까지만 해도 보슬보슬 내리던 빗방울이 제법 굵어져 있었다.
“ 어쨌든 성공했으니까.”
범일승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 흡! 젠장!”
순간 급하게 숨을 멈췄다.
바람 속에 섞여 있던 역한 구린내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 퉤! 빌어먹을 똥지게 놈!”
범일승은 냄새를 토하려는 듯 침을 뱉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
지하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아마도 바람의 계곡이란 뜻의 풍곡이 지금 불어오는 바람에서 유래한 모양이었다.
“ 재수 옴 붙었네.”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안으로 뛰어든 다음 사방으로 굴러다니던 약을 챙겨 궤짝 안으로 집어넣고, 곧바로 잠능폐혈대법을 완전하게 해제하고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날아 내린 곳이 고문실 옆이다. 고문실은 산산이 부서진 채고 안에 있던 시체들도 튕겨져 나와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 얼레?”
연우강은 단전을 내려다보았다.
매일 먹는 약 속에 영약을 집어넣었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무슨 의도로 그렇게 하는지 궁금했지만 일부러 묻지 않았다. 영약을 먹이는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이 어떤 부탁을 해와도 거절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래서 영약으로 생성된 기운마저도 팔 할 이상은 숨겨버리고 이 할만 드러냈다.
잠능폐혈대법은 혈도를 닫아줄 뿐 아니라 단전에 모인 내공 자체를 전신으로 분산시켜 버리기 때문에 지금처럼 각 부분으로 흩어진 기운을 일부러 모으지 않으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내공을 쌓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전신 혈도를 활짝 연 지금 단전으로 엄청난 내공이 모여들었다. 최소한 일 갑자 이상의 공력을 새롭게 쌓은 것 같았다.
“ 이 인간들이 날 괴물로 만들기로 작정을 했나보네.”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일 갑자라니.
문득 무원과 창노라는 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 아서라, 알면 다친다. 돈이 됐든, 여자가 됐든, 내공이 됐든, 뭐가 됐든 많아서 손해나는 경우는 절대로 없으니까.”
연우강은 헤벌쭉 웃었다.
다다익선.
부족해서 아쉬운 경우는 있어도 많아서 곤란한 것은 없다는 게 그의 인생철학이었다. 내공이 완전하게 활성화되자 주변 상황이 더욱 선명하게 감지됐다.
“ .........?”
문득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전장에서 수없이 느껴 이제는 자신의 감각처럼 돼버린 느낌들. 무섭게 몰아치는 바람 속에 스며들어 있는 그것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상대를 없애고 말겠다는 야수적인 살기였다.
“ 고민이군.”
연우강은 궤짝으로 시선을 주었다.
궤짝을 열어 그것들을 장착하는 순간 무공을 완전하게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 바람 속에 숨어 있는 자들은 날 죽일 생각이다. 그렇다면........’
한동안 궤짝을 주시하다가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궤짝 안에는 정신없는 상황에서 대충 던져 넣었던 손괭이와 낫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연우강은 안쪽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냈다.
손괭이와 낫이 나오고,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가지고 다니는 탕약과 약탕기, 그리고 최소한 한 달 이상은 버틸 수 있는 분량의 육포가 든 자루가 나왔다.
물건을 전부 꺼내놓자 안쪽은 텅 비었다. 하지만 연우강은 계속 궤짝 안을 주시했다.
“ 먼저 죽인다!”
연우강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폭사돼 나왔다.
그는 텅 빈 사망궤 오른편 구석을 가볍게 쓸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검은색 일색인 비수 두 자루가 들려나왔다. 순간, 놀라운 광경이 궤짝 안에서 일어났다.
안쪽 대기가 묘한 일렁임을 보이더니 또 다른 궤짝이 나타난 것이었다. 안쪽 궤짝의 표면에는 사망궤란 글이 전서체로 씌어 있었다.
“ 궤짝 안에 진식이 설치돼 있다는 건, 제갈세가인이 봐도 모를 거야.”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그가 줄기차게 궤짝을 가지고 다닌 이유는 바로 진식으로 숨겨둔 안쪽의 사망궤 때문이었다.
안쪽의 사망궤 뚜껑으로 손을 가져갔다.
뚜껑을 열자 가장 먼저 먹물보다 새카만 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사망마제 가립하가 남긴 유물 중의 하나로 사망묵의라는 고대 전포였다.
연우강은 감개무량한 얼굴로 사망묵의를 보았다.
정확하게 그곳이 어디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팔에 한 대, 다리에 두 대의 화살을 꽂은 채 정신 없이 사막을 내달리다가 갑자기 몸이 푹 꺼졌다.
놀랍게도 몸이 빠진 곳은 사막 지하에 만들어진 수로였다. 고대로부터 사막 부족들은 천산의 물을 사막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지하에 수로를 팠다.
카레즈라고 불리는 지하수로는 짧게는 수십 리, 길게는 수 천 리나 이어져 있었다. 그때 빠진 곳이 카레즈였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지하 수로를 따라 내달렸다. 다행히 수로는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그 지하수로를 헤매다가 우연히 동굴을 발견하였고 그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 동굴에서 사망마제의 유품과 내단을 얻었다.
“ 열여섯 살 때였지.”
천오백 년 전 무인이었던 사망마제와의 인연은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었다.
연우강은 사망묵의를 걸쳤다.
처음 입었을 때만 해도 약간 큼직했는데 지금은 몸에 꼭 맞았다. 옷을 걸친 그는 들고 있던 비수 두 자루를 한편으로 놓고 궤짝 안에서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물건 네 개를 들어올렸다. 두 개는 길고 두 개는 짧은 그것들은 서로 걸 수 있도록 끝이 구부러져 있었다.
사망월반이란 이름을 지닌 요대다.
사망월반으로 펼치는 초식은 월광잔으로, 이름처럼 잔인한 결과를 낳는다.
철컥!
사망월반을 걸치고 한편 구석에 놓인 삿갓을 머리에 썼다.
사망마립.
가장가리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사망마립은 적을 향해 날리게 되면 여덟 개로 분리돼 날아간다. 폭풍비 초식을 펼치는 무기다.
이어 그의 손에 들린 건 해골 문양이 달린 사망지환이었다. 사망지환으로는 일지소 초식을 펼칠 수 있다. 사망지환을 왼손 약지에 끼우고, 사망묵환이란 이름을 지닌 팔찌를 오른 손목이 끼워 넣었다. 겉보기엔 팔찌처럼 보이지만, 만년오금을 종이처럼 얇게 펴 둘둘 말아놓은 것이다.
전체 길이는 이 장으로 내공을 주입하면 펴지고, 거둬들이면 팔치 형태로 돌아가는 특이한 무기다.
사망묵환의 표면에도 사망지환처럼 해골 문양이 새겨져 있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 해골 문양이 환영처럼 나타나곤 한다. 그 환영 때문에 사망묵환으로 펼치는 무공의 명칭이 환환난인 것이다.
그 다음에 집어든 것은 염주처럼 생긴 목걸이였다. 사망정주라고 부르는 그것은 백팔 개의 묵주가 달려 있고, 지옥탄을 펼치면 그 묵주가 적을 향해 유성처럼 쏘아져 간다.
하나씩 별도로 쏘아낼 수도 있고, 백팔 개를 동시에 쏠 수도 있다.
척!
사망정주를 목에 걸자 그것들은 자석처럼 옷에 장착됐다. 그리고 아홉 개의 꽃잎이 달린 꽃을 들었다. 마치 화선지에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꽃은 평면이었다.
사망사화.
사망마립과 마찬가지로 날리게 되면 꽃잎이 전부 분리돼 적을 살상하는 무기다. 사망사화로 펼치는 무공의 명칭은 사우화였다.
연우강은 사망사화를 가슴에 가져다댔다.
철컥!
역시 사망정주처럼 사망사화가 옷에 장착됐다.
이제 남은 무기는 네 가지.
혼령무 초식을 펼치는 사망마비는 전부 열여덟 자루로 사망정주 옆에서 시작하여 몸 전체에 커다란 원을 그리는 형태로 꽂게 돼 있었다.
더불어 그것들 중 두 자루는 진을 해진하는 매개체였다. 먼저 꺼내놓았떤 두 자루를 비롯하여 전부 열여덟 자루로 이루어진 사망마비를 꽂고 난 뒤 이번엔 둥근 물체를 꺼냈다.
얇은 도드래 형태로 제작된 그것에는 사망혈삭이라 부르는 줄이 감겨져 있다. 모든 무기 중에서 유일하게 붉은색으로, 묵각혈망이란 놈의 껍질에서 뽑아낸 실이라서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으니 믿을 수는 없다.
다만 사망혈삭으로 펼치는 뇌력섬의 위력은 혈도부대를 몰살시킬 때 직접 확인했다. 사망혈삭 끝에 달린 작은 무기인 뇌섬이 박히면 무조건 죽었다. 더불어 그 길이는 무려 오십 장이나 된다.
사망혈삭이 감겨 있는 도르래 형태의 물건을 차는 곳은 왼편 허리다. 왼편 허리에 사망혈삭을 걸고 사망혈궁이란 이름을 지닌 작은 활은 오른쪽에 찼다.
이로써 아홉 가지의 무기를 장착한 셈이 됐다.
이제 남은 무기는 한 가지.
야수의 발톱 모야을 한 사망낭조 아홉 개다. 사망낭조는 손가락에 끼우는 부분과 적을 살상하는 날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적을 살상하는 날 또한 안쪽으로 접을 수 있게 돼 있어서 굳이 살상을 원하지 않을 때는 펼 필요가 없다.
연우강은 날이 접힌 사망낭조를 하나씩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왼손 약지, 사망지환이 끼워져 있는 손가락을 제외하곤 나머지 손가락엔 전부 사망낭조를 끼우고, 가볍게 내공을 주입했다.
찰칵! 찰칵! 찰칵!
사망낭조가 일제히 발톱을 곧추세우자 싸늘한 예기가 흘러나왔다.
날을 확인한 그는 다시 내공을 거둬들였다. 사망낭조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 복잡해.”
열 종류, 백예순 한 개의 무기를 전부 장착한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기의 일부가 진을 구축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에 마구잡이 뽑아낼 수가 없어 그렇게 하고는 있지만 매번 무기를 장착할 때마다 고개를 젓곤 한다.
“ 신중하게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연우강은 사망낭조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가 무기를 장착하는 순간부터 살기가 점점 강해지면 주변 대기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 난 이놈들을 처음 장착했을 때부터 궁금한게 있었어. 백예순 한 개의 무기를 장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표시가 나지 않는 이 옥을 어떻게 만들었지 그게 궁금했다고, 혹시 알아?”
연우강의 말대로였다.
사망마립, 사망지환, 사망묵환, 사망낭조를 제외하면 그의 옷에 장착된 무기의 수는 전부 백마흔 두 개다.
하지만 정성을 다해 장착했던 그것들은 기하학적인 문양처럼 보일 뿐. 무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사망묵의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휘이익!
대답은 바람에 섞여 있던 살기가 대신했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 더 빌어먹을 일은 그 영감은 백예순 한 개의 무기에 전부 이름을 지어 두었더라고, 하지만 난 그걸 외우지 않았어.”
연우강은 사망궤의 뚜껑을 닫았다.
“ 왜냐면, 사람을 죽이는 덴 굳이 무기 이름을 알려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지금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래 맞아. 난 무기 이름을 알려주기 싫어서 외우지 않은 게 아니고 전부 암기하면 머리가 빠개질지도 모를 겁을 먹었거든. 그래서 암기하지 않았어.”
혼자 묻고 답하면서 연우강은 꺼내놓았던 물건을 다시 안으로 집어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 궤짝을 걸머졌다.
척!
스스스!
두 다리를 쫙 펴고 전방으로 시선을 주자 그의 몸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몸 구석구석에서 먹물처럼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갑옷처럼 그의 몸을 감싸는 것이었다. 그 검은 기운은 그나마 기하학적 문양처럼 보이던 무기들마저 숨겨버렸다.
그리고 사망마립 아래쪽에서 검은 광채가 쭉 튀어나왔다.
이효는 고민했다.
풍곡에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건 반 시진 전이었다. 하지만 다른 때처럼 무시했다. 풍곡 입구 중의 한곳인 절벽은 백장 높이였고, 그곳에서 떨어지는 자라고 해봐야 천옥의 죄수밖에 없다.
내공이 금제된 자가 그 높이에서 떨어져 살아난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이다. 혹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고 해도 바람을 타고 다니는 풍천마인이 정리할 테니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런 그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바람에 섞인 피 냄새였다. 간혹 죄수가 떨어졌을 때도 피 냄새가 바람에 섞여 있기는 하지만 금일은 상황이 달랐다.
아주 진한 피비린내.
그건 수십 명이 동시에 죽었을 때나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아주 오랜만에 맡은 피비린내로 약간 흥분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풍천마인을 소집하여 이곳으로 왔다가 살아 있는 자를 보게 된 것이다.
진입자사 풍곡.
허락 없이 발을 들여놓은 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척살한다. 그건 대야벌의 벌주도 알고 있는 사실이고, 설사 그라고 해도 피해갈 수가 없는 불문율이다.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 있는 자도 그래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절벽 위에는 천옥이 있고, 그곳엔 내공이 금제된 자들뿐이다. 즉 내공이 금제되지 않은 자라면 천옥에서 왕처럼 살 수 있다는 말이 되고, 그런 자가 낭떠러지로 떨어질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내공을 지닌 자가 왜 이곳으로 떨어졌는지.
야효가 곧바로 척살 명령을 내리지 않고 고민하는 이유였다.
“ 누구냐?”
야효는 결국 묻고 말았다.
“ 먼저 본인부터 소개를 하는 게 예의잖아.”
연우강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소리로 짐작컨대 상대는 최소한 육십대 이상이었다.
그리고 바람 속에는 적어도 오십 명 이상이 몸을 은신하고 있었다.
“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
야효는 협박을 해보았다.
“ 말을 한다고 살려줄 것도 아니잖아.”
“ 대답을 하면 고통 없이 죽고, 대답을 하지 않으면 살을 발라내서 죽일 것이다.”
“ 그럼 결국 죽는다는 말이네.”
“ 고통 없이 죽는 것과 고통 속에 죽어 가는 건 큰 차이가 있다.”
“ 별 차이 없어. 영감. 고통스럽더라도 살아날 희망이 있을 때만 차이가 있는 거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는다면, 차라리 고통스러운 게 나아. 왜냐면, 고통을 당하는 그 순간만큼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되니까.”
‘ 물건!’
야효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죽음을 많이 경험해본 자가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 위험한 자다.’
육감이 신호를 보내왔다.
야효는 육감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자였고, 그는 즉시 실행에 옮겼다.
“ 죽여라!”
스악!
야효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른편에서 바람이 연우강을 향해 불어닥쳤다.
“ 이거 봐라?”
연우강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으니 대낮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둠 속에 숨은 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바람만 강하게 불어올 뿐,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점점 재밌어지네.”
연우강은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당기며 환상처럼 뒤로 이동했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 마치 환영이 처음 자리에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형환위의 신법이었다. 바닥에 발을 대는 순간 연우강은 가슴 앞으로 끌어들였던 오른손을 밖으로 휘둘렀다.
촤르르! 창!
그의 오른손에서 풀려 나온 사망묵환이 쫙 펴지며 허공에 검은 해골의 환영이 남았다. 그리고 촤르르! 소리와 함께 사망묵환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 커억!”
검은 바람 속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오고, 곧이어 곧 삭아 부서질 듯한 옷을 걸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경악한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 이제 시작이야, 영감.”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발을 가볍게 굴렀다.
툭! 촤악!
노인의 상체가 꺾이듯 떨어져 나가고 그곳으로부터 피가 솟구쳐 올랐다.
스악! 스윽! 사악!
이번엔 후미를 제외한 세 방향이다.
먼저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암경이 밀려왔다.
연우강은 틀어준 왼손을 왼편으로 쭉 뻗으며 활짝 폈다. 그리고는 오른손은 앞으로 내밀고, 고개를 오른편으로 빠르게 돌렸다.
슥! 차르르! 휘리릭!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사망지환이 공간을 단축하고, 사망묵환은 전면을, 그리고 쓰고 있던 사망마립은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면 비행했다.
“ 컥!”
“ 큭!”
“ 크아악!”
두 번의 신음고 한 번의 비명.
그것은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세 명의 죽음을 의미했다. 적의 숨통을 끊은 사망지환과 사망마립은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 거참 신기하단 말이야. 내공을 이용한다고 하지만 돌아오라고 하면 돌아오니. 아무리 그런 능력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해.”
“ 죽일 놈!”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자들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 한꺼번에 쳐라!”
휙! 휙휙! 휙! 휙!
누군가 고함을 내지르자 사방에서 강한 바람이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갔다.
바로 그때.
연우강의 입에서 나직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 지옥의 입구는 활짝 문을 열었다!”
툭! 툭툭툭! 툭툭!
그의 목에 걸려 있던 사망묵주가 일제히 떨어져 나와, 명치 앞에서 둥글게 모이더니 맹렬하게 회전했다.
“ 지옥탄.”
연우강의 입에서 나직한 호통이 흘러나오고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던 사망묵주가 부챗살처럼 상하로 퍼져 나가며 허공을 찢었다.
“ 마, 막아라!”
조금 전 공격 명령을 내렸던 자가 당혹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전 같으면 몰라도 지금은 불가능해!”
연우강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지는 순간, 그의 전면 어둠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백여덟 개의 사망묵주.
그 앞에서는 피한다는 말 자체가 무의미했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던 그것들은 바람 속에 숨어 있는 자들의 몸통을 단 번에 뚫고 지나갔다.
“ 저, 저럴 수가.....”
“ 기척을 내는 건 죽여달라는 것과 같은데.”
번쩍!
연우강의 왼편 허리춤에서 새파란 광채가 튀어나와 이십여 장 떨어진 곳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오십 장 길이의 사막혈삭 끝에 달린 뇌섬이었다.
“ 헉!”
야효는 질겁하여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뇌섬은 살아있는 것처럼 야효를 쫓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맞이하면 설사 고수라고 해도 당황하기 마련이다.
지금 야효의 상황이 그랬다.
삿갓, 팔찌, 반지 그리고 묵주.
그런 무기를 몽땅 가진 자에게서 또 다른 무기가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새파란 광채를 뿌리며 날아오는 물체를 향해 손을 쳐내는 것밖에 없었다.
전 공력을 싣지 못했다고 해도 푸른 광채 정도는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퍽!
“ 커억!”
야효는 멍한 눈으로 가슴을 보았다.
푸른 광채는 손바닥을 뚫고 심장 속까지 파고들어가 있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바람 속에는 칠십 명의 풍천마인이 있었다. 그들 전부를 한꺼번에 없애고, 곧바로 자신까지 없앨 능력을 지닌 자.
“ 설마 무, 묵사요?”
야효가 알기론 그런 자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묵사.
무성 서열 일이위자, 최강의 사내였던 자.
하지만 그는 분명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묵사냐고 물은 이유는 삿갓 사내가 사용하는 무공 때문이었다. 사내가 사용하는 무공의 바탕은 바로 마라천력이라 부르는 염력이었다.
사실 염력은 신력, 정진력, 정력, 혜력과 더불어 수행해 필요한 다섯 가지 힘이라고 부르는 불전 오력의 하나다.
더불어 ‘ 생각의 힘은 바위라도 뚫는다.’는 염력철암의 예시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것은 사고의 힘을 강조한 것이지 실제 바위를 뚫는 힘을 지닌 자를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런 힘을 타고난 자들을 마라(악마)라 칭하면 경원시하였다.
그런 자들 중에서도 최강의 능력자를 일컬어 하늘이 부여한 염력을 타고났다고 하여 마라천력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제거 대상 최우선 순위에 올라있다.
그들이 지닌 능력의 가공함 때문이다.
사실 일순간에 수백 개의 암기를 날리는 건 많은 연습을 하면 가능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천당문의 만천화우다. 하지만 사천당문의 만천화우는 암기의 회수가 불가능한 무공이다.
방금 눈으로 목격한 광경은 전설의 마라천력인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야효가 말한 묵사가 바로 마라천력인이었던 것이다.
“ 묵사, 괜찮은 별혼데. 누구지?”
연우강은 노인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대마다 사망혈삭의 길이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사망혈삭을 보관하는 도르래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또한 연우강이 지닌 마라천력이 하는 일이었다.
“ 그렇군. 묵사는 이미 죽었지. 더불어 너와 같은 마라천력인이고, 강하긴 하지만 우리 전부를 없애고도 멀쩡할 수는 없지.”
“ 나도 별호를 묵사로 하고 싶은데, 괜찮지?”
“ 묵사는 이곳을 나가지도 못했고, 그의 무공도 유출되지 않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천성은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어쩔 수 없었다.
“ 내 무공이 묵사 그 양반의 무공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 마라천력을 무공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무림사에 단 한 명도 없었다.”
“ 아냐, 있었어.”
“ 그 무공을 네가 익혔단 말이냐?”
“ 뭘 새삼스럽게 물어. 방금 봤으면서.”
연우강의 말대로였다.
연우강이 익힌 흑풍마라천력은 내공과 염력을 하나로 합칠 수 있는 내공심법이다.
그런 내공심법이 아니었다면 백예순한 개나 되는 무기를 동시에 날리고 다시 끌어올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더불어 흑풍마라천력은 염력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오 성 이상은 익혀낼 수가 없는 무공이었다. 동생에게 흑풍마라천력을 손쉽게 내줄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했다.
“ 누구냐?”
“ 이미 죽은 사람인데 알아서 뭐 하게. 그보다는 난 네 정체가 더 궁금해, 혹시 품속에 패 같은 걸 넣고 다니는 그런 부류야?”
“ 내, 내가 입을 열 것 같으냐?”
야효는 저도 모르게 가슴 앞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 보통은 너처럼 말하지.”
연우강은 환하게 웃으며 야효 앞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지척으로 가까워지자 연우강은 야효가 가리고 있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 난 여자 가슴이 아니면 더듬지 않는데, 미안해.”
손에서 둥근 패가 들려나왔다.
앞면에는 안개가 성을 감싼 그림이 새겨져 있고, 뒤편에는 백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성패였다.
연우강은 한동안 무성패를 쳐다보다가 지그시 말아쥐었다.
푸스스!
손에 검은 광채가 어리자 무성패는 가루로 흩어졌다.
“ 위로 아흔아홉 명이 더 있다는 말?”
“ 어차피 죽을 사람을 상대로 뭔가 알아내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 그럼 고통스럽게 죽게 될 텐데.”
연우강은 야효를 빤히 쳐다보았다.
“ 그럼 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
“ 이런! 그건 조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인데.”
“ 묻지 않겠단 말이냐?”
“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어. 전에 첩자를 고문한 경험이 있는데. 녀석들은 세 부류가 있어. 고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술술 부는 놈. 고문을 견디어 내다가 죽기 직전에 부는 놈. 그리고 끝까지 불지 않고 죽는 놈.”
“ 난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야효가 작심한 듯 말했다.
“ 가장 큰 문제는 끝까지 불지 않고 죽는 놈인데...... 너도 고문을 해봤는지 모르지만 우린 보통 고문을 할 때 열과 성을 다하잖아. 그렇게 성의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지 않으면 공연히 약이 오르면서 화가 나곤 하지. 어쩔 땐 내가 병신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죽은 놈에게 화풀이를 하곤 하는데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더라고. 그래서 그 후로는 싫다는 놈에겐 묻지 않기로 했어.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알아?”
“ ......?”
말을 참 잘하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후면 죽을 게 분명하고 자신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말이 기다려졌다.
“ 그놈이 더 약이 올라 하더라는 거야. 죽기 직전 잠깐에 불과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ㅇ낳고 바로 죽이는 나를 원망하더란 말이지.”
연우강은 사망혈삭으로 시선을 주었다.
“ 커억!”
사명혈삭 끝에 달린 뇌섬이 빠져나오자 야효의 입에서 울커 피가 넘어왔다.
“ 정말로 궁금하지 않단 말이냐?”
빌어먹을 노릇이다.
녀석이 묻지 않자 정말로 약이 올랐다.
“ 그래 인마. 네 녀석이 날 죽이려 했던 이유를 알게 되면 네놈 배후를 또 죽이러 가야 하잖아. 한두 명도 아니고 전부 아흔아홉 명이나 되는데 내가 미쳤다고 그 짓을 하겠냐? 난 귀찮은 건 딱 질색이야, 자식아.”
연우강은 손을 휘저으며 몸을 돌렸다.
“ 좋다. 말해주겠다. 난 무성......”
풀썩!
“ 바로 그거야 개자식아. 항상 그랬어. 말을 하려면 끝까지 다하고 죽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꺼내질 말아야 할 것 아냐. 잔뜩 궁금하게 해놓고 뒈져버리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새꺄!”
연우강은 이미 죽어버린 야효를 자근자근 밟았다.
“ 이런 엿 같은 기분이 싫어서 묻지 않았던 거라고. 제기랄!”
야효의 시체가 피 떡으로 변하자 그제야 연우강은 동작을 멈췄다.
“ 역시 동중정으로도 안 되는 건가?”
연우강은 축축하게 젖은 입가를 훔쳐냈다.
방금 쏟아낸 무기는 뇌섬을 포함하여 백아홉 개.
그것들 전부에 내기를 싣기는 했는데, 몸에 무리를 준 듯 피가 넘어오고 있었다. 지난 이 년 동안 꾸준히 정중동의 묘리를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흑풍이란 놈을 종으로 만들지 못한 것 같았다.
“ 무인으로 살 것도 아니니까 상관은 없지.”
연우강은 가볍게 넘겨버렸다.
무인 집안 출신도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무공으로 밥 먹고 살 생각도 없다. 무공은 그야말로 남에게 얻어터지지 않을 정도만 지니고 있으면 될 테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도 넘치는 게 바로 무공이었다.
“ 그나저나 이제 어떡한다....”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죽이는 것보다 후처리가 더 문제였다.
천옥에서 떨어진 사람은 자신밖에 없고, 이곳의 시체가 발견되면 그 후 상황은 굳이 예상할 필요가 없다.
“ 그냥 날라?”
“ 이쪽으로 와줄 수 있는가?”
내심 고민하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시체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연우강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 그건 나중에 치워도 되네.”
“ 시체를 치울 곳은 있소?”
“ 이곳은 화장실이 상당히 깊다네.”
“ 화장실?”
연우강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 그런데 갇힌 상태요?”
“ 그렇네.”
“ 어디로 가면 되는 거요?”
“ 계속 직진해 들어오면 되네.”
“ 직진이라....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말이오, 영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