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시인하우스》 신인상 당선작_ 달 (외1편) / 김미지
심사위원 : 강인한, 나금숙(시인),염선옥(평론가)
달 / 김미지
빈 하늘에 떠오른 풍등
한 방울의 짠맛, 단맛, 쓴맛도 다 지워진 골짜기가 있다
깊은 골짜기 속 유년의 밧줄을 내린다
달은
완전히 부수고 다시 짓는 동안
성한 곳 없는 이음새로 상처의 지도를 엮는다
어둠은
먼 우주의 기원 같은 침묵
환하게 채색하고 싶던 날
케케묵은 흙냄새가 났던 것 같다
층층으로 쌓인 먼 시간 안에 있고
밑동이 잘린 채 겹겹이 갈라졌지만
속수무책의 악력으로 그려낸 나이테의 반대편
축을 중심으로 도는 것들은
매번 처음인 것처럼 후속편을 찍어낸다
줄과 칸 안에 있고 출구가 없는
녹슨 밧줄의 굴레
나무에게도 있고
너와 나 사이에도 있고
새에게도 있는
어둑하고 투명한 창
건너갈 수 있지만 밖은 낭떠러지라서
까마귀들은 자주 머리를 찢고
까만색 가로줄 위에서 높이뛰기를 한다
천장은 지면에서 꽤나 멀었다
서쪽 하늘로 순례 길에 오른 까만 점들을 좇아
퉁퉁 부은 발자국이 부지런히 걸어간다
협곡을 잇는 밧줄을 잡고
한없이 평등한 풍등의 시간
빈집 / 김미지
허물어질 일만 남은 빈집에는
그림자가 살고 있다
기역자로 맞닿은 벽의 깊은 아래쪽부터
숨을 불어넣듯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어둠이 자리를 잡는다
제 몸만한 등짐을 진 벌레 한 마리
바닥인 듯 기면서 구역을 나눈다
이쪽과 저쪽은 원근(遠近)의 이중주
깨진 유리창을 벽에 걸고
방 안은 우주가 된다
비스듬히 누운 햇살을 따라
살아남은 것들은 같은 방향으로 눕는다
한 귀퉁이는 찌그러지고
누군가의 기척도 같은 쪽으로 기운다
컴컴하게 물든 사발면 용기 안에서
어떤 시작이
가느다란 숨이 꿈틀거린다
마른 넝쿨에 휘감긴 지붕이
한 뼘씩 낮아질 때에도
손깍지를 끼며 이끼가 자라난다
이끼의 얕은 그림자에서도
무엇인가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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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물음표를 붙잡고 시를 쓰겠다
숲에서 나무 한 그루를 보느라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던 일이 떠오릅니다. 속이 텅 빈 나무에 곁가지들이 뻗어 나가 푸릇한 잎사귀를 매달고 있었습니다. 나무의 생장이 신비롭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뿌리가 단단하면 이어갈 수 있는 거구나. 줄기 하나 더 뻗고 잎 하나 더 매달 수 있구나. 이런 생각으로 마음 한 편이 뭉클했습니다.
다시 시를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했습니다. 나는 시를 쓰는가. 어떤 시를 쓰고 싶은 건가. 시는 뭔가. 온통 물음표 투성이였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시인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구멍이 큽니다. 물음표를 붙잡고 시를 쓰겠습니다. 가던 길로 한 걸음씩 쉬지 않고 나아갈 것입니다.
저의 또 다른 물음표 아들 우석, 우준, 우영. 그리고 남편 항상 응원하고 사랑합니다.
가르침 주신 김신영 선생님과 함께 공부한 글벗들 그리고 시인하우스 심사위원님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김미지
1982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졸업. 2024년 제1회 《시인하우스》 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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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새로운 생성을 준비하는 꿈틀거림
신약성경, 특히 바울의 서신에서 동사의 형태들은 능동-수동이 결합되어 있는 의미일 때가 많다. 절대자와의 비밀한 교감을 평범한 일상에서 풀어내는 데는 이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선례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걸어서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발바닥이 강물을 밟으면 흐르는 물이 끊어진다는 여호수아의 예언의 말을 따라 강에 발을 디뎠고(능동), 믿음의 기다림 가운데(수동), 강 언덕에 넘쳐흐르던 물이 언덕처럼 서 있는 기적 속에서 마른 강 바닥을 건넜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붙잡아 언어로 형상화하는 작업도 전혀 낯선 이 부활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 미메시스의 오랜 관점에서 보면 현실과 사실은 존재론적 선차성을 독점해 왔다. 예술적 재현물이나 표상보다 먼저 실존하는 사물이야말로 진정한 존재성을 보유한다는 뜻이다. 이 세계의 운동과 순환으로서 사건이 먼저 있고, 이에 대한 기술로서 문장이 뒤이어 나온다는 것이다.(최진석) 이 맥락에서 사건 다음에 문장이 출현한다고 본다면 위의 능동-수동태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이 능동적으로 문장을 만들고 결합할 때, 시 속의 사건은 생긴다고 보야 한다. 인간과 비인간을 통괄하여 모든 존재자들이 특정한 관계 속에 놓임으로써 일정한 운동의 효과를 나타낸다는 ‘배치’(agencement)에 대한 개념(들뢰즈와 가타리)을 통해 살펴볼 때도, 시인은 새로운 ‘배치’를 통해 새로운 시공간과 사건을 창출해내는 자이어야 한다.
과연 김미지의 시들은 어디까지 이 관점에 닿아있는가? 미숙하나마 그 길에 들어섰다고 보여진다.
“어둠은/ 먼 우주의 기원 같은 침묵 ” , “축을 중심으로 도는 것들은/ 매번 처음인 것처럼 후속편을 찍어낸다", “ 협곡을 잇는 밧줄을 붙잡고/ 한없이 평등한 풍등의 시간" (「달」 부분)등을 보면 그러한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사건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문장이 사건을 창출해 낸다.
“허물어질 일만 남은 빈집에는/ 그림자가 살고 있다", “깨진 유리창을 벽에 걸고/ 방 안은 우주가 된다”, “컴컴하게 물든 사발면 용기 안에서/ 어떤 시작이/ 가느다란 숨이 꿈틀거린다”, “마른 넝쿨에 휘감긴 지붕이/ 한 뼘씩 낮아질 때에도/ 손깍지를 끼며 이끼가 자라난다/ 이끼의 얕은 그림자에서도/ 무엇인가 태어날 것이다”(「빈집」 부분)
아직은 얕은 박동이지만 새로운 생성을 준비하는 꿈틀거림이 시 속에 혼재해 있어서 좋은 조짐으로 보고 선택했다. 사발면 용기 안에서 어떤 시작이 가느다란 숨이 꿈틀거린다니, 폐허와 허무가 가득한 곳에서 김미지 시인은 새로운 문학적 ‘배치’를 통해 자기만의 우주를 만들어 갈 것이다. 예대를 졸업하고 세 자녀를 낳고 기르는 소중한 창조의 작업을 이미 하고 있으니 그 성실함에 큰 박수를 보낸다. 「사슴」(최정이), 「창세기 폴라폴리스」(지주현), 「허튼 춤과 노래」(노수림)도 그야말로 MZ세대들로서 좋은 기량을 갖추었으니 《현대시학》 과 《시인하우스》에 다음 도전을 격려해 본다.
심사위원 : 강인한, 나금숙(글), 염선옥,
—반년간 《시인하우스》 2024 하반기
출처: 다음카페 <푸른 시의 방>
https://naver.me/G8tbWBVV
들뢰즈의 배치이론
배치(agencement)’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것들을 자리에 맞게 함께 놓아둔다’는 의미에서 일상적 의미의 배치와 철학적 개념어로서의 배치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철학적 개념어로서의 배치에는 사물이나 사태를 바라보는 어떤 새로운 태도가 포함된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에 따르면, 배치란 일정한 시간 동안 이질적인 사물 또는 사태가 다른 것과 연결되어 어떠한 의미를 만들어낼 때 형성되는 계열이다. 이때 계열을 이루는 항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배치는 사회적, 기계적, 언어적, 음악적 영역을 가로지르며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예) 시인이 교실의 공간을 재배치할 경우 수업을 들으면 교실, 연극을 하면 극장, 밥을 먹으면 식당이 된다.
학교에서 가르치면 교사, 집에 오면 남편, 아버지이다.퇴근하여 집에오면 시간과 공간이 달라지는데 집에서 아들이 선생님하고 부른다면 지위와 역할에 맞지 않는 것이다.
유동적 공간과 시간의 장으로 생성. 시인의 관점과 태도가 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