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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자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를 나눕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 행각에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 기구였던 공회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치유되었다는 이 사실을 아주 멋지게 선포해 주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었지만 모퉁이돌이 되었다는 놀라운 선언을 했을 뿐만 아니라 친히 사람 중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었다. 즉 오직 예수만 원이다는 사실을 아주 강력하게 선언하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사실 종교 지도자들이 바라보았던 베드로와 요한은요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었죠. 굉장히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그들이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을 보고 당황하지 않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자신들이 십자가에 내몰았던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병 고친 사람이 병 고침 받은 사람이 그들 곁에 있는 것을 보고 어떤 트집을 잡거나 비난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상황에 놓인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이들을 그냥 놔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그래서 이들을 잠깐 나가게 하는데 서로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들로 말미암아 성전 미문에서 큰 기적을 행한 사실이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많이 알려졌고, 그들이 고침받은 증인까지 저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 우리도 이 사실에 대해서 무조건 부정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어쨌든 이 일이 백성들 사이에서 더는 널리 퍼지지 않도록 우리가 막아야 할 것입니다.
기왕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저들이 앞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도록 우리가 엄중하게 경고를 해야 합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단단히 타일러서 저들에게 경고해 줍시다.
공회원들은 그러한 의논을 나누고 결론을 내린 후에 사도를 다시 공회앞으로 세워 놓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단단하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잘 들으시오. 이번 일을 문제 삼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이후로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거나 가르치게 될 경우 이를 어길 시에 더 이상 묵과하지 않고 너희를 처벌할 것이 반드시 조심하면 좋겠소
라고 경고를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법으로 사도들을 정죄할 수 없게 되자 공해라는 그 권위와 힘을 사용해서 사도들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고자 했던 것이죠. 사실 이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의결 기구였던 공예 앞에 선다는 것은 굉장히 두렵고 떨리는 것이었습니다. 공회의 엄중한 분위기 가운데 서게 되면 누구든지 그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고요. 그 71명의 공회원들 앞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경고의 메시지를 들었던 베드로와 요한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베드로와 요한은 그 공예의 강력한 경고를 받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았다는 것이죠.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78명의 공회원들 앞에서 어깨를 펴고 아주 당당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듣고 본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주 강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사도들의 답변을 들은 공연들은 크게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도가 행했던 기적, 즉 예수의 이름으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고침 받은 것과 또 이 사건을 보거나 들은 백성들이 지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이 사태를 보고서 이 공예원들이 민심을 꺾으면서 사도를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사들에게 사도들에게 아주 험악한 말로 심하게 위협을 하고 그들을 풀어주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이 공예원들 앞에서 거침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그리고 그 질문에 당당하게 답변을 하고 또 위협 가운데에서도 자신 있게 자신들의 주장을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 4가지를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베드로와 요한은 본래 학문 없는 범인이었지만 예수와 함께 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죠. 우리 13절 말씀을 읽으면서 내용을 파악해 봅시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는 줄도 알고
여기서 학문 없는 범인이라는 것은 율법의 고등 교육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이 정해 놓은 규례들을 교육받지 못했던 당시의 천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아주 무식한 무식쟁이로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 베드로가 성경에 기록된 예언된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할 뿐만 아니라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매우 논리정연하게 설득력 있게 선포했다는 것이죠. 그 지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 그렇죠 베드로와 요한은 어부 출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보면 초등교육 국졸에 해당되는 즉 기초적인 율법 교육만 받았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구약 성경을 자유자재로 인용하여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었던 그 놀라운 이유는요. 우리가 지난주에 함께 나누었던 것처럼 성령께서 조명하신 은혜가 있었고 하나님의 지혜가 그들에게 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보면 바울과 같이 가말리엘 학문을 이수하고 아주 높은 학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또 아볼로 같은 경우도 그렇죠. 그의 지식 넓은 풍부한 지식을 가진 사람 그러한 사람들도 사용했지만 학문이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이 선택하시면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게 하려 하심이라
왜 그렇게 하셨는가 이것은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들을 들어 사용하시겠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다윗과 골리앗을 봐도요. 여러분 당연히 다윗이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이 그를 들어서 골리앗을 물리치게 하신 거예요. 군사력으로 볼 때 당연히 질 수밖에 없는 여러 전투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셔서 놀라운 군사력을 가진 그들을 이기게 하셨다. 이게 하나님의 일하심이지 따라서 해답은 학문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성령 충만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서 잡혀가실 때의 뒤를 따라가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잖아요.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닭 울기 전에 여종 앞에서 아주 비굴하게 세 번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66절에 보니까 그 여종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이 여종은 대제사장의 여종이다. 즉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공예원 앞에서 신문을 받잖아요.
근데 얼마 전에 그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신문하면서 십자가에 몰아세웠던 것이죠. 그렇게 예수님이 신문받을 때에 베드로는 여종에 의해서 원치 않게 신문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아주 비굴하게 나 예수 모른다. 나중에는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등돌렸던 그러한 사람이죠.
그런데요. 이제 성령 충만함을 입으니 예수님을 신문했던 그 공회원들 앞에서 똑같이 지금 그들에게 질문을 받고 신문을 받는데 이 베드로와 요한이 더 이상 비굴하지 않고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증거하고 있더라는 것이죠.
여러분 바울이 고백하잖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알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와 요한도 이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복음의 귀함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비굴해지지 않고 그 복음을 끝까지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이지, 이처럼 베드로와 요한은 학문이 아닌 성령 충만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이어지는 예수와 늘 함께하는 자들이었다는 표현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요. 예수님과 3년을 다니면서 동고동락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런 말이 있잖아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사실 제자들의 삶에서 그대로 드러나게 되죠.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어떤 분야의 지식이 전무한 사람일지라도 그 분야에 오래토록 있게 되면 어느 정도 지식과 경험을 쌓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식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과 함께 오래 지내다 보면 자연의 견문이 넓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3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서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해서 전했던 그런 말씀들이 그들에게 쌓이고 쌓이고 축적되었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3년만 잘 되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보내고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함께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보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노라.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혜사를 너에게 보내셔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내가 구하겠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 아니 그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했던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예수님이 약속해 주셨죠.
그리고 이들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 다른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여전히 예수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약속하신 성령이 함께하실 때에 나타나는 역사가 있죠.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겠다뿐만 아니라 예수를 통해서 배웠던 것들이 기억나게 하시겠다.
이것이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베드로와 요한이 공원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성령 충만한 자들이었기에 예수께서 그동안 가르치고 배우셨던 배우게 하셨던 것들을 성령이 깨닫게 하시고 말하게 하시고 선포하게 하셔서 그 자리에서 놀랍게 하나님의 말씀 선언할 수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함께하시는 자의 여러분 다니엘의 새 친구를 아십시오. 이들은 느부갓네살이 만든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은 이유로 인해서 풀무불 속에 던져지게 됩니다.
여러분 이 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요? 이 세 사람을 잡아서 던지기 위해서 갔던 이 사람들이 그 불꽃에 튀어서 불에 타 죽게 됩니다. 그 정도로 뜨겁고 위험한 자리에 던져진 것이죠. 결박하여서 세 사람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던진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안에 들여다보니까 결박당하지 않은 네 사람이 불 가운데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상하지 않은 거예요.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이 그들을 보니 네 사람의 모양이 꼭 신의 아들과 같더라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 세 사람들이 그 풀무불에 던져졌을 때 누가 함께하신 거예요? 우리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이죠. 여러분 이 함께하심을 보고 느부갓네살 왕은요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98절을 우리가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같이 읽습니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함으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여러분 사탄 마귀가 지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리보다는 지혜로운 자들일 거예요. 그런데 그 지혜도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주의 계명이 우리와 함께하시 주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즉 말씀이신 예수가 나와 함께하시면 우리는 그 지혜도 능히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말씀이 늘 우리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존교하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1명의 공회원들 앞에서 매우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40세 가량 되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그 사람이 실제 고침을 받고 그들 곁에 증인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거 여러분 22절 말씀 한번 보실까요?
이 표적으로 병 낳은 사람은 40일 전에 되었더라.
여러분 법정에서 승소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증거 또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한번 잘 우리가 들여다보십시오. 사실 이렇게 세상을 보면 아무 근거 없이 전해지는 말들이 참 많아요. 그중에 사실이 아닌 추측성 발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굉장히 또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죠. 참으로 희한한 것은 근거도 없는 그러한 추측성 발언들이 왜곡되어지고 과장되어지는 그러한 말들 이러한 말들이요. 진실의 말보다 더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이 시대를 가짜 뉴스가 판치는 시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가짜 뉴스가 너무 많으니까 뭐가 진짜인지 헷갈리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상황을 한번 보십시오. 그냥 이들이 말로만 전했던 것이 아닙니다. 말로 전한 것은 바로 옆에 40세 가량 된 사람이 산 증인으로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 40세 가량의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옆에 서 있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뒷받침해 주는 분명한 근거가 된 것이죠. 그러니 확실한 증거와 증인으로 인해서 이들은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때로는 필요한 것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믿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입니다.
여러분 믿음에 대한 증거를 갖고 계십니까? 내 삶 속에 내 마음에 내가 선포할 수 있는 믿음에 대한 증거가 있냐라는 거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내세울 때에 그러한 경험이 선포되어질 때에 우리는 더욱 담대함으로 선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죠.
그런데 그것이요. 항상 좋은 경험에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때로는 고난과 핍박 속에서 얻어지는 경우도 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것 중에 하나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는 고백이 우리 한번 따라가봅시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흔적이라는 것은 고대 사회에 주인이 노예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인정하기 위해서 노예의 몸에 낙인을 찍는 것이죠. 그 낙인 선명한 자국은 소유가 된다는 분명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흔적이라 하는 것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증표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던 바울이 그것으로 인해서 핍박과 고난을 받았다라는 사실을 증거하기도 하는 것이죠.
실제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수고를 넘치게 한 자라고 성경은 말하죠. 수차례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여러 번 죽을 뻔했다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은 결코 이러한 핍박을 불평하거나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오히려 그 핍박과 상흔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증거로 삼았다는 것이죠. 나에게 찾아왔던 고난과 핍박 그것이 참 힘들고 어려웠는데, 그런데 이것이 결국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거가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놀라운 증거물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따라서 여러분 예수 때문에 때로는 고난도 받고 핍박도 있어야 된다고 저는 그것이 우리에게 악영향으로만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 70여 명의 공회원들 앞에서 이들이 담대하게 전파할 수 있었던 세 번째 이유는요. 이들에게 코람데오 신앙이 있었다. 19절 말씀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게요.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여기에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이 있죠.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따라합시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코람데오가 하나님 앞에서라는 그러한 의미잖아요. 베드로와 요한은요. 세상 권세를 지닌 인간 지도자들보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했고, 그래서 그분께 더욱 충성한 존재들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에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중에 예를 들어보면 요셉이 그러하죠.
여러분 요셉은 억울하게도 자신이 팔려야 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애굽의 친일 대장 보디발 장군에 의해 그는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그의 삶이 형통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에게 은혜를 입어 그는 가정 총무로서 집안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죠. 문제는 보디발의 아내였던 것이죠. 외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운 요셉을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을 하면서 동침을 요구하게 되죠.
그때 요셉이 한 말이 있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 세상 사람들이 보지 않아도 하나님이 지금 보고 계십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득죄합니까? 보디발 장군은 속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즉 요셉은 그 누가 보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 살아갔던 존재 그의 신앙은 코람데오의 신앙이었다는 출애굽기에 보면 히브리 산파들이 등장을 합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어명을 내리니 이제 너희들 해산을 도울 때에 아들이 태어나거든 죽이고 딸이 태어나거든 살리도록 해라.
여러분 어명이 떨어졌어요. 이 명령을 어길 시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기본적으로 아는 것은 그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 산파들은 당시 가장 강력한 권세와 권력을 가진 왕보다도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들은 어명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주게 되었죠.
그렇다면 여러분 이들이 어명을 어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욱 그 가정이 흥하게 되었다고 기록해 주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들은 왕 앞에서 명령을 받았지만 그 자리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는 자로 살았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고, 이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라는 코람데오의 신앙을 가지고 살았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시편 말씀인데 같이 읽어보실까요? 시편 16편 8절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우리 같이 큰 소리로 읽어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어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항상 모시고 사는 다윗 그 결과는 그 고백의 은혜 그 고백을 통해서 주어진 선물은 그다음 구절에 나오는데 그것은 마음이 기쁘다. 그리고 영도 즐겁다. 육체도 안전하다. 즉 영육혼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 내가 살아갑니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비록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신다는 이 사실을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행할 때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우리는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앞에 계신 것처럼 믿고 행하는 것이다.
우리 한번 따라해볼까요?
신앙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앞에 계신 것처럼 믿고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으로 살아갈 때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죠.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사는 사람, 누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코람데오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인데요. 이들이 공회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 단호한 의지가 있어서 여러분 아무리 좋은 생각이 있어도 의지가 없으면 하지 않게 돼요.
근데 이들에게는 의지가 있었던 거예요. 20절 말씀 우리 같이 읽어볼까요?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거 말해야만 한다. 이러한 강한 의지가 이들에게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움 받은 자들입니다. 법정에 선 증인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숨김없이 다 증언해야 옳은 것이죠. 보고 들은 것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거나 숨기면 위증죄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신앙의 여정을 걸어오면서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우리의 영안을 열어서 보고 듣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이제 우리는 사도들이 고백했던 것처럼 이런 고백, 이러한 의지가 있어야 돼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삶의 현장 속에서 내가 본 예수님, 내가 만난 예수님을 마음껏 자랑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의지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사람 앞에 시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왠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한 번은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마태복음 10장 32절 33절에 기록된 말씀인데,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신하며,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할 우리가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면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께 우리를 인정하는 고백을 하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가 나의 죄라는 것을 부인하고 살아가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기인하신다. 그렇게 말씀하고 저와 여러분들이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기 위해서 먼저는 우리의 신앙 고백이 있으셨으면 좋겠어요.
주는 그리스도이시옵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러한 개인의 신앙고백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 신앙 고백이 주변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선언할 수 있는 놀라운 복음의 메시지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 가운데 복음을 알고 전해야 되는 걸 알면서도 머뭇머뭇하고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던지 그것을 전하면서 사는 것,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 그것이 필요한 것이죠.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려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이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그런데요.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원들 앞에서 공회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기뻐하는 말을 하지 않았던 거예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그들이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기본적인 마음속에 또한 더불어서 오늘 4가지 어떠한 모습으로 이들이 복음을 전했어요 이들은 학문 없는 범인이었지만 예수와 함께하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전할 수 있었죠.
두 번째 뒷받침해 줄 만한 확실한 증인이 그들 곁에 있었다. 우리도 증거할 만한 경험, 증거할 만한 내가 가진 증거물이 있어야 돼요.
세 번째 코란데오 신앙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이었고, 네 번째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단호한 결단이 그들에게 저와 여러분들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 저와 여러분들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어디에 있든지 복음의 산 증인이 되는 거룩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