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 정전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경복궁에 입궐했을 때 근정문을 통해 들어가서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며, 좌측에는 수정전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궁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2. 이름
정도전이 《서경》(書經)의 구절을 이용하며 왕은 부지런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勤) 잘 다스려진다(政)"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태조실록》 태조 4년 10월 7일 기사.)
이 이름이 쓰인 현판은 중건 당시 이흥민(李興敏)이 썼다고 한다. '근(勤)' 자는 왼쪽 변의 아래에 가로획이 하나 생략된 이체자인데, 서체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3. 역사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같이 지었다. 용, 봉황 문양을 새긴 청기와들로 지붕을 뒤덮어두어서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중략)...우리 나라에서는 다만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에만 청기와를 덮었을 뿐이고...(중략).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2월 28일 계묘 4번째 기사 중.
즉, 사극이나 영화 등의 대중매체에서,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된 고종 시기를 제외한 세종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의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은 청기와 건물로 표현해야 옳은 재현이라는 것이다. 세종 이후라 하는 이유는 1443년(세종 15년)에 근정전 취두(鷲頭, 치미나 용두와 같은 망새로서 용마루 양쪽 끝에 세워 놓은 대형 장식 기와)가 비로 인해서 무너졌는데, 비싼 청기와와 아련와(牙鍊瓦, 조개껍질 가루를 발라 만든 기와)중에 무엇으로 덮을지 고민하면서 청기와를 정밀하고 좋게 구워 만드는 기술을 시험해 보라는 실록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유력하다.
기존에 청기와가 덮여 있었을 시 아련와를 고민한다는 것은, 더 값싼 아련와를 정전에 덮는 꼴이 되고, 편전은 이미 청기와가 있으니 격이 떨어지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단 사정전은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청기와로 복원했는지는 알 수 없어 선조 대의 사정전은 어떠했는지가 애매한 위치에 있다.
중종 시대에 그린 《의령남씨가전화첩》에 수록된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이 그림은 임진왜란 이전 근정전의 모습을 상세히 그린 그림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1535년(중종 30년) 당시 국왕이었던 중종이 왕세자의 책봉 16주년을 맞아 왕세자의 교육에 힘쓴 서연관 39명에게 베푼 연회를 묘사한 것으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근정전의 정문이 중층으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작품이 그려진 시기로부터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근정전에 청기와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표현되지 않은 까닭은 밝혀지지 않았다. 15년 사이에 모종의 사유로 근정전 지붕을 수리하였거나, 모사 과정에서 지붕에 덮인 기와를 잘못 그렸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경복궁의 전경을 개괄적으로 묘사한 1550년(명종 5년)의 〈비변사계회도〉와 1581년(선조 14년)의 〈기성입직사주도〉에도 근정전에 해당하는 중층 정전 건물이 그려져 있지만, 그 구조가 자세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불에 타 사라진 후 그의 아들 광해군이 복원을 시도했었는데, 이때 값비싼 청자 기와로 복원하려 해 많은 반발을 사기도 했다.
영조 시대에 그린 《의령남씨가전화첩》에 수록된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
인조반정 이후 조선 정부에서는 복원을 포기했다. 대신 남아있는 돌 축대만을 일종의 예식 장소로 사용했음을 영조 때 그려진 《의령남씨가전화첩》에 수록된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후 흥선대원군이 1867년(고종 4년) 중건했다. 이후 고종이 근정전에서 공식적으로 정도전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정도전에 대한 사면을 반포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을 때도 철거되지 않고 자리를 지켰으며 광복 이후 6.25 전쟁의 화마 속에서도 무사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85년 1월 8일에 근정전을 국보 제223호로 지정했다.
현재 근정전의 모습은 2000년대 초 대대적인 보수와 수리를 거친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토 마코토 등 조선총독이 각종 행사를 할 때 어좌에 앉아 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을 진압하다 사망한 일본인 경찰의 위령제도 일제강점기 기간동안 수시로 근정전에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해방후에 들어서는 위와 같이 공연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2023년 9월 12일, 김건희가 근정전의 어좌에 앉은 것이 논란이 되었다.
4. 구조
2단 짜리 석축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2층 전각이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다포 양식이며 기둥은 원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지붕 측면의 합각은 나무판으로 마감했다. 지붕에는 용두와 취두, 처마에는 잡상을 올렸다. 잡상 개수는 7개인데, 경복궁의 옛 사진 자료들을 보기에 따라서는, 정확하진 않지만 1층에는 8개, 2층에는 10개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잡상을 홀수로 놓는 것이 원칙#이라고는 하나, 덕수궁 중화전이 10개#인 등 애초에 우리나라의 잡상 수는 딱히 규칙성을 보이지는 않는다.
기단에는 돌 난간을 설치했고, 가장자리 기둥 위마다 12지신 석수를 배치했다. 이는 다른 궁궐 정전에는 없는, 근정전만의 특징이다. 특이한 건 용, 개, 돼지는 없다는 점. 용과 개와 돼지가 제외된 이유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미 왕을 상징하는 용은 여기저기 많아서 따로 둘 필요가 없었고, 개와 돼지는 용과 상극이라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라고 한다. 여기에 근정전의 십이지가 신상(神像, 숭경의 대상이 되는 신의 화상)이 아니라 생초(生肖)의 모습을 한 금수상(禽獸像)인 까닭은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 왕조의 자연주의 태도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특이한 건 천장에 있는 금박 입힌 두 마리의 목조 용 조각의 발톱이다. 발톱이 7개인데 당시 중국의 질서에서 왕세자의 용은 발가락이 3개, 왕(제후)과 황태자는 4개, 황제(천자)는 5개로 규정했다. 따라서 발톱이 7개인 용은 황제보다 높음을 뜻한다.소심한 반항 7조룡이 언제 나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경복궁을 처음 만들 때부터 있었다는 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만들었다는 설 정도가 있다. 이 중에서도 좀 더 지지받는 쪽은 후자인 흥선대원군설. 중국 사신이 왕을 알현할 때 기본적으로 고개를 숙여야 했기 때문에 천장의 용을 볼 일이 없어서 당연히 눈치채지 못했으리란 것이다.
근정전 내부
2000년에 보수하며 근정전에 설치된 집기류들이 이질감이 있다. 도자기, 부채 등은 그렇다 쳐도, 칼이나 향로, 큰 도끼까지 설치되어 경복궁의 정전이라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다.
경복궁 중건 당시 근정전은 주 기둥 4개 중 3개는 전나무를 사용했다. 이는 조선 후기 남벌과 산림 자원 고갈로 인해 11m에 달하는 긴 소나무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100여 년이 지난 2000년대 초 시점에는 부식이 심해서 해체 보수 공사를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근정전은 주 기둥 4개를 모두 교체한 건축물이다.
5. 여담
유홍준 교수의 말에 따르면 근정전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은 근정전 남동쪽 행각(行閣) 모퉁이라고 한다. 출처 서쪽의 인왕산과 북쪽의 북악산의 스카이 라인이 근정전의 지붕 선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경복궁 개방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하다. 마당이 꽤 넓어서 앉을 자리도 많은데다 날씨 좋은날 풍경, 혹은 야경이 정말로 멋지기 때문. 그덕에 경회루와 함께 경복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베트남 후에 황궁에도 똑같은 한자와 이름의 건물이 존재한다. 다만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과는 달리, 후에 황궁의 근정전은 황제의 집무 공간인 편전이다.
조선 임금 중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은 선조이다. 선조 재위 중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전란 중 경복궁이 불타버렸고,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했지만 다음 임금이자 마지막 황제 순종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 중화전에서 양위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근정전에 일장기가 걸린 사진이 유명하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찍은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때 찍은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살아남은 건물이기는 하지만 1920년대에 일제가 내부를 크게 바꾸었다. 또한, 1930년대에는 순직 경찰관들의 위령제를 지내는 등 일제의 행사장으로 전락했고, 광복 이후에는 한 동안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풀이 무성하게 자라기도 했다. 물론, 현재는 조선시대 모습대로 돌려놓았다.
2023년 5월 16일 저녁 이곳에서 '구찌 크루즈 2024 패션쇼'를 개최했다. 이는 구찌가 한국 매장 오픈 25년만에 한국에서 여는 최초의 공식 패션쇼이며 경복궁에서 열린 최초의 패션쇼이기도 하다. 앞서 2022년 11월 1일에 이곳에서 ‘코스모고니 컬렉션 서울’ 패션쇼를 개최하려 했으나 이태원 압사 사고로 인한 국가애도기간에 따라 전날 행사를 취소한 바 있다.
6. 대중매체에서
전기 조선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궁궐이 나오면 근정전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하지만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기에 구한말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복원되기 이전인 조선 후기를 다루는 사극에선 근정전이 나오지 않는다. 특히 숙종부터 정조에 이르는 후기 조선시대는 사극의 소재로 두루 쓰이는 편이라 경복궁이 묘사되지 않는 조선 사극도 의외로 많다.
근정전 내부 어좌에 앉아있는 임금과 대립하는 신하들의 모습도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다만 이런 장면은 대부분 스튜디오 촬영을 하기 때문에 근정전은 그냥 지나가는 배경으로만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는 근정전에서 촬영하기 어려운 경우 용인대장금파크에 있는 궁궐 세트에서 찍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 경우 조선시대에 거의 쓰이지 않은 치미에 솟을지붕까지 얹어있어서 그 앞에 조선의 곤룡포와 관복을 입은 왕과 신하들이 지나가면 한눈에 봐도 어색해보인다.
〈심시티 시리즈〉에서는 숭례문, 63빌딩 등과 함께 한국의 랜드 마크로 꾸준히 등장한다.
카르멘 산디에고 오프닝 장면에서 지나가듯이 나온다.
신비아파트 특별판: 조선퇴마실록에서 하리 일행이 옥새의 눈을 이용해서 조선을 지배하려는 주운을 막기 위해 최종 결전을 여기서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