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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사의 退任式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69년 8월, 외무부에 들어온
동 退任式에서 권대사는 우리나라의 외교발전에 공헌하였다는 이유로 황조 근정훈장(勤政勳章)을
동 退任式에서 권 대사는 예상을 못한 듯, 짧은 메모지를 갖고 하기와 같은 요지의 퇴임사를 하였다. 대학교 후배인 송長官이 후배들에게 한 말씀하시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이 퇴임사는 같은 해, 8월2일과 8월9일 世界日報 海外判(세계일보 해외판)에 하기와 같이 “조국 경제발전에 일조 … 가슴 벅차” 라는 제목과 “붉은 악마의 정렬, 가슴 뿌듯” 이라는 제하에 2회에 걸쳐 全文 連載(전문 연제)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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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고 보니 ‘시간이 날라간다(Time flies)’ 란 말이 맞는다. 어떻게 지나왔을지 모를 정도로 외무부에 들어 온지 벌써 38년이 지나갔다. 나는 오늘 아침 먼 길을 왔다. 제주도에서 온 것이다. 정부에서 작년에 세운, 제주평화연구원을 원장대리 겸 부원장으로 이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난 70년 결혼 하였는데, 당시 제주도에 신혼여행을 갔다. 그런데 엊그제 우리 집사람이 아침 일찍 침대에서 나에게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보통 날이지 무슨 날이냐’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집사람이 눈을 흘겨보면서 ‘결혼 기념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집사람은 말을 이었다.
‘참. 당신은 젊었을 때 키스도 잘 해주더니’ 하여 나는 억지로 등을 돌려, 집사람 볼에다 키스를 하여주었다. 그랬더니 집사람은 한 수 더 떴다.
‘당신은 젊었을 때, 내 귀 볼도 잘 물어 주더니’ 하여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집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여보 어디가요?’ 그래서 나는 뒤를 돌아보고 조용히 이야기했다.
‘틀니 가지러 가요. 틀니!’
그만큼 세월이 빨리 흘러갔다. 어느새 38년이 눈 깜박할 사이에 흘러 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지난 69년 외무부에 들어와, 72년 비엔나로 발령을 받고 나가서 당시 정부가 세워놓은 각국별 수출 활 당 량을 초과하기 위해 사무실 바닥에 샘플을 쌓아놓고 일체의 관계가 없던 대 동구권 교역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오퍼상들을 불러다가 와이셔츠나 양말 등의 샘플을 나누어 주던 동료들의 생각이 난다. 오퍼상들은 대사관에서 보증을 한다니까 믿어 보자고 600불, 700불, 800불 정도의 신용장을 우선 열어 첫 시도를 해봤지만, 왜 그리 클레임이 많이 걸리는지, 한 건도 클레임에 안 걸리고 수출된 예가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속을 썩으면서도 우리나라 수출량 신장을 위해 노력하고 결국 활당 량을 초과하여
그리고
세 번 째 서구과장을 하고 요르단으로 나가 있을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생각난다. 당시에는 중동 붐이 한창이라 거의 모든 건설 회사들이 중동에 진출해 있었다. 석유가 나지 않는 요르단도 예외 일수가 없었는바,
참고로 홍수는 한반도 가까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동사막에도 홍수가 나서 인명피해 등이 생기는데 그 이유는 요르단 인근 사막에는 물이 흡수 되지 않는 찰흙 땅이 약 1m가량 지표를 덮고 있다. 이 땅은 비가 오면 진흙이 되지만 비가 안 오면 딱딱하게 바위같이 말라버린다. 비가 왔다고 하면 이 빗물은 밑으로 흡수가 안 되니, 바로 낮은 곳을 향해 흐르게 되고 계곡에 사는 것을 좋아하는 아랍 인들의 특성 때문에 곧 홍수를 이루게 된다. 홍수의 정의가 재산피해나 인명피해를 동반한 개념이라면 말이다. 이래서 홍수에 닭도 떠내려가고 양도 떠내려가며 또한 사람도 떠내려가고 간다. 이래서 재산피해나 인명피해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요르단 강에 일단 물이 들어가면 이 물은 이스라엘과 반으로 나누어 써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과의 협정내용이다. 그래서 요르단 강에 들어가기 전, 계곡에 땜을 만들어 물을 가두어 놓기 위한 물 전쟁이 치열하다. 정말이지 물은 금값과 같았다.
그런데 이런 물을 가두어 놓기 위한 와디 아랍 댐(Wadi Arab Dam) 공사에 노동자는 매우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유인 즉, 한국노동자는 노동비자를 얻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임금도 비싸며 아시아권 노동자도 노동비자를 받기가 어려운 사정이었다. 단지 이집트나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임금은 싸지만 문화가 달라서 부려 먹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성서에 보면, 나귀 같은 동물이 나온다. 아이들이 등에 나무를 가득 싫고 회초리를 휘두르며 타고 달리는 동물이 있다. 이 나귀는 호마르라고 하는 동물인데 태어날 때부터 귀머거리에다가 벙어리로서 천성은 착하고 예루살렘 쪽에 사는 힘이 장사인 동물이다. 천덕꾸러기이기도 한, 이 동물은 한번 갔던 길만 다니는 특성을 가진 동물로서 간 길만 가기 때문에 사막 길을 운전하다 보면 차에 치어 죽은 호마르 옆에 서너 마리가 머리를 숙이고 모여 서서 조상을 하고 있는 모습을 가끔 보게 된다. 그 만큼 이 호마르는 불쌍한 동물이다.
이 Wadi Arab Dam 공사에는 수로 터널 (Irrigation Tunnel) 을 뚫어 물꼬를 트는 공사가 가장 어려운 난 공사였다, ‘가나안’ 땅의 농토에 물을 대게 하는 공사였다. 이 공사에 책임을 맞은 기술자는 29살의 토목기사(Civil Engineer)로서 한양공대를 나온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암만 지사에 아무리 근로자를 보내 달라고 하여도 지사는 끄떡도 안 하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호마르를 이용하자는 방법이었다.
그는 자기 호주머니에서 100불을 꺼내어 이 호마르 4마리를 사서 계곡 언덕 위까지 서너 번 호마르를 몰고 다녔다. 왜냐하면 앞서 이야기한 대로 한번 다닌 길만 다니는 호마르가 간, 가파른 계곡의 작은 길을 나중에 Bulldozer를 대니 아주 훌륭하고 안전한 길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여하튼 이 기술자는 인도, 필리핀 노동자들을 언덕 위에 배치하고, 아랍 노동자들은 눈에 보이는 텐트 옆에 배치한 뒤 지사에다 대고 건설 기자재들을 언덕 위에 하역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시멘트, 철근 등 건축 기자재가 도착하자 언덕 위에서 대기하던 호마르의 등에 시멘트나 철근을 잔뜩 싣게 하고 머리를 밑 쪽으로 향하게 한 뒤 엉덩이를 때린다. 그러면 호마르가 머리를 끄떡 거리며 언덕을 내려온다. 그러면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동자들이 이를 하역하고 다시 머리를 언덕 위쪽을 향하게 하고는 엉덩이를 때리면, 호마르는 끄떡끄떡 머리를 아래위로 흔들며 언덕 위를 오르게 된다. 이렇게 하여 가장 난공사로 보이던 이 구간이 가장 빨리 끝난 것이다.
지금은 평 왕자로 강등된 ‘하싼’ 왕세자가 당시에는 경제를 담당하고 있었고 후세인 국왕이 안보, 외교분야를 책임지고 있었다. 왕세자는 Oxford를 나온 수재로써 매우 예리한 분이었다. 나는 83년2월 어느 날 하싼 왕세자가 주최한 리셉션에 참석하고 있었다. 후세인 국왕은 당시 영국을 방문 중이었고, 고
그러나 나는 다음날 아침, 경제 기획청 장관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이유인 즉, 왜 그런 이야기를 각료(Cabinet)가 아닌 왕실가족(Royal Family)에게 하였느냐는 이야기였다. 무슨 이야기 인지를 처음에는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동 장관은 Wadi Arab Dam 공사의 수로공사 부분(Irrigation part)을 설명하였다. 참고로 당시 요르단에는 베드윈 족(사막에 양치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을 포함하여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왕실에서 선발하여 장학금으로 미국이나 영국으로 조기유학을 보내고 일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하고는 다시 귀국시켜 정부 각 부처에서 훈련을 시키다가 승진시키는 인사들이 많았었다.
그런데 이 하싼 왕세자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다음날 오전, 특별 경제각료회의를 소집하고 이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즉, 세계적인 일류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지도자들이 이끄는 요르단은 전쟁과 배고픔 등으로 시달린 한국 측의 도움을 받아 경제를 발전시키고 있다는 피를 토하는 자성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언제 한국이 그렇게 발전한 나라였느냐고 물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한국은 앞으로도 경제발전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고 자신의 소신을 전제하고, 그 실례로 이 한양공대를 나온 29살의 토목기술자를 이야기하였다는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한국의 한 대학교를 나온 사람이 2억만 리 요르단에 와서, 요르단 사람들도 생각 못하는 토착적인 것을 이용해 가장 어려운 난공사를 가장 빨리 끝냈다는 것이다. 세계일류대학을 나온 당신들이 이끄는 내각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책망과 함께 말이다. 그래서 경제계획 청 장관이 나를 부른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한국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4번째가 주 덴마크 대사를 하고 있을 때 외신에 자주 인용된 ‘장롱 속에서 금붙이를 꺼내오는’ 평범한 우리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의 용기 있는 애국심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정부는 국제통화가 무엇보다 긴요하였고 이 국제통화에 버금가는 금이 가장 필요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을 전해들은 아낙네들은 꽁꽁 숨겨두었던 자신의 금비녀를 손자, 손녀의 백일반지나 돌 반지와 함께 장롱 속에서 꺼내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당한 어느 나라보다도 외환위기를 빨리 극복하고 경제발전에 매진할 수 있었다. 지금 외환위기를 당한 유럽의 어느나라가 우리나라의 이와같은 슬기를 모방할 수 있을까?
다섯 번째가 열정과 자제를 과시한 붉은 악마의 정열이었다. 내가 독일에 도착한 것은
그런데 사건은 막상 7월8일 신임장을 제정하는 자리에서였었다. Rau 대통령께서는 주요 비서진을 대동하고 신임장제정이 끝난 뒤, 간단한 알현기회(tete-a-tete talk)를 제공하였다. 이 자리에서 Rau 대통령께서 말 문울 여셨다.
‘대사는 이제서야 신임장을 제정하는데 어디에서 이미 많이 본 사람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 각하’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여 대사는 자신의 신임장 제정을 위하여, 남의 나라 대통령 보고 휴가계획을 미루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대통령 각하, 그러나 그러한 말씀은 양국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라는 대통령 각하의 분부로 이해하겠습니다.’ 라고 나는 둘러 대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어쩌면 나의 마지막 해외 포스트가 될지도 모르는 베를린에서 놀다가 올 수도 없어 수출량 배가(97년 이후 100억불 이하에 정체)와 우리의 이미지 개선을 위한 홍보노력 때문에 휴가가 끝날 때까지 신임장제정이나 신임예방을 미룰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휴가기간 중 실질적인 일을 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임장 제정행사가 7월8일 이후에는 휴가가 끝난 9월 달에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Rau 대통령께서 농담으로 시작하시니 나는 한결 수월 해졌다. 그래서 나도 딴청을 부렸다. ‘
‘대통령 각하, 각하께서는 한. 독 양국관계를 위하여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양국 간의 관계심화를 위한 방안도출 등을 위하여 2002.6월 방한 시, 양국 국가원수께서는 한. 독 포럼을 창설하셨습니다. 그 대표단과 함께 지난 6월말 신임장제정 이전인데도 각하를 알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각하의 2002년6월 방한은 양국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한 가지 대통령 각하께서 6월22일 대구에서 있었던, 2002년 한. 일 월드컵 4강전, 독일 팀과의 준결승전에 가셔서 독일 팀만을 응원하신 덕분에 우리 축구대표팀이 독일 팀에게 졌다고 합니다. 허지만 당시 유력한 소문은 한국 팀이 양보하였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른 분도 아니고 국빈께서 오셔서 독일 팀을 응원하시는데, 봐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간단한 동양예의의 발로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팀은 독일 팀이 전통적으로 무서워하는 폴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태리, 불란서 팀들을 모두 격파하였기 때문에 독일 팀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독일 대통령께서는 배석한 사람들과 함께 박장대소를 하셨다. 그리고는 계속하였다.
‘그래요. 그렇다면 2006년 독일 월드컵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이에 맞섰다.
‘각하, 그렇다면 2006년에는 독일 팀이 과거 우리 팀이 양보하여 준 것을 생각하여, 우리 팀에게 양보해줄 거라고 이야기해도 될까요? 양 팀 모두 출전자격(Qualification)은 충분히 얻을 테니까요. 지금 우리 대사관에는 특파원4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각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이야기하면, 대통령 각하의 한국 내 인기는 하늘을 치솟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다음 선거는 한국에서 치르시고 선거운동은 별도로 안 하셔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허락해 주시면 그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는 헛 가래를 치시며, 이어 나갔다.
‘허허. 그건 아니고 ... 2006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열심히 하시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열심히 연습들을 하라고 전해 주시요. 그리고 그게 뭐지요?’
대통령은 배석한 보좌 진들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Heinemann 비서실장이 답하였다.
‘붉은 악마(Red Devil) 입니다.’
‘그렇지. 그 Red Devil 이야.’ 그러고는 老 대통령께서는 계속하시었다.
‘내가 2002년6월 방한하였을 때, 호텔 밑은 물론이고 시청 앞, 중앙청이라고 하는 광장 등 모든 거리가 붉은 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꽉 차 있는데, 도대체 300여 만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유럽의 훌리간 (Hooligan) 생각이 나서 인명피해가 크겠다고 예상을 하였지! 그런데 나중에 주한대사에게 보고를 받으니 인명피해는 고사하고 그 많은 붉은 악마가 있었던 자리까지 깨끗이 치웠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 이것이 한국을 발전시킨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니 부러웠어. 대단한 민족이라고 생각하였지. 라인 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독일국민들한테서도 2006년에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지. 우리의 위대한 국민들한테도 말이야.’
그리고 독일 대통령은 웃었다.
그렇다. 이것이다. 우리가 독일사람들한테 보여 줄 우리 국민들의 우수성이란 붉은 악마가 보여준 열정과 자제가 넘치는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이다. 이래야만 우리 민족의 이미지도 올라가고 우리의 수출과 경제협력도 증대될 것이다. “2005년은 한국의 해”이다. 그리고 우리는 앞만 보고 뛰었다. “2005년 한국의 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상기와 같이 대한민국은 그 동안 어려움을 많이 겪어온 나라이지만 앞으로는 절대 어려움이 없이, 번성해 나갈 나라라고 말이지요. 더욱 더 커나가 세계에 우뚝 서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도 정들었던 외교부를 떠나면서 후배 여러분에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외교/안보정책은 그 동안 북으로부터의 실질적인 위협 때문에 구매력은 고사하고 일인당 국민소득이 100불 이하이던 60년대 초나 세계에서 11위, 12위권에 들어간 2만불 이상 시대의 지금이나 그저 북한 문제에 족쇄가 채워져 끌려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일부 선진국이나 후진국 중에서는 우리나라를 보고 경제적으로는 좀 나아 졌을지 모르나, 정치, 외교적으로는 여전히 어린아이 수준밖에 안 된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주기 바랍니다. 저희들 자체의 대치 등 북쪽의 정권야욕때문에 세계적인 문제는 등한시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독일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통일정책을 논하지 않았습니다. 평화정책과 유럽의 통합정책을 제창하였지, 독일통일을 처음부터 노래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주변 국 이나 국제적으로도 통일문제에 대한 거부감을 비교적 줄여왔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문제(agenda)에 깊이 개입하여 왔습니다. 참고로 이 때문에 2차 대전을 발발시킨 독일은 평화를 애호하는 국가로 부상하였고, 남의 나라 틈바구니에서 고생하던 한국은 짧은 기간에 경제적으로 갑작스럽게 부상한 것을 보고 통일만 된다면, 무서운 존재가 될 것이란 인식을 주변국에서부터 부식돼 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시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말로 우리의 외교/안보정책은 이제는 그 범위(scope)를 넓혀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평화라든지 인권, 민주주의 등 세계적인 문제(agenda)에 좀더 깊이 개입하고 북한문제도 분단국으로서 앞으로 해결하여야 할 주요사항(pillars)의 하나로 의식을 변경해 나가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한때의 벼락부자로 낙인이 찍힐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북한문제는 정권을 연장하려는 일족의 문제이지 분단된 민족의 문제가 더 이상 아닙니다. 이점 꼭 좀 명심해 주기 바라며, 사라져 가는(fading away) 선배의 충정으로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나는 지난 69년 외교부에 들어와, 가정적으로는 아들 두 아이를 잘 키워 한 아이는 시카고에서 건축사로 일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고, 둘째 아이는 서울에서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룬 가운데 직장에 열심히 다니고 있어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지 비행기 멀미(airsickness)라는 가장 비 외교관적인 조건을 타고난 집사람을 그 동안 38년간이나 세계 이곳 저곳 같이 다닌 생각을 하면 미안하게 생각하나, 나 하나 만을 위해 헌신하여 준 점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정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이제 후배 여러분들과 헤어지면서, 다시 한번 부탁하고 싶은 사항은 우리 외교/안보정책을 추진하면서 너무 북한문제에만 매어 달리지 말고 세계적인 agenda에도 집착해 달라는 말씀과 함께 그 동안 애틀랜타 총영사, 주 노르웨이 대사, 주 덴마크 대사, 주 독일 대사 그리고 제주 평화연구원을 이끌면서 일만 생각하고 앞으로만 달린 나머지, 같이 있던 우리 공관 동료들에게는 너무 혹독하게 대하지 않았나 하는 자성을 하며 만약 그랬다면, 이 자리를 빌려 양해를 구합니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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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는 외교부 18층 오찬 장으로 옮겨 Head Table에서
‘이와 같은 일을 그 동안 할 수 있게 하여준 하느님 감사합니다’ 끝.
첫댓글 긴 글을 읽는데
막히지 않고 술술....
요새 자주 접하는 단어 '산업전사'
미처 알지도 못하는 곳에 많이도 있었네요.
타국에 사는 저희는 고국이 잘 살고 있으니 여러모로 든든하답니다.
빈에서 수출실적 올리려 하신 일이 새삼스럽게 와 닿습니다.
양말, 와이셔츠, 등등...
1000불이 안 되는 액수도요.
감사합니다. 우리들 대한민국이 수출 4만불만 넘으면 "만세'하고 제가 개인적으로 한 잔 사지요. 그때를 우리는 컴초딩님이 살아 계실때로 앞당길테니 한번 보십시요. 감사합니다.
38년의 긴긴 임무를 잘 마치시고 퇴임 하셨씀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여러나라에서 누구 보다도 크신 긍지로 열심 이셨군요.
참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도 그 빛을 더욱 비춰 주세요.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