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에게 [경제야언]이라는 상소문을 올려 함양 출신 선비 관료 우정규의 간찰. 우정규는 [경제야언]이라는 상소문으로 일약 실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과연 실학이라는 것이 뭔지...?
우정규가 벼슬을 시작하자 한미한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과연 한미하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 신분적으로 서얼이나 서파를 말하는가, 아니면 경화사족에 비하여 지방 출신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과연 그러한 풍문이 돌아서 그런지, 우정규는 문과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외직이나 중앙 관직도 서파들이 자주하는 우통례의 벼슬을 하였다. [경제야언]도 우통례 때에 정조의 구언에 응하여 올린 개혁안 책자.
[李注書 孝廬 入納 禹翰林 候疏 省式謹封]
省式 日月易得/ 先府君小祥奄迫 仰惟/靡逮之痛 益復如新 悲念萬萬 不審/比來/ 哀履支護否 悲溸區區 記末憒劣依昨/ 內翰之職 誠是夢外 而旋卽出六 私/計甚幸 爲過子婚 日前下來 而不得/久留 來月望間 欲爲上京 其前似未得/相奉 秖切歉恨 姜友今方下去 故玆以/替候 只祈/節哀順變 以副區區之望焉 不宣 伏惟/哀下照 謹候疏上
丁亥(1767, 영조43)三月二十日 記末 禎圭 疏上
새로 한림이 된 우정규가 상을 당한 이 주서에게 보낸 慰狀이다. 위장은 疏狀이라고도 하는데, 이 위장 역시 작은 글씨로 이 주서에게 보낸 것이다. 스스로 한림이라고 칭하였다.
禹禎圭(1718~?)는 몰년도 확인이 되지 않는데, 사전에서는 전적, 예조좌랑, 광양현감, 우통례 등을 역임하고, 『경제야언』을 저술한 문신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1766년(영조 42)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으니 거의 50이 다되어 문과에 합격한 것이고, 이후 가주서(假注書)에 제수되면서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우정규(禹禎圭)의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여보(汝寶), 호는 남파(南坡)이다. 이황의 문인이었던 우희길(禹熙吉)의 현손(玄孫)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우성린(禹聖隣), 할아버지는 우형하(禹亨夏)이다. 아버지는 우서주(禹叙疇)이며, 어머니 풍천노씨(豐川盧氏)는 노세첨(盧世瞻)의 딸이다. 1718년(숙종 44) 경상도 함양에서 태어났다. 1747년(영조 23) 30세의 나이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1765년에는 성균관에서 장의(掌議)가 되었다. 그해 영조가 작헌례(酌獻禮)를 할 때 시행한 책문(策問)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였고,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자격을 얻었다. 이에 1766년(영조 42)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고, 가주서(假注書)에 제수되면서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1787년 우통례(右通禮)에 오른 우정규는 그해 6월 사회 전반에 걸친 제도 개선안을 40여 조항으로 정리하여 『경제야언(經濟野言)』이란 책으로 엮어 상소와 함께 왕에게 올렸다. 여기서 우정규는 지방관의 경험을 바탕으로 민생을 근본에 둔 군제 · 요역제(徭役制) 및 각종 세제(稅制)의 개선을 주장하였다. 이외에 부인수식(婦人首飾) · 과거제 · 교육제 · 국방 · 재정 · 조선(漕船) · 수령 임명 등 정치 · 경제 · 사회 · 군사 등을 포괄하는 다양한 제도 개선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정조는 비변사 등에 명하여 『경제야언』에서 지적한 문제를 검토하게 하였고, 그 방안을 환곡 등의 폐단 시정에 채용하였다.
1789년에는 돈녕도정(敦寧都正)에 임명되었고, 1791년(정조 15)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