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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054-740-7500 / FAX 054-740-7500
관람시간 : 10:00-18:00 (토요일 및 공휴일 1시간연장)
입장마감 : 관람종료 30분전까지
야간연장개관 10:00-21:00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3월~12월 매주 토요일
정기휴관일 : 매년 1월1일, 설날, 추석
임시휴실일 : 4월, 11월 첫 번째 월요일
(기획전시실, 어린이박물관, 정원 및 옥외전시 등은 정상 운영)
입장료 무료
주차비 무료
국립경주박물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성덕대왕신종
통일신라 771년
높이 3.658m, 무게 18,908±2kg
국보 29호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완성은 혜공왕 때인 771년에 이루어졌다.
이 종은 봉덕사(奉德寺)에 달았으나 수해로 폐사된 뒤 영묘사(靈廟寺)에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에 종각을 짓고 보호하였다. 1915년 8월에 종각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겼고
국립경주박물관이 신축 이전됨에 따라 이 동종도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경내로 이전되었다.
일명 봉덕사종·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최대의 거종(巨鐘)으로서 제작 연대가 확실하고 각 부의 양식이 풍요 화려한 동종의 하나이다.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범종을 대표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글은 무슨 내용일까?
성덕대왕신종에는 두 군데에 글이 새겨져 있다. 한 면(현재 동명)에는 성덕대왕신종을 만들게 되기까지의 기록인 산문이 있고,
그 반대면(현재 서면)에는 네 글자씩 50줄로 된 운문과 글을 짓고 쓴 사람, 종을 만든 사람 등이 새겨져 있다.
산문은 "선덕대왕신종지명"으로 시작한다.
이로써 종의 이름이 성덕대왕신종임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이 선대왕인 성덕왕(재위 702-737)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구리 12만 근으로 큰 종을 만들려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자,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재위 765-780)이 즉위 7년만인 대력(중국 당나라 대종의 연호) 6년(771) 신해년 12월 14일에
종을 완성하였다.
운문은 우선 삼국을 아우른 신라를 예찬했다. 이와 더불어 나라 구석까지 성스러운 교화를 펴
모든 것이 새롭게 뻗어나가게 하고,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질서를 기반으로 만대의 번영을 누리자는 각오와 다짐을 적었다.
범종(梵鍾)
종은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그리고 의식을 거행할 때 쓰였다. 특별히 절에 있는 종은 불교를 의미하는 범(梵)자를
붙여 범종이라고 부른다. 이 범종 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에 비유되기도 하며,
이 소리를 듣게 되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는 중생까지도 구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보통 한자로 종하면, 쇠 금(金)변에 아이 동(童)자가 붙은 종(鐘)자를 쓴다.
중국이나 일본 종을 일컬을 때는 이렇게 쓴다.
하지만 우리나라 종을 지칭할 때는 쇠 금(金)변에 종(鍾)자를 쓴다.
중국, 일본 종과 우리나라 종은 스는 한자가 다를 뿐만 아니라 그 모습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종을 매다는 종뉴(鍾紐)[용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용뉴(龍紐)라고도 함]는 중국식의 머리가 둘 달린 용이 아니라,
머리와 다리를 힘차게 뻗치고 있는 한 마리의 용이다.
이 종뉴 옆에는 중국이나 일본 종에는 없는 음통(音筒, 용통甬筒, 음관音管 이라고도 부름)이 있다.
또한 중국 종이나 일본 종과 달리 종의 위아래에는 보상화무늬나 모란당초무늬를 새긴 때[문양대文樣帶]와
4개의 유곽乳廓(연곽蓮廓이라고도 함)이 있으며,
유곽 내에는 각각 9개씩 총 36개의 유두乳頭(연꽃봉오리 형태와 같아 연뢰蓮蕾라고도 부름)가 있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과 종을 치는 부분에 당좌(撞座)가 새겨져 있다.
크고 웅장한 범종의 규모와 외관만 보이다가... 세부사항들을 읽고 찾아보는 재미가 더해져 새삼 새롭게 보인다.
열심히 성덕대왕신종을 살펴보고 있으면 장엄하고 맑은 맥놀이의 신비한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정시 20분 40분 그렇게 20분 간격으로 녹음된 종소리가 들린다.
신라역사관으로 들어간다.
제1전시실은 아득히 오래된 구석기시대부터 5세기 말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기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선사시대 돌도끼를 쓰던 경주 일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집단을 이루고
사회·정치적으로 점차 성장해 국가를 세웠는지 볼 수 있다.
또한 건국 이후 천년왕국의 기틀을 다져간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 무조건 등장하는 신석기 대표유물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櫛文土器)라고도 한다)
왜 밑이 뾰족할까?
강가 모래에 파묻기 위해서 그리고 여러 개를 포개어 운반하기 쉽도록 끝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흙으로 토기를 빚다
토기는 약 1만 년 전 진흙을 불에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화화적 변화를 깨닫고 만든 인류 최초의 발명품으로
무엇을 담는 그릇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토기의 발명으로 끓이고 데치고 삶는 등 조리법이 다양해져
먹을거리의 범위가 한결 넓어지고 보관이나 운반이 손쉬워졌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에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무늬의 토기를 만들었다.
특히 기원전 5천 년 무렵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 처음 나타난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빗살무늬토기의 무늬는 표면 전체에 새겼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간략해졌으며,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민무늬토기로 바뀌었다.
요령식 동검은 한반도에서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나타났다. [예전 교과서에서는 비파형동검(청동기 전기)이라고 불렀었다.]
이는 중국의 요령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고조선의 특징적 검이라는 점에서 '고조선식 동검'이라고도 부른다.
용령식 동검은 아랫부분이 넓고 둥근 형태를 이루며, 가운데 좌우에 뾰족한 돌기(突起)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검과 자루를 따로 만들어 조립하는 형식으로, 검과 자루가 한 몸인 중국식 동검과는 다르다.
한국식 동검은 요령식 동검처럼 뚱뚱하지가 않다. 그래서 예전 교과서에서는 세형동검(청동기 후기)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무덤으로 본 사로국(사로국: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로 훗날 신라로 발전함)의 지배자
신라 건국 이후 서기 300년 즈음까지 지배층의 무덤은 널무덤 또는 덧널무덤(목곽묘 木槨墓)이었다.
널무덤은 구덩이 안에 나무 널(木棺)을 넣은 것이고,
2세기 중엽 무렵에 나타나는 덧널무덤은 구덩이 안에 나무 덧널(木槨)을 만들고 그 속에 널과 부장품을 함께 넣은 무덤이다.
덧널무덤은 이중으로 주검을 보호하고 좀더 많은 부장품을 넣을 수 있는 구조였다.
경주 사라리 130호 널무덤과 구어리 1호 덧널무덤처럼 지배층의 무덤에는
쇠로 만든 창과 같은 무기나 도끼, 덩이쇠를 바닥에 가득 깔아놓은 예가 많다.
이러한 무덤과 그 부장품들을 바탕으로 이사금 시기 지배층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으며
더불어 사회에서 철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 수 있다.
국보 195호 토우장식 항아리(신라 5세기)
1973년 미추왕릉지구 정화사업을 위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출토 되었다.
긴목 항아리(長頸壺)에 사람과 자연의 생명체를 주제로 한 다양한 형상의 토우를 부착하여 최대의 장식효과를 낸
신라의 가장 대표적인 토우 장식 항아리다.
항아리의 목과 어깨부분에는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고 있는 뱀과 오리 모양 토우를 세 곳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 성기(性器)가 강조된 남자, 신라금(新羅琴)을 타고 있는 사람, 물고기,새, 거북 등의 토우를 장식하였다.
순간 포착된 생동감과 진흙의 투박함이 넘치는 이러한 장식토우들은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기원하는 조형물로서
신라인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자연과 조화된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경주 교동 금관(신라 5세기)
경주 교동의 한 무덤에서 도굴되었다가 1972년 압수된 금관이다.
지름이 비교적 작은 관테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을 세웠다.
이 장식은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산山자 모양의 나뭇가지와는 달리 비교적 사실적인 나뭇가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 관테나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다른 금관들과는 달리 점무늬 또는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지 않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지금까지 발견된 6개의 신라 금관(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교동, 천마총, 황남대총 북분)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여겨진다. 크기도 가장 작은 이 금관은 마립간 시기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4세기 중반에 마립간이라는 지배자를 중심으로 고대 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립간과 그 일족은 금·은·금동으로 화려하게 세공을 한 각종 장신구를 걸쳤고, 또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도 썼다.
제2전시실에서는 신라가 황금의 나라였으며, 지배자들에게 황금은 곧 권력의 상징이었음을 보여준다.
금관총 금관발견(1921 조선총독부)
이사지왕(2013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 박물관 자료 정리 사업 추진 금관총 부장품 보존처리 중에 이사지왕 명문의 발견
재발굴(2015 국립경주박물관)
금관이 처음 발견되어서 금관총
그래서 이사지왕이 너무 궁금하다. 실제 임금이든 임금으로 불리던 자이든 명칭이 발견된 것 신라무덤에서는 처음이다.
2016년부터 복원사업에 착수해 3차례에 이르는 설계자문회의와 발굴조사, 설계공모, 문화재청 설계승인을 등을 거쳐
2019년 1월에 착공하여 보존전시공간을 고분 형태로 복원한 천마총과는 달리 금관총을 현대적 건축물로 복원하여
2022년 6월중에 일반에 공개한다.
2020년 12월 금관총 부지 인근서 착공에 들어간 "금관총 고분정보센터"는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이며
2023년에야 정식 개관할 전망이다.
전날 2022년 4월 12일에 방문했을 때 완전 새로운 현대식 건축물로 변모한 금관총의 모습에 깜짝 놀랐었다.
신라 왕릉, 황남대총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라는 뜻의 황남대총은 두 개의 무덤이 남북으로 길게 맞붙어 있는 무덤이다.
남북 길이가 120m이며, 동서 길이는 80m이다.
남쪽 무덤(남분)을 먼저 만들고, 북쪽 무덤(북분)을 나중에 덧붙여 만들었다.
남쪽 무덤에는 남자, 북쪽 무덤에는 여자가 묻혀있었다.
무덤의 크기가 주변 무덤들을 압도할 정도로 크고, 껴묻거리(부장품)는 모든 면에서 최상급이며,
묻힌 이는 화려한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어
신라의 최고 통치자였던 마립관과 그 부인, 즉 왕과 왕비의 능이 분명해 보인다.
황남대총은 5세기 초부터 중후반 사이에 반들어졌다고 보는데, 금관을 비롯한 수만 점의 껴묻거리는
5세기 크게 발전하는 신라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이한 점은 마립간(왕)이 묻힌 남쪽 무덤에서 금동관이 나오고, 부인(왕비)이 묻힌 북쪽 무덤에서 금관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마립간을 위해 온갖 재물을 채우다
황남대총 남쪽 무덤(남분)의 주인인 마립간을 위해 커다란 딸린덧널(부곽 副槨)을 설치하고 온갖 재물을 가득채웠다.
이 창고를 가득 채운 수많은 물건은 마립간이 가진 권위를 보여주고 있다.
군사력을 드러내는 무기, 생산력을 보여주는 농,공구, 경제력을 나타내는 덩이쇠(철정 鐵鋌),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토기는
마립간의 특별한 지위를 나타내고 있다.
음식이 가득했을 큰항아리(대호 大壺)는 45점이 있다.
철제 무기로는 큰칼, 창, 화살촉 등이 있고,
농,공구는 삽날과 쇠스랑 등이 있다.
화폐로 추정되는 덩이쇠(철정)는 10의 배수 단위로 묶어서 최소 1,330개를 넣었다.
큰항아리 위에는 말을 부릴 때 쓰는 여러 가지 연장이나 말에 딸린 꾸미개, 그릇 등을 켜켜이 쌓았다.
말갖춤은 적어도 7벌을 넣었는데 금동이나 은 등 귀금속으로 꾸민 것(장식마구)도 4벌이나 있다.
마립간이라는 확신을 가져도 총일 수 밖에 없는... 그래도 봉분이 커서 대자는 들어갔네... 황남대총
왜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을까?
경주의 중심지에는 작은 산봉우리처럼 보이는 큰 무덤들이 있다.
이 무덤들은 4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만들어진 무덤으로 구덩이를 파고 나무 덧널(목곽 木槨)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과 껴묻거리(부장품)를 넣은 뒤 덧널 주위와 위를 돌로 덮고 다시 흙을 입혀 다진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積石木槨墳)이다.
황남대총, 천마총, 금관총 같은 무덤들은 모두 이와 같은 구조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큰 무덤을 만들었을까요?
박씨, 석씨, 김씨가 교대로 왕위를 이어나가던 신라는 마립간이 등장한 이후 김씨가 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맏아들 중심의 왕위 계승 원칙이 수립되어 왕권이 제도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 와중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온갖 호화스러운 물품을 가득 넣어 장례를 치르면서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왕의 권위를 과시하였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은 국보 제191호로 지정되어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
대신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관 국보 제188호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신라의 황금문화
오랜 시간 변치 않고 빛을 발하는 금은 예로부터 영원함과 고귀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마립간이 통치하던 5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신라는 고대국가로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고
이 150년간이 신라 황금문화의 전성기였다.
관을 비록하여 허리띠, 귀걸이, 팔찌, 반지, 목걸이 등 각종 장신구뿐만 아니라 무기와 말갖춤[마구], 그릇 등을 만드는데
금을 사용 하였다. 이러한 각종 금제품을 무덤안에 함께 넣어 죽은 이의 영원한 안식과 내세에서의 고귀한 삶을 기원하고,
한편으로는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르는 산자의 위세를 나타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6개의 금관 모두 순금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교동 금관(5세기 초)의 금함유량이 가장 높다.
교동금관보다 늦게 제작된 황남대총 북분-금관총-천마총-금령총-서봉총 등은 금함유량이 떨어진다.
순금만 사용하면 연성때문에 굽어지거나 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은을 합금해서 강도를 높였다.
그런데 주변에 아무리 찾아봐도 금광이 없는데 도대체 황금의 나라 신라는 어떻게 금을 조달했을까?
신라인들은 사금을 채취해서 금을 조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관
신라에는 금, 은, 금동으로 만든
머리띠 형태의 관[대관 帶冠], 고깔모양의 관[모관 帽冠], 새날개모양의 관장식[조익형관식 鳥翼形冠飾] 등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관이 남아있다.
이 가운데 금으로 만든 관은 경주 시내에 있는 돌무지덧널무덤에서만 출토되며,
금동으로 만든 관은 경주와 주변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금으로 만든 관은 최고 권위를 가진 자만이 제한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그 어떤 유물보다 착용자의 신성성과 정통성을 드러내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왕족보다 낮은 귀족 또는 지방의 지배자들에게는 금관이 아닌 금동관을 나누어 주었다.
제3전시실에서는 신라의 강화된 왕권과 지증왕에서 진흥왕대의 영토 확장 및 중앙집권화 과정, 삼국통일의 과정을 중심으로,
삼국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하는 통일신라의 문화도 함께 다루고 있다.
법흥왕대 불교 공인 관련 기록인 이차돈 순교비와 함께 흥륜사 및 영묘사 등 사찰 출토품의 전시도 이루어지고 있다.
보물 제1411호 지정되어 있는 임신서기석
생각보다는 작은 돌이고 글씨가 아주 선명하고 뚜렷하게 보인다.
1934년경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石丈寺)터 부근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 다섯 줄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74자가 새겨져 있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未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해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집지하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서약을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지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즉, 시·상서·예기·전(左傳 혹은 春秋傳의 어느 하나일 것으로 짐작됨.)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
이차돈 순교비 (비지정문화재 이차돈 순교 약300년뒤인 817년(신라 헌더왕 9) 제작)
법흥왕의 근신(近信)으로 일찍 불교에 귀의하였고 벼슬은 왕의 뒷바라지를 하는 내사사인(內史舍人)이었다.
527년 8월 5일 22살의 젊은 나이로 육신을 버려 순교함으로써 신라 땅에 찬란한 불교의 꽃을 피우게 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이 날아가서 경주 동천동의 소금강산 정상에 떨어지고
목에서는 흰 젖이 솟아났으며 꽃비가 내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신라에 처음 불교가 들어온 것은 미추왕 때이며,
이후 19대 눌지왕, 21대 소지왕 때도 계속 불교가 유입되었으나 정착되지 못하고 쫓겨남을 반복하다
마침내 23대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말미암아 공인이 된 것이다.
2018년 11월 27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010호로 지정된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慶州 人面文 圓瓦當)의 모습이다.
연꽃무늬를 새겨놓은 일반적인 수막새와는 달리 얼굴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어 흔히 '신라의 미소'라고도 불린다.
다음은 국은기념실로...
'국은(菊隱)’은 고(故) 이양선 선생(1916~1999)의 아호(雅號)다.
국은기념실은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국보)을 비롯하여
이양선 선생이 평생 동안 모은 귀중한 문화재 666점을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하였기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전시실이다.
삼국시대 작품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陶器 騎馬人物形 角杯)은 1993년 1월 15일 국보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역사관을 나와 신라미술관으로 이동하기 전에 옥외전시물이 눈에 들어와서 먼저 살펴보기로 하였다.
불국사에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을 재현해 놓았다. 불국사에 가서 보면 되지...굳이 이걸 왜?
사실 1973년 7월 3일 불국사 복원 준공식에 참여한 박정희 대통령이
다보탑 돌사자상 4개 중에 코가 떨어져나간 1개를 제외한 나머지 3개가 도난당한 아쉬움과
오랜 비바람에 씻기고 깎여 뭉퉁해져 절묘한 옛 모습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해 두 탑을 새로 만들라고 지시를 했다.
그래서 어렵게 옛 탑의 석질과 같은 돌로 월성군 외동면 북토리 산에서 풍화에 강한 화강암을 캐어와 원형대로 만들어
1975년 4월 30일 이곳에 세웠다.
선견지명이 있었던 건지 2016년 경주 지진으로 다보탑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그래서 온전한 돌사자상 4개가 네 귀퉁이를 차지하고 늠름하게 앉아있다.
(돌사자상 하나가 현재 대영박물관 수장고 창고에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문제 하나... 실제 십원짜리 동전에는 돌사자상이 몇마리 보일까요?
국보 제20호 경주 불국사 다보탑 (1962년 12월 20일 지정)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전형적인 신라 석탑 양식과는 매우 다른 이형 석탑이다.
불국사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2개 탑이 마주 보고 서 있는데, 그 중 동쪽 탑이다.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이루어져 있다. 하층기단의 4면에는 계단이 있고 양쪽에 난간의 석주로 보이는 유구가 서 있다.
상층기단에는 4개의 우주와 중앙에 탱주가 서 있으며, 우주 위에는 2단의 두공이 십자모양으로 놓여 있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려놓았다.
갑석 위에는 8각형의 신부가 3단 있는데 하단은 4각형의 난간 속에 별석을 돌렸고,
중단은 8각 난간 속에 죽절형의 기둥을 세우고, 상단은 8각 앙련 위에 꽃술형 기둥 8개가 8각의 신부를 돌려싸고 있다.
[다음백과]
대부분의 석탑들은 탑의 몸돌(탑신)이 모두 막혀있는데
유일하게 불국사의 다보탑의 탑신에는 어째서 빈 공간이 있고 그곳에 이르는 계단이 4개가 있을까?
불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은 다보여래와 석가여래를 상징한다.
다보여래는 석가여래 이전의 부처였고
법화경을 설법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탑 모양으로 솟아나서 그 설법의 진실을 증명하리라 다짐하였는데,
때마침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하자 다보여래가 탑의 형상으로 땅에서 솟아났고
이 장면을 그대로 만든 것이 불국사의 대웅전 마당이다.
다보탑 탑신의 빈 공간은 그래서 석가여래를 맞이하기 위함인 것이다.
국보 제21호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1962년 12월 20일 지정) 석가탑 도는 무영탑이라고도 한다.
이 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이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는데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적당하며 간결하다.
상·하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각각 2개씩 새겨져 있고 다른 조각은 없다.
탑신을 받치는 갑석은 4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아래에는 부연이 있고, 윗면은 경사가 져 있으며 2단의 탑신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그 위에는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 실상사 백장암 3층석탑의 상륜부를 모방해 결실된 부분을 보충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것 등은 유례가 드문, 주목할 만한 예이다.
[다음백과]
751년경에 만들어진 세계 최고(最古) 목판 인쇄본인 국보 제126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1966년 10월 13일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하였을 때
바로 설법을 하는 석가탑 2층 탑신부에서 금동제 사리함 등의 여러 유물과 함께 발견되었다.
석가모니가 영축산 돌산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기 때문에
돌산을 표현하기 위해 자연석 위에 짜맞춰 얹혀진 형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가 있다.
부처님이 앉았던 자리를 금강좌라고 하는데 연꽃무늬로 표시해 여덟군데 팔방으로 표시한 것이다.
석가모니의 설법이 팔방으로 퍼져나가기를 기원하는 뜻이었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순전히 내생각... 태클금지)
마치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잠깐 보고 온 듯한 이 느낌은 뭐지?
불국사 대웅전앞에 있는 석등처럼 석등이 있다. 그런데 모양이 다르다.
이 석등은 불국사 석등을 재현해 만든 것이 아니고 경주읍성을 비롯한 여러곳에서 모은 부재들을 합쳐 만든 것이다.
그래서 한데 어우러지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다만 석조유물들을 이렇게 활용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석불의 머리는 왜 없어졌을까?
1965년 경주 분황사를 발굴 조사할 때, 절 안에 있는 우물 속에서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석불들이 나왔다.
그런데 한결같이 머리가 잘려진 것들이었다. (8점 전시) 불상의 머리는 왜 없어진 것일까?
그 원인으로는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들 수 있다. 지진이 나면 받침대 위에 있던 불상이 굴러 떨어지는데,
약한 부분인 목이 부러졌기 쉽다. 또 몽고군의 침입, 왜란, 호란과 같은 전란에 의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일부러 불상을 훼손한 일도 있었다.
실제 머리가 잘려진 석불 8점이 전시되어있다.
그리고 국립경주박물관의 제일 구석진 곳에 고산사터 삼층석탑이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8호로 지정된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慶州 高仙寺址 三層石塔)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던 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인해 절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지금의 자리인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놓은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탑신도 여러 개의 돌이 조립식으로 짜 맞추어져있으나, 3층 몸돌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사리장치를 넣어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배려로, 석탑을 해체·복원하면서 밝혀졌다.
지붕돌은 윗면에 완만한 경사가 흐르는데, 아래로 미끄러지는 네 귀퉁이가 들려있어 경쾌함을 더해주고 있다.
밑면에는 계단 모양으로 5단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통일신라시대 전기인 7세기 후반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전형적인 석탑양식으로 옮겨지는 초기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이 탑과 함께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에서 시작되어
이후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그래서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고선사지 삼층석탑, 불국사 삼층석탑을 신라 3대 석탑이라고 하며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고산사터도 역사적 의미가 있고 고산사지 삼층석탑도 국보인데...
가람구조와 아무런 관계없이 국립경주박물관의 구석탱이에 무의미한 모습으로 놓여 있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고선사터 삼층석탑은 감은사터 삼층석탑과 쌍둥이 탑이라고 할 만큼 닮았다.
다만 고선사터 삼층석탑의 1층 몸돌에 문[문비 門扉]을 표현한 점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고선사터 삼층석탑은 감은사터 삼층석탑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의 중간 단계로 보인다.
나한상 모서리기둥
네 개의 네모난 돌기둥을 조합하여 만든 어떤 구조물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다.
직각으로 꺾인 바깥쪽의 두 면을 잘 다듬은 후, 인물상의 옆모습을 얕게 튀어나온 평부조(平浮彫)방식으로 새겼다.
이 상들은 불교의 성자(聖者)인 나한으로 추정되며, 연꽃대좌 위에 서서 손잡이가 달린 작은 향로(병향로)를 들고
마치 어딘가를 향해 공양하거나 무언가를 중심으로 도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자세, 의복과 신발 등 전체적인 형태가 석굴암의 십대제자상과 비슷하여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네모 반듯하게 만들어진 이 네 개의 기둥이 어떤 구조물의 일부였는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 신기한...
유사한 크기와 모양의 구조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형의 구조물 형태를 모르는 것이라면...
일반적인 쓰임새 보다는 독특한 구조물의 일부였을 것이라고 추정이 가능하다. (물론 순전히 내생각이지만...)
어쩌면 첨성대 못지않은 그 어떤 것이 서라벌에 존재했을 수도...
금강역사
본래 분황사 동쪽 도로 건너편 구황동 절터에 있던 것을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왔다.
이 절터에는 지금도 석탑 지붕돌, 주춧돌과 함께 네 구의 금강역사상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같은 모양의 벽돌모양 석재도 발견되었다.
아마도 분황사처럼 모전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금강역사상 역시 분황사 모전석탑의 예와 같이 탑의 감실(龕室) 좌우를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금강역사는 불교가 성립된 이후에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하였다.
보통 쌍으로 만들어지는데, 한 구는 입을 벌리고 다른 한 구는 입을 다물과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아형과 훔형)
범어로 아는 입을 벌렸을 때 나는 가장 첫 소리이고, 훔은 입을 다물 때 나는 가장 마지막 소리라고 한다.
이러한 의미로 미루어보면 부처와 부처의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킨다는 상징으로
금강역사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이게 입을 다문 훔형이고...
이게 입을 벌린 아형인듯... 재미있다.
이제 실내인 신라미술관으로 들어간다.
신라의 찬란한 미술문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신라미술관은 1층의 불교미술 I실과 II실, 2층의 불교사원실로 이루어졌으며,
삼국~통일신라에 이르는 750여 점의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불교미술 I실에서는 경주지역 여러 절터에서 출토된 불교미술품을 보여준다.
삼국시대 신라 불교조각의 정수인 남산 장창골 출토 석조미륵여래삼존상(보물), 능지탑과 석장사 터 출토 소조불상,
창림사 터와 칠불암 출토 석경, 전(傳) 황복사 터 출토 문화재 등이 대표 전시품이다.
불교미술 II실에서는
신라의 소형 금동불상과 대형 석조불상을 유형별, 시대별로 구분하여 불교조각의 전개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을 비롯하여 남산 왕정골 출토 석조여래입상, 낭산 출토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송화산에서 출토된 머리와 두팔이 파손된 반가사유상을 만나볼 수 있다.
머리 두팔이 없는데 진짜 앉은 다리의 모습만으로도 사유를 떠올릴 수 있다는... 요가 자세가 떠올라서 그런걸까?
2층의 불교사원실은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를 비롯해 분황사, 감은사, 사천왕사 등에서 출토된 사리기(감은사 서탑 사리장엄구, 보물), 기와, 전돌, 벽전 등을 소개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절이 별처럼 많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는 구절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전시실이다.
신라 최초 사찰인 흥륜사부터 9~10세기 사리기까지 아우르는 풍성한 이야기를 담았다.
황룡사 구층목탑과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발견된 다종다양한 사리기와 공양품은
불교 공인 이후 사찰에 투입된 왕실의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황룡사 사리기 외함 표면에 새겨진 찰주본기(보물)는 탑의 건립과 중수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다.
어~~ 이 장면 어디서 봤더라... 한참을 생각하다 전날 아침에 대릉원에서 찍은 사진이 떠올랐다.
전시실 구성을 정말 세련되고 감각적으로 잘 구성한 듯...
자칫 전시물만 있었으면 지루했었을 공간을 입체감있게 구성해 놓아서 여느 세계적인 역사박물관 못지 않다.
이렇게 보니 경주는 정말 절과 탑이 많구나 느꼈다.
황룡사의 치미
황룡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치미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치미는 망새라고도 하는데, 황룡사 치미는 투구 모양으로 생겼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 중에서는 가장 커서
그 높이가 182cm에 달한다.
크기가 크다 보니 상부와 하부를 따로 분리하여 구웠다.
치미는 건물의 용마루 양쪽에 올려져 화재를 예방하는 벽사의 기능과 건물을 장엄하고 웅장하게 보이는 장식물로 사용되었다.
거대한 황룡사 치미는 황룡사의 금당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측면과 뒷면에는 연화문과 남녀 얼굴무늬를 장식하였는데,
재미있는 것은 남자얼굴상은 수염까지 세세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1층 로비에 위치한 실감형 디지털 콘텐츠 ‘성덕대왕신종 소리체험관’에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성덕대왕신종의 진정한 울림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는 주제로
성덕대왕신종의 맑고 웅장한 소리, 맥놀이 현상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감상할 수 있다.
이제 다시 야외로 나가서 다보탑과 석가탑을 가로질러 월지관(안압지관)으로 이동한다.
월지관은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에서 발견된 약 3만 점의 통일신라시대 문화재 중에서 엄선한 1,100여 점의 문화재를
주제별로 전시하여 통일신라 문화, 특히 왕실의 생활문화 전반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월지는 신라 동궁 안에 있던 인공 연못이다.
조선시대 이래 오랫동안 안압지로 불렸으나 신라 사람들은 월지라고 하였다.
문무왕 14년(674)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월지관에는 용면문와, 금동판불상(보물), 금동초심지가위(보물) 등
신라 왕실과 귀족의 화려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안압지에서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변경된 것에 혼란은 있을 수 있지만 원래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는 좋다.
안압지라고 하면... 물론 다른 이야기겠지만 창경궁이 예전에 창경원으로 불렸던 느낌이라고 할까?
신라인들에게 동궁과 월지였다면 당연히 그렇게 불러줘야지.
월지와 신라의 궁궐 건축
신라시대 궁궐의 한쪽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동궁 궁궐은 신라 때는 수십 개 전각이 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1, 3, 5호 건물지 3개만 복원한 상태다.
마치 야간관람을 하듯이 조명을 만들어 놓았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 위로 올라가 보았다.
흑백사진의 옛날 동굴과 월지의 모습도 보이고...
마치 동굴과 월지를 관람하는 듯한 난간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다.
아무래도 무덤에서 출토되지 않고 연못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라 실생활의 쓰임새가 있는 것들이 많이 보였다.
연못 동쪽의 호안석축 앞에서 뒤집힌 채로 발견됐다고 하는 배도 전시되어 있다.
세 쪽의 나무를 통째로 파낸 뒤 이물과 고물쪽 뱃바닥에 참나무 각재를 가로질러 조립했다.
이 배는 통나무 배에서 나무판을 이어 붙여서 만드는 배로 넘어가는 중간단계의 형태다.
동궁과 월지 축소 모형을 2층에서 내려다 보니 밑에서는 볼 수 없었던 건물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신라 귀족들이 술자리에서 즐겼다는 14면 나무 주사위 '주령구(酒令具 Wooden Dice)'의 모습이다.
술먹고 주사위를 돌려서 벌칙을 수행하는 놀이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주령구는 신라 경덕왕 6년(747)~혜공왕 9년(774)에 작성된 목간(木簡)이 나온 토층보다 훨씬 더 아래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최소한 8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신라 유물임을 알 수 있다.
애석한 것은 이 주령구 실물은 발굴 후 건조기에서 습기 제거작업을 하다가
레인지 오작동으로 그만 불타 소실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것은 사진자료 등을 바탕으로 재현한 복제품이다.
중간에 이런 액자식 포토존도 있다.
큰항아리가 있는데... 항아리 입구 부분 중간에 자세히 보면 '십석입옹(十石入瓮)'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10석에 해당하는 (주로 곡식의) 양이 들어갈 수 있는 항아리라는 뜻이다.
통일신라 시대 1석은 약 52리터였다. 이 명문은 신라시대 도량형 이해에 결정적인 단어를 제공하고 있다.
월지관(압압지관)을 나와 나가는 길에...
이렇게 국립경주박물관에서의 모든 관람을 마쳤다.
눈에 익숙한 보고싶은 것만 보고... 자세히 관람하지는 못해서... 아쉬움도 있지만...
그래도 큰 숙제하나를 끝마쳤다는 뿌듯함도 함께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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