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시대의 문익환
영화 [1987]의 대미를 장식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스물여섯 명의 열사 이름을 목 놓아 부르던 문익환 목사의 인상적인 장면은 그를 기억하지 못할 젊은 세대에게 신선한 감동을 심어 주었다. 뒤이어 이어진 평창동계올림픽의 남북 단일팀 여자 아이스하키팀과 남북공동응원단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북한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전 세계에 평화와 화해의 감동적인 모습을 선사한 남북 정상의 ‘판문점 선언’은 특히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벅찬 희망으로 다가오고 있다. 어느 누구도 남북 관계가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야말로 문익환 목사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 이건 진담이라고 (…)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 거리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 버리는 거지 /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
1989년 늦봄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파격 그 자체였다. 그러나 냉전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정권들과 언론의 왜곡된 프레임에 갇혀 지금껏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었다. 문 목사가 김일성 주석과 만나 남과 북이 자주와 평화, 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해 통일 문제를 해결한다고 명시한 4·2 남북 공동성명은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그리고 이번 4·27 판문점 선언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된 남과 북 우리 모두의 통일론이었다.
한반도에 무르익는 평화 분위기 속에서 6월 1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문익환 목사의 삶을 기리는 것은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뜻깊다.
시인 문익환의 삶과 사상
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의 말을 빌리면 문익환은 “일흔여섯 생애 중 여섯 차례에 걸쳐 11년 2개월을 옥중에서 보냈던 우리 민족의 겸허한 심부름꾼” “우리 시대의 어른이자, 한반도라는 광야를 떠돈 예언자며, 어둡고 거친 파도 넘실대는 동서남 3해의 민족사의 등대이고, 설움 많은 민중의 동무이자, 반민족 반민주 반통일에 맞서는 전선의 척후병”이었다. 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윤동주, 장준하와 절친했으며, 장준하의 죽음 이후 군사독재와 싸우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아호를 ‘늦봄’이라고 짓고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는 생전에 펴낸『새삼스런 하루』(1973) 『꿈을 비는 마음』(1978)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두 하늘 한 하늘』(1989) 『옥중일기』(1991), 다섯 권의 시집과 신문에 발표한 시들에서 70편의 시를 가려 뽑은 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시집이다. 1999년에 펴낸 『문익환전집』의 시들과 각 시집에 실린 시들을 살펴, 현행 맞춤법과 띄어쓰기 원칙을 따르되 되도록 시인의 시어들을 살리는 쪽으로 편집하였다.
소설가 황석영은 추천의 글에서 “그의 시는 순결하고 낙천적이며 사랑과 꿈으로 가득 차 있다.”고 평했으며,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다룬 『L의 운동화』를 쓴 소설가 김숨은 “일제식민지배와 한국전쟁, 분단, 군부독재로 얼룩진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그의 시들에 기록되어 있었”다며 “그가 우리의 선한 아버지이자, 스승이자, 목자였다는 걸 깨닫는 데는 이 한 권의 시집으로 충분하다”고 밝혔다.
시인의 말을 대신해 수록한 첫 시집 후기를 보면 문익환이 시인으로서 길을 걷게 된 경위가 자세히 나타나 있다. 1968년부터 신구교 공동 구약 번역책임위원으로 있으면서 성서를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에 힘쓰던 그는 시가 거의 40%인 구약성서를 30여 년 연구하면서 시인이 되었다. 결국엔 자신을 알고 싶어서 쓰게 된 것이 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중한 소득은 나 자신의 모습을 밝히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일이오. 구리거울 에 비춰 보던 흐릿한 나의 모습을 바람 한 점 없는 숲 속 호수에서 쨋쨋이 보는 느낌이랄까. 이렇 게 나 자신의 모습을 찾고 보니, 갈증 같은 것이 생기더군. 나의 모습을 나보다 훨씬 민감한 이 땅 의 시인들의 거울에 다시 비춰 보고 싶어지더란 말이오. -‘시인의 말’을 대신하여
통일시대에 새롭게 읽는 늦봄 문익환의 시
1부는 시인으로서 면모가 돋보이는 시들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비롯해, 가족에 대한 애틋함, 존재론적 상념 등 개인적 삶의 편린을 담았다.
밤새 시만 읽고 싶은 밤이오 / 밤새 시만 생각하고 싶은 밤이오 / 모든 것이 살 속 뼈 속에서 시가 되는 밤이오 /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은 밤이오 / 무엇 하나 아픔 없이는 사랑할 수 없는 밤이오 / 한시도 기도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밤이오-「벗들이 보고 싶어지는 밤이오」 전문
2부는 「전태일」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 「동주야」 등을 비롯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인물들과 역사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을 모았다. 전태일 기념사업위원장,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후원회장 등으로 활동한 문익환 목사는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사회적으로 되레 탄압받는 상황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노동자, 철거민 등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을 함께했다.
나는 70년대에 사내라는 게 그리도 부끄러웠다 / 동일방직 쪼깐이들의 아우성을 들으며 / 걔들에게 똥을 퍼먹이는 것이 사내들이었거든 / 회사마다 여자들은 정의를 외치는데 / 사내 라는 것들은 기업주들의 앞잡이였거든 / 드디어 사내들도 노동운동에 뛰어드는 걸 보며 / 가 까스로 사내라는 부끄러움을 씻어 내고 있었는데 / 나는 오늘 네 사진을 보면서 / 사내라는 게 또 부끄러워지는구나 / 이 얼굴에 침을 뱉어라-「인숙아」전문
70년대 노동운동의 신화적 상징과도 같은 동일방직 노조 투쟁에 관한 시「인숙아」나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같은 시를 보면 문 목사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 그 여자는 별로 악을 쓰지도 않고 이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호소하는 투도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껌껌한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같았습니다 약간 몸서리가 쳐지는 소리였습니다 / 그 여자는 오늘도 내일도 공장에 가서 백안시당하면서 일을 해야 합니다 시댁에 맡겨 둔 두 살바기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친정에 갖다 둔 다섯 살짜리 장난꾸러기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
문익환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열심히 조력하고, 그 뒤를 이어 통일운동에 뛰어든 박용길 장로는 문 목사의 부인이자 동지요, 평생지기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여섯 달 살고 / 혼자 되어도 좋다며 / 시집온 아내 / 그 나팔꽃 같은 마음에 내 목청을 다 쏟고 / 펄럭이는 가슴 옷자락에 / 아내의 체온을 묻히며 살기 / 벌써 28년, / 이제사 나는 / 덤으로 사랑을 알 듯하다.-「덤」부분
문 목사가 여섯 차례에 걸쳐 11년 넘게 옥중 생활을 하면서도 피폐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박용길 장로와 주고받은 편지 덕분이다. 문익환은 부인에게 ‘봄길’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늦봄’을 이끌어 준 ‘봄길’이라며 평생 존경하고 존중하며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전주라 천릿길 / 하둥지둥 달려와서 / 접견실에 들어서는 조금은 성난 얼굴 / 내게는 그대로 하늘이어라 땅이어라 / 와락 안아 주고 싶은 반가움이어라 / (…) 정오의 어둠을 향해 걸어가는 / 단단한 발걸음이어라 ?「당신의 양심」부분
3부는 남북 분단에 대한 안타까움과 통일에 대한 열망을 바라는 시들로 가득하다. 3대에 걸쳐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헌신한 문 목사네 가족사는 곧 우리나라 근대사이자 현대사이고, 민족운동의 축소판이다.
1899년 2월 18일 / 아버지는 네 살에 / 독립군 아버지 어머니 품에 안겨 / 어머니는 다섯 살에 / 동학군 아버지 어머니 등에 업혀 / 하루에 두만강 얼음판을 건너셨는데 / 이제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시고 / 반 장님 반 귀머거리로 / 환갑 진갑 다 지난 아들 / 며느리에게 업혀 사시면서도 / 마음만은 더욱 푸르러 더욱 뜨거워 / 갈라져 피 흘리는 / 조국 생각하는 마음 / 이대로는 눈 감을 수 없어 / 이젠 우리더러 통일꾼이 되라신다 / 원산 함흥 회령을 거쳐 / 눈보라 휘몰아치는 북간도 용정 새장 거리에 서서 / 조선 독립 만세 / 조선 통일 만세 / 목이 터지게 부르다가 쓰러지는 게 / 마지막 소원이시란다-「통일꾼의 노래 1」 부분
특히나 개성공단 폐쇄 이후로 북한과의 평화, 화해, 상생에 대해 거의 생각해 본 적 없었을 젊은 세대에게는 지금의 이 상황이 어리둥절할 것이다. 한편 옥류관 냉면을 먹고, 북으로 연결된 기차를 타고 북한 사람들을 만나고, 더 나아가 러시아, 유럽까지 가닿을 수 있다는 즐거운 상상은 문익환 목사의 통일시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 주장하는 일이라고-「잠꼬대 아닌 잠꼬대」부분
서울을 떠난 기차가 원산 함흥 청진으로 굽이굽이 돌 적마다 / 죽었던 함경도 사투리들 봇물 터지듯 / 왁자지껄 쏟아져 나오는 소리 그게 바로 자유란다 / 황주에서 꿀맛 같은 홍옥을 사 먹고 / 평양에 가서 냉면 두어 그릇 사 먹고 / 신의주에 가서 압록강 물어 참외를 씻어 먹는 맛 그게 자유란다-「자유」부분
4부는 종교인으로서 시대와 사회에 대해 느끼는 고뇌를 담은 시들로 민중과 민족의 아픔을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라는 시집 제목은「손바닥 믿음」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게 누구 손이지 / 어두움 속에서 더듬더듬 / 손이 손을 잡는다 / 잡히는 손이 잡는 손을 믿는다 / 잡는 손이 잡히는 손을 믿는다 /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 / 인정이 오가며 / 마음이 마음을 믿는다 / 깜깜하던 마음들에 이슬 맺히며 / 내일이 밝아 온다
지금, 남과 북이 평화와 화해, 상생을 향해 두 손을 꼭 잡은 이 시점에 간절하게 와닿는 제목이기도 하다. 표지의 제목 글씨는 문익환 목사가 옥중에서 박용길 장로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집자한 것이다. 문익환 목사의 가택 통일의 집은 6월 1일 박물관으로 개관한다.
젊은 시인 박준은 시인으로서 문익환 목사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땀이었다가 눈물이었다가 피였다가 그것들 다독이며 잘 마르게 하는 볕이었다가, 서러움과 흐느낌 모두 함께 데리고 넘어서는 슬픔이었다가, 우리의 하늘과 가장 닮은 얼굴이었다가, 나직하게 운을 떼는 목소리였다가, 세상을 흔드는 일갈이었다가, 너무 많은 죽음들과 함께했던 생이었다가, 이 “모든 걸 버리고” 다시 “모든 걸 믿으며 모든 걸 사랑”했던, 오랜 기다림 끝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시인 문익환.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가 한국 현대사와 분단의 아픔, 통일의 열망을 문익환 시인의 육성으로 생생하게 전해 들을 수 있는 시집이다. 거창하고 묵직한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고, 좋아하는 시가 몇 편 생겨 시인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책읽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문익환의 삶과 사상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나를 돌아보고 우리 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통일시대에 읽는 이 시집이 시인 문익환의 모습을 새롭게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