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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수연의 만화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청아사랑
이승만 독재를 영원한 섬김의 유산이 되도록
참배케 하는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
국립 현충원은 개인이나 일개 개인단체에 예속된 곳이 아닌, 글자 그대로
국가에서 운영하기 위해 세워진 국가 보훈처 에 예속 된 기관이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등 고위 공무원이 되면 현충원을 둘러 순국
선혈들께 참배를 한다. 그중에 빼 놓을 수없는 곳이 공(功)보다는 화(禍)가 많다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라는 이승만 박사의 묘소 이다. 이 분이 정말 국록을 먹는
공무원이나 대통령들에게 참배를 받을 만큼 큰 업적이 있을까?
어찌하여 법정구속을 피해 공개적으로 “하와이”로 망명했다가
죽어서 시신만 돌아온 죄수를 공소권이 없다하나 “국립현충원”에 매장하고
추앙을 받게 하는지 의아심을 갖지 않을 수 없어,
그의 청년시절부터 더듬어 보기로 한다.
청년 이승만은 1898년 1월 만민공동회의 의 친일파 박영효 세력과 손잡고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 유약한 고종을 폐위시키고 의화군 이강(李堈)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1898년 12월에 체포되었으나
몰래 반입한 권총으로 간수들을 위협하여 탈출까지 했지만, 곧 다시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한성감옥서에 수감되었다. 당시로는 엄청 난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다시 말해 반역(反逆)을 꾀한 것이다. 이승만은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이지만,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은 누구인가? 잠시 그의 일생을 더듬어 보자
의화군 의친왕은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강(李堈)이며, 초명은 평길(平吉), 뒤에 강으로 개명하였다. 어머니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의 혐오를 사서 궐 밖으로 축출되었다.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에 추증 받고
다시 1906년 귀인(貴人)에 추증되었다.
귀인 장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11년 묘소를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어, 1911년 이전인 것은 분명하다.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된 그는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창건되면서 의왕에 책봉되었으며,
1899년 미국에 유학하고, 이듬해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귀국하여 육군 부장, 적십자사 총재, 순종 황제 대리청정 등을 지냈다.
경술 한일 합방 이후 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 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대동단의 최익환 등과 연락,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喪服) 차림
으로 변장하고 만저우 안둥 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건너올 것을
계속 강요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이후 일제로부터 형식적인 공(公)의 지위가 박탈되었다.
사진을 보면훤칠한 키에 황손으로 선 보기드믄 꽃미남 임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 황손"이석"씨에 의하면 의친왕께선 매일 빠지지 않고 독살을 염려 해
비산을 국에 소량을 넣어 음복하셨다 한다. "비산"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이며 즉사를 면하여 해독의 시간을 벌기위한 방법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종황제도 독살로 시해당한 정황이 뚜렷했던 시기에 생존하려는
몸부림이 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을사5적들은 이들과 다른
삶을 100년이 넘도록 국정 농단을 일삼으며 잘 살고 있다.
세례명은 비오이다.
이승만의 죄는 당시로는 죽음은 물론, 3족을 멸하는 역적질을 한 것이나 미수에 그쳐
한성감옥소에서 고문을 받으며 구속되어 있었다. 물론, 고종에 비해 모든 면에서
강인하고 유럽과 미국을 걸쳐 세계열강의 견문을 넓힌 의지가 분명한 인물로
일본인들도 두려워했던 義和君(의화군-의친왕)이강(李堈)이고 보면,
지금의 시각으론 “이승만”의 역모가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기대감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그도 세종대왕의 큰형
“양녕대군”이 15대 조(祖)이고 보면, 반역이 성공했을 때 그의 출세는
보장 됐으리라... 연거푸 과거에 낙방 후 벼슬길에 오르는 길이 막히자
목숨을 걸고 친일파편에 붙어 일으킨 변란이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 실패한 그는 감옥이라는 현실과 다른 앞날을 보장받지 못한
암울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시대 감옥은 인권이란 없는
시대이므로 개, 돼지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있을 곳이 못 되는 곳이라
하루하루 견디기가 지옥 같은 고통의 공간이었으며,
정치범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은
죽음의 고통이었다.
그런 중에 그는 선교사가 몰래 차입하여 준 신약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배재학당”입학전 최초 서양식병원 "제중원"의 여의사 "화이팅의 한국어 교사로
취업, 한국어를 가르쳤고, 화이팅여사는 이승만에게 영어를 가르쳐 줬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입학시절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는 선교의 꿈과 미국에 대한 동경을
심어줬고 옥 바라지는 선교적인 선교사들의 종교적 배려였다.
후에 미국 유학에서도 “아펜젤러”의 후광은 오늘의 이승만을 키운 절대적
힘이 되었다. 이승만은 머리에는 칼을 쓰고 손에는 수갑을 차고 있어
성경 한 장을 읽고는 다음 장을 넘길 수 없었다.
누군가 곁에서 넘겨주어야 읽을 수 있었다.
동료 죄수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경을 읽는 중에 그는 기도드리고픈 마음이 솟았고,
기도드리는 중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고 그 순간을 그는
다음같이 술회했지만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의 간증 속에 나오는 하나님과
그가 믿는 하나님과 같은지는 알 수 가없다.
열매가 다르기 때문이다.
1904년 "민영환“ 의 도움으로 6년간의 혹독한 옥살이 끝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이승만"은 같은 해 겨울 고종의 밀사가 되어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이건 모두
"민영환"이 끈질기게 고종을 설득한 결과였다. 이승만의 임무는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에게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守護通商條約)
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일본의 조선 침략 저지에 협조해주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와의 면담은 이루어졌으나, 이미
미국과 일본 사이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승만은 외교성과를
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이승만은 미국에 머무르며 공부를
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승만은 1905년 , 공부에 열정을 보였지만,
공부는 열등생을 면치 못했다.
그때마다 미국의 종교단체 ”장로회와 감리교“의 도움으로
낙제를 면하고 진학 할 수 있었다.
그는 남달리 미국사회에 유명인사들과 교류를 위해 틈나는 대로 편지와 메모로
자신의 입지를 폭 넓게 굳혀 나갔지만,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미개한 조그만 동양의 학생이 만났다는 부분은 "밀사"로 만난것이지
편지로 인한 개인적 만남은 아닌것이다. , 후에 2차 대전의 영웅
"맥아더" 를 만난 사건은 이미 많은 편지 왕래와 "이승만"의 신분이
조선의 "황태자"라는 사실과 "임정의 대통령"이란 신분 때문에
호감을 가진 맥아더의 호기심이 일궈 낸 사실로
보는것이 정확하다.
그가 5년 만에 " 프린스턴 " 대학에서 박사 "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 를 취득함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전무후무한 일 이었다.
그러한 그가 천재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의 뒤에는 미국장로교 총회가 한국을
“기독교국가”로 만들기 위해 조선조 4대임금 “세종대왕의 큰형 ” 양녕대군“ 의
15대손임을 자랑하며 자신을 ”황태자“ 라고 밝히는 ”이승만“ 을
낙제점수임에도 무난히 졸업과 학위를 취득 할수있도록 학교측과 "딜"을
성사 시킨 결과물 인데 추종자들은 이 부분을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졸업과 학위를 무난히 취득 한 걸로 유도를 하고 있다.
그가 자기 PR의 귀재라는 점은 이미 밝혀졌지만 애국을 한 사실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감옥에 간 것도 1904년 이전 1898년 정부전복을 꾀한 죄목으로
투옥됐다가 "민영환에 의해 미국으로 밀사 역을 맡아 유학 온 것 외엔
뚜렷한 것이 없다. 그런 그는 이해타산에 밝아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엔 절대 참여치 않는 이기주의자 였 다.
그런 그에게 뛰어난 영어실력과 좋은 학벌 때문에
기회가 찾아 왔는데 그 사건은,
1908년 3월 23일 쌘프란시스코 에서 "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미국인 " 친일파
"스티븐슨" 을 살해하는 통쾌한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인 친일파 스티븐슨”은
월급은 “대한제국”에서 받고, 업무는“일본을 위해 일하는 일본이 천거한 외교를
담당하는 인물 로 ”대한제국“으로 선 큰 두통거리였다. 이 일로 인해
”대한제국은 손해가 막심했고 대한제국 백성모두가
피해를 보는 실정이라 질시대상 1호였기에
통쾌하다고 박수를 쳤다.
재미(在美)한인사회는 들뜬 마음에 이승만 에게 이 사건의 법정통역을 맡겼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나는 살인재판”을 변호하기 위한 통역을 할 수 없다! 며 냉정하게
거절을 했다. 그 여파는 바나나농장이나 “애니깽”농장에서 힘들게 일 하던
재미 동포들을 울려 버리고 말았다. 나라와 국민에게 해악을 끼친
무뢰한을 처단한 것이 살인이란 말인가?
미국인들 눈엔 살인이겠지만 우리 동포들의 시각엔 의로운
아주 자랑스런 의인들이 분명 한데 이승만은 냉정하게 살인
재판으로 명명하고 통역조차 거절해 버린 것이었다.
그는 그에게 찾아 온 애국의 기회를 이렇게 헌 신발짝 내 차 버리듯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에 잔인하게 비수를 꽂는 한마디! “안중근”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한 “테러리스트” 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도"테러“로 간주하고 맹비난 하므로 써 나라 잃은
동포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잔인하게 울려버리고 말았다.
어떤 이유에서 일까 ?
1,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그는 "교육과 선교활동에 뜻을
밝힌 것으로 보아, 종교적 문제로 거절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출세의
수단으로 미국인을 살해한 사건을 통역함으로 써 자신에게 닥칠
불이익을 미리부터 계산을 하여 “안중근 의사의 의거까지
테러로 매도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2 어느 것이 던 거절 하므로 써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자신과 테러를 차별화시키기 위한 방법일수 있다.
그럼, 그는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어떤 외교활동을 펼쳤을까?
미국 외에 접촉한나라는 몇 나라나 될까 ? 전혀, 소득의 결과가 없다.
미국 본토에서 돈 없는 황색인종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열성적이던 동포들의
지원도 소극적으로 변하자, 갈 곳 없는 그는 "박용만의 배려로 " 하와이 " 로
건너 와 " 박용만 이 이끄는 "국민회“ 를 장악하기위해 밀고성 고발로 법정투쟁을
벌려 "박용만"을 축출하고 하와이 국민회를 삼키게 된다.
이는 나라를 위함이 아니요,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든든한 "친위대" 를 양성시키는
수순이었을 뿐 이었다.
이승만의 욕망
그의 야심이 드러난 것은 1919년 3월 1일 고국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3.1 운동이
일어나자그를 따르는 교민들을 규합하여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한인대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그는 "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뒤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독립운동을 획책 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독립은 국제연맹에 "청원서"를 내고 "위임통치를" 받은 후에 해야
할 일이며, 독립이 된다면, 반드시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고 "미국식"민주주의를
표방 할 것이라고 역설을 하며 가장 양심적 평화를 사랑하는 “박애주의자”처럼
2박 3일간 미국각지에서 몰린 교민들을 기만하며 거행 했다.
특징 중 하나는 틈 만나면 그는 손을 “호호”불었다.
나라를 위해 옥사에 갇혔을 때 모진 고문으로 생긴
손 저림 현상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가 옥사에 갇힌 것은 반역죄로 투옥 된 것 외엔
국가를 위해 옥에 갇힌 적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신채호”선생은 이승만의 행위를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고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 고 비난을 했다. 이로 인해 광복 후 300여명의 독립 운동가들
이 “신채호 선생을 비롯하여 ”약산 김원봉“홍범도”등 좌우논쟁의 희생물로 신원이
회복되지 못하고 ”무적자(無籍者)“로 존재 감 조차 사라진 안타까운 열사와
의사(義士)들.... 오늘날까지 이분들의 신원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이날 이승만은 미국의 신화 같은 초대대통령 "워싱톤“이 앉았다는 의자에 앉아
"새 한국의 초대대통령이 자신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며 대통령 취임식 까지 거행했다.
이때는 이미 임시정부의 직함엔 “국무총리"직 외엔 “대통령”직이 없었고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던 “이승만”은 그의 탐욕이 드러나 “국무총리”직도
박탈당하고 퇴출당한 아무것도 아닌 건달 신분이었는데 도
"임정에 없는 대통령" 직함을 그냥 사용하였다.
이것은 분명한 사기이며 교민들을
우롱한 사건이었다.
1918 년 출세를 위한 "대조선군단"의
박용만 밀고 사건!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 태생으로 "일본 동경으로 유학.
1904년 "보안회"에 입회하여 " 일본의 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는 운동에 참여,
한성감옥에 투옥됐는데 그는 그 감옥 안에서 " 이승만과 운명적으로 만나
"결의형제가 되었다. 머리에는 칼을 쓰고 손발이 묶인 이승만의
성경책을 한 장씩 넘겨 준 주인공이 바로 자상한 박용만 이었다.
1904년 출옥한 박용만은 이승만과 동일시점에 미국으로 출국하여, 박용만은
“이승만”의 딱한 처지를 이해하고 자비로“이승만”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미국까지 데려다 준다. 그러나 이승만은 별로 달가워하지도 않았고...
그 후의 아들에 대한 소식은 알 길이 없다.
유일한 친 아들이라고 한다.
그 외의 아들들은 모두 양자라고 하는데.... 박용만은
1906년 " 헤이팅스 대학에서 "정치학과 " 군사학을 전공하고
1909년 " 네브라스카"에서 " 한인소년병 학교" 를 설립하였다.
1911년 "신한민보 " 의 주필을 거쳐, 1913년 " 하와이" 로 와서 " 신한국보 " 의
주필이 되었다. 그는 " 군대를 양성해 일본본토를 공격해 독립을 이룩하자 ! 고
외쳐 교포사회에 감동을 일으켰다 . 교포들의 감동으로 그는
1913년 6월11일 하와이 " 호놀룰루시 " 볻읍 방향의 큰 산 너머 코올라우
( Koolau) 구역 " 아후이마누 "에 위치한 "파인애플 농장(1360 에이커) 에
" 대 조선군단 "이라는 독립군을 창설하였다. 그는 생도들에게 "낮에는 일을,
밤에는 군사훈련을 시켰다. 애국심에 독립이란 감동이 더해져
교포사회의 지원은 상상 이상 이었다.
박용만은 1차적으로 "하와이 항" 에 정박 중인 "일본함정" 츌운호 를 격침시키는
목표를 세웠는데.... 때를 같이해 " 이승만은 " 하와이의 독립운동 자금과 튼튼한
기반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백인우월주의에 돈 없는
" 황색인종"이 무슨 방법으로 외교를 할 수 있겠는 가 ?
그것은 오로지 " 돈" 의 힘 이었다 .
그는 미국본토에서 “한인사회”의 지원이 부실해 지자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서 " 박용만'의 대의에 참여와 협조를 빙자해
하와이로 건너와, 박용만의 지원으로 그곳애서 교육사업으로 학교를 세워
" 역사 와 세계사를 가르치고 " 교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를 기억하는 교포들의 증언은 과히 충격적 이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 분열'과 대립의 상징이었으며 ,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증언 했다. "신앙에 있어서는 자신이 믿고 만든 교회와 " 감리교중 하나만
선택하라며, 교회를 분열 시켰으며 , 이것은 자신이 세운 자신의
우상화 종교를 믿고 자기를 추종하는 " 사제" 가 되라고
강압적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이는 박용만 과
" 대조선 국민군단" 의 와해를 위한 고도로
기획된 이승만 식의 전략이었다.
급기야 이승만파 와 " 박용만'파로 갈리어 분열 됐는데 ...
분열된 하와이교포들은 " 반목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켜 서로 앙숙이 되게
이승만은 철저히 양극화 시켰다 . 하와이 교민 1세대들은 분열로 인한 큰 고통의
상처로 남게 되었고 이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 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 . KBS 에서 어렵잖게 취재한 증언들이 많다.
이승만 ! 이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기 보다는 평화를 빙자해 동족의 피의 대가를
자신의 업적으로 치부하는 비열하고 악랄한 무뢰한에 지나지 않았다 .
평화와 외교를 지향한 그가 하나님을 앞세워 행 한일은 종교와 동족분열 ,
그리고 그토록 증오하던 것처럼 외쳤던 " 테러리즘을 손수 자행한 장본인이었다.
또, 그는 증인이 아닌 밀고자 로 전락하였는데...
국민군단의 위용이 나날이 높아지자, 주미 "일본영사관" 에선 어찌 알았는지 ...?
미국국무장관에게 " 한국인의 군사훈련에 항의를 하여 "무기불법 소지 "문제로
교민의 대표인 "박용만"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승만에게 "천재일우" 의 기회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때 이승만이 증인으로 나와, 박용만이 미국영토에 군사학교를 설립한 것은
" 하와이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 "츌운호" 를 격침시키기 위함이며,
"미국과 일본 사이에 사변을 일으켜 양국 간 외교를 깨려하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진술했다 . 그로인해 "박용만은 유죄판결을 받아 몰락
하고 "대조선 국민군단 "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은 눈엣가시 같은 "박용만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하와이 의 주도권을 잡았다
.
그러나 " 박용만을 추종하던 애국심에 불타는 사람들은 동조를 거부하자,
본격적인 테러와 폭행을 감행했으며 총기난사 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승만의 증언은 밀고 성 고발이며 결의형제 의 결속을 배반하고,
교포사회의 애국심을 무참히 짓밟은 반역행위였다 .
어떠한 변명과 구실도 대신 할 수없는 선택이었으므로 , 굳이 변명을 한다면 ,
이는 마치 "씨저"를 살해한 " 브루터스의 웅변과 같을 것이다.
하와이와 같은 좁은 땅 에서 외교를 위한 동족을 범법자로 만든 상상을 초월한
사건이었고 개인의 야심에 애국심을 뭉개버린 그의 독선적인 욕망과 테러행각은 오늘
날 잘 포장되어 애국과 한국의 "국부" 로, 모래위에 누각처럼 서게 됐다.
그를 옹립한 "뉴라이트" 의 공로다. 그 후 "박 용만“씨는 1928년 " 베이징 에서 흉
한의 습격을 받고 살해 되었다. 누가 살해했는지 ...? 명확치 않다 .
1925년 베이징에서 " 이승만의 대통령 직 을 탄핵한 후 3년 뒤였다 .
이들의 결의형제 맹세는 이렇게 끝났다 .
이승만은 교민들에게 돈을 각출하기 위해 공채를 발행하여 돈을 걷어 드렸다 .
교민들의 돈으로 귀족처럼 외교에 힘쓴다는 명목 하에 "호의호식 "하며
" 직함 (대통령) 에 걸맞게 생활을 하는 이승만 , 그러나 교민들은 사탕수수
밭이나, 파인애플 공장에서 힘들게 벌어 기탁하고 강제로 채권과 공채를 사야만 했다.
그 돈은 몽땅 이승만의 주머니로 입금 됐으며 “박용만”때는 많은 자금이 상해 임정에
보내졌지만, 이승만은 예상 밖의 작은 돈만 조금씩 보내줌으로
임정의 운영은 최악의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1941년 , 미국과 일본의 " 태평양전쟁 "이 벌어지고 일본이 패망하자,
이승만 에겐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것은 라듸오 방송이었다. 아무런 내막
도 몰랐던 고국의 동포들에게 그의 일성은 희망을 넘은 열광의 기쁜 소리였다.
하와이 의 사정을 알길 없는 고국의 동포들은 이승만의 " 라듸오 " 소리에,
이승만은 이 나라 이민족을 구원할 구세주 인양, 대단한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그의 외교능력이 포장된 라듸오 방송 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우매한
국민들은 이승만을 너무 몰랐었다. 예나 지금이나 "메스컴' 의 힘은
대단한 것 이었다.
그 후 1950년 6.25 전쟁 때도 남산 방송국에서 방송된 내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못가고 독안에 든 쥐처럼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많은 인재들이 죽임을 당하고
납치를 당했다. 이때 동양의 석학이라고 칭송을 받았던 “양주동 박사”도 피난을
못가 갈팡질팡 하다 동아일보 취재 짚 차를 얻어 타고 서울을 빠져 나오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우리나라 향가는 살아있다. 라고 외쳤다 한다. 국문학사에
우리나라 향가(鄕歌)를 일본인 학자 “고꾸라 신베이(小創進平)”가 먼저
일부 번역을 시작 하였기에 양주동 으로 선 자존심도 상 했고 새로 태어난
목숨으로 완역 할 수 있다는 즐거움에 소리쳤다는
대목을 읽은 것 같다.
지금도 이승만을 우상화 하며 행적을 포장하는데 열을 올리는 친일사관에 젖은
일제의 노예집단들이 우리나라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 이때 임정에선
" 총리" 와 대통령 직을 박탈하고 " 주미외교위원회 " 위원장 에 위촉했으나 ,
그는 " 떠들지 말라 " 며 자칭 " 대통령 직을 고수했다. 우리헌법 전문에
" 상해 임시정부 "의 법통을 잇는다고 기록됐는데, 이때는 " 상해임시정부의 법은
절대적이었음에도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떠들지 말라 "고 밀어 붙였다.
무법자 의 일방적 추태인데도 오늘날 추종자들은
한술 더 떠 " 헌법전문 "까지 고치려한다.
그 첫 번째 시도 가 1948년 8월15일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고 이승만을
" 국부로 옹립, 임시정부 역사를 대한민국과 별개의 고난의 항쟁사로 묶어
"김구 , 안중근 , 윤봉길 , 이봉창 의사를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라덴 "과
동격으로 비하시킴을 당연하다고 외치고 있다. "고려대 "한승조, 육사22기 지만원,
박효성 ,안병직 류석춘 , 복거일 , 이명희, 는 "을사5적" 과 비교되는 인사들이다.
이들 중 “지만원”은 광주 5.18사건에 북한군이 투입 됐다
는 거짖주장 으로 곧 법정 구속이 될 것 같다.
해방 후 이승만의 귀국은 글자 그대로 " 금의 환양" 이었다. 해방직후 " 신탁통치를
위해 "미국에선 " 하지중장 "이 우리나라를 통치 할 때 이므로 제일 높은 사람이
하지 중장'이었는데 하지가 이승만에게 경례를 붙이자 한국 사람들은 전부 놀랐다.
하지 보다 더 높은사람, 이승만 ! 그것은 2차 대전의 영웅 " 맥아더 '에게
편지와 메모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직위로 인간적 교우를 다졌던 터에 ,
맥아더의 배려로 하지에게 " 대통령의 예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 일본 도꾜에서 맥아더와 이승만과 의 충분한 교감이 있은 직후의 일이라
이상 할 것 없는 사실이나 그때의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알리가 없었고 다만 라듸오
를 통해 독립을 위해 미국에서 열심히 애국한 애국자로 각인되어 있었기에 더욱
이승만의 능력을 과대평가 하기에 충분했다. 귀국한 이승만 에게 " 러브콜" 을 한
무리들은 바로"친일파들이었다. "하지중장" 의 입장에서도 통치의 경험이 있는
"친일파 "들을 처벌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승승장구 남북단일 독립국이 아닌 남한단독정부에
열을 올려 장애물을 제거해 나갔다.
" 여운형" 도 암살되고 , 김구도 제거하고 ,동족상잔 의 비극 6.25, 장기집권에
최대난적, 신익희 "의 돌연사, 조병옥의 위수술중 사망, " 죽산 조봉암의
빨갱이 죄목으로 사형집행, 3.15 부정선거 , 4.19 혁명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 시켰는가 ? 4.19혁명중 , 하와이로 도주 , 망명 ,
죽은 후 시체로 귀국, 이분을 "대한민국의 국부로 모신다니......
지금은 역사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때입니다. 이승만의 등장
으로 이득을 본 집단은 " 친일파 "들입니다.
그들은 국가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1%에 해당하는 귀족으로
그들의 권력과 재력은 국가의 " 명운"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역사 마 져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쳐 마치 자신들이 애국의 선봉에 희생자인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 고
있습니다. 특히 " 기독교 " 에 이런 무리들이 선발대라니 ... 전혀 ,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 가룟유다 "의 후예들이란 사실 앞에
“경천동지” 할뿐입니다. 과연, 이들의 행위가
"성경적" 일 까요? 의문 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서 오는 걸 까요 ?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3명의 장로" 대통령이 만들어 졌는데, 모두 하나님 섬기기에
실패한 대통령 같습니다, "이승만 때는 "민족 분열로 동족상잔의 6.25, “김영삼 때
는 지나친 과시로 IMF, "이명박"때는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꾼 장로 대통령이 탄생 했습니다.
오만과 독선의 독재와 종말
3.15 " 정부통령 선거 " 에서 전국적으로 야당참관인을 내쫓고 투표함을
교체하여 개표를 하였는데 , 여당당선표가 " 총 유권자수" 보다 많아 표를 줄이는
" 촌극"도 연출 됐으며, 부정선거가 극명해 지자 " 마산서 " 부정선거" 반대운동이
벌어진 후 행방불명된 " 김주열" 군의 시신이 "최류탄"이 눈에 박힌 채 발견됐다.
서울 종로에선 " 고려대" 학생들을 " 정치깡패 "들이 집단으로 폭행하여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주동이 된 혁명이 일어났는데 , 이름 하여 4.19혁명
이다 .“이승만”은 경무대 (청와대)에서 " 이화장 으로 피신까지 하며 사태 추이를
주시 했는데 당시 신문엔 4.19 혁명을 " 데모" 로 표기 했다. 이때는 일시적
" 데모"로 간주하고 기사를 올렸지만 , 날이 갈수록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성공적 혁명이 되었다
.
그것도 최악의 독재를 몰아낸 " 민주혁명 " 이었다. 그러나 2008년 현재엔
" 뉴라이트 "가 " 혁명이 아닌 "데모라고 비하 시킨다. 꼭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가 ? 있다면 ? 그것은 무엇인가 ? 다시 구시대로 " 회귀"하겠단 것인가 ?
이날의 혁명은 처절했다 . 이때 본인은 학교를 안가고 " 소공동 " 경남극장 "에서
" 죤 웨인 , 스잔헤이워드 , 주연의 "징키스칸" 영화를 1회 관람을 하고 도시락을
까먹은 후 시청 앞으로 나오다 혁명대 에 휩쓸려 전차를 타고 효자동 경무대 앞 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경험을 했다 . 6.25전쟁 때도 경험 못한 극한의
경험 이었다. 총에 맞아 튀는 피 ! 비명조차 못 내며 쓰러지는 학생들 !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와 친구 는 너무 놀라 " 눈알이 뒤집혔다는 "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 현장의 참상이 여러 날 꿈속에서 나를 괴롭혔다 .
이때 4.19혁명 때 부상당해 장애인이 된
학우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부정선거로 당선된 부통령 " 리 (이) 기붕이 그의 장남 " 육군소위 " 이강석'의
총에 , 일가족 모두 사살되고 " 강석은 자살했다고 전 해진다 . 어찌 보면
" 이승만 보다는자신들의 만행을 일찍 암치 깨닫고 선택한 용단이라 하겠다 .
" 리기붕 '의 가족은 이랬다 ,父 이기붕 , 妻 박 마리아 , 長 男 이강석 ,
次男 이강욱, 이었다. 원래 " 이기붕" 은 " 국일관 지배인 출신으로 " 부통령
재목이 아니었다. 항상 ,허약한 체질에 용기보다는 YES MAN의 전형이었지만
그의妻 " 박마리아 " 는 " 놀부妻 와 같은 기질의 여인으로 한때 , 정계를
시끄럽게 한 그녀는 " 이승만" 에게 자신의 長男인 " 이강석을 養子로
입적시키고 李起鵬의 출세를 진두지휘 한 여인이었다.
문제는 " 허정 "(당시 국무총리 )씨와 " 하와이" 로 쫓겨 가 듯 망명하는 이승만은
아마도 친일파들과 “허정”과의 철저히 기획된 밀약이 있지 않았나?
그 당시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은 ‘망명“을 못하게 막고 법의 심판을 받을 동안 구속이나 연금을 했어야
원칙인데 어찌 된 것인지.... 58년이 지난 지금까지 밝혀 진 것이 하나도 없다.
분노한 국민들은 남산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에 화풀이를 했다.
이동상은 시골서 서울 관광을 오면 꼭 둘러 절하며 숭배케 하던 동상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동상을 세우고 참배하는 것은 "우상숭배' 가 아닌가? 이것은
" 기독교적' 이지도 않고 더더욱 " 성경적 이지 않다. 그러나 성난 학생과 국민들은
이 동상을 쓰러뜨려 목이 떨어져 땅바닥에 뒹구는 것을 부숴 버렸다.
그런데 " 뉴라이트 에선 다시 "세종로“ 복판에 이 영감탱이 동상을 또 건립 한단다.
소름 끼치는 일이다. 뉴 라이트는 일본 놈들이 일본 돈으로 길러낸 한국인으로,
친일로 무장한 선발대들이란 사실에 등꼬리가 서늘해진다.
뉴 라이트와 일베는 우리나라에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일본은 또,
이런 식으로 간접 침략을 감행하고 있다. 이때 경무대 의 작은왕
" 곽영주 " 이정재, 임화수, 등 깡패는 모두 사형 시켰다 .
그때 정치깡패들은 모두 잡아 “ 나는 깡패입니다” 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시가행진을
시켰다. 그러나 국민 몰래 이승만은 하와이로 도망 친후 그곳에서도 교민들에게
그리 좋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 한 다. 당연한 일이다 . 그렇지만 , 이승만은
하와이를 택했다. 귀소본능 이랄까? 온갖 만행을 저질렀어도 " 하와이 는
그를 대통령 의 발판을 만들어 준 곳이기 때문인 것이다 " 그러나 교민들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 그것은 " 대통령" 이 된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그리고 기획 없는 통치철학을 통해 동족분열 과 정적제거,
제주 4.3사건, 여순반란 사건, 6 .25 동란 , 44 ,5입사건, 부산 정치파동,
국민방위군 사건, 3.15부정선거, 12년간 그의 정치적
행태가 말해주듯 , 철권통치 의 교훈 이었다
정권연장 에 급급하여 온갖 해선 안 될, 민주주의 의 역행하는 군주 식 " 독재" 는
그를 파멸로 이끌었고 종당엔 하와이로 도망쳐 1962년 병속에서 자신의 왕국을
회상하며 1965년 시체가 된 뒤에야 조국 땅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린 기억해야 할 것이 그의 독재로 혼란에 빠졌던 우리국민의 정치적 후퇴를
생각 안할 수 없다. 더 우기 이분을 국부로 섬기기 위해 임정을 무시하고
" 법"과 역사를 바꾼 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다.
대통령 12년 동안 위에 나열했듯이 그 많은 사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어째서 그는 “교도소(형무소)” 로 가지 않고 “하와이” 로 빼 돌려 져 “ 망명”이
이뤄 졌는가? 1965년 유해 입국을 “ 박정희 군사정권” 이 허용 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 현충원“ 에 묻힐 수 있었을까? 죄를 짓고 처벌을 피해 망명 한 자를
“ 현충원” 에 안장 한다는 것은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법리적 해석이 어찌 되는지?
한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이명박,
모두 현충원에 안장해야 하는가?
아마도 당장 파서 “ 망우리” 나 그의 양자의 소유지로 이장해야 마땅하다.
역대 대통령들 마다 독재자에게 참배를 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연속되는 것을
국민들은 이제 더는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참배하는 대통령들 마다 민주주의를
내 버리고 독재로 장기집권을 하여 추앙을 받으라는 의미 밖에 더 되는가?
독재를 영원한 유산으로 대 물림 하라는 의미로 도 해석 할 수 있다. 하루속히
이승만의 유해를 현충원에서 다른 곳으로 이장해야 “ 좌우”논쟁도 사라질 것이며,
건국절 논란을 획책할 명분도 사라 질 것이다. 누가 200만 명을 살해 한 살인마를
국부로 모시겠는가? 하루속히 “ 현충원”에서 이승만의 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 법리적 해석을 내 놓아 “ 좌우” 논쟁의
종식을 고 하도록 사법부는 힘 써야 할 것이다.
현충원은 묘를 쓸 자리가 없다하여 보훈처의 “ 박승춘” 이 故 김대충 대통령 유해를
현충원에 안장을 거부한 사례가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께선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시다, 이 문제 자체를 놓고 보면 독립운동을 한 “좌파”는 죽어서도
현충원에 들어 올수 없는 빨갱이 인 것이다. 일본제국에 부역한 자들은
현충원 상석에 있고 조국 독립에 매진한 분들은 들어 올수 없다는 논리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백정기“ 의사는 이미 효창공원에 안장 되어 있으니.....
보훈처의 “ 박승춘” 이 효창공원을 염두에 두고 김대중 대통령의 유해를
거부한 것인지? 많은 억측을 난발케 했다. 물론 보훈처 단독으로 이런 결단을
내렸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장례기간동안 각 부처와 충분한 교감이 있었고
담당 부처인 보훈처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보수라는 조갑재는 이승만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엔 민주주의가 서지 않고
공산화 됐을 거라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한쪽 눈을 감고 한쪽 눈으로 본 순진한
애꾸눈의 억지 주장이란 것이 증명 됐다. 이승만은 유감스럽게도 “민주주의”를
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무늬만 민주주의 였 지, 펼친 적이 없고 독재를
즐겼으며 정적을 해치는데 주력을 했다는 사실 이다.
우리 국민은 이승만을 민주주의를 편 대통령으로 기억하지 않고, 독재자로
기억하고 철권통치를 한 미개국가에 존재하는 부끄러운 대통령으로 알고 있다.
대통령을 해 먹기 위해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위기상황에 국가의 운명은
뒷전으로 미루고 피난처인 부산에서 낙동강 철교를 하나두고 밀고 밀리는
"워커라인"(북쪽으로 낙동강 철교를 시작으로 타원형으로 부산이 끝인 라인
이 부분이 무너지면 전쟁은 북한군 승리로 끝나는 것이다)
속에서 국회의원들이 탄 통근 버스를 통째로 납치한
“부산 정치파동”하나만 보더라도 그는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모독을 했지, 민주주의를
이행하진 않았다.
이들은 이승만을 최대한 느끼하게 포장을 하여 사람들을 선동하여
교육을 시키며 이런 일로 명성을 유지하고 산다.
세계 각국을 돌아봐도 독재자를 국부로 모시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경배하는 나라는 유일하게 우리나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독재"는 동격이 돼야 이들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민주주의는 독재인가? 묻고 싶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와 이승만과는 비교가 된다. 국민들에게 축출된
"피노체트"는 영국으로 망명했으나 체포되어 칠레로 돌아와
연금된후 지병으로 사망한다.
그의 "묘"는 국민들이 파헤쳐 훼손 할까봐 보호를 하는 반면, 우리나라 는
경배하기위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보존 되고 있으며
취임하는 대통령들 마다 "독재"정치를 결심하며 참배를 한다?
"박정희가 그랬고, 전두환 노태우가 그랬고, 방정맞은 YS도 그랬고, 단군이래
최고의 사기꾼 "이명박"이 그랬고, 맹추 GH도 감방안에서
참배 한 걸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번 현충일에 동작동이 아닌, 대전 현충원서
현충일 기념행사를 개최 했다고 한다. 이제 더는 현충원이
독재의 망령이 민주주의 의 탈을 쓰고 정치적 유산이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직시할 필요가 있다.
첫댓글 죽어서 시신만 돌아온 죄수를 공소권이 없다하나 “국립현충원”에 매장하고
추앙을 받게 하는지 의아심을 갖지 않을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