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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누가복음 5:1~11
여러분은 이번 명절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오랜만에 가족, 친지, 친구들을 만나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 각박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나를 알아주고, 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없습니다. 뉴스에서 들으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설날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 1, 2위가 즐거움, 행복이란 단어들이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습니다. 행복합니다. 그러나 설날에 떠오르는 또 다른 단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스트레스, 고통이란 단어들도 10위 안에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설날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고향은 있지만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만남은 더 이상 행복이 아닌, 고통이요, 스트레스입니다.
기독교는 만남의 종교입니다. 그 어떤 만남보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만남을 가르칩니다.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최고의 고상한 만남이요, 궁극적 만남입니다. 다른 모든 만남을 상대화시키는 절대 가치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물질세계에 젖어서 눈에 보이는 것들만 따라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나요?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를 만나 주시고, 야고보와 요한을 만나 주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서 있던 배 두 척을 보시고, 그 중 한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누구의 배였는지 아십니까? 네, 시몬 베드로의 배였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물고기 잡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요량으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배를 육지에서 조금 뗀 후에 계속해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계속해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겠지요? 예수님은 일상 속에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고, 베드로도 일상 속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기적을 잃어버린 세상, 꿈을 잃어버린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적을 찾고, 꿈을 찾기 위해 극장을 찾나봅니다. 적어도 극장 안에서 이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꿈과 기적을 경험합니다. 웃음과 눈물, 감동과 인간애(人間愛), 이런 고귀한 가치들은 잘 짜여진 2시간짜리 영화콘티와 배우의 연기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극장 안에서 꿈과 기적은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 입맛에 적당히 간이 베인 달콤한 팝콘과 콜라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극장을 나오는 순간, 꿈을 반납합니다. 마치 영화가 끝나면 사람들은 더 이상 필요 없는 팝콘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극장 안에서 공유했던 귀중한 가치들을 이 세상 한 가운데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사람들은 남들보다 빨리 극장을 빠져나오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무료 주차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걱정할 뿐 입니다. 정말이지 일상에서 기적을 경험한다는 것, 더군다나 일상에서 새로운 꿈을 꾼다는 것은 우리하고는 아주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사실 오늘 본문도 꿈을 잃어버린 일상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10년 전에도 그곳에 있었고, 어제도 그 곳에 있었을 뿐입니다. 과연 베드로에게는 어떤 꿈이 있었을까요? 아마 우리들처럼 자식들 잘 키우고, 공부시켜, 훌륭한 데에 시집장가 보내는 꿈 정도가 아닐까요? 사실 이 꿈도 보통 꿈이 아니에요. 인생을 좀 더 길게 살아보신 분들은 알겁니다. 남들 정도만 하고 살기도 얼마나 힘든지 말이에요. 제가 아는 분은 아직 시집가지 않은 딸 시집 잘 보내기 위해서 사업하시는 분도 계세요. 돈 벌이가 목적이 아니라, 나중에 사돈이 자신의 딸에게 너희 아버지가 무슨 일 하시냐고 물을 때,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날마다 직장에 출근하세요.”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지금도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부모님의 마음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여러분의 마음을 뛰게 하는 그런 꿈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준익 감독이 2007년에 개봉했던 “즐거운 인생”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대학시절에 함께 밴드를 하던 친구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에 질문을 던지는 중년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현실은 이러했습니다. “내가 일하지 않으면 유학간 자식과 아내의 생활비를 댈 수 없다…내가 일하지 않으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과외비는 꿈도 꿀 수 없다…내가 일하지 않으면 아내 덕을 보고 살아야만 한다.” 그래서 이 중년 남자들은 일하는 겁니다. 특별한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기적을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말이지요. 현실 속의 평범한 우리네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은 대학시절에 활동했던 “활화산” 밴드를 부활시킵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연습에 몰두하면서 마침내 그들 안에 잃어 버렸던 꿈과 열정을 회복해 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열정과 꿈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루하루 무미건조한 일상적인 일을 넘어서, 그 일 때문에 정말 가슴 뛰고 행복해지는 그런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꿈이 있습니까? 혹시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도 힘든 가운데 꿈마저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삶이 일상에 지친 베드로와 같다면 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상생활에 찾아오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꿈을 잃은 사람들에게 찾아오십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지만 물고기 한 마리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실패한 인생에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하루하루 가슴 벅찬 인생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무의미한 인생에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향락으로, 재물로, 권력으로 대리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인생에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자, 예수님이 우리의 일상에 찾아오시는 일이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나를 찾아오시는 분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는 사실 때문입니다. 과연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그물을 깁고 있던 베드로에게 말을 거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잡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물을 던지라 하십니까?” 맞아요. 베드로는 어부(漁夫)입니다. 율법 선생님이 어찌 어부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대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의 말씀을 믿고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자,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나셨는지 여러분은 아시지요? 네, 여러분이 이미 아시듯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엄청난 양의 고기가 잡혀 그물이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황급한 베드로는 다른 배에 있던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서 와서 날 좀 도와주구려. 지금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이 잡히고 있다고!”
아니나 다를까, 곧 물고기들이 두 배에 가득 차고 넘치고 말았습니다. 어부들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기적은 만선의 기쁨을 낳았습니다.
자!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셔서, 여러분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불가능을 가능으로, 허무를 충만함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던 제자 빌립을 향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9-10).”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입니다(엡 1:23). 예수님이 만지시는 인생, 예수님이 축복하시는 인생에 불가능은 없고, 공허함도 없습니다.
호렙 산의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만나주셨던 하나님을 생각해봅시다. 모세는 인생의 실패자요, 낙오자로 그곳에 살았습니다. 미디안 광야는 엄밀히 말하면 도망자 모세에게는 실패의 장소였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자기 양도 아닌 장인 이드로의 양이나 치면서 40년을 보냈습니다. 나이 80세의 모세에게 애굽에서의 꿈과 학문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습니다. 꿈도 없이, 열정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이름을 두 번 크게 부르시고,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명령하셨습니다. 도망자의 땅이 거룩한 땅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제의 땅이 오늘 갑자기 바뀐 것도 아닙니다. 땅은 그저 똑같은 땅일 뿐입니다. 그런데 바뀐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사명의 자리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거룩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미 없는 공간이라도 하나님께서 그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 공간은 새롭게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살리시는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고침을 받거나, 잃었던 꿈을 회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 더러는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의 흠이나 잡아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을 공격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과 3년 동안이나 동거, 동락했던 한 제자마저도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기고야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시자, 베드로는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집니다. 베드로가 던진 그물은 어부로서 자신의 자존심을 내던지는 것이고, 그에게 예수님을 향한 기대감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본질상 하나이십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 분은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분이시고, 죽은 것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기독교는 만남의 종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종교입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종교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식어버린 열정, 비전, 기적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때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미 90세가 되어 여자로서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었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태를 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녀는 이미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 아브라함도 100세가 되어 이미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던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의 말씀으로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던 그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던 그들을 통해 당신의 살아계심을 친히 증거 하셨습니다. 인간의 불가능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시작임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살아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여러분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존심도 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상처도 버려야 합니다. 남들의 시선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직 주님의 말씀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의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알지는 못했지만,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T. V 채널을 돌리다가 기독교방송의 “700클럽”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패드 로버트슨’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기독교방송을 통해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들의 치료를 돕기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던 이 여인은 로버트슨이 자신의 손을 화면에 보여주며 이 기형적인 골격구조를 가진 자신의 손이 기적적으로 치유될 것을 믿는다고 말하자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도 로버트슨처럼 손이 기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녀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한 줄이 빛이 자신의 손을 비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녀에게 온전한 치유가 일어났고, 그 일로 그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녀가 보던 방송 프로그램이 생방송이 아니라 재방송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방영했던 것을 다시 재방송했어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충분히 그녀에게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치유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 분의 능력을 경험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경험, 자존심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그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여러분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오직 그 믿음만이 기적을 낳고, 역사를 낳습니다. 온전한 치유와 회복을 낳습니다.
과연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기적을 하나님,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던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큰 변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면 자신의 참된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수십 년 동안 살면서 여러분 스스로 알고 지냈던 여러분 스스로의 모습을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기적을 베푸시는 분임도 알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우리 한 음성으로 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절과 10절에 보면, 베드로와 베드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고기 잡힌 것 때문에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과연 누구시기에 이런 기적을 행하는가?” 베드로가 먼저는 기적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동시에 자신의 죄인 됨을 보고 놀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님에서 주님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빛 앞에 모든 더러움이 드러나듯이, 빛 되신 주님 앞에 서는 자마다 그의 더러움이 드러날 것입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에 찔림을 받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기 때문에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의 더러움이 모두 파헤쳐져야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외치던 유대인들을 향해서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도행전 2장 38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찔려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하려거나,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고 권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회개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기독교는 만남의 종교이자, 회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회개를 낳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회개만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심령에 하나님의 구원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죄 사함을 받습니다. 여기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에서는 오직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새로운 사명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0절 중반 절부터입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과거에는 육신의 만족을 위해 물고기를 낚았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주어진 새로운 사명입니다. 앞으로 베드로는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이 그동안 아끼던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자기포기는 사명의 회복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명의 회복은 예수님을 만남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참된 자기포기의 결과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어떤 사명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일상생업의 현장에서 부르십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직업을 포기해야 한다거나, 가족을 배신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직장은 여러분이 주님의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열심히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는 더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일상현장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여러분에게 더욱 많이 붙여주실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일하고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시되,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주님의 최고의 관심은 여러분의 일을 통해 여러분이 사람을 취하는, 사람을 사로잡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은 초청 형이 아니라, 확정 형으로 쓰였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 일을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태초부터 여러분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결정이며,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속에 있음을 믿으십시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무미건조한 일상생활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각, 경험,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오늘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기적 중에 기적은 내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새로운 사명을 부여해 주실 것입니다. 바로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사람 낚는 어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여러분은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 여러분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 이 땅에서는 자기희생의 삶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금생과 내생의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보장되어 있음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런 놀라운 축복이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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