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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완성도 그리고 여운의 물결, 내 안의 울림
*심우기(시인)
시를 쓰면서 혹은 다른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간혹 습작기 시인지망생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여운 있는 작품으로 감동할 때는 독자 저마다의 상황과 처지 그리고 그때 당시의 인식에 맞아떨어질 때 감동으로 자리 잡고 시의 여운과 정서의 고양이 다 다르게 접근한다는 것이다. 어떤 시는 읽을 때마다 다른 경우의 맛을 내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시에 어떤 정답이나 주류적 주장이나 유행이 전부인 양한 것은 오만하게 비친다. 그러나 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시인의 부단한 노력은 자기 자신만의 고백이거나 일기체 또는 개인적 서술로 그쳤을 때 감동의 확장이나 울림이 없는 단조롭고 심심한 작품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읽고 난 뒤 강하게 남는 접점이 형성되지 못하고 넘어간다. 시를 쓰는 사람이면 이것은 일상적인 고민이고 더 좋은 작품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 이를 완성도 높은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은유나 비유 그리고 상징, 이미지와 비틀기, 묘사와 창작된 상상의 기술 등 여러 가지 장치가 필요하겠다. 짧은 시는 압축과 절제 속에 미를 갖추고 장편시는 서사와 이야기가 시 중에 녹아나야 한다. 시 한 편에서 한 행만으로도 시를 완성하는 때도 있고 모든 시구마다 멋진 표현인 훌륭한 작품도 많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은 사유하고 쓰고 고치고 시의 종자를 붙잡고 늘어지는 시인의 고충이란 자신과 싸움일 뿐이다.
『두레문학』 지난 25호를 다시 읽어보며 특히 시단 코너를 중심으로 작품 계간 평을 하려고 한다. 청탁을 통해 들어온 시와 시인들이 어떤 한 방향이나 공통된 흐름이나 기조를 잡기에는 저마다 개성과 특색이 있어 포착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선자의 눈에 띈 몇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시의 발화는 일상의 사건과 사물에서 시작된다. 물론 머릿속에서 그려낸 관념시도 있지만 대개 관념시는 잘 쓰지 못하면 선명한 이미지를 그려내기 어렵고 당연히 밋밋한 싱거운 작품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경계하고 조심하는 부분인데 일상의 사물에서 포착한 시가 기껏 자기 개인적 서술과 묘사, 개인 정서의 토로로 끝나는 경우다. 시가 발표되었을 때에는 활을 떠난 화살로 그 작품은 독자의 몫이 된다. 한 편의 완성된 시는 독자나 혹은 다른 시인과의 공감과 소통의 장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의도성이나 의미가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너무 단선적인 표현이나 접근, 그저 내가 이렇다고 하는 표현은 시의 감동과 여운에 확장성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봉준의 「굴뚝새」는 우선 시선을 끌었다. 지금 당대의 화두는 노동문제이고 일자리 문제이며 먹고사는 문제가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노동 분야의 비정규직 철폐의 문제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전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날지 못하는 새들이 있다
날려 보내도 날아갈 수 없는 새들이 있다
빼꼼히 눈과 귀만 열어 둔 채
스스로 날개를 접고 하늘 솟은 아득한 고공의 굴뚝에
둥지를 튼 새
내 얼릴 적 굴뚝새는
바람보다 빠른 순수한 영혼의 방랑자
광장에서는 농성 소리가 세차게 붉은 깃발을 흔들어대고
비둘기들은 더 이상
오염된 구둣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언 자리를 깔고 앉은 사백일
굴뚝 아래를 내려다보면 볼수록 미물들이 산다는 생각에
이제는 하느님과 조금은 가까워질 것 같은
하느님과 더 멀어질 것 같은
고공의 굴뚝새
- 박봉준, 「굴뚝새」 전문
세상에는 법과 제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많다. 물론 자본가와 노동자는 대립만이 아니라 상생의 관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일반 논리가 가진 자 내지는 더 많이 소유한 자에게 유리하게만 돌아간다면 힘이 없거나 저항의 수단을 잃은 자들은 법과 제도의 보호나 도움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목숨을 건 싸움을 한다. 그들은 타워 크레인이나 굴뚝에 오르고 몇십 일씩 단식투쟁을 하거나 고공농성을 한다. 지금도 서울 강남역 사거리 철탑 위에는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 씨가 80여 일째 농성하고 있다. 과거에 굴뚝의 주인은 “바람보다 빠른 영혼의 방랑자”이었다. 순수하고 지친 날개를 쉬어가는 경유지가 이제는 삶의 핍진과 탈법과 자본에 쫓겨 고공에 올라가 날지 못하는 사람들의 항거지가 되고 있다. 고공의 굴뚝새는 잃어버린 영혼의 방랑자를 꿈꾼다. 순수하였고 천진난만의 새, 자본보다 인간이 먼저인 어릴 적의 새를 시인은 불러온다. 높이 올라서서 하느님과 더 가까워질 것 같은데 역설적으로 목숨을 건 싸움으로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닌 어쩌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결단을 요구하는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이 그려진다. 시인은 당대의 이 사건을 외면하지 않고 시로서 증언한다. 그러나 현실을 고발하는 시의 일부 한계는 직설적이라 점이다. 보고나 보도 또는 고발 그 이상의 시적 성취가 필요하다. 리얼리즘의 시가 당대 문제를 고발하는 정도를 넘어 모순의 정점을 실감 나게 포착하고 표현하는 작품, 그런 가운데서도 인간이 추구하고 지켜야 하는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은 대개 작품 전체에 녹아들어 시인이 말하기보다 독자가 느끼게 하는, 고민하게 하는 시적 진술이 들어 있다, 이 또한 나도 늘 고민하는 지점이다.
이만섭 시인의 「답청(踏靑」을 한번 살펴본다.
내 걷는 발길에 얹혀
연둣빛으로 눈뜨는 풀잎들
물소리 소곤거리는 쪽으로 귀를 열고 있다
나는 풀잎들의 꿈을 드높이는 산책자
발등의 연둣빛이 파릇파릇 물들어 올 때까지
이 싱그러운 봄 길을 걷고 싶다
-이만섭, 「답청」 전문
『답청』이란 제목으로 익히 알려진 시는 정희성 시인의 「답청」이 있다.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 정희성, 「답청」 전문
답청은 음력 3월 삼짇날이나 청명에 산이나 계곡으로 나가 먹고 마시며 봄의 경치를 즐기는 풍속이라고 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의 기쁨을 맞이하던 과거 조상들의 풍속 같은데 요즘은 굳이 이것을 기억하여 길을 걷지는 않는다. 자연스럽게 건강이나 기타의 이유로 들길이나 산길을 찾아 걷는다. 이만섭 시인은 봄날 작은 풀잎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꿈을 듣는 자다. 그들의 동행자로서의 길을 걷고 싶은 소망을 담아보고 있다. 시인의 정서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인데 그 이상이 없는 시인의 소회 정도로 그친 점이 조금 아쉽다. 짧은 시일수록 압축과 절제미 그리고 여백의 미를 갖춰 독자가 소생의 풀잎을 통해 더 많은 것을 꿈꾸게 해주었으면 어떠했을까 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러나 이 시를 살리는 한 줄은 “나는 풀잎들의 꿈을 드높이는 산책자”란 한 행으로 시를 살리고 있다. 정희성은 풀과 어두운 아희들아 란 대구를 이루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란 표현으로 시를 완성해 낸다. 두 시인의 같은 제목의 다른 맛을 감상하는 것도 시 읽기의 재미이며 감상이다. 대개 풀은 생명을 상징하거나 민중 민초를 상징하며 또는 청춘과 젊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김수영이나 미국의 휘트먼의 「풀잎」이란 위대한 작품이 익히 알려져 있고 비유와 상징에 녹아 들어간 표현 그리고 의미는 장대함과 웅장함을 준다. 이만섭 시인을 통하여 답청이란 과거의 풀밟기, 보리밟기 혹은 봄놀이 행사에 덧붙여진 시대의 상과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갈망과 희망에 찬 이만섭의 작품을 보았다. 엄태지의 「잔디의 방식」이란 작품도 지구를 수선하는 수선공으로서 잔디와 풀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일차적인 접근으로 진술하여 시의 읽는 즐거움을 더 배가시키지 못한 점이 아쉽다. 지극히 소박한 필자의 주관적 의견임을 밝혀두는 바다. 생명의 자연스런 신비로운 힘은 스스로 상처를 치료하고 복원해낸다. 그들이 가진 강한 생명력과 건강성으로 훼손과 파괴된 것을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방식으로 즉 자연의 방식으로 치유한다. 어쩌면 인간은 자연에게 친구라기보다 거대한 적이며 파괴자이다. 사실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인데 오만한 인간 문명으로 인하여 지배자로서 군림하며 환경과 기후를 파괴하고 황폐화한다. 거기에는 끝없는 물욕과 자본의 광기 어린 탐욕과 수탈로 더 가속화되고 있다. 시인의 눈에 소소한 잔디나 풀 한 포기도 치유자로서 우리가 잊은 혹은 버린 신의 흔적을 찾아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자연의 현상과 변화, 그리고 반복 속에 그냥 일상으로 관습적으로 묻히고 아무 생각없을 것 같은 경우에도 시인은 지나가는 사람의 모습과 일반적인 말과 행동에도 시로서 포착하여 그 이면의 슬픔과 모순 또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이강하의 「이팝꽃 피는 밤」 이란 작품도 그 중에 하나다.
밤이 깊어 가는데,
휴지를 주우며 한 남자가 지나가네
빨간 양동이를 들고
밤이 깊었는데, 아들과 딸 같은 또래들이
얼굴 마주하고 치열하게 이야기 나누고 있네
횡단보도 앞에서
이미 밤은 깊었는데, 나는
홀로 이팝나무 아래서
매곡천을 거꾸로 돌리고 있네
가슴을 뻥 뚫을 세상 이야기 나눌 이 없느냐고?
휴지 줍는 남자에게 미안해하면서
이 땅의 청춘에게 미안해하면서
징검다리와 횡단보도를 수십 번 왔다 갔다 했지만
어둠 한 솥이 몸에서 들끓네
가난한 신발들이 슬피 우는
이팝꽃 피는 밤
-이강하, 「이팝꽃 피는 밤」 전문
시냇가의 물은 흐르고 강물도 흘러간다. 자연스럽게 당연한 듯이. 시인은 그런 일상의 논리나 현상에 반문을 한다. 의문과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시인 자신의 질문이기도 하지만 독자에게도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매곡천을 거꾸로 돌리고 있네”란 한 줄을 오래 잡고 고민을 했다 무슨 의미일까. 무슨 배치일까 무엇을 던지는 걸까 그러면서 다음에 오는 가슴을 뻥 뚫을 세상 이야기 나눌 이를 찾는 시인의 마음, 무언가 답답하고 막혀 있는 기존의 질서와 논리 관성을 부수고자 하면 강물이 거꾸로 흐르는 정도의 역사가 있어야 세상이 뒤집히지 않겠나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시인은 이팝꽃 피는 봄밤 그것도 늦은 밤 혼자 눈과 귀를 열어두고 휴지 줍는 남자와 아들딸 또래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가난한 처지를 보고 읽어낸다. 한밤중에 빨간 양동이를 들고 청소하는 남자는 단연히 비정규직이 아닐 것이고 낮도 아닌 밤에 일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곤궁한 사람일 것이다. 아이들은 무슨 이야기 했을까. 카드값 휴대폰 비용 먹는 이야기 모르겠다. 그러나 시인은 그 속에서 답답함과 미안함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휴지를 버리는 사람, 어른으로서 부모로서의 미안함이다.
그리곤 질문을 던진다. 함께 공감하고 이런 문제를 나눌 이가 없느냐고 가슴 시원하게 세상사 한 번 이야기할 이 없느냐고 묻는다. 마냥 운동과 꽃구경에 젖는 야밤의 꽃놀이도 아니고 개인의 한가한 잡담이 아닌 깊은 밤에 침잠되어 있으나 들끓는 어둠의 소리를 듣고 있다. 그 소리에 깃든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의 울음에 귀 기울이고 있다. 풍성한 이팝꽃 속에 헐벗은 가난을 잡아내어 아픔을 전하고 있다.
요즈음 텔레비전이나 특히 휴대폰의 등장과 확산으로 인하여 사람과의 관계가 물리적으로는 가까워졌는지 몰라도 실제로 대화와 이야기가 실종되고 개인적이거나 관음적 행태나 퇴행성 관계 설정이 부쩍 많다. 혼자만의 게임이나 자기만의 세계에 저마다 빠져 있다. 타인에 관한 관심과 존중, 소통과 연대에 극단적으로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뜨거운 솥단지처럼 끓어오르다 사라지기도 한다. 타자에 대한 인식 방법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식의 형태가 지배되어 표출되는 것이다. 기껏 식사 한번 하자고 약속하여 만나서 들어간 음식점에서 맛난 음식 주문해 놓고 서로 즐겁고 정다운 대화 없이 각자 휴대폰으로 정보나 뉴스를 검색하거나 게임이나 연속극을 본다면 얼마나 비극적인가. 저마다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와서 공유하거나 공존하려 하지 않는다. 겨우 한다는 것이 맛집 음식 사진이나 SNS에 퍼 나르고 다른 이의 사진이나 글들을 엿본다. 극단적인 경우 어떤 이는 오프라인의 만남이 불편하거나 불필요하게 생각하는 때도 있다. 막상 만나보면 어색한 것이다. 이런 현대 사회의 사람들 관계 맺기나 관계설정에 대해 꼬집은 시 한 편이 있다. 이종섭 시인의 아래의 작품이다. 그는 이것을 사람을 소비하는 형태의 한 방편으로 보았다.
친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서서히 정리한다 따지고 보면 친한 것이 아니라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친한 사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생물학적 천성을 타고난
현대인은 사람이 그리울 때면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람과 접촉한다 감정의 섞임과
요동을 겪으며 사는 생활은 얼마나 우스운가 오늘도 거리에 나가 사람들 사이에서
논다 카페에 홀로 앉아 사람들 사이에서 즐긴다 SNS를 통해 사람들과 관계한다
가까운 사람들은 서로를 소비한다 그래서 소비당하지 않기 위해 타인을 소비하며
사는 스타일을 선택한다 익명의 방식으로 사람을 소비하는 생활이 편안하다 사람을
소비하는 새로운 인종이 출현한다
-이종섭, 「사람을 소비하는 익명의 방식」 전문
현대인의 사람 관계, 설정을 소비의 한 형태로 포착한 시다. 현대인의 군상을 그려내고 있다. 지하철을 타보면 전철을 기다리거나 열차에 타더라도 누군가에게 눈맞춤이나 고개 한번 들지 않는다. 자연의 변화 온종일 하늘 한번 안 보고 사는, 가까운 주변과 사람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소비의 한 형태로 전락한 관계 맺기의 형태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일그러진 진화의 또 다른 어두운 면이다. 언젠가부터 사람이, 인맥이 재산이 되고 힘이 되던 시대가 있었다. 그것도 저마다의 이해나 계산속에서 맺어진 비생산적인 소비의 행태이고 보면 지금은 그것조차 거부하는 것이다. 진솔한 사람의 관계, 우정이나 믿음 존중과 존경의 관계에서 고독한 섬이 돼 버린 현대인의 탈출구는 익명의 인터넷 바다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고 관계 맺기보다 숨어서 타인을 소비하는 형식으로 숨는 것이다. 익명성을 통해 거짓 뉴스를 양산하거나 남을 비난 조롱하거나 비웃는다. 닉네임을 써서 여러 정보를 소비하고 확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 외에도 긍정적인 면도 있다. 전 세계적인 평화운동이나 환경운동의 연대, 국가와 인종 종교를 뛰어넘는 연대의 방식 등의 긍정적 면도 어떻게 보면 사람을 소비하는 긍정적인 면의 하나일 수도 있겠다. 새로운 인류의 등장의 저 이면에는 고독한 현대인의 빈곤한 영혼을 비추는 것이고, 이기적인 방식이 아닌 이타적 관계가 없는 삶은 생산성이 없는 죽은 삶과 같을 것이다.
어른이 되거나 학생을 가르치는 처지가 되고 보면 당연과 원칙이란 것이 아이들에게는 아니다. 그것은 관습이고 제도며 틀이며 법으로서 목을 옥죄는 목줄과도 같은 것이 된다. 아이들에겐 모두가 모든 것이 처음이고 첫 경험이며 새로운 세계의 대면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미지며 호기심이고 물음이며 궁금함이다. 아이들이 궁금함을 잃으면 배움이 없다. 기존의 관습이나 제도, 법, 종교 등의 틀도 또 다른 구속이고 억압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로웠던 유년의 어린 시절과 경험이 있다. 물론 부모님의 수고와 노동으로 양육되어 졌지만 거창한 꿈이나 욕망이 아닌 물만 먹고도 살 수 있다는 콩나물의 고백, “저는요 맹물만으로도 살 수 있어요.” (심우기,「콩나물」 부분) 당찬 순수함을 우리는 잊거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
황동섭의 「여뀌」에서는 물과 땅에서도 사는 이중적 삶의 행태를 가진 여뀌를 통하여 존재하는 것의 이유만으로 숭고할 수 있는, 그러나 삶의 질곡에 조아리거나 손가락질당하는 일도 어쩔 수 없이 뱀 같은 지혜로 거짓의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말한다. 은밀한 훔쳐보기나 병이 된 집착, 관음증에 빠진 현대인의 모습, 반인반수의 탈을 뒤집어쓴 인간을 통렬히 끌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반문을 합니다. 돌을 던지기 전에 사랑을 위한 반려자 혹은 동행자로서 당신이 있어 주겠냐는 도전을 건다.
쌍떡잎식물 마디풀과의 한해살이들,
물에서도 땅에서도 사는 여뀌처럼 어중된 이중성이라 할까요?
밭일이 밤일로 잘못 써졌다 하여 민망해하실 것까지야,
이나 저나 수고로움이며 살아 있는 것들의 성스러운 일입지요
숱한 업보를 쌓는다 해도 무한대로 살고 싶은 내 일이기도 합니다
어제는 뻐꾸기로 울었고
오늘은 사발 청자에 아내가 심어준 칼란코에 앞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모순에 빠집니다
손가락질 받는다 해도 애써 둘러대지 않겠다는 뻔뻔함이 있습지요
뱀처럼 당신 속을 헤집는 죄를 지으면서 멀쩡히 이슬처럼 빛나고 싶다니,
내 입으로 흘린 독이 당신을 부드럽게 녹여줄 거예요
아주 잠깐 짐승 같은 미소를 머금게 할지 누가 알아요?
은밀한 훔쳐보기나 구멍을 통한 엿보기이거나 관음증임이 틀림없으니
이왕, 반인반수의 탈을 벗으라시면,
그래요, 내 사랑을 위한 숙주가 되어 주실래요?
-황동섭, 「여뀌」 전문
“어중된 이중성”,“밭일”이 “밤일”로 읽히는 일, 죄지으면서도 무한대로 살고 싶은 욕망, 그 죄는 뱀처럼 사랑하는 이의 속을 뒤집는 일인데 이슬처럼 빛나고 싶은 여뀌를 통하여 인간의 이중성, 모순 같으면서도 존재하는 그 흘린 독이 당신이 미소 지을지 모르겠다는 능청스러움이 스스로 반인반수의 고백에 이르러서는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선자의 눈에 들어온 작품은 강재남의 「안개수사학」이다
허공을 세로로 접습니다
회색 마음이 반으로 갈라지고 절개선은 노출되지 않은 어제입니다 생김새 없는 숲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자랍니다
몸은 어디에 두고 왔습니다 날짜와 날짜 사이에서 방황하는 목소리는 후천적으로 태어난 결핍입니까
기억의 편린을 수집하는 너는 몇 개의 얼굴이면서 무엇도 가지지 않은 얼굴입니다 말하자면 구름과 물방울은 모계형통이라는 거죠
거슬러 올라가면 숨바꼭질에 능한 태생과 같은 맥락입니다
가령 그늘지고 축축한 곳에서 포자를 퍼트린다거나 왜곡된 목소리가 숨을 토할 때까지 귓불이 빨개지는 현상 같은 것 말입니다
호흡이 불완전한 너는 누구의 꿈속이라 믿고 싶겠습니다만, 술래라는 다른 이름이 경쾌한 거래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겠습니다
비밀은 오려도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추론을 사실이라 적는 모호하고 애매한 습성은 흩어지는 데 중점을 두면 되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만 너는 보입니다 고적한 네 미소는 언제나 오리무중입니다
-강재남, 「안개수사학」 전문
안개를 새롭게 표현한 작품이다. 안개의 여러 가지 이미지를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 안개는 회색 마음에서 시작되어 노출되지 않은 어제며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자라는 곳이다. “무엇도 가지지 않은 얼굴”이라 함은 무정형의 모습과 속성을 드러내고 숨바꼭질에 능한 태생, 귓불이 빨개지는 현상이며 술래라는 이름을 가지는 존재다. 또한, 안개의 은익성은 비밀을 내포한 은폐며 숨김이다. 안개의 태생과 존재 그리고 변주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 안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며 그래서 알 수 없다는 진술은 어떤 존재의 정형화 된 틀을 거부하는 오리무중의 존재이다.
지난 25호의 작품을 보며 일관되게 통하는 주제를 잡아내지 않았다. 다만 여러 시인의 작품을 통해 각자의 개성과 표현 등을 통해 즐겁게 차린 성찬을, 시가 가진 맛과 색깔을 통해 저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정서의 고양과 여운이 생성되어 퍼지기를 바랄 뿐이다. 필자의 부족으로 옳게 읽어내지 못한 점 있으면 다시 챙겨 보시길 바라고, 논하지 못한 좋은 작품도 많이 있었음을 밝히며 『두레문학』 제25호 계간 평을 갈음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