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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82
1월22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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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습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면 화사한 봄날이 찾아옵니다!>
마르코 복음 2장 1절부터 3장 6절까지는 이른바 ‘갈릴래아 논쟁 사화’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논쟁은 예수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갈릴래아 논쟁 사화는 중풍병자의 치유로 인해 야기된 사죄권 논쟁, 세리 레위의 부르심으로 인해 야기된 죄인들과의 친교 논쟁, 단식 논쟁, 그리고 어제와 오늘에 걸쳐 소개되고 있는 안식일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갈릴래아 논쟁 사화 중 마지막 사건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한 일로 인해 벌어졌습니다. 오늘도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또 다시 안식일 규정을 어겨가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주신다면, 곧바로 초강력 대응조치를 취하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켠채 감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잘난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생명이 위독한 응급 환자의 경우에만 목숨을 구해주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 제정의 본래의 의미를 망각한 채, 엄격한 잣대만 들이대는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한 동료 인간 존재가 지금 눈앞에서 겪고 있는 큰 고통과 깊은 상처는 안중에도 없던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저 율법의 원리원칙만 적용하려는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의 오그라든 마음, 완고한 마음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장 생명에 지장이 없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심연의 고통을 겪어온 한 인간 존재의 눈물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한없는 자비는 바리사이들의 경직되고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질된 율법을 상대화시키시고 율법 제정의 원래 목적인 인간의 대한 사랑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코 복음 3장 4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통해 갈릴래아에서의 치열했던 논쟁이 마무리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거듭 머리를 맞대고 부단히 올가미를 던져가며 예수님을 몰고 갔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있는 가르침 앞에 반박할 여지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분노로 가득한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당원들과 합작하여 예수님을 죽이기고 모의합니다.
오늘 우리의 손, 우리의 눈,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혹시라도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 못지 않게 오그라들데로 오그라든 것은 아닌지요? 잔뜩 경직되거나 왜곡된 것은 아닌지요? 너무나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인생을 묵상하며 드는 생각입니다.
인간만사 계속 죽어라죽어라 하지만은 않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습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면 화사한 봄날이 찾아옵니다. 기나긴 장마와 혹서가 지나가면 선선하고 청명한 가을하늘이 찾아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그랬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하나 했었는데 기적처럼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랜 기다림의 끝에 예수님을 만나는 행운을 손에 넣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의 나날이 무척이나 암담하다 할지라도 언제 상황이 '짠'하고 바뀔지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기상 악화로 파도가 넘실대어 발이 꽁꽁 묶여있다 할지라도 기다리다보면 반드시 배를 띄울 때가 찾아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며, 늘 희망하며, 그래도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주님께서 친히 찾아가실 것입니다. 다정한 위로의 말씀, 너무나 감지덕지한 생명의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손을 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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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은 각자가 믿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산다>
하루는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서로가 자기주장을 내세우면서 고집했습니다. 해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나뭇잎은 초록빛이다. 바다는 푸른빛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바삐 움직인다. 그 결과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다.”
반면 달은 상반되게 주장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나뭇잎은 은빛이야. 내가 매일 보는데 그걸 모르겠어? 바다는 검고 사람들은 집에서 나오질 않아서 세상은 언제나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단 말이야.”
그때 바람이 지나가다가 그들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람이 웃으면서 중재에 나섰습니다.
“얘들아, 그만 싸워. 너희들은 괜히 싸우고 있는 거야! 해가 떠 있을 때는 나뭇잎이 초록색이고 세상이 떠들썩한 게 맞고 달이 떠 있을 때는 달이 말한 것도 맞아. 나는 구름이 끼었을 때 회색 바다도 보고 나뭇잎이 검게 보이는 것도 보았어.”
그러나 해와 달은 자신이 본 것이 맞는다는 의견을 절대로 굽히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와 달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리고 믿는 대로 보이게 된다. 사랑에 조언이 필요치 않은 이유는 결국 자기 맘대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알고 믿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 ‘확증편향’입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자신이 믿는 바를 확증하려는 편협한 시각인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는 시각으로 보기에 어떤 보이는 것에 대해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의 믿음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리 옳은 판단을 해도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정당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저 정당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좋아하는 이유를 그 정당들이 내는 정책이 옳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삼성을 좋아하는 사람은 갤럭시를 살 것이고 애플이 좋다고 믿는 사람은 끝까지 아이폰을 살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논하기 이전에 나의 믿음이 옳은지, 그른지를 먼저 살펴야합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라고 시작합니다. 의도가 불순한 자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남에게 불필요한 피해가 가는 것도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타인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들은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합당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의도와 상반되기 때문에 알아도 모르는 것입니다. 머리로 따지는 옳고 그름은 마음의 의도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내가 옳고 그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다른 모든 것도 옳고 그름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성찰해보면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안식일에 이웃의 병이 치유되어 행복해지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옳다고 믿고 사셨던 것을 옳다고 믿고 살겠다는 마음을 굳혀야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는데 나는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조금 미워하며 사는 게 더 편해!’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믿으셨던 것을 나도 믿게 될 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올바로 판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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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6 :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그런데 회당 한 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절).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절)고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그분은 물으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절) 만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해도 되느냐?’하고 물으셨다면 그들은 즉시 ‘당신은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있소’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 의미를 말씀하신다.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마태 12,11) 소나 나귀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4절)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 때 사람을 비참한 상태에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이고,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돕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5절). 그리하여 여러 차례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절).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즉 죽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고 있는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나 자신을 성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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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의 묵상
예수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하였고, 예수님의 질문에 입을 다문 채, 좀처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한가운데’로 초대한 이상,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 사회에 내쳐지고 소외받고 천대받는 이들이 우리 삶 한가운데 등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우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다른 이들과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쳐다만 보고 있을까요? 어쩌면 그런 수동적 침묵은 우리의 비겁함과 잇속 계산에 따른 이기심에서 말미암은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노기를 띠십니다. 그리고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우리의 이기심을 깨부수는 명령과 같습니다. “마음을 열어라. 이웃을 향하여라. 더 이상 너의 ‘밥그릇’만 채우지 말아라.” 하고 예수님께서 다그치십니다.세상은 이러한 예수님을 없애려고 계획합니다.
세상은 제 ‘밥그릇’을 위하여 신념도, 사상도 내팽개칩니다.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합니다. 우리 역사로 보면, 일제 시대에 민족주의자들과 친일파가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이 두 집단이 함께 모의를 한다는 것이 신기하지만, 제 밥그릇 앞에서는 민족도, 나라도, 옳음에 대한 열망도 내팽개칠 수 있는 것이 세상인가 봅니다.
이런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이 지켜 나가야 할 것은 단 하나, 정의를 향하여 ‘손을 뻗는 일’입니다. 꽉 막힌 세상의 이기심 그 한가운데서 세상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펼쳐 나가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하려고 우리는 오늘도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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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르 3,1-6)
여기서 “합당하냐?”는, “하느님 뜻에 합당하냐?”이고, 이 말씀의 뜻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안식일에 무엇을 하기를 바라시겠느냐?”이고, 이 질문의 답은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안식일에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기를 바라신다.”입니다. 선(善)이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평소에도 늘, 안식일에는 더욱더, 좋은 일(선한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기를 바라십니다.
1)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 지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남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가르침은 안식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에 다 해당되고, 종교와 신앙생활 전반에 다 해당됩니다. 이웃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그 이웃에게 관심 갖지 않고, 그 이웃을 도와주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골방에 틀어박혀서 기도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이웃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 기준으로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2) 주일 미사 참례는 주일을 지키는 일 가운데 일부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따라서 주일 미사 참례만으로는 주일을 제대로 지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주일 하루를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휴일을 즐기는 일 자체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휴일을 즐기더라도 신앙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고, 그날이 주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주일 미사가 끝난 뒤에 나머지 시간들을 세속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또 전혀 거룩하지 않은 모습으로, 세속적으로 놀면서 지냈다면, 그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십계명을 안 지킨 것입니다. (주일을 안 지킨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모습을 흔하게 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너무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말이다.”라고 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주일을 주일답게 제대로 지키는 것은 고지식한 일이 아니라,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주일은 ‘노는 날’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쉬는 날’이고, ‘좋은 일’(선한 일)을 해야 하는 날이고, 이웃 사랑 실천을 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신앙인은 주일이 아닌 날에도 꾸준히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주일에는 특히 더 잘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 쉬란 말인가?”라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음과 정성의 문제입니다.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복음 말씀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도 없고, 그렇지만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도 싫고, 그래서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
1)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라는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한 것입니다.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나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희생이고 헌신입니다. 그러나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살인죄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무엇이 ‘하느님의 선(善)’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큰 죄를 짓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신념만을 내세워서 남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살인을 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신념이라면, 그것은 결코 옳은 신념일 수 없습니다. 선(善)이 아닌 신념은, 즉 악한 신념은 신념이 아니라 그냥 악(惡)입니다.
2) 바리사이들은 대부분 “나는 옳다.”라는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옳다.”라는 독선은 “너는 틀렸다.” 라는 편견과 짝을 이룹니다. 그 독선과 편견 때문에 자기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박해합니다. 바리사이들의 오만과 독선은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과 결합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나는 옳다.”라는 독선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3) 바리사이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무조건 싫어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조건 배척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갈릴래아의 시골 출신이고, 목수라는 점 때문에 싫어했는데, 나중에는 그냥 무조건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교를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해도,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해도, 그리스도교가 하는 일이라면 다 싫어합니다. 그런 태도는 자기 스스로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고, 구원의 길을 버리고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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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사제로써 살다보면 기쁜 소식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사연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혹자는 사제의 삶을 치과 의사의 역할에 비유하는데, 사람들의 찡그린 모습, 고통 중에 있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도구로써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미리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돕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주변의 일들에 적잖이 신경이 쓰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맡은 공동체에 인간적인 갈등이 있지 않을까 고민이고, 교사들 혹은 학생들의 신앙이 제대로 자리 잡아 나가고 있는지 걱정됩니다. 주일마다 보이던 학생이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은가 신경이 쓰이고, 학생의 표정이 어두우면 무엇이 고민인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워 하루하루 지내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사람 마음처럼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시간이 지난 뒤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지는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신학생이었던 시절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안타까운 이별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동료 신학생들의 자퇴, 퇴학 혹은 동료 사제들의 환속, 젊은 청년의 자살 등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받곤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할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제 마음을 뒤덮습니다. 나와 그다지 가깝지 않았다 할지라도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지는 않았을까,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지나쳐 버린 것은 아닐까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위로의 손을 내미신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찾아가신 회당에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생명의 위협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모든 행위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을 모두 무시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사실 이 병자는 당장 생명이 위험했던 것도 아니고, 안식일이 지나갈 때 까지 기다려도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굳이 사람들의 반발을 살 것을 알면서도 그를 성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율법 전문가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지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것은 즉 도와줄 수 있는 기회가 당장 주어졌을 때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옳지 않은 행동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웃을 돕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랑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의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옳은 일은 더 이상 그들의 눈에 옳은 일로 보이지 않고 이런저런 트집 잡을 일로만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고 들은 율법학자들은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좋은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꾀합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고집으로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을 슬프게 할 뿐만 아니라 노기를 띠게 만드는 죄악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뜻과 마음은 괴로움 중에 있는 이들에게 기울어져 있지만, 자기 자신만을 내세우고 신앙을 말로만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그분의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아가 개인의 이기적인 마음, 소유욕은 사랑과 배려의 마음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심지어 미움과 질시의 대상이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돌아봅시다. 사실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사춘기로 예민한 자녀, 갈등이 존재하는 가족들, 가난한 이웃들, 개인적인 일로 고통 받는 이웃들, 마음이 완고한 이들 등등 기도와 도움, 그리고 이해가 필요한 이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미사 중에 이러한 이웃들을 기억하며, 혹시 나 자신의 이기심으로 타인에게 베풀어야 할 도움의 손길을 거두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더불어 나 자신의 마음을 조금 더 비우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마음을 채워나가야 할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 졌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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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선한 뜻>
선한 뜻을 가지고 일을 할 때와 선하지 못한 뜻을 가지고 일을 할 때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또 마음을 비우고 이웃을 바라볼 때와 욕심과 이기심으로 이웃을 바라볼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얼마 전 드라마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했으나 결국 결과가 좋지 않아 낭패를 본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따라 그 사람을 처벌할 수도 없고 처벌 받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불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선한 동기에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면 그 결과에서 오는 불편함이나 오해까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면 고발하기 위해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의지는 결코 선한 것일 수 없고 세상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는 선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느님을 마음의 중심으로 삼아 세상에서 선한 몫을 택해야 하겠습니다. 길을 지나다 불쌍한 사람을 만난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한 가지라도 채워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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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님]
<계명의 참 의미>
“구루가 저녁 예배를 드리고 앉았을라치면 번번이 아슈람 고양이가 끼어들어 예배자들의 마음을 산란케 하곤 했다. 그래서 구루는 저녁 예배 동안 고양이를 매어 두도록 했다. 구루가 죽고 나서도 오랫동안 저녁 예배 때면 고양이가 묶여 있었다. 그런데 그 고양이도 죽자, 또 다른 고양이가 아슈람에 붙들려 오게 됐다.
"저녁 예배 동안 격식에 맞게 매여 있게시리.”
율법주의의 위험을 우회적으로 경고하는 것 같아 인용해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에 자구에 맞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가를 시험하기 위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 인간이 잘되게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계명을 실천할 때에는 기계적으로 말마디에서 벗어나지 않게 노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계명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숙고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중요한 것을 찾아 합리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안식일에 대한 계명뿐 아니라 다른 모든 계명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예외 없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율법주의에 빠져 계명의 참된 의미를 잊고,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계명을 잘 따르기 위하여 실제로 행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며, 단지 계명의 말마디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리사이들처럼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여 비판하거나 이웃에게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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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사람을 보다>
마르코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사람을 보다>
사람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본다
사람을
보기에
비로소 사람이다
사람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라도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이고파
사람을
보고 싶다
사람이
사람에게
보인다
사람에게
보이기에
비로소 사람이다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면
사람임에도
사람일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이고파
사람에게
보이고 싶다
사람을
보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보라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보지 말라는
사람이 있다
사람에게
보이고픈
사람이 있다
사람에게
보이라는
사람이 있다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사람에게 보인다
사람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보지 않고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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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시오>
회당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려고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십니다.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무관심한 뭇시선들을 피해 한쪽 구석에 있는 듯 없는 듯 초라한 모습으로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맛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도 있지만, 흠을 잡아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불온한 생각에 잠긴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눈빛과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간절한 눈빛이 마주합니다.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사람들의 차가운 눈빛과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생기 잃은 눈빛이 마주합니다.
예수님의 노기 띤 눈빛과 사람보다 법 규정에 얽매인 사람들의 의심과 불만 가득한 눈빛이 마주합니다. 무수한 눈빛들이 혼돈스럽게 오고가는 불안한 침묵이 이어집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이 침묵을 깨고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십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너라. 너의 자리는 거기가 결코 아니란다.
너에게는 모든 이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단다.
누가 너더러 그곳에 있으라고 했느냐.
너의 오그라든 손이 보기 싫다고 없어지라고 했느냐.
누가 너더러 아무 시선 없는 곳에 숨으라고 했느냐.
너의 오그라든 손이 보기 싫어 스스로 숨었느냐.
네가 있어야 할 곳, 내가 초대하는 곳으로 기쁘게 나오너라.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마라.
더 이상 다른 이들의 시선에 무릎 꿇지 마라.
어서 지체하지 말고 가운데로 나오너라.”
예수님의 부르심은 숨죽어 지내야 했던 이들과 누군가를 숨죽이게 했던 이들 모두에게 한 줄기 빛과 희망입니다. 숨죽어 지내야 했던 이들과 숨죽이게 했던 이들 모두, 무엇이 어둠인지, 무엇이 희망 없는 삶인지도 모른 채 어둠 속에서 절망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문득 지난 시절 참으로 가슴 쓰라리게 담아 놓았던 이야기가 다시 마음을 저며 옵니다.
“이렇게 사는 저희 모습이 그렇게도 눈에 거슬립니까? 제대로 갖추어 놓지 못하고 가난하게 사는 저희가 보기 싫습니까? 이런 저희를 외국인이 볼까봐 창피하고 두렵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무자비하게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짓밟습니까? 이렇게 내쫓지 말고, 차라리 우리 동네에 높이 담을 두르십시오. 밖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말입니다. 답답하다고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이 쳐놓은 그 담벼락 안에서 우리 오순도순 살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곳에서 나가라는 말만은 말아주십시오.”
88올림픽을 몇 해 앞두고 도시미관을 헤친다고 빈민지역을 무작정 철거할 당시의 어느 이름 모를 철거민의 피맺힌 절규입니다. 그분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계신지 모릅니다.
끊임없이 숨어 지낼 것만을 강요당하며 오늘은 이리로 내일은 저리로 쫓겨 가고, 갈 때까지 가다가 갈 곳이 없으면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현실을 어두웠던 과거의 것만으로 삼을 수 없음이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오늘입니다.
눈에 거슬리면 없애버리고, 입장이 다르면 적으로 몰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난하고 나서는 오만한 편의주의가 아름다운 인간 세상을 함께 살 수 없는 더러운 곳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살 맛 나는 곳으로 다시 만들기 위해서, 이제 언제부터인가 한편으로 밀어놓았던 소중한 이들을 다시금 삶의 중심 자리로 초대해야 합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십시오! 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십시오!”라고 말입니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오히려 가차 없이 내치는 이들에게 단호하게 외쳐야 합니다.
“당장 그 죽음의 굿판을 치워버리시오! 당신들의 정갈한 겉모습 속에 담긴 추악함 싹 쓸어버리고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나오시오!”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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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1828년 러시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보는 사람마다 못생겼다고 합니다. 그 말들은 상처가 되어, 아이가 자라면서 자기 얼굴에 대해 무서운 열등의식을 갖게 되어 폭력적으로, 그리고 어느 사람도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예수님을 알게 되고 만나면서 상처가 치료되기 시작합니다. 그 못생긴 아이가 “부활” “전쟁과 평화”를 쓴 위대한 작가인 “레오 톨스토이” 입니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삶은 변화되었다. 그 말씀은 나에게 신비한 능력을 주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멈추었습니다. 과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라는 묵상을 했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두 손으로 일을 했던 사람이고, 그 일을 해서 가족들을 먹여 살렸던 가장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사고였는지, 아니면 질병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한쪽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늘 괴로워하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 사람에게 또다시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시오. 당신의 자리는 거기가 아닙니다. 누가 당신더러 그곳에 있으라고 했습니까? 누가 당신더러 아무 시선 없는 곳에 숨으라고 했습니까? 당신의 오그라든 손이 보기 싫다고 없어지라고 했습니까?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시오. 당당하게, 주저하지 말고, 당신이 있어야 할 곳, 내가 초대하는 곳으로 기쁘게 나오시오. 이제는 자신을 숨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손을 뻗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모든 아픔과 슬픔과 죄는 내가 짊어질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회복되어 성하게 된 손을 너에게 주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한 줄기 빛과 희망이었습니다. 또한, 누군가를 숨죽이게 했던 이들에게도 한 줄기 빛과 희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숨죽어 지내야 했던 이들과 숨죽이게 했던 이들 모두 어둠 속에서 절망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오늘 예수님께서는 고운님들을 이곳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그리고 “손을 뻗어라.”
예수님 이 말씀의 능력은 퍼내면 낼수록 샘솟듯이 은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육신과 영혼을 지치지 않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고운님에게는 두 번, 세 번, 심지어 일곱 번이라도 도전할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아픈 그곳이 치유되고, 잃어버린 그곳이 회복되는 변화의 능력이 됨을 믿습니다. 그러나 고운님들에게 도저히 안 되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마음도 메마르고, 그곳에 더하여 손도 오그라들게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앞으로 나와 그분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손을 뻗어라.” “손을 뻗어라.” “손을 뻗어라.”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끊임없이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은혜로운 묵상은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그리고 손을 뻗어라.”라는 예수님 말씀의 초대에 “내가 할 수 있다.”라는 믿음으로 나아가 고운님들의 삶이 축복이 되는 충만한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조 두레박 사제도 안식년 기간 내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그리고 손을 뻗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담고,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손을 뻗어라.” 오늘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고운님들 안에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는 말씀의 능력이 있음을 믿고, 메마르고 오그라든 곳이 깨끗하고 성하게 회복되는 기쁨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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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84)
♧♧ 시편 71편 13절….
"저를 적대하는 자들이 부끄러워하며 사라지게 하소서. 저의 불행을 꾀하는 자들이 모욕과 수치로 뒤덮이게 하소서."
* 저를 적대하는 자...
문자적 의미는 ‘나를 고소하는 자’인데 ‘까닭 없이 내 목숨을 노리는 자’란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 부끄러워하며 사라지게 하소서.
악인이 결국 자기들의 악한 꾀로 인해 도리어 수치 즉, 공개적인 부끄러움을 당하며 자기들의 죄악으로 인해 결국 멸망당하게 해달라는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에 대한 요청입니다.
* 저의 불행을 꾀하는 자...
‘저를 모해하기를 원하는 자’ 혹은 ‘저의 불행을 원하는 자’란 말입니다.
* 모욕과 수치로 뒤덮이게 하소서.
‘모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르파’는 ‘꾸중’ ‘질책’을 뜻하며, ‘수치’에 해당하는 ‘켈리마’는 은총에 반대되는 ‘저주’를 뜻합니다. 다윗은 불의하게 자신의 목숨을 해치려는 대적들의 죄스러운 악한 행동에 대하여 하느님이 질책하시고, 대적 자들이 계획하는 바가 결국 수포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시편 71편 14절….
"그러나 저는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그 모든 찬양에 찬양을 더하오리다."
* 저는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다윗은 이미 앞에서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희망이시고(5a절)’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께서 자신의 희망이 되시는 이유를 설명하고(제 어릴 때부터 저의 신뢰이십니다.(5b절), 이러한 희망의 주님께 구원을 간구했었습니다.(7-13절. 참조) 따라서 여기서 ‘희망’은 지금까지 다윗이 간구한대로 하느님으로 인해 성취될 구원에 대한 크나큰 기대와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확신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 모든 찬양에 찬양을 더하오리다.
이 같은 주님께 대한 찬양의 다짐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구원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시편 71편 15절….
"저의 입은 당신의 의로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온종일 이야기하리니 저로서는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의로 선과 악을 판단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의 오묘함과 당신을 의지하는 이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의 무한함을 가리킵니다. 한편, 다윗이 ‘당신(주님)의 의로움과 행적’을 연결시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당신의 의로움으로...
여기서 말하는 ‘당신(주님)의 의로움’은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이에게는 축복을, 그렇지 않은 악인에게는 저주를 내리시는 하느님의 정의의 보응을 가리킵니다. 즉 여기서 다윗은 이 같은 하느님의 정의에 근거하여 경건한 자신에게 구원을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 당신 구원의 행적...
여기서 다윗이 대적들의 위협에 의해 자신의 목이 죄여오는 것과 같은 절박한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한 죽음과 근심, 두려움과 모든 곤경에서 자유롭게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온종일 이야기하리니...
비록 늙어 쇠약한 다윗이지만, 하느님께 구원받은 감격은 그 누구보다도 크며, 또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로서 주님의 의로움을 널리 증거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열의에 있어서도 그 누구보다도 강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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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꽤 오래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어릴 때의 일을 말씀하시는데, 이상하게도 제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당시의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한동네에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네에 10년 가까이 함께 살았는데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30년 뒤의 우연한 만남으로 함께 같은 공간에서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분과의 만남을 통해, 누군가와의 만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아도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보고 또 말도 전혀 나누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지금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어떤 만남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그 만남이 소중한 만남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그렇다고 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이를 대수롭지 않은 만남으로 생각하기에 때로는 불평불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또 좋은 만남이 아닌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만남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유대인의 회당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그분께서 행하시려는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고 말씀하시지요.
만약 “안식일에 일을 해도 되느냐?”라고 물었다면 그들은 곧바로 율법을 어기려고 한다고 고발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정신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그래서 사랑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어서,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기에 주님과의 만남을 좋은 만남으로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부정적인 마음,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면,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과 좋은 만남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 마음을 쫙 펴고 주님과 좋은 만남을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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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연분>
어느 부부를 만났는데 이들은 스스로 ‘천생연분’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왜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세요? 둘이 그렇게 딱 맞습니까?”
천생연분(天生緣分)이란 하늘이 마련하여 준 인연을 이르는 뜻의 한자성어로 모든 점에서 딱 맞을 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아뇨.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달라요. 그래서 좋아요.”
“왜요?”
“치킨 먹을 때 이이는 다리를 좋아하고, 저는 날개를 좋아해요. 그래서 다투지 않게 되고, 이렇게 달라서 좋은 점이 많기에 서로 잘 만났다 싶어요.”
천생연분을 우리는 성격이나 생각이 같아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이 천생연분의 이유도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천생연분이 아닐까요? 혹시 천생연분이 아니라고 고정을 해놓아서 최악의 커플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이라는 말에 맞고 틀리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내게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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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라디오 프로가 있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에 지침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부모님을 지극 정정으로 섬기는 자식의 이야기,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를 때려잡은 용감한 청년의 이야기, 남모르게 재물을 나누었던 형제의 이야기, 홀로 남아 자식을 잘 키웠던 어머니의 이야기,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던 의적 이야기, 귀신을 물리쳤던 스님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마을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런 이야기들을 모아서 들려주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민중의 삶이 되었습니다.
서양 문학의 원류가 되는 길가메시, 일리야드, 오디세이도 서양판 전설 따라 삼천리일 겁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가족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충성, 친구에 대한 우정, 배신자에 대한 응징, 운명을 받아들이는 겸손,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는 용맹, 진리에 관한 탐구,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이 있습니다.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는 영웅의 이야기도 있고, 이름 없는 시인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고, 시골에 사는 처녀와 총각의 순결한 사랑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전설이 음악으로 표현되고, 그림으로 표현되고, 연극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런 신화가 문학이 되었고, 이런 신화가 신앙이 되었습니다.
‘사실이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을 받으면 신화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류의 문화와 삶을 지탱한 것은 햇빛을 받은 역사와 달빛을 받은 신화가 한데 어울려진 겁니다. 논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과 기술은 현대 문명으로 꽃을 피웠습니다. 산업의 발전, 인터넷, 스마트폰, 인공지능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고, 편리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의 발전은 낡은 전통이라는 이유로, 인류의 소중한 유산인 신화와 직관, 영성과 깨달음의 세계를 소외시켰습니다. 하드웨어는 커졌는데 그것을 운영하는 소프트웨어가 없는 느낌입니다. 생명은 잘게 쪼개지는 원자와 물질이 전부가 아닙니다. 생명은 파동과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고고학, 이성, 과학의 기준으로 성서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양식비판과 편집비판을 통해서 시대를 구분하고, 첨부된 내용을 추려낼 수도 있습니다. 성서에 내포된 다른 종교와 신화의 영향을 가려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서를 해석하는 또 다른 전통과 전승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삶의 지침이 되는 윤리와 교훈을 발견하는 해석입니다. 직관과 성찰을 통해서 영적인 깨달음을 발견하는 해석입니다. 교회는 그런 방법을 ‘Lectio Divina(거룩한 독서)’라고 하였습니다. 성서가 단순히 우리에게 윤리적인 삶의 지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대화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힘의 세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죽이고 죽는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것이 강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에서 세상의 것이 이긴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승리한다는 신앙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환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환자가 손을 펴는 문제가 아닙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라는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순간에도 선을 행하는 신앙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밤을 새워 찾아다니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안식일에 좋은 일하는 게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하는 게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게 합당하냐? 죽이는 게 합당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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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戰士>
-믿음과 사랑의 무장武裝-
단 하나 제 간절한 소원은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정말 떠나야 할, 제때에 잘 떠나는 죽음보다 고마운 은총도 없을 것입니다.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그러니 사고사, 객사, 병사가 아니라 주님의 전사로서 치열히 싸우다가 기도하던 중이든, 공부하던 중이든, 일하던 중이든 전사戰死했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오늘날 사회 현실을 봐도 누구나 공감합니다. 총칼만 안들었지 생존경쟁의, 때로는 각자도생의 치열한 전쟁터인 세상입니다. 참 역설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인데 인류역사상 전쟁이 없었을 때는 없었습니다. 지금도 영원히 현재진행형중인 다양한 형태의 전쟁입니다.
수도승생활의 전통적 주제 역시 영적전쟁입니다. 수도생활은 영적전쟁이요 수도승들은 주님의 전사가 됩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요 수도형제들간에는 영적 전우애가 형성됩니다. 밖에서 볼 때는 평화로운 천국같아도 내적으로는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인 수도원입니다.
수도승들만 아니라 참으로 믿는 이들 모두가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일정한 복무후 전역하는 전사가 아니라 평생 현역의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말씀중 떠오른 주제가, 또 어제 15년 역사를 지닌 요셉수도원을 사랑하는 자매들의 모임인 ‘예수성심자매회’를 통해 새롭게 확인한 주제가 ‘주님의 전사’입니다. 어제 모임시 강론전 나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고인이 된 박석희 주교님의 예로 시작된 나눔입니다.
-“예전 신학교 시절 당시 박석희 교수 신부님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서품후 오랜만에 동창신부들을 만났을 때의 분위기가 흡사 치열한 전투후 고지를 점령하고 포탄 연기 자욱한 중에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며 ‘너 살아 있었구나!’ 삶을 확인하는 듯 반가왔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자매님들을 보며 비슷한 느낌입니다. 한달동안 치열한 영적전쟁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시간같아 참 반갑고 기쁩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전쟁에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사셨습니다.
모든 것이 변화합니다. 우리 역시 15년 동안 이런저런 많은 내외적 변화를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은 언제나 한결같이 영원하십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우리의 믿음도 사랑도 영원할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영원하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때 두려움도 불안도 사라져 안정과 평화입니다.
세월의 풍화작용도 우리의 주님을 향한 믿음, 희망, 사랑은 비켜갈 것입니다. 아니 날로 짙어지고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주님 향한 우리의 믿음이요 희망이요 사랑입니다.”-
요지의 말씀을 드리며 격려했습니다. 참으로 한분한분이 주님을 닮은 주님의 성녀들처럼, 주님의 여전사女戰士들처럼 보이는 참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우리 요셉 수도원 소속의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님들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다윗과 복음의 예수님이야말로 영적전사의 빛나는 모델입니다. 정말 불세출의 하느님의 전사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의 전사인 홍안의 소년 다윗이 무릿매 끈과 돌맹이 하나로 거인 전쟁의 달인 골리앗 용장을 물리치는 장면은 얼마나 통쾌하고 흥미진진한지요! 말 그대로 믿음의 승리입니다. 참으로 담대한 믿음의 소년 전사 다윗입니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정말 다윗의 기적같은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입니다. 영적전사의 빛나는 모델이 주님의 전사 다윗입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무장할 때 영적승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믿음과 사랑으로 완전무장한 하느님의 전사를 방불케 합니다. 진리의 말씀의 무기로 적대자들을 압도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총으로 다윗처럼 사기충천士氣衝天한 예수님이십니다. 당신을 고발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적대자들을 개의치 않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질문속에 답이 들어있습니다. 안식일법이 아니라 사랑이 판단의 잣대입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악이 아닌 선을 택해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이들의 말문이 막히니 완전 주님의 승리요 이어 주님은 이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명령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흡사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런저런 두려움과 불안으로 오그라들고 쪼그라든 우리 심신心身을 활짝 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전사들인 우리 모두를 믿음과 희망과 사랑, 그리고 평화로 완전 무장시키시어 세상 영적 전쟁터로 파견하십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삶의 은총을 상징하는 영성체송 시편 구절입니다.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시편2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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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이 오그라든 병>
얼음위에서 놀던 어린이가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구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서 이기심을 고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탈출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해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저항과 반대에도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인내와 지구력을 지녀야만 합니다. 이러한 인내와 지구력은 예수님께 의지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합니다. 좋은 일에는 인색하고 남을 해치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섭니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외적인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시기 질투하는 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한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칠 수 없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위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한1,5)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손은 반역의 손, 질투심 때문에 동생을 죽인 카인의 손은 살인의 손,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무리의 손은 폭력의 손이다. 예리코를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 사제나 레위의 손은 오그라든 손이다. 반면 강도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간호해 준 사마리아 사람의 손은 선한 손이요, 봉사의 손이요, 활짝 펴진 손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움켜진 손은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움켜진 손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는 펴질 수 없는 손입니다. 나의 손은 어떤 손인가? 살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믿습니까? 이 믿음은 나의 삶을 변화시킵니까?"(프란치스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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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하느님을 믿는 이의 당당함이 부각됩니다.
제1독서를 먼저 봅니다.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입니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1사무 17,45)
소년 다윗이 전장 한가운데로 나아가 필리스티아 거인 장수 골리앗과 마주합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대가 될 것 같지 않게 육체적으로 왜소하지만 다윗은 주눅들지 않고 당당합니다. 그건 그가 하느님을 단단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 ...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1사무 17,47)
어린 소년이지만 다윗의 믿음은 허황되지도 두서없지도 않습니다. 그는 만물의 주인, 세상만사의 주인, 인간 운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주도권을 확신하면서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1사무 17,50)
하느님은 다윗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으십니다. 기름부음받아 주님의 영 안에서 살아가는 소년 다윗은 하느님의 힘으로 필리스티아 장수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로써 온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진정 하느님께서 손수 지켜주시는 하느님 백성임을 확인하지요.
복음 대목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내용입니다.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마르 3,1)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잡으려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사실 현장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예수님 눈에는 가장 먼저 몸이 불편한 그 사람이 눈에 띈 것 같습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3)
예수님은 위험을 피하려 뒤에서 슬쩍 치유를 일으켜 주시거나, 이번만 그냥 외면하고 넘어가거나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정면으로 사람들의 악한 생각에 맞서 그들 한가운데서 당신 존재와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숨거나 피하지 않는 예수님처럼 손이 오그라든 사람도 자신의 부끄러운 장애를 사람들 눈에 드러내야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거저 얻는 기적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마르 3,5)
복음사가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노기는 노여운 기운, 곧 분노와 흡사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분노가 곧잘 폭언이나 폭력으로 표출되는 것에 비해, 예수님의 분노는 깊은 슬픔으로 옮아감을 알 수 있습니다.
깊은 슬픔. 어쩌면 이는 마음이 완고해져 형제의 고통에 관심을 꺼버린 사람들에 대한 격한 연민과 안타까움일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서는 그 완고한 자들까지도 당신의 사랑하는 형제들이기에 그들이 밉기보다 그들의 죄악이 아프고 슬프실 따름입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육신이 굳어버린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영혼이 굳어버린 사람에게도 거세게 흘러갑니다.
회당에서 당신을 고발하려고 노리는 무리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과 오늘 독서의 다윗이 겹쳐보입니다. 마치 골리앗처럼 버티고 선 제도권의 종교 권력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직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계시기에 흔들리지도 위축되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의 당당함은 교만이나 오만에서가 아니라 진실한 자기 인식에서 나오는 겸손입니다.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그라든 한쪽 손처럼 마음과 존재가 움츠러 들었던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로서는 불편하고 부끄러운 몰골로 회당 가운데에 나와 선 것도 난처한 일인데, 이제는 거기에 더해서 이제껏 오그라들어 있던 감추고 싶은 손까지 내밀어야 합니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마르 3,5)
그가 손을 뻗습니다. 아니, 뻗어 봅니다.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일단 예수님을 믿고 본 것이지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 자리에 서 계신 예수님처럼, 그 역시 자기 안에 있는 희미하고 미소한 믿음을 싹싹 끌어모아 굳어있던 손을 힘껏 내뻗습니다. 이로써 믿음은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르 3,6).
섞일 일 없었던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이 기회에 하나가 됩니다. 이는 화합이 아니라 야합일 겁니다. 거대한 악의 기운 앞에 선 예수님이 마치 오롯한 믿음으로 나아간 순결한 소년 다윗 같습니다.
"그분은 나의 힘, 나의 산성,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화답송)
이 노래는 다윗과 이스라엘의 노래입니다. 또 손이 오그라들었던 이와 예수님의 노래이기도 하지요. 이것이 또한 나와 벗님의 노래이길 희망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극한 고통에 삼켜지기도 합니다. 두려움과 절망, 슬픔으로 무너질 때도 있지요. 하지만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악의 무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도 숨어있지 말고 가운데로 나와 서라고, 손을 뻗으라고 이르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 이 노래는 나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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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마르 3,4)
<오그라든 손과 오그라든 정신>
유대인의 회당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계신 분을 바라보지도 없았고, 그분께서 행하시려는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구원자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말씀으로 그들의 정신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악하고 매정함을 아시는 그분은 우선 말씀으로 그들을 부드럽게 만드시고 다독이시며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만일 그분께서 ‘안식일에 일을 해도 되느냐?’ 라고 물으셨다면, 그들은 곧바로 ‘당신은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있소’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과 관련된 법을 세우신 그분께서는 율법이 원래 의도했던 바를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사람이 우물에 빠질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마태 12,11 참조), 사람만 아니라 소나 나귀의 경우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께서는 유대인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물음을 던지십니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참조; 마태 12,12), 그들은 ‘그렇다’는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타나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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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진흙을 매개로 우리가 오염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지
진흙을 매개로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안에 오염된 곳도 있음을 깨닫고 이를 바라보도록 초대하신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진흙을 반죽하기 위해 그분이 뱉은 침은 물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서 안에서 하느님의 성령을 상기시킨다.(요한 3,5; 7,37-39; 19,34 참조) 한편 어린 자식이 넘어졌을 때 생긴 상처에 엄마가 발라주는 것도 침이다.
♣의학적으로는 치료 효과가 없을지라도, 아이는 자신이 애지중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고 낫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상처를 받으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일상 안에서의 거룩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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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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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마르 2,28)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어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혹 나도 지금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어 형제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그것을 언제부터, 대체 왜 손에 쥐게 되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손을 꼭 쥐게 된 것일까?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쥐었을까?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니라, 손에 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이 되셨습니다. 참으로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해주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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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손을 뻗어라.”(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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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그래도 그러니까>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킁킁 앓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그래도 기도는 해야지.
그래도 일은 해야지.
그래도 그래도ᆢ
그러면 안 되지 하다가
사람 잡습니다.
힘이 든다고~ 죽겠다고
하는 사람을 살리는 길은
그래도 그래도 라는 선을
지워줄때 생명을 살립니다.
게으름, 핑계, 합리화가
아니라는 판단이 서면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해야 사람입니다.
"그래도 그러니까 봐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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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손을 뻗어라."(마르 3, 5)
먼저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안에
믿음이 있고
주님 안에 치유가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을 낳고
용기는 용기를
낳습니다.
오그라든 마음을
펴주시는 분은
언제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오그라든 삶에서
우리를 빠져나오게
합니다.
서로를 향해
뻗어가야 할
우리의
믿음입니다.
손을 뻗어야
서로를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형제의 마음을
오그라들게 한
당사자가 바로
우리자신임을
깨닫게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는
믿음이란
용기를 내어
손을 뻗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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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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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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