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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권 영천군 榮川郡
동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7리, 예안현(禮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51리,
남으로 안동부 경계에 이르기까지 41리, 서로 풍기군(豐基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북으로 풍기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3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내이군(奈已郡)이다 : 내(奈)는 날(捺)로 된 것도 있다.
신라(新羅) 파사왕(婆娑王)이 취했고, 경덕왕(景德王)이 내령군(奈靈郡)이라 고쳤다.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강주단련사(剛州團練使)라 고쳤고, 현종(顯宗)은 길주(吉州)에 귀속시켰더니, 인종(仁宗)이 순안현령(順安縣令)
이라 고치고, 고종(高宗)이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인준(金仁俊)이 살고 있는 시골이라 하여 지영주사(知榮州事)
로 승격시켰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세조(世祖) 3년에 순흥(順興)을 없애버리고,
마아령(馬兒嶺) 아래 물 동편 땅인 부석(浮石)ㆍ무짐이[水息]ㆍ관천(串川)ㆍ파문단(破文丹) 4리(里)를 끊어서
이 군에다 귀속시켰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기 한 사람씩이다.
군명 내이(奈已)ㆍ내령(奈靈)ㆍ강주(剛州)ㆍ순안(順安)ㆍ영주(榮州)ㆍ귀성(龜城)
성씨분군 민(閔)ㆍ우(禹)ㆍ애(艾)ㆍ팽(彭)ㆍ동(董)ㆍ고(高) : 내(來)이다. 연(延) : 촌(村)이다.
정(鄭) : 봉화(奉化) 김(金) : 영월(寧越) 전(全) : 정선(旌善)에서 왔다.
풍속 풍속은 검소하고 진솔함을 숭상한다 : 관풍안(觀風案).
인물은 번성하고 많았다 : 문헌(文獻)의 제민루기(濟民樓記).
산천 철탄산(鐵呑山) : 군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귀산(龜山) : 군의 서남 1리에 있으며, 군의 옛 이름 귀성(龜城)이 이에 말미암았다.
학가산(鶴駕山) : 군 남쪽 40리에 있다.
봉황산(鳳凰山) : 군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순흥에 속하였다가 이제 이 군에 귀속되었다.
마아령(馬兒嶺) : 군 북쪽 36리에 있는데, 길이 심히 험하였으며, 충청도 영춘현(永春縣)으로 가는 길이다.
관적령(串赤嶺) : 군 북쪽 33리에 있다. 방하수(防河藪) : 군 서쪽 2리에 있다.
덕산수(德山藪) : 군 남쪽 3리에 있다.
○ 이 고을은 본래 수재를 근심하였는데, 하륜(河崙)이 군수가 되었을 때,
흙을 쌓고 나무를 심어 이 두 수(藪)를 만들었다. 그 뒤에 백성들이 그 이익을 힘입었다.
임천(臨川) : 군 서쪽 3리에 있다. 풍기군의 남북쪽 냇물과 옛 순흥(順興) 동쪽 냇물의 하류로, 귀산(龜山) 밑을
지나 남으로 흘러서 사천(沙川)에 이르러 합하여 예천군(禮泉郡)의 사천(沙川)이 되었다.
사천(沙川) : 군의 동쪽 15리에 있으며, 봉화현(奉化縣) 물야계(勿也溪) 하류이다.
신증 봉산(蜂山) : 군 동쪽 15리에있다. 연화산(蓮花山) : 군 남쪽 15리에 있으며,
백병산(白屛山) : 군 북쪽 50리에 있다. 풍락산(豐樂山) : 군 동쪽 56리에 있다.
담보산(韂甫山) : 군 북쪽 5리에 있다.
백령(白嶺) : 군 남쪽 15리에 있다. 병령(竝嶺) : 군 동쪽 20리에 있다. 장암천(藏巖川) : 군의 남쪽 12리에 있다.
초수정(椒水井) : 군 북쪽 42리에 있다.
토산
종이ㆍ잣[海松子]ㆍ인삼(人蔘)ㆍ송이[松蕈]ㆍ벌꿀ㆍ칠(漆)ㆍ은어[銀口魚]ㆍ지황(地黃)ㆍ복령(茯苓)ㆍ
왕골[莞草]ㆍ석심(石蕈).
성곽 귀산성(龜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2백 81척이요, 높이가 9척이며, 그 안에는 우물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성내산(城內山)봉수 : 군 북쪽 14리에 있다. 동으로는 안동부(安東府) 내성현(奈城縣) 당북산(堂北山)봉수
에 응하고, 서로는 풍기군(豐基郡) 망전산(望前山)봉수에 응한다.
누정 자민루(字民樓)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선덕(宣德) 정미년에 군수 권상(權詳)이 세웠다.
제민루(濟民樓) : 귀산(龜山) 남쪽에 있다. 선덕 계축년에 군수 반저(潘渚)가 세웠으니, 곧 의학루(醫學樓)이다.
교수관(敎授官) 문헌(文獻)이 기(記)를 지었다.
소루(小樓) : 객사 남쪽에 있다. 천순(天順) 년간에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세웠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記)에, "죽령(竹嶺) 남쪽에 자리잡은 고을 중에 영천이 제이(第二)가 된다.
그 산천은 밝고 빼어났으며, 그 고을 터는 상쾌하고, 그 백성의 풍속은 검소하고 순박하였다.
이 고을에 원으로[製錦] 오는 이가 가끔 군자(君子)가 많았으나 그 중 남의 이목에 표표히 뛰어난 이는 하호정
(河浩亭)ㆍ정습인(鄭習仁)ㆍ최원부(崔元傅) 세 사람뿐이었는데,
지금의 수령 오천(烏川) 정 선생(鄭先生)도 역시 그들과 같이 칠 수 있는 이었다.
그는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대부(臺府)를 사직하고 이 고을을 맡았다. 무릇 그의 시설한 것은 마치 현보(縣譜)를
가진 듯하거니와, 공경으로써 윗사람을 받들고 따사로움으로써 백성을 사랑하고, 정직함으로써 간사한 자를
다스리었다.
넉넉한 자질로 다스리기 쉬운 백성을 교화하니, 비유하건대, 소백정[庖丁]이 날선 칼날로 소뼈 사이를 쳐서 소
를 잘 잡듯 하였으니, 어찌 어긋날 걱정이 있겠는가. 1년이 되지 않아 경치가 잘 되고 백성이 화락하였다.
한가한 날 자민루(字民樓)에 올라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 고을은 사신ㆍ빈객이 죽령을 넘어 왕래하는 요충
이다. 사신이 있으면 반드시 빈좌(賓佐)가 있다.
매양 뜨거운 여름을 당하면 집이 찌는 듯 답답하여, 마음을 맑은 바람에 씻어 번민함을 버리려고 생각할 적에,
사신은 이 루[樓]가 있지만 빈좌들은 어디에 거처할 것인가.
이것이 어찌 하나의 결함이 아니겠는가.' 하고 드디어 사방을 둘러보다가 동남쪽 구석에서 쓸모없는 집 한 채를
얻었으므로 이에 이를 개척하여 새롭게 하되, 그 기둥을 약간 높이고 곁에는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아래에는 땅을
파서 못을 만들어 두어 말[斗]의 고기를 넣고, 못 안에 있는 섬에는 참대[苦竹] 여덟 아홉 그루를 심고 잡(雜)꽃
을 그 사이에 간간히 심었더니, 난초는 그 기슭을 덮고 부용은 그 물결을 가렸다.
벽을 바를 적에 내가 가서 올라보니, 소나무는 죽죽 벌였고 울타리는 한가했으며, 푸른 이랑 누런 두렁은 수를
놓은 듯 엇갈리어 준조(尊俎)에 빛났다.
뽕나무밭을 매는 자와 농사짓는 이들이 그늘에서 쉬지는 못하지만 소장(訴狀)을 가진 이는 장애될 근심 없어,
산업을 권면하고 농사를 처리하는 정치에 도움됨이 적지 않았다.
이에 잔을 들어 주인에게 축하하며 말하기를, '세상의 수령(守令) 가운데, 게으른 이는 남을 의지할 뿐 스스로
진작하지 못하니, 비록 관청이 퇴락해도 받치고 붙들어 그냥 세월만 보낼 뿐 손 하나 감히 놀리지 못하오.
그리고 강한 이는 그 지혜를 뽐내어 백성의 힘을 가벼이 동원하매 번거롭게 명령을 내리면서 영선(營繕)이 그
치지 않으니, 많은 백성들이 매맞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오.
선생(先生)이 한 것은 이들과 같지 않으니, 여력(餘力)에서 나온 것이며, 옛것을 새로이 한 것이며, 어두운 것을
밝게 한 것으로 터럭만치도 백성을 수고시키지 않았고 재물을 소비하지 않았소.
그래서 비록 군청에 있으면서도 이 역사가 있은 줄 몰랐고, 지나가는 길손이 비와 이슬을 피할 수 있으며,
쉴 자리를 염려하지 않게 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어진 사람의 행동이라 이르는 것이요.
아, 선생의 뒤를 이어 일을 하는 이가 선생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현명한 수령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했다.
○ 옛사람의 시(詩)에, "반마(班馬)로 오르니 억지로 스스로 넓히며, 잔춘(殘春)의 마음은 바로 근심의 실마릴
세. 울 밑에서 잔을 드니 붉은꽃 싫도록 보고, 처마 아래에 발을 거니 푸른 산 받아들이네. 기다란 휘파람은 능
히 원별(遠別)을 위로하고, 흩어진 놀이는 잠시 환관(環觀)을 다하네. 오천(烏川)의 풍경은 모두 시의 재료,
읊으면서 한가로움을 얻게 해주네." 하였다.
신증 쌍청당(雙淸堂) :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으니, 군수 김세훈(金世勳)이 지었으며, 좌우에 쌍으로 연못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군의 동쪽 1리에 있으니 하륜(河崙)이 지주(知州)로 있을 때 세웠다.
역원 창보역(昌保驛) : 군 서쪽 9리에 있다. 평은역(平恩驛) : 군 동쪽 26리에 있다.
효대원(孝大院) : 군 동쪽 7리에 있다. 문수원(文殊院) : 군 남쪽 11리에 있다.
금림원(金林院) : 군 동쪽 36리에 있다. 승리원(乘利院) : 군 서쪽 10리에 있다.
가이원(加耳院) : 군 북쪽 20리에 있다. 장금원(長金院) : 군 서쪽 23리에 있다.
덕산원(德山院) : 군 남쪽 3리에 있다. 철겸원(鐵鉗院) : 군 서쪽 3리에 있다.
불우 행의사(行衣寺) : 군 서쪽 20리에 있다. 흑석사(黑石寺) : 군 남쪽 15리에 있다.
응석사(凝石寺)ㆍ정불사(淨佛寺)ㆍ부석사(浮石寺) : 모두 봉황산(鳳凰山)에 있다.
○ 궁예(弓裔)가 일찍이 이 절에 이르러 벽화(壁畫)에 그려진 신라왕(新羅王)의 상(像)을 보고 칼을 뽑아 쳤는데,
고려(高麗) 때에 와서도 그 흔적이 그냥 있었다. 이것은 생시에 버림을 당했던 것을 원망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 《보한재집(補閑齋集)》에 "고려(高麗) 사천감(司天監) 이인보(李寅甫)는 경주도(慶州道) 제고사(祭告使)로
서 산천(山川)을 돌며 제사지냈는데, 일이 끝나 장차 돌아가려던 저녁에 부석사(浮石寺)에 닿았다.
객우(客宇)가 조용하고 좌우에 사람이 없었는데, 홀연히 한 여인이 언뜻 마루 사이로 보이더니 좀 뒤에 춤추듯
마당을 돌아와서 절을 했다. 절을 마친 뒤에 섬돌을 올라 방에 들어와 앉았다. 사천감은 비록 괴이하게 생각했지
만 자색(姿色)이 뛰어났으므로 차마 거절치 못했다.
여인이 말하기를, '제가 사는 곳은 여기서 멀지 않아요. 높으신 뜻을 혼자 사모해서 왔습니다.' 하고,
그 응대(應對)함이 총민하였다. 사흘 묵고 떠나서 우정(郵亭)에 숙박했는데, 여인이 하느적하느적 따라왔다.
사천감이 말하기를, '왜 또 왔소.' 하였더니, 여인이 말하기를, '뱃속에 당신의 애기가 있어요. 다시 하나를 더하
고자 해서 온 것이어요.' 하였다. 새벽이 되자 작별을 고하고 흥주(興州)로 들어갔다.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여인이 또 왔다. 사천감은 후환이 될까 해서, 여인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상대하지 않았더니 여인은 발끈 골을
내면서 방문을 나가는데, 회오리 바람이 땅을 말아올려 집의 문짝 하나를 부서뜨리고 나뭇가지를 꺾어놓고는
갔다." 하였다.
신증 당(唐) 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 의봉(義鳳) 1년에,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이 스님 의상(義相)에게
하명하여 이 절을 창건하고 부석(浮石)이라 이름지었다.
동쪽에는 선묘정(善妙井)이, 서쪽에는 식사룡정(食沙龍井)이 있는데, 가물 때 기도드리면 감응이 있었다.
○ 박효수(朴孝修)의 세에, "새 울고 꽃 져서 꽃다운 나이 이우는데, 나그네 길 시간은 빨리도 가네. 어느 날 마셔
보리, 용정(龍井) 물 차맛을, 마루에 가득한 솔과 달 인연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 북쪽 7리에 있다.
여단(厲壇)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선곡현(善谷縣) :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고구려의 가곡현(賈谷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치고 내령군(奈靈郡)에 귀속시켰다." 하였다.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무신탑(無信塔) : 군(郡)에 무신(無信)이란 탑이 있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습인(鄭習仁)이 지군(知郡)으로 있
으면서 말하기를, "이상하도다. 악목(惡木)에서는 쉬지 않고 도천(盜泉)은 마시지 않는다 하니, 이는 그 이름이
나쁘기 때문이다. 탑은 고을에서 쳐다볼 수 있게 우뚝 서 있는 것인데, 어찌 무신(無信)을 표방한단 말인가" 하
고서, 쪼아 없애게 하고는 그 벽돌로 빈관(賓館)을 지었다.
신돈(辛旽)이 이를 듣고 노해서 계림옥(鷄林獄)에 구속하고 다시 전법(典法)으로 얽어 사지(死地)에 처치하려
고 했다. 정신(廷臣)들이 가련히 여겨 이를 구원해 주었으나 서인(庶人)으로 폐했다.
시사기(市肆基) : 신라 임금이 이곳에 오랫동안 주필(駐蹕)하다가 돌아갔다. 시사(市肆)의 터는 지금 군 서쪽 2
리에 있다.
날이군(捺已郡) :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이 군에 행행(行幸)했다. 고을 사람 파로(波路)에게 벽화(碧花)란 16세
된 딸이 있었는데, 예쁘고도 고왔다. 그 아비가 이를 잘 꾸며서 가마에 태우고 빛깔 고운 비단으로 휘장을 두르
고서 임금께 바쳤다.
임금이 찬물(饌物)이라고 여기고 열어보니 미녀(美女)였다. 그 뒤로는 여러 번 그 집으로 미행(微行)했다. 중도에
고타군(古陁郡)이 있는데, 하루는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묻기를, "나랏사람들은 임금을 어떻다고 하오."
하니 노파가 말하기를, "모두들 성인(聖人)이라고들 하지만, 저만은 이 말을 의심스럽게 여깁니다.
듣건대, 임금께서 날이(捺已)의 계집에게 가노라고 누차 미복(微服)으로 다닌다고 합니다. 무릇 용(龍)이 고기의
옷을 입고 있으면 어부에게 제어당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임금께서는 만승(萬乘)의 존엄으로써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를 성인(聖人)이라 한다면 성인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러이 여기고, 남몰래 그 계집을 데려다 궁중에 숨겨 두었다.
벌지부곡(伐只部曲) : 군 동쪽 15리에 있다. 마구부곡(馬駒部曲) : 군 북쪽 60리에 있다.
용산부곡(龍山部曲) : 군 서쪽 20리에 있다. 임지도부곡(林只刀部曲) : 군 동쪽 15리에 있다.
성을량부곡(省乙良部曲) : 군 동쪽 15리에 있다. 오등부곡(烏等部曲) : 군 북쪽 30리에 있다.
유수부곡(楡水部曲) : 군 북쪽 30리에 있다. 답곡부곡(沓谷部曲) : 군 북쪽 30리에 있다.
이곡부곡(沓谷部曲)ㆍ내소리부곡(奈小里部曲) : 정종소(鄭從韶)가 수령으로 있을 때, 군지(郡誌)를 지으면서,
"이곡(泥谷)은 바로 지금의 며전리(㫆田里)이니 군 서쪽 25리에 있고, 내소리(奈小里)는 바로 지금의 사내리
(沙奈里)이니 군 동쪽 1리에 있다." 하였다.
그러나 두 부곡(部曲)은 예와 이제의 명칭이 같지 않으니 어디서 고증하여 이런 말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신증 장군곡(藏軍谷) : 군 동쪽 8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太祖)가 나라를 통합할 때 오천(吾川)
사람들이 불복하므로 이곳에 병사를 숨겨두었다가 이를 격파했다." 한다.
명환고려 정습인(鄭習仁) : 공민왕(恭愍王) 때, 전교령(典校令)으로 지주(知州)로 나갔다. 시무(視務)하려 할 제,
아전이 고사(故事)에 따라 소재도(消災圖)를 찾아가 향을 사를 것을 청하였다.
습인(習仁)이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불륜(不倫)한 일을 하지 않거늘 재앙이 어떻게 생긴단 말인가.
무망(無妄)하기보다는 순수(順受)할 뿐이다." 하고서 아전에게 명하여 철거시켰다.
본조 하륜(河崙) : 지주(知州)였다.
인물본조
김증(金曾) : 과거에 두 번 급제했다. 벼슬은 금산 군수(金山郡守)에 이르렀다.
김담(金淡) : 김증의 아우이다. 두 번 급제했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다.
효자고려 문재도(文載道) : 홍무(洪武) 임술년(壬戌年) 봄에 왜적(倭賊) 수천 명이 본군(本郡)에 침략해 와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 재도(載道)는 그 아버지를 업고 산골에 들어가 숨었는데, 왜적이 찾아와 그 아버지를 쏘
아 맞혔다. 재도가 살촉을 뽑고 칼을 휘둘러 왜적을 베었더니 왜적들이 굴복했으므로 부자가 목숨을 온전히
했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벼슬은 평해군사(平海郡事)에 이르렀다.
본조 김이음(金爾音) :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은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일찍이 어버이를 위해 3년간 여묘
(廬墓)했으므로, 태조(太祖) 때 정려하였다.
우제(禹濟) : 벼슬은 감정(監正)에 이르렀다. 효자(孝子)로써 정려하였다.
신증 안수철(安壽鐵) : 그 아버지가 광질(狂疾)에 걸렸으므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약에 섞어 먹였더니
병이 나았다.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하었다.
제영 휴가초초과귀성(携家草草過龜城)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가족을 데리고 허둥지둥 귀성을 넘는데,
나그넷길이라 아무도 성명을 모르노라. 신세가 기구하여 살쩍머리 셋거늘, 내일 아침에는 또한 영마루를 넘어
갈까나." 하였다.
일수영회포고성(一水縈廻抱古城) : 김효정(金孝貞)의 시에, "한 줄기 물은 휘돌아 옛 성을 안아 흐르나니,
산의 형세는 곧 바로 거북의 이름 얻었다." 하였다.
계분연미음변인(溪分燕尾吟邊咽) : 윤자영(尹子濚)의 시에, "시내는 제비꼬리처럼 갈려 읊음 속에 흐느끼고,
산은 까치 머리되어 그림 가운데 모여든다." 하였다.
[비고]
방면 산이(山伊) : 동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봉향(奉香) :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망궐(望闕) : 끝은 10리이다. 사흥(司興) : 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두전(豆田)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권선(權先) : 위와 같다.
호문(好文) :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신혈(辰穴) : 남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적포(赤布)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어화(於火) :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천상(川上) : 동남쪽으로 처음은 27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말산(末山)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임지(林只)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60리인데, 봉화(奉化) 남쪽 경계와 안동 재산면(才山面) 서쪽
경계를 넘어 있다.
북면(北面) :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인데, 소천촌(韶川村)은 순흥(順興) 이부석면(二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으며, 답곡촌(沓谷村)은 동부(同府) 일부석면(一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고, 교각촌(校各村)은 동부 동원면
(東元面)의 경계를 넘어 있다. 우측 두 촌의 북쪽은 영춘(永春)과 접해 있다.
오록(梧鹿) : 동북쪽으로 50리이며, 순흥(順興) 삼부석면(三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고, 북쪽은 영춘과 접해
있다.
○ 벌지부곡(伐只部曲)은 동쪽으로 15리이며, 용산부곡(龍山部曲)은 서쪽으로 20리이고, 마륜부곡(馬輪部曲)은
북쪽으로 60리이다. 임지력부곡(林只力部曲)은 즉 임지면이며, 성을량부곡(省乙良部曲)은 동쪽으로 15리이다.
오등부곡(烏等部曲)ㆍ유수부곡(楡水部曲)은 북쪽으로 30리이다.
답곡부곡(沓谷部曲)은 북쪽으로 30리인데, 즉 답곡이며 이곡부곡(泥谷部曲)은 지금의 미전리(彌田里)이고
서쪽으로 25리이다. 내소리부곡(奈小里部曲)은 지금의 사내리(沙奈里)이며, 동쪽으로 1리이다.
봉수 창팔래산(昌八來山) : 동쪽으로 30리이다.
방면 읍창(邑倉)ㆍ동창(東倉) : 동쪽으로 30리이다. 북창(北倉) : 오록면(梧鹿面)에 있다.
토산 닥나무[楮].
누정 영훈정(迎薰亭) : 남쪽으로 3리이다.
사원 이산서원(伊山書院) : 선조(宣祖) 계유년에 건립하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 문묘(文廟) 조에 있다
풍기군 豐基郡
동쪽으로 영천군(榮川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남쪽으로 예천군(醴泉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51리,
서쪽으로 충청도 단양군(丹陽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24리,
북쪽으로 충청도 영춘현(永春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69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1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의 기목진(基木鎭)이다. 고려(高麗) 초에는 기주(基州)라 부르다가 현종(顯宗)이 길주
(吉州)에 귀속시키고, 명종(明宗)이 감무(監務)를 두더니 뒤에 안동부(安東府)에 다시 귀속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이 다시 감무를 두어 안동부의 속현(屬縣) 은풍(殷豐)을 예속시켰다.
본조(本朝)에서는 기천 현감(基川縣監)으로 고쳤는데, 뒤에 문종(文宗)의 태(胎)를 은풍현(殷豐縣)에 안치하게
되자 마침내 두 현(縣)의 이름을 따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속현 은풍현(殷豐縣) : 본래 신라(新羅)의 적아현(赤牙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은정(殷正)이라 고치고,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은 안동부(安東府)
에 귀속시켰는데, 공양왕(恭讓王) 때 본군(本郡)에 이속(移屬)시켰다.
별명은 은산(殷山)이다. 군 서남쪽 37리에 있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기목(基木)ㆍ기주ㆍ기천(基川)ㆍ영정(永定)ㆍ안정(安定).
성씨본군 정(鄭)ㆍ안(安)ㆍ피(皮)ㆍ방(邦)ㆍ음(陰)ㆍ진(秦)ㆍ신(辛)ㆍ김(金) : 영월(寧越)ㆍ
삼척(三陟). 이(李) : 평창(平昌). 최(崔) : 흥해(興海) 배(裵) : 성주(星州)에서 왔다.
은풍(殷豐) 오(吳)ㆍ박(朴)ㆍ전(全) : 김(金)이라고도 한다. 신(申).
순흥(順興) 안(安)ㆍ신(申)ㆍ이(李)ㆍ윤(尹)ㆍ석(石) : 촌(村)이다. 김(金)ㆍ정(鄭) : 모두 내(來)이다.
풍속 풍속은 강하고 사나움을 숭상한다 : 관풍안(觀風案). 백성은 경상(耕桑)을 즐겨한다. : 이선(李宣)의 시.
형승 산천이 수려하다 : 김효정(金孝貞)의 시.
산천 죽령(竹嶺) : 군 서쪽 24리에 있는데,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에 처음으로 길을 열었다.
소백산(小白山) : 순흥현(順興縣)에 있다. 군에서의 거리는 32리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소백산이 태백산에 이어져, 서리서리 백리(百里)나 구름 속에 꽂혀 있네.
분명히 동남계(東南界)를 모두 구획하였으니, 하늘ㆍ땅이 이루어져 귀신은 인색을 깨쳤네." 하였다.
명봉산(鳴鳳山) : 은풍현(殷豐縣) 서쪽 16리에 있으며, 본조 문종(文宗)의 태(胎)를 안치했다.
여현(礪峴) : 군 남쪽 14리에 있다. 골리현(骨里峴) : 군 서쪽 12리에 있다.
경원봉(慶元峯) :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22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태(胎)를 안치했다.
윤암봉(輪庵峯) :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32리에 있으며, 본조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를 안치했다.
초암동(草庵洞) :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45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렬왕(忠烈王)의 태를 안치했다.
욱금동(郁錦洞) :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13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목왕(忠穆王)의 태를 안치했다.
양곡동(陽谷洞) : 순흥부(順興府)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다.
죽계(竹溪) : 순흥부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23리 떨어져 있다.
○ 이색(李穡)의 안 시어(安侍御)를 전송하여 지은 시(詩)의 서(序)에,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세세로
죽계(竹溪) 가에 살았다. 죽계(竹溪)의 근원은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온다.
산이 크고 물이 멀리 흐르듯, 안씨의 흥성함도 끝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남천(南川) : 군 남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은 죽령(竹嶺)에서 나온다.
북천(北川) : 군 북쪽 3리에 있다. 그 근원은 욱금동(郁錦洞)에서 나온다.
○ 이상 두 물(남천(南川) 북천(北川))은 군 동쪽 3리에 이르러 합류되어 영천군(榮川郡)의 임천(臨川)에 들어
간다.
순흥(順興)의 동천(東川) : 하나는 부(府)의 동쪽 1리에 있고, 하나는 부(府)의 동쪽 10리에 있으니,
그 근원은 모두 소백산(小白山)에서 나와 부(府)의 동쪽 13리에 이르러 남ㆍ북의 두 개울이 합친다.
은풍(殷豐)의 동천(東川) : 현(縣) 동쪽 20보(步)에 있으며, 그 근원은 골리현(骨里峴)에서 나온다.
서천(西川) : 현(縣) 서쪽 10리에 있으며, 그 근원은 명봉산(鳴鳳山)에서 나오는데, 현 남쪽 8리에 이르러 동천
(東川)과 합류되어 예천군(醴泉郡)의 양천(襄川)이 된다.
신증 도솔성산(兜率城山) : 죽령(竹嶺) 아래 있다.
부로성산(夫老城山) : 은풍현에 있는데 봉우리 위에 못이 있다.
토산
수정석(水精石) : 양곡동(陽谷洞)에서 난다ㆍ인삼ㆍ잣ㆍ지치[紫草]ㆍ왕골[莞草]ㆍ꿀ㆍ송이ㆍ석이[石蕈]ㆍ
닥[楮]ㆍ은어[銀口魚].
봉수 죽령(竹嶺)의 봉수 : 서쪽으로는 충청도 단양군(丹陽郡) 소이산(所伊山)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망전산(望前山)에 응한다.
망전산(望前山)의 봉수 : 군 남쪽 8리에 있으니, 동쪽으로는 영천군(榮川郡) 성내산(城內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죽령(竹嶺)에 응한다.
신증누정 제운루(齊雲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군 북쪽 7리에 있다.
역원 창락역(昌樂驛) : 옛날 순흥(順興)의 땅으로, 군 서쪽 13리에 있다. 승(丞)이 있다.
본도(本道)의 속역(屬驛)이 아홉이니 즉 평은(平恩)ㆍ창보(昌保)ㆍ옹천(甕泉)ㆍ유동(幽洞)ㆍ통명(通明)ㆍ
안교(安郊)ㆍ도심(道深)ㆍ죽동(竹洞)ㆍ선안(宣安)이다.
○ 승(丞) 1명이 있다. 죽동역(竹洞驛) : 군 동쪽 19리에 있다. 남원(南院) : 군 남쪽 2리에 있다.
산요원(山腰院) : 군 서쪽 20리에 있다. 창락역(昌樂驛)의 남원(南院) : 군 서쪽 11리에 있다.
순지원(蓴池院) : 군 동쪽 10리에 있다. 인빈원(寅賓院) : 군 남쪽 27리에 있다.
불우 용천사(龍泉寺) : 군 북쪽 7리에 있다.
○ 고려 태조(太祖)의 화상[眞]이 문경(聞慶) 가은현(加恩縣) 양산사(陽山寺)에 있었는데,
신우(辛禑 폐왕 우(廢王禑)) 5년에 왜구(倭寇)를 피해서 이곳으로 옮겼다.
성혈사(聖穴寺)ㆍ초암(草庵) : 모두 소백산이 있다. 쌍악사(雙岳寺) : 은풍현 경청산(警淸山)에 있다.
양지사(陽地寺) : 죽령(竹嶺) 아래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 서쪽 3리에 있다.
여단(厲壇)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순흥폐부(順興廢府) : 본래 고구려 급벌산군(及伐山郡)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는 흥주(興州)로 고치고, 성종(成宗) 때에는 순정이라 일컬었으며, 현종(顯宗)은 안동부(安東府)에
귀속시켰다가 뒤에 순안현(順安縣)으로 이속시키고, 명종(明宗)은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렬왕(忠烈王)의
태(胎)를 안치하여 흥녕 현령(興寧縣令)으로 고치고, 충숙왕(忠肅王)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시켰으며, 충목왕(忠穆王)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켰다.
본조에 와서, 태종(太宗)은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세조(世祖) 임금 때,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이 수인
(囚人)들에게 협박되어 난리를 꾀했다 해서, 본군(本郡)에 혁속(革屬)시키고 마아령(麻兒嶺)의 개울 동쪽의 땅
은 이를 잘라 영천(榮川)에 귀속시키고, 문수산(文殊山) 개울 동쪽의 땅은 이를 봉화(奉化)에 귀속시켰다.
읍성(邑城)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9척이며 높이가 6척이다. 군에서의 거리는 북쪽으로 22리이다.
인풍현(隣豐縣) : 김부식이 말하기를, "본래 고구려 이벌지현(伊伐支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바꾸고 급산군
(岌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등항성(登降城) : 군 서쪽 5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太祖)가 남정(南征)했을 때,
이 현(縣)에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백제(百濟)의 항서(降書)가 이르렀으므로 드디어 주필(駐蹕)했던 곳을
등항성(登降城)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상을곡성(上乙谷城) : 은풍현(殷豐縣) 남쪽 34리에 있다. 둘레 9백 80보(步), 높이 5척인데,
안에 10개의 샘과 1개의 개울이 있다.
소백산고성(小白山古城) : 산꼭대기에 옛 석성(石城)이 있다. 둘레 1천 4백 28척이다.
감곡부곡(甘谷部曲)ㆍ대룡산부곡(大龍山部曲)ㆍ임곡소(林谷所) : 모두 순흥부(順興府) 조에 있다.
숙수사(宿水寺) :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 노여(魯璵)의 시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그윽한 경치 찾았더니, 난초의 뜰은 10년 전의 모습이어라.
벽의 값어치는 몇 년간 시와 함께 비싸고, 절의 이름은 천고에 물과 더불어 흐르누나. 추위가 산 빛을 미니 스님
은 문을 닫고, 차가움이 개울 소리를 누르니 손님은 누대에 오르도다.
휘바람 불며 서성거리니 어느덧 날은 저물며, 난간에 기대어 고개 돌리면 고향 생각 나누나." 하였다.
경원사(慶元寺) :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봉서루(鳳棲樓) : 순흥부(順興府)에 있었는데 지금은 황폐되었다.
○ 안축(安軸)의 기(記)에, "나라의 동남쪽에는 본래 산은 하나인데 고개[嶺]는 세 개이니,
태백(太白)ㆍ소백(小白)ㆍ죽령(竹嶺)이 그것이다.
영남(嶺南)에 뿌리박은 첫째 고을은 바로 우리 흥주(興州)이다. 주(州)에서 동쪽으로 가면 황폐하고 편벽된 부락
이 나오고, 주에서 똑바로 북쪽으로 가면 태백(太白)이 나오며, 북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꺾여 가면 소백(小白)이
나오는데 큰 길은 하나도 없고, 주에서 서쪽으로 가면 죽령(竹嶺)이 나오는데 서울로 가는 길이고,
주에서 남쪽으로 가면 길이 갈려서 동남의 여러 읍으로 통하게 된다.
고을의 형세가 이러하기 때문에 나그네들이 출입하는 것은 동ㆍ북쪽으로는 없고 모두 서ㆍ남쪽뿐이다.
옛적에 이곳에 고을을 설치하였을 때 오직 서ㆍ남쪽에만 후정(候亭)을 세운 것은 고을의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
이다.
서정(西亭)은 다만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들이 왕왕 지나칠 뿐이지만, 남정(南亭)은 서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도 이리로 나가고, 남쪽에서 서울 가는 이도 이리로 들어온다. 남쪽의 여러 주(州)에서 임금의 명을 가지고 일
을 독려하는 사신은 이리로 들어오지 다른 데로 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공적인 손님이나 사적인 나그네들을 전송하는 일이 없는 날이 없다.
고을 사람들이 서정(西亭)을 가벼이 보고 남정(南亭)을 무겁게 보는 것도 또한 사리가 그러한 것이다.
정자는 주(州)의 남쪽 5ㆍ6리쯤 되는 곳에 있다. 북쪽으로는 영험한 산악을 바라보고, 남쪽으로는 무성한 수림
을 마주보며, 동쪽으로는 푸른 개울에 닿고, 서쪽으로는 너른 들을 누르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우리 주(州)에서는 누대(樓臺)의 이름이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 많다. 모두 산에 바짝 붙고 깊은 절벽에 있다.
그것이 이름난 것은 아마 산 높고 물 맑기 때문일 것이다. 저처럼 산에 바짝 붙고 깊은 절벽에 있어 비록 맑고
그윽한 멋이 있다고는 하지만, 바라보이는 산은 한두어 번 겹친 것에 지나지 않고, 바라보이는 물은 한두어 번
굽이진 것에 지나지 않아, 두루 바라보더라도 하나의 동굴, 하나의 구렁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은 한 줌의 산,
한 움큼의 물을 얻은 것일 뿐이다.
만약 남쪽으로 가서 이 누정에 오르면, 높은 것으로는 만층으로 깎아지른 정상을 쳐다볼 수 있고, 먼 것으로는
천겹으로 겹친 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다. 이상한 바위들이 우뚝우뚝 하고, 수많은 골짝들이 빙빙 돌고 있으며,
구름의 변화 안개의 엉김이 천태만상이라, 이를 피해서 숨을 수 없다. 게다가 개울 물은 백 갈래로 흐르면서
소용돌이 치고 폭포로 날다가, 산 아래에 모여들면 사납던 형세는 늦추어지고 시끄럽던 소리는 조용해진다.
누정 아래에 이르러서는 깊게 가라앉은 물이 느릿느릿 십여 리나 흐른다.
여울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을 만하고, 돌맹이의 잘다람이 사랑할 만하니 산수(山水)의 크기[大]가 이에서
완비되는 것이다.
해마다 2월이면 농사를 시작한다. 남쪽 밭에 가는 사람들은 누정 아래를 끼고 다니고, 서쪽 들로 나가는 사람은
누정 밖에 줄짓는다. 도랑을 파면 빗물이 소용 없고, 가래를 매면 구름을 기다릴 것 없다.
이 누정은 오직 산수의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농사 짓은 풍경을 보는 즐거움도 가졌다.
내가 고을 사람이 되기 때문에 결발(結髮)했을 때 놀던 곳이다. 관직에 있는 동안 언제나 남쪽을 바라보면서
그리워했었다. 작년 봄에 사한(史翰)을 파(罷)하고 한가한 시간을 얻어 어머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고향에서 놀면서 이 누정에 여러 차례 올랐으나 기울어 있는 채 오랫동안 수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 누정은 산수(山水)에서 그 위대함을 얻었거늘 사람들에게 버림당하여 거의
부수어 질 것 같소. 그런데 저 깊은 절벽에 왜소한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받아들이니, 이것이 괴이하지 않소.'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오, 마음이 큰 이는 그 위대함을 보고 그 왜소함을 알
지만, 마음이 작은 사람은 왜소한 것에 매여서 위대한 것을 잊소.
옛날에 공자(孔子)는 동산(東山)에 오르고는 노(魯) 나라가 왜소하다고 했고,
태산(泰山)에 오르고는 천하(天下)가 왜소하다고 했소. 세상 사람들은 천 길되는 산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조그만 석가산은 귀하다 하고, 만경창파는 사랑하지 아니하고 마당의 연못은 사랑하오. 이로써 보건대 사람이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오. 이 누정은 눈을 들어 멀리 보면 아름다운 산과 물이요,
머리을 숙여 내려다 보면 언덕의 풀과 흙이요, 다락이 버림받은 것은 다락의 죄가 아니요, 이를 보는 사람이 작
기 때문이니, 만약 마음이 큰 사람이 이 고을을 맡아 이 누정에 오른다면 또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지 않으
리란 것을 어찌 알겠소. 더구나 사물의 이치는 성패에 때가 있는 법이니, 이 누정은 마땅히 다시 새로워질 날이
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부서질 것을 근심하겠소.' 하였다.
얼마 뒤에 직랑(直郞) 채상(蔡祥) 공이 우리 주(州)로 하명되었단 것을 들고, 나는 이 누정에 대해 커다란 바람
을 가졌다. 내가 서울로 돌아갔을 때, 채(蔡)공은 고을에 도착했다. 그는 이 누정에 올라보고 과연 산수를 보고
즐거워했으나 누정의 퇴락함을 보고는 탄식했다. 그리하여 장인에게 명하여 다시 지어 새롭게 하였으니,
규모가 크고 채색이 고왔다. 대개 영남(嶺南)에 있는 누대(樓臺) 가운데 이와 훌륭함을 견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백성 한 집을 보내어 지키게 함으로써 장구한 계책을 도모했으니, 저 조잡하고 소홀하게 금방 만들었
다가 금방 부서지는 것과 같은 자리에 놓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누정이 완공 된 뒤, 공은 손님이 오면 곧 이 누정에 올라 마중했다. 남쪽 손님으로 탁한 안개에 곤란받던 사람은,
이 누정에 올라 산을 바라보면 높이 들리고 구름이 나는 상상을 맛볼 것이고, 물가에 나가면 무우에서 바람쐬고
기수에서 목욕하는 즐거움이 생길 것이다.
공은 혹 농사철을 당하면 관청의 사무를 일찍이 파하고 이 누정에 올라 매일 농사를 살피며, 일의 빠르고 늦음,
부지럼함과 게으름을 책하고 캐물어 상벌(賞罰)을 내렸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스스로 권면하여 서로 앞다투어
늦은 자는 빨리하고 게으른 자는 부지런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관아에는 예절을 책하는 손님이 없게 되고, 들에는 생업을 잃은 농민이 없게 되었으니, 아전은 이로
써 편안하게 되고 연사(年事)는 이로써 풍성하게 되었다.
모두가 공(公)의 선사요 누정의 공덕이다. 나는 이 누정이 다시 새롭게 되었다 함을 듣고, 산수(山水)가 알아주
는 사람을 얻은 것을 치하하며, 내 바람이 어긋나지 않았음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이 기(記)를 부친다." 하였다.
명환고려 최재(崔宰) : 충목왕(忠穆王) 초에 지흥주(知興州)로 나갔다. 백성에게 편리를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
든지 시행하였다. 전적(田籍)이 오래되어 어지러워졌으므로 재(宰)는 이를 개수하면서, 구본(舊本)도 여전히
놓아두고서 대질하였다. 소문을 들은 사람은 탄복했으나 국권(國權)을 담당한 자는 이를 꺼려서 교체시켜버렸
다.
최운해(崔雲海) : 신우(辛禑) 때 순흥 부사(順興府使)에 제수되었다. 당시 왜적이 객관(客館)을 차지하고 있었
으므로, 운해(雲海)는 이와 더불어 싸웠는데, 노획한 마소와 재물들을 곧 사졸(士卒)과 주민(州民)에게 나누어
주었다. 싸움에서 크게 이겨 경내(境內)가 편안하게 되었다.
인물
고려 안유(安裕) : 흥주(興州) 사람이다. 뒤의 이름(즉 안향(安珦))은 우리(조선(朝鮮)) 문종(文宗)의 휘(諱)에
저촉되므로 처음 이름을 쓴 것이다. 원종(元宗) 초에 과거에 급제했다. 일찍이 충선왕(忠宣王)을 좇아 원(元)
나라에 갔는데, 원(元) 나라의 승상(丞相)이 전지(傳旨)하기를, "너희 임금은 어찌하여 우리 공주(公主)와 가까
이하지 않는가."하였다. 유(袼)가 말하기를, "안방의 일이야 외신(外臣)이 알 수 없는 것이오.
오늘 이것을 가지고 질문하니, 들을 가치가 없지 않겠소." 하였다. 승상이 이로써 아뢰니,
황제(皇帝 원제(元帝))가 이르기를, "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먼 나라 사람으로
볼 것인가."하고서 다시 묻지 아니하였다. 벼슬은 중찬(中贊)에까지 이르렀다. 학교(學校)가 날로 쇠퇴하는 것
을 근심하여 첨학전(瞻學錢)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고, 또 그의 노비[藏獲]를 들였다. 문장(文章)이 맑고 힘차
서 볼 만했으며, 또 감식(鑒識)하는 안목이 있었다.
만년에는 항상 회암(晦菴 주희(朱喜)) 선생의 화상을 걸어 두고 경모(景慕)하다가 드디어 회헌(晦軒)이라는 호
(號)를 썼다. 충숙왕(忠肅王) 6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안우기(安于器) : 유(裕)의 아들이며 벼슬은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에 이르렀다.
안목(安牧) : 우기(于器)의 아들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까지 이르렀다.
안원숭(安元崇) : 목(牧)의 아들이며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안축(安軸) : 충숙왕(忠肅王) 11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로(遼陽路) 개주(蓋州) 판관(判官)에
제수되었다. 당시 충숙왕(忠肅王)은 원(元) 나라에 잡혀 있었다.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
는 욕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요."라 하고는 상서(上書)하여 송사하였다.
임금[王]은 이를 가상히 여겨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한때 표전(表箋)ㆍ사명(詞命)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상주(尙州)에 목사(牧使)로 나가 있을 때 어머니는
흥녕(興寧)에 있었는데 왕래하면서 효도를 다했다.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흥녕군(興寧君)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 《관동와주집(關東瓦注集)》이 있다.
안보(安輔) : 축(軸)의 아우이다. 충목왕(忠穆王) 원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행 중서성(遼陽行中書省) 조마(照磨)에 제수되었다. 보(輔)는 말하기를, "수명(授命)하고도 공직(供職)하지
않는 것은 불공(不恭)스럽다. 더구나 조마(照磨)란 단지 문서(文書)를 수장(收掌)하는 것이며 다른 일이 없으니,
내 마땅히 성(省)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관(上官)ㆍ성관(省官)은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겨 예우하였다. 보가 말하기를, "내가 이제 책무는 다하였다.
어머니가 늙으셨으니 돌아가 봉양하지 않는다면 효가 아니다." 하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나라로 돌아왔다. 어머
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귀향하여 봉양하기를 청하여 뒤에 동경(東京) 유수(留守)가 되었다.
생산(生産 치부(治富))에 마음 쓰지 아니하여, 죽고 나자 집에는 곡식 한 섬의 저축도 없었다. 시호는 문경(文敬)
이다.
안종원(安宗源) : 축(軸)의 아들이다. 나이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목왕(忠穆王) 때 사한(史翰)으로 선보
(選補)되었다, 질(秩)이 차서 옮기게 되었는데 동료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은데 위계가 아래였으므로
종원(宗源)이 양보했다. 축(軸)은 이를 듣고 기뻐하면서, "도덕이 앞선 이에게 양보한 것이다.
이쪽에서 남에게 양보했으니 누가 이쪽을 버릴 것인가. 우리 집안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으니 번창할 것이다."
하였다.
신돈(辛旽)이 천권(擅權)할 때, 사대부(士大夫)들이 다투어 붙었다. 집정(執政)에게 붙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자네를 영상(領相)에게 천거하면 간관(諫官)을 얻을 수 있을 것일세." 하니, 종원(宗源)은 사양하면서,
"내 본래 게을러서 남에게 붙는 일은 내 재주가 아닐세."라고 말했다. 집정(執政)은 이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벼슬은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본조 안천보(安天保) : 태종(太宗) 때의 사람이다. 벼슬은 영돈녕부사(領頓寧府事)에 이르렀다.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구(外舅)이다. 안원(安瑗) : 원숭(元崇)의 아들이다.
벼슬은 유후(留後)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안경공(安景恭) : 종원(宗源)의 아들이다. 태조(太祖)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으며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에 봉하였고,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안순(安純) : 경공(景恭)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겸
판호조(判中樞兼判戶曹)에 이르렀다. 치사(致仕)하고 물러나서 금천별서(衿川別墅)에 살았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그에게 가서 물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안숭선(安崇善) : 순(純)의 아들이다. 경자과(庚子科)에 장원(壯元)했다. 벼슬은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신증 안침(安琛)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아들 처선(處善)ㆍ처성(處誠)은 모두 과거
에 급제했으나 일찍 죽었다.
효자본조 권득평(權得平) : 임오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 아버지가 실명(失明)하였으므로 출입할 때 언제
나 부축했으며, 음식은 반드시 몸소 받들었다. 양친이 4일 간격을 두고 모두 죽었는데 3년 동안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몸소 조석(朝夕)의 전(奠)을 올렸다. 대상(大祥)을 지낸 뒤 다시 어머니를 위해서 재최(齊衰) 3년을
입었으며, 가묘(家廟)를 짓고 조석(朝夕)의 전(奠)을 폐하지 않았다. 출입할 때는 항상 인사를 드렸다.
홍치(弘治) 기미년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제영 한한오묘상(閑閑五畝桑) : 정재(鄭載)의 시에, "넘실넘실하는 남쪽 개울의 물, 널찍널찍한 다섯 이랑의
뽕이로다." 하였다.
황량고루의연재(荒涼古壘依然在) : 강희맹의 시에, "사람은 누정에 기대었고 대자리는 비었으니,
달 밝은 밤의 피리 바람을 막지 못하누나. 황량한 옛 보루는 의연히 있는데, 기억하는가. 닭 잡고 오리 잡던
공적을." 하였다.
방산민십실(傍山民十室) : 조원(曹瑗)의 시에, "산 옆에는 민가 열 채, 다만 아는 것은 농사 일 뿐."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신라의 대매(代買)이다.
방면 동부(東部) : 읍으로부터 끝은 15리이다. 서부(西部) : 읍으로부터 끝은 20리이다.
동촌(東村) : 읍으로부터 끝이 20리이다. 생고개(生古介) : 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와룡동(臥龍洞) : 서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보좌리(普佐里)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상리(上里)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60리이다.
하리(下里) : 서남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성지 도솔산고성(兜率山古城) : 죽령(竹嶺) 아래에 있다. 부로산고성(夫老山古城) : 유지(遺址)가 있다.
등항성(登降城) : 서남쪽으로 5리이다.
어름성(於凜城) : 빙성(氷城)이라고도 하며 은풍(殷豐) 고현(古縣)에 있는데, 남쪽으로 30리이다.
둘레는 9백 80보이고, 10개의 샘과 한 개의 시내가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은풍창(殷豐倉) : 고현(古縣)에 있다.
의성현 義城縣
동쪽으로 청송부(靑松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45리,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44리, 남쪽으로 의흥현
(義興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40리, 서쪽으로 군위현(軍威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9리, 비안현(比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7리,
북쪽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7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5백 9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소문국(召文國)이었다. 신라(新羅)가 이를 취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이 문소군(聞韶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켰고, 현종(顯宗)은 안동부(安東府)에 귀속시켰고,
인종(仁宗)은 현령(縣令)을 두었고, 신종(神宗)은 일찍이 적에게 함락되었다해서 감무(監務)로 강등시켰고,
충렬왕(忠烈王)은 대구(大丘)에 병합시켰다가 다시 현령(縣令)으로 삼았다. 본조(本朝)에서는 이를 따랐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 각각 1명이다.
(군명) 소문(召文)ㆍ문소(聞韶)
성씨본현 : 김(金)ㆍ심(沈)ㆍ흥(洪)ㆍ정(丁)ㆍ강(康)ㆍ설(薛)ㆍ노(盧) : 지금은 노(魯)로 쓴다.
김(金) : 모두 촌(村)이다. 왕(王)ㆍ유(柳) : 모두 개경(開京)에서 왔다.
오(吳) : 장기(長鬐)에서 왔다. 강(姜) : 진주(晉州)에서 왔다. 박(朴) : 속(續)이다.
풍속 검소ㆍ솔직함을 숭상하고, 잠상(蠶桑)에 힘쓴다 : 관풍안(觀風案).
주민이 순박하다 : 조서강(趙瑞康)의 시다. 신증 운반에는 곡거(曲車)를 쓴다.
형승 산천(山川)은 백 리(百里)이고 연화(煙火)는 천가(千家)이다 : 이발(李潑 호는 동암(東巖))의 시에, "깨끗한
산천은 백 리요, 태Ꮘ한 연화(煙火)는 천 가라."하였다.
산천 금성산(金城山) : 현 남쪽 25리에 있다. 선암산(船巖山) : 현 남쪽 50리인 의흥현(義興縣) 경계에 있다.
금학산(金鶴山) : 현 남쪽 25리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 현 서남쪽 30리에 있다.
모현(茅峴) : 현 동쪽 45리에 있다.
마산(馬山) : 현 북쪽 20리에 있다. 황산(黃山) : 현 동쪽 50리에 있다. 산중에는 뽕나무가 많이 있어, 인근 여러
고을 사람들이 모두 이에 의지해서 누에를 기른다.
빙산(氷山) : 현 동남쪽 40리에 있다. 빙혈(氷穴) : 빙산의 큰 바위 밑에 돌구멍[石穴]이 있는데, 구멍의 입구는
높이가 3척, 높이가 4척 8촌, 옆으로의 길이가 5척 1촌이다. 이것을 풍혈(風穴)이라 한다. 또 하나의 구멍이 바
위 밑에 직하(直下)로 나 있는데 넓이가 1척, 길이는 1척까지는 잴 수 있는데 아래로는 굽어 있어 잴 수 없다.
입하(立夏) 뒤로 얼음이 엉기기 시작하여, 아주 더우면 얼음이 딱딱하게 되고, 장마가 들면 얼음이 풀린다.
봄ㆍ가을로는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빙혈(氷穴)이라 한다.
혈동(穴洞) : 사곡리(舍谷里)에 있는데, 현에서 동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다. 바위구멍[岩穴]이 아주 깊어서,
음수(陰獸)가 숨어 있는가 의심스럽다. 날이 가물 때 기우제(祈雨祭)를 드리면 곧 응험이 있다.
천암(穿巖)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구부리면 깊은 못에 다다르며 구멍이 바위 가운데 있다. 기괴하고 이상
하며 가뭄든 해에 기우제를 지내면 바로 응한다. 장천(長川) : 현 서쪽 3리에 있다.
근원은 모현(茅峴)에서 나온다.
하천(下川) : 현 남쪽 20리에 있다. 그 근원은 빙산(氷山)에서 나오며, 현 서쪽 20리에서 남천(南川)과 합류되어
병천(幷川)이 되는데, 바로 비안현(比安縣) 쌍계(雙溪)의 상류이다.
황산천(黃山川) : 현 동쪽 34리에 있다. 그 근원은 황산(黃山)에서 나온다. 바로 안동부(安東府) 독천(禿川)의
상류이다.
탄지(炭池) : 현 남쪽 30리에 있다.
신증 둔덕산(屯德山) : 현 동쪽 3리에 있다. 두음산(豆音山) : 현 서쪽 35리에 있다.
백장령(百丈嶺) : 현 서남쪽 28리에 있다.
토산 사(絲)ㆍ솜[緜] : 잠실(蠶室)은 현 북쪽 사진리(沙眞里)에 있다. 꿀ㆍ지치ㆍ인삼ㆍ칠(漆)ㆍ송이
봉수 마산(馬山)봉수 : 북쪽으로 안동부(安東府)의 감곡산(甘谷山)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고성산(古城山)봉수에 응한다.
고성산(古城山)봉수 : 현 남쪽 5리에 있다. 남쪽으로 영니산(盈尼山)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마산(馬山)에 응
한다.
영니산(盈尼山)봉수 : 현 남쪽 25리에 있다. 남쪽으로 의흥현(義興縣)의 승목산(繩木山)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고성산(古城山)봉수에 응한다.
누정 문소루(聞韶樓) : 객사(客舍) 북쪽에 있다.
○ 화지원(華之元)의 기(記)에, "현령 이광제(李光濟) 군(君)이 화산(花山)을 지나는 길에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
를, '자네는 우리 현(縣)의 공관(公館)을 아는가. 지세가 낮고 건물이 비좁아서 손님이라도 올 경우 여름이면 답
답해서 숨쉬기도 어렵다네. 화풀이를 현령(縣令)에게 하고 관리(官吏)들을 못살게 굴어서 참으로 부끄럽게 여기
고 있었네.
좀 넓게 새로 짓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전쟁이 10년이나 계속되어 백성들이 편히 살 수도 없었지.
다행히도 주상 전하께서 천명(天命)ㆍ인심(人心)에 순응하시어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반정(反正)하였으니,
도탄에 빠지는 것을 면하고 겨우 숨을 돌리게 된 것이 몇 년 못 되었소. 이 마당에서 역사를 한다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할 것이요, 또 개작(改作)한다는 비난을 살 것도 같아서, 다만 관청의 북쪽에 옛터가 있길래 이를
누정으로 세우고자 하니, 고을 사람들이 다투어 나와서 일해 줬다네. 산에서 재목을 얻고 흙을 파서 기와로 만
들어 집을 짓되, 농한기를 틈타서 며칠 만에 준공을 보았다네. 역사를 한 사람은 백성이 아니면 중들이었는데,
모두들 품삯을 주어서 노고를 보상했네.
이후로는 사신으로 이 누정에 오른 자는 즐거워하기만 하고 화내는 일이 없어서, 화풀이가 백성을 박탈하는
재앙이 없게 되겠지. 아직 다 되지 않은 것은 단청(丹靑) 뿐일세. 이제 임기가 다 차서 언제 떠날지 모르겠네.
나를 위해서 그 본말(本末)을 적어주게. 그리고 성명(姓名)을 써두어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 보여주도록 하세.'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현(縣)에 북루(北樓)가 있다는 것은 나 또한 알던 바이다.
옛날 학사 김지대(金之岱)가 일찍이 이 도(道)의 안렴(按廉)으로 있을 때, 이 누대에 대해 읊기를, '문소(聞韶)의
공관은 후원이 깊어, 가운데에 백여 척 되는 높은 누정이 있네.' 했었다. 어느 해에 이것이 쓰러지게 되었는가.
부로(父老)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마 현명한 이가 이를 일으켰고 우둔한 이가 이를 쓰러지게 했을
것이니, 다시 이를 일으키는 것은 또한 현명한 일이겠고,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은 더욱 우둔한 것이다.
이(李)군은 청렴하게 정치를 하고, 백성을 사역시키되 괴롭히지 않았고, 재물을 없애고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
고도 오랫동안 쓰러져 있던 것을 다시 일으켰으니, 현명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기록할 만한 것이다.
건축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나 조망의 넓고 좁은 데에 대해서는 내 아직 본 적이 없으니, 잠시 대가의 손을 기다리
기로 하자." 하였다.
○ 김지대(金之岱)의 시에, "문소의 공관은 후원이 깊어, 가운데에는 백여 척 되는 높다란 누정이 있네.
향기로운 바람 십리(十里)에 구슬 발이 걷히고, 밝은 달 일성(一聲)으로 옥피리 날리네.
연기는 가벼워 버들 그림자가 서로 가늘게 이어졌고, 비는 개어서 산빛이 짙은데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
용황(龍荒 흉노(匈奴))이 팔을 꺾은 갑지랑(甲枝郞), 그냥 난간에 기대고 있는 것 더욱 애석하네." 하였다.
지대(之岱)의 이 시는 사람 입에 오르내리다가 시판(詩板)을 잃었다. 그 뒤 10년에 어떤 군수가 이 시를 몹시 찾
으니 고을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시 현수(縣守) 오적장(吳廸莊)에게 딸이 있었는데,
일찍이 장일(張鎰)의 아들 정하(廷賀)와 약혼했었다. 오(吳)가 딸을 데리고 임지에 간 동안 정하는 다른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오녀(吳女)가 듣고 미쳐서 함부로 지껄이다가 갑자기 이 시를 암송해내었다.
고을 사람들이 이를 베껴서 바치니 군수가 놀랐다고 한다.
○ 고려 이문화(李文和)의 시에, "문소(聞韶)의 산수(山水)는 깨끗하여, 밤은 고요하고 발은 성기고 달은 기울었
네. 버들 빛 푸릇푸릇한 객사(客舍), 향기로운 내[煙] 모락모락하는 절간[僧家], 백성 걱정에 금방 변한 흰머리
[鶴髮], 비[雨]를 얻어 기슭에 돌아온 검은 모자[烏紗], 여섯 달 동안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다만 앞뒤의
황화(皇華 사신(使臣)에게 부끄럽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문소(聞韶)의 누정 아름다운 곳, 비를 피해 오르니 해가 기운다. 풀빛의 푸름은 역로
(驛路)에 닿았고, 복숭아 꽃의 따뜻함은 인가(人家)를 덮는다. 봄의 시름은 꼭 술같이 진하고, 세상의 맛은 점점
깁처럼 얇다. 애끊는 강남의 길손, 변방의 당나귀는 또 서울로 간다." 하였다.
○ 김자수(金子粹)의 시에, "오천(烏川) 선생의 훌륭한 작품은 점과 획이 바르고 비스듬. 도덕(道德)은 성역(聖
域)에서 자유로이 놀고, 문장(文章)은 시가(詩家)에서 홀로 뛰어났네. 벽 사이에서 농묵(濃墨)을 즐겁게 보고,
마루 위에서 농사(籠紗)를 한탄치 않누나. 우뚝하게 높은 산을 우러러 보니, 얼굴 시드는 것 바로 나이가 두렵다."
하였다.
신증 죽루(竹樓) : 객관의 남쪽에 있다. 현령 이종준(李宗準)이 세웠다.
학교 향교(鄕校)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철파역(鐵破驛) : 현 북쪽 5리에 있다. 청로역(靑路驛) : 현 남쪽 32리에 있다.
남원(南院) : 현 남쪽 2리에 있다.
허어리원(許於里院) : 현 동쪽 35리에 있다. 윤곡원(尹谷院) : 현 동쪽 24리에 있다.
염곡리원(廉谷里院) : 현 남쪽 12리에 있다. 황산원(黃山院) : 현 동쪽 30리에 있다.
승봉원(僧逢院) : 현 남쪽 20리에 있다. 건현원(件峴院) : 현 남쪽 35리에 있다.
빙산원(氷山院) : 현 남쪽 30리에 있다.
도리원(都里院) : 현 서쪽 32리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골짜기가 멀어서 맑은 물 흐르고, 모래가 평평해서 짧은 뗏목 없구나.
나루를 물었으나 길을 잃어버렸고, 연기 나는 곳은 두어 집뿐이다." 하였다. 북원(北院) : 현 북쪽 2리에 있다.
이곡원(梨谷院) : 현 북쪽 18리에 있다.
불우 빙산사(氷山寺) : 빙산에 있다. 수량암(修量菴) : 금학산(金鶴山)에 있다.
백장사(白丈寺) :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신증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비둘기와 제비가 서로 재잘거리니,
바야흐로 천하는 삼월 삼짇. 봄물은 기름 돌아 푸르고도 맑은데, 바위에는 꽃이 얼키설키 붉기도 하네.
시를 읊고 노니나니 술보다 흥겹고, 풀밭을 거니나니 쪽빛보다 푸르구나. 90일의 봄빛을 한번 훑으니,
조개(皁蓋 일산(日傘))가 성 남쪽에 가득해도 상관이 없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 북쪽 3리에 있다. 신증 속담에 전하기를, "김홍술(金洪術)의 모습이 고려 태조(太祖 왕건
(王建))와 비슷했는데, 백제의 견훤(甄萱)과 싸우다 패배하여 죽었다. 이에 여기에서 제사지낸다." 한다.
○ 유호인(兪好仁)의 영신가(迎神歌)에, "공은 어찌하여 이 구석에 있는고. 덩굴 풀에 의지하였는데,
산은 검푸르도다. 하늘을 위해 일했거늘 문란하도다. 진인(眞人)이 우뚝 일어섰으니, 푸른 나무 옆이로다.
물고기에 날개가 붙었으니, 다투어 뛰고 달리는도다.
황옥(黃屋 황제의 수레)의 좌도(左纛 황제 수레의 깃발)여, 범ㆍ이리를 당해내고, 유가(劉家 한(漢) 나라의 황가
(皇家))의 기신(紀信)주D-001이여, 멀리 서로 바라보는도다.
사당에서 백세(百世)를 잡수시니 신(神)은 양양하고, 우리 백성이 보답하니 잊지 못하는도다." 하였다.
○ 유호인의 송신가(送神歌)에, "신령이 양양함이여 산(山)의 머리로다. 구름은 뭉게뭉게 무턱대고 헤매는도다.
북은 두둥둥 둥둥 주저주저 춤추는도다. 여지(荔枝)가 누래지지 아니하니 계수나무는 부끄러워지는도다.
내가 드린 메를 받으시니 물리치지 않으시도다. 팔사(八蜡)주D-02는 해마다 가을이면 온 지경 안에서 구슬처럼
모여들어 삼밭처럼 빽빽하도다. 여귀(厲鬼 역귀(疫鬼))를 쫓으니 큰 복을 내리시는도다.
우리 백성이 보답하니 해마다 증수(增修)하는도다." 하였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고구현(古高丘縣) : 현 북쪽 20리에 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구화현(仇火縣)을 고구현(高丘縣)으로
고쳤다. 혹은 고근(高近)이라고도 한다. 뒤에 의성부(義城府)에 예속시켰다.
태일전(太一殿) : 빙혈(氷穴) 옆에 있다.
매년 상원(上元 정월 보름)에 임금이 향(香)을 내려서 제사지낸다.
성화(成化) 14년 무술(戊戌)에 충청도(忠淸道) 태안군(泰安郡)으로 옮겼다.
○ 신인손(辛引孫)의 시에, "태청(太淸 하늘)의 새 전각은 빙산(氷山)에 창건되었고, 하한(河漢 은하(銀河)) 돌아
감은 정환(定環)에 벌여 있다. 오색(五色)이 보광(寶光)은 하토(下土)에 이었고, 삼태(三台)의 화개(華蓋)는 중
간에 끼어 있다. 마음을 재계하기 10일 황궁의 섬돌로 달리고, 수명을 축수하기 천년 황제의 모습에 절한다.
원하옵기는, 비ㆍ바람 순조롭도록, 화기애애함이 인환(人寰)에 가득토록." 하였다.
소문국(召文國) : 옛터는 현 남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소문리(召文里)라 부른다.
어정(御井) : 소문리(召文里)에 있다. 아마 소문국(召文國) 시절의 어정(御井)인 모양이다.
피촌향(皮村鄕) : 현 남쪽 25리에 있다. 신촌부곡(新村部曲) : 현 동북쪽 30리에 있다.
굴어곡부곡(屈於谷部曲) : 현 남쪽 5리에 있다. 우곡부곡(牛谷部曲) : 현 동쪽 20리에 있다.
골라소(骨羅所) : 현 동남쪽 50리에 있다.
읍성(邑城) :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4천 7백 20척이었는데, 지금은 황폐해졌다.
황산성(黃山城) : 현 동쪽 40리에 있다. 서쪽만 돌로 쌓은 것이, 둘레 45척이었는데 지금을 황폐해졌다, 동ㆍ남ㆍ
북은 모두 절벽이다.
금성산고성(金城山古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 9천 백 척, 높이 13척으로 아주 높고 험하다. 안에는 네 곳의
샘물이 있다.
명환본조 김속(金續) : 성품이 청렴ㆍ정직하다. 상공(常貢)의 물품은 모두 보(寶 재단(財團))를 세워 백성들에
게서 걷지 아니하였다.
정종소(鄭從韶) : 정치에 성적이 있다.
인물
고려 김홍술(金洪術) : 태조(太祖 왕건(王建)) 때의 아전[吏]으로서 성주(城主)가 되었다. 태조 12년 가을에 견훤
(甄萱)이 갑졸(甲卒) 5천 명으로 쳐들어와 홍술(洪術)이 전사하니, 태조(太祖)가 울면서, "나는 좌우의 팔을 잃었
구나."라고 하였다.
홍유(洪儒) : 궁예(弓裔)의 말년에 배현경(裵玄慶)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과 함께 기장(騎將)으로 있
으면서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청주(靑州)가 배반하자.
유(儒)가 유검필(庚黔弼)과 더불어 진주(鎭州)를 진압했으므로 청주가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19년에 백제(百濟 후백제) 토벌에 따라가서 이를 멸망시켰다.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김훤(金暄) : 원종(元宗) 초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환(淸宦)ㆍ요직(要職)을 많이
지냈다. 충선왕(忠善王)이 세자(世子)로서 원(元) 나라에 가 있을 때 휜(咺)은 시독(侍讀)으로 따라갔다.
벼슬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성정(性情)이 깨끗하여 남과 잘 어울리지 않았으며,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
하여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호(號)는 철촌(鐵村)이다.
김개물(金開物) : 훤(暄)의 아들이다. 처음 이름은 서정(瑞庭)이다. 성품이 굳세고 정직하였다. 시(詩)ㆍ서(書)ㆍ
화(畫)에 모두 가법(家法)이 있었다. 남과 사귐에 있어 신용을 지켰다. 벼슬은 대간(臺諫)에 이르렀고, 옛날의
쟁신(爭臣)의 기풍이 있었다.
본조 김순(金淳)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희헌(僖憲)이다.
김말(金末)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가르치기를 열심히 했다.
신증효자본조 제연동(諸延同) : 어머니가 나쁜 질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약에 섞어 먹였더니 병이 금
방 나았다. 금상(今上 중종(中宗)) 11년 정려(旌閭)되었다
도금동(都今同) : 아버지가 죽자 여묘(廬墓)살이하였고, 상(喪)이 끝나서도 상복(喪服)을 벗지 않았으며,
조석(朝夕)의 제사를 한결같이 하였다. 금상(今上) 16년에 정려(旌閭)되었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방면 남부(南部) : 읍으로부터 끝이 15리이다. 북부(北部) : 끝이 10리이다.
점점곡(點谷) : 동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0리이다. 빙산(氷山) : 동남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소야(巢野) : 동남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80리이다. 산운(山雲) :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가음(佳音) : 동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상천(上川)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하천(下川)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석전(石田) : 위와 같다. 금뢰(金磊) : 위와 같다.
소문(召文)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억곡(億谷) :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안평(安平) : 서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옥산(玉山) :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귀산(龜山)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단촌(丹村)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이다.
외야(外也) : 위와 같다. 내사곡(內舍谷) : 동쪽으로 처음은 1리, 끝은 40리이다.
외사곡(外舍谷)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50리이다.
우곡(羽谷) : 서북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80리이며, 안동 남쪽 경계와 비안(比安) 북쪽 경계를 넘어 있다.
이혜(泥兮) :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이며, 일계(日谿)의 옛 현이다.
구화(仇火) : 북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40이며, 고구(高邱)의 옛 현이다.
○ 반촌향(反村鄕)은 남쪽으로 25리, 신촌부곡(新村部曲)은 동북쪽으로 30리, 굴어곡부곡(屈於谷部曲)은 남쪽
으로 5리, 우곡부곡(牛谷部曲)은 동쪽으로 30리, 골라소(骨羅所)는 동남쪽으로 50리이다.
토산 뽕[桑]ㆍ칠(漆)ㆍ닥나무[楮]
누정 기양정(岐陽亭)ㆍ능파정(凌波亭) : 모두 서쪽으로 1리에 있다.
사원 빙계서원(氷溪書院) : 명종(明宗) 병신년에 건립하고 선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김안국(金安國) : 태묘(太廟) 조에 있다. 이언적(李彦迪) : 문묘(文廟) 조에 있다.
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 : 모두 안동(安東) 조에 있다. 장현광(張顯光) : 성주(星州) 조에 있다.
[주 D-001] 기신(紀信) :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사이에 있는 산인데, 당(唐) 나라 때 시인(詩人)
이백(李白)이, 이 산에서 글을 읽었다 한다. 여기서는 시 쓴 사람 자신의 옛날 글 읽던 곳이라는 뜻이다.
[주 D-02] 팔사(八蜡) : 중국 하남(河南)현에 있는 성인데, 이백이 이 성을 지나면서, “광무성(廣武省) 가에서
모춘(暮春)을 만나니 문양(汶陽)으로 돌아가는 손의 눈물이 수건을 적신다.”라는 회고시를 지었다는 고사이다.
여기서는 시 쓴 사람 자신이 회고(懷古)하면서 눈물을 뿌린다는 뜻이다.
영덕현 盈德縣
동쪽으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13리, 영해부(寧海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남쪽으로 청하현(淸河縣) 경계
에 이르기까지 41리, 서쪽으로 청송부(靑松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46리,
북쪽으로 진보현(眞寶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57리, 서울에서의 거리가 7백 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야시홀군(也尸忽郡)이다. 신라(新羅)에서는 야성군(野城郡)으로 고쳤다.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때 예주(禮州)에 귀속시켰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또 현령(縣令)으로 고쳤다. 본조(本朝)에서는 태종(太宗) 15년에 바닷가에 있는 곳이라 하여 지현사(知縣事)를
두었다가 뒤에 도로 현령(縣令)으로 하였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 각기 1명씩이다.
군명 야시홀(也尸忽)ㆍ야성(野城)
성씨본현 김(金) : 전(全)이라 하기도 한다. 조(曹)ㆍ윤(尹)ㆍ조(趙)ㆍ정(鄭)ㆍ주(朱) : 모두 촌(村)이다.
박(朴) : 내(來)이다. 방(房) : 속(續)이다.
형승 땅이 동쪽 바닷가에 있다 :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땅은 동쪽의 바닷가에 끝나고, 산은 고을[州]과 함께
둘리웠다." 하였다.
산천 무둔산(無芚山) : 현 북쪽 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달로산(達老山) : 현 서쪽 37리에 있다.
대둔산(大芚山) : 현 서쪽 70리에 있다. 청송부(靑松府)와 경계가 된다. 암곡산(巖谷山) : 현 북쪽 10리에 있다.
화림산(花林山) : 현 북쪽 10리에 있다. 임물현(林勿峴) : 현 북쪽 45리에 있다. 진보현(鎭寶縣)과 경계가 된다.
바다[海] : 현 동쪽 10리에 있다. 오십천(五十川) : 현(縣)의 성 서쪽에 있다. 그 근원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임물현(林勿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달로산(達老山)에서 나온다.
현(縣)으로부터 지품원(知品院)에 이르는 50개의 건널목이 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포내천(浦內川) : 현 남쪽 24리에 있으니, 곧 오십천(五十川)의 하류(下流)이다. 오포(烏浦)로 들어간다.
남역포(南驛浦) : 남역(南驛)의 동쪽에 있다. 골곡포(骨谷浦) : 현 남쪽 45리에 있다.
신증 빙혈(氷穴) : 대둔산(大芚山)에 있다. 한 여름에도 딱딱한 얼음이 그냥 있다.
토산 송어(松魚)ㆍ전복[鰒]ㆍ방어(魴魚)ㆍ연어(鰱魚)ㆍ대구어(大口魚)ㆍ문어(文魚)ㆍ상어[鯊魚]ㆍ청어(靑魚)ㆍ
백조어(白條魚)ㆍ홍합(紅蛤)ㆍ미역[藿]ㆍ인삼(人蔘)ㆍ김[海衣]ㆍ자해(紫蟹)ㆍ화살[竹箭] : 남산(南山)ㆍ
오보산(烏保山)ㆍ구배산(臼背山)에서 난다. 광어(廣魚)ㆍ잣[海松子]ㆍ쇠(鐵) : 무둔산(無芚山)에서 난다. 꿀ㆍ
지치ㆍ황어(黃魚)ㆍ은어[銀口魚]ㆍ해삼(海蔘)ㆍ참가사리[細毛]ㆍ애끼찌[弓幹木]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3백 97척, 높이는 12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 못 하나가 있다.
관방 오포영(烏浦營) : 현 남쪽 17리에 있다. 수군만호(水軍萬戶) 한 명이 있다. 신증 현 남쪽 13리에 있다.
순변사(巡邊使) 고형산(高荊山)이 옛 군영은 바닷길을 내다볼 수 없다 하여 여기에 옮겨 설치하고 석성(石城)
을 쌓았으니, 둘레는 1천 4백 90척, 높이는 9척이다.
봉수 황석산(黃石山)봉수 : 현 남쪽 16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청하현(淸河縣)의 도리산(桃李山)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별반산(別畔山)봉수에 응한다.
별반산(別畔山)봉수 : 현 동쪽 18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황석산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영해부(寧海府)의 대소산(大所山)봉수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 권근(權近)의 기(記)에, "영덕(盈德)은 바닷가에 있는 가장 멀고 궁벽한 곳이다. 오랫동안의
왜놈 등쌀에 백성들이 마을과 성터에서 숨어버린지 몇 해나 된다. 그러다가 성(城)이 수축되어 모여들게 되자
유민들이 조금 돌아와 조잡하나마 생업에 편안하게 되었다. 내 일찍이 귀양가는 길에 여기를 지났거니와,
그때에는 아직 관청의 건물이 없었다.
그 현령(縣令)이 거처하는 곳은 초가집 몇 칸으로 낮고 좁은 것이 민가와 다를 바 없었다.
홍무(洪武) 신미년(辛未年) 가을에, 계림(鷄林) 이인실(李仁實)이 이곳의 현령으로 오면서, 정사(政事)와 송사
(訟事)가 제대로 되어 한 고을이 잘 다스려지게 되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공관(公館)을 짓기로 하
였다. 그 다음해 가을에 산에서 나무를 벌채했고, 또 그 다음해 봄에 빗물로 물이 불었을 때 개울로 재목을 흘려
보내니 실어나르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모두 성밑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청과 좌우의 방ㆍ문ㆍ낭하ㆍ
부엌ㆍ마굿간 등이 모두 갖추어지게 되었다.
또 그 성에는 전부터 우물이 없었는데, 땅을 점쳐서 팠더니 먹을 수 있는 맑은 샘이 솟아 올랐다.
온 고을 사람들이 경축해 마지 않았다. 무릇 관청의 건물이란 빈객(賓客)을 접대하고 정령(政令)을 베푸는 곳이
니 그 공이 큰 것이고, 우물은 조석(朝夕)으로 필요한 것이며 위급한 일에 준비가 되는 것이니 그 일이 절실한
것이다. 이후(李侯)의 정치는 이러한 일에 힘을 다 썼으니 급선무가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 고을 사람 진사(進士) 김적(金績)이 상경하여 나한테 와서 공부를 하면서 이 사적을 적어달라고 청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찬탄했다." 하였다.
누정 청심루(淸心樓) : 바로 성(城) 서문(西門)의 누각이다. 영락(永樂) 계묘년(癸卯年)에 지현(知縣) 최우(崔宇)
가 건축했고, 천순(天順) 정축년(丁丑年)에 현령(縣令) 염상항(廉尙恒)이 중수했으며, 권람(權擥)이 기(記)를 적
었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밤에 화초(華譙)에 묵으니, 둥그렇게 처마의 달이 밝도다. 향기는 해점(薤簟)에
녹아서 차갑고, 바람은 갈옷[葛衣]을 뚫어 시원하네. 산 빛은 가을의 기운과 짝하고, 여울 소리는 세상의 풍정
을 씻도다. 총총히 병사를 점검하여 가니, 막중(幕中)의 평(評)이 부끄럽도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주등역(酒登驛) : 현 동쪽 9리에 있다. 남역(南驛) : 현 남쪽 21리에 있다.
북원(北院) : 현 동쪽 2리에 있다. 주등원(酒登院) : 주등역 곁에 있다. 남역원(南驛院) : 남역 곁에 있다.
두아화원(豆牙禾院) : 현 남쪽 35리에 있다. 신원(新院) : 현 북쪽 20리에 있다.
지품원(知品院) : 지품부곡(知品部曲)에 있다. 현에서의 거리는 44리이다.
신증 사동원(沙冬院) : 현 남쪽 35리에 있다.
불우 옥천사(玉泉寺) : 암곡산(巖谷山)에 있다. 사자갑사(獅子岬寺)ㆍ
용천사(龍泉寺) : 모두 대둔산(大芚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 북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오보부곡(烏保部曲) : 현 동쪽 바닷가에 있다. 이이아부곡(伊已牙部曲) : 현 남쪽 25리에 있다.
지품부곡(知品部曲) : 현 북쪽 70리에 있다. 고성(古城) : 읍성(邑城)의 동문(東門) 밖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3천 3백 척이었는데 지금은 황폐해졌다.
달로산성(達老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8천 3백 56척이다.
신증명환본조 권오복(權五福)
인물본조 정자영(鄭自英) :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학(文學)으로써 뛰어나 40여 년간 사유(師儒)가 되었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제영 궤안요청장(几案邀靑嶂) : 홍여방(洪汝方)의 청심루시(淸心樓詩)에, "궤안(几案)에 푸른 봉우리를 부르고,
헌영(軒楹)에 푸른 개울이 그늘진다." 하였다.
장류요남맥(長流繞南陌) : 이원(李原)의 시에, "하늘 남쪽으로 멀리 온 손[客]이 되어, 바다 위로 외로이 선
성(城)에 오르네. 구름 걷히니 저녁의 산은 푸르고, 비 개이니 가을 해는 맑도다. 기나긴 흐름은 남쪽 길을 돌고,
훌륭한 나무는 안 마당에 있네. 지금은 변경(邊境)이 잠잠하니, 곳곳마다 거문고 타는 소리로세."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고읍 진안(眞安) : 서쪽으로 40리이고, 달로산(達老山) 아래에 있다. 본래는 신라의 조람(助攬)으로 경덕왕
(景德王) 16년에 진안(眞安)으로 고쳐 야성군(野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진보(眞寶)에 합하였으며, 현종 때에는 나누어 여기에 예속시켰다.
방면 읍내(邑內) : 끝이 5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은 5리, 끝은 25리이다.
중남(中南) : 처음은 6리, 끝은 20리이다.
외남(外南) : 처음은 20리, 끝은 50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은 20리, 끝은 60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 오보부곡(烏保部曲)은 동해(東海)의 연변에 있다. 이이재부곡(伊已才部曲)은 남쪽으로 25리이고,
지품부곡(知品部曲)은 서북쪽으로 17리이다.
성지 노산고성(老山古城) : 둘레는 8천 3백 56척이며, 동쪽으로는 진안(眞安) 고현의 터가 있다.
토산 잣[海松子]ㆍ궁간(弓幹)ㆍ뽕[桑]ㆍ홍합(紅蛤)
진보 혁처(革處) 오포진(烏浦鎭) : 남쪽으로 17리이다. 순변사(巡邊使) 고형산(高荊山)이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 현 남쪽 13리로 옮겼다. 중종조(中宗朝)에 축성(築城)하였다. 둘레는 1천 4백 90척이며,
수군만호(水軍萬戶)를 설치하고 후에 고쳤다.
봉화현 奉化縣
동쪽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31리, 서쪽으로 안동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남쪽으로 예안현(禮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25리,
북쪽으로 강원도(江原道) 삼척부(三陟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74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8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 고사마현(古斯馬縣)이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옥마(玉馬)로 고치고 나령군(奈靈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은 안동부(安東府)에 예속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은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임금 때, 예(例)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세조(世祖) 3년에 순흥(順興) 문수산(文殊山)의 물 동쪽의 땅을 떼어서 예속시켰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고사마(古斯馬)ㆍ봉성(鳳城)ㆍ옥마(玉馬)
성씨본현 정(鄭)ㆍ금(琴)ㆍ석(石)ㆍ몽(蒙)ㆍ권(權) : 안동(安東)에서 왔다.
매토(買吐) 윤(尹) : 물야부곡(勿也部曲)도 같다.
풍속 절약ㆍ검소를 숭상하며, 누에치기ㆍ뽕나무 가꾸기에 힘쓴다 :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산천
금륜봉(金輪峯) : 현 북쪽 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문수산(文殊山) : 현 북쪽 30리에 있다.
태백산(太白山) : 현 북쪽 73리에 있다. 고려(高麗) 최선(崔詵)의 예안(禮安) 용수사(龍壽寺) 기(記)에, "천하의
명산(名山)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三韓)의 명승(名勝)은 동남(東南)이 가장 뛰어나다.
동남의 거산(巨山)은 태백(太白)이 우두머리가 된다." 하였다. 태자산(太子山) : 현 남쪽 35리에 있다.
용점산(龍岾山) : 현 서쪽 13리에 있다.
파탄암현(破呑巖峴) : 태백산(太白山)의 남쪽에 있으며 험한 곳이다.
강원도(江原道) 삼척부(三陟府)와의 경계이다.
신라현(新羅峴) : 현 남쪽 15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新羅) 왕의 태자(太子)가 내령군(奈靈郡)에서
놀다가, 군리(郡吏)의 딸을 사랑하게 되었다. 오래되니 고을 사람에게 부끄러워 살며시 돌아와 여기서 머물렀으
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매토천(買吐川) : 매토부곡(買吐部曲)에 있다. 근원이 태백산(太白山)의 황지(黃池)에서 나오는데, 바로 예안현
(禮安縣)의 나화석(羅火石) 상류(上流)이다.
물야계(勿也溪) : 현 북쪽 18리에 있다. 근원이 문수산에서 나와, 내성현(奈城縣)을 지나,
영천군(榮川郡)의 동쪽에 이르러서 임천(臨川)이 된다.
도미천(道美川) : 현 동쪽 15리에 있다. 그 근원은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오고, 매토천으로 들어간다.
신증 망일봉(望日峯) : 현 서쪽 2리에 있다. 용연(龍淵) : 태백산 아래 있다. 가물 때 기우(祈雨)하면 응험이
있다.
토산 잣[海松子]ㆍ석이[石蕈]ㆍ인삼ㆍ수달(水獺)ㆍ산무애뱀[白花蛇]ㆍ석청[石淸密]ㆍ송이[松蕈]ㆍ
은어[銀口魚]
봉수 용점산(龍岾山)봉수 : 남쪽으로는 예안현(禮安縣)의 녹전산(祿轉山)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안동부(安東府) 내성현(奈城縣)의 당북산(堂北山)봉수에 응한다.
신증누정 영풍루(迎風樓) : 객관(客館)의 문루(門樓)이다.
학교 향교(鄕校) : 현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도심역(道深驛) : 현 남쪽 5리에 있다. 전에는 현 북쪽 30리에 있었는데, 태백산제(太白山祭)를 폐지한
뒤로 이곳에 옮겼다. 혹은 말둔(末屯)이라고도 부른다.
장불원(長佛院) : 현 북쪽 45리에 있다. 마장리원(馬場里院) : 현 남쪽 15리에 있다.
태자산원(太子山院) : 현 남쪽 25리에 있다.
불우 태자사(太子寺) : 태자산(太子山)에 있다. 신라(新羅) 병부 시랑(兵部侍郞) 최인곤(崔仁滾)이 지은 승랑공
탑명(僧朗空塔銘)과 고려(高麗)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김심언(金審言)이 지은 승통지납명(僧通眞塔銘)이
있다.
지림사(智林寺)ㆍ금정암(金鼎菴) : 모두 문수산(文殊山)에 있다. 남화사(覽華寺) : 태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물야부곡(勿也部曲) : 별호는 모산(冒山)이다. 현 북쪽 10리에 있다.
양곡부곡(良谷部曲) : 현 서북쪽 7리에 있다. 매토부곡(買吐部曲) : 별호는 청둔(靑芚)이다.
본래 안동부(安東府)에 속해 있었는데,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 3년에 여기로 귀속되었다.
현 동쪽 14리에 있다.
인물
고려 금의(琴儀) : 체격이 기걸하고 도량이 컸다. 젊어서 공부에 힘을 기울여 글을 잘 지었다. 명종(明宗) 임금 때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많은 요직을 지냈다. 희종(熙宗) 때 지주사(知奏事)로 옮겨서 오랫동안 기요(機要)를 맡아
주대(奏對)ㆍ칭지(稱旨)하였으니, 임금이 크게 의지하였다. 강종(康宗)이 즉위(卽位)할 때 금(金) 나라에서 사신
을 보내와 책명(冊命)하게 되었다. 금 나라의 사신이 정문(正門)으로 들어오려 했는데, 조정의 의론이 이를 옳게
여기지 않아, 왕복하면서 서로 따지게 되었다. 임금이 의(儀)에게 가서 잘 타이르도록 하명하였다.
의(儀)가 묻기를, "천자(天子)가 사방의 산악을 순수(巡狩)하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것이오.
대국(大國)에서 소국(小國)에 왕필(枉蹕)하면 어느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마땅하오." 하니, 금 나라 사신이 말하기
를, "천자(天子)가 출입하는 데 있어, 중문(中門)을 젖혀 놓고 어디로 할 것이오." 하여 "그렇다면 신하가 임금의
정문(正門)으로 들어오게 하려하는 것이 옳은 일이오." 하자, 금 나라 사신은 감복하고 서문(西門)으로 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기쁘게 여겨,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使)로 승진시켰다. 고종(高宗) 때 수 태보 동중서문하시랑 평
장사(守太保同中書門下侍郞平章事)로서 치사(致仕)하였다. 여러 차례 공거(貢擧 주군(州郡)에서 준수한 자제를
선발하여 추천하는 일)를 맡아, 그 가운데 명사(名士)가 많이 나왔으니, 세상에서는 이르기를, '금학사옥순문생
(琴學士玉筍門生)'이라고 하였다. 시호는 영렬(英烈)이다.
정운경(鄭云敬) : 충숙왕(忠肅王) 때 과거에 급제, 상주 사록(尙州司錄)에 보임되고,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옮
기어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를 존무(存撫)하였으며, 들어가서는 지형부사(知刑部事)가 되고 얼마 안 있어 형부
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뒤에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으로 병(病)을 이유로 영천(榮川)에 귀향했다가 졸
(卒)하였다. 운경(云敬)이 충목왕(忠穆王) 때, 서운부정(書雲副正)으로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하정(賀正)하
러 원(元) 나라에 갔는데, 당시 기황후(奇皇后)가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였으므로 중귀(中貴)에는 우리나라 사
람이 많이 있었다. 그들이 음식을 베풀면서 몹씨 거만하게 굴었다. 운경(云敬)은 정색하고 말하기를, "오늘 음식
을 베푸는 것은 옛주인을 위한 것이오." 하니 중귀(中貴)들은 놀라서 말하기를, "수재(秀才)가 우리를 가르쳐 주었
다." 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한 뒤, 운경(云敬)이 법을 지키면서 권세가들에게 굽히지 않았다 해서 내전
(內殿)에 불러들여 술을 내렸다. 아들은 도전(道傳)ㆍ도존(道尊)ㆍ도복(道復)이 있다.
정송수(鄭松壽) : 공민왕(恭愍王) 때, 호종(扈從)하여 1등공신이 되고, 봉화부원군(奉化府院君)으로 봉(封) 받았
다.
본조 정도전(鄭道傳) : 자(字)는 종지(宗之)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주사록(忠州司錄)에 뽑
혔고,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다.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신우(辛隅 폐왕(廢王) 우(隅)) 초에 언사(言
事)로 인하여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가 곧 용서되어 편히 살았다.
삼각산(三角山) 아래 오두막집을 지었는데, 글공부하는 사람이 많이 따랐다. 후생(後生)들에게 이단(異端)을
없애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라고 늘 훈계했다.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승진되었다가 군(郡)으로 나갈 것
을 빌어 남양부(南陽府)의 원이 되었다. 태조(太祖)를 따라 공양(恭讓)을 세웠으므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하
사되었다. 곧이어 정당문학 동판도평의사사사(政堂文學同判都評議使司事)를 배수하였다. 병(病) 때문에 물려줄
것을 빌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공양왕(恭讓王) 때 대간(臺諫)을 비훼(非毁)한 것으로 인해서 봉화현(奉化縣)에
방귀(放歸)되었다. 뒤에 소환되어 충의군(忠義君)에 다시 봉(封)해지고 여러 관직을 지냈다.
본조(本朝)에서 봉화백(奉化伯)에 봉하였는데 뒤에 죄를 지어 주살되고 훈봉(勳封)이 삭탈되었다.
정진(鄭津) : 도전(道傳)의 아들이다. 벼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신증 정문형(鄭文炯) : 진(津)의 손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영중추(領中樞)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제영 금륜봉올약지천(金輪峯兀若支天) : 강윤(姜允)의 시에, "금륜봉의 우뚝함은 하늘을 받친 듯하고,
도미천(道美川)의 흐름은 바닷가에 닿았다." 하였다.
창등찬공수목교(蒼磴攢空樹木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푸른 돌길은 하늘 뚫고 나무를 엇갈리는데,
두세 농가는 노란 띠풀을 덮고 있다. 주민들이야 어찌 알리 강호(江湖)의 맛을,
산나물 조금 캐어 술 안주를 마련한다." 하였다.
[비고]
방면 현내(縣內) : 끝이 5리. 중동(中東) : 처음은 5리, 끝은 20리. 상동(上東) : 안동 북쪽 경계 너머 있으며,
동쪽은 소천(小川)이라 하고, 남쪽은 재산(才山)이라 하며, 서쪽은 춘양(春陽)이라 한다.
북쪽은 영월(寧越)의 상동(上東)과 삼척(三陟)의 상장성(上長省) 경계에 접해 있으며, 처음 경계는 40리이고,
끝 경계는 80리이다. 남면(南面) : 끝은 40리. 서면(西面) : 처음은 5리, 끝은 15리.
북면(北面) :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물야(勿野) : 북쪽으로 끝은 15리인데, 본래는 물야부곡이다.
○ 미량곡부곡(彌良谷部曲)은 서북쪽으로 7리이다. 매토부곡(買吐部曲)의 별호는 청둔(靑屯)이며 본래 안동 땅
인데, 공양왕(恭讓王) 2년에 여기에 예속되었고, 상동면(上東面) 남쪽 경계에 있다.
궁실 선원각(璿源閣)ㆍ실록각(實錄閣)ㆍ사고(史庫) : 모두 각화사(覺華寺)에 있으며 곁에는 참봉(參奉) 및
수직군(守直軍)이 있다.
사원 문암서원(文巖書院) : 광해주(光海主) 병진년(丙辰年)에 건립하고 숙종(肅宗) 갑술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이황(李滉) : 문묘(文廟)에 보라. 조목(趙穆) : 예천(醴泉)에 보라
진보현 眞寶縣
동쪽으로 영덕현(盈德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0리, 영해부(寧海府) 경계까지 15리,
남쪽으로 청송부(靑松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8리, 서쪽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0리,
북쪽으로 영해부(寧海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3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6백 16리이다.
건치연혁 칠파화현(漆巴火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진보(眞寶)로 고치고,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조람현(助攬縣)을 경덕왕이 진안(眞安)으로 고치고,
야성군(野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는데,
고려(高麗) 초에 두 현을 합하여 보성부(甫城府)를 설치하였다 : 어떤 이는 재암성(載巖城)이라고도 한다.
현종(顯宗)은 예주(禮州)에 귀속시켰는데 뒤에 왜구(倭寇)로 인하여 주민이 싹 없어졌다.
본조(本朝)에서는 태조(太祖) 때 보성감무(甫城監務)를 두었다.
세종(世宗)은 청부(靑鳧)에 합쳐 청보군(靑寶郡)이라 불렀다가 얼마 안 있어 이를 파하고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다시 현감(縣監)을 삼았다. 성종(成宗) 5년에 현인(縣人) 금맹함(琴孟諴)이 현감(縣監) 신석동(申石同)을 구타
모욕하였다 해서, 청송부(靑松府)에 혁속(革屬)시켰는데, 9년에 토인(土人)들이 신소(申訴)하였으므로 복구(復
舊)시켰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기 1명씩이다.
군명 칠파화(漆巴火)ㆍ조람(助攬)ㆍ진안(眞安)ㆍ보성(甫城)ㆍ재암(載巖)ㆍ청보(靑寶)ㆍ진해(眞海).
성씨본현(本縣) 조(趙)ㆍ이(李)ㆍ김(金)ㆍ박(朴)ㆍ백(白)ㆍ전(全) : 속(續)이다.
춘감(春甘) 오(吳) : 파질(巴叱)도 같다.
산천 남각산(南角山) : 현 남쪽 8리에 있다. 고산(高山) : 현 서쪽 10리에 있다.
둔동산(芚洞山) : 현 동쪽 20리에 있다.
임물현(林勿縣) : 현 동쪽 20리에 있다.
신한천(神漢川) : 현 북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은 영해부(寧海府)의 일월산(日月山)에서 나와, 안동부(安東府)
를 지나면서 와부탄(瓦釜灘)이 되었다가 견항진(犬項津)에 합쳤다.
남쪽 기슭은 4백여 척의 석벽(石壁)이 되어 있어 이에 의해 성터[城基]로 삼았으나 아직 성을 쌓지는 못했다.
신증 추현(楸峴) : 현 서쪽 15리에 있다.
토산 송이[松蕈]ㆍ지치[紫草]ㆍ꿀[蜜蜂]ㆍ인삼(人蔘)ㆍ지황(地黃)ㆍ백복령(白茯苓)ㆍ석이버섯[石蕈].
봉수 남각산(南角山)봉수 : 동쪽으로는 영해부(寧海府)의 광산(廣山)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안동부(安東府) 임하현(臨河縣)의 약산(藥山)봉수에 응한다.
정사 압각대(鴨脚臺) : 객관(客館)의 북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다행히도 동헌 앞에 압각대(鴨脚臺)가 있어, 과객(過客)을 받으므로 갔다가는 돌아
오네. 강남(江南)에서 어느 누구 장대류(章臺柳 유곽의 버들을 가리킴)를 부르는고,
농상(隴上)에는 아무도 역사매(驛使梅 매화의 별명)를 기대지 않네. 붉은 나무는 가까워 짙음이 떨어질 듯하고,
푸른 산은 눈앞에 우뚝함이 쌓여 있네. 늙은이가 힘써 일했지만 무슨 일을 이루었는고, 세월은 유유히 술잔에
부쳤거늘."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현(縣) 남쪽 4리에 있다.
역원 보시원(普施院) : 현 동쪽 1리에 있다. 보현원(普賢院) : 현 동쪽 30리에 있다.
추현원(楸峴院) : 현 서쪽 15리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구름 길은 꼬불꼬불 돌길은 서리서리,
산허리에 원(院)집 두세 칸이 있고나. 우레 소리 벽을 돌아 두 개울 합치고, 빗발 하늘에 이어 만 그루 옹기종기.
말은 꼬부랑길 밟으며 구름 밖으로 가고, 사람은 새등[鳥背] 내려보며 봉우리 속으로 돌아온다. 자식 생각하는
것 시인(詩人)이 아니니, 무슨 일로 한갓 촉도난(蜀道難)을 읊었나." 하였다.
삼두등원(三豆等院) : 현 동쪽 15리에 있다.
불우 수정사(水淨寺) : 남각산(南角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천숙부곡(泉宿部曲) : 현 동쪽 10리에 있다. 춘감부곡(春甘部曲) : 현 북쪽 10리에 있다.
파질부곡(巴叱部曲) : 현 남쪽 15리에 있다. 고을마부곡(古乙亇部曲) : 현 동쪽 30리에 있다.
성부부곡(省夫部曲) : 현 북쪽 30리에 있다.
인물
본조 조용(趙庸) : 벼슬은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학문이 넓고 문장을 잘했는
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다. 일찍이 예천군(醴泉郡)에 귀양살이하면서 후진을 가리키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명사(名士)가 많이 나왔다.
조말생(趙末生)ㆍ윤상(尹祥)ㆍ배항(裵恒)ㆍ배강(裵杠)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다.
신증 이우(李堣)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시명(詩名)이 있었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방면 하리(下里) : 사방으로 끝이 5리이다. 상리(上里)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5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은 7리이고 끝은 25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 천숙부곡(泉宿部曲)은 동쪽으로 10리이고, 춘감부곡(春甘部曲)은 북쪽으로 10리이다.
파질부곡(巴叱部曲)은 남쪽으로 15리이고, 고을마부곡(古乙亇部曲)은 동쪽으로 30리이며,
성부부곡(省夫部曲)은 북쪽으로 30리이다.
봉수 신법산(神法山) : 서쪽으로 10리이다. 읍창(邑倉)ㆍ북창(北倉) : 북면에 있다.
창고 봉각서원(鳳覺書院) : 선조(宣祖) 임인년에 건립하고 숙종(肅宗)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 문묘(文廟)에 보라.
군위현 軍威縣
동쪽으로 의성현(義城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5리, 남쪽으로 의흥현(義興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24리,
서쪽으로 선산부(善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16리, 북쪽으로 비안현(比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20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5백 7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의 노동멱현(奴同覓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숭선군(嵩善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高麗) 현종(顯宗)은 상주(尙州)에 귀속시켰고,
인종(仁宗)은 다시 일선현(一善縣)에 귀속시켰으며,
공양왕(恭讓王)은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예(例)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속현 효령현(孝靈縣) : 영(靈)은 영(令)이라 쓴 곳도 있다. 현 서남 35리에 있다.
본래 신라(新羅) 모혜현(芼兮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숭선군(嵩善郡)의 영현(領縣)
으로 삼았다. 고려(高麗) 현종(顯宗)은 상주(尙州)에 귀속시켰고, 인종(仁宗)은 다시 일선현(一善縣)에 귀속시
켰으며, 공양왕(恭讓王) 때 여기에 내속시켰다. 본조(本朝)에서도 이에 따랐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기 1명씩이다.
군명 노동멱(奴同覓)ㆍ적라(赤羅).
성씨본현(本縣) 박(朴)ㆍ나(羅)ㆍ방(方)ㆍ서(徐)ㆍ오(吳) 효령(孝靈) 유(劉)ㆍ사공(司空)ㆍ도(陶)ㆍ택(澤)ㆍ
박(朴)ㆍ김(金)ㆍ손(孫) : 모두 들어왔다. 변(卞)ㆍ탁(卓) : 모두 속(續)이다.
풍속 풍속이 순후ㆍ질박하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의 주(註)에, "풍속이 순후ㆍ질박하다.
비록 고을의 호가(豪家)라도 호미ㆍ쟁기를 들고 농사에 부지런하며, 호가의 부녀들도 비단옷을 입지 아니한다."
하였다.
산천 마정산(馬井山) : 현 동남 5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박달산(朴達山) : 효령현에 있다. 본현(本縣)에서의 거리는 남쪽으로 24리이다.
한적산(韓敵山) : 현 남쪽 15리에 있다.
기우봉(祈雨峯) : 현 서쪽 7리에 있다. 옛 기우단(祈雨壇)이 있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풍현(風峴) : 현 서쪽 10리에 있다. 추현(槌峴) : 현 서쪽 16리에 있다.
병천(幷川) : 현 남쪽 11리에 있다.
의흥현(義興縣)의 남천(南川) 및 부계현(缶溪縣)의 남천(南川)이 합쳐서 하나의 개울이 된 것이므로 붙은 이름
이다. 현 서쪽을 지나 북쪽으로 가서 비안현(比安縣)의 남천(南川)이 된다
남천(南川) : 현 남쪽 1리에 있다. 한적산(韓敵山) 아래까지 흘러가서는 병천(幷川)이 된다.
신증 화산(花山) : 현 서쪽 25리에 있다. 농암(籠巖) : 현 북쪽 13리에 있다. 뇌현(磊峴) : 효령현 동쪽 7리에 있다.
토산 송이버섯ㆍ꿀ㆍ칠(漆)ㆍ지치ㆍ사기(沙器)ㆍ목화씨[綿子].
학교 향교 : 현 동쪽 2리에 있다.
봉수 마정산(馬井山) 봉수 : 남쪽으로는 박달산(朴達山)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비안현(比安縣) 간검산(肝岾山)봉수에 응한다.
박달산(朴達山)봉수 : 남쪽으로는 의흥현(義興縣)의 토현(吐峴)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마정산봉수에 응한다.
역원 소계역(召溪驛) : 현 남쪽 41리 효령현(孝靈縣)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아침에는 사공경(謝公鏡)을 슬퍼하고, 저녁에는 양자기(楊子岐)를 우노라.
한 가닥 마음은 해 밑에 걸리고, 외로운 형적은 하늘 끝에 날리노라. 양장(羊腸 꼬불랑길)은 모두가 험한 것은
아니고, 호미(虎尾 위험한 일)는 어찌 족히 위험할 것인가. 인간 세상에 있어 총애ㆍ모욕을,
하나로 보는 사람은 바로 대장부이어라." 하였다. 장수원(長水院) : 현 남쪽 9리에 있다.
천보원(天寶院) : 현 북쪽 5리에 있다.
의성원(義省院) : 현 북쪽 16리에 있다. 상원(上院) : 현 남쪽 36리에 있다.
창고원(倉庫院) : 현 남쪽 23리에 있다.
불우 월영사(月影寺) : 영방산(迎邦山)에 있다. 마정사(馬井寺) : 마정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동쪽 5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김유신사(金庾信祠) : 효령현(孝靈縣) 서악(西岳)에 있는데, 삼장군당(三將軍堂)이라 속칭된다.
매년 단오(端午)날에 현(縣)이 수리(首吏)가 고을 사람을 거느리고 역기(驛騎)에 기(旗)ㆍ북[鼓]을 달고 신
(神)을 맞이하면서 거리를 누빈다.
○ 허추(許樞)의 시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장수[古將]는 서성(西城)의 주인이라고, 풍속이 내려와 오늘도
제사가 분명하구나. 해마다 단오날을 어기지 아니하니, 깃발 세우고 북치면서 신의 뜻 위로하는구나." 하였다.
고적 소소보부곡(召召保部曲) : 현 서쪽 10리에 있다. 잉미곡부곡(仍未谷部曲) : 효령현 북쪽 15리에 있다.
효자본조 박약지(朴約之) : 나이 17세에 부상(父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에 3년 동안 거처하여 지팡이를 짚고야
일어났고, 뒤에 모상(母喪)을 당하여서도 또 여막에 3년 동안 거처했다. 어느날 들불이 여막에까지 번지려하는
것을 보고 약지(約之)가 소리쳐 울었더니 불이 저절로 꺼졌다. 사람들은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여겼다.
열녀본조 서씨(徐氏) : 고(故) 낭장(郎將) 서사달(徐思達)의 딸이다. 같은 현 사람 도운봉(都雲峯)에게 시집갔는
데, 겨우 1년 만에 지아비가 죽었다. 지나치게 슬퍼하면서, 늘 집 뒤 대밭에 들어가 대나무를 부둥켜 안고 울었
다. 선덕(宣德) 계축(癸丑)년 봄, 어느날 갑자기 흰 대나무 세 떨기가 나왔는데, 3년 만에 7ㆍ8 떨기가 되었다.
정통(正統) 무오(戊午)년 봄에 세종대왕(世宗大王)이 흰 대나무를 그림 그려 들이라고 하명하셨고, 복호(復戶)
하고 정문(旌門)을 세우셨다.
제영 희희상유고순풍(熙熙尙有古淳風)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십리 길에 쭈욱 이은 뽕나무와 삼밭, 화목한
모습은 그냥 옛날의 순박함이라. 밭갈이는 본래 백성들의 일이니, 비단은 어찌 작은 여자들의 일을 방해하랴.
꽃이 흩어지니 봄은 지나 붉음이 땅에 깔리고, 보리 물결치니 여름을 맞아 푸름은 하늘에 닿았어라. 한가롭기
인간 세상 같지 않고, 아마도 화서(華胥)가 꿈속에 떨어진 듯." 하였다.
산전계회작일성(山轉溪回作一成) : 윤상(尹祥)의 효령현시(孝靈縣詩)에, "산이 맴돌고 물이 휘돌아 한 성을
이루고, 두어 집 치장된 것 그림처럼 밝아라."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고읍 효령(孝靈) : 서남쪽으로 35리이다. 본래 신라의 모혜(芼兮)인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효령으로 고쳐
숭선군(嵩善郡) 영현으로 삼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상주(尙州)에 속했는데,
인종(仁宗) 21년에 다시 일선(一善)에 속했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에 내속했다.
방면 현내(縣內) : 끝은 3리이다. 동리(東里) : 처음은 3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서리(西里) : 서북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성동(城東) :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중리(中里) :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5리이다.
효령(孝令) : 남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석본(石本)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25리이다.
화곡(花谷) : 서북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은 3리이고 끝은 15리이다.
○ 소소보부곡은 서쪽으로 10리이고, 잉미곡부곡은 남쪽으로 20리이다.
창고 읍창(邑倉)ㆍ화곡창(花谷倉) : 화곡면이다. 효령창(孝令倉) : 효령 고현이다.
누정 준희루(畯喜樓) : 현내. 침류정(枕流亭) : 남쪽으로 2리이다. 귀영정 : 북쪽으로 7리이다.
연어정 : 서쪽으로 35리이다.
사원 김발한사(金發翰祠) : 효령(孝靈) 서쪽 산악에 있으며, 신라 때에 건립하였고, 매해 단오일(端午日)에는
수리(首吏)가 가서 제사를 지낸다. 김유신(金庾信) : 경주(慶州)에 보라.
비안현 比安縣
동쪽으로 의성현(義城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6리, 남쪽으로 군위현(軍威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7리,
서쪽으로 선산부(善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2리, 상주(尙州) 경계에 이르기까지 21리,
북쪽으로 예천군(醴泉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33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5백 3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아화옥현(阿火屋縣)이다 : 병옥(幷屋)이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이 비옥(比屋)이라
고치고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高麗) 현종(顯宗)이 상주목(尙州牧)에 귀속시켰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안정현(安貞縣)을 병합하였다. 본조 세종(世宗) 3년에 비안현(比安縣)이라 고쳐 부르고,
5년에 치소(治所)를 비옥(比屋)으로 돌리고 이어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속현 안정현(安貞縣) : 정(貞)은 정(定)이라 된 곳도 있다. 현 북쪽 17리에 있다.
본래 신라 아시혜현(阿尸兮縣)이다. 경덕왕이 안현(安賢)이라 고치고 문소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초
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은 상주(尙州)에 귀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고 비옥(比屋)을 겸임하게 하였다.
우리 세종(世宗)께서 안비(安比)라 고치고 비옥(比屋)에 치소(治所)를 옮기고 비안(比安)이라 고쳐 부르며 계속
귀속시켰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기 1명 씩이다.
군명 아화옥(阿火屋)ㆍ병산(屛山)ㆍ비옥(比屋)ㆍ병옥(幷屋).
성씨비옥(比屋) 박(朴)ㆍ손(孫)ㆍ원(袁)ㆍ장(張)ㆍ소(邵) : 정(鄭)이라 된 곳도 있다.
나(羅) : 모두 내(來). 안정(安貞) 오(吳)ㆍ임(林)ㆍ나(羅)ㆍ박(朴) : 밀양(密陽).
김(金) : 속(續)이다. 신평(新平) 팽(彭) : 하필점(下筆坫)ㆍ물실(勿失)의 두 부곡(部曲)도 같다.
황(黃)ㆍ임(林) : 모두 속(續)이다.
풍속 백성은 순박하고 풍속은 검소하다 : 박결(朴潔)의 시에, "백성은 순박하고 풍속은 검소하여 옛날 풍습이
남아 있네." 하였다.
형승 쌍계(雙溪)가 띠처럼 둘러있고, 겹겹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있다 : 정종주(鄭宗周)의 시에, "쌍계(雙溪)
는 얇은 비단 띠처럼 돌았고, 겹친 봉우리는 무늬 있는 비단 병풍처럼 둘렀도다." 하였다.
산천 성황산(城隍山) : 현 북쪽 1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대암산(大巖山) : 안정현 서쪽 3리에 있다.
간점산(肝岾山) : 현 남쪽 7리에 있다. 남천(南川) : 현 남쪽 1리에 있다. 바로 군위현(軍威縣) 병천(幷川)의 하류
이다.
쌍계(雙溪) : 현 동쪽 10리에 있다. 의성현(義城縣) 병천(幷川)의 하류이다.
또 북쪽으로 흘러 남천(南川)과 합쳐 상주(尙州) 단밀현(丹密縣)에 이르러 낙동강(洛東江)에 들어간다.
저지(猪池) : 안정현(安貞縣) 서쪽에 있다.
개천지(開天池) : 현의 북쪽 21리에 있는데 현감 이간(李玕)이 쌓았다.
신증 성안굴(聖安窟) : 현 북쪽 11리에 있다. 관어대(觀魚臺) : 안정현 남쪽 5리에 있다.
토산 꿀ㆍ칠ㆍ지치ㆍ인삼.
궁실 요산헌(樂山軒) : 바로 객관(客館)의 동헌(東軒)이다.
○ 김지경(金之慶)의 기(記)에, "공자(孔子)의 말씀에,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樂山],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다. 무릇 궁실(宮室)을 경영하는 이는 땅을 선택함에 있어 산수(山水)의 명승지를 얻지
못한다면 비록 사치를 다한다 하더라도 후세(後世)에서는 높이지 않을 것이니, 택할 점이 무엇있겠는가.
이 헌(軒)으로 말한다면, 여기에 앉아 사방을 돌아 볼 때 푸른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려져 있고, 산골물이 띠
처럼 앞에서 흐르고 있어 실로 산에 오르고 물가에 가는 듯한 멋이 있다. 산수(山水)의 즐거움이 모두 갖추어 있
는 것이다.
그밖에 제도(制度)의 교묘함이나 단청(丹靑)의 아름다움은 다만 나머지 일이다. 이제부터 이 헌에 오르는 이는
산수의 즐거움을 좌우에서 취하여도 그 근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현(縣)의 별호가 본래 병산(屛山
병풍 같은 산)이니, 산수를 병풍에 그리는 것이 산수를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못하다. 이렇게 해서 병풍의 뜻
을 취하고, 감히 요산(樂山)으로써 이 마루의 이름를 삼고자 하거니와, 괜찮을 것인지." 하였다.
봉수 간점산(肝岾山)봉수 : 남쪽으로는 군위현(軍威縣) 마정산(馬井山)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대암산(大巖山)봉수에 응한다.
대암산(大巖山) 봉수 : 남쪽으로는 간점산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예천군(醴泉郡) 소이산(所伊山)봉수에
응한다.
누정 구요루(衢謠樓) :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 하륜(河崙)의 기(記)에, "친시과(親試科)의 제삼인(第三人), 우정언(右正言) 지제교(知製敎)인 박서생(朴瑞生)
군이 장차 고향에 가서 선영(先塋)을 배소(拜掃 성묘(省墓))하려 하면서, 나에게 작별하고는 또 요청하기를, '나
의 고향 비옥(比屋)은 전에 상주(尙州)의 속현(屬縣)이었는데, 주(州)에서 60여 리나 떨어져 있어 현리(縣吏)가
5일에 1차씩 주(州)로 찾아가 청명(聽命)하면서도 혹시 미치지 못할까 겁을 내고 가끔 급한 일이 있어 주리(州吏)
가 현(縣)에 오게 되면 현리(縣吏)를 욕보이고 현민(縣民)을 못살게 함을 다 말할 수 없었소.
전조 말경에는 일이 모두 창졸(倉卒)한 것이 많아, 현(縣)의 형세는 날로 궁축하였소.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그
까닭을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속현(屬縣)이 주(州)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모두 감현관(監縣官) 1명을 두어 스
스로 다스리게 하므로 우리 고장도 예(例)에 따라 관원(官員)을 얻게 되었는데, 이 뒤로 아전이나 백성이 조금 숨
을 쉴 수 있게 된 것이오.
계미(癸未)년 봄에 감현관(監縣官) 유양(兪讓) 군이 도착하여서는 일을 일으키고 없앨 것에 대해서 모두 잘 처리
하였소. 하루는 현(縣)의 부로(父老)를 모아 놓고 말하기를 「관우(館宇)는 사명(使命)을 접대하고 덕위(德威)를
베푸는 곳이오. 현(縣)이 이제는 앞서와 비교가 안 되게 달라졌소.
그런데 관우(館宇)가 이처럼 좁아서야 여름철의 더위를 당해서는 사명(使命)을 편히 모실 수 없는 것이니,
부로(父老)들도 이것이 부끄럽지 않소.」라고 하니, 모두들 「명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했소.
관(館)의 남쪽에는 큰 길[通衢]이 있고, 고목 두어 그루가 길을 에워싸고 높았다오. 이에 그 그늘에다 누대 3칸
을 지었으니, 농한기를 틈타서 백성을 부역시킴으로 며칠 사이에 준공을 봤소. 그 위에 앉아 사방을 돌아보면
푸른 산은 곁에 둘러 있고, 산골물은 앞에 흐르며, 녹음은 온 땅에 깔리고, 청풍은 절로 불어와, 실로 산에 오르
고 물가에 나간 것 같았다오.
청하건대 그대가 이름 짖고 기(記)를 적어주어 우리 현(縣)을 빛내주기 바라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글이
유치한데 어찌 감히 하겠소. 그러나 내 일찍 듣건대, 요순(堯舜)의 백성은 집집마다[比屋] 봉(封) 받을 수 있었
다 하였소. 이제 비옥(比屋)이란 이름을 듣고 보니 마음에 느낌이 없을 수 없구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성인(聖人)의 글을 읽었으니, 어느 누구인들 요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의 뜻을 갖지 아니할 것이오.
그러나 필경에 이를 능히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소.
대개 요순의 도리는 인(仁)ㆍ의(義)일 뿐이니, 인의(仁義)는 사람 마음에 본디 있는 이치요, 사람들이 모두 이
마음이 있다면, 마음에 모두 이 이치가 있는 것이오. 다만 마음을 다하지 못할 뿐인 것이니, 위로 마음을 다하는
임금이 있고, 아래로 마음을 다한 신하가 있어, 이런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난다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
었소.
정언(正言 박서생(朴瑞生))은 이미 비옥(比屋)의 세가(世家)이므로 일찍이 비옥(比屋)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니,
요순 시대의 임금ㆍ백성의 뜻을 가진 것도 얕지 않을 것이오. 휴가(休嘉 경사(慶事))를 만나 대정(大庭)에서
책문을 지어 시종(侍從)의 열(列)에 뛰어올려 언책(言責)으로 벼슬을 주었으니, 임금의 알아주심이 깊지 않음
이 아닌즉 그대의 책임이 장차 클 것이오. 뒷날, 요순 시대의 군민(君民)의 마음으로써 요순 시대의 군민의 정
치를 행하여 우리나라가 집집마다[比屋] 봉(封) 받을 수 있는 풍속을 이루게 된다면, 반드시 그대의 현(縣)에서
시작될 것이오.
봉(封) 받을 수 있는 풍속이 있다면 반드시 강구요(康衢謠 요임금 때, 요의 덕에 의하여 천하가 절로 다스려지게
된 것을 구가한 동요임)가 있을 것이오. 관(館)의 남쪽에 누대가 있고, 누대의 남쪽에 큰 길[衢]이 있으니,
현민(縣民)들의 노래[謠]가 이 길[衢]에 끊이지 않을 것이오. 이 누대에 올라 이 노래를 듣는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소.
그러니 감히 구요(衢謠)로써 누대의 이름을 삼아도 괜찮지 않겠소.' 하였다. 정언(正言)이 절하면서 말하기를,
'크신 말씀이오. 추생(鯫生 소인)이 어찌 감히 이에 해당되겠소. 그러나 이 뜻을 돌아가서 감히 향인(鄕人)ㆍ
부형(父兄)에게 말씀드려 이를 따르고 잊지 않게 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였다.
나는 늙어서 마음을 다하지 못하였으나, 이미 누정의 이름을 지었고 거듭 마음에 느낌이 생겨 이를 적어 기(記)
로 삼는다." 하였다.
신증 쌍명루(雙明樓) :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안계역(安溪驛) : 현 북쪽 29리에 있다.
쌍계역(雙溪驛) : 현 동쪽 10리에 있다. 흥계원(興係院) : 현 서쪽 19리에 있다.
옥미원(玉彌院) : 현 동쪽 14리에 있다. 장족원(長足院) : 현 북쪽 5리에 있다.
저천원(楮川院) : 현 북쪽 19리에 있다. 안계원(安溪院) : 현 북쪽 28리에 있다.
가차원(加次院) : 현 동쪽 15리에 있다.
불우 용천사(龍泉寺) :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안장사(安長寺) : 무거산(無居山)에 있다.
미흘사(彌屹寺) : 봉미산(鳳尾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퇴곡부곡(退谷部曲) : 현 동쪽 10리에 있다. 신평부곡(新平部曲)ㆍ하필점이부곡(下筆坫伊部曲)ㆍ
물실부곡(勿失部曲).
인물
본조 박서생(朴瑞生) : 태종(太宗) 임금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이조 참의(吏曹參議) 가선대부(嘉善大夫)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에 이르렀다.
효자본조 유포(柳砲) : 벼슬은 경산 현령(慶山縣令)에 이르렀다. 모상(母喪)에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하였다.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제영 관거금랭락(官居今冷落) : 김겸(金謙)의 시에, "관거는 이제 영락했고, 고와(古瓦)는 푸른 이끼 끼었어라."
하였다.
사산송취근첨영(四山松翠近簷楹 : 이영견(李永肩)의 시에, "사산의 푸른 솔 처마에 가깝고,
계하(階下)의 차가운 못 속속드리 맑도다." 하였다.
쌍계합포옥만회(雙溪合抱玉灣回)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쌍계는 합하여 옥만 감싸 돌아드니,
공관(公館)은 여전하고 도서(島嶼)는 펼쳐졌네. 말은 푸른 다리 건너니 자라의 등을 지나는 듯, 새가 파란 벽에
날아드니 그림속으로 들어온 듯." 하였다.
[비고]
연혁 고조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방면 안정(安貞) : 북쪽으로 17리인데, 본래 신라 문시혜(問尸兮)이며, 아을혜(阿乙兮)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안현(安賢)으로 고쳐 문소군(聞韶郡)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太祖) 23년에 안정
(安貞)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상주에 예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비옥(比屋)을 병합했다.
본조(本朝) 세종조(世宗朝)에 두현을 합하였다. 위에 보라.
방면 현내(縣內) : 끝은 7리이다. 신동(身東) : 끝은 15리이다. 남면(南面) : 위와 같음.
내면(內面) : 끝은 10리이다.
외서(外西) : 끝은 20리이다. 내북(內北) : 끝으로 15리이다. 외북(外北) : 끝은 30리이다.
정동(定東) : 북쪽으로 끝은 15리이다. 정북(定北) : 북쪽으로 30리이다.
정서(定西) : 위와 같음. 우(右) 3면은 안정(安定) 고현의 땅이다.
○ 퇴곡부곡(退谷部曲)은 동쪽으로 10리이다.
신평부곡(新平部曲)ㆍ하필점이부곡(下筆坫伊部曲)ㆍ물실부곡(勿失部曲).
성지 고성(古城) : 북쪽으로 1리이며 성황산(城隍山)이라 일컫는다.
창고 읍창(邑倉)ㆍ안정창(安貞倉).
누정 망북정(望北亭).
예안현 禮安縣
동으로 영해부(寧海府) 경계까지 41리, 남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 12리,
서로 영천군(榮川郡) 경계까지 39리, 북으로 봉화현(奉化縣) 경계까지 41리,
경도(京都)와의 거리는 5백 4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 매곡현(買谷縣)이다. 신라(新羅) 때에 선곡(善谷)으로 고치고, 내령군(奈靈郡)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 때에 성주(城主) 이능선(李能宣)이 거의(擧義)하여 귀순(歸順)하였으므로 지
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승격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길주(吉州)에 붙였으며 신우(辛禑)가 그 태(胎)를 현지
(縣地)에 간직하였다 하여 다시 군으로 하다가 얼마 후에 주(州)로 승격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 와서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이다.
군명 매곡ㆍ선곡ㆍ선성(宣城).
성씨본현 김(金)ㆍ이(李)ㆍ우(禹)ㆍ조(趙)ㆍ안(安)ㆍ권(權)ㆍ강(姜)ㆍ박(朴)ㆍ정(鄭)ㆍ최(崔)ㆍ가(賈).
의인(宜仁) 김.
풍속 풍속은 절약하고 검소함을 숭상한다 : 관풍안(觀風案)에 보인다.
지역은 편소(偏小)하고 토질이 박(薄)하다 : 김효정(金孝貞)의 동루시(東樓詩)에 있다.
산천 성황산(城隍山)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녹전산(祿轉山) : 현 서쪽 20리에 있다.
요성산(邀聖山) : 현 북쪽 18리에 있다. 장갈현(長葛峴) : 현 동쪽 30리에 있는데,
영해부(寧海府) 청기현(靑杞縣)의 경계이다.
영지산(靈芝山) : 현 북쪽 5리에 있다. 용두산(龍頭山) : 현 북쪽 22리에 있다.
○ 최선(崔詵)의 용수사(龍壽寺) 기에, "태백산(太白山) 남쪽으로 3백여 리를 높았다 낮았다 하여 우뚝하게 빠져
나온 것이 있으니, 이것이 용두산인데 실로 영가군(永嘉郡)이 이 산을 짊어지고 도시가 된 것이다." 하였다.
비암(鼻巖) : 현 남쪽 3리에 있는데, 높이가 10여 장(丈)이고, 그 위에 5ㆍ60명이 앉을 만하다. 앞으로 큰 시내에
임하여 고을 사람들의 유상(遊賞)하는 곳이다.
조산수(造山藪) : 부진(浮津) 남쪽 언덕에 있다.
나화석천(羅火石川) : 현 동쪽 28리에 있다. 곧 봉화현(奉化縣) 매토천(買吐川) 하류이다.
손량천(損良川) : 현 동쪽 5리에 있다. 곧 나화석천 하류인데, 현 남쪽 1리에 이르러서는 부진(浮津)이 되고,
남으로 흘러 안동부에 이르러서 견항진(犬項津)이 된다.
부진(浮津) : 현 남쪽 1리에 있는데, 곧 나화석천 하류이다. 안동부에 이르러서는 요촌탄(蓼村灘)이 된다.
신증 월명담(月明潭) : 현 동쪽 25리에 있다.
토산 인삼ㆍ꿀ㆍ지치ㆍ송이버섯ㆍ은어ㆍ철 : 현 동쪽 상리(上里)에서 난다. 오미자(五味子)ㆍ석이버섯ㆍ잣ㆍ
칠ㆍ백복령(白茯苓)ㆍ설면(雪綿).
성곽 북산성(北山城) :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1백 49척, 높이 4척이며,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녹전산(祿轉山)봉수 : 남으로 안동부 개목산(開目山)봉수에 응하고, 북으로 봉화현 용점산(龍岾山)봉수에
응한다.
누정 추흥정(秋興亭) : 객관 동쪽에 있다. 홍희(洪熙) 원년에 현감 박결(朴潔)이 세웠고, 관찰사(觀察使) 하연
(河演)이 이름 짓고 기(記)를 썼다.
○ 은여림(殷汝霖)의 시에, "비단 펼친 듯 네 창문엔 산빛이 가깝고, 유리 깔아 놓은 듯 한 지역엔 물빛이
깊구나." 하였다.
동루(東樓) : 현 동쪽에 있다. 신증 쌍벽루(雙碧樓) : 부진 언덕 위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현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선안역(宣安驛) : 현 남쪽 3리에 있다. 대사원(大寺院) : 현 서쪽 1리에 있다.
장원(場院) : 현 동쪽 28리에 있다.
불우 용수사(龍壽寺) : 용두산(龍頭山) 남쪽에 있다. 고려 때의 중 성원(誠源)이 처음 지었으며, 의종(毅宗)이
중 석윤(釋胤)을 위하여 고쳐 짓고, 용수사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최선(崔詵)에게 명하여 기를 짓게 하였다.
신증 이우(李堣)의 시에, "절 서쪽 10리 못 되는 곳, 소나무ㆍ전나무 빽빽하게 들어섰다.
산과 시내는 온갖 풍파 다 겪은 후, 쓸쓸한 옛 절만 남았구나. 선경(禪扃)엔 구름 연기 자욱하고, 음침한 골짜기
에는 도깨비들이 울부짓는데, 문을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무무(貿貿)한 중 서넛뿐일세.
비바람에 시달리다 남은 긴 집[長齋]은, 반절이나 불에 타 없어지고,
빈 뜰에 섰는 탑은 층계가 희미한데, 금부처[金粟]의 빛깔 초췌(憔悴)하다. 무너진 담장엔 등 갈 엉켰고,
그림 벽엔 거미줄만 늘어졌는데, 소조(蕭條)한 물색(物色) 너무 많아, 일찍이 놀던 곳이 아닌 듯하다.
광려산(匡廬山) 글 읽던 곳에,주D-001별안간 광무(廣武)의 눈물을 뿌리네.주D-02 상교(象敎 불상 모시는 교)
쇠함을 알 수 있으니, 천년 만에 성인 다스림 만났다. 우리 도가 하늘 가운데 행하여지니, 사교[陰霾]는 스스로
물러났다.
중의 옷이 갓과 망건이 되고, 징과 바리때는 쟁기로 화하는구나. 마침내 법당[金仙宮]터 변하여,
민간의 전리(田里)로 만들게 하네. 환히 빛나는 주 나라 공자(孔子)의 법, 만고에 사람 기강 붙든다." 하였다.
성천사(聖泉寺) : 요성산(邀聖山)에 있다. 골내사(骨乃寺) : 영지산(靈芝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 산성 안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의인폐현(宜仁廢縣) : 현 동쪽 9리에 있다. 본래 안덕현(安德縣)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이었는데,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현으로 승격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안동에 붙였고,
공양왕(恭讓王) 때에 예안에 예속시켰다.
대왕수(大王藪) : 최선(崔詵)의 용수사(龍壽寺) 기에, "용두산의 남쪽에 동네가 있고, 동네 어귀에 숲이 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대왕수라고 칭한다. 대개 우리 태조께서 경계를 순시하니 남쪽 지방에 이르러 여기서 군대를
주둔하고 3일 후에 떠났는데, 지금 그 땅에 높은 나무, 뭇 풀들이 많아도 나무꾼 풀베기꾼들이 감히 가까이 들
어가지 못하니 용[神物]이 보호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하였다.
명환본조 성엄(成揜) : 현감이 되었다.
신증 김전(金詮) : 성종(成宗)이 유신(儒臣)들을 각 도의 피폐한 고을로 나누어 부임하도록 명하였는데, 김전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서 나가 현감이 되어 청렴 간결하게 정치를 하니,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사모하여
산 사람의 사당을 세웠다.
우거고려 우탁(禹倬) : 옛날 살던 곳이 비암(鼻巖) 남쪽 2리에 있다. 단양군(丹陽郡) 인물조에 자세하다.
효자고려 황재(黃載) : 지인(知印)으로서 서울에서 벼슬하는데, 꿈에 그 어머니가 병환이 난 것을 보고 곧 사직
하고 하루 만에 이르니, 어머니가 과연 병이 계신지라 목놓아 울면서 시약(侍藥)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3년을 여묘(廬墓)살이하였다. 홍무(洪武) 신사년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부세(賦稅)를 면해 주
었다.
본조 우석보(禹錫寶) : 어버이를 위하여 3년을 여묘살이하였다. 성종 12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연계일로종산전(緣溪一路從山轉) :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시내 따라 한 길이 산으로 돌고,
골짜기에 가득한 숲에 은은한 안개가 깊구나." 하였다.
안전산수불수빙(眼前山水不須屛) : 김보륜(金輔輪)의 시에, "멀리 바라보면 어렴풋하나 가까이선 도리어 밝고,
눈앞에 산과 강 있으니 병풍은 필요하지 않네." 하였다.
수복산중노굴반(水複山重路屈盤) : 서거정의 시에, "물 겹겹 산 첩첩 길은 구불구불 한데, 풀풀 나는 단풍잎은
가는 말을 보내네. 다른 날 예전에 놀던 곳 내가 기억할 건가, 명구(名區)를 지나가면서 자세히 보노라." 하였다.
협절분천수지진(峽折犇泉隨地盡) : 전인(前人)의 시에, "골짜기가 끊어졌으니 급히 흐르는 샘물은 땅에 떨어져
다하고, 산은 여러 봉우리를 벌였으니 하늘을 찌를 듯하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방면 읍내(邑內) : 끝으로 10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 7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북면(北面) : 서북쪽으로 처음은 8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동상(東上) :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동하(東下) :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의서(宜西)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의동(宜東) :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성지 의인고현성(宜仁古縣城) : 고현의 남쪽에 있으며 흙으로 쌓은 유지(遺址)가 있다.
누정 망미루(望美樓)ㆍ관심정(寬心亭)
사원 역동서원(易東書院) : 선조(宣祖) 무신년에 건립하고, 숙종 갑자년에 사액하였다.
우탁(禹倬) : 단양(丹陽) 조에 있다.
박충좌(朴忠佐) : 고려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이며,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 도산서원(陶山書院) : 선조 갑술년에 건립하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이황 : 문묘 조에 있다. 조목(趙穆) : 예천(醴泉) 조에 있다.
창고고려 신우(辛禑) 8년에 왜적이 예안(禮安)을 노략질하였다. 9년에 부원수(副元帥) 윤가관(尹可觀)이 왜적
을 맞아 예안(禮安)에서 싸워 대패하였으며,
전의부령(典儀副令) 우하(禹夏)는 왜적과 예안에서 싸워 적의 머리 여덟을 베었다.
[주 D-001] 광려산(匡廬山) 글 읽던 곳에, : 광려산은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사이에 있는 산인데,
당(唐) 나라 때 시인(詩人) 이백(李白)이, 이 산에서 글을 읽었다 한다. 여기서는 시 쓴 사람 자신의 옛날 글 읽던
곳이라는 뜻이 된다.
[주 D-02] 별안간 광무(廣武)의 눈물을 뿌리네. : 광무는 중국 하남현(河南縣)에 있는 성인데, 이백이 이 성을
지나면서, “광무성(廣武省) 가에서 모춘(暮春)을 만나니, 문양(汶陽)으로 돌아가는 손의 눈물이 수건을 적신다.”
라는 회고시를 지었다는 고사이다. 여기서는 시 쓴 사람 자신이 회고(懷古)하면서 눈물을 뿌린다는 뜻이다.
용궁현 龍宮縣
동으로 예천군(醴泉郡) 경계까지 15리, 남으로 동군(同郡) 경계까지 35리, 서로 상주(尙州) 경계까지 12리,
북으로 동주(同州) 경계까지 9리, 경도와의 거리는 4백 4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때의 축산(竺山)이었다 : 원산(園山)이라고도 했다.
고려 성종(成宗)이 용주자사(龍州刺史)로 승격하였고, 목종(穆宗)이 자사를 파하고 군으로 강등하였다.
현종(顯宗)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상주에 붙였고,
명종(明宗)이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는 그대로 하다가 태종조(太宗朝)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축산ㆍ원산ㆍ용주
성씨본현 김ㆍ박ㆍ전(全)ㆍ정(鄭)ㆍ윤(尹) : 모두 촌(村)이다.
곡(曲) : 당(唐) 나라에서 투화했다. 조(曹) : 진해(鎭海)에서 왔다. 오(吳) : 장기(長鬐)에서 왔다.
엄(嚴) : 영월(寧越)에서 왔다. 손(孫) : 평해(平海)에서 왔다.
무송 김 : 양정(陽井)ㆍ풍양(豐壤)ㆍ하남(河南)ㆍ평구(平丘)ㆍ곡계(曲溪) 모두 같다.
풍속 풍속은 화목함은 숭상한다 : 관풍안에 있다.
형승 일대수(一帶水)ㆍ사위산(四圍山) : 장돈의(蔣敦義)의 시에, "일대수는 회계수(會稽水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 있는 강 이름이다.)와 같고, 사위산은 영가산(永嘉山)과 비슷하네." 하였다.
산천 축산 : 객관 북쪽에 있다. 진산이다. 용비산(龍飛山)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천덕산(天德山) : 현의 동쪽 7리에 있다.
하풍진(河豐津) : 안동부의 견항진(犬項津), 예천군의 사천(沙川) 및 성화천(省火川)의 물이 용비산 아래에서
합쳐 하풍진이 된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푸른 호수엔 가벼운 노 목란주(木蘭舟), 눈에 가득한 연기 파도는 모두 시름뿐일세.
올해는 점점 작년 모습이 아니니, 타향에서 고향에 놀던 것 생각하누나. 용추(龍湫)에 해 저무니 구름 모이고,
만령(蠻嶺)에 가을이 차니 장기(瘴氣)가 거두어지네. 길 끊어져 방호(方壺 신선이 사는 곳)에 갈 수 없고, 옥지
(玉芝 신선이 먹는 약)가 창주(滄州)에서 늙는데 어찌할꼬." 하였다.
무흘탄(無訖灘) : 현의 남쪽 7리에 있다.
작탄(鵲灘) : 현의 남쪽 14리에 있다. 수정탄(修正灘) : 현의 동쪽 40리에 있다.
○ 무흘탄으로부터 여기까지 모두 견항진의 하류이다. 성화천(省火川) : 현의 서쪽 6리에 있다.
사천(沙川) : 현의 남문 밖에 있는데, 예천군 사천의 하류이다.
토산 철 : 수정탄에서 난다. 왕골ㆍ배ㆍ은어ㆍ백화사(白花蛇)ㆍ해송자(海松子).
성곽 용비산성(龍飛山城) : 돌로 쌓았다. 둘레가 8백 71척, 높이 7척인데, 안에 샘이 세 군데 있으며,
군창이 있다.
봉수 용비산봉수 : 동으로 예천군의 서암산(西巖山)봉수에 응하고, 남으로 예천군 다인현(多仁縣)의 소이산
(所伊山)봉수에 응하며, 북으로 상주 산양현(山陽縣)의 소산(所山)봉수에 응한다.
누정 수월루(水月樓) : 객관 동쪽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맑은 때 일 없고 몸도 한가로우니, 태수는 백중(伯仲) 사이에서 서로 즐기네.
백 잔 술 실컷 마시고 누 위에 누워, 주렴 걷으니 남북이 모두 푸른 산일세."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몸도 한가롭지 못한데 하물며 마음일쏘냐. 양 볼의 수염은 문부[簿領] 사이에서 다 희여
지네. 청산에 돌아가지 못함을 부질없이 말하랴, 남쪽에 오니 청산 아닌 곳 없다." 하였다.
청원정(淸遠亭) : 전원발(全元發)의 옛날 살던 곳으로, 성화천의 동쪽 언덕에 있고, 전자(篆字)로 청원정 3자를
석벽(石壁) 위에 새겼다. 후에 금유(琴柔)가 잇따라 거처하였다.
신증 부취루(浮翠樓) : 수월루 북쪽에 있다.
○ 홍귀달(洪貴達)의 기에, "용주 사천의 맑고 얕은 것과 늪이 깊숙하고 울창함은 남주(南州)에 알려졌다.
내가 어렸을 적에 고을 사람 주씨(周氏)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매양 강독(講讀)하다가 틈만 있으면 친구들
을 데리고 자주 시내 숲 사이를 걸어다니다가 피곤하면 객사에 나아가서 휴식하였다.
고을은 남산의 북쪽 북산의 남쪽에 있어 4면이 푸르다. 문을 나서면 맑은 시냇물이 비단 펼쳐 놓은 듯이 흐르고,
물을 사이하여 깊숙한 수풀이 무성하게 서 있으니 승경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다만 그 관사의 좁고 누추함과 누대가 낮고 미약한 것이 한이었다. 그 후로 내가 조정에 벼슬하느라고
강호(江湖)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지 수십여 년이 되었는데, 시험삼아 한 번 와 보니 그 형승(形勝)은 옛날과 같
으나 누대의 조폐(凋廢)함은 더 심하여 졌으므로 대개 일찍이 산천을 위하여 탄식하였다. 홍치(弘治) 4년에 양
천(陽川) 허민(許珉) 후(侯)가 이 고을로 부임하여 이미 백성들의 이익되는 일을 일으키고 백성들의 해독을 제
거하니, 백성들은 그 즐거움을 즐기어서 더 일할 것이 없었다.
이에 산천의 좋은 경치를 두루 구경하는데, 이 누에 올라 탄식하기를, '아, 이것이 이른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천이 있는데 관우(館宇)는 이같이 누추하니 어찌 수령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관해(官廨)는 내 몸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신을 위하는 것이니 감히 혐의를 두겠는가.' 하고, 보니
객관의 동쪽 옛 누의 북쪽에 우뚝 솟은 땅이 있고 단단한 돌이 있거늘,
이에 그 단단한 돌을 뚫어내고 우뚝 솟은 땅을 평평하게 고루어서 그 위에 누를 지어, 가운데 세 채는 공좌(公坐)
의 장소로 정하고, 동서쪽 구석진 방 각 3칸은 연식(燕息)하는 곳으로 만드니, 제도가 굉걸 화려하였다.
누에서 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면 눈이 환하고 정신이 상쾌하며, 사방의 시퍼런 산들은 붕 뜨는 듯이 처마 밑에 둘
러 있다. 대개 그런 후에야 산천의 경치와 거처하는 집이 서로 어긋나지 않았다.
지방관된 자가 혹 마음이 답답하거나 정사에 막히는 일이 있어도 이 누에 오르면, 마음이 확 트이어 황연(況然)
히 깨달아지리니 오히려 또한 이로움이 있는 것이다.
누가 이미 이루어지매, 허후의 말로서 나에게 고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누는 새로워졌지만 아직 이름이 없소.
이는 그대의 옛날 놀던 곳이니, 원하건대 그대는 이름도 짓고 기도 지어 주오. 산천도 역시 그대를 바라고 있을
것이오.' 하였다. 이에 내가 예전에 본 것을 가지고 이름을 '부취'라 지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내가 20세 전에 숲과 시내를 거닐면서 논 적이 있으니, 지금 40여 년이 된다. 그 사이에 이
고을에 와서 수재(守宰)라고 칭한 자가 그 얼마였는지 알지 못하나 여태껏 지은 자가 없었는데, 우리 후에 이르
러 비로소 이룩하였으니, 산천이 사람을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이 어찌 때가 있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일은 구차스러이 해서는 안 된다. 귀한 바는 시기를 인연하고 사람에 순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산천의 형세가 좋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국가에 일이 많고 농상(農桑)이 시기를 잃어 여염(閭閻)에서 탄식
을 한다면 또한 어느 겨울에 역사를 하겠는가. 그런데도 역사를 한다면 곧 백성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어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고 어진 수령들이 주현으로 배치되어 전리(田里)가 편안
한 마음으로 일에 종사하니, 백성들은 부역에 기꺼이 나오기를 마치 아들이 아버지의 일에 좇아가듯 하는데,
어찌 나직한 누, 무너진 관사에 앉아서 산천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후의 한 번 거사하는 데에서 태평세대의 상
징과 읍사람들의 마음을 짐작할 것이니, 이것은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했다." 하였다.
○ 강혼(姜渾)의 시에, "높은 누에 하룻밤 자니 맑고 한가함을 깨닫겠고, 몸은 연기 수풀 자욱한 사이에 있네.
밤비는 정히 아름답지만 개어도 또한 좋고, 아침에 구름 걷히니 청산이 나오는도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대은역(大隱驛)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지보역(知保驛) : 현의 동쪽 35리에 있다.
천덕원(天德院) : 천덕산에 있다. 석현원(石峴院) : 현 동쪽 5리에 있다. 성화천원(省火川院) : 성화천 가에 있다.
장안원(長安院) : 현의 서쪽 9리에 있다. 용서원(龍西院)ㆍ진원(津院) : 모두 현의 서남쪽 21리에 있다.
불우 백화사(白華寺) : 천덕산에 있다. 절에 두 누가 있으니 서쪽에 있는 것을 관공(觀空), 동쪽에 있는 것을 정
당(政堂)이라고 한다.
○ 이제현(李齊賢)의 관공루 기에, "묵암탄사(黙菴坦師)가 용궁군의 천덕산에 정사(精舍 사원의 별칭)를 지었는
데, 두 누가 있다. 서쪽에 있는 누를 관공이라고 하는데, 그 문도로 호를 운수(雲叟)라고 하는 이가 기를 썼고,
동쪽에 있는 누를 정당이라고 하는데,
정당 한 재상(韓宰相)이 일찍이 남쪽 지방으로 와서 놀 때에 그 위에 오른 까닭으로 이름한 것이다.
정당이 돌아간 뒤에, 묵암탄사가 사람을 시켜 나에게 기문을 구하는 것으로서 누의 영광이 된다 하고, 그러한 후
에 스님이 잇따라 이르렀다. 내가 서로 본 다음 묻기를, '보리달마(菩提達摩)는 탑을 만들고 절을 일으키는 것으
로서 함[爲]이 있는 복으로 삼고, 독조(獨照) 상지(常知)주D-001를 참된 공덕으로 삼아 비록 천자의 높은 위엄
에 용서를 보지 못하더라도 민망히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스님은 달마를 섬기면서 도리어 건축[土木]에
노심(勞心)하여 옥실(屋室)을 장하게 하고 현달(顯達)한 사람에게 이름을 부탁하여 유관(遊觀)을 사치스럽게 하
려 하니, 거기에 대한 해설이 있는가.' 하였다. 스님은 말하기를, '이제 어떤 사람이 장차 천리 길을 가는데, 게을
러서 이끄는 자가 없으면 중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몽매해서 인도하는 자가 없으면 길은 있어도 도달하지
못한다.
내가 보건대 지금 세상에서 우리 불도들이 도를 배운다고 하는 것을 보면, 옛날 사람의 조박(糟粕)주D-02을 얻
어 가지고 거연(居然)히 방자하여 성리(聲利)에 취하니, 중도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자와 거의 비슷하지 않겠는
가. 혹 산림(山林)에서 얼고 주리면서 뜻을 극복하고 도를 깨달았으나, 열린 것이[款啓] 흐리멍텅[聽瑩]하여
올바른 도를 취할 바가 없으니, 길을 있어도 몽매한 자와 거의 비슷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를 시정하려고 발분
(發憤)해서 절을 짓고, 우리 불도들을 전부 규합(糾合)하여 성리에 취하는 폐단을 버리며, 산림에서 얼고 주리는
것을 면하게 한 것이다.
그 게으른 자는 이끌고 그 몽매한 자는 인도하면 우리 스승의 이른바 독조 상지의 이치를 반드시 깨달아 알고
의심이 저절로 풀려질 것이니, 내가 장차 우리 스승의 도를 크게 하려는것이요,
함[爲]이 있는 복을 삼으려는 까닭은 아니다. 대개 휘로(暉老)가 배상국(裴相國)주D-03, 만공(滿公)이 백 소부
(白少傅)주D-04와 서로 주고받은 문답은 총림(叢林 절)에서 거룩한 일로 전하는데, 어찌 일찍이 달관(達官)에게
부탁한 것을 혐의하겠는가. 우리 누의 이름을 한공으로부터 얻었으니, 세상은 예와 지금이 있으나 그 이치는 하
나이다.' 한다. 내가 이미 듣고 사과하면서 그 말을 써서 기한다 그 산천의 좋은 경치와, 면세(面勢)의 마땅한 것
과 경시(經始) 낙성(落成)의 세월은 운수가 이미 말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적지 않는다." 하였다.
○ 옛사람의 시에, "승경(勝景) 노니는 곳은 붙잡고 오르는 곳이 많은데, 이 절[蓮宮]은 낮은 산에 머물러 가장
좋구나. 한 물은 비단 펼친 듯 멀리 뻗쳤고, 두 고개는 옷깃처럼 그윽함을 보호한다. 부처 밖과 마음 밖을 구하지
말라, 인간은 곧 꿈속에 있는 것이네. 듣기만 하여도 누 이름 얻은 이치 알 수 있는데, 어찌 모름지기 주인 얼굴
가서 대할 것인가." 하였다.
○ 권사복(權思復)의 시에, "이름 난 절 있음은 들었어도 한 번 와 보지 못했건만, 산과 호수 좋은 건 시를 보고
알았네. 동문(洞門) 잠그지 않아도 속인 오지 어렵고, 누대 위에 주렴 걷으니 한가로운 중일세. 천고의 산수 경
치 흥폐(興廢)한 밖, 산언저리 사이에서 6시(時)로 복과 종 두드리네. 노인(老人)이 선사(禪師)의 명 거역치 못
해, 거친 글 써내니 얼굴이 붉어진다." 하였다.
○ 염흥방(廉興邦)의 시에, "우뚝한 누는 별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데, 탄공산(坦公山)엔 소나무 삼나무 가득하
구나. 용이 설법 듣고 나오니 구름은 흩어지고, 새가 경 외우고 오니 소리 다시 한가롭다.
도솔청(兜率廳) 위에 한 몸 기대고 있으니, 가부(跏趺 두 다리를 포개어 도사려 앉는 좌법이니 곧 중의 앉음새)
의 삼세(三世 전세ㆍ현세ㆍ내세)는 잠깐 사일세. 관공(觀空)주D-05의 뜻 해득하는 사람 없는데, 분명한 설법
또한 낯이 부끄럽도다." 하였다.
흥천사(興泉寺) :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양정부곡(陽井部曲) : 현의 남쪽 22리에 있다. 풍양부곡(豐壤部曲) : 현의 남쪽 13리에 있다.
하남부곡(河南部曲)ㆍ무송부곡(茂松部曲)ㆍ평구부곡(平丘部曲)ㆍ곡계부곡(曲溪部曲)
인물고려 전원발(全元發) : 응양군 민부전서(鷹揚軍民部典書) 진(璡)의 아들이고, 판도총랑(版圖摠郞) 대년(大
年)의 손자이며, 전법총랑(典法摠郞) 충경(忠儆)의 증손이다.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영록대부(榮祿大夫)
병부상서 집현전태학사(兵部尙書集賢殿太學士)를 하였고, 본국에서는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작(封爵)
되었으니, 호는 국파(菊坡)이다. 아들 한(僩)은 사복 판사(司僕判事)이고, 손자 강(强)ㆍ근(謹)ㆍ경(敬) 등은 모
두 과거에 장원하여 청환(淸宦)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다.
우거본조 조어(趙峿)ㆍ금유(琴柔)
신증효자본조 권직형(權直衡) : 연산 때에 단상법(短喪法 삼년상(三年喪)의 기한을 짧게 줄이는 법)이 엄하였는
데, 직형은 부모가 연달아 세상을 뜨니 상복을 6년이나 입고 소금과 나물을 먹지 않았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려되었다.
정산호(鄭珊瑚) : 나이 8세에 아버지가 악질(惡疾)을 얻으매 손가락을 잘라 피를 술에 타서 먹였더니 병이 곧 나
았다. 일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되었다.
제영 임단출려초(林端出麗譙) : 이규보의 시에, "용궁군에 처음 들어서니, 수풀 끝에 나오는 것 높은 누각일세.
원형으로 둘러 앉은 관기(官妓)의 웃음소리, 경쇠같이 굽은 것은 현서(縣胥)의 허리로다. 물결이 부딪치니 차운
빛이 언덕을 흔들고, 버들가지 드리우니 푸른빛이 다리[橋]에 번지는구나. 거민(居民)들 모두 편안히 살아가는
데 뱁새 또한 공중을 소요(逍遙)하는도다." 하였다.
창외군봉사조산(窓外群峯謝眺山 : 권근(權近)의 시에, "한 군의 풍연(風煙)은 10리 사이인데, 맑은 정치 간소한
형벌에 아전ㆍ백성 한가롭네. 문 앞에 곧은 길은 담대(澹臺)의 길이요주D-006, 창 밖에 뭇 봉우리는 사조(謝眺)
의 산주D-07이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방면 북면 : 끝이 15리이다. 북상(北上) : 동북쪽으로 20리이다. 성화(省火) : 서쪽으로 5리이다.
서면(西面) : 끝은 10리이다. 남상(南上) : 끝은 20리이다. 남하(南下) : 끝은 30리이다.
내상(內上) : 동쪽으로 25리이다. 내하(內下) : 동남쪽으로 25리이다. 중상(中上) : 동쪽으로 끝은 40리이다.
중하(中下) : 동남쪽으로 끝은 60리이다.
○ 양정부곡(陽井部曲)은 남쪽으로 20리이다. 풍양부곡(豐壤部曲)은 남쪽으로 15리이다. 무송부곡(茂松部曲)ㆍ
평구부곡(平邱部曲)ㆍ곡계부곡(曲溪部曲)
창고 읍창(邑倉)ㆍ사창(社倉) : 동쪽으로 40리이다. 산창(山倉) : 문경(聞慶)의 조령산성(鳥嶺山城)에 있다.
진도 하풍진(河豐津) : 서남쪽으로 20리에 큰 길이 있다.
토산 감ㆍ꿀
[주 D-001] 독조(獨照) 상지(常知) : 불경(佛經)에서 나온, “홀로 한 물(物)이 있어 항상 홀로 비추고, 담박(澹
泊)하게 죽고 사는 데에 따르지 않는다.”는 말인데, 홀로 비추는 것을 항상 안다는 것이다.
[주 D-02] 옛날 사람의 조박(糟粕) : 중국 전국 때 제 선왕(齊宣王)이 글을 읽고 있는데, 뜰에서 수레바퀴 만드
는 윤인(輪人)이 보고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의 찌꺼기만 읽는다.” 하였다. 제 선왕이 묻기를, “무슨 말이냐.”
하니 윤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선조 때부터 대대로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는데, 옛법은 능히 지킬 수 있지만 그
묘함은 이루지 못합니다.” 했다는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그 겉을 본받을 수 있어도 실질적인 깊이는 모른다는
것이다.
[주 D-03] 휘로(暉老)가 배상국(裴相國) : 휘로(暉老)는 중국 당 나라 때 중 황벽 희운선사(黃蘗希運禪師)인데,
복주(福州) 민현(閩縣) 사람이다. 어릴 때 홍주(洪州) 황벽산에서 출가(出家)하여 뒤에 천태산(天台山)에서 놀
다가 다시 경사(京師)에 가서 유학(遊學)하였다. 백장 회해(百丈懷海)를 뵈옵고 드디어 백장의 법을 이었다.
당 무종(唐武宗) 회창(會昌) 2년에 종주(鍾州)의 용흥사(龍興寺)에 머물렀다. 후에 당 나라 선종황제(宣宗皇帝)
대중(大中) 2년에 배 상국(裵相國)이 스님의 덕을 흠모해서 완릉(宛陵)에 하나의 큰 선원(禪院)을 세우고 스님
을 청하였다. 절은 개원사(開元寺)라 한다. 배 상국은 당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휴(休), 자는 공미(公美)이다
진사에 급제하여 하동현자(河東懸子)에 봉하였고, 조행이 엄숙하고 발랐다. 희운선사를 섬겼으며 전심법요
(專心法要)의 게문(偈文)을 썼다는 고사이다.
[주 D-04] 만공(滿公)이 백 소부(白少傅) : 만공(滿公)은 당 나라 중 여만선사(如滿禪師)이며, 백 소부는 당 나
라 때 사람인데, 이름은 거이(居易), 자는 낙천(樂天)이며, 소부는 그의 직함이다. 백 소부가 회창(會昌) 초에
형부상서(刑部尙書)로서 치사하고 낙경(洛京) 불광사(佛光寺)에서 향산(香山)의 여만선사를 모시고 심법(心法)
및 대승금강보계(大乘金剛寶戒)를 얻었다 한다. 원화 중년에 경조(京兆)에 흥선법당(興善法堂)을 지어 네 가지
불법을 문의하였다는 고사이다.
[주 D-05] 관공(觀空) : 불경 청정경(淸淨經)에서 나온 “빈 것을 봐도 역시 비고, 없는 위에 없어도 역시 없다.”
는 말인데, 밝고 잡념이 없다는 것이다.
[주 D-006] 문 앞에 곧은 길은 담대(澹臺)의 길이요 : 춘추 전국 때 노(魯) 나라 무성(武城) 사람인데 자는 자우
(子羽)이며, 공자의 제자이다. 논어(論語)에 자유(子遊)가 무성 수령이 되었는데, 공자께서, “네가 사람을 얻었
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사람이 있으니, 다닐 때에는 지름길로 다니지 않으며,
공무가 아니면 일찍이 언(偃: 자유의 이름)의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한 고사이다. 여기서는 담대멸명처럼 착하
고 바른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는 뜻이다.
[주 D-07] 사조(謝眺)의 산 : 중국 남제(南齊) 때 사람이다.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여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고,
문장이 맑고 고우며 초서와 예서를 잘 쓰고 5언시를 특히 잘 지었다. 삼산(三山)에 올라 경읍(京邑)을 바라보고
지은 시는 너무도 훌륭하여 심약(沈約)이 일찍이 3백년 내로 이런 시를 지은 이가 없다고 칭찬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삼산을 가리키는 뜻이다.
26권 대구도호부 大丘都護府
동으로 경산현(慶山縣) 경계까지 18리, 남으로 청도군(靑道郡) 경계까지 47리, 서로 성주(星州) 경계까지 52리,
북으로 의흥현(義興縣) 경계까지 43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달구화현(達句火縣)인데 : 달불성(達弗城)이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
으로 고쳐서 수창군(壽昌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이 경산부(京山府)에 붙였고, 인종이 현령(縣令)을
두었다. 본조 세종 때에 승격시켜 군을 삼았고, 세조 때에 비로소 진(鎭)을 두고 승격시켜 도호부(都護府)를
삼았다.
속현수성현(壽城縣) : 부의 남쪽 12리에 있다. 본래 위화군(喟火郡) 또는 상촌창군(上村昌郡)이라 하는데, 신라
경덕왕이 수창군으로 고쳤으며, 가창(嘉昌)이라고도 하였다.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이 경주
에 붙였으며, 공양왕 2년(1353)에 감무(監務)를 두어 해안현(解顔縣)을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 3년(1394)에 감무를 폐지하여 대구에 내속(來屬)시켰다가 뒤에 도로 경주(慶州)에 붙였고,
태종 14년(1414)에 다시 내속시켰다.
해안현 : 부의 북쪽 17리에 있다. 본래 치성화현(雉省火縣), 또는 미리(美里)라 하였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
으로 고쳐서 장산군(獐山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이 경주에 붙였고 공민왕이 감무를 두어 수성
감무가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 3년에 감무를 폐지하여 내속시켰다가 뒤에 도로 경주에 붙였고,
태종 14년에 다시 내속시켰다.
하빈현(河賓縣) : 부의 서쪽 37리에 있다. 본래 다사지현(多斯只縣), 또는 답지(沓只)라 했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수창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이 경산부에 붙였는데, 뒤에 내속시켰다.
또는 금호(琴湖)라고도 부른다.
진관 도호부 하나 : 밀양(密陽). 군 하나 : 청도(淸道). 현 일곱 : 경산(慶山)ㆍ하양(河陽)ㆍ인동(仁同)ㆍ
현풍(玄風)ㆍ의흥(義興)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이다. 신증 신녕(新寧)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각 1명이다.
군명 달구화(達句火)ㆍ달성(達成).
성씨본부 백(白)ㆍ하(夏)ㆍ배(裴)ㆍ서(徐)ㆍ이(李). 도(都) : 딴 곳에서 들어왔다.
하빈(河濱) 신(申)ㆍ이(李)ㆍ송(宋). 수성(壽城) 빈(賓)ㆍ나(羅)ㆍ조(曺)ㆍ혜(嵇)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수성에 옛날에 3성(城)이 있었는데,
수대군(壽大郡), 일명 양성(壤城)은 그 성(姓)이 빈이고, 구구성(句具城)은 그 성이 나이고,
잉조이성(仍助伊城)은 그 성이 조와 혜이다." 하였다.
유(柳)ㆍ장(張)ㆍ최(崔)ㆍ신(申)ㆍ유(劉)ㆍ고(高)ㆍ정(鄭)ㆍ예(芮)ㆍ진(陳)ㆍ김(金)ㆍ이(李):모두 딴 곳에서 들
어왔다.
해안(解顔) 모(牟)ㆍ백(白)ㆍ하(河)ㆍ신(申)ㆍ정(丁) :《육익》에 또한 말하기를, "성화성(省火城)은 모이고,
무가성은(無價城)은 신이고, 불좌성(佛座城)은 백과 하이고, 명성(鳴城)은 정이다." 하였다.
제(諸)ㆍ진(秦)ㆍ박(朴) : 모두 딴 곳에서 들어왔다. 한(韓) : 그 전부터 살았다. 자이(資已) 김(金) : 속(續)이다.
형승 땅의 형세가 평탄하고 넓다. 겹겹이 산봉우리가 둘러 있고 큰 내가 구불구불 얽혀 있으니,
사방에서 모이는 곳이다. : 모두 김요(金銚)의 금학루기(琴鶴樓記)에 있다.
산천 연귀산(連龜山) : 부의 남쪽 3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읍을 창설할 때 돌거북을
만들어 산등성이에 남으로 머리를 두고 북으로 꼬리를 두게 묻어서 지맥(地脈)을 통하게 한 까닭에 연귀라 고
일컬었다."고 한다.
침산(砧山) : 부의 북으로 6리에 있다.
공산(公山) : 팔공산(八空山)이라고도 일컫는데, 해안현에서 북으로 17리에 있다. 신라 때에 부악(父岳)이라고
일컫고, 중악(中岳 중국 숭산(嵩山)의 별칭)에 비겨 중사(中祀)를 지냈다.
둘러 있는 것은 부 및 하양ㆍ신녕ㆍ부계(缶溪)ㆍ인동ㆍ팔거(八莒) 등의 읍이다.
마천산(馬川山) : 하빈현에서 남으로 1리에 있는데, 일명 금성산(錦城山)이라고도 한다.
왕산(王山) : 해안현에 있다.
팔조령(八助嶺) : 수성현에서 남으로 34리에 있다. 청도군 조에도 보인다.
입암(笠巖) : 신천(新川) 가운데에 있다.
그 모양이 삿갓 같기 때문에 이름지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별이 떨어져서 돌이 되었다고 한다.
금호(琴湖) : 부의 서북으로 11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영천(永川郡) 보현(普賢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모자(母子山)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사문진(沙門津)으로 들어간다.
달천진(達川津) : 하빈현에서 동으로 16리에 있는데, 금호의 하류이다.
저탄(猪灘) : 해안현에서 남으로 5리에 있는데, 금호의 상류이다.
신천(新川) : 부에서 동으로 4리에 있다. 팔조령에서 나와서 금호로 들어간다.
성당(聖堂池) : 부에서 남으로 10리에 있다. 동안진(東安津) : 하빈현에서 서쪽으로 16리에 있다.
근원은 봉화현(奉化縣)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온다.
신증 행탄(杏灘) : 하빈현에서 남으로 10리에 있다.
불상지(佛上池) : 부에서 북으로 10리에 있다. 연화(蓮花池) : 부에서 서쪽으로 5리에 있다.
토산 붕어ㆍ은구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백복령(白茯苓)ㆍ감ㆍ잣ㆍ송이(松蕈)ㆍ죽전(竹箭) : 왕산(王山)에서
난다.
호두ㆍ입초(笠草)ㆍ지황(地黃). 신증 잉어ㆍ지치[紫草]ㆍ옻ㆍ석류(石榴)ㆍ우슬(牛膝)ㆍ구기자(枸杞子)ㆍ
인삼(人蔘)
성곽 달성(達成) :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9백 44자, 높이 4자이다.
안에 우물 셋과 연못 둘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마천산 봉수(馬川山烽燧) : 남으로 성주 화원현(花園縣) 성산(城山)에 응하고,
북으로 같은 주(州)의 각산(角山)에 응한다.
법이산 봉수(法伊山烽燧) : 수성현에 있다. 남으로 청도군 팔조현(八助縣)에 응하고, 북으로는 경산현 성산에
응한다.
누정 금학루(琴鶴樓) : 객관(客館)의 동북 모퉁이에 있다.
○ 김요(金銚)의 기문에, "옛사람이 물건에 이름 붙이기를 혹은 그 땅에 말미암고, 혹은 그 사람 이름에 말미암
는다. 파릉(巴陵)의 악양루(岳陽樓)로 말하면 그 땅 이름에 말미암았고, 저수(滁水)의 취옹정(醉翁亭 취옹은
구양수(歐陽脩)의 아호)으로 말하면 그 사람 이름에 말미암았다. 지금 금후(琴侯 금은 성, 후는 지방을 다스리
는 장관)가 정사를 맡았으며 읍에 금호(琴湖)의 이름이 있고, 누(樓)의 그림이 학이 춤추는 형상이니,
이 누에 오르면 한 거문고와 한 학이 있어서 쇄락출진(洒落出塵)주D-001하는 기상이고, 성문화명(聲聞和鳴)
주D-02하는 멋과 남풍해온(南風解慍)주D-03하는 즐거움이 있다.
금학으로써 그 누각을 이름지음이 옳겠도다. 드디어 나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내가 말하기를, '예전에
백성을 잘 다스린 사람은 덕을 숭상하고 법을 숭상하지 않았으며, 너그러움에 말미암고 사나움에 말미암지 않
았소.
언자(言子)의 현가(絃歌)의 정치주D-04, 복자(宓子)가 탄금(彈琴)하여 교화한 것주D-05, 영천(穎川)의 정치주
D-06로 말하면, 그 공효(功效)가 봉황래의(鳳凰來儀)주D-07에 이르렀으니, 옛사람의 정치를 알 것이요.
이제 후(侯)가 달구(達句)를 다스림은 신(信)이 흡족해서 사람들이 화목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공경하여
속이지 않고, 홀아비와 홀어미가 편안하여 원망하지 않고, 예악(禮樂)이 일어나서 소송(訴訟)이 적어졌으니,
덕을 숭상하고 법을 숭상하지 않으며, 너그러움에 말미암고 사나움에 말미암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하였다."
하였다.
○ 강진덕(姜進德)의 시에, "땅이 넓어 사람이 많이 살고, 다락이 높아서 시계(視界)가 밝구나. 학은 능히 구름과
함께 가고, 거문고는 달과 같이 맑구나." 하였다.
○ 일본 중 경양(慶陽)의 시에, "그림 그린 들보의 나는 듯한 가에서는 학의 여윈 그림자를 보고, 붉은 난간의 굽
은 곳에서는 거문고의 남은 소리를 듣네. 맑은 바람 밝은 달은 천년의 모습이요, 흐르는 물 높은 산은 태고(太古)
의 마음일세." 하였다.
학교 향교 : 부에서 동으로 2리에 있다.
역원 범어역(凡於驛) : 부에서 동으로 9리에 있다. 금천역(琴川驛) : 하빈현의 서쪽 1리에 있다.
낙중원(洛中院) : 부에서 남으로 3리에 있다. 대로원(大櫓院) : 부의 서쪽 6리에 있다.
사부원(沙阜院) :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관방원(觀方院) : 부에서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마천원(馬川院) : 하빈현에서 남으로 4리에 있다. 남천원(南川院) : 하빈현에서 서쪽으로 1리에 있다.
오원(梧院) : 부에서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박실원(朴實院) : 부에서 서쪽으로 26리에 있다.
불우 동화사(桐華寺) : 공산에 있다. 고려 김훤(金晅)이 지은 중 홍진(弘眞)의 비명(碑銘)이 있다.
지장사(地藏寺) : 수성현에 있다. 고려의 김황원(金黃元)의 기문이 있다.
선사암(仙槎庵) : 마천산에 있다. 암자 곁에 최치원(崔致元)이 벼루를 씻던 못이 있다.
부인사(夫人寺)ㆍ자화사(慈華寺)ㆍ파계사(把溪寺)ㆍ보리사(菩提寺) : 모두 공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부의 동쪽에 있다. 여단(厲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공산성(公山城) : 공산의 동쪽에 있는데, 부에서 30리 떨어졌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백 60척이고,
높이가 4척이며, 안에는 샘이 2, 도랑이 3개 있다.
미리사(美理寺) : 해안현에 있다. 혹은 해안을 미리라고도 한다.
견훤(甄萱)이 신라의 서울 가까운 곳에 닥쳐오니, 경애왕(景哀王)이 고려에 구원을 빌었는데, 견훤이 갑자기
신라의 서울에 들어와서 왕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고, 국고의 보배와 무기를 다 취하였고, 자녀들과
여러 공장 중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따라서 귀의하였다. 고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으로 공산 아래
미리사 앞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우니, 장군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죽고 여러 군대가 패배하여 태조
는 겨우 몸을 피하였다.
자이소(資已所) : 해안현에서 북으로 20리에 있다.
성불산 고성(成佛山古城) : 수성현에서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51척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명환본조 금유(琴柔)ㆍ옥고(玉沽) : 모두 군수였다. 군의 아전 배설(裵泄)이 교활하고, 눈치가 빠르고 민첩하며
법률 조문을 멋대로 해석하며 남용하여 수령들이 많이 그에게 의지해서 정치를 했는데, 배설이 만년에 남에게
말하기를, "전후의 수령들을 내가 모두 거느리고 살았는데, 오직 금유와 옥고는 모시고 살았다." 했다.
신증 신엄(申嚴)인물고려 빈우광(賓于光) : 수성현 사람으로,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또 중국 과거에 3등으로
합격했다.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이익과 영달을 구하지 않고 산수(山水)로써 스스로 즐기면서 생애를
마쳤다. 필법(筆法)이 당대에 이름났다.
배정지(裵廷芝) : 충렬왕 때에 인후(印侯)를 따라 연기현(燕岐縣)에서 합단(哈丹)을 쳤는데, 칼을 빼어 말을 달
리니 가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 화살이 날아와서 보거(輔車 광대뼈와 아랫이틀 사이)를 꿰뚫자 상처를 싸매
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목 자른 것이 매우 많았다. 생김새가 멀쑥하고 장대하였으며, 사람들이 모두 그의 무략
(武略)에 탄복했다. 입으로는 이익을 말하지 않았으며, 관직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서균형(徐鈞衡) : 관직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본조 서거정(徐居正) : 갑자과(甲子科)에 합격하고 또 중시(重試)ㆍ발영(拔英)ㆍ등준(登俊)의 3과에 뽑혔다.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들었고, 관직은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달성군(達成君)을 봉하고, 시호는 문충
(文忠)이다. 시문(詩文)을 지음에 어휘가 풍부하고 민첩하여 저술한 것이 많고, 홍문관 대제학이 된 것이 모두
26년이었다. 중국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祁順)이 일찍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는데, 거정이 접반사(接伴
使)가 되어 시를 주고받되 붓을 멈추지 않자 기순이 탄복했다. 사신이 돌아가서 그 재능을 칭찬하고,
우리 사신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안부를 물었다.
《사가집(四佳集)》ㆍ《동인시화(東人詩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태평한화(太平閑話)》가 있어 세상
에 전한다.
효자고려 하광신(夏光臣) : 명종 때 사람인데, 어머니를 섬기기에 효성을 지극히 하고,
여묘(廬墓)살이를 3년 하였다. 태정(泰定) 계묘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조희삼(曺希參) : 수성현 사람인데, 관직은 군기소윤(軍器少尹)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15년(1382)에 어머니
를 부축하고 왜란을 피하였는데, 경산부 가리현(京山府加里縣)에 이르러 강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는데, 적이
쫓아오니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죽어도 후회가 없다. 너는 말을 달려 피하는 것이 옳다."
하니, 희삼이 말하기를 , "어머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가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그 어머니와 더불어 밭 사이에
숨었는데, 적이 칼을 뽑아 그 어머니를 치려하자, 희삼이 몸으로 가려서 적에게 죽고 어머니는 죽음을 면하였다.
김한(金閑) : 해안현 사람이다. 어릴 때 그 아버지가 죽었는데, 늘 상례(喪禮)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
더니, 어머니가 죽자 여묘살이 3년을 마치고, 그 아버지를 이장(移葬)하고 또 3년을 살았다. 나무로 부모의 모습
을 새겨서 두 무덤 사이게 두고 큰 농(籠)을 짜서 그 앞에 놓고 그 속에서 살았는데, 부모의 나서 길러주고 보살
펴준 은혜를 생각하여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어떤 큰 호랑이가 농 곁에 왔으나 오히려 움직이지 않자 호랑이는
얼마 있다가 가버렸다.
채순(蔡順) : 수성현 사람이다. 어머니가 죽었으나 아버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무덤을 지킬 수 없었는데, 아버지
가 죽자 여묘살이하고 이듬해 그 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이장하여 아침 저녁 상식을 올려 6년에 마쳤다.
본조 박득춘(朴得春) : 해안현(解顔縣) 사람이다. 부모를 위하여 여묘살이 6년을 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중추원 녹사(錄事) 벼슬을 내리고 정려했다.
열려본조 서씨(徐氏) : 낭장(郞將) 김내정(金乃鼎)의 아내이다. 나이 24세에 내정이 죽었는데, 절개를 지켜 두
남편을 섬기지 않았다. 태종 때에 정려하고 복호(復戶 부역을 면해 줌)하였다.
제영 영각서풍청(鈴閣暑風淸) : 금유의 시에, "군(郡)을 위해 몸이 피곤하더니, 다락에 오르니 눈이 트이네.
금호에 새 물이 가득하고, 영각에 여름 바람이 맑네. 감히 현가(絃歌)의 정치를 바랄까마는, 조수(組綬)주D-
008의 영달일랑 뽐내지 마라. 3년토록 조금도 공이 없으니, 붓을 놀려 부질없이 정만 머금네." 하였다.
십영(十詠) : 서거정의 시이다. 금호범주(琴湖泛舟) : "금호의 맑고 얕은 곳에 난주(蘭舟 목란(木蘭)으로 만든
배로 일반적으로 놀잇배를 뜻함)를 띄우니, 차츰 한가히 가서 백구(白鷗)에 가까울사. 한껏 취해 달 밝은데 노저
어 되돌아가니, 풍류란 반드시 오호(五胡 중국의 경치 좋은 다섯 호수)에 노는 것이 아닐세." 하였다.
입암조어(笠巖釣魚) : "가랑비 자욱히 가을 물가에 내리는데, 낚싯줄 드리우고 홀로 앉아 하염없이 생각하네.
잔 고기는 낚싯밥 아래 다소 있음을 알겠는데, 금오(金鼇)를 낚지 못해 멈추지 않네" 하였다.
귀수춘운(龜岫春雲) : "거북 봉우리가 흐릿하여 큰 자라 봉우리 같구나. 구름이 무심히 나온다지만 또한 뜻이
있더라.대지의 생령(生靈)들이 바야흐로 바라고 있는데, 뜻 없이 단비를 만든다 하랴." 하였다.
학루명월(鶴樓明月) : "한 해 열두 번 둥근 달 중에, 추석에 한껏 둥근 달을 기다려 얻네. 또한 긴 바람이 구름
쓸어 가버리니, 온 다락에 조그만 요기(妖氣)도 붙일 곳 없네." 하였다.
남소하화(南沼荷花) : "물에 돋아난 어린 연꽃은 작은 돈짝을 겹쳐 놓은 듯한데, 꽃이 피면 끝내 배[船] 보다
크네. 재질이 커서 쓰이기 어렵다 말하지 마라, 고질병을 보내어 만성(萬姓)을 고치기에 알맞으니." 하였다.
북벽향림(北壁香林) : "옛벽의 푸른 향나무는 옥삭(玉槊 옥으로 만들거나 혹은 옥색의 창(槍))같이 길고, 긴
바람이 끊임없어 사시(四時)에 향기롭구나. 은근히 다시 가꾸어 힘을 붙이면, 머물러 맑은 향기를 온 고장에
함께 할 수 있으리." 하였다.
동사심승(桐寺尋僧) : "멀리 절에 올라가는 돌층계 길엔, 등나무에 흰 버선에 또 검은 지팡이로다. 이렇게 흥겨
운데 알아주는 이 없네. 하기야 흥이 청산(靑山)에 있지 중에 있진 않거니." 하였다.
노원송객(櫓院送客) : "관도(官道 국도(國道))에 해마다 버들 빛이 푸르고, 단정(短亭 짧은 거리에 있는 주막)이
수없이 장정(長亭)을 이었네. 양관곡(陽關曲 이별곡) 다 부르고 각각 흩어지니, 모래밭 가에 두 흰 술 병만 누었
구나." 하였다.
공령적설(公嶺積雪) : "공산 천 길에 울퉁불퉁 산이 겹쳐 의지했는데, 쌓인 눈이 하늘을 적셔 이슬이 맑구나.
신사(神祠)에 신령이 응당 있음을 알겠고, 해마다 삼백(三白 정월에 내리는 눈)이 내려 풍년을 얘기하네." 하였
다.
침산만조(砧山晩照) : "물은 서쪽에서 산 밑으로 흐르고, 침산은 푸르러 맑은 가을에 붙었구나.
저녁바람에 어디에서 방아 소리가 급한고, 비낀 해에 일임하여 나그네의 수심을 찧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고읍 풍각(豐角) : 남으로 70리인데, 동남쪽으로는 밀양(密陽)과 50리 떨어져 있다. 본래 신라 상화촌(上火村)
인데,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유산(幽山)으로 고쳐 화왕군(火王郡)의 영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 풍각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1018)에 밀성(密城)에 속했으며, 본조(本朝) 현종 조에 내속했다.
화원(花園) : 서남쪽으로 30리이며, 서쪽으로 성주(星州)와 70리 떨어져 있다. 본래 신라의 설화(舌火)인데,
경덕왕 16년에 화원으로 고쳐 수창군(壽昌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경산부(京山府)에 속
했으며, 후에 본부(本府)로 옮겨 속하고, 그 후에 경산부로 다시 속했다. 본조 숙종조에 다시 본부로 속하게 하
고 읍호(邑號)를 금성(錦城)이라 하였다.
방면동상(東上) : 끝은 5리이다. 동중(東中) :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동하(東下) :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서상(西上) : 끝은 5리이다.
서중(西中) :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서하(西下) :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감물천(甘勿川)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옥포(玉浦) : 서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월배(月背)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조암(阻巖)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25리이다.
법화(法華) : 서남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성평곡(省平谷) : 서남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5리이다.
수현내(守縣內) : 동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수동(守東) : 동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수북(守北) :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상수남(上守南) : 남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하수남(下守南) : 남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상수서(上守西)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하수서(下守西) : 남쪽으로 처음은 8리이고, 끝은 10리이다.
○ 앞의 7면은 수성(壽城) 고현 땅이다. 해동촌(解東村) :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해북촌(解北村) : 북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해서부(解西府)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해서촌(解西村) : 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 앞의 4면은 해안(解顔) 고현 땅이며, 지금은 금호강(琴湖江) 북쪽이다.
하동(河東)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하서(河西) : 서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하남(河南) : 서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하북(河北) : 서북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다.
○ 앞의 4면은 하빈(河濱) 고현 땅이며, 금호강 북쪽에 있다.
각현내(角縣內) : 남쪽으로 끝은 70리이다.
각북(角北) : 남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70리이다.
각초동(角初同) : 남쪽으로 처음은 70리이고, 끝은 1백리이다.
각이동(角二同) : 남쪽으로 처음은 80리이고, 끝은 1백 리이다. 각남(角南) : 남쪽으로 처음은 70리이고,
○ 앞의 5면은 풍각(豐角) 고현 땅이다. 화현내(花縣內) : 서남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35리인데,
즉 화원(花園) 고현 땅이다.
○ 두야보부곡(豆也保部曲)은 풍각 고현에 있다. 자이소 해안현(資已所解顔縣)은 북쪽으로 20리이다.
성지 읍성(邑城) : 본조 영종(英宗) 12년(1736)에 쌓았으며, 둘레가 2천 1백 24보이고, 우물이 다섯이다.
성불산 고성(成佛山古城) : 수성(壽城) 고현 서쪽 10리이다. 둘레가 3천 51척이다.
마천산 고성(馬川山 古城) : 서쪽으로 35리이다. 하빈(河賓) 고현 남쪽 1리에 유지(遺址)가 있으며,
금성(錦城)이라 부른다.
화원 고성(花園古城) : 고현 북쪽 5리에 있으며, 성산(城山)이라 부른다. 구위성(舊倭城).
영아 순영(巡營) : 태조(太祖) 원년(1392)에 안렴도관찰(按廉都觀察) 출척사(黜陟使)의 영(營)을 상주(尙州)에
설치했다. 태종(太宗) 원년(1400)에 다시 안렴사(按廉使)를 삼았고, 세조(世祖) 11년(1465)에 고쳐서 관찰사
(觀察使)라 불렀다. 중종(中宗) 13년(1518)에 본도의 일이 번잡하다 하여 좌우도 관찰사(左右道觀察使)로 나누
었는데 동년에 다시 합했다. 선조(宣祖) 25년(1592)에 왜적이 모략질하고 약탈하여 도로가 불통하였으므로 또
좌영과 우영으로 나누었는데, 좌영은 경주(慶州)에 설치하고, 우영은 상주(尙州)에 설치하였다가 26년에 다시
합쳐 영(營)을 성주(星州)의 팔거(八莒) 고현에 설치하니, 즉 총병(總兵) 유연(劉綖)이 진(陣)을 주둔했던 곳이
다. 28년에는 땅이 넓어 다스리기가 곤란하다고 하여 다시 좌우로 나누었으며 29년에 다시 합하여 달성(達城)
에 영을 설치하고 이어 석축(石築)을 더하였다. 30년에는 병화(兵火)로 인하여 또 파했는데,
31년에 관찰사 한준겸(韓준謙)과 체찰사(體察使) 이덕형(李德馨)이 대구(大邱)와 성주(星州)를 한 도(道)로 하
니, 백성의 피폐함이 가시지 않으므로 안동부에 유영(留營)하자고 하였다.
34년에는 체찰사가 다시 본부(本部)로 영을 옮기자고 청하였다.
관원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 (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大邱都護府使)와 도사 중군 겸
토포사 심약검률(都使中軍兼討捕使審藥檢律) : 각각 1명이다.
○ 중영(中營)은 인조(仁祖)조에 설치했다. ○ 중영장 1명이다.
○ 속읍(屬邑)은 밀양(密陽)ㆍ인동(仁同)ㆍ칠곡(漆谷)ㆍ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하양(河陽)ㆍ현풍(玄風)ㆍ
신녕(新寧)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ㆍ의홍(義興)ㆍ자인(慈仁)이다.
봉수 성산(城山) 봉수 : 화원(花園) 고현이며, 북쪽으로 5리이다.
창고 사창(司倉)ㆍ영창(營倉)ㆍ수성창(修城倉)ㆍ고륙(庫六) : 모두 읍내에 있다.
남창(南倉) : 남쪽으로 15리이다.
하창(河倉) : 하서면(河西面) 낙동강(洛東江) 가이다.
강창(江倉) : 금호(琴湖)가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남쪽 연안이다.
풍찰(豐倉) : 풍각(豐角) 고현에 있다. 해창(解倉) : 북쪽으로 10리이다. 화원창(花園倉) : 고현 남쪽에 있다.
대혜창(大惠倉) : 선산(善山)에 있다. 팔거창(八莒倉).
역참 설화역(舌火驛) : 화원 고현 서쪽 5리이다. 유산역(幽山驛) : 풍각 고현에 있다.
보발(步撥)ㆍ관문참(官門站)ㆍ오동원참(梧桐院站).
진도 사문역(沙門驛) : 금호강(琴湖江)이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며, 서쪽은 성주(星州)와 통한다.
금호진(琴湖津) : 서북쪽으로 10리이며, 북쪽은 칠곡(漆谷)과 통한다.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토산 입초(笠草).
누정 관풍루(觀風樓)ㆍ척금루(滌襟樓)ㆍ점풍루(占豐樓)ㆍ읍북루(挹北樓):모두 읍내이다.
임수정(臨水亭) : 서남쪽으로 35리이다. 하목당(霞鶩堂) : 낙동강가 경치가 훌륭하다.
사원 연경서원(硏經書院) : 명종(明宗) 갑자년(1564)에 건립하고, 현종(玄宗) 갑자년(1660)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 문묘 조에 보인다. 정술(鄭述) : 충주(忠州) 조에 보인다.
정경세(鄭經世) : 상주(尙州) 조에 보인다.
○ 낙빈서원(落濱書院) : 숙종 기미년(1679)에 건립하고 갑술년(1694)에 사액하였다.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門)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 모두 과천
(果川) 조에 보인다.
○ 표충사(表忠祠) : 현종 경술년(1670)에 건립하고 숙종 정묘년(1687)에 사액하였다.
신숭겸(申崇兼) : 마전(麻田) 조에 보인다. 김낙(金樂) : 순천 사람으로,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주 D-001] 쇄락출진(洒落出塵) : 쇄락은 물뿌린 듯이 차고 모습이 깨끗한 것이요,
출진은 더러운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주 D-02] 성문화명(聲聞和鳴) : 성문은 학이 깊은 못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는 뜻이요,
화명은 학이 그늘에서 우니 그 새끼가 화답해 운다는 뜻이다.
[주 D-03] 남풍해온(南風解慍) : 순(舜) 임금의 거문고 가락 남풍가(南風歌) 중에,
“여름 바람의 향기로움이 우리 백성의 걱정을 풀어줄 만하다.[南風之薰兮可以解吾民之慍兮]”에서 온 말.
[주 D-04] 언자(言子)의 현가(絃歌)의 정치 : 공자의 제자 언언(言偃)이 무성(武城)의 원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교화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 D-05] 복자(宓子)가 탄금(彈琴)하여 교화한 것 : 공자의 제자 복불제(宓不齊)가 단보(單父)의 원이 되어
거문고를 타면서, 관아의 당(堂)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도 잘 다스렸다는 고사가 있다.
[주 D-06] 영천(穎川)의 정치 : 한(漢) 나라의 황패(黃霸)가 영천 태수로 선치하여 한 나라 때에 가장 백성을
잘 다스린 사람으로 이름이 있었다.
[주 D-07] 봉황래의(鳳凰來儀) : 《서경(書經)》에, “소소(簫韶: 순 임금의 음악)가 9악장(樂章)을 마치니,
봉황이 와서 거동하였다.[簫韶九成鳳凰來儀]”고 하였으니, 곧 예악의 극치를 말한다.
[주 D-008] 조수(組綬) : 벼슬을 하여 귀하게 됨을 뜻한다.
밀양도호부 密陽都護府
동으로는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 49리, 언양현(彦陽縣) 경계까지 93리,
남으로는 김해부(金海府)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는 영산현(靈山縣) 경계까지 38리, 북으로는 청도군(淸道郡)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1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추화군(推火郡)인데, 경덕왕이 밀성군(密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는 그대로 부르다
가, 성종이 밀주 자사(密州刺史)로 고쳤고, 현종이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로 일컬었고,
충렬왕 원년(1274)에 이 군 사람 조천(趙仟) 등이 수령을 죽이고 진도(珍島)의 반적(叛賊)에 호응했으므로
낮추어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하여 계림(鷄林)에 붙였다가, 뒤에 밀성현으로 불렀고, 11년에 높여서 군으로
하였다가, 얼마 안 되 또 낮추어 현으로 했고, 공양왕이 증조할머니 박씨(朴氏)의 고향이므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높여서 부로 하였다.
본조 태조 때에 도로 밀성군으로 하였다가, 뒤에 중국에 입조(入朝)한 환자(宦者) 김인보(金仁甫)의 고향이므로
다시 높여서 부로 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태종 때에 도로 군으로 하였다가,
뒤에 준례에 따라 도호부로 하였다.
속현 수산현(守山縣) : 부에서 남으로 40리에 있다. 본래 천산부곡(穿山部曲)인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으로 하였고, 현종 때에 부에 내속(來屬)하였다. 은산(銀山)이라고도 한다.
풍각현(豐角縣) : 부에서 서북으로 50리에 있다. 본래 상화촌현(上火村縣)인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 9년(1668)에 내속하였다. 유산(幽山)이라고도 한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각 1명씩이다.
신증 지금 임금 13년(1518)에 부의 사람으로 그 아버지를 죽인 자가 있어서 낮추어 현으로 하고,
부의 땅을 갈라서 청도ㆍ경산(慶山)ㆍ영산ㆍ현풍(玄風) 등의 읍에 나누어 붙였다가, 17년에 복구하였다.
군명 추화(推火)ㆍ밀성(密城)ㆍ밀주(密州)ㆍ귀화(歸化)ㆍ응천(凝川)ㆍ밀산(密山).
성씨본부(本府) 손(孫)ㆍ박(朴)ㆍ변(卞)ㆍ김(金)ㆍ조(趙)ㆍ변(邊)ㆍ양(楊)ㆍ당(唐) : 절강(浙江) 명주(明州)에서
왔다. ○ 인물 조에 상세히 있다. 이(李)ㆍ최(崔)ㆍ윤(尹)ㆍ조(曺) : 모두 내(來)이다.
풍각(豐角) 노(魯)ㆍ전(田)ㆍ유(劉)ㆍ부(斧)ㆍ태(苔). 김(金) : 청도에서 왔다.
수산(守山) 서(徐). 손(孫) : 금주(金州)에서 왔다.
내진(來進) 변(卞)ㆍ박(朴). 두야보(豆也保) 백(白)ㆍ노(魯)ㆍ박(朴) : 속(續)이다. 금음물(今音勿) 제(諸).
이동음(伊冬音) 제(諸). 윤(尹) : 철원에서 왔다.
풍속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한다. :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밭에서 농사에 부지런하다. : 김주(金湊)의 영남루기(嶺南樓記)에 있다.
형승 긴 내를 굽어 당기고 넓은 들을 평평히 머금고 있다. : 김주의 기문에 있다. 큰 강이 비껴 흐르고 늘어 선
봉우리가 겹쳐 에워쌌다. : 성원도(成元度)의 영남루시의 서문에 있다.
먼 봉우리는 하늘에 떠 있고, 긴 강은 뉘어(練) 놓은 듯하다. : 권람(權擥)의 덕민루기(德民樓記) 기문에 있다.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요, 잇닿 봉우리와 겹친 봉우리이다. : 권기(權技)의 소루기(召樓記)에 있다.
산천 화악산(華嶽山) : 둔덕(屯德)이라고도 하는데, 부의 북쪽 19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추화산(推火山) : 부의 동쪽으로 5리에 있다. 비슬산(琵瑟山) : 풍각현의 서북 30리에 있다.
우령산(牛齡山) :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재악산(載嶽山) : 부의 동쪽 41리에 있다.
만어산(萬魚山) :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자씨산(慈氏山) :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귀령산(龜齡山) : 수산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려 인종이 여기에 태(胎)를 묻었다.
실혜산(實惠山) : 부의 동쪽 31리에 있다. 천화령(穿火嶺) : 부의 동쪽 93리에 있다.
호법현(湖法峴) : 부의 서북 37리에 있다. 영현(鈴峴) :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나현(羅峴) : 부의 서쪽 15리에 있으며, 아현(阿峴)이라고도 부른다.
고암산(高巖山) : 부의 서쪽 9리에 있다. 그 남쪽에 일현(日峴)이 있다.
용두산(龍頭山) :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율림(栗林) : 응천(凝川)의 남쪽 기슭에 있다.
운례수(運禮藪) : 부의 남쪽 6리에 있다.
마암(馬巖) : 부의 서쪽 6리에 있다. 바위가 응천으로 쑥 들어가서[斗入] 모양이 물을 마시는 말[馬]과 같은 까
닭에 이름지었으며, 그 아래에 깊은 못이 있다. 해양강(海陽江) : 부의 남쪽 34리에 있다. 일명 뇌진(磊津)이고,
김해(金海)와의 경계이다.
응천(凝川) : 부의 남쪽 성(城) 밑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청도군의 동쪽에 있는 운문산(雲門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풍각현의 북쪽에 있는 비슬산에서 나와서 청도군 유천역(楡川驛) 곁에 이르러 합류하여 부의 성
(城)의 남문(南門)을 지나 해양강으로 들어간다.
월영연(月盈淵) :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재악의 물이 추화산 동쪽에 이르러 응천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수산진(守山津) : 수산현에서 서쪽으로 1백 보 가서 있다. 구연(臼淵) : 천화령 아래에 있는데, 둘레가 1백여 자
이다. 폭포가 돌에 떨어져 움푹 파여서 못의 모양이 꼭 절구와 같은 까닭에 이름지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
"용이 있으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데, 가뭄에 범의 머리를 집어넣으면 물을 뿜어서 곧 비가 된다." 한다.
삽포(鈒浦) : 부의 동쪽 51리에 있다.
우도(牛島) : 응천 가운데에 있다. 내진천(來進川) : 내진향(來進鄕)에 있다. 근원이 화악산에서 나와 수산진으로
들어간다.
용진(龍津) : 부의 남쪽 36리에 있다. 수산진의 하류이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8월의 용진 강물이 평평하고, 물가[渚]가 맑고 모래가 희어서 눈이 더욱 밝네.
물을 거슬러 곧바로 올라가니 밀물이 멀어지고, 양 기슭의 푸른 산이 길손을 전송하네." 하였다.
양량지(陽良池) : 양량부곡(陽良部曲)에 있다.
토산 종이ㆍ차ㆍ젓대 : 영정사(靈井寺)에서 난다. 죽전(竹箭) : 용두산에서 난다. 은구어ㆍ황어ㆍ붕어ㆍ송이ㆍ
석심(石蕈)ㆍ석류. 밤 : 앞 교외에 밤나무 숲이 있어 몇 리에 가득 찼는데, 해마다 수확이 매우 많고 그 품질 또
한 좋아서 세상에서 밀율(密栗)이라고 부른다. 옻ㆍ벌꿀ㆍ지황ㆍ복령ㆍ반석(班石) : 북정리(北亭里)에서 난다.
신증 삼ㆍ웅어ㆍ천문동(天門冬)ㆍ농어ㆍ닥나무.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6백 70척이요, 높이가 9척이다. 안에 우물 넷과 한 못이 있다.
성화(成化) 15년(1479)에 쌓았다.
봉수 남산 봉수(南山烽燧) :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남으로 김해부의 자암산(子巖山)에 응하고,
북으로 추화산에 응한다. 추화산 봉수(推火山烽燧) : 남으로 남산에 응하고, 북으로 분항(盆項)에 응한다.
분항 봉수(盆項烽燧)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남으로 추화산에 응하고, 북으로 청도군의 남산에 응한다.
누정 영남루(嶺南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바로 옛 영남사(嶺南寺)의 작은 누각인데, 절은 없어졌다.
지원(至元) 을사년에 김주(金湊)가 군수가 되어 예전대로 고쳐 세우고, 인하여 절의 이름으로써 이름지었다.
뒤에 부사 안질(安質)이 중수하였다. 천순(天順) 경진년(1460)에 부사 강숙경(姜叔卿)이 또 중수하여 옛 규모를
넓히니, 크고 아름답기가 비길 데가 없다.
○ 고려 김주의 기문에, "밀성군은 경상도에서 이름난 고장으로 그 해우(廨宇 관공서의 청사) 동쪽에 누각이 있
어 영남(嶺南)이라 하는데, 긴 강을 굽어보며 끼고 있고 넓은 들을 평평히 머금고 있어서 더욱 온 군에서 경치
좋은 곳이다. 을사년 봄에 내가 서울을 나와서 군수가 되어 일을 보는 여가에 이 누각을 보았는데,
규모가 좁아 집이 작고 추녀가 짧아 바람이 비끼면 비가 들어오고 해가 기울면 볕이 들어와서, 누각에 오르는
것을 즐긴다 하여도 메마르고 축축함을 제거할 수 없으므로 낡은 것을 고치려고 모두 다 걷어버리려고 생각하
나, 공장(工匠)을 얻기 어려워서 군 사람들에게 물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군노(郡奴) 한 사람이 평소에 훌륭한
공장이라 일컬어졌는데, 이미 늙고 또 병들어 일을 맡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누워서 지시할 수는 있습니다.'
하기에, 내가 곧 아전을 보내서 불러다가 그 까닭을 말하고, 진양(晉陽 진주(晉州))에 보내서 촉석루(矗石樓)의
제도를 그림으로 그리게 했더니, 돌아옴에 미쳐서는 병이 비로소 조금 나았다.
또 일꾼들을 거느리고 산에 들어가 재목을 거두니 날로 조금씩 힘이 붙어 일어나서 걸을 수 있게 되어 그 척도
(尺度)를 헤아리고 승묵(繩墨)을 보고, 그 일을 마치게 되어서는 드디어 아주 병이 나았으니 이 어찌 천행이
아니랴.
집을 네모지게 넓히고 추녀를 겹쳐서 깊게 하니, 마루와 기둥이 넓고 높아서 바람과 비를 물리치게 되었다.
이윽고 단청을 하니,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았다.
그런 뒤에 바람과 비가 닥쳐도 근심하지 않고 뙤약볕의 뜨거움을 근심하지 않았다. 손님과 주인이 함께 기뻐하
며 술을 서로 권하고 받았는데, 돌아다니고 움직이고 가만이 있기에 오히려 여지가 있고 올라가서 글을 읽으면
가슴속이 후련하니, 대개 좋은 경치의 고상한 멋을 더한 까닭이다.
교대하여 조정으로 돌아가서 8년이 지난 암자년에 외람되게 안부(按部)에 뽑히고, 또 18년이 지난 기사년에 또
한 관찰사의 임무를 받고 와서 이 다락에 오르니, 이미 두 번이 된다. 돌아다보니 산천은 옛날과 같으나 누각이
더욱 새로움에 감탄했다.
산은 멀고 들은 넓으며 물은 멀고 하늘은 길며, 바람과 구름이 모습을 바꾸어 봄ㆍ여름으로 다르게 보이는 것은
참으로 조화(造化)가 무궁한 것이요, 농부가 밭에서 부지런하고 목동이 들에 가축을 놓아 먹이며, 고기잡이가
물에서, 나무꾼들이 산에서 등을 구부리고 가고오는 것이 앞뒤로 잇따르고 사람의 일이 그 사이에서 대사(代謝)
하는 것은 또한 조화와 더불어 무궁한 것이다. 예전에 내가 군수가 되었을 때는 나이가 젊고 기개가 날카로웠고,
나와서 안찰하게 되어서는 이미 예전 같지 않았다. 하물며 오늘날에 와서는 또 더욱 쇠약하였다.
24년 남짓을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회상하니, 윤택하던 얼굴이 변해서 푸르죽죽해지고 검던 머리가 바뀌어 희끗
희끗 해져서 다락 안의 보이는 것은 다 옛날에 보던 것인데 다락 안에서 보는 사람은 이미 옛 모습이 아니다.
어찌 바람을 쏘이면서 몹시 탄식하지 않을 수 있으랴. 비록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소감 중에 작은 것일 뿐이다.
예컨대 군수이던 날에는 지위가 낮아 힘이 작았고, 안부가 되어서는 지위가 이미 높아져 힘이 커져서 당시에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지금에 와서는 지위가 더 높아져 힘 또한 커졌으므로 더욱 세상에서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
한 도(道)의 권세를 조종하고 12년이란 오랜 세월을 겪었는데도 한 가지 일도 나라를 돕고 백성에게 넉넉하게
하여 뛰어나게 이목(耳目)에 있고 밝고 밝게 금석(金石)에 새겨, 이 다락의 경치와 더불어 함께 무궁한 후세에
드리울 만하게 하지 못한 것으로 말하면 더욱 한탄할 일이다. 때문에 벽에 적어서 내 뜻을 털어놓는다."
하였다.
○ 신숙주(申叔舟)의 기문에, "밀양 군수 강숙경(姜叔卿) 군이 영남루를 새롭게 하고 나서, 글을 나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다락이 읍의 좋은 구경거리인데 좁고 기울어져서 이름에 걸맞지 않더니, 지금 새롭게 하여 모두 3채
를 더 달아서 두르고 단청을 베푸니, 사치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형님이 일찍이 기문을 지어주기로
허락하고서 이루지 못했는데, 우리 형을 알기로는 당신만한 이가 없으니,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아, 기문이 가보지 않고 멀리서 되겠는가. 강군은 진산(晉山) 문경공(文景公)의 한배 아우이다. 임금께서 공을
정승으로 임명하면서, 공의 어머니가 진주(晉州)에 있는데 늙어서 데려갈 수 없음을 불쌍히 여겨 밀양이 진주
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군을 내보내 군수로 삼아 봉양하게 하고, 또 공에게 한 해에 한 번씩 근친하도록 허락하
였다.
경진년에 공이 근친갔다 돌아와서 내게 말하기를, '내 아우가 관리가 되어서 은혜롭게 하지 않는데도 사랑받고
가혹하게 하지 않았는데도 두려워하며, 일이 닦여져 폐해졌던 것을 일으켰다.
이에 그 낡은 다락을 새롭게 하니 크고 넓기가 비할 데 없고, 큰 공사를 하는데 독촉하지 않아도 모여드니,
그 관리 노릇하는 것이 참으로 내가 미칠 수 없는 바이다. 내가 그 잘하는 것을 기뻐하여 기문 짓기를 허락하고
이미 초고를 지었다.' 하고, 장차 보여주려고 하였는데, 공이 곧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의 아들 윤범(允範)에게 초고에 대해 물으니 모른다고 한다. 아, 아깝다. 이제 군의 글을 받고 보니, 먼 것을
어렵게 여길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차마 기를 짓겠는가. 그러나 또한 기문을 지어서 공의 뜻을 맺지 않고 견딜 수
도 없다.
내가 공을 따른 것이 수십 년인데, 남에 대해 헐뜯고 칭찬하기를 가벼이 하는 것을 일찍이 못 보았는데 하물며
친아우임에랴. 군의 잘한다는 것은 역시 믿을 수 있다. 대저 은혜롭게 하지 않았는데도 사랑받는 것은 인자한
은혜가 있기 때문이요, 가혹하게 하지 않아도 두려워하는 것은 중한 위엄이 있기 때문이요, 일을 닦아 폐해졌
던 것을 일으키는 것은 정치의 민첩함이니, 인자함과 위엄이 함께 드러나고 민첩함으로써 행하며, 그 미치는
바가 어찌 한 다락에 그치고 말 것이며, 한 고을에 그치고 말 것이겠는가. 이는 참으로 적지 않을 수 없다.
하물려 영남은 예전에 신라의 땅이었다. 고을이 된 것이 크고 작은 것 60여 관청인데, 누(樓)ㆍ사(榭)ㆍ대(臺)ㆍ
관(觀)이 없는 곳이 없으나, 대체로 다 보이는 것으로 뜻을 취하여 이름지었는데, 홀로 이 다락만이 영남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그 강산의 좋은 경치의 아름다움이 영남에서 으뜸이기 때문이니, 올라가 볼 것도 없이 멀리서
도 알겠다.
특히 그 강산의 형세가 좋고 이제 영남루가 크고 넓은 것으로써 또한 강산으로 하여금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
지 못하게 하기 충분하니, 이에 또한 적을 만하다." 하였다.
○ 성원도(成元度)의 시 서문에, "내가 사방에 유람하면서 누관(樓觀)의 좋은 것을 관람한 것이 많은데, 반 걸음
도 못 가서 올라가 멀리 바라보이는 것이 확 트여 끝이 없는 것으로는 이 다락만한 것이 없었다.
남방의 아름다운 것으로는 복주(福州)의 영호루(暎湖樓), 울주(蔚州)의 대화루(大和樓), 금주(金州)의 연자루
(燕子樓),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 협주(陜州)의 함벽루(涵碧樓)인데, 모두 이 다락에 비견할 수 없고,
여강(驪江)의 청심루(淸心樓), 평해(平海)의 망사루(望槎樓), 단양(丹陽)의 봉소루(鳳韶樓)로 말하면 그 사이에
서 우열을 겨룬다고 할 수 있다.
이 다락이 군의 길 곁에 자리잡아 북으로 소나무 언덕에 의지하고 서쪽으로 관도(官道)에 임했는데 큰 강이 그
사이에 비껴 흐르고, 늘어서 있는 봉우리가 삼면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고 넓은 들이 아득하고 평평하기가 바둑
판 같은데, 큰 숲이 그 가운데에 무성하여 흐리거나 맑거나 아침이나 저물 녘의 사시의 경치가 무궁해서 시로는
다 기록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다 그려낼 수 없으니, 남방 산수의 신령한 기운이 밀양에 다 모여서 이 다락이 껴
안고 있다.
내가 지정(至正) 갑신년(1344) 봄에 찰방(察訪)의 명을 받들어 이 도에 나와서 순행(巡行)하다가 길이 이 군을
지나게 되었는데, 군수 유(兪) 공이 나에게 구경하기를 부탁하였다. 그래서 긴 구절로 된 율시(律詩)를 지어 판
위에 쓰니, 뒤에 오는 군자들은 서툴고 나쁘다고 꾸짖지 마십시오.
시에 이르기를, '붉은 난간이 불쑥 솟아 구름 하늘에 닿았고, 줄지은 산 잇단 봉우리가 눈 앞에 모였구나.
아래에는 긴 강이 끊임없이 흐르고, 남쪽에는 큰 들이 끝없이 넓으이. 마을 다리엔 버들이 천림(千林) 비 속에
어둡고, 관로(管路)엔 꽃이 10리 연기 속에 밝구나. 올라가 풍경을 감상하고 싶지 않으니, 사람들이 환영연을
베풀까 두렵네.' 하였다." 했다.
○ 임춘(林椿)의 시에, "일찍이 듣기를 원교(圓嶠 신선이 산다는 곳)가 푸른 물결을 임해서, 누각이 영롱(玲瓏)히
큰 자라 위에 세워 있다더니, 자라가 기울어지니 바다가 흔들려서 여러 신선들이 놀래누나. 망망히 다 없어져버
리고 한 봉우리만 높이 남았는데, 그것이 날아와서 황홀히 이곳에 옮겨져, 가득히 천고에 옛 구덩이에 맞추었네.
우뚝 솟아 하늘에 닿아서 옥을 겹친 듯하고, 백 길 맑은 연못에는 압록(鴨綠 오리 머리의 진한 녹색 같은 물의
빛깔)을 비꼈구나. 물에 뜬 복숭아꽃은 동중(洞中)에서 나왔고, 사는 이들은 완연히 진(秦) 나라의 풍속이 남았
네. 푸른 산 그림자 속에는 두세 집인데, 늘어진 버들 그늘 안에는 천만 집일세. 해 저무는 교외 들에 소ㆍ말 돌
아가고, 봄 깊은 물가에는 오리ㆍ갈매기가 헤엄치네. 고깃배 아이놈의 노질은 나는 듯하여, 시냇가를 몇 굽이나
돌았는지 모르겠구나.
서울에서 오는 손이 언제 오는지. 다락 위에서 천리까지 다 보았으면, 산인지 구름인지 멀리 같은 빛인데, 기러
기가 긴 하늘을 점점이 끊겼다 이어지는구나. 하늘가에 저녁 빛이 사뭇 어스름한데, 어찌 그리 집 생각이 다시
바쁜고. 거듭 이 다락에 오르지 않으리, 안개 물결 좋은 곳이 사람을 근심시키네."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높은 다락에 올라 바라보니 하늘에 오른 듯하고, 경치가 어지러이 앞뒤에 갑작스럽
구나. 바람과 달이 모두 맑기는 예나 이제나 한가진데, 강과 산은 10리로 가운데인지 가인지 모르겠구나.
가을이 깊어 관로(管路)에 단풍이 비추는데, 날 저문 어촌에 흰 연기 이네. 손이 오래도록 읊어도 시를 이루지
못하는데, 사군(使君)이 상을 차려 첫 자리를 가다듬네." 하였다.
○ 고려 이인복(李仁復)의 시에, "더위를 느끼면서 올라오니 가을이 하늘에 가득하고, 눈 안에 장관을 전엔 몰랐
네. 산은 서쪽을 따라 꺾여서 구름 겉에 비꼈고, 물은 동에서 흘러와 기슭을 에워쌌네. 가락이 바쁜데 해와 달을
한가히 감상하고, 긴 숲 무성한 풀에 바람 안개를 즐기네. 경치 속에 머물러 거리낄 일 무엇이랴. 곤드레 취해서
끝내 비단 자리를 밟으리."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백 척 높은 다락 긴 하늘을 당기니, 책상 머리에 풍경이 무성히 늘어섰네.
시내가 가까우니 물 소리가 난간 밖에 지나가고, 구름이 개이니 산의 푸름이 처마 끝에 듣네.
1천 휴 밭 이랑에 벼가 비를 겪었고, 10리 거리에는 나무가 연기를 띠었네. 필마(匹馬)로 남으로 와서 경치 좋은
곳을 지나니, 올라와 바라보며 손님 자리에 낄 만하이." 하였다.
○ 하륜(河崙)의 시에, "뉘라서 높은 다락을 지어 하늘까지 올려 이었나. 벽 사이에 글을 써서 기둥머리 다 채웠
네. 흘러 간 세월은 잇고 이어 개울 밑에 임해 있고, 지난 일은 오래도록 기둥 가에 붙어 있네.
10리 상마(桑麻)는 비 이슬에 깊었고, 온 고장 산수는 구름 연기에 늙었네. 늦게 와 이미 저무는 해의 아름다움
을 보았으니, 달이 가득한 긴 강에 다시 자리를 베푸네." 하였다.
○ 유관(柳觀)의 시에, "올라온 것이 바로 9월 가을인데, 끝없이 봉우리들이 앞뒤를 싸안았네. 외로운 따오기는
저녁 노을 밖에 가지런히 날고, 뒤떨어진 기러기는 석양가에 놀라 일어나네. 붉은 난간 푸른 기와는 기운 달빛
에 맑고, 큰 들 평평한 숲은 푸른 연기를 비꼈네. 기둥에 기대어 시를 읊다가 잠깐 조니,
꿈 속에서 마침 다시 경연에 입시하네." 하였다.
○ 이원(李原)의 시에, "높은 다락이 영남 하늘에 높이 있어, 10리의 진기한 풍경이 한눈 앞에 보이네.
낮이 고요하여 여울 소리가 베개 위에 잇달았고, 해가 기우니 소나무 그림자가 뜰가에 떨어졌네. 농부가 봄일
하는데 마을마다 비 내리고, 들 주막에서 밥 지으니 곳곳에 연기 이네. 아버님이 일찍이 여기를 지나신 것을 생
각하니, 도리어 소자가 다시 자리를 편 것을 부끄러워하네." 하였다.
○ 도원흥(都元興)의 시에, "금빛 옥빛 다락이 밝아 물과 하늘을 누르니, 예전에 누가 이 봉우리 앞에 지었나.
한 낚싯대 드리운 어부는 빗 소리 밖에 있고, 10리 길 행인(行人)은 산 그림자 가에 있네.
난간에 들어 온 구름은 무협(巫峽) 새벽에 일어나고, 물결 쫓는 꽃잎은 무릉(武陵) 연기에서 나왔네.
갈매기는 양관곡(陽關曲)만 들으니, 어찌 수심(愁心)의 송별연을 알랴." 하였다.
○ 김계창(金季昌)의 시에, "눈(眼)은 동남 만리 하늘에 트였고, 한 고장의 풍경은 잔 앞에 있네. 시는 편우(片雨
한 곳에만 오는 비)가 무심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흥은 긴 강이 다하지 않는 곳을 쫓네. 갈매기한테 차인 놀란
물결은 맑은 눈[雪]을 뿌리고, 소가 졸고 있는 꽃다운 풀엔 푸른 연기가 이네. 주인이 놀이하는 이의 뜻을 늘 잘
알아서, 웃으며 봄바람을 거느리고 취한 자리에 들어오네." 하였다.
신증 김계창의 시에, "누대(樓臺)의 그림자는 물속 하늘에 거꾸로 섰고, 만 가닥 늘어진 버들은 기슭 앞을 터네.
강은 저녁 밀물을 받아 바다 어귀에 돌아가고, 구름은 겨울 비를 끌고 시냇가를 지나네. 배 뚝이 멀고 가까운 곳
에 청작(靑雀)주D-001이 헤매고, 보리 밭 높고 낮은 곳에 푸른 연기를 폈네. 달 밝은데 아전들 흩어지기를 즐겨
기다려, 퉁소소리 속에서 구슬 자리에 눕네." 하였다.
○ 신부(申溥)의 시에, "객이 남쪽 고을에 오래 머무르니 한 해가 저물었구나. 몇 밤이나 화산(華山) 앞에서 돌아
가는 꿈을 꿨던가. 서리는 수국(水國)의 푸른 오리 밖에 날고, 나뭇잎은 강성(江城)의 흰 기러기 가에 떨어지네.
양 기슭은 갈꽃인데 외로운 배에는 비요, 숲 너머 울타리에는 두어 집에 연기로다. 게을리 놀아 올라와 노는 흥
을 다하지 못했는데, 난간을 돌다보니 달이 자리 위에 오르네."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올라가 굽어보니 마침 늦은 봄[慾沂川]주D-02이라, 바람은 얼굴을 스치는데 기둥
앞에 기대네. 남국의 산천은 바다에서 다하고, 여덟 창문의 음악은 구름가에 들레누나. 들소는 코를 들고서 관
도(官道 국가가 관리하는 나루)를 가로지르고, 깃드는 해오라기는 새끼를 거느리고 밤 안개를 뚫고 가네.
바야흐로 내가 다니는 것이 외롭지 않음을 알겠구나. 늘 어머님을 뵈러 오느라니 손님 자리를 더럽히네." 하였
다.
○ 일본인 용장(龍章)의 시에, "등림하니 음악이 균천(鈞天 상제(上帝)의 궁궐)인가 황홀한데, 춤추는 소매 앞
에 이야기 끝을 끊임없이 잇네. 맑은 안개는 멀리 산 마을 밖에 걷히고, 저녁 새는 물가 마을가를 낮게 나네.
갈대는 한밤의 달빛을 넉넉히 차지하고, 상자(桑柘 뽕나무와 산뽕나무)는 만호(萬戶)의 연기를 가지런히 나누
었네. 가득 찬 술잔을 사양하지 마오, 내일 아침이면 바다 위에서 이별한 자리가 생각나리다." 하였다.
○ 이윤(李胤)의 시에, "홀로 높은 난간에 기대어 먼 하늘 바라보니, 한 점 나잠(螺岑 소라모양의 산)이 기러기
진(陣) 앞에 있네. 현자(賢者) 달자(達者)가 고금의 묵은 자취 속에 있고, 강산의 그림은 이 다락가에 다하였구
나. 겹친 숲의 나뭇잎은 가을비에 밝고, 먼 동리의 인가엔 저녁 연기 일어나네. 마음껏 취해 소리 높여 노래하고
크게 웃으니, 늙은이가 꽃다운 자리로 가지 못하네." 하였다.
○ 유순정(柳順汀)의 시에, "호산(湖山) 만리 하늘을 배회하니, 신세(身世 내 몸이 있는 이 세상)는 20년 전 그대
로구나. 두어 마을의 물가 대나무 곁에는 소가 울고, 한 덩어리 구름 아지랑이 가에는 새가 가네. 꿈은 꽃 지는
강가 집에 내리는 비에 깨고, 시는 해 지는 버들가 다리의 연기에 이루었네. 늙은 사객(詞客 글 짓는 사람.
문사(文士)ㆍ사인(詞人))이 옛 생각에 쏠리는데, 어찌하여 잔이 기울고 달빛이 자리에 차는고." 하였다.
소루(召樓) : 영남루 서쪽에 있다.
○ 권기(權技)의 기문에, "누각으로 영남에서 뛰어남을 자랑하는 것이 하나뿐이 아니니,
예컨대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 금주(金州)의 연자루(燕子樓), 울주(蔚州)의 대화루(大和樓), 그리고 내
고향의 영호루(映湖樓)가 곧 그것인데, 밀주(密州)의 누각에 대해서만 영남으로 이름 부르니 어찌하여 여러 고
을을 내려다보고 한 지방의 명승(名勝)을 독차지하는가. 내가 경치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도 구경하지 못한 지
오래였다.
신유년 겨울에 예천(醴泉) 권맹손(權孟孫) 정승이 경기관찰사로 있다가 이 도에 절도사로 옮겨 오는데,
막하(幕下)에 붙어서 이듬 해 임술년 봄에 행차가 밀산(密山)에 이르렀다. 공을 따라 누각에 가서 문서를 살피는
여가에 눈을 돌려서 보니, 진기한 경치와 뛰어난 구경이 과연 평소에 듣던 것과 똑같아서 남쪽 지방에서 첫째일
뿐 아니라, 곧 등왕각(滕王閣)ㆍ악양루(岳陽樓)와 서로 겨루고 또한 나은 것이 있다.
다락의 서쪽에 또 한 다락이 있어 더욱 물에 가까운데, 읍 사람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부사 안질(安質) 공이 옛
터에다 지었는데, 읍 사람들이 소루(小樓)라고 부르며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무릇 작다
고 일컫는 것은 큰 것에 대하여 말하는데, 아마도 영남 옛 다락이 있는 까닭으로 이르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지은 규모는 비록 옛 다락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추녀와 기둥이 트였으며 들려서 머무르기에 편하고 온화
해서 설사 귀빈이 한꺼번에 온다 하더라도 각각 등림하여 편히 쉴 곳이 있으니, 이 다락의 지음새가 참으로 작다
고 할 수 없다. 하물며 여기 올라서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 잇단 봉우리와 겹친 산, 온 하늘에 긴 연기와 천리에
밝은 달을 바라보는 것이 영남루와 같음에 있어서랴. 가까이에서 상쾌한 바람소리가 추녀로 들어오고 맑은 여울
이 기슭에 부딪치며, 멀리로는 마암(馬巖)에서 짐승에게 풀 뜯기는 자, 우도(牛島)에서 밭가는 자를 숲 곁에서 바
로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 말하면, 또 옛 다락에 더하는 것이 있는데, 어찌 작다고 일컫겠는가.
마땅히 아름다움으로 편액해야 하니, 그 음(音)을 따라 그 글자를 고쳐 소루(召樓)라고 하라. 소(召)로 소(小)를
바꾼 것을 네가 어찌 알겠는가. 이 다락을 지은 사람은 백성들을 사랑하며 기르기에 수고하고 소송을 판결하는
데 밝아서 고을 사람들이 소부(召父)주D-03에 비기고,
이 다락에 오르는 사람은 모두 다 남쪽 지방을 선화(宣化)하기에 소백(召伯의 옛 정치를 숭상할 것이니, 소(召)
로 이름짓는 것이 그럴 듯하지 않은가.' 했다." 하였다.
신증 부사 이충걸(李忠傑)이 옛것에다가 증축하고 이름을 임경당(臨鏡堂)으로 고쳤다.
덕민정(德民亭) : 수산현(守山縣)에 있다.
○ 권람(權擥)의 기문에, "정통(正統) 13년 무진(1448) 겨울에 양성(陽城) 이후(李侯)가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있다가 이 부(府)로 옮겨 임명되어 와서, 정치는 통달하고 사람은 화목하며 해로운 것은 물리치고 이로운 것은
일으켰다. 수산이라는 속현(屬縣)이 부의 남쪽 30리쯤에 있는데, 부로부터 남으로 가서 서쪽에 다다르는 요충
이고, 현의 남쪽에 큰 강이 있어 상산(商山 지금의 상주)으로부터 낙동강으로 가서 바다에 이르니,
참으로 조운(漕運)이 경우하는 곳이다. 무릇 사명(使命)이 이 현을 지나갈 때에는 부에서 실상 영접한다.
현에는 공해(公廨)가 없고 또 아전과 노비들이 모두 부에 들어가 일하는 까닭에, 말린 양식, 평상과 휘장 등 제
반 수요 물자를 짐승에게 싣고 허리를 꾸부리고 잇달아 가고 오기에 쉴 새가 없었으므로 부사가 개탄스럽게
생각했다.
3년을 지난 경오년 가을에 현의 서쪽 언덕에 자리를 잡아 가운데에 3칸을 지어 청(廳)의 일을 보게 하고 좌우에
각각 3칸을 붙여 따뜻한 방으로 만드니 따뜻하고 서늘함이 장소를 달리하였다. 단청이 끝나자 무릇 현에서 와
서 부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딸려서, 무논 몇 이랑을 개간하여 때때로 농사를 권장하니, 해마다 벼
몇백 섬을 얻었다.
부엌과 곳간이 이미 세워지자 일용 도구가 또한 저장되어 부엌일 하는 사람과 정원 일 하는 사람들이 분주히
일에 종사하는데, 도구를 갖추지 못한 것이 없었다. 이로부터 무릇 전송이나 영접할 일이 있으면 부사가 혼자
말을 타고 가 쌀은 곳간에서 꺼내고 술은 통에서 떠내어 능히 갖추어 접대에 공급할 수 있으므로, 문득 부에서
는 손님을 모셔 가는 수고가 끊어지고 현에서는 들어가 일하는 괴로움이 없어져서 피차가 함께 편안하여 사람
들이 모두 즐거워하였다.
내가 미침 객으로 갔더니, 부의 사람 강(姜)ㆍ박(朴) 두 사람이 나에게 고하기를, '부사께서 이 정자를 짓고 민
폐를 혁파하였으니, 덕은 비록 백성에게 있어서 길이 잊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문이 없을 수 없으니,
장차 당신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보건대, 온 부의 경치가 다 이 정자에 들어 있어서,
그 남쪽은 먼 봉우리가 하늘에 떠 있고 새파란 빛이 하늘에 비껴 있어 먼 곳은 옅고 가까운 곳은 짙은 것이 함
께 정자에 모이고, 긴 강은 피륙을 펴놓은 듯하고 평형한 모래 밭은 눈을 깔은 듯하며, 연기는 먼 물가에 가라
앉고 달은 긴 섬에 찼으며, 장삿배의 돛은 바람을 가득히 안고 고깃배는 그물을 걷으며, 그 동쪽은 넓은 들이
갈아놓은 듯 평평하여 멀리 바라보아도 끝이 없고, 밭두둑에서는 농부가 노래하고 뚝에서는 목동이 피리 불며,
외로운 마을에는 늙은 나무가 있고, 땅거미가 질 때에는 연기가 비끼며, 그 북쪽은 백 이랑이나 되는 못이 있는
데, 물결 위에는 연꽃이 피어서 우뚝한 푸른 일산이요, 윤기 있는 붉은 옷엔 바람이 비껴 불고 비가 윤기 있게
내려 적시고, 물가의 난초와 기슭의 향풀은 이슬을 띠고 연기를 머금었으며, 갈매기와 해오라기가 날아 모이고
물고기와 자라가 떠서 헤엄치며, 못 가운데에 섬이 있어 푸른 대나무가 길쭉길쭉 아름답게 무성하여, 바람을
맞으면 구슬을 비비는 것 같은 소리가 나고, 달빛을 띠면 금가루를 키질하는 것 같으니, 이것이 또한 이 정자의
가장 좋은 경치이다.
아, 부사가 정자를 지은 뜻이 어찌 이에 있으랴. 이 강과 이 산이 있은 이래로 일찍이 얼마 동안이나 풀이 우거
져 논밭이 묵고 쓸모 없는 언덕이었던가. 그러더니 오늘에 와서 이 정자가 빨리 이루어지자 묵은 폐단이 갑자기
새로워지니, 또한 하늘이 아끼고 귀신이 감추었다가 우리 부사를 기다려서 이 백성들에게 복을 주는 것이 참으
로 이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어찌 다만 승지를 유람하는데 그치랴. 우리 부사의 덕은 부가 부담을 벗고 현도
편히 자게 하였다. 부사가 백성에게 덕을 베풀고 백성이 덕에 감복한 것은 이것뿐이 아니다.
강의 연변에 멱례리(覓禮里), 감물지리(甘勿池里) 등이 있어 무려 수백 호가 장마로 물이 부는 때를 당할 때마
다 늘 집이 물에 잠기는 것을 걱정하나 백성이 모두 일정한 곳에 옮겨 편히 살지 못하므로, 부사가 그 산 언덕에
자리를 잡아서 모두 옮겨 지어 산의 터에 의지하게 하니, 샘이 달고 땅이 기름져서 갈고 파서 먹으며 그 직업을
길이 세웠으니, 그 백성에게 덕을 베풂이 또한 크도다.
그러므로 특별히 덕(德)과 민(民) 두 자를 들어 정자에 이름붙였다고 한다.
부사의 이름은 백상(伯常)인데, 일찍이 몇 군을 맡아서 다 어진 정치를 하였다. 강(姜)은 본관이 진주로 이름이
극창(克昌)이고, 박은 본부 사람으로 이름이 학문(學問)이다." 하였다.
○ 서거정이 읊은 사시시(四時詩)에, "들 넓고 하늘 얕아 손바닥인 양 평평하고, 봄 강물은 오리 머리인 양 밝구
나. 연기는 비단 같은 꽃 천 그루를 얽고, 비는 낭간(琅玕) 같은 대 몇 줄기를 씻네. 제비가 영접하니 버들개지가
날아 내리고, 갈매기가 전송하여 가는 배에 비끼네. 예나 지금이나 방초(芳草)와 청천(晴川)의 한은 같은데,
황학루(黃鶴樓)가 이름을 독차지 하다니." 하였다.
○ "겹친 산마루는 큰 뚝을 누르고, 발을 걷으니 청산(靑山)의 살아 있는 그림이 밝구나. 연꽃은 살살 부는 바람
에 묵은 잎새를 추켜들고, 줄과 부들은 물이 넉넉하여 새 줄기가 자라네. 섬은 늘어 선 나무를 두르고 하늘과
함께 지나가는데, 골짜기는 맑은 강을 묶어 땅을 깎고 비껴 있네. 술통의 술이 흥을 다하지 않았으니,
내 몸 밖에 다시 무슨 공명을 알랴." 하였다.
○ "소슬한 강 언덕에 초목이 평온하고, 누대 홍벽(紅碧)은 구분이 선명하구나. 빗소리는 댓잎[三湘葉]주D-004
에 먼저 곁들고, 가을 빛은 난초 줄기[九畹莖]주D-05에 길이 머무네. 물이 줄어 여울에 물고기 내려가고, 구름
이 깊어 고개에 기러기 비끼네. 예로부터 송옥(宋玉)이 요락(搖落)을 슬퍼하였으나, 비추부(悲秋賦)를 지었으니
벼슬 재미인지 나그네 근심인지 이름짓기 어렵구나." 하였다.
○ "긴 하늘이 흐려 언 구름이 낮게 흐르고, 10리 강산에 개인 눈이 밝구나. 이 생도 옥계(玉界)를 헤맬 수 있으
니, 신선은 금경(金莖)주D-06이 필요하지 않으리. 솔에 바람 불어 만 골짜기에 추운 소리 크고,
매화에 달 비추어 천 수풀에 여윈 그림자 비끼네. 이런 강산에 돌아가야겠는데, 하찮은 벼슬이 공명에 부끄럽
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 : 부의 북쪽 6리에 있다. 정수홍(鄭守弘)의 중신기(重新記)가 있다.
역원 용가역(龍駕驛) : 부의 북쪽 6리에 있다. 무흘역(無訖驛)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수안역(水安驛) :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금동역(金洞驛) : 부의 남쪽 23리에 있으며, 예전에 이동음역(伊冬音驛)이라고 불렀다.
양동역(良洞驛) : 수산현에 있으며, 부에서 41리 떨어졌다.
유산역(幽山驛) : 풍각현에 있으며, 부에서 60리 떨어져 있다. 금곡원(金谷院)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북정원(北亭院) : 부의 북쪽 6리에 있다. 남정원(南亭院) : 부의 서쪽 2리에 있다.
조화원(助火院) : 부의 남쪽 13리에 있다. 마산원(馬山院) : 부의 남쪽 28리에 있다.
무량원(無量院)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성덕원(成德院) : 부의 서쪽 34리에 있다.
이창원(耳倉院)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작원(鵲院) : 부의 동쪽 41리에 있다. 원으로부터 남으로 5ㆍ6리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棧道)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구비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 연못으로 물빛이 짙은 푸른 빛이라,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 예전에 한 수
령이 떨어져서 물에 빠진 까닭에 지금까지 원추암(員墜巖)이라고 부른다. 그 서안(西岸)이 곧 김해부(金海府)의
도요저(都要渚)이다.
입량적원(入良赤院) : 부의 남쪽 32리에 있다.
신증 임강원(臨江院) : 수산현에 있으며, 앞에 나루가 있다.
해양원(海陽院) :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교량 인교(茵橋) : 부의 서쪽 45리에 있으며, 내진천(來進川)의 하류이다.
○ 이첨(李詹)의 시에, "나그네는 다소 보이는데, 나같이 한가한 이 드물구나. 산을 사랑하여 곳에 따라 머무르고,
시구를 얻어 홀로 읊조리며 돌아오니, 절에는 가을이 막 이르렀고, 관도(官塗)에는 이슬이 마르지 않았네.
마친 이 무릎을 낄 만하니, 강 위에 낚시터가 있네 그려." 하였다.
사포교(四浦橋) : 작원 앞에 있다.
불우 영정사(靈井寺) : 재악산(載嶽山)에 있다. 만어사(萬魚寺) : 만어산에 있다.
안수사(安水寺) : 종남산(終南山)에 있다. 봉천사(鳳泉寺) : 화악산(華嶽山)에 있다.
용천사(湧泉寺) : 비슬산(琵瑟山)에 있다. 영은사(靈隱寺) : 남산(南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추화산(推火山)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부리(府吏) 손긍훈(孫兢訓)이 고려 태조를 도와서 공이
있으므로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를 추증하고, 광리군(廣理君)을 봉하였으니, 바로 사신(祠神)이다." 한다.
여단 : 부의 북쪽에 있다.
신증종묘 김종직(金宗直)의 묘 : 지동(池洞)에 있다.
고적 귀화 부곡(歸化部曲) : 고려 원종 12년(1271)에 군(郡) 사람 방보(方甫)ㆍ계년(桂年)ㆍ박경순(朴慶純)ㆍ
박평(朴平)ㆍ경기(慶祺) 등이 장차 진도(珍島)에 있는 삼별초(三別抄)에 호응하려고 부사(副使) 이이(李頤)를
죽이고 드디어 공국병마사(攻國兵馬使)라고 일컬으며 군현(郡縣)에 이첩(移牒)하고,
그 무리를 보내어 청도 감무(淸道監務) 임종(林宗)을 죽이니, 청도 사람들이 거짓으로 항복하고 술을 먹여서 취
하게 하여 섬멸하였다.
또 군 사람들을 소집하여 일선 현령(一善縣令) 조천(趙仟)을 함께 모반하게 하니, 조천이 따랐다.
금주 방어사(金州防禦使) 김훤(金晅), 경주 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 등이 와서 토벌하자, 조천이 곧 손일
(孫逸)과 함께 방보 등을 꾀어 죽이니, 반적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대간(臺諫)들이 읍호(邑號)를 낮출 것을 여러
번 청했으나, 권세를 쥔 사람이 읍 사람에게서 뇌물을 받고 늘 막았다. 충렬왕 2년(1276)에 이르러 대간이 다시
극론(極論)하여 비로소 귀화부곡으로 낮추어 계림(鷄林)에 붙이고 소복별감(蘇復別監)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두야보(豆也保) 부곡 : 일명 도련(道連)이라고도 하며, 풍각현(豐角縣)에 있다.
이동음(伊冬音) 부곡 : 일명 금산(金山)이라고도 하며,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금음물(金音勿) 부곡 : 부의 동남 15리에 있다.
내진향(來進鄕) : 일명 통가(通駕)라고도 하며,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운막향(雲幕鄕) : 세상에서 백족(白足)이라고 부르는데,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신포향(薪浦鄕) : 곧 삽포(鈒浦)이다. 섶[薪]과 삽은 사투리로 서로 비슷하다.
저대(楮代) 부곡 : 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오정(烏丁) 부곡 : 부의 서쪽 6리에 있다.
평릉(平陵) 부곡 : 부의 동북 15리에 있다. 음곡소(陰谷所) :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고매(古買) 부곡 : 청도군 동촌(東村)과 경주 서촌(西村)에 넘어 들어가 있으며, 부에서 95리 떨어졌다.
곡량촌(谷良村) 부곡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파서방(破西防) 부곡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근개(近皆) 부곡 :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양량(陽良) 부곡 :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밀진현(密津縣) : 일명 죽산(竹山)이라고 한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경덕왕이 개명하여 밀양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했는데, 지금 상세히 알 수 없다.
○ 지금 살펴보건대, 권근(權近)의 《사략신라지리(史略新羅地理)》에는, 추화(推火)의 주(注)에 밀양이라 하고,
상약(尙藥)의 주에 영산(靈山)이라 하고, 추포(推浦)의 주에 밀진(密津)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영산에
서 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멸포(蔑浦)가 있는데, 밀[推]과 멸(蔑), 밀(密)은 사투리의 음이 같으므로, 이것이
그 땅인 듯하다. 더욱이 고려 때에 영산ㆍ계성(桂城)이 모두 밀양의 영현(領縣)이었으니, 이 땅도 밀양에 붙었던
것은 분명한데, 상고할 곳이 없다.
수산제(守山堤) : 수산현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이 이 뚝을 쌓
아서 밭에 물을 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량(軍糧)을 갖추었다." 한다.
못 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마름ㆍ연ㆍ마름ㆍ귀리가 멀리까지 가득하다. 세종 때에 물길을 트고 수
문(水門)을 설치하여 나라의 둔전(屯田)으로 하였다가, 뒤에 봉선사(奉先寺)에 내려주었다. 성종 때 다시 나라의
둔전이 되었다.
병구(兵區)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김훤이 조천을 토벌할 때 병영을 주둔시킨 곳이다."
한다.
영원사(瑩原寺) : 자씨산(慈氏山)에 있다. 고려의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중 보감(寶鑑)의 비명이 있다.
○ 절에 선조루(先照樓)가 있다. 이문화(李文和)의 시에, "선조루 안에서 중이 좌선하니, 밝은 마음과 자취가 둘
이 서로 알맞네. 어느 해에 한 갈대[一蘆] 위로 바다를 건넜던가.주D-007 오늘날 쌍수(雙樹) 앞주D-08에서 불
경(佛經)을 뒤적이는구나." 하였다.
엄광사(嚴光寺) : 실혜산(實惠山)에 있다. 만어산 경석(萬魚山磬石) : 산중에 한 동굴이 있는데, 동굴 안에 있는
크고 작은 바윗돌이 모두 종과 경쇠 소리가 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돌로 화했다."
한다. 세종 때에 채굴하여 경쇠를 만들었으나 음률에 맞지 않아 드디어 폐지하였다.
장군정(將軍井) : 객관의 동북쪽에 있다.
샘물이 맑고 차며, 겨울에는 따듯하고 여름에는 차다. 그 깊이가 10여 척은 되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세속에서, "김석(金碩) 장군의 우물."이라 한다.
삼랑루(三郞樓) : 부의 남쪽 30여리에 있다. 응천(凝川)이 강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 고려 중 원감(圓鑑)의 시에, "호수 위에 청산이요, 청산 아래 누각이로다. 아름다운 이름이 길이 물과 함께
흐르네. 물가의 가게는 달팽이 껍질을 늘어놓은 듯하고, 물결 쫓아 바람 받는 배에는 바람개비가 춤추네.
상자(桑柘)에 연기 깊어 천리가 저물고, 마름꽃과 연꽃이 늙어 온 강에 가을빛이로구나. 낙하 고목(落霞孤鶩)은
낡은 말일세. 새 시 지어 경치 놀이를 적노라." 하였다. 추화산 고성(推火山古城) : 산꼭대기에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2천 3백 60척이고, 안에 샘이 둘, 못이 하나 있다.
명환고려 정운경(鄭云敬) : 충혜황 때에 밀양 사람이 정승 조영휘(趙永暉)에게 베를 빌린 일이 있었는데,
영휘가 어향사(御香使) 안우(安祐)에게 부탁하여 이첩해서 징수하게 하니, 운경이 말하기를, "밀양 사람이 베를
빌린 것은 조영휘가 스스로 거두어들일 것이지 공소(公所)에서 문책하기에 마땅한 일이 아니다." 했다.
안우가 노하여 좌우 사람들을 시켜서 욕보이니, 운경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이제 이미 천자의 명을 교영(郊迎)
하였는데, 장차 어떻게 나를 죄주시렵니까. 공이 천자의 말씀을 펴서 먼 곳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고 감
히 이렇게 하십니까." 하자, 안우가 굴복하여 그만두었다.
유희(劉曦) : 의종 때에 어시(御試)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장원 급제는 보통 있는 일이지만, 천자의 문생(門生)이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하였다. 뒤에 지방에 나가서 주(州)의 원이 되었다.
윤송균(尹松筠) : 원 노릇 하기를 청렴하고 곤궁하며 엄하고 굳세게 하였다.
본조 유두명(柳斗明)ㆍ이교연(李皎然)ㆍ성순조(成順祖) : 모두 부사였다.
임수창(林壽昌)ㆍ허계(許誡) : 모두 정사에 임하기를 청렴하고 대범하게 하였다.
신증 이세전(李世銓)ㆍ이세응(李世應) : 정사에 임하기를 엄하고 밝게 하여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인물
고려 박의신(朴義臣) : 본부의 아전으로서 학문을 힘써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거듭하여 공부 상서(工部尙
書)에 이르렀다.
박영인(朴永寅) : 의신의 5대손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림랑 감찰어사(文林郞監察御史)에 이르렀다.
박의중(朴宜中) : 전라도 김제(金堤) 우거(寓居) 조 아래 자세히 나온다.
박인간(朴仁幹) : 과거에 급제하였다. 태위심왕(太尉瀋王)을 따라 토번(吐藩)에 들어갔다가 귀국하자 익찬공신
첨의평리(翊贊功臣僉議評理)가 되었다.
본조 박위(朴葳) : 처음에 우달적(于達赤)에 보직되었다가 여러 번 벼슬을 옮겨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이르
렀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4번 수령이 되고, 3번 남쪽 변경을 수비하니 구적(寇賊)이 평정되어 백성이
편안했으므로 크게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당성(唐誠) : 절강(浙江) 명주(明州) 사람인데, 원(元) 나라 말기에 병란을 피하여 동으로 와서 본조 초부터 사대
이문(事大吏文 중국에 보내는 공문서)을 전담했다. 벼슬은 공안부윤(恭安府尹)에 이르렀다. 나라에서 명하여
본부로 그 본관(本貫)을 삼게 하였다.
박돈지(朴敦之) :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비서감(祕書監)에 이르렀다.
박언충(朴彦忠) : 고려 말기에 왕복명(王福命)을 따라 왜병을 격파하고 동래성(東萊城)을 회복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호조 참의를 지냈고, 지방에 나가서 경상좌도 도절제사(慶尙左道都節制使)가 되었다.
나이 97세에 죽었다.
박홍신(朴弘信) : 인충의 아우인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무예의 재간이 있다. 벼슬은 사재 감정(司宰監正)
에 이르렀다. 세종 기해년(1419)에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종군하여 선봉으로 상륙
해서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변계량(卞季良) : 자는 거경(巨卿)인데, 나이 17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은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
制府事)에 이르렀다. 세자의 스승이며 20여 년 동안 대제학을 지냈고, 사대교린(事大交隣)하는 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시호는 문숙(文肅)이고, 《춘정집(春亭集)》이 있다.
박중손(朴仲孫) : 과거에 급제하여 화려하고 중요한 벼슬을 두루 역임했다.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서 밀산군
(密山君)을 봉하였고,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효(恭孝)이다. 아들 미(楣)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참의에 이르렀다.
손비장(孫比長) : 2번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명(文名)이 있으며, 벼슬은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신증 박건(朴健) : 중손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박열(朴說) :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이정(夷靖)이다.
우거 현석규(玄碩圭) :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이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렀다.
효자본조 이신(李申) : 벼슬을 거듭하여 사헌부 지평에 이르렀다. 아버지 상중(喪中)에는 밤에 허리띠를 풀지
않고 애통해 하다가 쇠약해져서 뼈가 드러났다. 모든 상구(喪具)는 여러 형제와 함께 마련하지 않고 손수 부담
하였고, 여묘살이 3년을 하였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김불수(金不受) : 부모를 위해 여묘살이 6년을 하였는데, 정문하였다.
박심(朴尋) : 벼슬하여 남해 현령(南海縣令)이 되었다.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 3년을 하면서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려하였다.
금지(今之) : 12살에 어머니를 따라 가서 산밭을 매다가 마침 날이 저물었는데 어머니가 범에게 물려가자, 금지
가 한 손으로 어머니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호미를 쥐고 범을 때리면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구해 달라고 외쳤다.
백여 보쯤 가서 붙잡고 있던 어머니가 점점 굳어지니 범이 버리고 가버렸다. 시체를 거두어 집에 안치하고는 밤
새워 시체를 안고 통곡하다가 옷을 팔아 관을 사서 장사지냈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려하였다.
신증 전불산(全佛山) :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죽어서 여묘살이를 하는데, 밤에 바람이 불고 비
가 오면 반드시 무덤 앞에서 호곡(號哭)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복(服)을 마치고 또 3년을 여묘 살았는데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려하였다.
열녀본조 손씨(孫氏) : 윤하(胤河)의 딸인데, 16살에 초계(草溪) 사람 안근(安近)에게 시집 가서 겨우 며칠 만에
남편이 죽자, 울면서 3년 동안 예를 갖추어 손수 잔을 올렸다. 복을 마치게 되자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나이가
젊은 것을 가엽게 여겨 그 수절하려는 뜻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손씨가 죽음으로 굳게 항거하였다. 할아버지의
위엄과 노여움이 닥치자, 손씨가 몰래 뜰 안의 대나무 숲에 가서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그 형이 마침 보고서 풀
어주었다. 손씨는 곧 시댁으로 돌아가서 살았는데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먼저 지아비에게 제사지내고 나서야
먹었다. 32살에 죽었다.
신증 난비(卵非) : 정병(正兵) 김순강(金順江)의 아내였다가 뒤에 버림을 받자, 그 부모가 개가시키려 하니,
난비가 목놓아 울면서 말하기를, "한 몸으로 두 남편을 섬기는 일은 죽어도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곧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지금 임금 18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노공주거회(路控舟車會) : 임춘(林椿)의 시에, "산군(山郡)에 경치가 좋은 곳이 많아, 이름이 높아 한 고장
의 으뜸일세. 지세가 영특하여 사람이 스스로 잘나고, 들이 기름져 풍년 잦으이. 길이 당겨 배와 수레가 모이는
데, 풍속은 아직 예의(禮義)가 있네. 선비가 많기로는 촉군(蜀郡)과 같고, 경치가 좋기로는 여항(餘杭)보다 낫구
나. 송국(松菊)은 팽택(彭澤)에 거칠고, 연파(煙波)는 악양(岳陽)에 움직이네. 산이 깊어 새가 지저귀고, 하늘과
물은 푸르고 넓구나. 산이 푸르러 새 경계를 열고, 호수가 맑아서 분단장한 듯하네. 하늘까지 닿은 나무 장막이
늘어섰고, 눈이 날려 차나무가지에 아롱거리네. 사시에 떨기진 대나무 푸르고, 집마다 세버들 누렇구나.
술잔과 쟁반에 산해 진미 넉넉하고, 현관(絃管)은 음률이 묘하구나. 승경(勝景)을 만나 시흥(詩興) 더하고,
여가에는 술잔에 곤드라지네.
봄에는 오리떼 어지러운 물가에 가고, 저물녘에 연봉루(燕鳳樓) 서늘한 곳에 잔치를 하네. 꿈은 서창(書窓)의
달빛에 깨고, 옷은 술 취한 잠자리 향기에 엉켰구나. 마음은 위로하고 일은 즐기고, 흥겨워 청광(淸狂 미치지
않고서 미친 듯이 하는 것)을 함부로 하네. 오래도록 산천의 만류를 받으니, 돌이켜 길 먼 것이 서글프구나.
남아 있는 노을에 등왕각(滕王閣) 바라보고, 밤비에 소상(蕭湘)의 대나무 소리 듣네.
가는 말에 채찍하여 떠나는데, 마음은 기러기 따라 바쁘구나. 왕발(王勃)의 문필이 없음이 아깝구나.
낙하고목(落霞孤鶩) 솜씨로 남창(南昌) 적듯하지 못하네." 하였다.
탄성격석훤여우(灘聲激石喧如雨) : 정추(鄭樞)의 시에, "여울은 돌에 부딪쳐 비처럼 요란하고, 밤 기운은 하늘에
떠서 연기처럼 옅구나." 하였다.
영남루하대천횡(嶺南樓下大川橫) : 이색의 시에, "영남루 아래 큰 개울 비끼고, 가을 달과 봄바람이 태평하구나."
하였다.
운횡고첩천년수(雲橫古堞千年樹) : 김근(金謹)의 시에, "구름은 옛 성 천년 나무에 비꼈고, 벼는 가을바람 부는
만호(萬戶)의 연기 속에 익어 있네." 하였다.
황요취롱번풍맥(黃搖翠隴翻風麥) : 이발(李潑)의 시에, "누렇게 흔들리는 것은 푸른 두둑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보리요, 희게 끌리는 것은 푸른 언덕 물가의 연기로다." 하였다. 십경(十景) 서거정의 시이다.
우령한운(牛嶺閑雲) : "우령이 멀리 겹친 청강석을 꽂은 듯하니, 영남의 아름다움이 천하에 제일일세.
아름다운 누각은 들보에 금오(金鰲)의 머리를 그렸고, 한가로운 구름이 둘러 있어 오색(五色) 위에 높다랗구나.
누가 구름을 무심타 하는가, 생령을 윤택케 하니 원래 술법이 있더라. 어찌하여 일찍이 해를 가려 부질없이
하늘을 막는다 하였던가. 큰 가뭄에 며칠 안에 장마를 이루어 주리라." 하였다.
마산비우(馬山飛雨) : "동풍에 발이 걷혀 12난간이요, 한번 바라보는 안계(眼界)는 동남이 트였구나.
긴 숲이 가렸다 비쳤다 하여 물가와 물가가 새뜨고, 마산(馬山) 한 점은 청아환(靑鴉鬟)일세. 문득 강 구름이 옻
같이 검더니, 소낙비 날려 은 살대 번득이네. 긴 바람이 강을 쓸고 가니, 반변(半邊) 청산이 지는 해를 머금네."
하였다.
응천조정(凝川釣艇) : "응천이 멀리 은하수에서 와서, 누 앞을 푸르게 물들여 포도주를 괴네. 간밤에 작은 비가
삿대에 반이나 물을 불리니, 고기잡이 거룻배 뜻대로 물결 따라 돌아오네. 복사꽃 뜬 잔잔한 물결에 쏘가리 새
끼 살쪄, 쟁반에 회를 치니 눈 날리는 듯하구나. 얼큰히 취해 북[鼓] 밑에서 창랑(滄浪)을 읊조리니,
인대 황각(麟臺黃角)주D-009은 알 바 아닐세." 하였다.
삽포어등(鈒浦漁燈) : "삽포에 아침이 오니 새물이 일고, 하늘이 촉촉하여 가을 밤이 맑구나. 잎 떨어져 성긴 숲
에 강바람 아니 불고, 어등(漁燈)이 반짝반짝 별을 늘어 놓았네. 야로(野老)들이 기뻐서 나뒹굴 듯하는구나.
금년에 풍어(豐漁)이니 돈 걱정 마라. 술에 가재 안주로 다시 서로 위로하니, 외로운 배가 갈꽃 가에서 밤을 새우
네." 하였다.
용벽춘화(龍壁春花) : "용두산(龍頭山) 위에 봄이 정말 좋구나, 철쭉꽃이 벼랑 가득히 봄이 한창일세.
하룻밤 좋이 온 비 진국술 같아서, 꽃이 만발하여 타는 듯 붉구나. 뉘 집 젊은이가 금장니(錦障泥 비단으로 만든
말 다래)했나. 술병 지니고 동에 서에 노니네. 날 저물어 돌아오니 봄빛이 얼굴에 가득하고, 말굽 아래 무수히
꽃잎 날리네." 하였다.
율도추연(栗島秋煙) : "누 앞의 10리 앵무주(鸚武洲)에는, 밤 꽃이 눈 같고 향기 넘치네. 늘어진 밤송이 별같이
많아서, 가을이면 만섬 황금 거두네. 나무 끝에 희게 비낀 것은 연기 아닌 연기인데, 만가(萬家)의 연기는 멀리
서로 이었구나. 태평한 기상을 그릴 사람 없구나. 묘수(妙手)로 용면(龍眠 이공린(李公麟))을 수고시켰으면."
하였다.
영봉초욱(塋峯初旭) : "금계(金鷄)가 꼬꾜 우니 부상(扶桑)의 새 아침일세. 육용(六龍)이 해바퀴를 떠받쳐 올려,
짙은 붉은 빛 햇살이 찬란하여 산호 빛이요, 큰 물결 만 두둑에 금빛 번득이네. 조금 뒤에 만 길 언덕에 날아 올
라서, 하루에 끝없이 푸른 하늘 한 바퀴 도네. 긴 밧줄로 구오(九烏 해의 별칭) 묶어다가, 만고 하늘 한가운데에
달아 놓았으면." 하였다.
나현적설(羅峴積雪) : "강 구름이 컴컴하더니 먹을 흠뻑 뿌리네. 눈송이 훨훨 자리[席]보다 크구나.
하늘 땅 사이에 온통 맑은 기운이요, 한 조각 안개만한 틈도 없구나. 예전부터 삼백(三白)하면 풍년을 기약한다
는데, 집집마다 백옥 같은 천 두둑 밭이니, 황충(蝗蟲)이 천 길 땅속으로 들어가고, 명년에는 집집이 벼를 거두
리." 하였다.
서교수계(西郊修禊) : 서 자는 동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 "봄날이 사람에게 알맞게 옥과 같이 따뜻하고, 서교의 방초(芳草)는 베보다 가늘구나. 교외에 가득히 꽃비 붉
게 날리고, 봄 물결이 쏴쏴 유수곡(流水谷)일세. 동리 푸닥거리에 구름같이 모여서 잔질 빨라 어느듯 모두 흥청
거리네. 풍류는 영화(永和) 봄만 못지 않은데, 취해 쓰는 글이 누가 왕장군(王將軍)주D-10과 같을꼬." 하였다.
남포송객(南浦送客) : "아침에 조금 오는 비는 기름같이 윤나고, 관가(官街)의 푸른 버들 명주실같이 가늘구나.
아이 하나 말 한 필에 쌍 술병 달고서, 손님 전송하러 남포교(南浦橋)를 바로 지나니, 인생의 모이고 흩어짐이 뜬
구름 같아, 부별(富別) 빈별(貧別)이 모두 상심하는데, 이구(驪駒 송별곡) 한 곡은 노래 이미 한창이요, 하늘 길고
물 멀어 사람 근심시키네." 하였다.
[비고]
연혁 중종 13년(1518)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 부(府)의 땅을 갈라 청도(淸道)ㆍ영산(靈山)ㆍ경산(慶山)ㆍ현풍
(玄風) 등의 읍으로 나누었다. 17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 선조(宣祖) 33년(1600)에 방어사(防禦使)를 겸하였다
가 이듬해에 파했는데, 37년에 다시 겸했다.
인조(仁祖) 7년(1629)에 파하고 19년에 토포사(討捕使)를 겸했는데 현종조(顯宗朝)에 파했다.
고읍 밀진(密津) : 지금 영산현 남쪽 34리이다. 멸포(蔑浦)는 곧 현의 땅이다. 본래 신라의 추포(推浦)인데 죽산
(竹山)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16년에 밀진으로 고쳐 밀성군(密城郡)의 영현을 삼았고 고려 초에도 이에 속했다.
수산(守山) : 남쪽으로 40리이다. 본래 천산 부곡(穿山部曲)이며, 은산(銀山)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에 수산으로 승격하고 현종 9년(1018)에 내속하였다.
방면 부내(府內) : 끝은 10리이다. 부내초동(府內初同)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부내이동(府內二同) :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부내삼동(府內三同) : 위와 같음. 부북(府北) :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상동(上東) : 동북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상동초동(上東初同) : 동남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하동이동(下東二同)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중초동(中初同)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80리이다.
중이동(中二同) : 동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7리다.
중삼동(中三同)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상남(上南) : 끝은 30리이다.
하남초동(下南初同) : 끝은 20리이다. 하남이동(下南二同) : 끝은 30리이다.
하남삼동(下南三同) : 끝은 50리이다.
상서초동(上西初同) :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상서이동(上西二同) :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상서삼동(上西三同) :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중서(中西) :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고미(古彌) : 동북으로 처음은 80리이고, 끝은 1백 20리이다.
내진향(內進鄕) : 다른 이름은 통가(通駕)로, 서쪽으로 20리이다.
운막향(雲幕鄕) : 통속적으로는 백족(白足)이라 한다. 남으로 25리이다.
신포향(薪浦鄕) : 즉 급포(級浦)이니, 아래에 보인다.
이동음 부곡(伊冬音部曲)은 일명 금산(金山)이라 하며, 남쪽으로 20리이다. 지금의 음물 부곡(音勿部曲)은
동남쪽 아래로 5리이다.
오정 부곡(烏丁部曲)ㆍ평릉 부곡(平陵部曲)은 동북쪽으로 15리이다.
고매 부곡(古買部曲)은 청도(淸道) 동남 경계와 경주 서쪽 경계를 넘어 들어갔으며, 동북쪽으로 95리이다.
곡양소 부곡(谷良所部曲)은 서쪽으로 20리이다. 파서방방 부곡(破西防防部曲)은 남쪽으로 30리이다.
근개 부곡(近皆部曲)은 서쪽으로 25리이며, 양량 부곡(陽良部曲)은 북쪽으로 10리이다.
음곡소(陰谷所)는 서쪽으로 25리이다.
봉수 성황(城隍) : 즉 추화산(推火山)이다. 백산(柏山) : 남쪽으로 40리이다.
영아 읍창(邑倉)ㆍ북창(北倉) : 고칭면(古稱面)이다. 동창(東倉) : 상동면(上東面)이다.
하동창(下東倉) : 하동면(下東面)이다. 남창(南倉) : 남쪽으로 30리이다. 서창(西倉) : 서쪽으로 35리이다.
○ 삼랑창(三郞倉) : 후에 조창(漕倉)이라 불렀는데, 남쪽으로 40리 강변이다.
영종(英宗) 을유년(1765)에 우참찬 이익보(李益輔)가 건의하여 설치하고, 밀양(密陽)ㆍ현풍(玄風)ㆍ창녕(昌寧)ㆍ
영산(靈山)ㆍ김해(金海)ㆍ양산(梁山) 등 여섯 읍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운송하여 서울로 보냈는데,
밀양 부사가 받는 것을 감독하고 제포 만호(薺浦萬戶)가 거느리고 가 바쳤다.
진도 뇌진(磊津) : 남쪽으로 35리이다. 수산진(守山津) : 남쪽으로 40리이다. 용진(龍津) : 남쪽으로 36리이며,
수산진 하류이다. 오우진(五友津) : 남쪽으로 40리이며, 용진 하류로서 오른쪽으로는 김해(金海)와 연접하여 통
한다.
교량 내포교(內浦橋) : 작원(鵲院) 앞에 있다.
누정 읍승정(揖升亭)ㆍ응향루(凝香樓) : 모두 읍내(邑內)이다.
사원 예림서원(禮林書院) : 명종 정묘년(1567)에 건립하고 현종 기유년(1669)에 사액하였다.
김종직(金宗直) : 자는 계온(季溫)이고,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벼슬은 형조 판서인
데 영의정을 추증하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박한주(朴漢柱) : 자는 천지(天支)이고, 호는 우졸재(迂拙齋)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연산주 갑자년(1504)에 화를 입었다. 벼슬은 헌납이고,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표충사(表忠祠) : 영종 계해년(1743)에 건립하고 같은 해에 사액하였다.
석 휴정(釋休靜) : 자는 현응(玄應)이고, 호는 청허(淸虛)라고도 하고 서산(西山)이라고도 하는데, 속성(俗姓)
은 최씨이며,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선조 임진년(1592)에 승군(僧軍)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니, 국일자도
대선사 도총섭(國一紫都大禪師都摠攝)의 호를 하사하였다.
석 유정(釋惟政) : 자는 이환(離幻)이고, 호는 사명(泗溟)이라고도 하고 송운(松雲)이라고도 하는데, 속성은 임
(任)씨이고, 본관은 풍천(豐川)이다. 벼슬은 지중추부사이고, 사시(私諡)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임진년에 휴정을 대신하여 도총섭(都摠攝)이 된 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다.
석 영규(釋靈圭) : 임진년에 중 7백 명을 일으켜 창의(倡義)하였다.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을 따라 왜적을
토벌하다가 금산(錦山)에서 순국하였다. 지중추부사를 추증하였다.
[주 D-001] 청작(靑雀) : 바람개비 새로 그 새가 바람에 잘 견디어 날므로 용(龍)과 함께 뱃머리에 그렸는데,
그 새겨진 바람개비의 머리도 바람개비라고 부른다.
[주 D-02] 늦은 봄[慾沂川] : 공자가 제자들에게 바라는 바를 묻자, 증자는,“기수에서 목욕하자고 한다.”고
하였다.
[주 D-03] 소부(召父) : 한 나라 때의 사람 소신신(召信臣)을 말하는데,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있을 때 선정
을 베풀어서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後漢書》
[주 D-004] 댓잎[三湘葉] : 삼상은 중국의 대나무로 이름있는 소상(瀟湘)·이상(離湘)·증상(蒸湘)을 가리킨다.
삼상엽은 삼상에서 나는 대나무를 말한다.
[주 D-05] 난초 줄기[九畹莖] : 구원은 《초사(楚辭)》의 “난지구원(蘭芝九畹)”에서 나온 말로서 난초가 있는
곳이다.
[주 D-06] 금경(金莖) : 창주(滄州)에 금지(金池)가 있고, 여기에 금경꽃이 있는데, 이것을 따지 않고는
선계(仙界)에 갈 수 없다고 한다.
[주 D-007] 한 갈대[一蘆] 위로 바다를 건넜던가. : 달마 존자(達磨尊者)가 갈대 위에 서서 바다를 건너 중국
에 와서 불도를 전하였다는 말이 있다.
[주 D-08] 쌍수(雙樹) 앞 : 쌍수는 부처가 이승을 떠난 곳인데, 쌍림(雙林)이라고도 한다. 쌍수 앞이란 부처의
영혼 앞이란 뜻이다.
[주 D-009] 인대 황각(麟臺黃角) : 인대는 기린각(麒麟閣)으로, 한 나라의 효무제(孝武帝)가 기린을 잡고서
이 누각을 짓고, 뒤에 공신 11명의 화상을 여기에 그렸다. 황각은 재상이 사무 보는 곳이다.
[주 D-10] 왕장군(王將軍) : 곧 왕희지(王羲之)로 영화(永和) 9년(353)에 난정기(蘭亭記)를 지었다.
청도군 淸道郡
동으로 언양현(彦陽縣) 경계까지 1백 18리, 경주(慶州) 경계까지 92리, 남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40리,
동부(同府)의 풍각현(豐角縣) 경계까지 16리, 북으로 대구부(大丘府) 수성현(壽城縣) 경계까지 24리,
경산현(慶山縣) 경계까지 2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이서소국(伊西小國)이었는데,
신라 유리왕이 정벌해서 빼앗고 뒤에 구도성(仇刀城) 경내의 솔이산(率伊山) : 이(伊)는 사(巳)로도 쓴다.
경산(慶山) : 가산(茄山)이라고도 한다. 오도산(烏刀山) 등 세 성과 합쳐서 대성군(大城郡)을 설치했다.
구도(仇刀)는 구도(仇道), 오야산(烏也山)은 오례산(烏禮山)이라고도 하는데, 오도산(烏刀山)이 그 지방인 듯
하다.
경덕왕 때에 구도를 오악현(烏岳縣)으로 개칭하고, 경산을 형산현(荊山縣)으로 개칭하고, 솔이산을 소산현
(蘇山縣)으로 고쳐서 모두 밀성군(密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초기에 세 성을 다시 합쳐서 군으로 하여 지금의 이름 일명 도주(道州) 으로 고쳤다가 곧 밀성에 붙였다.
예종 4년(1109)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혜왕 때에 군 사람 김선장(金善莊)이 공이 있어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다시 감무가 되었고,
공민왕 15년에 다시 군이 되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 1명씩이다.
군명 도주(道州)ㆍ오산(鰲山)ㆍ이산(伊山)ㆍ이서(伊西)ㆍ대성(大城)ㆍ마악(馬岳).
성씨 본군 신(申)ㆍ김(金)ㆍ백(白)ㆍ이(李)ㆍ조(曺). 최(崔)ㆍ손(孫) : 모두 들어온 성이다.
풍속 풍속은 검약하고 솔직한 것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安)》에 있다.
산천 오산(鰲山) : 군의 남쪽 2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동쪽에 한 골짜기가 있어 고사동(高沙洞)이라 하는
데, 하늘에서 장차 바람이나 비가 오려면 먼저 운다. 구름 기운이 솟아서 구름이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 비가
오고, 구름이 골짜기 밖으로 나오면 바람이 불며, 크게 울면 그날로 효험이 있고,
작게 울면 2, 3일 지나서야 효험이 있다.
운문산(雲門山) : 군의 동쪽 96리에 있다. 오혜산(烏惠山) : 군의 동남쪽 31리에 있다.
마곡산(馬谷山) : 군의 동쪽 1백 13리에 있다. 갑을령(甲乙嶺) : 군의 서쪽 54리에 있다.
성현(省峴) : 군의 북쪽 23리에 있다.
자천(紫川) :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근원은 밀양부 비슬산(琵瑟山)에서 나와서 유천(楡川)에 이르러,
운문천(雲門川)과 합치고 동부(同府)의 추화산(推火山) 동쪽에 이르러 재악천(載岳川)과 합쳐서 성(城) 남쪽에
이르러 응천(凝川)이 된다.
운문천(雲門川) : 군의 동쪽 90리에 있다. 근원은 운문산에서 나와서 유천에 이르러 자천과 합친다.
유천(楡川) :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곧 자천과 운문천이 합치는 곳이다.
금물법지(今勿法池) : 군의 북쪽 14리에 있다.
신증 거연(巨淵)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용단(龍壇)이 있어서 가뭄을 만나면 비를 빈다.
이목연(李木淵) : 운문사 남쪽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물(神物)이 있어서 비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토산 종이ㆍ벌꿀ㆍ은구어(銀口魚). 젓대[笛竹] : 군의 동쪽 와암리(臥巖里)에서 나온다. 석이버섯ㆍ송이버섯ㆍ
감ㆍ밤ㆍ칠ㆍ호두. 석류황(石硫黃) : 마곡산에서 나온다. 지황ㆍ복령 신증 닥나무.
봉수 남산 봉수 : 군의 남쪽 10리에 있는데, 남으로 밀양부 분항(盆項)에 응대하고, 북으로 팔조현(八助縣)에
응대한다.
팔조현 봉수 : 군의 북쪽 24리에 있는데, 남으로 남산에 응대하고, 북으로 대구부 법이산(法伊山)에 응대한다.
누정 청덕루(淸德樓) : 객관 동쪽에 있는데, 지군(知郡) 최안을(崔安乙)이 세우고, 최원우(崔元祐)가 기문을
지었다.
○ 전녹생(田祿生)의 시에, "해우(廨宇)는 언덕 밑에 높다랗고, 높은 누각은 꼭대기를 누르고 있네.
하늘에 평지가 있어, 더운 여름이 서늘한 가을 같구나. 민력(民力)은 원래 빌지 않았으니, 누명(樓名)이 과연 뜬
말 아닐세. 굳이 사시의 경치를 말할 것 있나. 청덕(淸德)이 최후(崔侯)를 설명해 주네." 하였다.
○ 고려 심효생(沈孝生)의 시에, "고군(古郡)에는 진기한 경치가 많은데, 높은 누각이 언덕 머리에 있네.
여염 30리에 문물(文物)이 몇 천 년이냐. 일월(日月)은 술병 안에 길이 머무르고, 산천은 거울 속에 떠 있네.
여기서 세상을 피하기 좋구나. 공업(功業)일랑 공후(公侯)에게 맡기세."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날 저문데 다락에 오른 객이, 성취한 일 없이 늙어만 가네. 나무에 부는 바람 비를 보낼
듯하고, 보리는 벌써 익어가네. 고을이 오래 되었으니 지령(地靈)이 뛰어나고, 산이 비껴 있어 검푸른 빛을 띠었
네. 떠돌다가 도리어 자리를 얻었네. 청안(靑眼)에 어진 원이 있구나."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군각(郡閣)에 아름다운 조망이 넉넉하여, 큰 언덕이 끝이 없구나.
누가 출새곡(出塞曲)을 부나. 사객(詞客)은 비추부(悲秋賦)를 짓네. 나무가 떨어지니 들이 도리어 멀고, 연기가
일어나니 산이 뜬 것 같구나. 누가 장차 현송(絃誦)으로 다스려,
능히 무성후(武城侯 무성의 원 언언(言偃)을 말함)를 계승하랴." 하였다.
신증 청향루(淸香樓) :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성현역(省峴驛) : 성현 아래에 있다. 본도의 속역(屬驛) 16개, 곧 용가(龍駕)ㆍ쌍산(雙山)ㆍ 내야(內野)ㆍ
일문(一門)ㆍ범어(凡於)ㆍ유천(楡川)ㆍ설화(舌化)ㆍ금동(金洞)ㆍ양동(良洞)ㆍ수안(水安)ㆍ온정(溫井)ㆍ
오서(鰲西)ㆍ무흘(無訖)ㆍ유산(幽山)ㆍ매전(買田)ㆍ서지(西芝) 역을 찰방(察訪)한다.
○ 찰방 1인이 있다. 유천역(楡川驛) :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서지역(西芝驛) : 군의 동쪽 81리에 있다.
매전역(買田驛) : 군의 동쪽 50리에 있다. 오서역(鰲西驛) :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제생원(濟生院) : 군의 남쪽 24리에 있다. 양원(陽院) : 군의 북쪽 19리에 있다.
공암원(孔巖院) : 군의 동쪽 86리에 있다. 길이 암벽 사이에서 나와서 마치 문 같은데 수십 보가 된다.
이길원(利吉院) : 군의 서쪽 12리에 있다.
신증 냉천원(冷泉院)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늑원(勒院) :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여의원(如意院) :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불우 적천사(磧川寺) : 오산 남쪽에 있다.
○ 중 인각(麟角)의 시에, "숲 너머 산에서 종소리 멀리 들려 나오니, 푸른 봉우리에 절이 있겠구나.
나무가 빽빽하여 문 비추는 달빛 가리고, 골짜기가 비어서 문 두드리는 지팡이 소리에 대답하네. 물은 흰 명주
를 깔아 온전한 돌에 흐르고, 무지개는 푸른 깁을 끌어다 고소(古松)에 걸었네. 늙은이 며칠 머무름을 괴이타
마라. 그 옛날 보조(普照)가 유적(遺跡)을 보였네." 하였다.
운문사(雲門寺) : 운문산 아래에 있다. 처음 이름은 작압(鵲岬)인데, 신라의 고승 보양(寶壤)이 창설한 것이다.
고려 태조가 편액을 내리기를, "운문선사(雲門禪寺)라 하였다. 윤언이(尹彦頤)가 지은 승 원응(圓應)의 비문이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남쪽 2리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폐성(吠城) : 군의 동쪽 7리에 있는데, 동서가 모두 석벽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동으로
정벌하여 군의 경계에 이르렀는데, 산적이 이 성에 모여서 웅거하면서 항복하지 않자, 태조가 봉성사(奉聖寺)
의 중 보양에게 물으니, 보양이 이르기를, "개는 천성이 밤을 맡고 낮을 맡지 않으며 앞만 지키고 그 뒤는 잊으
므로,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공격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따르니, 적이 과연 패하였다고 한다.
오혜산성(烏惠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9천 9백 80척, 높이가 7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안에 시내가 3, 못이 5, 샘이 3개가 있다.
○ 지금 살펴보건대, 구도(仇刀)는 오례산(吳禮山)이라고도 하는데, 예(禮) 자는 혜(惠) 자와 소리가 근사하니,
바로 이 성인 것 같다.
매전 부곡(買田部曲) : 지금은 역 마을이 되었다.
북곡부곡(北谷部曲) : 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부곡부곡(釜谷部曲) : 군의 북쪽 15리에 있다.
명환고려 금의(琴儀) : 정치하는데 있어서 강정(剛正)하여 흔들리지 않으므로 한쪽에서는 청도의 철상공(鐵相
公)이라고 불렀다.
민종유(閔宗儒) : 군에 대성(大姓)이 많아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불리는데, 종유가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고 법에
의해서 다스렸으므로 잘 다스린다고 가장 이름났다.
본조 문여량(文汝良) : 지군(知郡)이다. 신증 이굉(李汯)ㆍ이윤(李胤)ㆍ안구(安覯)
인물고려 김지대(金之岱) : 처음 이름은 충룡이었다. 학문을 힘쓰고 글을 잘하며, 풍모가 헌출하고 깨끗하며 척
당(倜儻)하여 큰 뜻을 가졌다.
고종 때 강동(江東) 싸움에 아버지가 군대에 참여하게 되자 지대가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갔다. 전사(戰士)들이 방패 머리에 모두 기이한 짐승을 그렸는데, 지대는 홀로 한 절구(絶句)를 쓰기를, "나라
걱정이 신하의 걱정이요, 어버이 근심이 자식의 근심일세. 어버이를 대신하여 보국(報國)하면 충과 효를 다 닦
을 수 있네." 하였다. 원수(元帥) 조충(趙冲)이 군사를 점열하다가 보고 놀라서 그 까닭을 묻고, 그 사람됨을 알
아서 일을 시켰다.
이듬해 기묘년에 개선하여 돌아와서 과거에 1등으로 합격하니, 규례에 따라 전주사록참군(全州司錄參軍)을
제수받았다. 드센 자를 누르고 외로운 자를 돌보아주며, 귀신같이 일을 적발하였다.
뒤에 전라도를 안찰(按察)하러 나가서는 최항(崔沆)이 보낸 중 통지(僧通知)를 강 속에 빠뜨려 죽였다.
최항이 아버지를 이어 정권을 잡자 비록 전의 유감을 품고 있었으나 지대가 청렴하고 삼가서 허물이 적었기 때
문에 해칠 수 없었다. 지위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김선장(金善莊). 김한귀(金漢貴) : 감찰대부(監察大夫)이었다.
공민왕이 그 청을 쫓아서 본현을 지군사(知郡事) 고을로 승격시켰다.
효자본조 김극일(金克一) :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를 위해 종기를 빨고
아버지를 위해 설사를 맛보았다.
전후로 여묘살이 6년을 했는데, 한 호랑이가 무덤 곁에서 새끼를 젖먹이니, 극일이 제사지내고 남은 것을 먹이
기를 가축을 기르듯이 하였다. 아버지에게 천첩(賤妾) 두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와 같이
섬겼고, 그들이 죽자 모두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 천순(天順) 갑신년에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문하였다.
이관명(李官明) : 그 어머니가 밤에 범에게 물려 가는데, 때마침 큰 비가 와서 천지가 칠흑같이 어두워 이웃 사람
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 나오지 않으니, 관명이 13살인 누이 연가(延加)와 9살인 조카딸이 있는데,
혼자서 이 두 아이와 함께 범을 쫓아갔다. 오른손에 도끼를 잡고 왼손에 횃불을 잡고서 5, 6리쯤 가서 불이 꺼지
자, 솔가지를 따서 횃불을 만들어 다시 1, 2리를 쫓아가서 범을 꾸짖고 어머니의 시체를 빼앗아 돌아오니,
동네 사람들이 슬퍼하고, 관을 만들어서 장사 지냈다.
박윤손(朴閏孫) : 수군(水軍) 박동(朴同)의 아들이다. 17살에 어머니가 빨래하는데 따라갔다가 범이 어머니를
물어 가자, 윤손이 왼손으로 어머니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돌을 던지며 5리 남짓 쫓아갔다. 이웃 사람들이 듣고
와서 구하자, 범이 드디어 버리고 갔는데, 그 어머니는 한밤중에 이르러 죽었다.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려하고 복호(復戶)하였다.
신증 종비(從非) : 군리(郡吏) 김군산(金郡山)의 아내이다.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죽어서는 상을 마치자 영당(影堂)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제시 지내기를 살아 있을
때에 섬기 듯이 하였다.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려하였다.
제영 당시예악이서국(當時禮樂伊西國) : 이첨(李詹)의 시에, "당시 예악은 이서국에 있었고, 오늘날 정기(旌旗)
는 원수(元帥)가는 곳에 있네." 하였다.
청덕루중취옥적(淸德樓中吹玉笛) : 이첨의 시에, "비파 소리 속에는 양주곡(楊州曲)이요, 비취 주렴 앞에는
태백(太白)의 잔이로다. 청덕루 안에서 옥적을 부니, 1년에 세 번 돌아가기를 즐기네." 하였다.
일구현고다교목(一區縣古多喬木) : 김효정(金孝貞)의 시에, "한 고장 오랜 고을에 큰 나무 많고, 사면 추녀가
트여 좋은 산을 대하네." 하였다.
[비고]
토산 잣(海松子)ㆍ호도(胡桃)ㆍ자초(紫草)ㆍ은구어(銀口魚)ㆍ이어(鯉魚)
고읍 소산(蘇山) : 동으로 50리이며, 매전역(買田驛) 땅이다. 본래 솔이산성(率伊山城)이다.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소산이라 고쳐서 밀성군(密城郡)의 영현을 삼았고, 고려 초에 본군에 합하였다.
오악(烏岳) : 남으로 35리이며, 유천역(楡川驛) 땅이다. 본래는 오도산성(烏刀山城)인데 오구산(烏邱山)ㆍ
오례산(烏禮山)ㆍ오야산(烏也山)ㆍ구도성(仇道城)이라고도 부른다.
경덕왕 16년에 오악이라 고쳐서 밀성군의 영현을 삼았으며, 고려 초에 본군에 합하였다.
형산(荊山) : 동남으로 7리이며, 폐성(吠城) 땅이다. 본래는 가산성(茄山城)인데 이서국기(伊西國基)라고도 하
며 가산(駕山)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16년에 형산으로 고쳐서 밀성군의 영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에 본군에
합하였다.
방면 상읍내(上邑內) : 읍으로부터 동서쪽으로 10리이고, 남북쪽으로 7리이다.
차읍내(次邑內) :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상동(上東) : 동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1백 10리인데, 동은 경주(慶州)와 접해 있고, 서는 자인(慈仁)과 접
해 있으며, 북은 영천(永川)과 접해 있다.
중동(中東) : 동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70리이다. 상남(上南) : 동남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70리이
다.
하남(下南) : 남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상북(上北) :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5리이다.
차북(次北) :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내종(內終)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5리이다.
외종(外終) : 동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적암(赤巖) : 동남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내면(內面) :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외서(外西) :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60리인데,
창녕(昌寧) 동쪽 경계를 넘어 있다.
○ 매전 부곡(買田部曲)은 바로 매전역 땅이다. 북곡 부곡(北谷部曲)은 동쪽으로 25리이다.
부곡 부곡(釜谷部曲)은 북쪽으로 15리이다.
성지 읍성(邑城) : 선조 24년(1591)에 쌓았는데, 1천 5백 70보(步)이다.
봉수 북산(北山) : 북쪽으로 24리이다.
창고 읍창(邑倉)ㆍ상동창(上東倉) : 동쪽으로 90리이다. 하남창(下南倉) : 동쪽으로 10리이다.
서창(西倉) : 외야면(外也面)이다.
토산 닥나무.
사원 자계서원(紫溪書院) : 선조 무인년(1578)에 건립하고, 현종 신축년(1661)에 사액하였다.
김극일(金克一) : 본관은 김해이며, 벼슬은 지평인데, 집의를 추증하였으며, 사시(私諡)는 절효(節孝)이다.
김일손(金馹孫) : 목천(木川)에 보인다.
김대유(金大有) : 자는 천우(天佑)이고, 호는 삼족당(三足堂)이며, 일손의 조카이다. 벼슬은 정언이고, 응교를
추증하였다.
제 27권 경산현 慶山縣
동쪽으로 경주부(慶州府) 경계까지 9리, 남쪽으로 청도군(淸道郡) 경계까지 29리,
서쪽으로 대구부(大丘府) 경계까지 21리, 북쪽으로 하양현(河陽縣) 경계까지 21리,
서울과의 거리가 7백 1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압량(押梁 : 압독(押督)이라고도 함.)은 작은 나라였는데 신라(新羅) 지미왕(祗味王)이 이를 점령
해서 군(郡)을 만들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장산(獐山)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년에 장산(章山)으로
고쳤다. 현종(顯宗)이 경주(慶州)에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이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선왕(忠宣王) 초년에 임금의 이름과 음이 같은 점을 피하여 지금 이름(경산)으로 고쳤으며 충숙왕(忠肅王)이
국사(國師) 일연(一然)의 고향이라 해서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다.
공양왕(恭讓王)이 왕비(王?) 노씨(盧氏)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켜,
본조(本朝) 태조(太祖) 때에 다시 현령(縣令)으로 낮추었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압량(押梁)ㆍ압독(押督)ㆍ장산(獐山)ㆍ장산(章山)ㆍ옥산(玉山).
성씨 본현(本縣) 전(全)ㆍ김(金)ㆍ백(白)ㆍ서(徐)ㆍ유(劉) : 모두 당(唐) 나라에서 투화(投化)했다.
녹(綠)ㆍ주(珠) : 모두 일본(日本)에서 투화했다. 박(朴)ㆍ정(鄭)ㆍ노(魯) : 모두 온[來] 사람들이다.
풍속 풍속이 검소하고 소탈함을 숭상한다. :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산천 마암산(馬巖山) : 현의 남쪽 21리에 있는 진산(鎭山), 동학산(動鶴山) : 현의 서쪽 8리에 있다.
장고산(長鼓山) : 현의 동쪽 4리에 있다.
황율천(黃栗川) : 현의 북쪽 9리에 있다. 영천군(永川郡) 보현산(普賢山)에서 발원하여 성주(星州) 무계진(茂溪
津)으로 들어간다.
남천(南川) :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마암산(馬巖山)에서 발원하여 황율천(黃栗川)으로 들어간다.
갑지(甲地) : 현의 동쪽 11리에 있다.
토산 은구어(銀口魚)ㆍ입초(笠草)ㆍ붕어[?魚]ㆍ대추ㆍ매실ㆍ백복령ㆍ벌꿀.
봉수 성산봉수(城山烽燧) :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북쪽으로 하양현(河陽縣) 시산(匙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대구부 수성현(大丘府壽城縣) 법이산(法伊山)에 응한다.
누정 망북루(望北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차군헌(此君軒) : 채신보(蔡申保)의 기(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을유(乙酉)년 초여름에 부임해서 관사에 있는데 한 달이 넘지 못하여 자식을 잃는 액운을 만났다.
창과 문지방, 뜰과 섬돌에 지난날 드나들던 모습과 글 읽는 소리가 항상 귀에 들리는 듯, 눈에 보이는 듯하니,
우울하여 여기에 어찌 오래 있을 수 있겠는가. 동쪽에 무성한 숲과 키 큰 대나무가 있어 낡은 집을 비치니 옛 청
사였다. 가서 보니 먼지는 낡은 벽을 덮고 이끼는 헌 기왓장에 끼어 있다.
무너진 담과 남은 주초에는 푸른 풀만이 가득한데, 오직 동헌[廳事]과 서쪽 마루[西軒]만은 우뚝하게 홀로 남
아 있다. 나는 이것을 수리할 것을 결심하고 아전에게 차례로 돌려 가면서 공사하도록 명했다. 기울어진 기둥은
바로 세우고, 깨진 기와는 갈아끼웠다. 또 옛 재목을 가지고 안팎의 낭무(廓?)를 만들었다.
초가을에 시작해서 늦가을에 완공하여 가족들을 데려다 거처하기 시작했다. 기왓장 하나에 새겨진 것을 보니 연
우(延祐) 7년(1320)에 만들었고, 그때의 감독과 목수의 성명이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원(大元) 연우(延祐)로부터 지금까지 계산하면 2백여 년만에 중수(重修)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고 싶어하
는 것이 아니고 하게 되어 있는 운수라 하겠다.
이 땅은 연우(延祐) 이전으로 올라가 천지가 개벽(開闢)한 때까지 소급될 것이고, 오늘 이후로 내려가 천지가 뒤
집힐 때까지 이를 것이니 강하(江河)가 뽕나무 밭이 되며 또 관청이 되기를 얼마나 많이 할지를 알 수 없는 일이
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작게는 개인의 영욕에서, 크게는 국가의 성쇠(盛衰), 음양(陰陽), 소장(消長)의 이치에 이
르도록 모두 일정한 운수가 있는 것이지 맘대로 옮기고 망녕되어 움직일 수 없는 것인데,
이제 갑자기 인위적(人爲的)인 지혜나 꾀를 그 속에 베풀려고 하니, 이는 한갓 스스로 곤란함을 취하는 것이다.
마루 앞에 대나무 숲을 묶어 세운 듯한 바람 부는 달밤을 만나거나,
눈 오는 아침에 대하면 탐욕으로 더럽혀진 속세의 마음이 얼음녹듯 풀어진다.
아름다운 손이나 좋은 친구와 더불어 푸른 댓잎 소리 들으며 그 밑에서 거나하게 먹고 마시면,
이야말로 양주(楊州)의 학(鶴)이 아닌가! 왕자유(王子猶 왕휘지(王徽之)의 자(子))의 '하루도 차군(此君 대[竹])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뜻을 따라 여기에 '차군헌(此君軒)'이란 현판을 다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 : 현의 서쪽 3리 되는 곳에 있다.
역원 압량역(押梁驛) : 현의 동쪽 12리 거리다. 속설에 전하기를 압독국(押督國)의 옛터라고 한다.
건흥원(乾興院) : 현의 북쪽 18리 거리다. 신원(新院) : 현의 남쪽 20리 거리다.
월연원(月淵院) :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시지원 : 현의 서쪽 11리 거리다. 광리원 : 현의 남쪽 1리 거리다.
불우 심천사(深泉寺)ㆍ망월사(望月寺)ㆍ밀암사(密巖寺)ㆍ구주사(鳩住寺) : 모두 동학산(動鶴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 : 성산(城山)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포성(古浦城) : 현의 서쪽 9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1백 70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금성(金城) : 현의 남쪽 7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1백 55척이더니 지금은 없어졌다.
우곡성(于谷城) : 현의 서쪽 6리에 있다.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신라 때 이 세 성을 합쳐서 압량군(押梁郡)을
만들었고, 통합한 뒤에는 고쳐서 세 성으로 만들었다.
신라 명환 김유신(金庾信) : 진덕왕(眞德王) 때에 압량주 군주(押梁州軍主)가 되었는데 군사 일에는 관심이 없
는 듯 항상 음주와 풍악을 즐겼으므로 고을 사람들은 용렬한 장수로 여겼으며 한 번도 싸우지 못하는 것을 한스
럽게 여겼다. 유신은 그 사람들을 쓸만하다 생각하고, 곧 백제(百濟)를 쳐서 크게 승리하고 적장 8인을 사로잡
았다.
김인문(金仁問) : 무열왕(武烈王) 때에 압량주총관(押梁州總管)이 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쌓아 요새지(要塞地)를
만든 공으로 식읍(食邑) 3백호를 받았다. 본조 손욱(孫旭) : 부지런하고 근신하며 법을 잘 받들었다.
신증 안만철(安萬哲).
인물
고려 김정미(金庭美) : 충선왕(忠宣王)을 따라서 원(元) 나라에 들어가 공을 세웠고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다.
본조 전백영(金伯英) : 벼슬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평(文平)이다.
효자 본조 손일선(孫日宣) : 부모상을 당해서 3년 동안 여막에서 살았다.
세종조(世宗朝) 때 이 일이 조종에 알려져서 정문이 세워지고 서요직(西窯直)이 제수되었다.
제영 산색농저함(山色濃低檻)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다. "옛 고을이 말[斗]보다 큰데, 사군(使君)의 재주는
강과 같도다. 어진 소문은 으뜸이었으니, 치적 또한 짝할 이 없으리. 산 빛은 짙어 난간에 나직하고,
가을 소리가 가느다랗게 창에 들어오네. 선비들의 아름다운 모임 성하니, 이 글 쓰는 붓 장광[?]과 같네."
[비고]
연혁 선조(宣祖) 34년에 대구(大邱)와 합하였다 : 왜적으로 인하여 시들어 쇠잔한 까닭이다.
40년에 다시 분리되었고,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邑內) : 사방으로 끝이 7리이다.
상동(上東) : 처음은 7리, 끝은 10리. 하동(下東) :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중남(中南) : 처음은 5리, 끝은 20리.
외남(外南) :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서면(西面) : 처음은 7리, 끝은 20리. 북면 : 처음은 7리, 끝은 15리.
성지 읍성(邑城) : 둘레는 4천8백 척이며 서문(西門)은 진옥루(鎭玉樓)라 부른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3년에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른다.
토산 대ㆍ연자(蓮子)ㆍ자초(紫草)
하양현 河陽縣
동쪽으로는 영천군(永川郡) 경계까지 6리, 남쪽으로 경산현(慶山縣) 경계까지 18리,
서쪽으로 같은 현(縣) 경계까지 30리, 북쪽으로 영천군(永川郡) 경계까지 12리, 서울과의 거리는 6백 42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하주(河州)였는데 성종(成宗) 14년에 자사(刺史)를 두었더니.
현종(顯宗)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縣)을 만들어 경주부(慶州府)에 붙이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하주(河州)ㆍ화성(花城)
성씨 본현 : 허(許)ㆍ현(玄)ㆍ제(諸)ㆍ유(兪)ㆍ김(金). 안심(安心) : 전(全)ㆍ박(朴)ㆍ이(李)ㆍ최(崔)ㆍ신(申)ㆍ
김(金)ㆍ허(許)ㆍ노(魯)ㆍ형(荊). 이지(梨旨) : 이(李)ㆍ윤(尹)ㆍ안(安).
산천 무락산(無落山) : 현에서 12리에 있는 진산(鎭山). 초례산(醮禮山)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고려 태조가 동수(桐藪)에서 견훤(甄萱)을 치고, 이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공산(公山)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병풍암(屛風巖) : 현의 서쪽 14리에 있다.
남천(南川) : 현의 남쪽 5리에 있으며, 영천군(永川君) 동경도(東京渡) 하류(下流)임.
대지(大池) : 현의 동쪽에 있다. 동자지(童子池) : 현의 남쪽에 있다.
토산 대추[棗]ㆍ입초(笠草)ㆍ붕어[鯽魚]ㆍ은어(銀魚)
봉수 시산봉수(匙山烽燧) : 현의 남쪽 7리에 있다. 동쪽으로 영천군(永川郡) 성황당(城隍堂)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경산현(慶山縣) 성산(城山)에 응한다.
누정 용벽루(聳碧樓) : 동헌(東軒) 동쪽에 있다. 영락(永樂) 병신(丙申)년에 현감(縣監) 송을개(宋乙開)가 세웠
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가 있다. "시야 속에서 날던 새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텅 빈 누각은 반공중에 서
있네. 굵은 마디 긴 대나무는 천 개의 옥삭(玉槊 대의 별명)이요, 가는 허리 연약한 버들은 만 가닥 금실일세.
청천(晴川)의 좋은 글귀 지금은 어디 있는가. 고목(孤鶩)의 높은 재주 교만할 것 없네. 누각에 오르니 생각도 많
은데, 이른 아침 산 허리엔 비를 뿌리네."
관서정(觀逝亭) : 현의 남쪽 4리 지점에 있다. 앞에는 큰 냇물이 평평한 넓은 들을 감돌아 흐른다.
영락(永樂) 갑진(甲辰)에 현감(縣監) 채륜(蔡倫)이 세웠다.
학교 향교 : 현의 서쪽 3리 거리에 있다.
역원 화양역(華陽驛) : 현의 서쪽 7리 거리에 있다.
폭괘원(幅掛院) : 현의 서남쪽 18리 거리에 있다. 시천원(匙川院) : 현의 동쪽 5리 거리에 있다.
불우 신림사(新林寺) : 무락산(無落山)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갈대 태워 6월 더위 돋우니, 금기(金氣 가을 기운)는 움츠리고 화기(火氣 여름
기운)는 가슴을 떠네 붉은 기운 우주에 뻗치니, 이글이글 새 가마 연 듯 어찌 풀과 나무만 타겠는가?
모래도 돌도 다 탄다네.
내 이슬 먹는 신선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이 번거로움 피할 수 있으리. 마음속이 타고 있으니 이 답답함 언제나
가시려나. 근심스레 앉았으니 스스로 편치 않네.
조용히 더위 씻을 곳 생각한다면 돌아가는 길 멀다고 어찌 사양하리. 나귀 타고 다른 고을로 향하니, 내와 육지
가 이렇게도 먼가. 모인 강물은 흰 비단이 비치듯, 겹친 산봉우리에는 푸른 옥을 묶은 듯. 서남쪽으로 통한 한
줄기 길, 꾸불꾸불 산허리를 감았네. 이끼를 밟고 고찰을 찾으니, 아름다운 경계라 속세를 떠나 있네.
연기와 안개 는 골짜기에 자욱하고, 측백나무 잣나무 공중에 솟았다. 뜰 앞에 냇물은 콸콸 흐르고,
난간 밖에 바람은 으스스하다. 초가집 암자엔 노승이 하나 방장(方丈 승의 거처하는 방)에서 우뚝하게 앉아 있
다. 눈속의 원숭이가 저렇게 싸느랄까 서리맞은 갈매기가 저렇듯 고고할까. 향 연기는 가늘게 피어오르고,
꽃잎은 가볍게 흩날린다.
선(禪)을 닦은 마음 물욕은 버렸지만 옛 친구는 아직 차마 못 잊네. 조용히 마주보고 앉아서, 담소하며 맑은 바
람(淸風 : 고상한 인격) 일으킨다. 서늘한 자리에 놀란 물결 일어나 찌는 더위 식혀주네. 갈건(葛巾)을 쓰니 머리
손질 귀찮고, 부채[葵扇]를 잡아 이따끔 흔드네. 조용한 분위기 내 맘에 맞아서, 돌아가고 싶은 생각 내키지 않
네. 요란한 매미 소리에 저녁 노을 붉어 오고, 잔잔한 종소리에 아침 구름 휜해진다. 아침에 시를 읊으면 낮이 후
딱 가고, 저녁에 취하면 밤새우기 일쑤지. 한 번도 지적 없는 소 학사(蘇學士 : 소동파), 삽수(霅水 땅 이름)에서
삼료(參廖)와 마주했다." 하였다.
남태사(南泰寺) : 시산(匙山)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말 위에서 시내와 산 백 겹이나 지나서, 황혼에야 비로소 범왕궁(梵王宮 절)에
도착했네. 눈 덮인 일천 봉우리는 반공중의 물결이요. 온갖 구멍에서 나는 바람 소리는 평지의 천둥일세.
시든 부들에 시름겹게 앉으니 몸이 떨려오고, 마른 삭정이를 쾌하게 태우니 다리가 활같이 굽네. 그대를 시켜
술을 청해 함께 마시니, 얼었던 뺨이 금시에 난만하게 붉어지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양량촌부곡(陽良村部曲) : 현의 서쪽 12리에 있다. 이지부곡(貍只部曲) : 현의 서쪽 8리에 있다.
안심소(安心所) : 명산(明山)이라고도 한다. 공산(公山) 밑에 있다.
양량원(陽良院) : 옛날 양량부곡(陽良部曲)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이지폐현(梨旨廢縣) : 신영현(新寧縣) 서쪽 20리에 있다. 본래 영주(永州) 이지은소(梨旨銀所)였다. 고려 말년에
현으로 승격되어 영주에 소속되고, 본조(本朝) 태조(太祖) 때에 이곳[하양]에 속했다.
○ 최해(崔瀣)의 비석에 쓰기를, "지원(至元) 후원년(後元年)에 상호군(上護軍) 안자유(安子由) 등이 중국 서울
에 갔다가 돌아올 제, 천후(天后)의 명령으로 부마이신 선왕에게 복명하여 말하기를, '영주(永州)의 이지은소는
옛날에는 현을 삼았었는데 중년에 이 고을 사람들이 국가의 명령을 어겼다고 폐지하였고, 백성들의 재산을 몰
수했으며 백금(白金 : 은이다)을 세금으로 받아 은소(銀所)라고 일컬은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그곳 토인(土人) 나수(那壽)와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어려서부터 중국 궁중에 내시로 있어 수고로운 일을
많이 했다. 그 공으로 그의 고향을 다시 현(縣)으로 승격시켜라.' 하였다.
그래서 임금이 유사(有司)를 시켜 중국의 뜻대로 시행하였다.
이듬해에 나수가 사신이 되어 귀국, 고향을 영화롭게 했다. 본래의 터가 비좁다고 자리를 고을 서쪽으로 옮겼다.
본래의 터에서 몇 발자국 떨어졌고 현사(縣司)와 장리(長吏)를 다시 두어 처음과 같이 햇다. 5년 뒤에 야선불화
의 향함(香函)을 갖고 잇달아 와서 '이 고장이 회복되게 된 전말 사실 기록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사왕(嗣王)에게
비문을 청했으므로 내가 늙었다고 사양할 수가 없어서 명(銘)을 지어 이 비를 보는 자들을 깨우쳐 준다.
나수(那壽)는 벼슬이 봉의대부 견용태감(奉議大夫甄用太監)에 이르렀고, 야선불화(也先不花)는 중의대부 중서
사승(中議大夫中瑞司丞)에 올랐으니, 성은 모두 이씨(李氏)다.
본국에서도 나수에게는 신안군(信安君)을 봉하고, 야선불화는 영리군(永利君)이라고 이름해서 삼대(三代)에 걸
쳐 모두 추봉(追封)했다. 그 아들이 귀하게 되어 장차 중국 조정으로부터 추봉, 증직(贈職)될 것은 여기에서는 생
략한다." 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너의 나라 선군(先君)이 동쪽 나라를 정할 때에 그 산천(山川) 형세로 따르고,
크고 작은 터를 보아서 현(縣)을 세우고 주(州)를 두었다. 밝게 훈계하여 이르시기를, '조금도 더하고 덜함이 없
게 하라.' 하였으나, 때로는 운명이 스스로를 깎아냈다.
오직 이 이지현(梨旨縣)은 영주(永州)에 소속되었는데 전하는 말에 옛날에 고을 유생[邑子]들이 스스로 중흥
[修擧 : 회복함]하지 못하여서 온 고을이 엎어졌다.
죄를 간직하고 수치심을 당하고 폐지되어 은호(銀戶)로 삼았었다. 세월이 길고 길지만 특출한 자가 이 수치심을
씻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고향을 생각[狐正首岳 : 여우가 죽을 때 살던 굴쪽으로 머리를 둔다]하랴!
그 의리가 참으로 돈독함에 천후의 은혜가 넓고 두터우며[后命旣優] 국가의 은혜 또한 두터웠다.
아, 나는 알았노라. 이치란 진실로 확장되고 단축된다는 것을 한 사람이 똑똑지 못하여 몇 사람이 굴욕을 받았다
든가! 오랜만에 회복되는 데는 이 두 사람의 힘이 컸으니 그 사람의 옳고 그른 것이 혁파되기도 하고 그대로 있기
도 한다. 변화를 관찰하려거든 여기에 새긴 글을 보라." 하였다.
명환 본조 채륜(蔡倫).
인물 본조 허주(許周) : 벼슬이 판한성부윤(判漢城府尹)에 이르렀다.
허조(許稠) : 주(周)의 아우다.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는 동안 훌륭한 치적을 나타냈다. 벼슬이 의정
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이르렀는데 , 볍령에 한결 같았다.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세상에서 어진 정
승[賢相]을 일컬을 제는 조(稠)와 황희(黃喜)를 우두머리로 친다. 세종(世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허주(許倜) : 조(稠)의 아우. 벼슬이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이르렀다.
허성(許城) : 주(周)의 아들. 벼슬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공간(恭簡)이다.
허계(許誡) : 주(倜)의 아들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이르렀다.
본조 윤인후(尹仁厚) : 나이 9세에 아버지 상을 당해서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태종조(太宗朝) 때에 그 일
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허중견(許仲堅) : 고을 아전이다. 아버지를 위하여 여막을 짓고 살았다.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이 세워졌다.
신증 신휴(申休) : 아버지가 병이 나자 항상 똥 맛을 보아 병 증세를 대중했고, 소변을 보지 못하자 빨아서 낫게
했다. 아버지가 죽자 상제 노릇을 극진히 하였다.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이 세워졌다.
[비고]
연혁 선조(宣祖) 34년에 □□□에 합쳤다 : □□□이 쇠잔한 때문이다.
40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41년에 옛터의 남쪽 5리 되는 천천면(泉天面)으로 읍내를 옮겼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邑內) : 끝은 5리이다. 북면(北面) : 끝은 10리이다. 마양(磨陽) : 서쪽 끝은 10리이다.
와촌(瓦村) : 동쪽 끝은 10리이다. 중림(中林) : 남쪽 끝은 13리이다.
낙산(樂山)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18리이다. 안심(安心) : 서쪽으로 처음은 23리이고, 끝은 30리이
다.
○ 양량촌부곡(陽良村部曲)은 서쪽으로 12리다. 이지부곡(貍只部曲)은 서쪽으로 8리다.
안심소(安心所)는 일명 명산(明山)이며 팔공산(八公山) 밑에 있다. 즉 안심면이다.
사원 금호서원(琴湖書院) : 숙종 갑자년에 건립되고, 정종 경술년에 사액되었다.
허조(許稠) : 태묘(太廟)에 보라.
인동현 仁同縣
동쪽으로 성주(星州) 경계까지 43리, 남쪽으로 같은 주계(州界)까지 57리,
서쪽으로 개령현(開寧縣) 경계까지 33리,
북쪽으로 선산부(善山府)계까지 15리다.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사동화현(斯同火縣)이던 것을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이 경산부(京山府)에 소속시켰고,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본조(本朝)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속현 약목현(若木縣)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대목현(大木縣) 또는 칠촌(七村)이라고도 하며,
곤산(昆山)이란 이름도 있다. 경덕왕(景德王)이 '계자(谿子)'로 고쳐 부르고 성산군(星山郡)의 영현(領縣)을 삼
았었다.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경산부(京山府)에 부쳤다가 뒤에 여기에 소속시켰다.
칠진(漆津) 서쪽 27리에 있다.
신증
성현(成俔)의 시(詩)에, "옛 고을은 숲 기슭에 의지해 있고, 집들은 언덕을 끼고 나누어져 있네.
정자 향나무는 푸른 그림자 퍼져 있는 듯, 언덕 위의 보리는 누른 구름이 떠 있는 듯. 집[院]이 고요하니 새소리
요란하고, 높은 누각은 저녁 햇살 마주 했네. 밥 상에 게[蟹]와 자라 놓인 것 같고, 비로소 여기가 강촌인 줄 알
았네."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사동화(斯同火)ㆍ수동(壽同)ㆍ옥산(玉山).
성씨 본현 장(張)ㆍ유(兪)ㆍ유(劉)ㆍ심(沈)ㆍ고(高). 약목(若木) 이(李)ㆍ유(柳)ㆍ한(韓)ㆍ김(金) : 촌(村).
백(白) : 속이다.
산천 유악산(流嶽山) :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옥산(玉山) : 현의 동쪽 50보(步)에 있다.
금오산(金烏山) : 약목현(若木縣) 북쪽 10리에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남숭산(南崇山)이라고 하는데 이는 해주(海州)의 북숭산(北崇山)과 상대하여 부르는 것이다.
여기 돌 성이 있는데 자세한 것은 선산부(善山府)에 있다.
천생성산(天生城山) : 변의 동쪽 8리에 있다.
사면에 깎아 세운 듯한 석벽이 성이 되었다. 하늘이 만든 것 같다 해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 가운데 못 네 개가 있다.
박집산(朴執山) : 현의 남쪽 35리에 있다. 칠진(漆津)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곧 선산부(善山府) 보천탄(普泉灘)
하류로서 성주(星州)에 이르러서 소야강(所耶江)이 된다.
신증 북천(北川) : 현의 북쪽 10리에 있으니 근원은 유악산(流嶽山)에서 나왔다.
토산 은어ㆍ호도(胡桃)ㆍ감ㆍ지황(地黃)ㆍ꿀ㆍ붕어[鯽魚]
봉수 건대산봉수(件岱山烽燧)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남으로 박집산(朴執山)에 응하고, 북으로 선산부(善山府)
석현(石峴)에 응한다.
박집산봉수(朴執山烽燧) : 남쪽으로 성주(星州) 각산(角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건대산(件岱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宮室) 망호헌(望湖軒) :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강혼(姜渾)의 기(記)에 쓰기를, "군읍(郡邑) 객관의
차림이란 토목(土木)의 역사를 일으켜 가지고 크고 고운 것을 자랑하라는 것뿐이 아니다.
왕인(王人 임금의 명령을 받드는 사람)을 높이고 등급(等級)을 엄하게 해서 한 고을의 규모를 이루는 것이니,
그 관계가 어찌 소중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일을 간략하게만 하려는 수재(守宰)들은 객관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도 이는 내 일이 아니니, 뒷사람에게 맡긴다고 말하니 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리요.
이런 까닭에 수재(守宰)가 관사(館舍)를 수리하는 데에는, 부득이 고쳐야 되는 것을 고치지 않는 자와,
고치지 않아도 될 것을 고치는 자가 있는데 그 잘못은 마찬가지다.
혼(渾)이 지난해에 국가의 은혜를 입어 영남(嶺南)의 절도사[節 감사]가 된 그해 여름에 순행하다가 인동현
(仁同縣)에 이르러 보니, 그곳 수재(守宰)는 금후 치담(琴侯致湛)이었다.
나를 맞아 예를 행한 뒤에 동헌(東軒) 고옥(古屋)에 내 관사(館舍)를 정해 주었는데, 비좁고 사방이 막혀서 답답
해 있을 수가 없었다. 서헌(西軒)을 보니 이제 막 공사를 하다가 마치지 못한 채로 있었다.
나는 그 공사를 직접 가보고 비로소 읍재(邑宰)가 이 공사를 부득이해서 하는 것임을 알았고, 또 그가 국가의 일
을 봉행하는 데 부지런하고 민첩하게 진행시키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그해 가을에 두번째로 순시하여 보니, 이른바 새로운 서헌에 관사를 정해 주는데, 헌(軒)에는 온돌(溫突)이 있고
북쪽에 누각 세 칸이 있으며, 누각 아래에는 네모진 못을 파고 물을 끌어 들여 졸졸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 있었
고, 못 둘레에는 꽃나무를 심고 담을 쳐서 둘렀다.
헌(軒)의 남쪽에는 7칸 방을 만들어 도사(都事)가 거처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문이나 방 모양이 영롱하고 단청
(丹靑)이 선명(鮮明)하였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다보면 그 서쪽으로는 긴 강물이 멀리 흐르는데, 평평한 언덕과 모래사장이 푸른 풀과 얽혀
있는 것은 칠진(漆津)이요, 푸른 모습 뾰죽한 봉우리에 아침 구름, 저녁 안개가 조석으로 모양이 변해서 측량할
수 없는 것은 금오산(金烏山)이니, 이 금오산은 곧 충신(忠臣) 길재(吉再)가 옛날에 숨어 있던 곳이다.
문부와 공사를 끝낸 다음 아전은 흩어져 가고 뜰은 비었는데, 두건을 젖혀 쓰고 휘파람 불면서 서쪽 산 상쾌한
기운을 들여 마시고, 앞사람의 잘한 일을 생각하면서 만족한 듯 스스로 즐거워했다.
그 뒤에 지난 일을 추억할 적마다 맘속에 떠오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올 여름에 휴가를 얻어 남쪽으로 가는 중
이었는데 금후(琴侯)가 역정(驛亭)으로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집을 지었으니 반드시 기(記)가 있어야 합니
다. 더구나 이곳 신헌(新軒)은 전에 대감이 황화(皇華 나라 사절)로서 다녀간 곳이 아닙니까?
원컨대 한 마디 글을 지어서 우리 읍의 영광이 되게 하시오.' 한다. 내가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본 바를 그대로
적어서 주는 것이다.
한편 금후의 벼슬하여 직책을 수행하는 재능[操刀之神]과 현령의 직을 수행하는 재능[割鷄之能]은 노는 인부
를 사역시키고, 송사에서 받은 수입으로 번거롭지 않게 일을 이루고 수고롭지 않게 공사를 마쳤다는 것은 전일
에 보고 들어서 아는 바이지만 인동(仁同)은 작은 고을인데 금후의 재능을 어찌 다 쓸 수 있으리오.
자리를 맡게 된다면 틀림없이 재능을 다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누정 인풍루(仁風樓) : 동헌(東軒) 동쪽에 있다. 영락(永樂) 정유(丁酉)에 현감(縣監) 강생민(康生敏)이 세웠다.
경풍루(慶風樓) : 약목현(若木縣)에 있다.
○ 정통(正統) 무진(戊辰)에 현감 신우경(辛遇慶)이 세웠다.
학교 향교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박서생(朴瑞生)의 기(記)가 있다.
○ 윤상(尹祥)의 시(詩)에, "몇 길 되는 담장에 높다란 누각, 광풍제월(光風霽月 산뜻한 바람 비 갠 뒤의 달) 몇
해런가. 이제부터 옥산(玉山)에 재사가 많을 것이고 태수(太守)의 아름다운 명성 물과 함께 흐르리다." 하였다.
역원 양원역(楊原驛) :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동안역(東安驛) : 약목현(若木縣) 동쪽에 있는데 현과의 거리가 30리다.
종자원(種子院)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소야원(所也院) : 현의 동쪽 41리에 있다.
초원(草院)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광혜원(光惠院) : 약목현(若木縣) 남쪽 12리에 있다.
석적원(石積院) : 현의 동쪽 24리에 있다.
신증 교량 석교(石橋)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불우 선봉사(僊鳳寺) : 금오산(金烏山) 동쪽에 있는데, 고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임존(林存)이 지은 승려
의천(義天)의 비석이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총묘 길재묘(吉再墓) : 현의 서쪽 14리 오태산(吳泰山)에 있다.
고적 소목부(小木部) : 고려 태조(太祖) 10년에 견훤(甄萱)이 장수를 보내어 벽진(碧珍)을 침략, 대목(大木),
소목(小木) 두 군(郡)의 곡식을 베어 갔다하는데, 지금은 어느 곳인지 자세치 않다.
저항부곡(猪項部曲) : 약목현(若木縣) 북쪽 8리에 있다.
명환 본조 김빈(金鑌) : 뒤에 요(銚)로 고쳤다.
인물 고려 유원순(兪元淳) : 사람됨이 침착하고 말이 적고 겸손하며, 박문강기(博文强記 :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많음)하며, 더욱이 고문(古文)에 능해서 세상에서 일컫기를 원순의 글[元淳之文]이라고 했다.
고종(高宗)이 어렸을 때 그에게 배웠으며, 즉위한 뒤에 왕의 은혜가 깊었고 드디어 사부(師傳)가 되었다.
벼슬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 원순의 이름이 우리 태조(太祖)의 어휘(御諱 단(旦))를 범했다해서 자(字)를 대신 썼다.
본조 장말손(張末孫) : 과거에 급제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참예했고 영복군(迎福君)에 봉해졌다.
제영 공관수동여(公館壽同餘) : 장수(張脩)의 시(詩)에, "천성(天城)은 혁거세(赫居世)의 뒤에 생겼고, 공관(公館)
은 수동(壽同) 남은 터에 있네."라 하였다.
화부반성음(花覆半城陰) 김요(金銚)의 시에, "바람은 구름을 몰아서 한 시내에 비가 오게 하고 꽃은 덮어 성의 절
반을 그늘지었네."라 하였다.
권렴북색응창옥(捲簾竹色凝蒼玉)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에, "발을 걷으니 대나무 빛은 푸른 옥이 엉킨 듯,
베개에 의지해 있으니 솔바람 소리 푸른 물결 치는 듯."이라 하였다.
[비고]
연혁 선조(宣祖) 37년에 도호부(都護府)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올렸다 : 41년에 조방장을 없앴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읍호 옥산(玉山).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 대구진관 병마 동첨절제사(大邱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한다. 한 사람씩이다.
방면 읍내(邑內) : 사방이 5리다. 북서(北西) : 처음은 10리, 끝은 15리다.
동서(東西) : 처음은 15리, 끝은 25리다.
석적(石積)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5리다.
문량(文良) : 동남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35리다. 장곡(長谷)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다.
북삼(北三)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다. 약목(若木) : 서남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다.
기산(岐山) : 서남으로 처음은 4리, 끝은 50리다. 위의 3면(面)은 약목 고현(古縣)의 땅이다.
○ 서항부곡(緖項部曲).
성지 천생산성(天生山城) : 동쪽으로 8리인데, 본래 신라의 옛 성이다.
본조(本朝) 선조(宣祖) 34년에 곽재우(郭再祐)가 외성(外城)을 쌓았는데, 둘레는 3천 6백 12척이다.
사면에는 깎아 세운 듯한 석벽(石壁)이 하늘 높이 서 있고, 성안에는 네 개의 못[池]이 있다.
창고 읍창(邑倉) 중지창(中旨倉) : 남쪽으로 30리 강변이다. 현창(縣倉) : 약목(若木) 고현이다.
서창(西倉) : 기산면(岐山面)이다.
역참 양원참(楊原站).
진도 칠진(漆津) : 서쪽으로 10리다. 선산(善山) 보천탄(寶泉灘) 하류요, 성주(星州) 소야강(所耶江) 상류다.
비산진(緋山津) : 서북으로 7리다.
토산 대나무[竹].
사원 오산서원(吳山書院) : 선조 갑술(甲戌)에 건립하고 광해주 기묘에 사액하였다.
길재(吉再) : 선산(善山)에 보인다.
동락서원(東洛書院) : 효종(孝宗) 갑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장현광(張顯光) : 성주(星州)조에 보임.
현풍현 玄風縣
동쪽으로 밀양부(密陽府) 풍각현(豐角縣) 경계까지 33리, 남쪽으로 창녕현(昌寧縣) 경계까지 16리,
서쪽으로 고령현(高靈縣) 경계까지 16리, 북쪽으로 성주(星州) 가리현(加里縣) 경계까지 23리,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리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의 추량화현(推良火縣)이다. : 추(推)는 혹 삼(三)으로도 쓴다. 경덕왕(景德王)이 현요
(玄驍)로 고쳐서 화왕군(火王郡)의 영현(領縣)을 삼았으며,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은 밀성군(密城郡)에 붙였고
공양왕(恭讓王)은 감무(監務)를 두고 밀성(密城) 구지산부곡(仇知山部曲)을 베어서 소속시켰다.
본조(本朝)에서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추량화(推良火)ㆍ현요(玄驍)ㆍ포산(苞山)ㆍ현풍(玄豐).
성씨 본현 문(文)ㆍ임(林)ㆍ곽(郭)ㆍ윤(尹)ㆍ박(朴) : 밀양(密陽). 하(河) : 창녕(昌寧).
김(金) : 안정(安定). 구지산(仇知山) 변(卞).
산천 비슬산(琵瑟山) 일명 포산(苞山)이다.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또한 성주(星州), 밀양(密陽), 창녕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이 승사(僧舍)에 쓴 시에, "속객(俗客)이 먼 길을 달려 왔는데, 고승(高僧)은 조그만 정자에
누워 있네. 구름은 아침에도 저녁에도 희고, 산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푸르구나. 지나간 일은 적송자를 좇고,
정한 곳 없는 여행 지령(地靈)에 부끄럽네. 은근히 시냇물 길어다가, 한 웅큼 인삼과 복령(茯苓)을 달이네."
하였다.
금사산(金寺山) : 현의 서쪽 9리에 있다. 광탄(廣灘) : 현의 서쪽 5리 낙동강(洛東江) 하류에 있다.
답곡진(沓谷津) : 현의 서남쪽 20리 광탄(廣灘) 하류에 있다.
마정진(馬丁津) : 현의 남쪽 27리 답곡진(沓谷津) 하류에 있다.
장택(長澤) : 현의 서쪽 9리에 있다. 둘레가 4리요, 못가에 금계돈(金溪墩)이 있다.
신증 대암(臺巖) :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대지택(大技澤)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과을포(寡乙浦)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토산 자초(紫草)ㆍ붕어[鯽魚]ㆍ잉어[鯉魚]ㆍ꿀[蜂蜜]ㆍ오매(烏梅)ㆍ대나무[竹]ㆍ복령(茯苓)ㆍ
백화사(白花蛇)ㆍ석류(石榴).
성곽 서산성(西山城) :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8백 23척, 높이가 6척이다.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소산봉수(所山烽燧) : 현의 북쪽 6리에 있다. 남쪽으로 창녕현(昌寧縣) 합산(合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성주 가리현(星州加利縣) 말응덕산(末應德山)에 응한다.
누정 앙풍루(仰風樓) : 객관(客館) 남쪽에 있다.
○ 이첨(李詹)의 기(記)는 다음과 같다. "대지[大塊]의 부는 기운이 만물에 부딪치는 것을 바람이라 한다.
교화(敎化)가 유행(流行)하고 백성들이 유행을 따르는 것이, 바람이 물건에 부딪치면 물건이 움직이게 되는 것
과 같다. 그러므로 윗사람의 가르침을 또한 풍(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풍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교화(敎化)가 미치는 곳으로 쏠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자는 천하(天下)의
바람이요, 제후(諸侯)는 한 나라의 바람이요, 수령(守令)은 군(郡)이나 현(縣) 등 한 지역의 바람이다.
현풍(玄風)에 감무(監務)를 둔 지는 이미 오래다.
중간에 밀성(密城)에 소속되었는데 아전들이 명령을 받고 이현에 나가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토관(土官 지방관
리)을 업신여기고 백성들을 속였으며 그들을 업신여기고 그들의 재산을 침탈했다.
또 징발(徵發) 때문에 백리길을 오가는 동안 백성들은 피폐하고 논밭은 황폐하여 현의 이름만 겨우 유지해 왔다.
경오(庚午)년에 이르러 관찰사(觀察使) 김공(金公)이 현풍(玄風)처럼 못사는 고을 10여 현(縣)의 폐단을 상소하
였다. 조정은 새로 감무(監務)를 정해 보내서 폐해를 개혁하는 정사를 행하기로 하였다.
요령은 사람을 잘 쓰는 데 있으므로 선택을 매우 정밀하게 하였는데 전평원(田平遠)이 이 선택에 들었다.
그는 그 해 여름 6월에 처음 오자, 잘 공경하고 부지런해서 모든 일을 다스릴 것을 계획했다. 우선 생도(生徒)들
을 모아 효제(孝悌)를 가르치고, 예절[揖遜]을 익히게 함으로써 풍화(風化)를 돈독하게 하였다.
또 나이 많은 이를 존경하고 장사지내고 제사지내는 것을 삼가고, 고아(孤兒)ㆍ과부(寡婦)를 불쌍히 여기게 함
으로써 풍속을 바로잡았다.
처음에는 백성들의 불신도 있었지만 읍내에 객사(客舍)를 새로 짓고 들판에 두 채의 정자를 세워서 손님을 보내
고 맞는 곳으로 하였다.
전후는 백성들을 모으고 앞에서 말하기를, '관의 품수[官品]와 명기(名器 벼슬과 그에 따른 의복ㆍ기물)는 각각
다르기 마련이다.
이 고을이 전에 밀성(密城)에 소속되었을 적에는 정자나 객관(客館)이 없어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현(縣)에서 승
격되어 군(郡)이 되고, 상민(常民)이 참예하여 아전이 되었으니, 관사(官舍)를 새로 지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감히 말 수 있는데 하지 아니하고, 너희들의 힘만 허비하겠는가.' 하고, 더욱 백성을 위무하
자 백성들은 고달픔도 잊고 즐겨 일하여 정자와 관사가 완성된 것이다.
이리하여 사신들이 여기에서 쉬게 되었으니 이른바 집이 ‘크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美哉輪奐]’ 교외(郊外)
에서 손을 맞고 보내는 집이 생긴 것이다. 여기 오르고 내리고 절하고 부복하는 전 감무[田侯]의 모양과 법도가
볼 만한 뒤에야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며 전후가 하던 말이 과연 옳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더욱이 학문을 배우는 것은 인륜(人倫)을 밝히는 것이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왕도(王道)를 행하는 것이라 사람은 본래 타고난 천성(天性)이 있는 것인데, 누가 이것을
어길 수 있겠는가. 교화(敎化)가 3년을 행하자 없어졌던 온갖 예절이 되살아났다.
객사(客舍) 남쪽에 누각(樓閣)을 짓고 그 아래에 문을 만들어 왕래에 편하고, 올라가 구경하기에 쾌하게 하였다.
사신이 이 누(樓)에 오르면 먼길을 온 여독도 잊게 되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위로될 만하다.
이 누각을 짓는 데 관사와 정자를 지을 적보다 더 빨랐던 것은 이는 백성들이 의리를 생각하기 때문에 부리기가
쉬웠던 때문이다.
군(郡) 이름이 풍(風)이요 전 감무가 군자(君子)의 풍이 있고 누각의 낙성이 마침 이 고을 백성들이 그의 풍화를
숭앙하던 때였으므로 '앙풍(仰風)'이라고 이름했던 것이다.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의 풍도를 들으면 왕악
한 자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가 뜻을 세우며, 각박한 자가 후해지고 비루한 자가 너그러워진다고 한다.
무릇 이 누에 오르는 자는 풍화(風化)가 어디서 온 것인 줄 알지 못하면 되겠는가.
오늘 나는 서울 가는 길에 현풍을 지나게 되었다. 전 감무가 동헌(東軒)에 술을 차려 함께 마시고 나서 나에게 기
(記)를 청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윤길보(尹吉甫)가 신백(申伯)을 위해서 사호(肆好)의 시(詩)를 지었고,
중산보(仲山甫)를 위해서 목여(穆如)의 송(頌)을 지었으니, 나와 전 감무는 동갑 친구라 내 전 감무의 풍화를 칭
송하는 것이 그에게 욕될 것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신증 누정 사겸루(思謙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쌍산역(雙山驛)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풍제원(豐濟院) : 현의 서쪽 1리에 있다.
소도촌원(所道村院) : 현의 북쪽 12리에 있다. 장파고원(長破高院) : 현의 북쪽 19리에 있다.
신원(新院) : 현의 북쪽 17리에 있다.
불우 대견사(大見寺) : 비슬산(琵瑟山) 남쪽 모퉁이에 있다. 신라(新羅) 헌덕왕(憲德王)이 세운 절이다.
소재사(消災寺)ㆍ도성사(道成寺)ㆍ속성사(速成寺)ㆍ정백사(庭柏寺) : 모두 비슬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 : 비슬산에 있다. 세간에 전하기를, "정성대왕(靜聖大王)의 신(神)이 장마나 가뭄, 역질이 있을 때에 기도
하면 응답이 있으므로 제사지내려는 자가 몰려들었다. 여기에 모인 종이와 베는 활인서(活人署)에 보내게 했다."
한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포산(苞山) : 신라(新羅) 때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란 두 스님이 포산(苞山)에 은거했는데 서로 10여 리
쯤 떨어져 있었지만 자주 만났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 싶으면 나무들이 모두 남쪽으로 구부러졌고 관기(觀機)
가 도성(道成)을 부르고 싶으면 나무들이 모두 북쪽으로 누웠다.
뒷사람들이 시로써 찬미했다. "서로 찾아 달을 밟고 운천(雲泉)을 희롱하니, 두 늙은이의 풍류(風流)가 몇 백 년
이나 되었는가. 구렁에 가득 찬 연기와 안개 고목(古木)에 남아 있어,
구부렸다 일어서는 찬 그림자 아직도 서로 맞이하는 듯."
유가사(瑜伽寺) : 비슬산 밑에 있다.
○ 김지대(金之岱)의 시(詩)에, "절 하나 연하(煙霞) 속에 무사하게 서 있으니, 어지러운 산 푸른 물방울 가을빛
이 짙었네. 구름 사이 끊어진 돌층계 6, 7리요. 하늘 끝 먼 멧부리는 천만 겹일세. 차 마시고 솔 처마 쳐다보니
반달이 걸려 있고, 독경 무르익는 풍탑(風榻)에 쇠잔한 종소리 들리네. 흐르는 냇물은 옥띠[玉帶] 띤 손을 웃겠
지, '씻고 싶어도 씻어지지 않는 게 세속의 먼지.‘라고 하였다.
구지산부곡(仇知山部曲) : 현의 서남쪽에 있다.
본조 명환 전평원(田平遠) : 고려 말년에 감무(監務)가 되었다. 앙풍루기(仰風樓記)에 자세하다.
인물 고려 곽원진(郭元振)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 좨주(成均祭酒) 통헌대부(通憲大夫) 진현관 제학
(進賢館提學)에 이르렀다.
곽충관(郭忠貫) : 원진(元振)의 아들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중대부 상서좌승(大中大夫尙書左丞)에
이르렀다.
곽부(郭郛) : 충관(忠貫)의 아들이다. 추충익대공신(推忠翊戴功臣)으로서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
렀고,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졌다.
곽거인(郭居仁) : 부(郛)의 아들이다. 아우 유의(游義)와 함께 모두 벼슬이 전공 판서(典工判書)에 이르렀다.
막내 아우 유례(游禮)는 벼슬이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다.
본조 곽종(郭宗) : 거인(居仁)의 아들이다. 고려 이정간(李貞幹)의 방(榜)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통정대부
지상원군사(通政大夫知祥原郡事)에 이르렀다.
효자 고려 곽의(郭儀) : 벼슬이 판전객서에 이르고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본조 채굉(蔡宏) : 벼슬이 감무(監務)를 지냈고 아버지 상을 당하자 술을 마시지 않았고 3년 동안 여막에 살면
서 자기 집에 왕래한 적이 없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이 세워졌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창녕에 합했다가 다시 군이 되었다. 《文獻備考》
방면 동부(東部) : 끝이 8리다. 서부(西部) : 끝이 5리다. 논공(論工) : 동쪽으로, 처음은 8리, 끝은 20리다,
유가(瑜伽)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다. 혜만(兮萬) : 남쪽으로, 끝이 10리다.
말역촌(末亦村)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15리이다. 묘동(妙洞) : 남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다.
구지산(仇知山) : 본래 부곡인데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다.
마산(馬山)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다. 산전(山田)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다.
모로촌(毛老村) : 서남쪽으로 처음은 8리, 끝은 15리다. 오설(烏舌) : 서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다.
걸산(乬山)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다. 진촌(津村) : 서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7리다.
답곡(沓谷)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25리다.
왕지(王旨) : 상지(上旨) 우(右) 삼면은 낙동강(洛東江)의 서쪽에 있다.
성지 고성(古城) : 서쪽으로 4리이며, 서산성(西山城)으로 불리는데 둘레가 1천 8백 59척이다.
석문성(石門城) : 석산성(石山城)이라고 불리며 서남쪽으로 20리다. 선조(宣祖) 30년 왜란에 곽재우(郭再祐)가
옛 성터를 다시 쌓았다. 둘레가 2천 7백 59척이다.
창고 읍창(邑倉)ㆍ강창(江倉) : 서쪽으로 5리다.
진도 답곡진(沓谷津) : 서남쪽으로 20리다. 마정진(馬丁津) : 남쪽으로 27리, 답곡진 하류다.
사원 도동서원(道東書院) : 선조 을사년에 건립하였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김굉필(金宏弼) : 문묘에 보인다.
정구(鄭逑) : 충주에 보인다.
의흥현 義興縣
동쪽으로 영천(永川) 신녕현(新寧縣) 경계까지 45리, 남쪽으로 성주(星州) 경계까지 48리,
대구부(大丘府) 경계까지 51리, 서쪽으로 군위(軍威) 효령현(孝靈縣) 경계까지 26리,
북쪽으로는 의성현(義城縣) 경계까지 18리고,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6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의흥군(義興郡)이던 것을 현종(顯宗) 9년에 안동부(安東府)에 소속시켰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본조(本朝)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속현 부계현(缶溪縣) : 현의 남쪽 31리에 있다. 본래 삼국(三國) 때 부림현(缶林縣)이었는데, 고려 초년에 지금
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상주(尙州)에 붙였다가 뒤에 선주(善州)로 옮겨 소속시켰고, 공양왕
(恭讓王) 때에 이곳 의흥에 소속되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이다.
군명 귀산(龜山)ㆍ귀성(龜城).
성씨 본현 전(全)ㆍ박(朴)ㆍ김(金)ㆍ이(李)ㆍ백(白).
부계(缶溪) 예(芮)ㆍ홍(洪)ㆍ유(兪)ㆍ김(金)ㆍ전(錢)ㆍ유(柳) : 내(來). 이(李)ㆍ윤(尹)ㆍ안(安) : 이지(梨旨).
풍속 풍속이 순후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한다. : 관풍안(觀風安)에 보라.
산천 용두산(龍頭山) : 현의 동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선암산(船巖山) : 현의 동쪽 17리에 있다.
국통산(國通山) : 현의 서쪽 17리에 있다. 화산(華山).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공산(公山) : 부계현(缶溪縣) 남쪽 42리에 있다.
풍혈(風穴) : 화산(華山) 기슭에 있다. 넓이가 3척 2촌, 길이가 2척 8촌이다. 바람이 구멍에서 나오는데 몹시
차서 초여름에도 반드시 얼음이 얼었다. 성산(城山)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남천(南川) :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수원이 청송부(靑松府) 보현산(普賢山)에서 발원하여 현의 서쪽 15리에
이르러서 부계현 남천과 합류, 군위현(軍威縣)의 병천(倂川)이 되었다.
부계남천(缶溪南川) : 현의 남쪽 백 보(步)되는 곳에 있다. 수원이 공산(公山)에서 발원한다.
토산 꿀ㆍ송심(松蕈)ㆍ인삼ㆍ자초(紫草)ㆍ석심(石蕈)ㆍ자기(磁器)ㆍ백화사(白花蛇)ㆍ칠(漆)ㆍ입초(笠草)ㆍ
지황(地黃).
봉수 승목산봉수(繩木山烽燧)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북쪽으로 의성현(義城縣) 영니산(盈尼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토현(吐峴)에 응한다.
토현봉수(吐峴烽燧) : 현의 남쪽 31리에 있다. 동쪽으로 엿동산(餘叱洞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승목산(繩木山)과 군위현(軍威縣) 박달산(朴達山)에 응한다.
엿동산봉수(餘叱洞山烽燧) : 현의 남쪽 42리에 있다.
동쪽으로 영천군(永川郡) 성산(城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토현(吐峴)에 응한다.
누정 남루(南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우곡역(牛谷驛)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남원(南院)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의루원(義樓院) : 현의 남쪽 13리에 있다. 이조원(李趙院)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신원(薪院) : 부계현(缶溪縣) 북쪽 5리에 있다. 전구이원(錢拘伊院) : 부계현 동쪽 15리에 있다.
범박원(凡朴院) : 부계현 동쪽 18리에 있다. 갑원(甲院)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신원(新院) : 현의 남쪽 44리에 있다. 양야원(陽也院)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불우 인각사(麟角寺) : 화산(華山) 동네 어귀에 있는데 석벽(石壁)이 깎아지른 듯하다. 속담에 전하기를, "옛날
기린(麒麟)이 이 석벽에 뿔을 걸쳤다 해서 이렇게 불렀다." 한다.
민지(閔漬)가 지은 보각(普覺) 스님의 비명(碑銘)이 있다.
신증 유호인(兪好仁)의 시(詩)에, "예전에 노승이 살던 곳, 연기와 석실(石室)이 안개에 잠겨 있네.
시내와 산은 참다운 면목이요, 꽃과 버들은 그대로가 풍광(風光)일세. 속세 바깥이라 티끌도 깨끗하고, 한가로
움 속엔 세월도 길다. 창에 기대 편안히 한숨 자고 막 깨어나려는데, 새벽 종소리 요란하네." 하였다.
수태사(水泰寺) : 선암산(船巖山)에 있다. 신흥사(新興寺) : 도봉산(到鳳山)에 있다.
성불사(成佛寺) : 국통산(國通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동쪽 5리에 잇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피토부곡(皮土部曲) : 현의 남쪽 11리에 있다. 고로곡부곡(古老谷部曲) :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니화촌(尼火村)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성산성(城山城) : 둘레가 1천 1백 10척의 토성(土城)인데 지금은 없어지고 안에 두 개의 똘이 있다.
공산성(公山城) : 둘레가 3천 75척, 높이 10척인 석성(石城)이었는데 지금은 반쯤 무너졌다.
안에 우물 둘과 똘 셋이 있다.
신증 명환 본조 김수문(金秀文).
인물 본조 예승석(芮承錫) : 부계현(缶溪縣) 사람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재능 있는 관리로 이름이 났다.
신증 홍귀달(洪貴達)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찬(參贊)에 이르고, 시호(諡號)는 문광(文匡)이다.
문장이 아담하고 힘찼으며 오랫동안 대제학(大提學)의 자리에 있었다. 호(號)는 함허정(涵虛亭)이다.
홍언충(洪彦忠) : 귀달(貴達)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했고 시(詩)를 잘한다는 평을 받았으나 일찍 죽었다.
연산(燕山) 갑자(甲子)년에 귀양갔을 적에 끝내 죽을 것을 예측하고 스스로 만사(挽詞)를 짓기를, "대명(大明)
천하 먼저 해돋는 나라, 사나이의 성은 홍(洪)이요, 이름은 충(忠), 자는 직(直)이다.
반평생을 못나게 살아 글자 공부만 하다가 32세에 세상을 마치네. 명(命)은 이렇게 짧은데 뜻은 왜 그렇게 길었
던가. 옛 고을을 택하니, 그곳이 무림(茂林) 땅일세.
위에는 푸른 산 아래는 굽은 시내. 먼 훗날 누가 이 들을 지나다가 여기를 가리키고 서성거리면서 반드시 슬퍼
할 자 있으리." 하였다.
신증 효녀 본조 유금(有今) : 할아버지가 몹쓸병에 걸렸는데 손가락을 잘라 약에 피를 타서 먹이니 병이 나았다.
금상 20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제영 우성도화연계사(偶成圖畫沿溪寺) : 이규보(李奎報)의 시(詩)에, "좋은 경치 끝이 없고 밥 먹이는 손 많은데,
맛은 사탕수수처럼 씹을수록 아름다워, 우연히 그린 것은 시냇가의 절이요,
따로 풍류(風流)를 점령한 것은 버들에 비친 집일세. 물결이 급하니 노는 물고기 떨어지는 돌에 부딪치고,
바위 비었으니 새는 장난치며 꽃을 잡아당기네.
이 속에 삼신산이 있다고 들었는데, 봉래(蓬萊), 영주(瀛州)의 길이 막혔다고 누가 말하나."라 하였다.
임정조망청(林亭眺望淸) :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시골[山郡]에 길손 적으니, 숲 속 정자에 조망(眺望)이 맑구
나. 이제 시끄러운 속세의 일 없으니, 야인(野人)의 감정이 저절로 나네." 하였다.
헌고산영근(軒高山影近) : 권진(權軫)의 시(詩)에, "여름날에 올라가 구경하기 좋으니, 관청이 한가롭고 집은 밝
도다. 마루가 높으니 산 그림자 가깝고, 처마 가지런하니 오후의 서늘함 생기네. 초가집에 사람의 말소리 적고,
나무 사이엔 새소리 많이 나네. 스스로 부끄러운 건 귀밑터럭 흰 사람이, 꾸물꾸물 헛이름 위해 바쁜 것이라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읍호 부계(缶溪) : 남쪽으로 31리, 본래 신라 때 읍을 세웠는데 옛 이름은 알 수 없다.
경덕왕 16년에 부림이라 고쳐 숭선군(崇善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태조 20년에 부계로 고쳤다.
현종 9년에 상주(尙州)에 속했다가 후에 옮겨서 선주(善州)에 속했으며 공양왕 2년에 내속했다.
방면 중리(中里) : 남쪽 끝이 5리다. 하리(下里) : 서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다.
우보리(牛保里) : 서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다. 내화리(乃化里)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다.
사립(巳立)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다. 소수리(小首里)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다.
신남(身南)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부동(缶東)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다.
현내(縣內) : 남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40리다. 부남(缶南) :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다.
부서(缶西) : 서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다.
○ 피토부곡(皮吐部曲)은 남쪽으로 11리다. 고로부곡(古老部曲)은 동쪽으로 20리다.
니화촌(尼火村)은 서쪽으로 10리다.
성지 화산성(華山城) : 숙종(肅宗) 35년에 성을 쌓다가 그만두었는데 둘레가 9천 3백여 보(步)이다.
고성(古城) : 동쪽으로 2리이며 성산(城山)이라고도 한다. 둘레가 1천 1백 10척이다.
고성(古城) : 팔공산(八公山) 부계(缶溪) 고현(古縣)에 있으며 서쪽으로 40리, 둘레는 3천 75척인데,
지금은 가산(架山) 성지(城址)에 들어갔다.
창고 읍창(邑倉) : 둘이다. 부계창(缶溪倉) : 고현(古縣)에 있다.
신녕현 新寧縣
동쪽으로 영천군(永川郡) 경계까지 10리, 남쪽으로 같은 군 경계까지 5리,
서쪽으로 의흥현(義興縣) 경계까지 11리,
북쪽으로는 같은 현(縣) 경계까지 17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리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의 사정화현(史丁火縣)이던 것을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임고군
(臨皐郡)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이 경주부(慶州府)에 소속시켰고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
를 두었으며, 본조(本朝)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치고 장수역(長壽驛)으로 소재지[治所]를 옮겼다.
연산(燕山) 3년에 고을의 아전들이 현감(縣監) 길수(吉脩)의 사나운 정치가 괴로워서 땅을 비우고 도망하니 옆
고을에 붙였다가 9년에 복구시켰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 : 각 1인.
군명 사정화(史丁火)ㆍ화산(花山).
성씨 본현 이(李)ㆍ박(朴)ㆍ정(丁)ㆍ사(史). 이지(梨旨) 이(李)ㆍ윤(尹)ㆍ안(安).
산천 화산(花山) : 현의 북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공산(公山) : 현의 서쪽 14리에 있다.
○ 정덕(正德) 경진(庚辰)에 왕세자의 태(胎)를 봉안했다.
보현산(普賢山) : 모자산(母子山)이라고도 한다. 현의 북쪽 30리 청송부(靑松府) 경계에 있다.
서천(西川) : 현의 서쪽 1리에 있다. 근원이 공산(公山)에서 나와서 영천군(永川郡) 북천(北川)에 합류(合流)
된다.
자을아천(玆乙阿川) : 옛 신녕현(新寧縣)에 있다. 곧 영천군(永川郡) 북천(北川) 상류(上流)다.
엿동령(餘叱洞嶺)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갑현(甲峴)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토산 꿀ㆍ인삼ㆍ칠ㆍ입초(笠草)ㆍ지황(地黃)ㆍ맥문동(麥門冬).
봉수 엿동산봉수(餘叱洞山烽燧)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동쪽으로 영천군 성산(城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부계현 토현(吐峴)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에, "뜰을 둘러싸 흐르는 조그만 시내에, 짓푸른 대숲 가지가 나직
하네. 마루 위의 한 생각은 물보다 맑은데, 온갖 새들은 제멋대로 울어대네."라 하였다.
학교 향교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장수역(長壽驛) :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찰방(察訪)을 두었다.
본도에 속한 역은 청통(淸通)ㆍ아화(阿火)ㆍ모량(毛良)ㆍ사리(沙里)ㆍ압량(押梁)ㆍ우곡(牛谷)ㆍ부평(富平)ㆍ
청경(淸景)ㆍ구어(仇於)ㆍ화양(華陽)ㆍ의곡(義谷)ㆍ인비(仁庇)ㆍ경역(境驛)ㆍ조역(朝驛) 14개다.
○ 찰방(察訪) 1명이다.
○ 정몽(鄭夢周)의 시(詩)에, "흰 구름은 푸른 산에 있는데, 노는 손 고향을 떠나네. 해 저물어 눈과 서리 찬데,
어찌하여 먼 길을 가는가. 역 정자에서 밤중에 일어나니, 닭 우는 소리 크게 들리네. 내일 아침 앞길 떠나면,
유연(悠然)한 회포 금치 못하리. 친구들은 이미 날로 멀어졌고 머리를 돌리면 눈물만 흐르네." 하였다.
신원(新院) : 현의 서쪽 7리에 있다. 양야원(陽也院) : 현의 동쪽 17리에 있다.
갑현원(甲峴院)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불우 부귀사(富貴寺) : 공산(公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민백현(黽白縣) : 본래 신라(新羅)의 매숙차현(買熟次縣)이던 것을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
고, 뒤에 현에 합쳐서 소속시켰다.
이지폐현(梨旨廢縣) : 현의 서쪽 20리에 있으니 본래 영주(永州) 이지은소(梨旨銀所)다.
고려 말년에 현(縣)으로 승격시켰고 인하여 영주에 소속시켰으며, 본조(本朝) 태조(太祖) 때에 여기로 붙였다.
○ 최해(崔瀣)의 비석에 쓰기를, "지원(至元) 후 원년(元年)에 상호군(上護軍) 안자유(安子有) 등이 중국 서울에
갔다가 돌아와 천후(天后)의 명령으로 부마(駙馬)인 선왕에게 복명하여 지위를 말하기를, '영주(永州)의 이지은
소(梨旨銀所)는 옛날에는 현이었는데 중년에 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이 국가의 명령을 어겼다 해서 폐지하고 백
성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때 백금(白金 : 은이다)을 세금으로 받아 은소(銀所)라고 일컬은 지가 오래였는데
이제 그곳 토인(土人) 나수(那壽)와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어려서부터 중국 궁중에 있어 수고가 많았으며, 그 공
으로 향관(鄕貫)을 승격시켜서 다시 현(縣)으로 삼으라.' 하였다." 했다.
그리하여 임금이 유사(有司)를 시켜 황제 뜻대로 시행하게 했다.
이듬해에 나수(那壽)가 사신이 되어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고향의 영광이 되었는데, 옛 곳이 비좁다 해서 자리를
잡아 고을 서쪽으로 옮겼다.
먼저 있던 곳에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현사(縣司)와 장리(長吏)를 둔 것은 모두 처음과 같았다. 또 그 뒤 5년에,
야선불화(也先不花)가 향을 싸가지고 잇따라와서 본현(本縣)이 먼저대로 회복되고 옮기게 된 전말 기록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사왕(嗣王)께 비문에 쓰기를 청했다. 내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없기에 명(銘)을 지어 뒤에
이 글을 읽는 자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나수(那壽)는 벼슬이 봉의대부 견용태감(奉議大夫甄用太監)에 이르렀고,
야선불화는 중의대부 중서사승(中議大夫中瑞司丞)에 올랐다.
성은 모두 이씨(李氏)다. 본국(고려)에서 나수를 신안군(信安郡)에 봉하고 야선불화를 영리군(永利君)이라는 이
름으로 삼대(三代)에 걸쳐 추봉(追封)했다. 그 아들이 귀하게 된 때문에 다시 중국 조정의 봉함과 증직(增職)이
마땅히 있었지만 여기에는 생략한다. 명(銘)에 쓰기를, "우리나라 선군(先君)께서 동쪽 나라 정하시고, 산천(山
川) 형세 따라 크고 작은 터를 잡아 현(縣)을 세우고 주(州)를 두었으며, 밝게 교훈하여 이르시기를, '말씀에 더하
고 덜함이 없게 하라.' 하셨는데, 혹시는 운명을 스스로 깎아댔다.
이에 이지현(梨旨縣)은 영주(永州)에 소속되었는데 전하는 말에 옛날 이 고을 사람이 자기 몸을 닦지 못한 이가
있으므로 온 고을이 엎어졌다. 죄를 간직하고 수치를 계승하여 폐해서 은호(銀戶)를 삼아서 세상 세월 오래 되었
으나 뛰어나지 아니하면 밝히 써서 줄 자 누구더냐. 여우도 죽을 때는 언덕으로 머리 두나니, 이 의리는 참으로
두터운 것이다. 황제의 명령이 이미 우악하시니 국가의 은혜 또한 두텁다.
아, 나는 알았노라. 이치가 진실로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함을 한 지아비의 총명치 못함으로 굴욕 받은 자 몇 사람
이더냐. 오랜 뒤에 능히 회복된 것은 이 두 사람의 힘을 입은 것이니, 그 사람의 잘하고 못하는 것으로 그 혁파하
기도 하고 그대로 두기도 한다. 변하는 것을 잘 보려거든 여기 새긴 글을 보라." 하였다.
고신녕(古新寧) : 지금 고을의 동쪽 25리에 있다. 신촌부곡(新村部曲) : 보현산(普賢山) 남쪽에 있다.
제영 여염희소불의군(閭閻稀少不宜郡) : 유방선(柳方善)의 시(詩)에, "민가 드무니 고을 되기 부적합하고, 나무
우거지니 도리어 촌락 같도다." 하였다.
계도루전겁불류(溪到樓前却不流) : 홍여방(洪汝方)의 시(詩)에, "시냇물 누(樓) 앞에 이르러 문득 흐르지 않고
빙빙 돌며 머뭇거리니 누굴 위한 머뭇거림인가. 제 마음은 이제부터 구덩이를 가득 채운 뒤에 나가려는 듯,
이름에 급급해서 근심하는 것 비웃는 듯하네."라 하였다.
계함월색정진심(溪涵月色淨塵心) : 윤자영(尹子濚)의 시(詩)에, "이른 저녁 찬 매미는 먼 숲에서 우는데, 앉아서
경치를 보니 가슴이 열리는 것 같네. 주원(周原)에서 감히 황화(皇華)의 글을 속작하랴. 단보(單父)는 그래도
복천(宓賤)의 거문고를 자랑하네. 대나무는 가을 소리 이끌어 손의 꿈 맑게 하고, 시내는 달빛을 담아 티끌 마음
씻어주네. 시골 동네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취미 많으니 장생(莊生)의 월 나라 노래[越吟] 읊는 것 우습구나."
하였다.
영산현 靈山縣
동쪽으로는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40리, 남쪽으로 칠원현(漆原縣) 경계까지 23리,
서쪽으로 창녕현(昌寧縣) 경계까지 15리, 북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11리,
서울과의 거리는 7백 78리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 서화현(西火縣)이던 것을 경덕왕(景德王)이 상약(尙藥)으로 고쳐서 밀양군(密陽郡)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전대로 소속시켰다.
원종(元宗)이 감무(監務)를 두고 본조(本朝)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서화(西火)ㆍ취산(鷲山)ㆍ취성(鷲城).
성씨 본현 신(辛)ㆍ문(文)ㆍ전(全) : 김(金)이라고도 한다. 조(曺)ㆍ채(蔡)ㆍ박(朴) : 내(來).
계성(桂城) 서(徐)ㆍ진(陳)ㆍ석(石)ㆍ전(田)ㆍ신(申)ㆍ이(李) : 내(來).
풍속 백성들은 모두 주씨 진씨다 : 고려 신예(辛裔)의 시(詩)에, "영취산(靈鷲山) 높아 조그만 티끌도 없는데,
안구역 백성들은 곧 모두 주씨(朱氏) 진씨(陳氏)로다." 했다.
뽕나무를 심고 대나무를 가꾸었다 : 남재(南在)의 시(詩).
십실(十室)의 음악 소리와 글 외우는 소리 : 이지강(李之剛)의 시(詩)에, "생각 밖에 조그만 고을에서 음악 소리
와 글 외우는 소리 들리니, 모름지기 조정에서 문화를 숭상함을 알겠도다." 하였다.
형승 취령진촌(鷲嶺鎭村) : 이백첨(李伯瞻)의 시(詩)에, "취령(鷲嶺) 높고 높아 네 마을을 누르니, 영특한 재주
와 무사(武士)의 지략(智略) 몇 가문(家門)이던가." 하였다.
산천 영취산(靈鷲山) : 현의 동북쪽 7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서역(西域)의 중 지공(指空)이 여기에 와서,
'이 산이 천축(天竺)의 영취산과 모양이 같아 이렇게 부른다.'고 했다.
태자산(太子山)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 신라(新羅) 태자(太子)의 묘가 있다 해서 이렇게 이름 지었다.
도초산(道草山) : 현의 서쪽 22리에 있다. 건현(件峴) : 현의 동쪽 22리에 있다.
이물현(尼勿峴) : 현의 동쪽 12리에 잇다. 석천산(石泉山) 현이 남쪽 15리에 있다.
병풍암(屛風巖) :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천연(穿淵)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방아굉이가 물에 잠겨 땅 속을 뚫고 들어가다가 법사지
(法師池)로 나왔다." 한다. 지금은 변해서 내가 되었다.
기음강(岐音江) : 현의 서쪽 28리에 있다. 창녕현(昌寧縣) 감물창진(甘勿倉津) 하류(下流)인데 의령현(宜寧縣)
정암진(鼎巖津)과 합쳤다. 옛날에는 가야진(伽倻津)이라고 불렀다. 매포진(買浦津) : 현의 남쪽 23리에 있다.
또 멸포(蔑浦)라고도 하는데, 곧 칠원현(漆原縣) 우질포(亏叱浦) 하류다.
동보포(同步浦)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온천(溫泉) : 현의 동남쪽 17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계성천(桂城川) : 계성현(桂城縣)에 있다. 창녕현(昌寧縣) 화왕산(火王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매포
(買浦)로 들어간다.
법사지(法師池) : 현의 남쪽 18리에 있다. 가뭄이 들면 호랑이 머리를 못에 넣으면 곧 비가 왔다.
장자택(長者澤)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작택(鵲澤) : 현의 서쪽 11리에 있다.
토산 대나무[竹]ㆍ죽전(竹箭) : 병풍암(屛風巖)에서 난다. 붕어[鯽魚]ㆍ잉어[鯉魚]ㆍ복령(茯苓)ㆍ매실(梅實)ㆍ
꿀[蜂蜜]ㆍ감[柹]ㆍ석류(石榴)
신증 감초(甘草) : 밭이 있다.
봉수 여통산봉수(餘通山烽燧) : 계성현(溪城縣)에 있다. 현에서 떨어지기 14리인데 남쪽으로 봉산(烽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창영현 합산(合山)에 응한다.
봉산봉수(烽山烽燧) :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칠원현(漆原縣) 안곡산(安谷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여통산(餘通山)에 응한다.
신증 정사(亭榭) 쌍수정(雙樹亭) : 객관(客館) 남쪽에 있다.
○ 홍의달(洪義達)의 회문시(回文詩)에, "맑은 그늘 푸른 나무 서쪽과 동쪽에 무성한데, 겹겹이 둘러선 산 천 번
이나 거듭했네. 갠 날 늦안개는 희미하게 멧부리를 두르고, 저녁 하늘 봄비는 가늘게 바람에 불리네. 푸른빛이
흰 것과 연한 것은 매화와 대나무가 섞여 있고, 푸른빛에 붉은 것이 겹쳐 있는 것은 꽃이 소나무에 닿은 것일세.
꾀꼬리는 노래하고 제비는 춤추니, 영주(瀛州)나 봉래(逢萊) 같은 좋은 경치 정말 웅장해." 하였다.
학교 향교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일문역(一門驛) :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온정역(溫井驛) :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보제원(普濟院) :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 매포(買浦) 동쪽 언덕에 있다.
급구원(汲救院) : 계성현(桂城縣)에 있다.
불우 보림사(寶林寺) :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이 절에 반야루(般若樓)가 있다. 고려 김륜(金倫)이 합포 만호
(合浦萬戶)가 되었을 제, 서역(西域) 중[僧] 지공(指空)을 위해서 이 누(樓)를 3일만에 지었다.
지공(指空)이 여기 올라가서 반야경(般若經)을 강론하였다 하여 이렇게 이름지었다.
죽림사(竹林寺)ㆍ고봉사(高峯寺)ㆍ서림사(西林寺)ㆍ적조사(寂照寺)ㆍ
법화사(法華寺) : 모두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절벽(絶壁) 위에 겨우 뚫린 돌길이 있어 사람들이 붙들고 오르내린다.
일미사(一味寺) : 화왕산(火王山)에 있다. 석천사(石泉寺) : 석천산(石泉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영취산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기음강용단(岐音江龍壇) : 사전(祀典)에는 가야진명소(伽倻津溟所)라고 하여 봄가을로 본읍(本邑)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써 있다.
고적 계성폐현(桂城廢縣)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밀성군(密城郡)에 붙였다가 공민왕
(恭愍王) 때에 이곳에 소속되었다. 뒤에 공양왕(恭讓王)이 다시 밀성(密城)에 붙였고, 본조(本朝) 태조(太祖) 3
년에 다시 여기로 소속되었다.
마천부곡(馬川部曲) : 현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왕기음부곡(王岐音部曲) : 계성현(溪城縣) 서쪽 10리에 있다.
길곡부곡(吉谷部曲) : 지금은 기곡(箕谷)이라고 부르는데 현의 동남쪽 20리에 있다.
○ 이첨(李詹)의 기곡계당기(箕谷谿堂記)에 쓰기를, "취성(鷲城) 동쪽에 골짜기가 있으니 깎은 듯이 삼면이 높
다랗고, 그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마치 키[箕]와 같이 생겼기 때문에 기곡(箕谷)이라고 이름 지었다.
우리 동방(東方)은 본래 기자(箕子)가 봉한 나라요, 또 기성(箕星)의 분야(分野)이므로 이 골짜기를 기곡이라고
한 것은 처음에는 비록 그 모양이 키와 같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겠지만 그 이름의 뜻을 상고해 본다면 아주 근
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대체 키라는 것은 곡식을 까부르는 도구인 까닭에 군자를 안으로 하고 소인을 밖으로 하는 뜻이 있다 한 것은
태괘(泰卦)의 형상[象]이다. 그래서 어진 사람이라야 이 골짜기에 살 수 있고 못난 자는 제 몸을 용납하지 못하
는 것이므로 군자(君子)다운 이 부감(李府監)이 여기에서 늙은 것이다. 무술(戊戌)년에 집 동쪽에 당(堂)을 짓고
못을 파서 물고기를 기르고 시냇물을 끌어 오리를 기르며, 대나무 천 주를 심어 음악 소리를 대신하고 소나무
백 그루를 심어 절조를 가다듬는다.
이는 모두 계당(谿堂)의 구경거리로 군자(君子)가 즐겨하는 바이다.
마침내 언덕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면 취봉(鷲峯)이 우뚝 서 있는 것은 키[箕]의 발뒤꿈치가 아닌가! 낙수 물이
가로놓인 것은 키의 혓바닥이 아닌가! 그 밖에 쇠잔한 산과 끊어진 항구, 별 같은 것이 또한 많다.
하늘에는 기성(箕星)이 있고 땅에는 기곡(箕谷)이 있어 빛나는 멧부리의 기상이 서로 사랑하는 덕에 감응하여
덕을 나게 하여 계당(谿堂)의 주인에게 주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 부감(李府監)이 그렇게 수(壽)하고
또 강녕하며 그 자손이 잘 되고 또 많단 말인가.
내가 가서 그를 찾으니 공(公)은 나를 계당 위에서 대접하여 술을 마시고 나서 그 당(堂)의 기(記)를 청하기를,
"내 당(堂)이 이루어진 지 이제 15년이나 되었건만 글하는 선비라고는 그대가 처음 왔으니, 나를 위해서 기(記)
를 지어달라." 했다. 나는 강경하게 사양했으나 그 뒤 며칠만에 또 편지를 보내어 권하는 뜻이 더욱 두터웠으므
로 끝내 사양치 못했다." 하였다.
오가이향(烏加伊鄕) : 매포(買浦) 동쪽에 있으니 현에서 거리가 20리다.
퇴곡소(退谷所)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수다이소(水多伊所)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인물
고려 신천(辛蕆)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밀직사(判密直事)에 이르렀다.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문인(門人)이다. 유(裕)의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반대하는 의논이 있을 때 천
(蕆)이 총랑(摠郞)으로서 힘써 문묘 종사를 주장했다.
신예(辛裔) : 과거에 급제하였고, 원(元) 나라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남대어사(南臺御史)가 되었
으며, 고려에 벼슬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본조 신극례(辛克禮) : 태종조(太宗朝) 때 좌명정사공신(佐命定社功臣)이 되었고, 취산군(鷲山君)에 봉해졌다.
신유정(辛有定) : 장수의 재질이 뛰어나고 벼슬이 평안도(平安道) 도안무사(都按撫使)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
는 무절(武節)이다.
신인손(辛引孫) : 유정(有定)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숙
(恭肅)이다.
신석조(辛碩祖) : 인손인인(引孫)의 아들로 고제(高第)에 뽑혔으며 문예(文藝)로 이름났다.
벼슬이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이르고 시호는 문희(文僖)다.
신증 신주(辛鑄) :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우거 본조 이첨(李詹) : 집이 현의 서쪽 마고리(馬古里)에 있다.
매화나무 한 쌍을 뜰 앞에 손수 심고 스스로 그 집을 이름 지었는데, 그 매화가 지금까지 있다.
효자 본조 박연수(朴延守) : 연수(延守)가 나이 14세 되던 영락(永樂) 갑진(甲辰)년에, 그 아버지를 따라 산골짜
기에 가서 나무를 베어 밭을 만드는데, 아비가 범에게 물려 가는 것이 보였다. 연수는 왼손으로 아비의 발을 잡
고 오른손으로 낫을 휘둘러 범을 위협하면서 범에게 수백 보(步)나 끌려가다가 드디어 아비의 시체를 빼앗아서
돌아왔다. 경태(景泰) 을해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안도(安堵) : 벼슬이 우헌납(右獻納)에 이르렀다. 어머니 상을 당하자 혼자 여묘살이 3년을 마쳤다.
영락(永樂) 을유(乙酉)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박의(朴椅) : 어머니가 나쁜 병에 걸리자 의(椅)는 허벅다리 살을 베어 끓여 먹이니 병이 점점 나았다.
성종조(成宗朝) 때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이 세워졌다.
열녀 고려 신씨(辛氏) : 낭장(郎將) 신사천(辛斯蕆)의 딸이다. 홍무(洪武) 임술(壬戌)년 6월에 왜적 50여 명이
영산(靈山)을 침략했을 때 사천(斯蕆)은 온 집 식구를 데리고 난을 피하여 멸포(蔑浦)를 건너려 하는데,
적의 추격이 몹시 급했다. 이때 사천의 식구들은 모두 배에 타고 둘째 아들 식열(息悅)이 밀고 끌었는데,
때는 여름 장마로 물이 많고 빨라서 뱃줄이 끊어지면서 배가 갑자기 언덕에 닿았다. 이에 적이 쫓아와 사천을
쏘아 죽이고, 신씨(辛氏)의 손을 잡고 같이 가자고 했다. 신씨가 듣지 않자 적이 칼날을 번뜩이면서 위협했으나
신씨는 큰 소리로 꾸짖기를, "이놈들아, 죽이려면 죽여라. 너희가 이미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불공대천의 원수다.
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너희들을 따라가겠느냐." 하고, 적의 목을 움켜잡고 발길로 차서 넘어뜨리자 적은 화가
나서 죽였다.
그때 나이 20세였다. 체복사(體覆使)가 이 일을 모두 갖추어서 사관(史官)에게 보고하고 또 조정에 알려서 비석
을 세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신씨(辛氏) : 낭장(郞將) 김우현(金遇賢)의 아내이다.
홍무(洪武) 을미(乙未)년에 왜적이 졸지에 이르니 우현(遇賢)은 군사를 일으킨 장수로서 도망치고 나오지 않았
다. 감군(監軍)이 우현의 있는 곳을 신씨(辛氏)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이것이 만일 상을 탈 일이라면 남편 있는
곳을 가르쳐 주겠지만, 이제 죄를 주려고 묻는 바에야 어찌 차마 그것을 사실대로 가르쳐 주어서 남편이 죽음을
당하게 하겠는가." 하고 아무리 매를 때려도 종시 말하지 않고 마침내 맞아 죽었다.
영락(永樂) 을미(乙未)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제영 천감목노호산촌(泉甘木老好山村) : 이원(李原)의 시(詩)에, "샘물 달고 나무 늙은 좋은 산촌에, 일 한가로
운 대낮 관청 문이 반쯤 닫혀 있네. 절후는 풍년이고 무기 쓸 일 없으니, 농삿집 자제들도 글을 할 줄 안다네."
하였다.
죽리모옥엄형문(竹籬茅屋掩荊門) : 최종리(崔宗理)의 시(詩)에, "산이 막아주고 시내 감돌아 한 마을 이루었는
데, 대울타리 초가집은 대문이 닫혀 있네." 하였다.
노전계회사녹문(路轉溪回似鹿門) : 최수(崔脩)의 시(詩)에, "봄 구름 비 되어 앞 마을을 지나니, 길은 구부러지
고 시내는 돌아 녹문(鹿門)과 같네. 다음날 취봉(鷲峯)에 집을 지으면, 어느 사람이 북산문(北山文)을 모방해
지으리." 하였다.
[비고]
연혁 인조(仁祖) 9년에 창녕(昌寧)을 합하였다가 15년에 나누었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고읍 계성(桂城) : 북쪽으로 15리다. 본래 신라 때에 읍을 설치하였는데 옛 이름은 알 수 없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계성으로 고쳐 화왕군(火王郡) 영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밀성군(密城郡)에 속했고, 공민왕(恭愍王) 15년에 내속되었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에
다시 밀성에 속했다가, 본조 태조 3년에 또 내속하였다.
방면 읍내(邑內) : 끝이 10리다. 부곡(釜谷) : 동으로 처음은 12리, 끝은 40리다.
기곡(箕谷) : 동남쪽으로 처음은 12리, 끝은 20리인데, 고길곡부곡(古吉谷部曲)이다.
도천(都泉) :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다.
계성(桂城) : 북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다. 마단(馬丹) : 남쪽으로 처음은 12리, 끝은 20리다.
장가(長嘉)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다. 도사(道謝) : 서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다.
○ 마천부곡(馬川部曲)은 동남쪽으로 30리다. 옥기음부곡(玉岐音部曲)은 계성 옛 현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오가이향(烏加伊鄕)은 매포(買浦) 동쪽에 있고, 현과 20리 거리다.
퇴곡소(退谷所)는 동쪽으로 10리다. 다이소(多伊所)는 동쪽으로 30리다.
진도 매포진(買浦津) : 남쪽으로 23리이고, 멸포(蔑浦)라고도 부르며, 즉 칠원현(漆原縣) 혜질포(兮叱浦) 하안
(下岸)이다.
송진(松津) : 남쪽으로 20리인데, 칠원으로 통한다.
창녕현 昌寧縣
동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27리, 남쪽으로 영산현(靈山縣) 경계까지 10리,
서쪽으로 초계군(草溪郡) 경계까지 41리, 북쪽으로 현풍현(玄風縣) 경계까지 29리,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4리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 비자화군(比自火郡) : 또는 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한다. 진흥왕(眞興王) 16년에
하주(下州)를 두었다가 21년에 혁파했고, 경덕왕(景德王)이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가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이 밀성군(密城郡)에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이 감무
(監務)를 두었고, 본조(本朝)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비자화(比自火)ㆍ비사벌(比斯伐)ㆍ화왕(火王)ㆍ하주(下州)ㆍ창산(昌山)ㆍ창성(昌城)ㆍ하성(夏城)ㆍ
하산(夏山).
성씨 본현 장(張)ㆍ성(成)ㆍ정(鄭)ㆍ조(曺)ㆍ한(韓)ㆍ표(表)ㆍ하(河)ㆍ육(六) : 혹은 변(卞)이라고도 한다.
최(崔) : 모두 내(來)이다.
산천 화왕산(火王山) : 현의 동쪽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문방산(文房山) : 현의 서북쪽 30리에 있다.
효자암산(孝子菴山)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합산(合山)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비슬산(琵瑟山)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유남산(楡南山) :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마현(馬峴)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감물창진(甘物倉津) : 현의 서쪽 41리에 있으니,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에 있다. 초계군(草溪郡) 조에도
나왔다.
물슬천(勿瑟川)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두 근원이 있으니 하나는 화왕산(火王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유남산(楡南山)에서 나와서 합류하여 이지포(梨旨浦)로 들어간다.
남천(南川)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근원이 화왕산에서 나와서 영산현(靈山縣) 매포진(買浦津)으로 들어간다.
이지포(梨旨浦) :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근원이 유남산(楡南山)에서 나와서 매포진(買浦津)으로 들어간다.
누구택(樓仇澤) :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반개택(盤介澤)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신증 용장택(龍壯澤) : 현의 서북쪽 20리에 있으며 둘레가 5리다.
토산 화살[竹箭] : 화왕산(火王山)에서 난다. 붕어ㆍ석류(石榴)ㆍ오미자(五味子)ㆍ백복령ㆍ백화사(白花蛇)ㆍ
꿀. 신증 감초 : 밭에 있다.
봉수 합산봉수(合山烽燧) : 남쪽으로는 영산현(靈山縣) 여통산(餘通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현풍현(玄風縣) 소산(所山)에 응한다.
누정 불일루(不日樓) :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 이지강(李之剛)의 시(詩)에, "누(樓) 위에 바람은 가볍고 해는 긴데, 장미꽃 지고 나니 나무 그림자 서늘하네.
서늘한 기운 사람의 뼈를 맑게 함이 괴이타 했더니, 새 대나무 천 그루가 이미 담보다 높구나." 하였다.
징원당(澄源堂)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신증 추월헌(秋月軒) : 이는 곧 객관의 서헌(西軒)이니 현감(縣監) 박한주(朴漢柱)가 세운 것이다.
헌(軒)의 북쪽에 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으며 돌을 모아 섬을 만들었다.
○ 안침(安琛)의 시(詩)에, "달이 중추(中秋)를 맞으니 빛이 정히 촉촉하고, 작은 못에 연꽃이 고우니 물은 쪽
[藍]같이 푸르다. 물결이 흔들리니 소동파(蘇東坡)가 백이 생기고, 그림자를 대하니 참으로 이태백(李太白)의
셋을 이루었네. 얼굴에 부는 좋은 바람 살살 불어오고, 옷을 적시는 서늘한 이슬은 촉촉히 떨어지네.
마루의 맑은 경치 시(詩)로는 형용키 어려워 다 쓰고 나서 우두커니 부끄러운 생각이 드네." 하였다.
세심정(洗心亭) : 공관(公館)에 있다.
학교 향교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내야역(內野驛) :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서원(西院)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다견원(茶見院) : 현의 북쪽 29리에 있다. 적현원(赤峴院) :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경산원(京山院) : 현의 북쪽 9리에 있다. 구곡원(仇谷院) :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감물창원(甘物倉院) : 감물창진(甘物倉津) 동쪽 언덕에 있다. 방문원(防文院) : 현의 남쪽 11리에 있다.
불우 관룡사(觀龍寺)ㆍ자련사(紫連寺)ㆍ승지사(勝地寺) : 모두 화왕산(火王山)에 있다.
연화사(蓮花寺) : 비슬산(琵瑟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성산향(城山鄕) : 현의 북쪽 23리에 있다.
화왕산고성(火王山古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천 9백 83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성 가운데 샘 아홉 개와 못[池] 세 개가 있었다.
신문부곡(薪文部曲) :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옥천사(玉泉寺) : 화왕산(火王山) 남쪽에 있다. 고려 신돈(辛旽)의
어머니는 바로 이 절 종이다. 돈(旽)이 죽음을 당하자 절도 폐쇄되었는데, 뒤에 고쳐 지으려다가 완성되기 전에
돈(旽)의 일 때문에 다시 반대가 생겨 헐어버렸다.
명환 본조 금유(琴柔). 신증 박한주(朴漢柱)
인물 고려 장일(張鎰) : 고종(高宗) 때 향리(鄕吏)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아, 공순하고 정직했으며 글을 잘했고 관리의 재목으로서 뛰어났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조광한(曺匡漢) : 충렬왕(忠烈王) 때 사람으로 중시(重試) 괴과(魁科)에 뽑혀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다.
조자기(曺自奇)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조익청(曺益淸) : 충혜왕(忠惠王)이 왕위를 이어받고 원(元) 나라에 있을 제, 정방길(鄭方吉) 등이 왕의 부자를
이간하였다. 이때 익청(益淸)이 충혜왕에게서 오자 충숙왕(忠肅王)이 불러 말하기를, "왕이 나를 따르던 신하들
의 직책을 빼앗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비록 심왕(瀋王) 고(暠)가 왕이 된다 하더라도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내 원(元)에 들어가서 황제께 아뢰려 하는데 어떠냐?" 하였다.
익청은 더욱 부자간에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몹시 간절하게 역설하자, 충숙왕도 그 말을 받아들였다.
벼슬이 좌정승(左政丞)에 이르고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며 공민왕(恭愍王)
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조계방(曺繼芳)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고향에 물러가 살면서 안빈낙도(安貧樂
道 :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고 도(道)를 즐김)했다. 그의 시(詩)에, "한쪽 편에 듬성듬성한 울타리 이것이 내 집,
봄이 오면 산에 핀 꽃 사방으로 보이네. 회칠한 담 단청한 기둥이 제 어찌 오래 가랴?
혼자 뜰에 앉아 뜰에 가득한 달빛 사랑하노라."
○ "세상 사람 부자만 부러워하고 가난은 싫다 하니, 뉘라서 이 강 마을 쓸쓸한 사람 기억하리.
그러나 하늘과 땅은 후하고 박함이 없어, 적막한 초가집에도 청춘(靑春)은 있네." 하였다.
성여완(成汝完) : 벼슬이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본조
성석린(成石璘) : 여완의 아들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史館)에 뽑혔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 문하찬성사(藝文館大提學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본조(本朝)에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을 봉했고, 벼슬은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호(號)는 독곡(獨谷)이요,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글씨도 중진 대우를 받았다.
성석용(成石瑢) : 석린의 아우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普文閣大提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성석연(成石珚) : 석용의 아우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고 시호는 정평(靖平)
이다.
성엄(成揜) : 석연의 아들로 벼슬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고 시호는 공도(恭度)다.
성억(成抑) : 엄의 아우로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고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성개(成槪) : 석용(石瑢)의 아들로 해서(楷書)를 잘 썼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에
이르렀다.
성염조(成念祖) : 엄(揜)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고 시호는 공혜
(恭惠)다.
성봉조(成奉祖) : 염조(念祖)의 아우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뽑히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조석문(曺錫文) : 과거에 급제하여 세조조(世祖朝) 때 좌익공신(佐翼功臣)에 뽑히고 이시애(李施愛)를 쳐서
이기고 돌아와서 적개공신(敵愾功臣)이 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어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성임(成任) : 염조(念祖)의 아들로 사람됨이 너그럽고 아담하며 시(詩)를 잘하고 글씨를 잘 썼다. 벼슬이 의정부
좌참 찬(議政府左參贊)에 이르고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성간(成侃) : 임(任)의 아우며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벼슬이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에 이르렀지만 겨우 30세
에 죽어서 사람들이 애석히 여겼다. 진일집(眞逸集)이 있다.
조효문(曺孝門) : 석문(錫文)의 당숙(堂叔)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참례하고 벼슬이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으며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다.
성건(成健) : 엄의 손자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고 시호는 문혜(文惠)다.
신증 성준(成俊) : 엄(揜)의 손자로 과거에 급제, 연산조(燕山朝) 때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나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시호는 명숙(明肅)이다.
성현(成俔) : 간(侃)의 아우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대제학(大提學)으로 있었고 시호는 문대(文戴)다. 허백당집(虛白堂集)이 세상에 전한다.
성희안(成希顔) : 자는 우옹(愚翁)이며,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강개(慷槪)하고 큰 절개가 있으며 아는 것이
많았다. 연산조(燕山朝) 말년에 종사(宗社)가 장차 무너지는 것을 보고 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과 함
께 계획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았다.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성담년(成聃年) : 개(槪)의 손자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성질이 소탈하고 정직하여
재산 증식을 일삼지 않았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성몽정(成夢井) : 담년(聃年)의 아들이다. 과거에 뽑혀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성운(成雲) : 개(槪)의 증손(曾孫)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성세정(成世貞) : 과거에 올라 벼슬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이르렀다.
성세순(成世純) : 세정(世貞)의 아우다. 과거에 급제,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우거 본조 장계이(張繼弛) : 과거에 급제, 벼슬이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르렀고, 이학(理學)에 조예가
깊었고 조행(操行)이 있었다.
효자 본조 박근인(朴近仁) : 부모상을 당해서 3년 동안 여막에 살았다. 영락(永樂) 8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박주(朴冑) : 부모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막에 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이 세워졌다.
벼슬이 인산군사(麟山郡事)에 이르렀다.
박운(朴云) : 나이 14세, 그 아우 운산(云山)은 8세 때였다. 그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 가니 운이 조그만 도끼를
들고 운산(云山)과 함께 30여 보(步)를 쫓아가면서 하늘을 부르며 크게 울자, 범이 버리고 갔다.
운(云)은 시체를 업고 운산은 도끼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문이 세워졌다.
열녀 고려 윤씨(尹氏) : 진사(進士) 양호생(梁虎生)의 아내다. 나이 23세에 과부가 되자 외삼촌 판사(判事)
성윤덕(成允德)이 다시 시집보내려 했으나 그 뜻을 뺏지 못하였다. 51세에 죽었다.
이기(二紀 1기(紀)는 12년)를 수절(守節)하는 동안 집안이 화목하니 국가에서 그의 절개와 행실을 가상히 여겨
비석과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신증 본조 강씨(姜氏) : 하호(河濩)의 아내다. 호(濩)가 여러 해 풍질(風疾)을 앓는 동안 약을 매우 정성껏 썼다.
남편이 죽자 슬픔이 지극했으며 초상을 마친 뒤에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이 세워졌다.
[비고]
연혁 인조 9년에 혁파되어 영산현(靈山縣)에 속하였다. : 반역(反逆)의 변란 때문이다. 15년에 나누어 설치하였
다.
방면 현내 : 끝이 5리다. 고암(高巖) :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다. 성산(城山) : 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다. 합산(合山) : 서쪽으로 15리, 끝은 30리다. 대곡(大谷)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다.
옥야(沃野) : 서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다. 이언(利彦)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다.
장유(長遊)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다. 지포(池浦) : 서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다.
대송(大松) : 위와 같다. 창락(昌樂) :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다.
어촌(漁村) : 남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20리다. 남곡(南谷) : 서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다.
○ 신문부곡(薪文部曲)은 남쪽으로 20리다.
성산향(城山鄕)은 북쪽으로 23리인데 지금의 성산면(城山面)이다.
봉수 태백산(太白山) : 서북쪽으로 30리다.
창고 읍창(邑倉)ㆍ사창 : 대곡면(大谷面)에 있다. 감물창(甘勿倉).
진도 박지곡진(朴只谷津) : 박진(朴津)이라고도 한다. 서쪽으로 10리며 의령(宜寧)과 통한다.
우산진(牛山津) : 서쪽으로 40리며, 초계(草溪)와 통한다. 마수원진(馬首院津) : 서쪽으로 40리다.
감물창진(甘勿倉津) : 서쪽으로 40리다. 만향정(滿香亭).
사원 관산서원 : 광해주(光海主) 경신년에 건립되고 숙종(肅宗) 신묘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정구(鄭逑) : 충주(忠州) 조에 보라.
28권 상주목 尙州牧
동쪽으로 비안현(比安縣) 경계까지 67리, 남쪽으로 선산부(善山府) 경계까지 39리, 동부(同府) 경계까지 40리,
금산군(金山郡)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 충청도(忠淸道) 보은현(報恩縣) 경계까지 70리,
북쪽으로 함창현(咸昌縣) 경계까지 29리, 서울까지 4백리 다.
건치연혁 본래 사벌국(沙伐國)인데 : 하나는 사불(沙弗)이라고도 한다. 신라 점해왕(沾解王)이 빼앗아서 주(州)
로 만들었다. 법흥왕(法興王)이 상주(上州)로 고쳐 군주(軍主)를 두고,
진흥왕(眞興王)이 상락군(上落郡)으로 고치고 신문왕(神文王)이 다시 주(州)로 만들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사벌주(沙伐州)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다시 상주(尙州)로 고치고, 뒤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고치고,
성종(成宗) 2년에 상주목(尙州牧)으로 고치고,
뒤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귀덕군(貴德軍)이라 이름하여 영남도(嶺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이 절도사를 폐지하여 다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만들고, 뒤에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로
고쳤다가 9년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는데, 본조(本朝)에서 그대로 하였다. 세종(世宗) 때에 관찰사(觀察使)
로서 목사(牧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혁파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비로소 진(鎭)을 두고 목사로서 우도병마절도부사(右道兵馬節度副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파하고 진(鎭)으로 만들었다.
속현 화령현(化寧縣) : 본래 신라 답달비군(荅達匕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에서 그대로 하였다가 뒤에 현(縣)으로 고쳐 내속(來屬)시켰다. 주(州) 서쪽 51리에 있다.
중모현(中牟縣) : 본래 신라 도량현(刀良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도안(道安)으로 고쳐 화령군(化寧郡)
에 예속시켰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예속시켰으며 주(州) 서쪽 57리에 있다.
단밀현(丹密縣) : 단(丹)은 단(單)이라고도 한다. 본래 신라 무동미지현(武冬彌知縣)인데 달리 갈동미지(曷冬彌
知)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문소군(聞韶郡)에 예속시켰는데, 고려에서 그대로 하였
다가 뒤에 와서 붙이었다. 주(州) 동쪽 57리에 있다.
산양현(山陽縣) : 본래 신라 근품현(近品縣)이다. 달리는 근암(近巖)이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이름을 가유(嘉猷)
로 고쳐 예천군(醴泉郡)에 예속시켰는데, 고려(高麗)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 내속하였다가 뒤
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명종(明宗)이 혁파하고 전대로 예속시켰으며 주(州) 북쪽 63리에 있다.
장천부곡(長川部曲) : 주 남쪽 25리에 있다.
진관 목(牧) : 성주(星州). 부(府) 1 : 선산(善山). 군(郡) 1 : 금산(金山). 현(縣) 5 : 개령(開寧)ㆍ지례(知禮)ㆍ
고령(高靈)ㆍ문경(聞慶)ㆍ함창(咸昌).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군명 상주(上州)ㆍ상락(上落)ㆍ사량벌(沙梁伐)ㆍ사벌(沙伐)ㆍ상산(商山)ㆍ타아(陁阿)ㆍ귀덕군(貴德軍).
성씨본주(本州) 김(金)ㆍ박(朴)ㆍ주(周)ㆍ황(黃)ㆍ고(高)ㆍ이(李)ㆍ형(荊)ㆍ나(羅) : 모두 온 사람이다.
이(李) : 하간부(河間府) 인물(人物) 아래에 자세히 하였다.
윤(尹) : 촌(村). 임(林) : 속(續). 단밀(丹密) 나(羅)ㆍ손(孫). 산양(山陽) 유(庾)ㆍ신(申)ㆍ채(蔡)ㆍ방(方). 화령
(化寧) 임(任)ㆍ고(高)ㆍ방(方)ㆍ장(張)ㆍ전(全)ㆍ신(申). 공성(功城) 성(成)ㆍ손(孫)ㆍ장(張)ㆍ전(全). 청리
(靑里) 장(張)ㆍ박(朴)ㆍ방(方)ㆍ심(沈). 중모(中牟) 전(全)ㆍ김(金)ㆍ강(姜)ㆍ박(朴)ㆍ방(加)ㆍ심(沈) : 내(來).
영순(永順) 태(太). 장천(長川)ㆍ윤(尹)ㆍ박(朴). 연산(連山)ㆍ윤(尹) : 백원(白原)ㆍ하해(河海)ㆍ양녕(壤寧)ㆍ
보량(保良)도 같다.
주선(主善) 신(申) : 단곡(丹谷) 생물(生物)도 같다.
양보(陽寶)ㆍ진(陳). 관제(灌濟) 임(任)ㆍ전(全)ㆍ고(高). 평안(平安) 방(方)ㆍ심(沈)ㆍ구(仇). 평산(平山) 방(方).
무림(茂林) 손(孫)ㆍ김(金)ㆍ심(沈) : 모두 속(續). 선은(鐥銀)ㆍ임(任)ㆍ전(全). 해상이(海上伊)ㆍ방(方)ㆍ
김(金)ㆍ박
풍속 습속(習俗)이 간소하고 인색한 것을 숭상한다.
백성의 풍기가 순고하고 질박하다 : 모두 권근(權近)의 기(記)에 있다.
형승 동남방 일백 고을 중 첫째다 : 최자(崔滋)의 전(傳)에 있다.
팔방으로 통한 거리이다 : 안축(安軸)의 기에 있다. 신라(新羅) 때부터 큰 부(府)가 되었다 : 이색(李穡)의 기에
있다.
산천 왕산(王山) : 성안의 작은 산이다. 천봉산(天峯山) : 주(州) 북쪽 7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구봉산(九峯山) : 화령현(化寧縣) 서쪽에 있는데 봉만이 창을 벌여 세운 것 같아서 대단히 높고 험하다.
속리산(俗離山) : 화령현 서쪽 30리에 있다. 산 서쪽 15리 가량 되는 곳에 용화솔면촌(龍華率面村)이 있는데
황장(黃腸)주D-001과 궁실(宮室)의 재목이 나온다. 나머지는 보은현(報恩縣) 편을 보라.
사불산(四佛山) : 산양현(山陽縣) 북쪽에 있는데, 주(州)와의 거리가 99리다.
○ 고려(高麗) 중 진정(眞靜)의 유산기(遊山記)에 산양현(山陽縣) 북쪽에 산이 있는데 동쪽으로 죽령(竹嶺)에
연하고 남쪽으로 화장(華藏)을 끌어 당긴다. 이 산의 이름이 사불(四佛)인데 공덕(功德)이라고도 한다.
산에 사방 십척 쯤 되는 돌이 있는데,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을 새기어 별봉(別峯)에 안치되어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그 산을 순행하여 구경하고 그 옆에 절을 창건하여 이름을 대승(大乘)이라 하였다.
산의 곤방(坤方)에 절이 있는데 이름은 백련사(白蓮社)다.
뜰 좌우에 미면정(米麪井)이 있고 의상(義湘)이 설법(說法)하던 대(臺)가 있는데, 종려(椶櫚) 삿갓과 주석 지팡
이가 있다. 고종(高宗) 29년 소경(少卿) 최자(崔滋)가 상주(尙州) 목사(牧使)로 있을 때 찾아보니,
옛 궁전에 원효(元曉) 의상(義湘)의 진용(眞容)이 있고 소위 삿갓과 지팡이도 아직 탈이 없었다.
문 밖 50보쯤 되는 곳에 높이가 석 자나 되는 돌 하나가 있는데,
전하기를 금호석(禁虎石)이라 한다. 20보쯤 되는 곳에 샘이 있는데, 바위 틈 사이로 졸졸 솟아 나오고, 소나무ㆍ
가래나무가 울창하며 아래에 반석이 있어 30명은 앉을 만하다.
이 이름이 냉천정(冷泉亭)이다. 최공이 법조(法曹) 왕공(王公)에게 명하여 공사를 감독하여 불우(佛宇)ㆍ
조당(祖堂)ㆍ승료(僧寮)ㆍ객실(客室)로부터 허백루(虛白樓)에 이르게 하고,
또 냉천정(冷泉亭) 아래에 누교(樓橋)를 만들어 이름을 신청교(神淸橋)라 하였다.
조계산인(曹溪山人) 탁연(卓然)에게 명하여 써 부치게 하였다.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가 호남(湖南)에 있고, 공덕산(功德山)은 강동(江東)에 있으므로 동백련(東白蓮)
이라 불러서 구별하였다. 병풍산(屛風山) : 주(州) 동쪽 10리에 있다.
왜유현(倭踰峴) : 주 남쪽 47리 금산군(金山郡) 경계에 있다. 대조현(大鳥峴) : 산양현(山陽縣) 북쪽에 있는데
주(州)에서 88리다.
갑장산(甲長山) : 주 남쪽 13리에 있는데 일명 연악(淵岳)이라 한다. 석악산(石嶽山) : 주 북쪽 6리에 있다.
만악산(萬嶽山) : 단밀현(丹密縣) 남쪽에 있으며 주(州) 북쪽 47리에 있다.
백화산(白華山) : 중모현(中牟縣) 서쪽에 있으며, 주에서 72리다.
노음산(露陰山) : 주 서쪽 10리에 있다. 서로악(西露岳)이라고도 일컫는다.
북석악(北石岳) 남연악(南淵岳)과 함께 상산삼악(商山三岳)이라고 일컫는다.
죽현(竹峴) : 주 남쪽 38리 선산부(善山府) 경계에 있다. 송현(松峴) : 주 북쪽 28리 함창현(咸昌縣) 경계에 있다.
북천(北川) : 주 북쪽 2리에 있다. 근원이 주 서쪽 가전현(加田峴)으로부터 동으로 흘러 남천(南川)과 합한다.
남천(南川) : 주 남쪽 5리에 있다. 근원이 왜유현(倭踰縣)으로부터 주 동쪽 5리에 이르러 북천(北川)과 합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낙동강(洛東江) : 주 동쪽 36리에 있다. 문경(聞慶)의 용연(龍淵)과 군위(軍威)의 병천(竝川) 등 여러 물이 주의
동북쪽에 이르러 용궁(龍宮) 하풍진(河豐津)에 합하여 남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어, 선산부(善山府) 경계로 들어
간다. 여기로부터 바다에 들어가기까지 비록 땅에 따라 이름은 다르나 총칭 낙동강이라 하고 가야진(伽倻津)
이라고 일컫는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백 번이나 구부려진 푸른 산 속에 한가하게 낙동을 지난다.
풀이 깊으니 아직도 이슬이 있고 솔이 고요하니 자연 바람 없다. 가을 물은 오리 머리 같이 푸르고, 새벽 놀은
성성의 피같이 붉구나. 게을리 노는 손이 사해(四海)로 떠도는 한 시옹(詩翁)인 줄 누가 알까." 하였다.
안축(安軸)의 시에, "비 뒤의 산빛은 쪽물 들인 듯 푸르고, 십리의 기이한 바위는 수묵(水墨)으로 그린 병풍이다.
자사(刺史)가 새 안부(按部 감사)를 기꺼이 맞아, 목란(木蘭) 배 위에 초가 정자를 얹었다." 하였다.
송라탄(松羅灘) : 주 북쪽 37리에 있는데 곧 낙동강(洛東江) 상류다.
공검지(恭檢池) : 주 북쪽 27리에 있다.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에 사록(司錄) 최정분(崔正份)이 옛터를 따라서
쌓았는데, 둑의 길이가 8백 60보이고 둘레가 1만 6천 6백 47척이다. 그 못이 실상은 함창(咸昌)에 있는데,
상주 백성들이 관개(灌漑)의 이익을 독차지한다.
불암지(佛巖池) : 주 북쪽 4리에 있다. 둘레가 1천 9백 31척이다.
대제지(大堤池) : 단밀현(丹密縣) 북쪽에 있으며 주에서 68리다.
기지(機池) : 주 남쪽 6리에 있으며 둘레가 4천 1백 81척이다.
토산 옥석(玉石) : 갑장산(甲長山)에서 난다. 옥등석(玉燈石) : 대조현(大鳥峴)에서 난다.
철(鐵) : 송라탄(松蘿灘)에서 난다. 호도(胡桃)ㆍ감[柹]ㆍ밤ㆍ은어(銀魚)ㆍ송이[松蕈]ㆍ왕골[莞草]ㆍ인삼ㆍ
안식향(安息香)ㆍ백화사(白花蛇)ㆍ석이[石蕈]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백 49척 높이가 9척이며 안에 21개의 우물과 두 못이 있다.
봉수 회룡산봉수(回龍山烽燧) : 공성현(功城縣)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 금산군(金山郡) 소산(所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청리현(靑里縣) 서산(西山)에 응한다.
소산봉수(所山烽燧) : 주 동쪽 5리에 있다. 남쪽으로 청리현 서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함창현(咸昌縣) 성산(城山)
에 응한다.
서산봉수(西山烽燧) : 청리현 서쪽에 있다.
서쪽으로 공성현(功城縣) 회룡산(回龍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소산(所山)에 응한다.
국사당산봉수(國師堂山烽燧) : 화령현(化寧縣) 서쪽에 있다. 동쪽으로 중모현(中牟縣) 소산(所山)에 응한다.
산양현 소산봉수(山陽縣所山烽燧) : 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문경(聞慶) 호계현(虎溪縣) 선암산(禪巖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용궁현(龍宮縣) 용비산(龍飛山)에
응한다.
중모현 소산봉수(中牟縣所山烽燧) : 현 북쪽에 있다. 남쪽으로 충청도(忠淸道) 황간현(黃澗縣) 소산(所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화령현(化寧縣) 국사당산(國師堂山)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 안축(安軸)의 기에 "지정(至正) 3년 계미(癸未)년에 내가 상주(尙州) 목사의 명을 받아 이해
여름 4월 고을에 부임하여 일을 보았다. 근년 이래로 가혹한 정치 때문에 백성들이 흩어지고 마을 골목이 쓸쓸
하며 옛날의 공해(公廨)ㆍ학교(學校)ㆍ신사(神祠)ㆍ불사(佛寺)라고는 모두 기울어 무너지고 오직 객사(客舍)만
이 온전히 갖추어져 고대(高大)하고 화려한 것이 남방에 으뜸이고 그 청당(廳堂)과 기초의 규모와 배치(排置)가
크고 장려하며 여유가 있어 각각 그 마땅함을 얻었다.
내가 생각하기를, '이것은 시속 사람의 상례에 따른 제도가 아니라' 하여 고을 사람에게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지금의 정동성랑(征東省郞) 김상국(金相國) 영후(永煦)가 영건(營建)한 것입니다.
이 고을이 팔방으로 통한 거리에 있어서 역마를 타고 사명을 받든 자가 빈 날이 없는데, 옛날의 객관이 비습하
고 좁고 낮고 더러우며, 또 오래되어 기둥이 이미 흔들렸으므로 항상 손님의 꾸지람을 받았었습니다.
지난 정묘(丁卯)년 4월에 공이 이 고을 목사로 부임하여 곧 새롭게 할 생각이 있었으나 생민의 지치고 곤함을
민망히 여기어 차마 공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다만 인애(仁愛)로써 백성을 사랑하고 엄중하게 부하를 경계할 뿐
이었는데, 돌이 지나자 고을 사람들이 덕스러운 정사에 편안하여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생겨 공의 은혜
를 갚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백성을 부릴 수 있는 것을 알고 재목을 모으고 역사를 시작하여 기한을 정하였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발로 뛰고 손으로 춤추며 기쁨으로 수고로움을 잊으므로 억센 무리들도 두려워서머리를 숙이
고 귀를 늘어뜨리고 힘을 다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일이 백성을 상하지 않게 하고 공사가 농업을 방해하지 않아서, 며칠이 안 되어 이루어졌습니다.
객관이 준공되자, 또 객관의 서쪽을 개척하고 따로 작은 관사를 영건하니, 비록 사빈(使賓)이 겹쳐 이르러도
기숙하는 것이 여유가 있어 고을 사람이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아, 공(公)이 저와 같이 얼마 안 되는 백성을 써서 이와 같은 큰 집을 지었으나 힘은 실로 넉넉[恢恢]하였으니,
비록 백성의 힘을 쓰긴 하였으나 실상은 공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 백성이 지금까지 칭송한다.
대개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시경(詩經)》에, '창과 지게문을 얽고 손질한다
[綢繆牖戶]'는 비유가 있고, 《서경(書經)》에는 '긍당긍구(肯堂肯構)주D-002'의 비유가 있으니,
공이 묘당(廟堂)에 앉아서 경기(經紀)를 세우고 방략(方略)을 베풀어서 다시 왕가를 번영하게 한 것을 여기에
서 볼 수 있다." 하였다. 신증 가정(嘉靖) 병술년에 불에 탔는데, 목사(牧使) 윤탕(尹宕)이 고쳐 지었다.
누정 풍영루(風詠樓) : 이색(李穡)의 기에, "상주 목사(尙州牧使) 김공(金公)이 공관 동편에 이미 정자를 짓고
한산(韓山) 이색(李穡)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름과 기(記)를 청하고 말하기를, '「누가 뜨거운 것을 잡고 물에 가
서 씻지 않으리오[誰能執熱逝不以濯]」하였으니 상주의 곤란한 것을 내가 능히 없앴으므로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신축(辛丑)년 겨울에 임금께서 남쪽으로 행하시어 이듬해 봄에 상주에 거둥하였는데, 색(穡)
이 그때에 승선(承宣)으로서 조석으로 시종하였고, 가을에 이르러 거가(車駕)가 청주(淸州)로 옮겼다. 참으로
더위에 곤란을 겪었다. 그때에 깊이 한하기를, '이 고을이 신라(新羅) 때로부터 큰 부(府)였는데, 어째서 유관
(遊觀)할 만한 정사(亭榭)가 이렇게 없는가' 하였던 것을, 오늘날 이르기까지 대개 잊지 못하였다.
지금 나의 동년(同年) 박헌납(朴獻納)이 말한 것과 문인(門人) 김남우(金南遇)의 일가 사람 김계(金桂)가 칭도
하여 말한 것을 보면 이 정자가 시원스러워서 바람에 씻는 의상(意想)이 있다 하였으니, 그 기쁘고 다행함이
어떠하겠는가.
대개 사시의 기운이 천지 사이에 유행하여 춥고 덥고 따스하고 서늘함의 당연함이 다른데,
사람이 응하는 것도 각각 그 도(道)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송석(松石)ㆍ수천(水泉)의 홍치와 사죽(絲竹)ㆍ배상
(杯觴)의 즐거움에도 내 마음에 주장됨이 있으면, 눈앞에 유행하는 차고 더운 것이 넉넉히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마음을 잃게 하는 것은 바깥 물건이니 이 두 가지를 내놓고 천시(天時)에 순응하고, 내 뜻을 펼 수 있는 것은 오
직 바람 쐬고 읊는 것이다. 무우(舞雩)에 바람 쐬고 읊고 돌아오매 가슴속이 유연(悠然)하여 조그만 꾸밈도 없거
늘, 하물며 장마비나 혹한에 대한 원망이 이것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절(節)을 짚고 병부를 나누어 가지고, 이 고을을 지나가는 자로[지방장관으로] 하여금 춘복(春服)이 이루어진
즈음에주D-003 화기(和氣)가 넘쳐 흐르는 것과 같아지기만 한다면 상주 백성은 다행한 일이니,
감히 풍영(風詠)으로 이름짓기를 청한다.
담을 둘러서 동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서 못을 만들며 씨를 심고 나무를 심어서 둘러보고 바라보는데 탁 트이고,
여러 봉우리가 둘러 호위한 것 같은 따위는 이 정자의 보조[羽翼]니 생략하여도 좋을 것이다.
뒤에 여기에서 바람 쐬고 읊어서, 오여점야(吾與點也)의 대의(大意)를 얻는 자는 무엇으로 우리 김공에게 갚을
것인가. 아울러 여기에서 고하노라. 김공의 이름은 남득(南得)인데 경진년(庚辰年) 진사에 합격하고 안팎에 들
락날락하여 중한 이름이 있어 내가 아끼고 공경하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고 기를 짓는다 하였다." 하였다.
○ 권근(權近)의 기에, "상주(尙州)는 본래 사벌국(沙伐國)인데 신라에 속하여 큰 부(府)가 된 지 천여 년이 되었
다. 산천의 수려한 것과 인물의 번성함이 도내(道內) 여러 고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러나 누대 정사(亭榭)가
없었으니 백성의 풍속이 순박한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홍무(洪武) 경술(庚戌)년에 목사(牧使) 김남득(金南得) 공
이 거듭 해우(廨宇)를 영건(營建)하고 비로소 과원(菓園)을 동북쪽에 설치하고 그 가운데에 정자를 지었는데,
우리 좌주(座主) 한산(韓山) 목은(牧隱 : 이색) 상국(相國)이 풍영(風詠)으로 이름짓고 기(記)를 지었으며,
과거에 장원[解元]한 성산(星山) 도은(陶隱 : 이숭인)이 시(詩)를 남겼으니, 두 공은 모두 세상의 문장(文章) 대
가라 이 고을의 성가(聲價)가 실로 그 무게를 더한 것이다.
경신(庚申)년에 왜구(倭寇)가 침범하여 관사와 민가가 모두 병화(兵禍)를 당했다.
이듬해 신유년에 반자(半刺 목사를 돕는 통판(通判)) 전군 리(田君理)가 비로소 고을 성을 쌓아 남은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옛터에 별관을 창건하여 사명(使命 : 사신)을 접대하였으며, 경오년에 목사(牧使) 이복시(李復始)
공이 또 해사(廨舍)를 창건하였으나, 정사(亭榭)는 미처 지을 겨를이 없었다.
지금의 목사 송공(宋公)이 판관(判官) 한공(韓公) 암(巖)과 더불어 다스려 폐단이 없어지고, 이익되는 것을 일으
켜서 풍교(風敎)가 진흥되어 백성들이 편안하여졌다. 그리고 정자의 옛터를 개척하고 넓혀서, 그 위에 다락을
일으키고 목은의 기와 도은의 시를 써서 옛날의 관첨(觀瞻)을 모두 회복하니,
고을의 좋은 경치가 더욱 증가되었다.
고을 사람 전 대호군(前大護軍) 김겸(金謙) 공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이 풍영정(風詠亭)이 생긴 후로 큰
두 선비의 거필(巨筆)을 얻어 그 빛을 빛내었는데, 중간에 화재를 만나고 미처 다시 세우지 못하여 오랫동안 고
을 사람의 수치가 되었었다. 이제 우리 목백(牧伯) 목사의 정치 성적이 탁월하여 여러 고을의 으뜸이 되고, 다락
을 짓는 것도 백성에게 폐가 미치지 않게 며칠 안에 준공되었고, 사명(使命)을 받든 신하가 가고 오는 길에 구경
할 곳이 있으므로 고을의 늙은이ㆍ어린이가 서로 경하(慶賀)하며 기뻐한다.
목은(牧隱)과 도은(陶隱)은 그대의 스승과 벗이니, 어찌 한마디 말로 그 뒤를 잇는 것을 아끼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풍영(風詠)에 대한 뜻은 정자의 기(記)에 다 말하였으니, 내가 무엇을 덧붙일 것이 있는가.
그 말에 절(節)을 짚고 병부를 나누어 가지고, 이 고을을 지나가는 자로[지방장관으로] 하여금 봄옷이 이루어
진 즈음에 화한 기운이 넘쳐 흐르는 것과 같아지기만 한다면 상주(尙州) 백성은 다행할 일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매우 크다. 내가 감히 이것을 가지고 부연하여 말하겠노라.
공자 문하의 여러 사람[諸子]들이 각각 그 뜻을 말함에 있어서, 모두가 무슨 일을 한다는 말단적인 생각에 얽매
여 있는데, 증점(曾點)만이 목욕하고 바람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다고 말함으로써 공자께서 찬탄하고 인정하
였는데, 이를 두고 말하기를, '요순(堯舜)의 기상이 있다.' 하였다.
아마도 가슴을 넓게 열어 대허(大虛 : 허공)와 동체(同體)가 되어, 대상에 따라 형체를 부여하여 모두 제자리를
얻게 한다면, 이를 실천, 조치(措置)할 때 젊은이를 품어주고[少者懷之],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주며[老者安之],
편안하게 해주어 오게 하고[綏之斯來], 고무시켜 화하게 하는[動之斯和] 묘(妙)주D-004가 있게 된다.
화한 기운이 흘러 행하여 백성이 사는 데[耕鑿] 편하기가 봄바람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서, 다스려진 효과가 곧
큰 조화와 더불어 함께 운행될 것이니, 요순(堯舜)의 정치도 또한 여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쫓아온 곳을 찾아 보면 다만 가슴 가운데에 한 점의 사심[私累] 없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만일 절(節)을 짚고 병부를 나누어 가진 사신으로 하여금 올라 구경할 적에, 진루(塵樓)의 번잡한 것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세상 생각을 소화해 보내어 뜨거운 것을 잡았어도[執熱] 샘에 빠는 것을 기다림 없이 맑아지고,
주D-05 맑은 정치가 재야의 도움을 얻지 않고도 이룩되며, 짧은 시간[俯仰] 수작(酬酌)하는 사이에도 묵묵히
보고, 읊조리며 마음에 즐거움을 얻음으로써 물과 내가 같다는 이치[物我同然之望]를 넓힌다면, 그 정치와 교
화의 효험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그 누대의 좋은 경치를 구경하기엔 내가 늙었으나 혹시 한 번 가서 보기라도 한다면 마땅히 도은의 뒤를 이어
읊을 텐데."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오래 손 노릇하여 몸이 바야흐로 피곤한데, 처음으로 오르니 눈이 번쩍 밝아진다.
경영하여 지은 이는 김 태수(金太守)요, 풍영(風詠)으로 이름한 이는 이 선생(李先生)이다. 대 그림자에는 지당
(池塘)이 고요하고, 소나무 소리에는 원우(院宇)가 맑다. 좋은 말 없는 것이 스스로 부끄럽구나. 현판 위에 다만
이름만 썼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중수기(重修記)에, "상주(尙州)가 낙수(洛水)의 상류에 있어서 감사(監司)의 본영(本營)
이 되었으니, 실로 동남방의 큰 도회이다. 사명을 받고 정사를 반포하는 손님과 조공을 바치는 일본 사신이 오
고 가는 것이 줄처럼 연속하여, 죽령(竹嶺)을 경유하는 것은 3분의 1도 못 되고 대개는 관현(冠縣)을 경유하는데
상주가 그 폭주하는 중심지에 있으니, 체모[儀刑]에 맞게 마땅히 높은 다락과 웅장한 집이 있어 관첨(觀瞻)을
장엄하게 하며, 고명(高明)과 겨루어 염열(炎熱)과 습기를 제거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은 풍영루(風詠樓)를 중수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전하(殿下) 18년 정미(丁未) 봄에 순창(淳昌) 설순조(薛順祖)공이 좌도(左道)의 책임을 지고 이 고을에 왔
을 때, 이 다락의 지붕ㆍ마루와 서까래는 흔들려 기울어지고 난간이 깨어져 닫히고, 기와는 처마에서 벗어나
비는 벽에 새어 붉고, 흰 것의 장식은 흐려지고 벗겨져서, 오르는 자가 관현(管絃)을 베풀기 전 주춤해서 꺼리는
빛이 많은 것을 보고 개연히 중수하고자 하였는데, 그 해 가을에 통판(通判) 고양(高陽) 신후(申侯) 현(礥)이 잇
따라 이르렀다.
의논이 서로 합하여 이듬해 봄에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재목 수집을 명하여 성안에 실어들이고 가을 8월에 이
르러 비로소 묵은 집을 헐고 그 제도를 넓히고 키워서, 겨우 30여 일 만에 자귀와 흙손의 사용이 끝이 났다.
누각의 화려함ㆍ장려함ㆍ훌륭함이 더불어 대적할 것이 없어서, 성지(城池)와 여항(閭巷)이 모두 덕스럽게 여기
는 빛이 있고, 무릇 지경 안의 산천의 진산(鎭山)이 되고 소택(沼澤)이 된 것이 마치 높고 깊은 것을 증가시킨 것
같았다.
공이 그래서 우리 친구, 고을의 교수(敎授) 주윤창(周允昌)군을 중개하여 편지를 보내 나에게 기(記)를 청하였다.
내가 고을의 옛일을 상고하건대,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에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위치를 적당하게 한
자는 목사(牧使) 김영후(金永煦)이고, 기를 지은 이는 근재(謹齋)이다.
황명(皇明) 홍무(洪武) 경술년엔 관사의 동평을 개척하고 그 땅에 새 정자를 지은 이는 목사 김득남(金得南)이고,
풍영(風詠)으로 이름하고 또 기를 지은 이는 목은(牧隱)이며, 시를 지은 이는 도은(陶隱)이다.
경신(庚申)년 병화에 정자도 불타버렸는데, 얼마 안 되어 묵은 터에 정자를 바꿔 다락으로 지은 자는 목사 송인
(宋因)이고 기를 지은 이는 양촌(陽村)이다.
지금 공이 이 다락을 중수함에 있어서 그 제도의 모획(謨劃)과 공정(功程)이 족히 두 김씨와 송씨에 좇아 필적
(匹敵)할 수가 있는데, 기를 짓는 촉탁을 받은 자는 네 선생의 제자 축에도 들지 못하니 어찌하랴.
옛적에 한퇴지(韓退之)는 둥왕각(騰王閣)의 기를 지으면서 글이 세 왕씨의 다음에 나열함으로써 영광을 삼았으
나 나는 뻔뻔스럽게 네 선생의 뒤에 초(貂)를 속(續)한다주D-006 하더라도 반드시 세상 사람들이 배를 부둥켜
웃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장차 움츠리고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을 텐데 어찌 소위 영광이라는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공이 명령하여 감히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아직 그 대강을 기술하고 또 노래하기를, '배와 수레가 모여
드니 사방으로 통한 요충(要衝)이로다. 관과 일산이 수레 자국을 열했으니 다른 나라가 하풍(下風)에 따르는도
다. 이 집이 있지 않으면 연향(宴饗)과 호군(犒軍)을 어디 의탁하랴. 누가 뜨거운 것을 잡고서 물에 씻지 않으리
오, 상산(商山)은 푸르고 푸르러 낙수(洛水)는 구불구불 흐른다. 옛것을 계승함이 있으니, 층층 집이 구름에 닿
았도다. 둘러 있는 것이 맑은 낙수요, 높은 상안(商顔)주D-07이로다. 순창(淳昌)의 후계함이 영구히 깎이지 않
을 것이다.' 하였다." 한다.
관수루(觀水樓) : 낙동강 동쪽 언덕에 있다.
응신루(凝神樓) : 풍영루(風詠樓) 서쪽에 있으며, 판관(判官) 민녕(閔寧)이 세웠다.
신증 홍귀달(洪貴達)의 기(記)에 "고을 객헌(客軒) 동쪽에 '풍영'이라는 다락이 있는데 목은(牧隱) 이 선생(李先
生)이 이름과 기를 지었고, 그 서북 모퉁이에 또 지붕마루를 연하여 새로 일어난 것이 있으니 이름하여 응신(凝
神)인데, 지금의 통판(通判) 민녕(閔寧) 후가 세운 것이고 함종(咸從) 어자익(魚子益) 선생이 이름한 것이다.
홍치(弘治) 기미(己未)년 봄에 겸선(兼善)이 명령을 받아 성종실록(成宗實錄)을 성주사각(星州史閣)에 봉안(奉
安)하는 길에 상주(尙州)로 지나게 되었으니 상주는 우리 시골이다.
시골 사람들이 풍영루(風詠樓) 위에서 내게 술을 주는데 목사 신종지(申宗之) 공과 민후(閔侯)가 함께 자리에
있었다.
술이 취하고 날이 저물 때 민후가 일어나서 고하기를, '작은 다락은 우리가 사객(使客)을 편안하게 하자는 것인
데, 왜 오늘 여기에서 자지 않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이 누각이 기(記)가 없으니 한 말을 남기기를 원한다.'
하였다.
내가 사양할 수 없어서 말하기를, '재주없는 내가 다행히 여기에서 마시고 읊는데 마침 봄옷이 이루어짐을 만나
[春服之成] 손과 벗이 자리에 가득하고 또 사죽(絲竹)과 관현(管絃)의 성대함이 있으니, 어른과 아이 7ㆍ8명이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읊고 돌아오는 것에 비교하면 과연 어떠한가.' 하였다.
조금 뒤에 작은 다락에 자리를 까니 그 제도가 극히 깨끗하고 시원스러웠다.
다락 중심에 방을 만들었는데, 창은 비고 발은 성기어 더울 때에 거처하기가 대단히 좋게 되어 있다.
또 바로 다락 머리에 목욕하는 집이 있어 깨끗하고 편리하였다.
술이 깬 뒤에 내려가 목욕하니 심신(心神)이 맑고 명랑하여 한 점의 진구(塵垢)도 없었다.
끝낸 뒤에 다시 오르니 때는 이미 사람의 소리가 없는 고요한 밤인데 오직 작은 바람이 휘장을 움직이고 등롱
촛불이 그림자를 흔드니, 참으로 인간의 둘도 없는 정취였다. 이에 단정히 ‘함이 없이[無爲]’ 눈을 감고 보는 것
을 거두니, 마음이 엉기고 형상이 풀리며 천기(天機)가 움직이지 않아서 만물과 더불어 가만히 합하였다.
그래서 몽롱하게 잠이 드니 꿈에 신선이 내게 읍하며 말하기를, '괴로운 티끌 세상에 만 가지 일이 한 몸에 집중
되어 그럭저럭 늙는 것이 이르러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 내가 한 가지 비결이 있는데 말이 간단하고 긴요하다.
만물이 수없이 많은데 마음은 오직 고요하다.
물건마다 생각해 처리한다면 날마다 하여도 부족하고 정신을 어리어 고요하게 보면 백 가지 생각이 일치된다.'
하였다. 말이 끝나자 보이지 않았다.
이에 꿈이 활짝 깨어 마음으로 가만히 스스로 말하기를, '신선은 누각에 사는 것을 좋아한다주D-008 하였는데,
아까 꿈에 보인 것이 이 다락의 주인이 아닌가. 그가 나를 가르쳤도다.' 하였다. 얼마 뒤에 계인(鷄人 관직명)이
새벽을 알리고 민후가 벌써 와서 문안하였다. 꿈에 신선에게 들은 것을 말하니 후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허어
이것이 누의 기가 될 만하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함종(咸從)이 이름을 지은 뜻도 나타내어 밝혀야 하겠
고 또 목은(牧隱)의 기가 있어 옛 다락 사이에 있으니, 새 다락은 나의 일이 아닌가 하고 이에 신선의 말을 써서
민후에게 주어 돌려 보내었다.' 하였다.
신증 청량각(淸涼閣) : 객관 북쪽에 있어 작은 못에 굽어 임하고 있다.
추월당(秋月堂) : 서헌(西軒) 북쪽에 있다. 목사 정종보(鄭宗輔)가 세웠다.
한연당(閒燕堂) : 주 동쪽 40리에 있다. 이항(李沆)의 별장이다. 남곤(南袞)의 기에,
"이호숙(李浩叔)이 낙동강(洛東江) 서쪽 언덕에 땅을 잡아 밭 두어 이랑을 사서 집 3칸을 짓고 당에 올라 사방으
로 바라보니 긴 강은 시야(視野)에 미만(彌滿)하고 흰 모래는 자리를 펼친 것 같고 강 밖의 석벽은 수십 리를 두
르고 청동산(靑銅山)은 연기와 구름, 아득한 아지랑이 밖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니 참으로 좋은 경치였다.
호숙이 즐거워서 돌아가기를 잊고 그 당에 편액(扁額)하기를 '한연(閒燕)'이라 하고 그 뒤에 내게 기(記)를 구하
였다.
내가 한(恨)하기를 '낙수(洛水)가 태백산(太白山)으로부터 남해로 들어가는데 그 중간이 수백 리뿐이 안 되나
저 영호(映湖)ㆍ월파(月波)ㆍ관수(觀水) 등의 여러 누각과 정자가 모두 국가의 소유가 되었으니,
망천(輞川)의 왕마힐(王摩詰)과 보리(甫里)의 육구몽(陸龜蒙)주D-009은 어찌 그렇게 사람이 없는가.
사람이 그 지경을 만나지 못한 것인가.
또한 기다림이 있는 것인가 한갓 붉은 단장과 푸른 눈섬은 보내고 맞는 사이에 떠들어대고 운산(雲山)과 풍월
(風月)은 적막(寂寞)한 물가에 길이 한가하니 이것은 어찌 유감스런 일이 아닌가,' 하였는데 지금 호숙의 청함에
비로소 낙동강이 기다림을 알았고 나의 유감도 풀렸다. 한연(閒燕)의 뜻에 내가 무엇을 부연하여 말하리오.
군의 부친이 바야흐로 인의(仁義)의 말로 임금에게 진달하고 군이 또 인의의 정사로 영천(榮川) 백성에 임하니
이것이 평소에 한연(閒燕) 사이에서 얻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서 당의 이루어짐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남은 온축
이 없다. 그러나 한연의 도(道)가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랴. 현달하고도 행하지 못하면 조정에서도 한연할 것이
요, 만일 어그러짐이 있으면 호산(湖山) 사이에서 한연할 것이니, 그러면 나오는 것도 인의로 하고 물러가는 것
도 인의로 하여 일생의 쓰는 것이 모두 그 인의 속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호숙의 깊은 뜻이고 다른 사람은 엿보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비록 무상(無狀)하나 이공 부자의 사이에서
교유함을 얻었으니 감히 이것으로 당 위의 기를 삼는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주 남쪽 5리에 있고 남루(南樓)가 있다. 선덕(宣德) 초년에 판목(判牧) 조치(曺致)가 세웠다.
홍여방(洪汝方)이 기를 지었다.
역원 낙양역(洛陽驛) : 주 서쪽 3리에 있다. 낙동역(洛東驛) : 낙동강 동쪽 1리에 있다.
낙원역(洛源驛) : 주 북쪽 16리에 있다. 낙서역(洛西驛) : 주 서쪽 19리에 있다.
낙평역(洛平驛) : 주 남쪽 26리에 있다. 장림역(長林驛) : 화령현(化寧縣) 동쪽에 있으며 주에서 51리다.
남원(南院) : 주 남쪽 2리에 있다. 안빈원(安賓院) : 주 동쪽 11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 주 동쪽 19리에 있다.
이두등원(泥豆等院) : 주 동쪽 36리에 있다. 요제원(要濟院) : 주 동쪽 37리에 있다.
양산지원(陽山旨院) : 주 남쪽 15리에 있다. 흥옥원(興玉院) : 주 남쪽 9리에 있다.
서원(西院) : 주 서쪽 3리에 있다. 어암원(於巖院) : 주 서쪽 15리에 있다. 율원(栗院) : 주 서쪽 33리에 있다.
부원(釜院) : 주 북쪽 8리에 있다. 북원(北院) : 주 북쪽 2리에 있다. 송원(松院) : 주 북쪽 26리에 있다.
당제원(唐梯院) : 주 북쪽 15리에 있다. 퇴산원(退山院) : 주 북쪽 42리에 있다.
유등원(柳等院) : 주 남쪽 24리에 있다.
죽현원(竹峴院) : 죽현(竹峴) 아래에 있다. 대두원(大豆院) : 주 남쪽 24리에 있다.
중생원(重生院) : 중모현 남쪽에 있는데 주까지 65리다. 장혜원(長惠院) : 중모현 서쪽에 있는데 주까지 72리다.
동원(東院) : 중모현 동쪽에 있으며 주까지 56리다.
반암원(班巖院) : 산양현(山陽縣) 서쪽에 있으며 주까지 57리다.
공성원(功城院) : 주 남쪽 43리에 있다.
신증교량 북천판교(北川板橋) : 주 북쪽 5리에 있다.
남대교(南大橋) : 주 남쪽 5리에 있다. 동술교(東述橋) : 주 동쪽 5리에 있다.
양산지교(陽山旨橋) : 주 남쪽 13리에 있다.
불우 용암사(龍巖寺) : 만악산(萬嶽山)에 있다.
○ 고려(高麗) 황보탁(黃甫倬)의 기에, "만악산(萬嶽山)이 단밀현(丹密縣) 서남방 30여 리에 있는데,
태백산(太白山)으로부터 서리서리 연하여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고 널푸러져 모여드는 것이 얼마이지 알지 못하
지마는 오직 이 산만은 영기를 품고 바탕을 온축(蘊蓄)하여 홀연(屹然)히 진산(鎭山)이 되었으니 상락(上洛) 사
람들이 덕산이라 지목한다.
용암사(龍巖寺)가 위로는 뾰족한 산에 의지하고 아래로는 질펀한 물에 임하였으니 이것은 만악산이 미(美)를 모
은 것이다. 옛날에 우리 태조(太祖)께서 통합(統合)한 처음에 이 산 동남 모퉁이에 좋은 땅을 정하여 절을 세우고
밭 6백 묘(畝)를 주고 나무할 땅을 붙여서 화엄(華嚴) 원교(圓敎)주D-010를 천양(闡揚)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 후에 해이(解弛)하고 폐한 지가 오래라 무너진 담과 깨어진 주추가 바위 언덕에 끼어 있고, 금병(金餠) 같은
땅은 변하여 기와쪽과 조약돌이 되었고, 연화(蓮花)주D-11의 지경이 모두 가시밭이 되어서 공허한 곳으로 도피
하는 자가 혹 때때로 이르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지난 갑오(甲午)년에 임금께서 친히 쓴 조서를 내리어 절의 주지(住持) 운미(雲美)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서쪽
사람들이 험고(險固)한 것을 믿고 우리에게 항거하여 변방 사람을 모아서 반역을 꾀하므로, 이에 원수를 명하여
성을 쳐서 토죄(討罪)하였는데 흉한 무리가 스스로 그물에 몸을 던질 뿐 아니라 우리 평민들도 화살과 돌에 목
숨을 잃었다. 그래서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간난(艱難)한 것을 구제하려 하니, 바라건대 그대는 나의 불쌍히 여
기는 뜻을 생각하여 부처께 기도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주지 운미가 여러 종들과 함께 예전에 지나본 곳으로써 진(眞)을 서식(棲息)하고 법(法)을 강연(講演)
하여 국가에 복리가 되게 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는데 그윽한 곳을 더듬고 좋은 곳을 가리어 이 절에 이르렀다.
측연(測然)히 흥복(興復)할 뜻이 있어 기계를 날카롭게 하고 재목과 기와를 수집하여 무술(戊戌)년 봄 3월에 시
작하여 기해(己亥)년 11월에 준공하였으니, 모두 87일간이었다. 임금이 의정왕후(懿靜王后)의 명복을 비는 곳
으로 만들어 밭 40경(頃)을 붙이고 또 내탕(內帑)의 재물로 벼 2천 석을 팔아들이어 학업을 권하는 것과 기름과
향의 비용에 충당하게 하고 고승(高僧) 지영(知英)을 명하여 주지(住持)하게 하였다.
슬프다!. 석씨(釋氏)의 교가 가리고 몽매하여 거꾸로 놓여진 풍속으로 하여금 착한 데에 옮기어 죄를 멀리하고
순진한 데로 돌아가고 소박한 데로 돌아오게 하니, 실로 다스리는 도(道)에 도움이 있는 것이다.
저 서쪽 사람들이 성(城)을 바쳐 항복하여 피를 흘리지 않고 평정된 까닭과 그 공[陰功]과 묘한 힘이 대개 여기
에 힘입음인지 어찌 알랴. 이제 이 용암사의 이루어짐에 있어서 역사가 너무 번거롭지 않고 제도가 지나치게 사
치하지 않아서 앞사람의 기업을 변함이 없고 뒷사람의 보는 것을 폐함이 없었으니, 다만 능히 불사(佛事)를 크
게 천양(闡揚)하기를 저렇듯 탁연(卓然)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주상(主上)께서 백성을 근심하고 폐단을 구제
하는 뜻에 응부(應副)하기를 이렇듯 지극하게 한 것이다. 미사(美師)의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인데 명주(溟州)
사람이다. 젊었을 때에 깨끗하게 진세(塵世)에 뛰어날 뜻이 있어 치악산(雉岳山) 개선사(開善寺)의 윤공(胤公)의
강연 아래에 들어가 수업하여 넓은 학문과 높은 행실로 위로는 임금의 의지하고 공경하는 바가 되고 아래로는
배우는 자들의 쳐다보고 우러르는 바가 되었으니,
비록 도안(道安)의 예장(豫章) 기재(杞梓)와 규기(窺基)의 유단(流檀) 천혜(闡蕙)라도 어찌 여기에 더하리오."
하였다.
승장사(勝長寺) : 장천부곡(長川部曲)에 있다.
○ 김상직(金尙直)의 〈중창기(重創記)〉에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이 중국 조정의 명령을 받아 상락공
(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을 명하여 동으로 왜구(倭寇)를 정벌하는데, 왕이 김해부(金海府)에 거둥하여 전송하고
돌아올 때 이 절에 유숙하고 드디어 천태종(天台宗)주D-012에 붙이었다." 하였다.
용담사(龍潭寺) : 장천부곡(長部曲)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빈 골짜기에는 바람이 오히려 소리치고, 찬 시내에는 물이 절로 내려 씻는다.
기르는 것은 지둔(支遁)주D-13의 말을 어여삐 여기고, 주문은 섭공(葉公)주D-14의 용을 내린다.
작은 채전(菜田)에는 신령스런 삽주[朮]에 물을 주고, 그윽한 뜰은 어린 소나무를 보호한다.
한 소리 맑은 밤 경쇠소리, 달을 짝지어 먼 봉우리에 떨어진다." 하였다.
○ 고려 김양경(金良鏡)의 시에,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여 푸른 산비탈로 들어가고, 위태한 다락은 우뚝하여 푸
른 무지개를 굽어본다. 새벽이 서늘한데 누른 송아지는 평평한 들로 돌아가고, 한낮이 되니 그윽한 새는 얕은
시내에서 목욕한다. 집에 가득한 담쟁이덩굴은 벽에 얽히어 컴컴하고, 창에 늘어진 버들은 처마를 눌러서 나직
하다. 문 밖의 진흙에 깊이 사슴의 발자국 박혀 있는 것은 땅이 궁벽하여 이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미륵암(彌勒庵) : 사불산(四佛山)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에, "대원(大院)의 고개가 지맥(支脈)이 갈리어 동남쪽으로 둘러 갈라져 보주(甫州)ㆍ산양(山
陽) 두 고을 경계에 이르러 불룩하게 높이 일어났는데, 산정(山頂)에 큰 돌이 있어 뿌리가 떠서 서있고 사면에
모두 부처의 몸을 새겼으니 그 때문에 사불산(四佛山)이라 이름하였다.
온 나라의 부처를 신봉하는 자들이 가장 이야기하기 좋아하고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봉우리는 법왕
이고 그 남쪽 언덕 돌에 자씨(慈氏 미륵보살(彌勒菩薩))의 얼굴을 새기고 옆에 작은 절을 지었는데 미륵암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때에 창건(創建)한 것이고 암자 북쪽에 묘한 봉우리가 있어 멀리 사불(四佛)을 향하여
우뚝 서 있는데 신라 왕이 사불을 바라보고 예를 한 곳이라 한다. 세대가 멀어서 집이 무너져 풀숲이 되어버렸
다.
전 판사(判事) 백진(白瑨) 공이 대대로 영해(寧海)에 살아오는데 계해(癸亥)년 봄에 왜구(倭寇)를 피하여 어머니
를 엎고 자빠지고 미끄러지며 간신히 걸어서 두어 고을을 거쳐 이 산 아래로 왔다. 이듬해에 어머니가 병으로 죽
으매 상사를 영위하고 복을 추원(追願)하여 있는 힘을 다하였다.
하루는 울며 산 중에게 고하기를, '내가 부모를 위해 정려(精廬)를 영건하여 명복을 빌어서 조금이라도 망극한
슬픔을 펴려 하는데 큰 상처의 아픔이 깊으므로 더욱 애통(哀痛)하다.' 하였다. 중이 말하기를 '새 절을 창립하는
것은 나라에서 정한 법금(法禁)이 있다. 산에 미륵암이 있는데 신라 때 옛터가 폐하여 부흥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일으켜서 새롭게 하지 않는가.' 하였다.
공이 눈물을 거두고 말하기를, '좋다' 하고, 곧 가서 살펴보니, 샘과 구렁이 맑고 깊으며 지경과 땅이 시원하고
깨끗하며, 미륵보살[慈氏]의 상(像)이 완연하고 남은 터가 그대로 있었다. 마음에 맞는지라 곧 즐겁게 나가서
거칠고 가린 것을 베어내고, 자갈과 흙을 밀어버리고 집 칸을 세워 이중 처마를 붙이니, 당도 있고 부엌도 있고
반질반질하고 또 간단하며, 붉은 마룻대와 푸른 연목이 높고 크고 빛나고 아름다워 볼 만한데,
전말(顚末)을 기록하여 벽에 게시하고자 하나 아직 못하였다.
이때에 내가 일을 말하다가 성대(省臺)에게 거슬려서 영해(寧海)에 귀양와 있었다.
백공이 이미 고향에 돌아와서 두 번이나 청하므로 내가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그 말을 써서 기록한다.
아, 세상 풍속이 부모를 섬김에 있어 겨우 상사와 장사를 영위할 뿐인데, 백공은 능히 예제(禮制)를 다하고도 오
히려 부족하여 왜구를 피하여 떠돌아다닌 나머지 절을 창건하고 불경을 인출(印出)하여 유구 무궁한 복리와
신종 추원(愼終追遠)주D-015의 효도를 도모하니 남보다 한 등수가 높다 하겠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천봉산(天峯山)에 있다.
여단(厲壇) : 주 북쪽에 있다.
고적 백화산(白華山) : 옛날 석성(石城)이 있다. 둘레가 1천 9백 4척이고, 안에는 시내가 1개, 샘이 5개 있다.
지금은 폐하였다.
사벌국고성(沙伐國古城) : 병풍산(屛風山) 아래에 있다. 성 옆에 높고 둥근 구릉(丘陵)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사벌국의 왕릉(王陵)'이라 한다.
○ 신라(新羅) 말년에 견훤(甄萱)의 아비 아자개(阿慈介)가 이 성에 응거하였다.
화창현(化昌縣) :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지내미지현(知乃彌知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쳐 상주(尙州)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하였으나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공성폐현(功城廢縣) : 본래 신라의 대병부곡(大幷部曲)이다.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에 붙이었다. 주 남쪽 30리에 있다.
영순폐현(永順廢縣) : 본주(本州) 북면(北面) 임하촌(林下村)이다. 고려(高麗) 때에 촌 사람 태씨(太氏) 성을
가진 자가 도둑을 잡아 공이 있으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쳐 승격하여 현을 만들어서 그대로 붙이었다.
주 북쪽 35리에 있다.
청리폐현(靑里廢縣) : 이(里)는 혹은 이(理)로 되었다. 본래 신라의 음리화현(音里火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청효(靑驍)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붙였다. 주 남쪽 20리에 있다.
무림부곡(茂林部曲) : 주 북쪽 30리에 있다. 예전 무흥촌(茂興村)이다.
연산부곡(連山部曲) : 낙동강 동쪽 5리에 있다. 소금 창고가 있다.
백원부곡(白原部曲) : 주 남쪽 15리에 있다. 양녕부곡(壤寧部曲)ㆍ하해부곡(河海部曲) : 모두 본주에 있다.
양보부곡(陽寶部曲) : 산양현(山陽縣)에 있다. 관제부곡(寬濟部曲)ㆍ
선은소(鐥銀所) : 모두 화령현(化寧縣)에 있다.
가량부곡(加良部曲) : 주 남쪽 15리에 있다. 보량부곡(保良部曲) : 주 동쪽 20리에 있다.
평안부곡(平安部曲)ㆍ평산부곡(平山部曲) : 모두 공성현(功城縣)에 있다.
주선부곡(主善部曲)ㆍ단곡부곡(丹谷部曲)ㆍ생물부곡(生物部曲) : 모두 단밀현(丹密縣)에 있다.
해상이소(海上伊所) : 중모현(中牟縣)에 있다.
명신신라 김유신(金庾信) : 진덕왕(眞德王) 때에 백제(百濟)를 쳤는데, 공을 논하여 이찬(伊餐)으로 질(秩)을
더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으로 삼았다.
이등(伊登) : 법흥왕(法興王) 12년에 대아손(大阿飡) 이등(伊登)을 군주(君主)로 삼았다.
고려 이주좌(李周佐) : 목종(穆宗) 때에 과거에 올라 상주목(尙州牧) 기실참군(記室叅軍)에 등용되었다.
김부일(金富佾) : 숙종(肅宗) 때에 나가서 지키었다. 한충(韓冲) : 사록(司錄).
정극영(鄭克永) : 사록(司錄). 정항(鄭沆) : 사록(司錄). 처음 고을에 이르매, 사람들이 젊어서 소홀히 여겼는데,
일에 임하여 잘 결단하매 모두 탄복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사록을 셀 때에는 두 정(鄭)과 한(韓)이라 하는데,
항(沆)과 극영(克永)과 충(冲)을 말함이었다.
양원준(梁元俊) : 인종(仁宗) 때에 부사(副使)가 되었다. 정사가 청렴하고 근면하여 아전과 백성이 칭송하였다.
최유청(崔惟淸) : 인종(仁宗) 때에 목이 되어 덕스러운 정사가 있었다. 최기우(崔奇遇) : 과거에 합격하여 사록
에 전보(塡補)되었다. 뒤에 목의 부사[副使]가 되었다
최득평(崔得枰) : 수(守)가 되었는데, 백성들이 그 은혜를 생각하였다.
최재(崔宰) : 득평(得坪)의 아들인데 공민왕(恭愍王) 때에 목사로 나왔다. 신축(辛丑)년 겨울에 공민왕이 군사를
피해 남방으로 옮겨 이듬해 봄에 상주를 순행하매 재(宰)가 힘을 다하여 공봉(供奉)하고 판변[辦 ]하였다. 오직
털끝이라도 백성에게 상함이 있을까 두려워 먹이고 주는 것을 일삼지 않으매구하다가 얻지 못한 자가 있어 조금
헐뜯었다.
윤해(尹諧) : 사록이 되었다. 백성 중에 그 누이와 난행(亂行)한 자가 있었고, 이때에 극히 가물었다. 해가 장관과
다투어 극형에 그를처하매 하늘이 과연 비를 내렸다.
김인경(金仁鏡) : 좌천되어 목사가 되었는데 주위 벽에 쓰기를, "감히 하늘을 향하여 원망하는 생각이 있으랴.
귀양와도 오히려 성을 오로지함[專城 지방장관]을 얻었다. 어느 때에 영각(鈴閣 장수가 있는 곳)에서 황각(黃閣
정승이 있는 집)에 올라, 태수(太守)의 행차가 재상(宰相)의 행차로 될꼬."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형부상서(刑部
尙書) 좌복야(左僕射)가 되었다.
최자(崔滋) : 강왕(康王) 임신(壬申)에 진사(進士) 과거에 뽑히어 예에 의하여, "상주사록참군사 겸장서기(尙州司
錄參軍事兼掌書記)에 전보(塡補)되었다가 들어와 국학 학유(國學學諭)가 되었고, 뒤에 또 목사로 나갔다.
김지대(金之岱)가 시를 주기를, '일찍이 관기(管記)주D-016가 되었을 때는 얼굴이 옥 같았는데, 다시 오두(遨頭
태수(太守))가 되어도 살쩍이 아직 희지 않았다." 하였다.
고사(故事)에 정월ㆍ동짓달 팔관회(八關會)와 탄신절(誕辰節)에 양계(兩界) 병마사(兵馬使)와 여러 목사 도호부사
(都護府使)가 전(牋)을 올려 하례하면 중서문하(中書問下)에서 그 높고 낮은 차례를 정하여 방(牓)을 붙이는데,
상주(尙州)의 표전(表牋)이 반드시 일등을 차지하니, 문사(文士)들이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주는 도(道)
의 으뜸이므로 옥 송사가 더욱 빈번하였는데, 최자가 이르는 날엔 판결하기를 귀신같이 하니, 아전과 백성이 아
끼고 두려워하여 윤상(倫常)을 어지럽히고 강기(綱紀)를 범하는 자가 없어서, 얼마 안 되어 옥이 비어서 지경 안
에 화한 기운이 돌아 태평하게 되었다. 기한이 차지 않아서 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로 소환하였으니,
대개 그 특수한 포장(褒獎)을 보인 것이다.
김부의(金富儀) : 판관(判官)이 되었다. 안유(安裕) : 판관이 되었다.
그때에 여자 무당 세 사람이 있어 요망한 귀신을 받들고 민중을 미혹하여 합주(陜州)로부터 여러 고을을 돌아다
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의 소리를 지어 공중에서 불러서 은은하게 갈도(喝道)주D-17하는 소리 같으매, 듣는
자들이 서둘러 제사를 베풀어서 감히 뒤지는 자가 없고, 비록 수령(守令)이라도 또한 그러하였다.
상주에 이르매 안유가 곤장을 때려 칼을 씌웠다.
무당이 귀신의 말로써 화복(禍福)으로 유혹[怵]하니, 상주 사람이 모두 두려워하나 유가 움직이지 않았다.
두어 날이 지난 뒤에 무당이 애걸하므로 석방하였는데, 그 요괴(妖怪)가 드디어 없어졌다.
3년 만에 염사(廉使)가 그 맑은 정치를 포장하여 불러서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 삼았다.
정운경(鄭云敬) : 충숙왕(忠肅王) 때에 과거에 올라 사록(司錄)에 전보되었다. 용궁감무(龍宮監務)가 뇌물을 받
았다고 무고하는 자가 있으매, 안렴사(按廉使)가 운경을 보내어 국문하게 하였다. 운경이 용궁에 이르러 물어
보지도 않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관리가 탐하고 더러운 것이 비록 악덕(惡德)이라고는 하지마는, 재주가 족히
법을 농간하고 위엄이 족히 사람을 두렵게 할 만한 자가 아니면 하지 못하는 법인데, 지금 감무가 늙고 또 임무
를 감당하지 못하니, 누가 뇌물을 주려 하겠는가." 하였다.
안렴사가 과연 거짓인 것을 알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근래에 관리들이 가혹한 것을 숭상하는데,
사록은 참으로 장자(長者)로다." 하였다.
안축(安軸) : 충혜왕(忠惠王) 때에 검교평리(檢校評理)로 나와서 목사가 되었다.
최중청(崔仲淸) : 판관이 되었다.
본조 권집경(權執經) : 지신사(知申事)로 물러나와 고향에 살고 있었는데, 특별히 천거하여 목사로 삼았다.
박이창(朴以昌) : 교수(敎授)가 되었다. 이인손(李仁孫) : 관찰사(觀察使)로 목사를 겸하였다.
조오(趙峿) : 판관이 되었다. 김구(金鉤) : 목사가 되었다.
이전수(李全粹)ㆍ유문통(柳文通) : 모두 목사가 되었다.
신증 정종보(鄭宗輔) : 목사가 되었는데 백성이 복종하고 아전이 두려워하였다.
인물고려 김득배(金得培) : 고을 아전 김조(金祚)의 딸이 만궁(萬宮)인데, 나이 일곱 살에 부모가 거란(契丹)의
군사를 피하여 백화성(白華城)으로 가다가, 군사가 쫓아오자 길 옆에 버리고 달아났다. 사흘 뒤에 수풀 밑에서
찾았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밤이면 무슨 물건이 와서 안아주고 낮이면 갔다."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는데 곧 호랑이였다. 15세가 된 뒤에 호장(戶長) 김밀(金謐)에게로 출가하
여 록(祿)을 낳았고, 록이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득배(得培)이다. 과거에 올라 예문 검열(藝文檢閱)이
되고, 전객 부령(典客副令)이 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원(元) 나라에 들어가서 숙위(宿衛)하였는데,
왕이 즉위한 뒤에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제수하고, 6년에 서북면 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
指揮使)가 되고, 조금 뒤에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제수하고, 인하여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로 삼아 서경윤 상만호(西京尹上萬戶)를 겸하였다.
7년에 홍두적(紅頭賊)의 위평장(僞平章) 모거경(毛居敬)의 무리가 의주(義州)를 함락시켜 부사(府使) 주영세(朱
永世)와 고을 백성 천여 명을 죽이매, 득배가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군사를 거느려 진격하였는데,
모두 아홉 번 싸워서 개가(凱歌)를 아뢰고 돌아와서, 수충보절 정원공신 정당문학(輸忠保節定遠功臣政堂文學)
을 제수하였다. 10년에 홍두적이 또 삭주(朔州)를 공격함에, 득배가 도병사(都兵使)가 되어 안우 이방실과 더불
어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쳤다. 적이 서울을 함락하매 군사를 내어 머리 10여 만을 베니, 적이 드디어 평정되었
다. 김용(金鏞)이 득배의 무리가 큰 공을 이루어 왕이 총애할까 두려워하여 안우(安祐)의 무리를 시켜 정세운
(鄭世雲)을 죽이고, 이로써 죄를 만들어 득배를 죽이니, 듣는 자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선치(金先致) : 득배의 아우이다. 낭장(郞將)으로 전라도 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 유탁(柳濯)을 따라 왜적
(倭賊)을 쳐서 손으로 수십 명을 죽였다. 여러 번 옮기어 호부 낭중(戶部郎中)이 되었고, 공민왕(恭愍王) 때에
원수 이암(李嵒)을 따라 적을 쳐서 일등으로 녹공(錄功)되어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뽑히었다.
홍두적이 서울을 함락하여 여러 장수를 따라 수복(收復)하였다.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나아가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되고, 동지밀직(同知密直)에 승진하였다. 신우(辛禑) 때에 낙성군(洛城君)
으로 봉하여졌다.
김득제(金得齊) : 득배(得培)의 아우이다. 벼슬이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이르렀다.
김수자(金守雌) : 과거에 합격하여 금양현위(金壤縣尉)에 조용(調用)되었다. 인종(仁宗) 때에 사관(史館)을 맡았
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궁궐이 연소되자, 수자가 금중(禁中)에서 받들다가 국사(國史)를 지고 산호정(山
呼亭) 북쪽에 땅을 파고 감추어서 불타지 않았다.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겼는데, 어머니가 늙었으므로 고을을 나
가 예주 방어사(禮州防禦使)가 되었다가 죽었다.
의종(毅宗) 때에 이부(吏部)에서 아뢰기를, "수자가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국사를 옮겨 감추었는데, 현저한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매우 아까운 일이라." 하였다. 명령하여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증직하였다.
이민도(李敏道) : 원(元) 나라 하간부(河間府) 사람인데, 순제(順帝) 말년에 병란을 피하여 동쪽으로 왔다. 나라에
공이 있으므로 상상군(商山君)을 봉하고, 명하여 상주로 본관(本貫)을 삼았다.
본조 박안신(朴安臣) : 과거에 올라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고,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태종(太宗) 때에 대관(臺官)이 되어 일을 말하다가 좌죄되어 목을 베이게 되었다. 얼굴빛이 변하지 않고 한 절구
(絶句)를 읊조리기를, "수(數)가 천년을 당하였으니 황하수(黃河水)가 응당 맑아질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군왕께서 지극히 성명(聖明)하다 하였는데, 내 직책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달게 죽음을 받지마는, 임금께서 간신
(諫臣)을 죽였다는 이름을 얻을까 두려워하노라." 하였다.
뾰족한 사금파리로 땅에 그어 글자를 만들고 눈을 부릅뜨고 옥(獄) 아전에게 말하기를, "이 시를 상감께 드리렷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가 악귀(惡鬼)가 되어서 너의 씨붙이를 남기지 않겠다." 하였다.
태종이 듣고 위엄이 가라앉아서 용서하였다. 뒤에 일본(日本)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해적을 만났다.
적이 칼을 빼들고 함부로 배 속에 뛰어들어 행구(行具)를 약탈하는데, 안신이 큰 상에 걸터앉아 꿈적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휘하니, 적이 두려워서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므로 일행들도 힘입어 안전하였다.
아들 이창(以昌)이 또한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항직(抗直)하여
사람에게 굽히지 않았다 김사우(金師禹) : 무과에 올라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김상직(金尙直) :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이르렀다.
황효원(黃孝源) : 갑자(甲子)년 과거에 장원으로 뽑히었다. 좌악좌리공신(佐翼佐理功臣)에 참여하여 상산군
(商山君)으로 봉해졌다.
우거고려 조운흘(趙云仡) :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서 관직을 사퇴하고 와서 노음산(露陰山) 밑에 살며 스스로
석간(石磵) 서하옹(棲霞翁)이라 이름하고, 거짓으로 미쳐 스스로 도회(韜晦)하여 출입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탄
다. 기우도(騎牛圖)와 찬석간가(贊石磵歌)를 지어서 뜻을 보였다. 자은사(慈恩寺) 중 종림(宗林)과 더불어 방외
(方外) 친구가 되어서 초연(超然)히 세상 밖의 의상이 있었다. 양주(楊州)에 자세히 보였다.
효자고려 신우(申祐) : 벼슬이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그 아버지 판도판서(版圖判書) 원유(元濡)가 죽자,
우가 3년 동안 여막에서 지냈다. 무덤 앞에 대 두 그루가 나니 사람들이 효도의 감응(感應)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였다.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신증본조 박세연(朴世延) : 어버이를 효도로써 섬기고 돌아가시자 장사와 제사에 예를 다하여 3년 동안 여막에
있어 한 번도 집에 이르지 않았다. 상(喪)이 끝나도 배회하며 차마 가지 못하고 두어 날을 통곡하니, 동네 사람들
이 감동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날마다 반드시 새벽에 사당에 뵙고 초하루 보름으로 제사를 그치지 않았다.
열녀본조 김씨(金氏) : 김심(金潯)의 아내이다. 나이 17세에 심이 죽자 머리를 깎고 신의를 지켜 그 몸을 마쳤다.
신증 정씨(鄭氏) : 교리(校理) 권달수(權達手)의 아내이다. 연산(燕山) 갑자(甲子)년에 달수가 피살되었는데,
정씨가 그때 함창(咸昌) 촌집에 있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입에 넣지 않은 지 무릇 60여 일에 그 종에게 말하기를,
"지금까지 참고 살아온 것은 남편의 유해가 돌아와 장사하기를 기다려서 뼈를 그 곁에 의탁하렸더니,
기력이 이미 다하였으니 내가 죽을 것이다." 하고 통곡하다가 운절(殞絶)하였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지형진사호기복(地形眞似虎起伏)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상주는 옛날의 사벌국(沙伐國)이다.
왕후(王侯)의 제택(第宅)이 남은 터도 없다. 간과로(干戈)로 백 번 싸운 생사(生死)의 땅에 오직 강산만이 성쇠
(盛衰)를 꺾어 왔다.
나라 깨어져 고을 되고 고을이 나라됨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때만이 아니리라. 땅 형세는 흡사 호랑이가 일어
났다 엎드렸다 함과 같아서 어찌 그리 담 두르듯 천리를 에둘렀노. 가고 옴에 피곤하여 누웠으니 날은 저물어,
기관(寄觀)에 눈을 붙여 끝까지 찾을 겨를 없었다. 날 밝자 나가 놀아 시험삼아 고루 보니, 고기 비늘 같은 집에
용트림한 들 보이도다. 나비 같은 눈썹(고을의 기생들) 나란히 절하는데 환패(環佩)가 운다.
자운(紫雲)주D-018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누구인지 알겠는가." 하였다.
○ 사벌구기유승경(沙伐舊畿猶勝景) : 하륜(河崙)의 시에, 사벌의 옛 왕기는 아직도 좋은 경치이고,
서라(徐羅)의 남은 풍속은 스스로 순박한 풍토로다." 하였다.
○ 불견구주낙수중(不見龜疇洛水中) : 정발(鄭潑)의 시에, "완연히 자지곡(紫芝曲)을 상산(商山) 속에 듣겠는데
주D-019, 귀주(龜疇)주D-20는 낙수 가운데에 보지 못하도다. 사벌(沙伐)의 유적을 물을 곳이 없으니,
수천 년의 일을 시공(詩工 시(詩)하는 사람)에게 부친다." 하였다.
거읍고상락(巨邑跨商洛) : 김조(金銚)의 시에, "큰 고을은 장산과 낙수에 걸쳐 앉았고, 위태한 다락은 조망이
멀고 밝다." 하였다.
천년낙수서응출(千年洛水書應出)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천년 낙수에는 글이 응당 나올 것이요, 만고 상산
은 골이 스스로 깊도다." 하였다.
여정천구원(閭井千區遠) : 권맹손(權孟孫)의 시에, "여항 우물은 물 천 구역이 멀고, 구름산은 만겹이 맑다."
하였다.
[비고]
연혁 선조(宣祖) 29년에 관찰사영(觀察使營)을 대구로 옮겼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영아 좌영(左營) : 인조조에 설치하였다. ○ 좌영장 겸 토포사가 1명이다.
○ 속읍은 상주ㆍ개령(開寧)ㆍ금산(金山)ㆍ지례(知禮)ㆍ함창(咸昌)이다.
○ 감영(監營) : 본조 태조 원년에 경주에서 관찰사영을 상주로 옮겼다. 세종 31년에 관찰사로서 목사(牧使)를
겸하였다가 얼마 안 있어 파하였고, 세조 때 목사로서 우도병마절도부사(右道兵馬節度副使)를 겸하였다가
이윽고 파하였다. 선조 29년에 영(營)을 대구로 옮겼다. 대구편에 보라.
토산 수정석(水晶石)ㆍ송이[宋蕈]ㆍ닥[楮]ㆍ벌꿀[蜂蜜]
성지 화령고현성(化寧古縣城) : 서쪽으로 50리에 있는데, 견훤성(甄萱城)이라고 전해지나 잘못이다.
고성(古城) : 서북쪽으로 50리에 있으며 성산(城山)이라 일컫는데, 곧 화창현성(化昌縣城)이며 남은 터가 있다.
누정 진남루(鎭南樓)ㆍ이향정(二香亭)ㆍ영빈관(迎賓館) : 북쪽 5리에 있다.
진도 송라진(松羅津) : 용궁(龍宮) 하풍진(河豐津) 아래다. 비만봉(飛鸞峯) : 송라진 아래다.
죽암진(竹巖津) : 비만진 아래다. 낙동진(洛東津) : 죽암진 아래며, 동래 대로(大路)로 통한다.
교량 북천교(北川橋) : 북쪽으로 5리에 있다. 남대교(南大橋) : 남쪽으로 5리에 있다.
동미교(東迷橋) : 동쪽으로 5리에 있다. 양산지교(陽山旨橋) : 남쪽으로 13리에 있다.
창고 읍창이 세 개다. 단밀창(丹密倉)ㆍ공성창(功成倉)ㆍ중모창(中牟倉)ㆍ산양창(山羊倉)ㆍ화령창(化寧倉)ㆍ
청리창(靑理倉)ㆍ외서창(外西倉) : 서북쪽으로 10리, 곧 화창(化昌)의 옛 현이다.
사원 도남서원(道南書院) : 선조 병오년에 세우고, 숙종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정몽주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 함께 문묘편에 보라.
노수신(盧守愼) : 충주편에 보라.
유성룡(柳成龍) : 안동편에 보라. 정경세(鄭經世) :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이며 진주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 전문형 증좌찬성(吏曹判書典文衡贈左贊成)이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 옥동서원(玉洞書院) : 선조조에 세우고 정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황희(黃喜) : 태묘(太廟) 편에 보라. 전식(全湜) :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이며 옥천(沃川) 사람이다.
벼슬은 대사헌 증영의정이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 흥암서원(興巖書院) : 숙종 임오년에 세우고 영조 병진년에 어필(御筆)로 현판을 썼다.
송준길(宋浚吉) : 문묘편에 보라. ○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 : 임진왜란 때 여러 의사들이 순절(殉節)한 곳이다.
정조 임자년에 이름을 내렸고, 상단(上壇)에는 4명의 종군자[從事]를 배향하고 하단에는 전사자를 배향하였다.
윤섬(尹暹) : 자는 여진(汝津), 호는 과재(果齋)이며 남원(南原) 사람이다. 벼슬은 교리 증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경류(李慶流) : 자는 장원(長遠)이며 한산(韓山) 사람이다. 벼슬은 예조 좌랑 증도승지(禮曹佐郞贈都承旨)다.
박지(朴篪) : 자는 대진(大津)이며 밀양(密陽) 사람이다. 벼슬은 홍문 교리(弘文校理)다. 김준신(金俊臣).
[주 D-001] 황장(黃腸) : 소나무 심(心)이 누른 것으로 널[槨]을 만드는 것을 황장이라 한다.
[주 D-002] '긍당긍구(肯堂肯構) : 아비가 창업을 하면 자식이 이어서 성공하는 것을 말한다.
[주 D-003] 춘복(春服)이 이루어진 즈음에 : 증점(曾點)이 말하기를, "봄옷[春服]이 만들어지면 아이 6·7명과
관자(冠者) 5·6명과 더불어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다.[詠而歸]"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증점을 허여한다.[吾與點也]" 하였다.
[주 D-004] 젊은이를 품어주고[少者懷之],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주며[老者安之], 편안하게 해주어 오게 하고
[綏之斯來], 고무시켜 화하게 하는[動之斯和] 묘(妙) : ‘젊은이는 품어주고(少者懷之)……’는 《논어》 공야에,
‘편안하게(綏之斯來)……’는 《논어》 자장에 나온 말인데, 앞의 구절은 공자가 자기의 뜻을 말한 것이요,
뒤의 구절은 자공(子貢)이 공자의 덕을 칭호한 말이다.
[주 D-05] 뜨거운 것을 잡았어도[執熱] 샘에 빠는 것을 기다림 없이 맑아지고, : 《맹자》 이루에 “천하에 무적
의 왕이 되기를 바라면서 인정(仁政)을 행하지 않는 모순은 ‘뜨거운 손을 빨리 물에 가서 담그지 않는[誰能執熱
逝不以濯]것’과 같다는 《시경》 대아 상유의 구절을 인용한 것을 약간 변형해서 한 말이다.
[주 D-006] 초(貂)를 속(續)한다 : 초(貂)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잇는다는 옛말이 있는데, 다른 이의 하던 사업
을 자기가 잇는 것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다.
[주 D-07] 상안(商顔) : 상안(商顔)은 곧 상산(商山)인데 한 고조(漢高祖) 때에 사호(四皓)가 숨어 있던 산이름
이다.
[주 D-008] '신선은 누각에 사는 것을 좋아한다 : 선인(仙人)이 누거(樓居)를 좋아한다는 것은 공손경(公孫卿)
의 말임. 황제(黃帝) 때에 누(樓)를 지어서 신인(神人)을 기다렸다 함.
[주 D-009] 육구몽(陸龜蒙) : 당 나라 사람인데 높고 소방(疏放)하여 송강(松江) 보리(甫里)에 살면서 강호산인
(江湖散人)이라 자호(自號)하였음. 뒤에 고사(高士)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주 D-010] 원교(圓敎) : 불교의 한 종파 이름임.
[주 D-11] 연화(蓮花) : 불사(佛寺)를 말함. 불좌(佛座)를 연대(蓮坮)라 함.
[주 D-012] 천태종(天台宗) : 불교의 한 종파이다. 북제(北齊)의 혜문선사(慧文禪師)가 천태산(天台山)에 살았
기 때문에 이름한 것임.
[주 D-13] 지둔(支遁) : 진(晉)나라 임려(林慮) 사람인데, 여항산에서 도를 닦아 25세에 도에 들어갔다.
뒤에 낙양에서 죽었다.
[주 D-14] 주문은 섭공(葉公) : 장자(莊子)에 섭공(葉公)이 용을 좋아한다 하였고, 후진(後秦) 때의 중 섭(涉)
이 바리[鉢] 가운데에 용이 내려오게 하였다.
[주 D-015] 신종 추원(愼終追遠) : 신종은 상사(喪事)에 예를 다하는 것을 말한 것이요, 추원은 제사에 예를
다하는 것을 말함.
[주 D-016] 관기(管記) : 문독(文牘)을 관리(管理)하는 직책.
[주 D-17] 갈도(喝道) : 고관(高官)이 행할 때에 앞잡이가 소리를 외치며 행인을 금지하는 것을 갈도(喝道)라
함.
[주 D-018] 자운(紫雲) : 두목(杜牧)이 어사(御史)가 되어서 이원(李愿)의 연회석에서 이원에게 묻기를, "들으
니 자운(紫雲)이라는 기생이 있다는데 누구인가." 하매, 이원이 가르쳐 주었다. 두목이 한참 주목하여 보더니,
"명불허득(名不虛得)이로다." 하였다.
[주 D-019] 자지곡(紫芝曲)을 상산(商山) 속에 듣겠는데 : 상산 사호(商山四皓)의 자지가(紫芝歌)를 말함.
[주 D-20] 귀주(龜疇) : 홍범 구주(洪範九疇)를 말함. 황제(黃帝) 때에 귀서(龜書)를 낙수에서 얻었는데,
귀주가 곧 그것임.
성주목 星州牧
동쪽으로 대구부(大丘府) 경계까지 26리, 의흥현(義興縣) 경계까지 1백 2리, 인동현(仁同縣) 경계까지 99리,
남쪽으로 고령현(高靈縣) 경계까지 49리, 현풍현(玄風縣) 경계까지 54리,
서쪽으로 지례현(知禮縣) 경계까지 62리,
북쪽으로 개령현(開寧縣) 경계까지 38리, 인동현(仁同縣) 경계까지 20리, 서울까지 6백 27리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 본피현(本彼縣)인데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성산가야(星山伽倻)로서 여섯 가야
중의 하나로 삼았으니, 의심하건대 신라가 빼앗아서 본피현을 두었나보다.
김해부(金海府) 산천 아래에 자세히 보인다. 경덕왕(景德王)이 신안(新安)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에 붙였다가
뒤에 벽진군(碧珍郡)으로 고쳤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경산부(京山府)로, 경종(景宗)이 강등시켜 광평군(廣平郡)으로,
성종(成宗)이 대주도단련사(岱州都團練使)로, 현종(顯宗)이 단련사를 폐지하여 다시 경산부로, 충렬왕(忠烈王)
이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목(牧)으로 만들었고, 충선왕(忠宣王)이
강등시켜 경산부로 만들었는데, 본조(本朝)에서 인습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어태(御胎)를 부(府)의 조곡산(祖谷山)에 안치하고 승격시켜 목으로 만들었다.
속현 가리현(加利縣) : 주 남쪽 59리에 있다. 본래 신라 일리현(一利縣)인데 경덕왕이 성산군(星山郡)으로 이름
을 고쳤다.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에 붙여졌다. 별호는 기성(岐城)이다.
팔거현(八莒縣) : 주 동쪽 72리에 있다. 본래 신라 팔거현(八居縣)인데, 일설에는 '인리(仁里)'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팔리(八里)로 이름을 고쳐 수창군(壽昌郡)에 붙였다. 고려(高麗)에서 다시 팔거(八居)로 일컬었는데,
뒤에 '거(居)'가 변하여 '거(莒)'가 되었다. 현종(顯宗) 때에 와서 붙였다. 별호는 칠곡(七谷)이다.
화원현(花園縣) : 주 동쪽 71리에 있다. 본래 신라 설화현(舌火縣)인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창군
(壽昌郡)에 붙였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붙였고, 뒤에 대구(大丘)에 옮겨 붙였다가 뒤에 다시 붙였다. 별호는 금성(錦城)이다.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각 한 사람이다.
군명 본피(本彼)ㆍ성산(星山)ㆍ가야(伽倻)ㆍ신안(新安)ㆍ벽진(碧珍)ㆍ광평(廣平)ㆍ대주(岱州)ㆍ경산(京山)ㆍ
흥안(興安).
성씨본주(本州) 이(李)ㆍ배(裵)ㆍ여(呂)ㆍ백(白)ㆍ전(全)ㆍ차(車)ㆍ박(朴)ㆍ임(林) : 개경(開京). 강(姜)ㆍ손(孫)ㆍ
김(金)ㆍ조(趙) : 모두 온 것이다.
팔거(八莒) 도(都)ㆍ현(玄)ㆍ임(任)ㆍ전(田)ㆍ변(卞)ㆍ배(裵)ㆍ임(林) : 모두 온 것이다.
가리(加利) 윤(尹)ㆍ조(趙)ㆍ이(李)ㆍ홍(洪)ㆍ정(鄭)ㆍ김(金). 화원(花園) 정(丁)ㆍ조(曹)ㆍ갈(葛)ㆍ서(徐)ㆍ
석(石)ㆍ한(韓)ㆍ이(李)ㆍ백(白) : 모두 온 것이다.
풍속 풍속이 화려한 것을 숭상한다 : 《지리지(地理志)》에, "풍속이 화려한 것을 숭상하고 매와 개를 좋아한다."
하였다. 여공(女功)을 잘한다. : 관풍안(觀風案).
형승 산천이 빼어나고 특이하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記). 연한 봉우리와 중첩한 병장(屛嶂).
긴 내와 평평한 숲 : 이숭인(李崇仁)의 〈몽송루기(夢松樓記)〉. 도(道) 가운데에 있다.
땅이 요충(要衝)에 있다 : 모두 신숙주(申叔舟)의 기(記).
산천 인현산(印懸山) : 주 북쪽 9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조곡산(祖谷山) : 주 남쪽 35리에 있다. 태종(太宗)의 태를 봉안하였다.
선석산(禪石山) : 주 북쪽 28리에 있다. 세조(世祖)의 태를 봉안하였다. 적산(積山) : 주 서쪽 25리에 있다.
비슬산(琵瑟山) : 화원현(花園縣) 10리에 있다. 성산(星山) : 주 동쪽 8리에 있다.
비지산(斐旨山) : 주 서쪽 21리에 있다. 공산(公山) : 팔거현(八莒縣) 동북쪽 20리에 있다. 산의 동쪽은 영천(永川)ㆍ
신녕(新寧)ㆍ하양(河陽), 남쪽은 대구(大丘), 북쪽은 의흥(義興), 서북쪽은 인동(仁同) 경계다.
가야산(伽倻山) : 주 서남쪽 48리에 있다. 또 합천(陜川)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가야산 천만 겹을
그림으로는 다하기 어려우리. 연기와 구름은 곳이 없어 뿌옇고, 소나무와 노송나무는 찬데도 무성하다. 끊어진
석벽은 우뚝 서서 푸른 하늘을 떠받치고, 흐르는 샘은 곧장 쏟아져 흰 무지개를 끈다. 봄 아침에는 꽃을 꺾고,
가을에는 달을 구경하고, 름에는 얼음을 마시고, 겨울에는 눈을 본다. 가야산의 사시를 뉘 있어 알리. 염공(廉公
안렴사(按廉使))이 일을 좋아하여 험한 산길을 만홀히 여긴다. 2년을 나쁜 진토(塵土)에서 노고할 때, 맑은 꿈
밤마다 하늘 남쪽에 달렸었네. 아름답다 가야산, 참으로 드물다. 하물며 성주(星州)는 나의 고향 선생의 초가집은
산 동쪽에 있고, 상인(上人 승려)의 연사(蓮社 절)는 산 가운데 있다. 시 읊고 설법하는 것, 두 가지 다 맑은 것이
짝 없으니, 언제나 손을 잡아 굶주리고 목마름을 위로하리." 하였다.
○ 성주 경계에 진산이 되었고, 합군(陜郡) 동쪽에 형상을 뻗쳤다. 푸른 뿌리는 두터운 땅에 서리고, 푸른 빛은 갠
공중에 가득하다. 원숭이와 학은 여러 해 동안 이별하였는데 연기와 놀은 옛날과 같도다.
내가 와서 절정에 오르니 망부산(望夫山)이 제일 높다.
○ 산 돌이 험하고 높아 오르기 어려워, 나귀는 놓아두고 마음대로 지팡이를 짚는다. 구름이 열리니 한자(韓子)
의 정성을 감동시켰고주D-001, 꽃이 떨어지니 유랑(劉郞)의 물색(物色)이 아득하다.주D-02
길고 짧은 등나무 가지는 옛길에 너우러지고, 높고 낮은 나뭇잎은 맑은 시내를 덮었다.
한종일 다녀도 얘기할 사람은 없고, 오직 그윽한 새만이 제 맘대로 운다." 하였다.
수도산(修道山) : 주 서쪽 85리에 있고, 지례(知禮)ㆍ거창(居昌) 두 고을 경계다.
적현(赤峴) : 주 서쪽 52리 거창군 경계에 있다.
태자암(太子巖) : 주 서쪽 12리에 있다. 둥근 돌이 삼층으로 쌓여 높이가 아홉 자이고, 원(圓)의 직경이 13척인
데 매우 기괴하다. 가물 때에 비를 빌면 곧 응험이 있다.
태평촌(太平村) : 팔거현(八莒縣) 서쪽 15리에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누가 이 땅을 태평촌이라 일렀는가. 부역이 무거워 백성들이 반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두어 집이 있어 손을 재우는데, 솔 껍질을 먹으니 아마도 적송자(赤松子)주D-003의 후손인가보다."
하였다.
동안진(東安津) : 주 동쪽 26리에 있고, 소야강(所耶江)의 하류다.
○ 채련(蔡璉)의 시에, "긴 물결은 출렁거리고 푸른 비늘(물고기)은 살쪘는데, 손을 익히 본 모래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지 않는다. 만리에 길들이기 어려운 것주D-004이 너 하나뿐 아니다. 흙먼지가 사람의 옷을 더럽
혔다고 무시하지 말라." 하였다.
무계진(茂溪津) : 주 남쪽 49리에 있고, 동안진(東安津) 하류이다. 소야강(所耶江) : 주 동쪽 20리에 있고,
인동현(仁同縣) 칠진(漆津)의 하류다. 이름은 고도암진(高道巖津)이고, 배 열부(裵烈婦)가 순절(殉節)한 곳이다.
마포천(馬舖川) : 주 북쪽 11리에 있다. 근원이 대야원동(大也院洞)에서 나와서 고을 동남쪽 15리에 이르러 이천
(伊川)과 합한다. 가천(伽川) : 주 서남쪽 47리에 있다. 근원이 가야산 동남쪽에서 고령현(高靈縣) 지경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천(伊川) :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적산(積山)에서, 하나는 비지산(斐旨山)에서 나와서, 주 서쪽 5리
에서 합하여 성을 안고 동으로 흘러 동안진(東安津)으로 들어간다. 방문중(房文仲)의 향교루(鄕校樓) 시에 말한,
"뜰 밑의 이천(伊川)ㆍ사수(泗水)에 연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라지(紗羅池) : 팔거현(八莒縣) 서쪽 20리에 있다. 잉화포지(仍火浦池) : 주 남쪽 5리에 있다.
정동지(鼎洞池) : 팔거현 동쪽 5리에 있다. 동정지(東亭池) : 주 동쪽 4리에 있다.
여근내지(汝斤乃池) : 주 동쪽 14리에 있다. 박외지(泊畏池) : 주 남쪽 24리에 있다.
동만지(同萬池) : 주 남쪽 4리에 있다. 거류지(巨留池) : 주 남쪽 5리에 있다.
조시지(助是池) : 주 북쪽 6리에 있다. 대가곡지(大家谷池) : 주 서쪽 15리에 있다.
극지지(極只池) : 주 북쪽 20리에 있다. 죽지(竹池) : 주 북쪽 12리에 있다.
소이지(所伊池) : 팔거현 북쪽에 있다. 수향지(水向池) : 팔거현 서쪽에 있다.
효성지(曉星池) : 화원현(花園縣) 동쪽에 있다.
토산 은구어(銀口魚)ㆍ송심(松蕈)ㆍ자초(紫草)ㆍ칠(漆)ㆍ봉밀(蜂蜜)ㆍ자기(磁器)ㆍ안식향(安息香)ㆍ
해송자(海松子).
성곽 읍성(邑城) :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52척, 높이가 13척, 나각(羅閣)이 5백 52칸,
안에는 샘 7개 못 2개가 있다.
신증 정덕(正德) 경진(庚辰)에 돌성으로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4천 52척, 높이가 9척이다.
봉수 성산봉수(星山烽燧) : 남쪽으로 가리현(加利縣) 이부로산(伊夫老山)에, 북쪽으로 각산(角山)에 응한다.
각산봉수(角山烽燧) : 주 북쪽 20리에 있다. 북쪽으로 인동(仁同) 약목현(若木縣) 박집산(朴執山)에, 남쪽으로
성산(星山) 및 대구(大丘) 하빈현(河濱縣) 마천산(馬川山)에 응한다.
말응덕산봉수(末應德山烽燧) : 가리현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 화원현(花園縣) 성산(城山)에,
남쪽으로 현풍현(玄風縣) 소산(所山)에 응한다.
성산봉수(城山烽燧) : 화원현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대구(大丘) 하빈현(河濱縣) 마천산(馬川山)에,
서쪽으로 말응덕산(末應德山)에 응한다.
이부로산봉수(伊夫老山烽燧) : 가리현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 고령현(高靈縣) 망산(望山)에,
북으로 성산(星山)에 응한다.
궁실 실록각(實錄閣) : 성안 객관(客館) 동북쪽에 있는데, 본조(本朝)의 실록을 간직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이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봉안(奉安)하는 시에, "헌원씨(軒轅氏)의 봉력(鳳曆)주D-005에
왕춘(王春)주D-06을 기록하였다. 구오(九五)주D-07의 용이 나니, 대인(大人)을 보았도다. 석실(石室)에 쇠를
잠가 실록을 간직하니, 멀리 활과 칼주D-08을 생각하니 마음이 배나 슬프다." 하였다.
백화헌(百花軒) : 곧 동헌(東軒)이다.
○ 신숙주(申叔舟)의 《중영기(重營記)》에, "고을에 관사(館舍)와 해우(廨宇)가 있는 것은 사신(使臣)을 높이고
빈객을 접대하자는 것이니, 고을의 수령이 된 자가 마땅히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고을이 비록 작고 땅이 궁벽
지더라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고을이 크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곳이랴. 성주(星州)가 고을로 세워진 것은
신라(新羅) 초기부터 현(縣)에서 군(郡)으로, 군에서 부(府)로, 부에서 주(州)가 되어 지역을 잃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으니, 횟수를 지나온 것이 남방 고을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
또 속현(屬縣)이 셋이나 되어 땅이 크고 백성이 호강(豪强)하고, 고을의 치소(治所)가 도(道)의 중앙에 있어서
역마를 탄 사신이 번갈아 이르고 손과 나그네가 모여드는데, 관해(館廨)가 세월이 오래 되어서 빈객과 사신을
접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법이 엄하고 백성이 사나워서 고을을 지키는 자가 모두 역사(役事)를
일으키기를 어렵게 여겨 관해(館廨)가 허물어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고, 돌 한 개, 기와 한 장이라도
다시 수리하여 정리하지 않고 수수방관(垂手旁觀)하여 교체되기를 기다린다.
우리 동년(同年) 김유선(金有銑)군이 목사가 된 지 돌이 못 되어 정치가 이루어지고 일이 간략해졌다 하여 탄식
하기를, "성주가 남방의 큰 고을이고 땅이 요충(要衝)에 있는데, 관해가 이와 같아도 수령이 된 자가 뜻을 두지
않는 것이 옳은가. 법이 엄하더라도 법을 범하지 않으면 법을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며, 백성이 사납더라도 백성
을 귀찮게 하지 않으면 백성에게 꺼릴 것이 무엇인가." 하고, 이에 재목을 모으고 공장이를 명하여 먼저 정청
(正廳)의 동헌을 짓되, 예전 제도를 인습하여 넓힌 지 두어 달이 못 되어 준공하였다.
모두 2칸인데, 앞에 횡랑(橫廊)이 있어 밝고 통창하고, 뜰 가에는 화단이 있어 여러 가지 꽃을 심었다.
그리하여 아전을 보내어 편지를 달려 기(記)를 청하였다. 내가 군이 의주(義州) 목사로 있을 때 눈여겨보았는데,
알고는 하지 않는 것이 없고, 부지런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의주라는 고을은 지경이 중국과 연하여 사신이
모이는 곳이요, 장사꾼이 모여드는 곳이어서 다스리기가 어렵기로 이름이 났는데, 군이 칼을 놀리는 것주D-09이
여유가 있었다.
우리 벗 김자호(金子灝) 공(公)이 사람에 대하여 허여(許與)하는 것이 적은데, 영남을 안찰(按察)하고 돌아왔기
에 남쪽 고을의 다스림을 물으니, 군을 제일로 들면서 말하기를, "일을 다스리는 데에 부지런하고, 무슨 일을 하
든지 과감하다." 하였다. 자호씨의 말하는 것이 내가 전날 본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자호씨가 세상을 떠나서 다시 볼 수 없음을 매양 슬퍼하며, 그 말을 생각하니 더욱 군을 믿노라. 일 없을 때에도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법을 범하지 않는 자가 오히려 적거늘, 큰 공사를 일으켜[工作] 남이 감히 하지 못
할 것을 하면서도 능히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내력이 없겠는가.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은 인(仁)이요,
법을 범하지 않는 것은 의(義)요, 게으르지 않은 것은 부지런한 것이요, 과감하게 하는 것은 민첩한 것이다.
인과 의는 덕(德)의 부고[府]요 몸을 보전하는 것이니, 이것으로 스스로 처하고 부지런함과 민첩함으로써 행하
면 무엇인들 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하물며 이 동헌이랴!. 김군은 자호씨의 알아줌을 저버리지 말고,
내가 군을 믿는 것에 맞출지어다. 숙주(叔舟)는 공명(功名)으로 세상을 속인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벼슬을 그만두고 남방으로 돌아가려 한다. 나의 시골이 성주와 접경하였으니, 만일 한 번 빈객의 자리에 참여하
게 된다면 동헌의 좋은 경치를 그대를 위하여 시로 지으리라." 하였다.
○ 고려(高麗) 이조년(李兆年)의 시에, "부탁하노니, 꽃을 심는 것을 다시 더하지 말라. 수효가 백에 차면 되지.
더할 필요는 없다. 매화와 국화의 맑은 표격(標格) 이외에, 잡되게 붉은 것들이 많은 것은 부질없지." 하였다.
○ 고려 왕강(王康)의 시에, "세상일 시끄러움 날마다 더해지는데, 정화(菁華)는 그럭저럭 눈앞에서 지나간다.
한 헌(軒)의 꽃 피고 지는 것 흥미없지만, 오히려 맑은 읊조림이 늘그막에 많음을 기뻐한다." 하였다.
○ 남재(南在)의 시에, "만가지 일이 해마다 귀밑의 눈(雪)만 더한다. 청춘 시절이 마치 망아지가 틈을 지나는
것 같구나. 백화헌(百花軒) 위에 거듭 노는 날에, 금정(金井)주D-010 가을 오동(梧桐)이 많은 생각을 자아내리."
하였다. 흥민각(興民閣) : 객관 남쪽에 있다. 좌우에 홍련(紅蓮)ㆍ백련(白蓮) 두 당(堂)이 있고, 모두 연못이 있
다. 목사 민영견(閔永肩)이 세웠다.
누정 임풍루(臨風樓) : 객관 북쪽에 있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記)에, "성주 고을 생긴 것이 산천이 수려 기이하고, 인물이 번화하여 상주(尙州)ㆍ진주
(晉州)ㆍ경주(慶州)ㆍ복주(福州)와 더불어 남방에서 서로 상하를 다툰다.
그 때문에 비록 한 지경의 우두머리는 되지 못하나, 특별히 목(牧)으로 일컬은 것이다. 내가 옛날 벼슬하여 돌아
다닐 때에 두세 번 이르렀는데, 한없는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고 고운 땅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은
객관 동쪽에 주(州)의 청사가 바짝 닿아 담을 연하여서, 구경하고 바라보는 데 장애가 있었다. 좌우들에게 물어
보니 지은 지가 이미 오래되어서 연월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헐면 고을 사람들에게 해로움이 닥칠까 백여 년을
지내오면서 고치지를 못한다." 하였다. 성주는 큰 고을이어서 국가에서는 반드시 진신(搢紳) 가운데의 영준(英俊)
한 사람을 뽑아서 목사로 보내니, 이 선발에 응하는 사람은 참으로 강명(剛明) 준걸한 인재가 아니면 칼날이 무디
어져서 그 극무(劇務)를 이기지 못하고 명예는 곧 떨어진다.
경태(景泰) 2년 신미(辛未)에 이후(李侯)가 이 고을에 두번째 목사로 나왔는데, 닭을 베는주D-011 재능이 있어
폐단되는 것은 제거하고, 이익되는 일은 일으켜서 명성과 공적이 멀리 알려졌다. 드디어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주(州)의 청사를 빈땅에 넓히고 새 다락을 일으키는데, 재목은 폐사(廢寺)를 뜯어오고, 힘은 관청의 심부름하는
한가한 군사들을 이용하며, 기와는 새로 굽지 않고, 돌은 애써서 치지 않게 하여 잠깐 동안에 이루어졌다.
이내 단청(丹靑)을 칠하니 화려하고 높은 것이 꿩이 나는 것 같고, 새가 날개 버린 것 같아서 우뚝하게 고을의
장관(壯觀)이 되어 비로소 영남루(嶺南樓)ㆍ촉석루(矗石樓)와 아름다움을 다투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 한 가지 작은 일로도 후(侯)의 지혜와 용단이 전 사람보다 훨씬 나은 것을 볼 수 있다.
을해(乙亥)년 봄에 후가 전(箋)을 받들고 서울에 와서 본말을 갖추어 말하고 또 이름과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객관과 주(州)의 청사가 서로 붙어 있는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이다. 예전에 막혔던
것이 지금은 통하고, 예전에 좁던 것이 지금은 통창하여졌으니, 전에는 어찌 그리도 구애되었고 뒤에는 어찌
그리도 통창하게 되었는가. 열자(列子)의 냉연(冷然)한 것주D-12과 초왕(楚王)의 쾌재(快哉)주D-13의 당함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이름을 임풍(臨風)이라 하라. 관리가 정무에 분망하다가 막히고 답답한 것을 소창하고
정신을 상쾌하게 하여, 영귀(詠歸)의 흥을 발하는 것도 반드시 여기에서 얻을 것이요, 묵객(墨客)이 시를 읊조
리어 꽃과 달을 희롱하고 정회를 펴서 호탕(浩蕩)한 기운을 붙이는 것도 또한 여기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하물며 주인이 술을 내고, 좋은 손이 자리에 앉아 눈을 천리까지 바라볼 수 있어 만가지 경치를 거두어 들이고
젓대[笙]와 피리가 어우러지고 주고받는 술잔이 서로 섞이어 노래 소리는 바람을 쫓아 날고 춤추는 소매는 바람
에 나부끼어 들면, 어찌 한 번 조이고[一張] 한 번 늦추는[一弛]주D-14 시간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건대 강산과 풍월이 그 전에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산만하여 통속이 없다가 지금 이 한 다락을 세우매
모두 궤석(几席) 아래에 집중되었으니, 그런 후에야 풍경에 부끄러움이 없고 후(侯)의 공이 천만 배로 드러날
것이다. 이것을 어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증 강혼(姜渾)의 시에, "비 뒤에 강물이 불어서 노[篙]가 빠져서 오는데, 기둥에 기대어 물결을 보니 장하기도
하다. 첩첩한 물결은 푸른 풀 물갓을 완전히 쌌고, 연이은 봉우리의 반은 흰 구름 무더기에 들어갔다.
짧은 짐대[棹]를 끌고 고깃배에 오르고 싶기도 하고, 긴 낚싯대를 잡아 낚시터에 오르고도 싶다.
10년 동안 강해(江海)의 뜻이 오늘 아침에 흥이 나서 술 석잔 마시네."
○ "시험삼아 아름다운 시구(詩句)를 읊조리어 하늘이 아끼는[天慳] 것을 발로하니, 마침 다락 가운데에 부서
(簿書 공무 처리) 한가함을 만났도다. 붉은 제비가 번갈아 나는데 바람은 버들을 스치고, 푸른 개구리가 어지럽게
우니 비가 산에 어둡다. 일생 동안 훼방을 받으니 몸에 병이 많고, 반년을 달려 다니니 귀밑이 얼룩지려 한다.
황각(黃閣 정승의 집) 친구의 편지가 끊어졌으니, 객의 형색이 쓸쓸하게 시골에 머물러 있도다."
○ "구름 사다리가 높이 하늘에 기대었는데, 달 밝을 때 다락에 오르니 젊은 나이가 아니로세. 산수의 굴(窟)에서
길이 읊조릴 흥이 있고, 비단 자리에서 한 번 취할 마음도 없네. 아침 정원에는 실 같은 비요, 저문 날 촌락에는
담담한 연기로다. 청천(晴天) 방초(芳草)의 구(句)주D-15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부지런히 시를 써두니, 당나라
시인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 용(龍)이 게으름에서 일어나 기이한 공을 자랑하노라고 여러 날 동안 침침한 구름이 하늘을 막았네.
평지에는 넉넉히 석자의 물결이 더하였고 긴 강에는 누가 반 돛의 바람을 빌릴까. 누대(樓臺)는 꾀꼬리와 꽃 속에
은은히 보이고 염막(簾幕)은 연기와 안개 가운데에 흐릿하도다. 사모(四牡)주D-16로 상재(桑梓)의 고을을 물으니,
고향을 생각하는 왕찬(王粲)은 나와 같기 어렵다." 하였다.
청운루(靑雲樓) : 성 동문 안에 있다. ○ 고려(高麗) 안유(安裕)의 시에, "초여름에 절월(節鉞)을 나눠 받아 삼복
(三伏) 동안을 바닷가 치원대(致遠臺)주D-017에서 읊조리며 지냈다. 역마를 탄 사자(使者)가 번개처럼 달리어
비밀 명령을 전하니, 과거(科擧)에 어진 재주를 뽑으라고 불같이 독촉한다.
성산(星山)의 급한 장마 물을 뗏목으로 건너고, 월굴(月窟)의 맑은 바람은 계수나무 기르는 것을 재촉한다.
주D-18 미리 상상하노니, 글을 아뢰고 경사를 여는 자리에 봉의 피리와 단판(檀板)이 천 무더기이리." 하였다.
○ 임춘(林椿)이 잠깐 이 고을에 놀러 왔는데 고을 원이 이름난 기생을 시켜 모시고 자게 하였더니, 밤이 되자
도망하여 돌아갔다가 이튿날에 연석(宴席)으로 바로 가서 시를 짓기를, "홍장(紅粧) 미인이 새벽을 기다려 금전
(金鈿)을 붙이는 것은 재촉하는 부름을 입고 비단 자리에 나온 때문이지. 장관(長官)의 엄한 호령도 두려워하지
않고, 공연히 나그네의 나쁜 인연(因緣) 나무라네. 다락에 올라 퉁소 부는 짝주D-19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달[月]로 달아나서 약을 훔치는 신선이 되었네.주D-20 청운(靑雲)의 어진 학사(學士)에게 말을 전하노니,
어진 마음으로 포편(蒲鞭)주D-21을 쓰지 말게나." 하였다. ○ 박효수(朴孝脩)의 시에, "누(樓) 아래 사는 사람들의
우스개 말 시끄럽고, 다리 밑 흐르는 물에 버들 그늘이 짙구나. 최호(崔顥)의 방초(芳草)를 쓸 수 없는 것이 한
이다. 누가 등왕각(騰王閣)을 위하여 낙하(落霞)를 읊으리. 새벽에 산 비는 대순을 구워 먹는[燒筍] 흥을 재촉
하고, 들바람은 모 심는 노래를 보낸다. 억지로 졸한 글귀를 써 두니 참으로 운치로구나.
벽에 가득히 용처럼 날치는 취한 붓글씨가 비껴 있다." 하였다.
몽송루(夢松樓) : 옛터가 성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중수하여 정자를 만들었다.
○ 이숭인(李崇仁)의 누기(樓記)에, "홍무 기원(洪武紀元) 8년에 의성(義城) 정후(丁侯)가 선발되어 경산(京山
성주)을 다스리는데, 부임한 뒤에 정사가 잘 되고 풍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즐겁게 여기었다.
그리하여 읍내 북쪽에 다락을 짓는데 재목을 베고 기와를 굽는 것을 농사철 아닌 때를 맞추어 하고, 공장이는
노는 사람을 부리었다. 다락의 구도는 동마루와 처마 끝을 높게 하여 그 바라보는 것을 넉넉하게 하고, 단청을
얇게 하여 검소한 것을 표하였다. 준공이 되자 여러 노선생들을 초청하여 술을 내어 낙성(落成)을 하고 또 이름
지을 것을 생각하는데, 술이 반쯤 되자 후(侯)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다락이 이루어졌으니 이름을 지어달라."
하였다. 노선생 제공(諸公)들이 다락은 후가 지은 것이므로 몽송(夢松)주D-022 두 글자를 들어서 편액(扁額)
하였으니, 대개 옛사람의 사업과 명위(名位)를 후에게 바란 것이었다. 후가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여러 선생이
다락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대는 기(記)를 지으라." 하였다. 내가 사양하지 못하여 말하기를, "무릇 놀고 구경하는
누대(樓臺)를 설치한 것은 그 낙(樂)을 붙이자는 것인데, 낙(樂)은 형상이 없으니 반드시 저기에 붙인 뒤에야
형상되는 것이다. 소위 낙이라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얻는 것인데, 그 즐거운 것을 미루어 넓히면 백성은 내 동포
형제이고, 물(物)과 내 무리[與]가 되어서 훈훈[和]한 기운과 무르녹은 은혜의 진액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을
것이니, 한갓 저 놀고 구경하는 것에 힘쓰는 자의 즐거움이란 것이 너무 좁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남의 관장(官長)이 된 자는 그 즐거워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지금 후가 이 다락에
오르면 다른 봉우리와 첩첩한 멧부리, 긴 내와 질펀한 숲이 연기와 구름 아득하고 흐릿한 사이를 숨었다 나타났다,
나왔다 들어갔다 하여 바라보기는 하여도 끌어올 수는 없던 것이 궤와 책상에 있는 것같이 되었다.
나무꾼은 숲에서 노래하고, 농사꾼은 들에서 노래하고, 길 가던 나그네가 그늘에서 쉬는 것, 소와 말이 흩어져
있는 것, 새들이 날아다니는 것에 이르기까지 물(物)이 모두 제 낙을 낙으로 여기고, 후(侯)가 물과 함께 하는 것도
또한 한 번 부앙(俯仰)하는 사이에 유쾌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가 여기에 이른 것은 단묵(丹墨) 부서(簿書)
밖에 있는 것이 있으리라. 훗날 후가 순리 명관주D-23의 으뜸으로서 재상이 된다면 제공들이 다락의 이름을 지은
것이 더욱 징험이 될 것이다. 나는 원래 후의 정치가 착한 것을 좋아하지만, 이번의 일이 물(物)과 함께 즐기는
뜻이 있기 때문에 기(記)를 짓고 굳이 사양하지 않노라. 혹 말하기를, "춘추(春秋)에 공사(工事) 일으킴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쓴 것은 칭찬하지 않는 뜻이다. 그대의 기(記)는 어디에 속하는가. 전(傳)에, '때는 굴(屈)한데 일은
지나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주D-24 하였다. 나의 기(記)가 춘추의 필법에 있어서는 일은 같으나, 아름답고
악한 것이 다르다주D-25는 뜻이다." 하였다. 동정(東亭) : 주 동쪽 5리에 있다. 못 위에 돌기둥을 세워서 정자를
지었다.
신증 남정(南亭) : 주 남쪽 1리에 있다. 김우(金祐)가 지었다.
○ 황필(黃㻶)의 기(記)에, "성주가 영남 상류(上流)에 있어 호구의 번성한 것과 송사의 번다한 것과 빈객의 모이는
것이 한 도(道)의 제일이니, 참으로 통달하고 민첩한 인재가 아니면 반근착절(盤根錯節)주D-026에 시험하여 그
효용(效用)을 보기 어렵다. 정축(丁丑)년 가을에 김우(金祐)가 성주 목사로서 일을 본 지 1년 만에, 정사가 간략
하여지고 교화가 행하고, 나그네가 그 길에 다니고자 하며주D-27 쇠한 것이 일어나고 묵은 것이 새로워졌다.
고을에 전부터 토성(土城)이 있는데 치첩(雉堞)이 기울어 무너졌고, 나각(羅閣)이 모두 백여 칸인데, 모두 촌 백성
을 시켜 보존하고 지키게 하니,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기었다. 김후가 감사 김극성(金克成) 공(公)에게 보고하고
조정에 아뢰고는 경진(庚辰)년 겨울 10월에 일을 시작하였다.
역사가 한 달이 넘지 않아서 성이 이루어졌다. 높이는 선 것과 같고 길이는 끄는 것 같아 천연(天然)으로 세워진
것 같으니, 보장(保障 군사상(軍事上) 방어(防禦))의 웅대한 것이 으뜸이었다.
성의 남쪽 모퉁이를 보니 빈 땅이 있는데, 오랫동안 풀이 우거진 언덕이었다. 올라서서 바라보니 냇물이 삼면에
둘러 있고, 봉만이 사면에서 읍(揖)하는 것 같고, 푸른 눈썹 같은 공산(公山)과 연기와 구름이 낀 가야산(伽倻山)
과 창ㆍ칼 같은 금오산(金烏山)을 궤안(几案) 사이에 서로 마주보게 되어 있었다.
생각건대 당시의 산천과 초목이 최고운(崔孤雲)의 해타(咳唾)주D-28를 겪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요, 여리(閭里)
와 향당(鄕黨)이 길야은(吉冶隱)의 시서(詩書)의 유풍(遺風)주D-29에 흥기됨이 있었을 것이다. 개천과 두렁이
서로 얽히고, 벼와 곡식이 들에 가득하며 봄에는 가는[耕] 것을 살피고 여름에는 일을 권하고, 가을에는 거두는
것을 살피는 일을 여기에 앉아서 다 할 수 있다. 후(侯)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여기에 정자를 지을 수 있다." 하고,
판관(判官) 박주형(朴冑亨) 군과 의논하여 곧 그 땅을 다스려 평평하게 하고 정자 3칸을 지었는데, 제도가 매우
한가롭고 통창하여 손의 자리를 펴고 노래와 춤을 벌이기에 여유가 있었다. 또 부엌 몇 칸을 세우고 측간[厠]
과 담을 모두 갖추었다. 재목은 폐사(廢寺)의 것을 취하고 기와는 나각(羅閣)의 묵은 것을 쓰고, 공장이는 잘하는
솜씨에 맡겨 백성에게 빌리지 아니하여 두어 달이 못 되어 정자가 새롭게 되었으니, 그 땅의 웅장함과 경개의
절승함이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와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더불어 백중(伯仲)을 다투게 되었다.
아, 어찌 그리 신기한가. 고을에 예전에 동ㆍ북 두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남정(南亭)으로 이름 지었다.
정자가 이루어진 뒤에 내가 곤남(昆南)에서 선산(善山)으로 향하는데 이 고을로 지나게 되었다. 후가 나를 정자
위에 앉혀 술을 권하고 기(記)를 부탁하였다. 내가 거칠고 졸한 글로 정자의 벽을 더럽힐 수는 없지마는 생각하
건대, 후가 돌아가신 나의 맏형과 동갑이기 때문에 의(義)가 형제의 분(分)이 있으므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토지의 성쇠와 물리(物理)의 성훼(成毁)는 운수가 그 사이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고을이 성립된 것이 몇 천 년
전인지 알지 못하고, 고을의 목사가 된 자가 전후에 몇 사람인지 알지 못하며,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고 알아도
성취하지 못한 자가 또한 있어서 반드시 우리 김후를 기다렸으니, 이것은 성주의 토지ㆍ성곽ㆍ정관(亭館)ㆍ
문물(文物)이 김후를 만나서 한 번 재조(再造)된 것이다. 한(漢) 나라의 공수(龔遂) 황패(黃霸)의 덕을 표창하는
것을 지금에도 바랄 수 있거니와 다른 날 순리(循吏)의 전(傳)을 쓰는 자가 이 사람을 빼고 누구를 쓸 것인가.
이것이 참으로 쓸 만한 것이다. 후의 자는 길부(吉夫)요, 광산(光山) 사람인데, 젊어서 성균관에서 영준(英俊)
들과 교유(交遊)하였고, 수령이 되어 가는 곳마다 치적(治績)이 모두 제1이었고, 뒤에 큰 고을 충주(忠州)ㆍ양주
(楊州)의 목사가 되었을 때에도 혁혁한 명성 때문에 사람들이 잊지 못한다." 하였다.
향사당(鄕射堂) : 곧 용흥폐사(龍興廢寺)다.
학교 향교(鄕校) : 주 북쪽 2리에 있다. 문묘(文廟)가 모두 흙으로 만든 상(像)인데,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처음
에 향교의 종이 개성(開城) 대성전(大成殿)에 가서 한 번 보고 돌아와서 똑같이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하였다.
○ 허종항(許從恒)의 시에, "묘전(廟殿)이 높직하여 학교를 누르고 있다. 남으로 향한 초상이 몇 가을을 지냈는고.
은근히 뜰 앞의 은행나무에게 묻노니, 누가 안자(顔子)ㆍ증자(曾子)이고, 누가 자공(子貢)ㆍ자로(子路)인가."
하였다.
연혁 답계역(踏溪驛) : 주 북쪽 10리에 있다. 안언역(安偃驛) : 주 남쪽 28리에 있다.
무계역(茂溪驛) : 무계진(茂溪津) 동쪽에 있다. 설화역(舌火驛) : 화원현(花園縣) 서쪽 5리에 있다.
고평역(高平驛) : 팔거현(八莒縣) 서쪽 5리에 있다. 인화원(仁化院) : 주 동쪽 8리에 있다.
사원(蛇院) : 주 남쪽 34리에 있다. 동안원(東安院) : 동안진(東安津) 언덕에 있다.
공배원(公排院) : 주 동쪽 25리에 있다. 이동원(李同院) : 주 남쪽 42리에 있다.
약보원(若寶院) : 주 북쪽 2리에 있다. 광대원(廣大院) : 주 서쪽 20리에 있다.
인원(引院) : 화원현(花園縣) 남쪽 20리에 있다. 대야원(大也院) : 주 북쪽 29리에 있다.
봉서원(鳳棲院) : 팔거현 북쪽 15리에 있다. 숭유원(崇儒院) : 팔거현 북쪽에 있다. 예전 이름은 독유(獨儒)인데,
관찰사 손순효(孫舜孝)가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원(院)에 다락이 있다. 다른 이름은 척이(斥異)다.
유원(柳院) : 팔거현 남쪽 5리에 있다. 작원(鵲院) : 팔거현 남쪽 10리에 있다.
흥왕원(興王院) : 화원현 서쪽 1리에 있다. 사읍제원(沙邑梯院) : 가리현(加利縣) 동쪽에 있다.
다품원(多品院) : 주 북쪽 11리에 있다. 월항원(月恒院) : 주 북쪽 18리에 있다.
퇴계원(退界院) : 주 서쪽 25리에 있다. 관음원(觀音院) : 주 남쪽 22리에 있다.
통신원(通信院) : 주 동쪽 30리에 있다.
창고 화원창(花園倉) : 예전에는 인흥사(仁興寺)를 빌려서 본현(本縣)의 군수(軍需) 미곡을 저장하였는데,
세조(世祖) 때에 현 읍내 남쪽에 따로 세웠다. 왜국 사신이 가지고 오는 동(銅)ㆍ철(鐵)ㆍ소목(蘇木)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여기에 저장하여, 지출하고 사용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불우 용흥사(龍興寺) : 고을 성북 문 밖에 있다. 대장당(大藏堂)이 있는데, 이인복(李仁復)이 기를 지었다.
인흥사(仁興寺) : 비슬산(琵瑟山) 북쪽에 있는데,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이 액자(額字)를 썼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흥인사(興仁寺)가 포산(苞山 현풍(玄風)) 기슭에 있는데, 내가 옛날에 놀 때에 눈과
반딧불을 짝 삼았다.주D-030 시주(施主)는 때때로 부처에 예를 하고, 중은 맑은 낮에 앉아서 경(經)을 말한다.
뜰에 서 있는 탑은 우뚝하고 희며, 길을 끼고 있는 긴 솔은 낱낱이 푸르다. 가장 생각나는 것은 황금(黃金)의
천상필(天上筆)이 지금도 광채가 빛나는 별빛이 화성(華星) 쏜다." 하였다.
심원사(深源寺) : 가야산(伽倻山) 남쪽에 있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심원의 옛 절이 가야산에 있는데,
소나무ㆍ잣나무 그늘 가운데에 문을 닫지 않았다. 능엄경(楞嚴經)을 듣고 미묘한 뜻을 물어보려 하는데, 이 몸의
한가함으로 빌어 얻을 수 있을는지." 하였다. 안봉사(安峯寺) : 주 서북쪽 10리쯤 되는 곳에 있다.
이장경(李長庚)ㆍ이조년(李兆年)ㆍ이숭인(李崇仁)의 진영(眞影)이 처음에는 선석사(禪石寺)에 있었는데, 세조
(世祖)의 태(胎)를 선석산(禪石山)에 봉산하여 그 절을 철폐하자, 이씨의 자손들이 그 진영을 이 절에 옮겼다.
적산사(積山寺) : 적산에 있다. 곧 이직(李稷)의 고택(故宅)인데, 지금은 절이 되었다.
용연사(龍淵寺) : 비슬산(琵瑟山) 북쪽에 있다. 법수사(法水寺) : 가야산 남쪽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신증오성(五聖)과 십철(十哲)주D-031을 예전
에는 소상(塑像)으로 만들었는데, 목사 강중진(康仲珍)이 위판(位版)으로 고쳤다.
성황사(城隍祠) : 주 성안에 있다. 여단(厲壇) : 주 북쪽에 있다.
고적 성산(城山) : 화원현(花園縣) 북쪽 5리에 있다. 작은 산이 큰 강을 베고 있는데 그 위가 평평하고 넓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왕이 꽃을 구경하던 곳이므로 화원현의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다." 한다.
그 아래에 예전에 금강정(錦江亭) 오류정(五柳亭)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강 북쪽에 상국리(上國里) 세자지(世子旨) 등의 땅이 있는데 모두 신라 왕의 장전(帳殿)주D-032의 터다.
가야산성(伽倻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5천 9백 35척, 높이가 5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안에서 여섯 시내와 열 개의 샘이 있다. 평탄하고 험한 것이 반반이다.
독용산성(禿用山城) : 주 서쪽 3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8천 64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안에는 시내 셋과 샘 하나가 있다.
팔거산성(八莒山城) : 현 동쪽에 있다. 주(州)까지 78리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4백 23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안에는 샘 둘과 못 하나가 있다.
도산현(都山縣) :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적산현(狄山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쳐 성산군
(星山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신곡부곡(薪谷部曲) : 주 서북쪽 30리에 있다. 위곡부곡(葦谷部曲) : 주 동쪽 30리에 있다.
선남부곡(船南部曲) : 주 동쪽 15리에 있다.
명환고려 이총언(李●言) : 태조(太祖) 초년에 본부(本府) 장군이 되어 본성(本城)을 지켰는데, 임금이 친히 쓴
조서로 금석(金石) 같은 친구가 되기를 약속하여 말하기를, "백자(百子) 천손(千孫)까지 이 마음 변하지 말지어
다." 하였다. 총언이 시종 한결 같은 절개를 지키었다.
임금이 명하여 옆 고을의 민구(民口)를 주어 그 호구(戶口)를 보태고 또 소금과 곡식 4천여 곡(斛)을 상으로 주
었다.
김황원(金黃元) : 선종(宣宗) 때에 부사가 되었다. 아전이 살인 강도를 잡아 오자 황원이 한참 보더니 말하기를,
"이것은 도적이 아니다." 하고, 빨리 석방하게 하였다. 판관 이사강(李思絳)이 힘써 다투기를, "이 도적이 이미
항복하였으니 마땅히 죄를 다스려야 한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뒤에 다른 도적이 잡혔는데 과연 지난번에
살인한 자였다. 아전과 백성들이 그 신명(神明)함에 탄복하였다.
이영(李永) : 숙종(肅宗) 때에 경산 부사가 되었다. 최척경(崔陟卿) : 판관이 되었는데 아전과 백성이 사랑하고
두려워하였다.
왕세경(王世慶) : 의종(毅宗) 때에 과거에 올라 경산 부사가 되었는데 청백하기로 유명하였다.
윤택(尹澤) : 사록(司錄)이 되었다.
이보림(李寶林) : 부사가 되었을 때에 길에서 여자가 우는 것을 듣고 말하기를, "우는 소리가 슬프지 않고 기뻐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하고 붙잡아서 심문하니 과연 간부(奸夫)와 공모하여 남편을 죽인 자였다.
어떤 사람이, "이웃 사람이 내 소의 혀를 잘랐다."고 고소하였는데, 이웃 사람이 자백하지 않았다.
보림(寶林)이 그 소를 목마르게 하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물에 간장을 타서 명령하기를, "차례로 소에게 물을
먹이되 소가 물을 마시려 하거든 곧 다시 빼앗으라."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고소를 당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소가 놀라 달아났다.
심문하니 과연 자백하였다. 또 어떤 사람의 말이 달아나서 남의 보리 싹을 거의 다 뜯어 먹었다. 보리밭 주인이
고소하려 하자 말 주인이 말하기를, "나도 보리밭이 있으니 너의 보리가 수확이 없거든 내 보리를 너에게 주겠
으니 고소하지 말라." 하므로 보리 주인이 승낙하였었다. 여름이 되어 보리가 다시 싹이 나서 조금 수확할 수가
있었다. 말 주인이 말하기를, “네 보리도 결실하였다.” 하고 주지 않았다. 보리 주인이 고소함에, 보림이 명령하
여 말 주인은 앉고 보리 주인은 서게 하고 말하기를, "경주(競走)를 하여 따르지 못하는 자는 벌을 주겠다." 하였
더니 말 주인이 따르지 못하였다. 왜 졌느냐고 물으니 말하기를, "저 사람은 서고 나는 앉았으니 따를 수가 있습
니까?" 하였다.
보림이 말하기를, "보리도 그러하다. 뜯어 먹은 뒤에 다시 싹이 났으니 온전한 수확이 될 수 있느냐. 네가 말을
놓쳐서 보리를 먹게 하였으니 죄가 한 가지요, 고소하지 못하게 빌었으니 죄가 두 가지요, 약속을 어기고 주지
않았으니 죄가 세 가지다." 하고, 곤장을 때리고 보리를 고소한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정치를 하는 것이 엄하고
밝기가 이와 같았다.
본조 권득경(權得經) : 목사가 되었다. 정치가 맑고 공평하여 아전과 백성이 사랑하였다. 관(官)에서 죽었다.
손소(孫昭) : 목사가 되어 명성과 치적이 있다.
신증 윤석보(尹碩輔) : 목사가 되어 청렴하고 밝은 정치를 하였다. 김우(金祐) : 목사가 되었다.
고려인물 이장경(李長庚) : 본래 고을 아전이다. 집에 있다가 귀한 사람이 지나가는 벽제(辟除) 소리를 들으면,
곧 방에서 나와 땅에 엎드려서 지나간 뒤에 일어났다. 뒤에 정승(政丞)에 증직되고 농서군공(隴西郡公)으로
봉해졌다.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올랐다. 이천년(李千年) : 장경(長庚)의 아들이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다.
이만년(李萬年) : 장경의 아들이다. 이조년(李兆年) : 장경의 아들이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과거에 올라 비서랑
(祕書郞)에 옮겨 왕을 따라 원(元) 나라에 조회하였다. 뒤에 충숙왕(忠肅王)이 참소를 당하여 원 나라에 머물러
있는데, 조년이 분히 여겨 원 나라에 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바쳐 왕의 죄 없는 것을 하소하니, 조정에서
아름답게 여겼다. 충혜왕(忠惠王)이 원 나라에 숙위(宿衛)하여 있을 때에 자못 근신하지 못하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조년이 경계하는 말을 아뢰기를, "전하가 천자를 섬기고 있으니 마땅히 하루하루 새로워야 하겠는데,
어째서 예(禮)를 버리고 정욕에 방종하여 스스로 누(累)를 초래(招來)하십니까. 좌우가 모두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니 어디에서 바른 말을 듣고 바른 일을 보겠습니까. 원하건대 행실을 고쳐 경계하고 유아(儒雅)한 선비
를 친히 하소서."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싫어하여 담을 넘어서 달아났다.
조적(曺頔)의 난에 백관들이 적에게 붙었는데 조년이 의리로 적(頔)의 당을 효유하여 듣는 자가 모두 감격하였다.
왕이 아첨하는 소인을 가까이하고 충성하고 곧은 사람을 미워하여 조년이 사직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송강(松岡)에서 탄자(彈子)로 참새를 잡을 때 조년이 끓어 앉아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명이(明夷)의 때
주D-033를 잊으셨습니까? 지금 악소년들이 전하의 위력을 빙자하여 부녀자들을 노략하고 재물을 강탈하여 백
성들이 살 수가 없으니, 신은 화가 조석에 있을까 두렵습니다.
이것을 근심하지 않고 도리어 작은 오락에 빠지십니까. 전하가 늙은 신의 말을 들어서 아첨하고 간사한 자를
버리고, 어질고 선량한 사람을 쓰며 다시는 부질없이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신은 비록 죽더라도 눈을 감을 것입니다." 하였다. 자주 간하여도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탄식하기를, "자주
간하여도 듣지 않으니 책임이 돌아갈 데가 있다.
이미 그 아름다움을 순하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악함만 더하게 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니, 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다음날에 필마(匹馬)로 고향에 돌아가서 인간의 일을 간섭하지 않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의 직함으로서 죽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포(李褒) : 조년(兆年)의 아들이다.
성품이 순후하여 예법대로 행동하였다. 벼슬이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원(敬元)이다.
이승경(李承慶) : 장경(長庚)의 손자다. 원 나라 조정에서 벼슬하여 여러 번 옮겨 요양성 참정(遼陽省參政)이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6년에 어머니 상사에 분상(奔喪)하여 환국하였는데, 이듬해에 원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이백전(李百全) : 사부(詞賦)로 진용(進用)되어 벼슬이 국자감 대사성 보문각 학사(國子監大司成寶文閣學士)에
이르렀다.
이승휴(李承休) : 가리현(加利縣) 사람이다. 젊어서 아버지를 잃고 학문에 힘써서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이르렀다. 성품이 정직하여 세상에 구함이 없었다. 뒤에 두타산(頭陀山) 귀동
(龜洞)에 들어가서 몸소 밭갈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곳에 산 지 10여 년에 안집사(安集使) 이심돈(李深敦)
이 권하여 서울에 갔는데, 뒤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어 소(疏)를 올려 옳고 그른 것을 지극히 말하다가 임금
의 뜻에 거슬려 벼슬을 파하고 구동 전날 숨었던 곳으로 돌아와서 따로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제왕운기(帝王
韻記)》를 저술하였다. 10년 만에 충선왕(忠宣王)이 글을 내리어 부르니 승휴가 늙고 병들었음으로써 사양하였
다. 왕이 다시 글을 내리기를, "과인(寡人)이 평소에 경의 이름을 듣고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여 지금 경에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주는 것이니, 창생(蒼生)을 위하여 한 번 일어나시오." 하니, 승휴가 이에 일어났다.
이인복(李仁復) : 자는 극례(克禮)며, 포(褒)의 아들이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과거에 올라 복주 사록(福州司錄)
이 되고 춘추공봉(春秋供奉)에 전직되었다. 충혜왕(忠惠王) 때에 원 나라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대령로(大寧路)
금주 판관(錦州判官)이 되었다. 동으로 돌아왔을 때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였는데, 인복이 명망이 있으므로
네 번 옮기어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삼았다.
공민왕이 원 나라에 아뢰어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제수하였더니, 신돈(辛旽)에
게 거슬려 파면되었다. 흥안(興安) 부원군으로 봉하고 조금 뒤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죽자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인복은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 충렬ㆍ충선ㆍ충숙 세 왕조의 실
록(實錄), 고금록(古今錄)ㆍ금경록(金鏡錄)을 편찬하였다.
인복이 가만히 아뢰기를, "신돈이 훗날에 반드시 변이 있을 것이니 멀리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뒤에 신돈이 처단을 당하자 왕이 인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탄복하였다.
인복이 그 아우 인임(仁任)ㆍ인민(仁敏)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패하고 집을 망칠 자는 반드시
두 아우라." 하더니 뒤에 과연 패하였다.
뒤에 충정왕(忠定王) 묘정에 배향하였다. 이숭인(李崇仁) : 공민왕(恭愍王) 때에 과거에 올랐다.
본국에서 문사를 뽑아서 원 나라 서울에 응시(應試)하는데, 숭인이 첫째로 뽑혔으나 나이 아직 25세가 되지 못
하였으므로 보내지 않았다. 신우(辛禑) 때에 예문관 제학이 되어 서연(書筵)에 들어갔는데 '이초(李初)의 옥사'
가 일어나 청주(淸州)에 갇혔다가 얼마 안 있어 소환되어 지밀직사사 동지춘추관사(知密直司事同知春秋館事)
가 되었다. 또 정몽주(鄭夢周)의 당으로 멀리 귀양갔다가 조금 뒤에 죽었다.
숭인(崇仁)은 자질이 총명 민첩하고 문장(文章)이 전아(典雅)하였다. 이색(李穡)이 매양 탄복하여 칭찬하기를,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하여 보더라도 시대마다 이런 사람 흔치 않다." 하였다.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숭인이 지은 표(表)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어, "표의 문사가 참으로 간절하다." 하였고,
중국의 사대부들이 숭인의 저술을 보고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도은집(陶隱集)》이 세상에 행한다. 배극렴(裵克廉) : 개국공신이고 좌시중(左侍中)이다. 시호는 정절(貞節)
이다.
이직(李稷) : 포(褒)의 손자다.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고 태종
(太宗)을 도와 좌명공신(左命功臣)이 되어 성산(星山)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아들 사후(師厚)는 벼슬이 한성 부윤(漢城府尹)에, 사원(師元)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사순(師純)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이견기(李堅基) : 포(褒)의 후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당시에 장자(長者)
로 일컬어졌으며, 시호는 안성(安成)이다.
이함녕(李咸寧) : 사후(師厚)의 아들이다. 을묘년에 장원하여 벼슬이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에 이르렀으며,
일찍 죽었다.
이정녕(李正寧) : 사후(師厚)의 아들이다. 태종(太宗)의 딸에게 장가들어 성원위(星原尉)가 되었다.
시호는 장절(章節)이다. 배규(裵規) : 세종(世宗) 때 사람이다.
아들 윤(閏)과 한(閑)이 모두 과거에 올라 부자가 연이어 간원(諫院)에 들어가니 사림(士林)이 아름답게 여기
었다.
신증 이집(李諿) :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이자견(李自堅) :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이자건(李自健) : 자견의 아우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이자화(李自華) : 자건의 아우다. 기개가 있고 과거에 올라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우거고려 김수(金洙) : 선산부(善山府) 조에 자세히 나왔다.
본조 김맹성(金孟性) : 수(洙)의 후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고 조행이 있었다.
효자본조 김문상(金文尙) : 수(洙)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전후 6년을 시묘 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하였다. 김자강(金自强) :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는데, 어머니를 봉양함에 부족
함이 없었다. 어머니가 죽어서 치상하는데 불교 의식을 따르지 않고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의하였다.
장사할 때에 아버지 무덤을 옮기어 합장하고 3년을 시묘 살면서 신을 신지 않았다.
복을 마치고 또 추후로 아버지를 위하여 다시 3년을 시묘하려 함에, 아내의 친정 가족들이 끌고서 돌아오게 하고
그 여막을 불태워 버렸다.
자강(自强)이 연기 나는 것을 돌아보고,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두들겼다. 이에 힘껏 떠밀치고 다시 돌아가 무덤
앞에 엎드려서 3일 동안을 일어나지 않았다. 인아(姻婭) 친척이 효성에 감동되어 다시 여막을 지어 주었다.
자강이 또 3년을 처음과 같이 살았다.
박구(朴矩) : 벼슬이 가정(嘉靖) 도총제(都摠制)에 이르렀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하고 한 번도 집에
이르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김승득(金承得) : 벼슬이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좇고 불교 의식을
좇지 않았으며, 3년을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김방계(金邦啓) :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고 또 조부상을 입어서 모두 9년을 시묘하였는데, 한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김신환(金信還) : 어버이가 죽자, 장사를 한결같이 가례를 좇고 3년을 시묘하였다. 나라에서 물품을 주었다.
신증 배경동(裵敬同) : 어머니가 악한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먹이니 병이 곧 나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이식(李植) : 부모가 전염병에 걸려 함께 죽자 조석으로 전(奠)을 드리는 정성을 다하여 6년을 마치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열녀고려 배씨(裵氏) : 이숭인(李崇仁)의 《배열부전(裵烈婦傳)》에, 배씨(裵氏)는 진사(進士) 배중선(裵中善)
의 딸이다. 15세가 넘은 뒤에 사족(士族) 이동교(李東郊)에게 출가하여 내정의 일을 잘 다스렸다.
홍무(洪武) 경신년에 왜적이 경산(京山)에 침입하여 온 경내가 소요하여 감히 막을 자가 없었다.
동교는 그때 합포(合浦) 원수(元帥)의 막(幕)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적병이 배씨의 사는 동네에 돌입하자,
배씨는 젖먹이 아들을 안고 달아났다.
적이 쫓아서 이르렀는데 강물은 바야흐로 창일하였다. 배씨가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어린 아들을 언덕 위에
놓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적이 활을 겨누며 말하기를, "나오면 죽이지 않겠다." 하였다. 배씨가 적을 돌아보고
꾸짖기를, "왜 나를 속히 죽이지 않는가. 내가 어찌 적에게 더럽혀지랴." 하였다. 적이 화살을 쏘아 어깨를 맞추
었다. 두 번 쏘아 두 번 맞아, 강 가운데에서 죽었다. 체복사(體覆使) 조준(趙浚)이 그 일을 임금께 아뢰어 정려
하였다.
나씨(羅氏) : 감찰(監察) 나상(羅尙)의 딸이고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배윤(裵閏)의 아내다. 윤이 죽었을
때 나씨의 나이 젊은데 머리를 깎고 3년 동안 무덤을 지켰으며, 무릇 상례와 장례를 한결같이 가례를 좇고 불교
의식을 따르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본조 눌덕(訥德) : 그 남편 정수(鄭守)가 호랑이에게 잡혔는데 눌덕이 칼을 가지고 호랑이를 쳐서 남편이
벗어났다. 일이 조정에 들리어 정려하였다.
신증 문덕(文德) : 서원(書員) 김계하(金戒河)의 아내다. 남편이 물에 빠져 죽자, 곡읍(哭泣)을 끊지 않고 3년상
을 마치었다. 부모가 개가시키려 하자 곧 머리를 깎고 시부모의 집으로 가서 15년이 넘도록 마늘ㆍ파ㆍ술ㆍ
고기를 먹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웃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일이 알려져 정려하였다.
제영 교목구려회세덕(喬木舊閭懷世德) : 이곡(李穀)의 시에, "교목과 옛 거리는 세덕을 생각하고,
낙하(落霞) 고목(孤鶩)은 재주 없음이 부끄럽다." 하였다.
일렴향무금성퇴(一簾香霧錦成堆) : 전 사람의 시에, "다시 백화헌(百花軒) 속에서 자려 하니,
발에 가득한 향기 안개요, 비단이 무더기를 이루었다." 하였다.
강분낙수천지준(江分洛水天池濬) : 이첨(李詹)의 시에, "강은 낙수를 나누었으니 천지가 깊고,
눈[雪]은 가야산(伽倻山)을 눌렀으니 지축(地軸)이 웅장하다." 하였다.
호산형승갑남주(湖山形勝甲南州)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호산의 좋은 경개가 남주에서 으뜸인데,
백 가지 온갖 모양 봄빛이 아직 가을이 되지 않았구나." 하였다.
교목한연쇄고주(喬木寒煙鎖古州)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교목의 찬 연기는 옛 고을에 잠겼는데,
집집의 감과 밤은 서리 가을을 만났도다." 하였다.
[비고]
연혁 광해주 7년에 신안 현감(新安縣監)으로 강등시켰다. : 고을 사람인 이창록(李昌祿)이 시사(時事)를 논하여
대역죄(大逆罪)로 국문 받아 죽었기 때문이다. 인조 원년에 다시 승격시켰다가 동 7년에 성산 현감(星山縣監)
으로 강등시켰다 : 고을 사람 박흔(朴訢)이 목베어 죽었기 때문이다.
효종 4년에 다시 승격시켰다가 읍인(邑人)이 목사를 독살함으로써 영조 12년에 현으로 강등시켰고
동 21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주내(州內)ㆍ강남(舡南) : 본래 강남(舡南)의 부곡(部曲)인데, 동쪽으로 20리다.
화곡(禾谷) : 동쪽으로 20리다.
오도(吾道) : 동쪽으로 30리다. 대동(大同) : 동쪽으로 35리다. 용산(龍山) : 동남쪽으로 10리다.
산남(山南) : 동남쪽으로 15리다. 초곡(草谷) : 동남쪽으로 20리다. 두의(豆衣) : 동남쪽으로 30리다.
조곡(祖谷)ㆍ다질(茶叱) : 모두 동남쪽으로 40리다. 벌지(伐旨) : 동남쪽으로 60리다.
남산(南山) : 남쪽으로 10리다. 지사(知士) : 남쪽으로 15리다. 성법산(省法山) : 남쪽으로 20리다.
운라(雲羅) : 남쪽으로 30리다. 소야(所也)ㆍ흑수(黑水) : 남쪽으로 50리다. 대척(大尺) : 남쪽으로 40리다.
사등(沙等) : 서남쪽으로 15리다. 대리(大里) : 서남쪽으로 30리다. 소건(所件) : 서남쪽으로 35리다.
오차(吾次) : 서남쪽으로 60리다. 운곡(雲谷)ㆍ본아(本牙) : 모두 40리다. 대가곡(大家谷) : 서쪽으로 10리다.
명암(明巖) : 서쪽으로 40리다. 덕곡(德谷) : 남쪽으로 30리다. 금물(今勿) : 서쪽으로 40리다.
증산(甑山) : 서쪽으로 50리다. 초전(草田) : 서북쪽으로 30리다.
신곡(薪谷) : 본래 신곡의 부곡인데 서북쪽으로 40리다. 북산(北山) : 북쪽으로 10리다.
당소(唐所) : 북쪽으로 30리다. 비호석(非乎石) : 북쪽으로 20리다. 이물(爾物) : 서쪽으로 50리다.
노장곡(蘆長谷)ㆍ유동(柳洞) : 동쪽으로 10리다.
○ 위곡(葦谷)의 부곡인데 동쪽으로 30리다.
성지 읍성(邑城) : 옛날에 흙으로 쌓았다가 중종 15년에 돌로 고쳐 쌓았다. 선조 24년에 또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6천 53척인 둥근 성이다. 청동문(淸東門)에 있는 누는 영춘루(迎春樓)라 하고, 북문 바깥에는 용흥사
(龍興寺)가 있다.
독용산성(禿用山城) : 본래 도산성(都山城)인데 서쪽으로 33리다. 수도산(修道山)의 동쪽인데 옛날 돌로
쌓았다. 숙종 원년에 고쳐 쌓았다. 둘레가 4천 5백 81보며, 옹성(甕城)으로 일포루(一砲樓)다. 개천 네 개, 샘 두
개이며, 평탄하고 험함이 반반이다. ○ 속읍은 성주ㆍ고령(高靈)이다.
○ 수성장(守城將)이 본래 목사 겸 별장을 겸하였으며 1명이다.
누정 호산정(湖山亭)ㆍ쌍도정(雙島亭).
진도 동안진(東安津) : 동쪽으로 20리, 소야강(所耶江)의 하류다.
무계진(茂溪津) : 동남쪽으로 50리, 동안진의 하류다.
토산 대ㆍ닥나무ㆍ감.
창고 읍창 두 개. 동안창(東安倉) : 동쪽으로 26리에 있다. 달창(達倉) : 서북쪽으로 25리에 있다.
가리고현창(加里古縣倉)ㆍ산성창(山城倉)ㆍ남창 : 남쪽으로 40리에 있다.
천평창(泉坪倉) :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능묘 관왕묘(關王廟) : 선조 정유년 천장(天將) 제국기(第國器)가 세웠는데, 영조 정미년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겨 세웠다. 관우(關羽) : 경도(京都) 동묘(東廟) 편을 보라.
사원 천곡서원(川谷書院) : 중종 무자년에 세우고 선조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정숙자(程叔子)ㆍ주자(朱子)ㆍ김굉필ㆍ이언적(李彦迪) : 모두 문묘편에 보라.
정구(鄭逑) : 충주 편을 보라.
장현광(張顯光) :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며 인동(仁同) 사람이다. 벼슬은 우참찬 증영의정(右參贊
贈領議政)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 회연서원(檜淵書院) : 인조 정묘년에 세우고 숙종 5년에 사액하였다. 정구 : 충주 편을 보라.
○ 충렬사(忠烈祠) : 숙종 기유년에 세우고 정조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제말(諸沫) : 선조 임진왜란에 전사하였는데, 벼슬은 성주 목사 증병조판서(星州牧使贈兵曹判書)며,
시호는 충무(忠武)다.
이사룡(李士龍) : 본주(本州) 포수(砲手)였는데, 인조 무인년에 청(淸) 나라 징병으로 요동(遼東)에 들어가서 금
주(錦州) 송산에서 순절하였다. 성주 목사에 추증되었다.
[주 D-001] 구름이 열리니 한자(韓子)의 정성을 감동시켰고 : 한유(韓愈)가 형산(衡山)에 올라가서 여러 날 비
를 만나 걱정하다가 형악묘(衡岳廟)에 빌었더니 곧 맑게 개었다. 그의 시에, "묵도(黙禱)하였더니 감통(感通)되
었다."는 말이 있다.
[주 D-02] 꽃이 떨어지니 유랑(劉郞)의 물색(物色)이 아득하다. : 진 나라 유신 완조(阮肇)가 천태산(天台山)에
놀러 가서 선녀(仙女)를 만나 놀다가 돌아와서 뒤에 다시 찾아갔다.
[주 D-003] 적송자(赤松子) : 옛 신선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송자(松子)를 두고 한 말이다.
[주 D-004] 만리에 길들이기 어려운 것 : 두보의 시에, "백구가 호탕한 물결에 빠졌으니 만리에 누가 길들일꼬.
[白鷗沒浩蕩 萬里誰能馴]" 하였다. 여기서는 자신이 백구처럼 한가롭다는 뜻.
[주 D-005] 봉력(鳳曆) : 봉(鳳)이 천시(天時)를 아는 때문에 봉으로 역정(曆正)의 벼슬을 이름하였다.
[주 D-06] 왕춘(王春) : 《춘추(春秋)》에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쓴 것을 말함.
[주 D-07] 구오(九五) :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오효(九五爻)에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
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되는 괘(卦)라 한다.
[주 D-08] 활과 칼 :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오를 때에 황제의 활과 칼이 떨어졌으므로 여기서는 임금
이 승하한 것을 말함.
[주 D-09] 칼을 놀리는 것 : 소를 잘 잡는 포정(庖丁)이 소를 잡을 때에 칼 놀리는 것이 여유가 있듯이,
고을 다스리는 일에 잘 하는 것을 말함.
[주 D-010] 금정(金井) : 우물 난간을 아로새겨 꾸민 것을 금정이라 함. 오동 잎이 금정에 떨어진다는 시가 있음.
[주 D-011] 닭을 베는 :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원이 되었는데, 공자가 가본즉 선비들의 공부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자는 웃으며 농담으로, "닭을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왜 쓰느냐." 하였는데 그 말은 나라를
교화시키는 법을 작은 고을에 쓴다는 뜻으로 칭찬하는 말이다.
[주 D-12] 열자(列子)의 냉연(冷然)한 것 : 《장자(莊子)》에, "열자(列子)가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매 서늘하게
[冷然] 좋았다." 하였다.
[주 D-13] 초왕(楚王)의 쾌재(快哉) : 송옥의 풍부[宋玉風賦]에 초 양왕(楚襄王)이 난대(蘭臺)에 놀다가 바람이
쏴하고 불어오매 왕이, "옷깃을 헤치고 바람을 쐬면 상쾌하다 이 바람이여." 하였다.
[주 D-14] 한 번 조이고[一張] 한 번 늦추는[一弛] : 《예기》에, "한 번 버티고 한 번 푸는 것은 문무(文武)의
도다." 하였다. 그 주에는 한때 괴롭다가 한때는 편해야 한다는 뜻이라 하였다.
[주 D-15] 청천(晴天) 방초(芳草)의 구(句) : 최호(崔顥)의 황학루시(黃鶴樓詩)에,
"청천역력한양수(晴川歷歷漢陽樹) 방초처처앵무주(芳草萋萋鸚鵡洲)"라는 시구(詩句)가 유명하다.
[주 D-16] 사모(四牡) : 사모(四牡)는 옛날 사신의 수레를 끄는 네 말을 말함인데,
《시경》에 사모편(四牡篇)이 있다.
[주 D-017] 치원대(致遠臺) : 최고운의 유적인 동래 해운대(海雲臺)나 월영대(月影臺)를 말한다.
[주 D-18] 월굴(月窟)의 맑은 바람은 계수나무 기르는 것을 재촉한다. :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비유한 것.
[주 D-19] 퉁소 부는 짝 : 춘추(春秋) 때 사람 소사(蕭史)가 퉁소를 잘 불므로 진 목공(秦穆公)이 딸 농옥
(弄玉)을 아내로 주었는데 농옥에게 퉁소 부는 것을 가르쳤다.
[주 D-20] 달[月]로 달아나서 약을 훔치는 신선이 되었네. : 예(羿)가 불사약(不死藥)을 서왕모(西王母)
에게서 얻어 왔는데, 항아(姮娥)가 훔쳐 가지고 월궁(月宮)으로 달아났다.
[주 D-21] 포편(蒲鞭) : 유관(劉寬)이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어서 아전과 백성이 죄가 있으면 부들 채찍을
써서 벌을 줄 뿐이었다.
[주 D-022] 몽송(夢松) : 오(吳) 나라 정고(丁固)가 꿈에 배 위에 소나무가 났었는데 점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송자(松子)는 십팔공(十八公)이니 이 뒤 18년만에 삼공(三公)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그대로 되었다.
[주 D-23] 순리 명관 : 법도를 따르는 어진 관원을 말함인데, 《사기(史記)》에 순리전(循吏傳)이 있음.
[주 D-24] '때는 굴(屈)한데 일은 지나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 시기는 그렇지 못한데 큰 일을 한다는 뜻
이다.
[주 D-25] 아름답고 악한 것이 다르다 : 공자(孔子)가 《춘추》를 지어 좋은 일은 포상[褒]하고 나쁜 일은 폄
(貶)하는데, 같은 일에도 경우에 따라서 포(褒)와 폄(貶)이 다르기도 하였다.
[주 D-026] 반근착절(盤根錯節) : 옛글에, "서리서리 얽힌 나무뿌리나 어긋난 마디가 있는 재목을 만나지
않으면, 잘 드는 연장을 구별할 수 없다." 하였다. 어려운 일을 만나야 잘 처리하는 재주를 알아낸다는 뜻이다.
[주 D-27] 나그네가 그 길에 다니고자 하며 : 《맹자》에서 나온 말인데 정치를 잘하는 나라에는 사람들이
따른다는 뜻이다.
[주 D-28] 해타(咳唾) : 어진 사람이 남긴 말이나 글을 기침과 침에 비하여 그것이 주옥(珠玉)과 같다 한다.
[주 D-29] 길야은(吉冶隱)의 시서(詩書)의 유풍(遺風) : 길야은이 글을 가르치고 행실을 닦아서 향리(鄕里)를
감화시켰다.
[주 D-030] 눈과 반딧불을 짝 삼았다. : 옛날에 강필(江泌)은 밤에 촛불이 없어 눈[雪]에 비춰 글을 읽었고,
차윤(車胤)은 반딧불을 모아 엷은 비단 주머니에 달아서 글을 비추었다.
[주 D-031] 오성(五聖)과 십철(十哲) : 공자·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를 오성(五聖)이라
하고, 안연(顔淵 : 안자)·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염유(冉有)·자로(子路)·재아(宰我)·자공
(子貢)·자유(子游)·자하(子夏)를 십철(十哲)이라 한다.
[주 D-032] 장전(帳殿) : 왕이 임시로 장막[帳]을 치고 거처하던 곳이다.
[주 D-033] 명이(明夷)의 때 : 《주역(周易)》 명이괘(明夷卦)에 해가 땅 속으로 들어가면 밝은 것이 상한다
하였는데, 어진 사람이 뜻을 얻지 못하여 참소를 근심하는 것을 명이(明夷)라고 한다.
여기서는 충혜왕이 원 나라에서 참소를 만났던 때를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