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14.중앙
신봉길의 한반도 평화위치
북핵 남북한 공존 전제로 새 해법 찾아야
전 주 인도대사 북한대학원대학 석좌교수 긴 기사 요약
2002연 함경도 신포에 건설중인 원자력발전소 건설 때문에 나는 여섯 차례북한을 방문했다.
1965년 소련이 지원한 소형연구용 원자로 5mw급이 영변에 건설될 때 문이 엇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도미노로 붕괴하자 북한은 핵개발을 통해 체제유지에 나섰다.
1989년 1월 한,소 수교를 통고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소련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에게 북한은 극도의 배시감감을 나타냈다. 북한은 미국. 일본과 수교 시 까지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소련은 거부했다. 당시 한국과 서방은 북한의 조기붕괴가능성에 들떠 대북 고립 압박 정책을 택했다.
1994년 미국은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경수로 원전 건설 완공 시까지 연간 50만t의 연료용 중유공급을 약속했다. 미 북 정안안도 들어있었다. 이 제네바 핵 합의를 지원하기위해 한국은 경수로 원전지원 기획단을 만들고 나는 이기구 특보였다.
부시. 비핵화 마지막 기회 허물어
합의는 잘 진행되고 있었다.2002년 10월 농축우라늄이슈가 터졌다. 북한은 경수로 원전 건설이 지연되고 부시 행정부의 강경세력이 전임 클린턴 정부의 제네바 핵 합의를 부정하고 나오자 파키스탄의 핵 과학자 압둘 카디르 칸 박사 루트를 통해 우라늄 농축을 통한 핵개발을 모색했다.
2002년 10월 미 국무부 켈리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해 추궁했다. 그리고 한국. 일본. 유렵.연합(EU)등의 신중논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중유공급을 중단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중유공급을 중단하면 북한이 벼랑 끝 전술로 영변 핵을 손을 댈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평양방문중이 었는데 북한은 초긴장 상태였다. 옆자리에 앉은 북한 고위간부는 앞으로 미국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북한은 컬리 대표단에 다시 만나자고 간청도 했다.이때가 미.북간에 다시한번 큰 타협을 만들어 낼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부시 정권은 9.11테러를 이유로 아프니카스탄을 공격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고 이라크 침공을 계회하고있었다.그리고 북한을 이란과 함께 악의 축(9axis of evil)로 지목했다.
북한은 사생결단으로 나왔다.2003년 초 국제원자력기구 (IAEA)의 영변 핵 사찰단을 추방했다. 8연간 폐쇄됐던 영변 핵 시설 재가동했다. 핵심부품만 남겨 두고 있던 경수로 원전도 중단됐다.
북한에 경수로원전 완공됐다면
2018년 2월 주인도 독일대사로부터 당시상황을 들었다. 농축우라늄 이슈 대응을 북핵 저지 과정에서 미국이 가장 큰 전략적 실책으로 보왔다.
북한이 곧 붕괴 할 것이라는잘못된 환상에 전임 클린턴 정부가 어렵게 만든 제네바 함의를 무너뜨렸다고 비판했다.역사에 만약은 없다.그러나 재네바 합의가 유지되고 경수로 원전을 완성했으면 원전을 위해 미국과 한국인이 북한을 수시로 왕래했응것이다. 중국의자금도 투입되어 송전망도 건설되고 서울과 평양 워싱턴 간에 대표부도 설치 됐을 것이다. 그 후 부시 대통령은 6자 회담에 넘긴 것이 전부였다.나는 1.2차차 회담에 한국대표단의 이원으로 참석했다.두나라가 협상을 해도 어려운 판에 6개국 100여명이나 모여서 협상이 잘될이가 없었다북한에 핵개발시간만 줬다.부시정부이후 오바마정부는( 2009-2017)인내라는 명분으로 8년간 방치했다.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트럼프.김정은 미북 정상회담은 깜짯쇼로끝났다.북핵에관해서 30년을 소비했다.미국이 대책없이 너무 쉬베 강경책을 주장하는 안락의좌의 전사들이 많았다는 점이다.현상화에서 유엔과 미국이 북한에 경재제재하면서 협상장으로 끄러내것외는없다.
한국판 동방정책새로 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