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임(李仁任)
출생일 미상
사망일 1388년(우왕 14)
고려후기 수문하시중, 개성부사, 좌시중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이인임은 고려후기 수문하시중, 개성부사, 좌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1388년(우왕 14)에 사망했다.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웠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원나라가 덕흥군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이를 막는 데 기여했다.
공민왕 피살 후 10세의 어린 우왕을 즉위시켰다. 돌아가는 명의 사신을 살해하고 친원정책을 펴려다 반대에 부딪히자 최영 등 대신들을 유배보냈다. 탐학을 일삼는 가운데 사직했으나 우왕이 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일파를 처단하고 이인임을 유배보내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본관은 성주(星州). 할아버지는 이조년(李兆年)이다.
처음 문음(門蔭)으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된 후 전법총랑(典法摠郎)을 거쳐 1358년(공민 7)에는 좌부승선(左副承宣)이 되었다.
이듬해 12월 홍건적이 침입해 의주를 함락시키자 서경존무사(西京存撫使)에 임명되어 홍건적에 대비했고, 1361년의 재차 침입했을 때에도 크게 활약하였다.
1362년 8월 판개성부사로서 서북면도지휘사, 이듬해 2월 첨의평리로서 서북면도순문사겸 평양윤이 되었고, 윤3월에는 수복경성공신(收復京城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5월 원나라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삼아 고려에 들이려 하자, 평양윤이 되어 덕흥군 일파의 침략을 물리친 출정군의 식량을 조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11월 기해격주홍적공신(己亥擊走紅賊功臣) 2등에 봉해졌다. 이어 삼사우사(三司右使)·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에 봉해졌으며, 1368년(공민왕 17) 12월 좌시중(左侍中)이 되었다.
1374년(공민 23) 4월 잠시 면직되었다가 6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되었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공민왕이 피살되어 명덕태후(明德太后)와 시중 경복흥(慶復興)이 종친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 하자, 자신의 일파와 모의해 나이 10세의 어린 우왕을 즉위시켰다.
한편 당시 고려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이 공민왕 피살사건을 본국에 보고해 책임이 재상인 자신에게 돌아올까 염려해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채빈을 호송관 김의(金義)로 하여금 살해토록 하고, 그 동안 배척당했던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려고 하였다.
이에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 전리총랑(典理摠郎) 이숭인(李崇仁),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鄭道傳), 삼사판관(三司判官) 권근(權近)이 정부의 친원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우헌납 이첨(李詹)이 이인임과 찬성사 지윤(池奫)의 죄목을 열거하며 이들을 목 벨 것을 상소했다.그러자 최영(崔瑩)·지윤 등과 합심해 이첨·전백영을 사기죄로 몰아 유배시키고 김구용·이숭인·정몽주(鄭夢周)·임효선(林孝先)·정사도(鄭思道)·박형(朴形)·이성림(李成林) 역시 자신을 해치려 한다며 모두 유배시켰다.
반대세력을 제거한 후, 지윤·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며 관직과 옥(獄)을 팔고 전국에 걸쳐 토지와 노비를 축적하는 등 탐학을 일삼았다.
1381년(우왕 7) 2월 문하시중(門下侍中), 이듬해 6월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를 거쳐, 1384년 9월 판문하부사, 1386년 8월 좌시중을 거쳐, 이듬해 8월 노환으로 사직하였다.
1388년에 염흥방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이 주인의 권세를 배경으로 전직 밀직부사 조반(趙胖)의 토지를 빼앗자 이에 격분한 조반이 이광을 죽였다. 이에 염흥방이 조반을 국가모반죄로 몰아 순군(巡軍)에 가두고 심하게 고문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그 동안 기회를 엿보던 우왕·최영·이성계 등이 오히려 염흥방·임견미·왕복해(王福海) 등을 처단하고 그 일파를 유배시켰는데, 이 때 이인임도 경산부로 옮겨졌다가 곧 죽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인임(李仁任))]
이포(李褒)
출생일 미상
사망일 1373년(공민왕 22)
고려후기 검교시중을 역임한 관리.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아버지는 예문관대제학 이조년(李兆年)이다. 아들로는 이인복(李仁復), 이인임(李仁任), 이인미(李仁美), 이인립(李仁立), 이인달(李仁達), 이인민(李仁敏) 등이 있다
벼슬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하여졌다.
성품이 순박하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1372년 왕이 손수 이포의 초상화를 그려서 아들 이인임에게 내려주는 영예를 입었다. 시호는 경원(敬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포(李褒))]
이조년(李兆年)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11년(1285) 을유(乙酉) 을유방(乙酉榜) 병과(丙科) 1위(2/31)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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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원로(元老)
시호(諡號) 문열(文烈)
생년 기사(己巳) 1269년 (원종 10)
졸년 계미(癸未) 1343년 (충혜왕 후4)
향년 75세
합격연령 17세
본인본관 성주(星州)(주3)
거주지 경산(京山)(주1)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장령,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농서군공(隴西郡公) 이장경(李長庚)의 아들이다.
1294년(충렬 20) 10월 향공진사(鄕貢進士)로 과거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에 보직되고,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비서랑(秘書郎) 등을 지냈다.
1306년 11월 비서승으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을 때 왕유소(王惟紹)·송방영(宋邦英) 등이 충선왕을 모함하여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 왕전(瑞興侯 王琠)으로 하여금 충렬왕의 후계를 삼으려 획책하다가 충선왕의 세력이 커지자 처벌된 일이 있었다.
같은 해 5월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단지 충렬왕을 보필하고 있었으나 그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그 뒤 귀양에서 풀려나와 13년간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한번도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지 않았다. 당시 충숙왕은 5년간이나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가 왕위 찬탈을 도모하자 홀로 원나라에 들어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이러한 음모를 분쇄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왕이 귀국하자 감찰장령으로 발탁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郎)으로 관동 지방을 안무(按撫)하였다.
1327년 충숙왕이 원도(元都)에 있을 때 왕을 도운 공로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이어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하였다.
이 때 충숙왕은 심왕당(瀋王黨)의 끊임없는 모략으로 왕위를 심왕에게 선양(禪讓)하려 하였으나 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여 이를 저지시켰다.
1330년 12월 충혜왕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었고, 그 뒤 여러 번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내왕하였다.
1340년(충혜 복위 1) 4월 정당문학에 승진하였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의 음탕함을 여러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1341년 12월 성산군으로 사직을 청하였다.
1342년(충혜 복위 3) 6월 조적의 난 때 호종한 공로로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에 녹권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1343년 5월 세상을 떠났다.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하는 엄격한 성품 때문에 경외시되었으며, 역임한 관직에서 많은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되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조년(李兆年))]
[이력사항]
선발인원 31명
관직 정당문학(政堂文學)
봉호 성산군(星山君)
기타 을유(乙酉) 향공진사(鄕貢進士)(주2)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장경(李長庚)
[조부(祖父)]
성명 : 이득희(李得禧)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돈문(李敦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정윤의(鄭允宜)[麗文]
본관 : 초계(草溪)【補】
[주 1] 거주지 : 『경산지(京山志)』 卷4, 人物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2] 기타 : 이제현(李齊賢)이 찬한 이조년묘지명(李兆年墓誌銘)에 “公年十七 以鄕貢進士 登第丙科”로 기록되어 있다. 이조년의 나이 17세는 1285년으로 충렬왕 11년이다. 『고려사』 제109권, 열전 제22, [이조년]열전에 “忠烈二十年 以鄕貢進士 登第”로 나오는데, 충렬왕 20년은 1294년으로 이조년은 26세였다. 이조년은 기사(1269) 생, 계미(1343) 졸로 향년 75세이다. 만일 충렬왕 20년(1294)이 17세이면, 묘지명과 고려사 둘 다 충족시킬 수 있는데, 그러면 생년이 1278년이 되고, 졸년은 1352년 된다. 이것은 다른 기록(방목, 묘지명)들로 보아서 맞지 않다. 또 하나의 가설은 17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한 경우이다. 묘지명의 17세 을유(1285)에 향공진사에 합격하고, 고려사의 충렬왕 20년(1294)에 문과에 급제한 경우이다. 아니면 고려사 기록이 오류로 17세 을유(1285)에 향공진사와 문과를 같은 해에 합격한 경우이다. 동 시대 사람인 이제현이 찬한 묘지명의 기록을 무시할 수 없으며, 고려사의 기록 또한 그러해서 아직 과거 급제년을 확증할 수 없다. 방목의 기록대로 두었다가 추후에 상고해서 급제년을 확증해야 할 것 같다.
[주 3] 본관 : 『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에는 본관이 “경산(京山)”으로 기록되어 있음.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 4650-10])
정윤의(鄭允宜)
[고려문과] 원종(元宗) 9년(1268) 무진(戊辰) 무진방(戊辰榜) 을과(乙科) 2위(2/4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815C724C758U9999X0
본인본관 초계(草溪)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밀직제학, 서북면도순문사, 봉익대부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정배걸(鄭倍傑)의 7세손으로,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1268년(원종 9) 과거에 차석으로 합격하였다.
1300년(충렬왕 26)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시를 관장하여, 이자세(李資歲)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302년에는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되었으며, 이후 관직은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윤의(鄭允宜))]
[이력사항]
선발인원 43(주1)명
관직 밀직제학(密直提學)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정필(鄭弼)
[조부(祖父)]
성명 : 정석중(鄭碩中)
[증조부(曾祖父)]
성명 : 정영(鄭榮)
[외조부(外祖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문인위(文仁渭)
[주 1] 등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卷30, 草溪郡, [人物]편을 참고하여 등위를 2위로 확정함. "榜眼"을 참고.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 4650-10])
첫댓글 이인임의 형 이인복은 강거정의 사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