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가르치는 방법 중에 비교법을 통해서 가르치시기도 합니다. 비교법에 보면 직접 비유법이 있고 은유법 등이 있습니다. 직접 비유는 ‘~같다’라고 비유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꽃 같다’라고 하면 ‘아름답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은유법은 ‘A는 B다’라고 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읽은 이 예수님의 교훈은 은유적 표현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면 우리 주님이 포도나무라고 하면 우리는 그 가지이니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이죠. 이것이 은유적 표현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라는 말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백성들 혹은 성도들을 두고 하는 말이고, 소금과 빛이라는 말은 소금처럼 맛을 내며 빛처럼 밝게 비춘다는 의미이죠. 예수님은 아주 탁월한 방법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소금은 어떤 의미이고 무슨 역할을 하며 빛은 어떤 역할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마태복음 5: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너희’라는 말은 그때 갈릴리 호수 북쪽 산 언덕에서 말씀을 듣던 그 제자들과 성도들이었다고 하면 오늘날에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즉 예수 믿는 성도들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이라는 말은 이 사회에서 혹은 이 세상 살아가는 환경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안 믿는다고 해서 다 버리고 산에 올라가 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죄가 많은 세상에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 심지어 불신자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소금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고대사회에나 지금이나 아주 중요합니다. 음식을 할 때 맛을 내기도 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이 소금으로 돈과 같이 거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소금은 맛을 내는데 필요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할 때 소금을 넣습니다. 국을 끓여도 소금을 넣고 반찬을 만들 때도 소금이 필요합니다. 간장을 넣는다고 하지만 간장을 만들 때 소금을 넣어서 만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모임에서 설렁탕을 먹었는데 아주 맛이 있었습니다. 설렁탕이 음식도 귀하고 영양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금을 넣지 않으면 싱거워서 영 먹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소금을 좀 넣으면 얼마나 맛이 있고 또 영양가 있는 진국인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사회에서 소금과 같이 맛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그 사람이 있으면 은혜가 있고 재미가 있고 가치가 있을 때 귀한 사람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그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 사람이 꼭 필요한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합니다. 안동에서 가면 간고등어가 유명합니다. 옛날에 동해에서 잡은 귀한 고등어를 임금이 계신 한양으로 운반해 가야 하는데 시간이 걸리니 생선을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소금으로 간을 친 것입니다. 그러면 생선이 오래가고 운반하는 시간에 생선에 배여서 맛도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선이 썩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바다의 물은 소금이 있어서 그 거대한 물이 썩지도 않고 생명력이 있어서 다 포용합니다. 어떤 경우 오물이 좀 들어와도 다 희석을 시키고 살아있는 바다가 되어 바다의 생명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은 구약에서 언약을 의미하고 합니다. 소금언약이라고 합니다. 소금이 변질 잘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주의 백성들과의 언약을 소금언약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약속은 변치 않기 때문에 소금언약이라고 합니다.
소금은 희기 때문에 순결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전라도 신안 앞바다에 가면 염전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염전이고 세계적인 염전입니다. 그곳에 기념관도 있고 관람을 할 만합니다. 소금을 창고에 재 낳은 것을 보면 얼마나 흰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얀 소금처럼 우리 성도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가 없다고 했습니다. 소금을 채취할 때 불순물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불순물을 제거하지 못하여 그것이 나중에 맛을 내지도 못하고 좋지 않은 품질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소금이 웬만해서 맛을 잃고 그러지는 잘 않습니다. 아무튼 소금이 맛이 없으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대개 필요 없는 소금은 땅에 버립니다. 땅을 고르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평한 지붕 위에 소금을 버려서 그것을 밟아서 땅을 고르게 하고 물이 세지 않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옛날 흙으로 된 테니스장에 소금을 부어서 땅을 고르게 하고 밟는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개 하드코트를 하여 흙이 아닌 인조로 만들어 사용합니다. 그런 소금들은 땅에 뿌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힙니다.
이 소금은 다른 데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거름에도 못씁니다. 음식이나 물질이 부패하여 썩어서 마지막에 거름으로 사용을 합니다. 그 거름은 퇴비로 사용하여 나무에 뿌려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런데 썩은 거름에도 쓰지 못하는 것이 소금입니다. 그래서 길에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밟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버림을 받고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소금처럼 그 맛을 내지 못하고 생명력이 없으면 버림을 받고 사람들에게 비참하게 밟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비참하게 된다는 의미도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둘째,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14절 말씀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했습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하신 것입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 비추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새벽기도에 오면 가로등이 비추고 있습니다. 혁신도시에서는 가로등이 잘 되어 길이 환합니다. 오늘날에는 우리나라 가로등이 잘 되어 시골 마을에도 가로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골 논길에 가로등이 없는데 사람이 걸어가려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별빛이라고 있든지 아니며 후레시를 켜서 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우리는 그 어둠에서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태양 빛이 환한 대낮이라고 영적으로는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영혼이 캄캄합니다.
이 사회가 경제성장을 해서 이처럼 좋은 APT에 살고 빌딩에서 근무를 해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로 가득차 있어서 죄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빛이십니다. 주님은 공생애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경이 앞이 안보여 캄캄함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주님을 만나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자는 빛을 보게 됩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영안이 빛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성경예화)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라!
한 번은 예수님 공생애 시절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을 다 들고 그 여인을 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간음하는 자는 돌로 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예수님에게로 데려와서 어떻게 할까요? 물었습니다. 돌로 치라고 하면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였는데 무자비한 분이 됩니다.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어른으로부터 젊은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다 돌을 땅에 내려놓고 떠나버렸습니다.
그 여인 홀로 남았습니다. 그때 주님이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실 때 주님 요한복음 8:12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 주님을 우리가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계십니다. 그 말씀은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고 그 주님의 빛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살아갈 때 주님의 빛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간증예화) 소망의 집 봉사
제가 전도사 때 소망의 집에 봉사한 적이 있습니다. 합포구 진전면 이명리에 시각 장애자들이 7명이 있었고 그 외 장애자들과 고아들과 노인들이 합하여 40여명 정도 되었는데 그때 창포교회 담임목사님이 운영했습니다. 교회의 지원을 받아 운영을 했는데 저는 그곳에서 2년 정도 같이 그들과 기거하면서 산서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노인들 목욕도 시켜드리고 여러 가지 공사도 하고 장애자들을 돕기도 했습니다. 새벽기도 갈 때 시각장애자들의 팔을 잡고 1Km 정도 떨어진 교회로 걸어가서 기도했습니다.
그 상황을 들은 우리 어머니께서 그 때에는 교회를 안 다니셨는데 말씀하시기를 너무 착하다고 했습니다. 어찌 그리 좋은 일을 하느냐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선을 행하여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해야 됩니다.
15절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등불을 켰습니다. 그 등불을 등경 즉 등불 받침대를 만들어 그 위에 얹어 두어 집안을 다 환하게 밝도록 합니다. 그 등불을 말 아래에 두어 엎어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은 곡식을 계산할 때 담는 그릇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 집안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이 볼 때 과연 예수 믿는 사람이 본이 된다고 칭찬해야 합니다. 혹 여러분의 가족들 중에 안 믿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여러분의 삶을 보고 칭찬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론)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6절 말씀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비추는 빛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비치는 빛이 무엇입니까? 예, 착한 행실입니다. 여러분의 착한 행실이 빛이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란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세상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서 영광을 돌릴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고 세상의 안 믿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 믿는 사람이 참 잘한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지지만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니 하나님이 계시는 갑다, 라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