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미학 교사들(4)
4.
쉰 살이 훌쩍 넘은 지금 나이에 내게는 헤세의 여성적인 것을 향한 구도의 열정은 공허한 사치로 여겨진다. 오히려 노년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고심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는 노년의 삶도 매우 현실적이다. 스위스 작은 마을 테신(Tessin)에서의 생활을 보여주는 글에서 그는 노년의 삶을 즐기는 낙관론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은 죽음이 아주 먼 곳에 있을 것이다/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노인들에게 멋진 것은/ 난로와 부르고뉴산(産) 적포도주/ 그리고 마지막에 편안한 죽음/ 그러나 먼 훗날, 아직 오늘은 말고!”
《희랍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혹 그리움의 대상을 찾았다면, 야생마같이 거침없는 그의 주인공 ‘조르바’처럼 감정에 솔직했을까. 매우 수줍음이 많았던, 결혼한 그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 1922년 그의 나이 39세 때의 비엔나에서의 일이다.
어느 극장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미모의 여인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가 연극이 지겹다고 해서 둘은 밖으로 나와 저녁나절을 산책으로 보냈다. 그가 여인에게 자기 호텔로 가지 않겠냐는 물음에, 그날은 사정이 있어 다음 날 밤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그날 밤 행복한 순간을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 깨어 거울을 보니 입술과 턱이 부어올라 있고, 얼굴 전체가 습진과 같은 반점이 돋아 있었다. 낭패감에 빠져 그 여인에게 그날 밤에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음날로 약속했으나,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상태가 악화가 되었다. 더욱 당혹감에 빠진 일은 병의 원인을 아는 의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우연히 프로이트 친구인 심리학자를 만나 상담했다. 그간의 모든 상황을 설명했더니, 그 심리학자는 중세의 금욕주의자들인 수도자들이 동굴에서 영혼의 자유를 얻으려는 수행 과정에서
이를 견디지 못해 마을로 달려가는 순간에, 그들의 얼굴에 발진이 돋고 진물이 흘러내렸다는 ‘성자의 병’을 그가 앓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여인을 잊지 않는 한 그 병이 절대로 나을 수 없다는 처방을 내렸다.
그가 그 여인을 포기하고 비엔나를 기차로 떠난 후, 한 시간이 채 못되어 놀랍게도 얼굴의 발진이 가라앉았다고 했다. 이는 그에게 육체와 영혼은 각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무섭게 체험한 경우이다. 평소 그는 감각적인 것들과 보고 듣고 느끼는 욕망도 자제하고 육체를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시인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는 그의 기념비적인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에서 본능적 쾌락에 탐닉한 젊은이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을 떠나 정신의 본향을 찾는 노인의 모험적인 여행을 노래했다.
젊은 날, 예이츠는 고향 이니스프리를 항상 그리워했지만, 그의 나이가 60대 초반으로 들어섰을 때 생각이 바뀐 것이다. 그가 동경하는 것은 ‘비잔티움’이었다. 무엇이 그에게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도록 만들었을까. 그는 이전에 비잔티움을 여행한 일이 없었다. 그에게 그 도시는 ‘불멸의 지성’을 추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비잔티움은 유럽 문명의 중심이었고 정신적 철학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젊음이 갖는 혜택은 젊은이를 위한 것이며, 늙은이들은 자신을 위한 다른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첫 연의 끝부분에 ‘불멸의 지성’을 보여주고 있다. 혹 젊음과 육체적 쾌락은 인생 후반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존재 이유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이츠는 인생의 전 후반에 공정한 균형감각을 부여함으로써, 폭넓은 관점에서 시간의 영향에 대해 살펴본다. 그는 그가 늙었기 때문에 노인을 찬양하는 유혹에서 벗어났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까. 예이츠의 시 첫 부분에 나오는 ‘저세상은 늙은이들이 살 곳은 아니야/그럼 난 뭐야? 늙어빠진 나는 도대체 뭐냐고?’라는 말처럼 실망하고 분노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젊음이 누리는 본능이나 관능의 음악에서 깨어나 새로운 가치인 ‘불멸의 지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시의 화자처럼 그 지성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각자 정신의 여행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영혼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선 자신만의 장려한 기념비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하지만 그런 영혼의 노래를 가르쳐줄 노래교습소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난 먼바다를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을 찾아온 것이지”와 같이 노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자기만이 가진 영혼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리움이란 어느 봄날 아지랑이를 잡으러 강가를 마주 보고 달리던 소년과 소녀가 스쳐 지나가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그리움을 오래 간직하려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도 된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단, 한번 보았을 뿐인데 그 소녀는 그를 천국으로 안내할 정도였으니. 이 땅의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가 모든 길을 굳이 다 가야 할 필요는 없다. ‘가지 않은 길’로 남겨두는 여유가 있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화자는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택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즉 그러한 길을 택하는 것이 매우 진취적이고 도전적이어서 인생의 교훈처럼 시를 읽는 사람에게 해석될 수가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한 결론은 다른 길을 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먼 훗날 스스로에 확신을 심어주는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습관적으로 후회하는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조롱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어느 길은 사람들의 발자취가 보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길이었고, 다른 길은 풀이 우거져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은 험한 길인지도 모른다. 어느 길이 “쉰 살의 남자”에 어울리는 길이고,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로 가는 노인의 길이 될까.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카잔차키스의 ’성자의 병‘체험과 같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기에 두 길 모두를 갈 수가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