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깨어나고 있다. 지난 1월 21일 무룡계곡 주차장으로 퇴각한 지 한 달 일주일 만에 덕유 아래 산들을 마주하러 떠났다. 세 차례 정도 짐을 쌌다가 날씨 등이 맞지 않아 풀었던 터였다. 백두대간에 나서 처음으로 차량을 이용했다. 지난 1월 15일 하산했던 광대치~중고개재 구간을 다시 밟고 내려와 무룡고개 주차장으로 이동, 영취산(1016m) 정상을 밟고 덕운봉~민령~깃대봉(구시봉, 1015m) 거쳐 육십령 닿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덕유 아래 산들에 미진한 구석을 말끔히 메웠다.
27일 아침 6시 30분쯤 집을 나서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타고 전북 장수군 장계면 지지리를 찾아간다. 세 차례 짐을 쌌다 푸는 과정에서 지지리 쪽으로 들머리를 잡으면 비교적 시간을 적게 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무룡고개 주차장으로 7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시간 운용상 효율적일 것 같았다.
그런데 지지리 마을은 한없이 고즈넉하기만 했다. 들개마냥 풀어놓은 견공 두세 마리가 뛰어온다. 반가워서 그러는지 낯선 이를 위협하려고 하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산행 들머리를 찾았는데 사유지니 침입하지 말라는 경고판이 봄눈 녹아 넘칠 듯 흐르는 개울 건너 또렷하다. 이번 백두대간 산행에 원칙으로 삼은 것이 있다. 오지 말라는 데 가지 않는다,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게 한다, 민폐 끼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등이다.
그렇게 조금 헤매느라 시간을 허비해 무룡고개 주차장에 차를 대고, 800m쯤 오르니 저번 퇴각 때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바위에 다다랐다. 당시보다 훨씬 부처 얼굴에 가깝다. 머리에 앉은 흰눈이 부처 정수리 같다. 눈은 훨씬 적은데 서걱거리는 게 정감이 간다. 미끄럽지 않아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았다.
갈림길 이정표 지나 300m를 내처 오르니 영취산 정상이다. 멀리 남덕유가 빼꼼 얼굴을 내민다. 그 동안 주로 영각사 쪽에서 남덕유 오르며 봤던 모습과 많이 다르다. 훨씬 기골이 장대하다. 앞으로 가야할 민령과 깃대봉 등도 선명히 다가온다.
길은 너무 편하고 조붓하다. 뒤를 돌아보면 복성이재와 봉화산 등 한달 보름 전에 걸었던 길이 장엄하다. 왜 영취산을 '뷰 맛집'이라 하는지 알것 같다. 능선미를 조망하며 걷는 길맛이 일품이다.
그런데 난관은 있었다. 지난번 퇴각했을 때는 산죽이 나를 힘들게 했는데 이번에는 아래 사진 오른쪽처럼 소나무 가지에 붙은 얼음 결정체의 습격이 만만찮다. 상당히 큰, 길이 10cm쯤 되는 것들도 뚝뚝 떨어진다. 거기에 등로에 고꾸라진 큰나무들이 자꾸 걸음을 막는다. 그러다 결국 한 방 제대로 맞았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일순, 엄청난 고드름이 내 정수리를 제대로 맞췄다. 한참 뒤 만졌더니 쪼맨한 남붕이 만져졌다.
길을 서둘러야 했다. 영취산 정상의 표지판은 육십령까지 11.9km인데 7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엥? 그렇게나 많이 걸린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영취산 정상에서 바라본 시계는 12시 10분. 그렇다면 육십령에 도착했을 때 저녁 7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럼 안 된다 싶었다. 쉬지 말자 생각했다. 남덕유 능선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발길을 한없이 재촉해야 했다.
덕운봉 자락을 스치듯 지났다. 동쪽으로 제산봉(853m)으로 해서 경남 거창군 서상면 옥산리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 왼쪽 뒤를 돌아보면 장안산(1237m)이 토끼등처럼 부드럽다. 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으로 갈라지는 것이 장안산이다. 영취산 정상에서 장안산 가는 길이 따로 있다. 나중에 날씨 풀리면 광대치~중고개재 구간을 장안산으로 연결해 한 번 다녀오자 생각했는데 이튿날 상황이 달라졌다. 이 내용은 나중에 얘기하겠다.
잰걸음 끝에 2시 44분 북바위에 다다랐다. 처음으로 짐을 풀어 연양갱 하나를 먹으며 10분을 쉬었다. 아래 사진은 3시 29분에 민령에서 돌아본 북바위 모습이다. 한가운데 능선 안에 흰 북처럼 생긴 것이 그것이다. 35분 만에 이만한 거리를 이동했으니 길이 얼마나 편한지 반증이 된다. 뒤쪽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백운산, 가운데 뒤쪽 두 봉우리 가운데 오른쪽이 영취산, 오른쪽이 장안산, 그 앞 능선이 덕운봉 자락이다.
3시 54분 깃대봉(구시봉,1014m)에 이르렀다. 남덕유 아래 할미봉이 저렇게 생겼구나. 그 아래 육십령 들머리의 마을들, 저수지, 오른편 삿갓재, 무룡산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앞산자락은 월봉산(1279m)이다.
여하튼 계속 잰걸음 놀려 4시 50분쯤 육십령 주차장에 내려섰다. 깃대봉부터 한 시간 걸린다. 이 구간은 축지법이라도 쓴 듯 표지판에 적힌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이 구간은 언제 실측을 통해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 마법이라면 좋겠지만, 어디 그렇겠나. 7시간 걸린다는 거리를 5시간도 안 돼 주파했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닌 것이다.
지난달 21일 이용했던 택시 기사님을 다시 호출했다. 20분을 기다리며 팔각정도 둘러보고 사진도 찍었다. 기사님은 무척 반가워하셨다. 무룡계곡 주차장에 도착, 차를 끌고 장계면 소재지로 향했다.기사님은 지름길로 터널을 일러주셨다. 올 때 왔던 길인데 몰라봤다. 정말 10분 정도 단축된 것 같았다.
시장 입구 JS 모텔(옛 귀빈 모텔)에 묵었다. 기사님은 산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하이얏트 모텔은 시설이 낡았다며 이곳을 소개했다. 바로 옆에 양지가마솥식당의 순대수육이 먹을 만하다고 추천했다. 육십령 아래 펜션이나 민박에 묵을까 생각했는데 차가 있으니 여러 편의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면소재지가 낫다고 판단했다. 모텔은 아주 조용했다. 건설현장 등을 옮겨 다니는 분들이 묵는 곳인 듯 널찍한 마당에 나와 담배를 피우며 배낭 메고 움직이는 날 주시하는 눈치다. 얻어 걸리듯 대화를 엿듣게 됐는데 '현장이 없어' 그런 취지의 얘기가 들렸다.양지가마솥순대의 대창순대는 먹을 만했다.
숙소 돌아와 따듯한 물에 샤워하고 덕유산 삿갓재 예약을 하려는데 좀처럼 되지 않는다. 분명 월요일에 검색했을 때 되지 않는다.
채만식의 노벨라(중편) '냉동어'를 읽으며 밤을 보냈다. 11시 조금 넘어 잠을 청했는데 28일 새벽 2시쯤 깨어났다. 전날 산행하며 들었던 명명을 다시 듣고 불을 끄고 잠을 청해 한 시간 남짓 잘 수 있어 다행이었다.
6시 반쯤 삿갓재 예약이 안되길래 더욱 열띤 검색을 했더니 전날 오후 2시쯤에야 그날부터 덕유산이 (설천봉 케이블카만 남기고) 전면 통제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사님이 언뜻 말했는데 맞았다. 탐방시설 일부가 전도돼 그런 것이라 사전 예고도 없이 그렇게 득달같이 전면 통제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산은 깨어나는데 우리 국립공원관리공단은 무조건 문을 걸어잠근다. 산불도 자연이 스스로 되살아나는 과정의 하나인데 우리 공원은 너무 잠그는 데만 급급한다.
고민하다 날이 풀리면 하려 했던 광대치~중재 구간을 이번에 하기로 했다. 모텔 객실에서 물 끓여 컵라면 먹는 무람한 짓을 했다. 무료로 제공하는 캔음료 둘, 생수 하나를 비운 데다 컵라면 끓여 먹는 무람한 짓에 대한 보상으로 1만원을 두고 나왔다. 모텔 마당에서는 또 그들이 모여 일자리 걱정을 하고 있다. 햇살이 막 부챗살을 펼쳤다.
장계면을 나와 육십령과 뼈재(백운산 오르는 길이 있다) 지나 상당히 위험한 고갯길을 통과해 함양군 백전면 대안리로 왔다. 지난달 12일 광대치에서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오르는데 차를 마을회관 근처에 대놓고 기신기신 올랐다. 광대치 갈림길까지 무려 한 시간이 걸렸다. 지난번 내려올 때는 뛸듯이 달려 내려와 그렇게 오래 걸렸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오르는 길이란 점을 감안해도 무척 길었다. 사방댐 들머리에서 10분 만에 갈림길에 이르러 능선길을 따라 걷는다. 월경산 자락을 걷는다. 조붓한데 기대와 달리 조망감이 없다. 전날 찾았던 지지리 계곡 전경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한눈에 펼쳐진다. 이렇게 가까운데, 조금 더 모험심을 발휘했어야 했나 싶기도 했다.
광대치~중재 3.2km, 중재~중고개재 1.6km로 모두 4.8km, 왕복하면 9.6km다. 출발할 때만 해도 왕복하지 뭐, 했는데 걸을수록 아니다 싶었다. 차라리 다른 계절에 걷더라도 왕복할 일은 아니라고 봤다. 중기마을로 내려가 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중재 못 미처 약간 위험한 암릉을 만나긴 했지만 대체로 안온한 길이라 오전 8시 50분에 출발한 길을 11시 30분쯤 마쳤다. 중고개재는 755m라 훤히 보이는 백운산(1279m)가 굉장히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지난번 무진 고생했던 곳이다. 대체 저기를 어떻게 올랐을까 싶었다.
중고개재 내려오는 길은 구상나무가 가로수로 늘어서 있다. 기억을 되살리니 영각사 입구도 딱 이랬던 것 같다. 물론 정확치는 않다.
중고개재 내려온 길에서 올려다본 백운산 위용.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위쪽은 산죽능선이 눈으로 뒤덮이면 상당한 위험을 초래한다. 지난번 대안마을에서 탈출할 때 안면을 익혔던 기사님을 다시 호출했다. 중기마을에서 대안마을까지 2만 5000원을 말씀하신다. 산길로 4.8km 떨어진 곳인데 뺑 돌아가야 하니 거리가 상당하다.
기사님께 점심 먹을 곳으로 병곡면 복성각을 소개받았는데 불행히도 임시휴업이었다. 짬뽕 맛이 괜찮다고 했는데 아쉬움을 삼켰다. 함양터미널 옆 할머니국수집을 떠올렸다가 접었다. 아침에 컵라면을 먹어 두 끼 연속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속도로 함양휴게소에서 등심까스로 허기진 속을 채웠다.
이로써 덕유산 아래 모자란 부분을 다 채웠다. 하지만 국립공원들이 산불조심기간을 연장해 4월 20일까지 출입을 막아 3월은 국립공원이 아닌 곳, 뼈재~부항령 구간을 찾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