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일간 중미 여행기 15: 과테말라 "티칼과 플로레스"
2014년 11월 27일 오후 12시 30분 경 세묵 참페이를 출발하는 트럭을 타고 란킨 마을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지점 근처에 어제 우리 호텔의 지배인의 집이 있었다. 본래 그 집을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근처에 화장실이 없어서, 트럭기사에게 물었더니, 지배인 집으로 가라고 하여 얼떨결에 그 집을 찾아간 것이다. 지배인의 부인과 아이 두 명이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TV나 냉장고 등 문화 시설은 갖추어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삶이 풍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사람의 팔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 사람이 과테말라에 터를 잡고 여관업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끔가다가 고향 생각도 날 것이고,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날 것이다. 낯선 이국 땅, 모르는 사람 속에 섞여서 산다는 것이 어디 그리 만만한 삶이겠는가? 좀 그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
<세묵 참페이 호텔 책임자의 딸> <일행 중 한 사람이 가게에 가서 칼을 쓱 꺼내 자세히 바라본다. 이곳 사람들은 이런 칼을 차고 있기도 하고, 들판의 풀을 베는 데도 사용한다.>
1시 40분경 세묵 참페이를 출발했다. 오늘의 목표는 플로레스까지 가는 것이다. 플로레스로 가는 방법은 다시 꼬반으로 가서 플로레스로 가는 방법이 있으나, 온 길로 다시 돌아서 간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조금 멀고 힘들더라도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마땅히 배낭 여행자의 마음 자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스 기사 자신도 한번도 이 길로 플로레스에 가본 적이 없었다. 모두들 호기심이 충만해 있었다. 새로운 길로 몇 키로 가니, 마침 도로 공사 중이어서 차를 통과 시켜주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고, 과테말라가 너무 아름답고, 어쩌고 저쩌고 말하면서 통과시켜 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그는 책임자가 아니니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고 했다. 돌아온 길로 돌아가 책임자 집에 가서 허락을 받아 오라고 했다. 버스를 뒤로 몰아서 한참을 찾아가니 집 한 채가 있었는데, 동네 개가 짖어대며 으르렁거렸다. 책임자와 이야기를 하여 허락을 받고서야 비로소 통과할 수 있었다. 문제는 비포장 도로인데다 도로가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고 또 최근에 비가 많이 와서 길에는 자갈만 남아 있는 구간이 많았다. 따라서 시속 30키로 이상 속도를 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가다 보면 두 길이 나타난다. 그럴 경우 어떤 길로 가야할지 애매하여 차에서 내려 근처 사람에게 물어보고 가야했다. 모두들 한 마디씩했다. "오늘 플로레스까지 가기는 어차피 틀렸네." "그냥 아무 동네나 들어가서 닭이나 몇 마리 잡아서 회식이나 하지." "오늘 정말 우루루 어떤 오지로 몰려가 진정한 배낭여행의 오묘한 맛을 한번 봐볼까?" |
<플로레스로 가는 길 동영상 약 1분> <가다가 엉뚱한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 주민이 바라본다.>
그러나 버스의 속도는 느려지고, 시간은 걸리고, 우리가 가는 길이 맞는지 틀리는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고 그저 앞으로만 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스마트폰 애플인 Maps with me를 보아가며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라고 몇 번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한번은 잘 못 보아 절벽으로 내려가라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순간 운전수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는 두손으로 자동차의 핸들을 세계 내리쳤다. 가슴이 철렁한 나는 그 뒤부터는 끽소리 안 하고 운전수의 눈치만 살폈다. 운전수도 피곤하고 힘들고 지친 판이어서 이래저래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들 시무룩하여 그저 창만 내다보거나 졸거나, 운전수의 처분만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는 도리밖에 없었다. 나는 어렸을 때 불렀던 "가도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이 나그네길" 이라는 노래를 불러보기도 하고, "얼마나 멀고 먼지 그리운 서울은, 파도가 길을 막아 가고파도 못 갑니다" 라는 노래도 불러보면서 무료함을 달랬다. |
<소형 광각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사진>
중간에 잠시 쉰 후, 버스는 계속 달렸다. DSLR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촬영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평야가 가까워지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긴 칼을 차고 건들건들 걸어가는 사람, 비닐 도롱이를 입고 트럭을 타고 가는 사람이 보인다. 우리는 점심을 먹었지만 기사는 점심 먹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때가 오후 4시인데 기사는 그때까지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모두들 미안해 하면서 바나나와 계란 두 개를 주었더니, 와~, 운전수의 눈이 휘둥그래지며, 마치 코끼리 비스켓 통털어 입어 넣듯 몇초도 걸리자 않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비포장 도로 약 80키로를 통과하는 데 약 3시간이 걸렸으니, 채 시속 30키로가 안 되는 속도로 달려왔다. 5시 경에야 비로소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이미 해는 지기 시작했고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중간에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는 그날 일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판을 내야했다. 1)본래대로 밤 12시가 되더라도 플로레스까지 갈 것인가?, 2)우리도 힘들지만 운전수도 힘드니 일정에 없던 중간 도시에서 쉴 것인가? 우리는 산 루이스라는 도시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왜냐하면 밤 12시에 플로레스에 도착한다면 숙소를 잡기도 어렵고, 또 잡는다 해도 어차피 다음날 10시나 돼야 일어날 수 있을텐데, 그럴 바에는 중간에 자고, 일찍 출발해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밤 9시 반경 산 루이스에 있는 나쿤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
<우리가 묵은 산 루이스 호텔>
다음 날 11월 28일 아침 6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9시경에 플로레스에 도착하였다. 아침 식사를 끝낸 후 숙소를 정하고, 바로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인 티칼로 향했다. |
플로레스 시내에서 마야 유적지인 티칼까지는 약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티칼 공원에서 1인당 입장료 20,000원씩 내고, 가이드비도 1인당 5,000원씩 내고, 가이드를 태우고 17키로를 더 들어가야 드디어 티칼 유적이 나온다. 티칼 유적지에 들어가면 거기가 바로 정글이어서 마치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나의 위치를 알 수가 없다. 티칼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 정글 속에 있다는 것이다. 가이드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확한 지도를 반드시 가지고 다녀야 한다. 가이드를 따라 들어가면 사방에서 나는 새소리, 동물 울음 소리, 벌레 소리가 여기가 정말 열대 우림임을 말해주는 듯 하다. 특히 스파이더 멍키라고 불리우는 이 원숭이의 울음 소리는 여러 군데에서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울음 소리가 마치 까마귀 울음 소리와 비슷했다. 더구나 이 가이드까지 툭하면 원숭이 소리를 내는 바람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이 가이드의 조상이 스파이더 멍키(거미 원숭이)가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
<구글 지도에서 본 티칼> <구글 위성에서 본 티칼: 위에 있는 지도와 동일 장소> <현장에서 실제로 본 티칼> <나무가 없다는 가정 하의 티칼: 인터넷에서 인용>
총면적이 16㎢에 달하는 티칼에는 3,000여개의 석조 건물이 솟아 있다. 여기에는 궁전, 광장, 무덤, 제단 비석, 침실과 목욕탕 등이 있다고 하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피라미드, 제단 비석, 광장 뿐이다. 로운리 플래닛에 따르면, 6세기 중엽에는 면적이 30평방 키로였고 인구가 100,000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티칼의 핵심은 아무래도 제I, II신전과 광장, 그리고 아크로폴리스가 있는 지역이다(위 지도 참조). 신전은 가파르게 탑을 쌓아서, 걸어 올라가기 어렵게 만들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피라밋은 제 I 신전이다. 제 I 신전은 그랜드 재규어(Grand Jaguar: 대단한 호랑이)라고 불려지는데, 여기에서 재규어의 뼛조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피라미드를 잘 살펴보면 신전 I은 9층으로 되어 있고, 신전 II는 4층으로 되어 있다(아래 사진 참조). 9라는 숫자는 마야 세계에서 신성한 것으로 영원, 저승을 상징했다. 신전 1은 재규어 왕의 무덤 위에 그의 아들이 축성한 것이다. 이 무덤에는 180점의 보석과, 뼈로 만든 90점의 상형 문자, 그리고 진주와 가오리 뼈가 발견되었다고 로운리 플래닛은 전한다. 가오리뼈는 왜 발견되었는가? 그 당시에는 의식을 거행할 때 사람의 피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가오리 뼈로 상처를 내어 피를 뽑았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제 I 신전은 사람이 올라갈 수 없다. 왜? 적어도 두 사람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사망한 이후로 올라가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4세기 중엽 티칼 왕들은 멕시코 중부의 통치자들이 사용했던 잔인한 방법으로 전쟁을 했다. 맨손으로 싸워 적을 무찌르는 방법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적을 포위해서 공습으로 죽였다. 이 공습이라는 것은 적을 한군데로 몰아서 창을 던져 몰살시키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들은 이 지역에서 압도적위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운리 플래닛에 있는 내용이다. 창을 던져 죽인 후 그들의 심장을 꺼내 하늘의 신에게 성스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신전 II는 신전 I과 마주보고 있다. 설명에 의하면 4층 구조이고 각층의 네 모서리는 둔각이다. 따라서 긴장감이 덜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신전 I에 비해 여성스러워 보여 왕비의 무덤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한다. 보통 관광객들은 신전 II에 올라가, 그 앞에 펼쳐진 넓은 광장과 위압적인 신전 I ,그리고 아크로 폴리스를 본다. |
<가이드의 해설> <제 1신전> <제1 신전과 그 앞에 있는 광장: 제1 신전의 왼쪽 모서리를 보면 9층이다. 광장에 많은 비석이 있다.> <제 2신전: 왼쪽 모서리를 보면 4층으로 되어 있다. 뒤에 있는 계단을 통해 사람이 올라간다. > <아크로 폴리스에서 본 제2 신전> <제1신전과 제 2신전 사이의 광장> <중앙 광장> <중앙 광장> <광장에서 본 아크로 폴리스>
세계에서 가장 신비로운 수수께끼의 문명을 들라고 하면 거의 모든 고고학자들이 마야 문명을 말한다. 10세기경 티칼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쇠퇴하고 버려졌다. 이에 대해서는 왕과 신관의 횡포와 이에 대한 저항, 환경에의 부적응, 화전농법, 북쪽 아스테크 문명의 침입 등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뚜렷한 결론은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마야 문명 중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이 도시를 건설한 곳이 그야말로 인간이 살기에는 아주 부적합한 열대 우림 속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문명은 강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황하강,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인더스 강, 그리고 나일 강이 모두 문명의 중심였다. 그러나 마야인들은 왜 이런 척박한 밀림 속에 그토록 웅장한 건축 문화를 건설하였을까? 이들이 도시를 세운 열대 우림 지역은 평균 3m나 되는 풀이 무성해 있으며 마호가니를 비롯한 다양한 거목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낮에도 햇빛이 닿지 않는다. 정글에는 원숭이, 표범, 멧돼지, 독사, 독도마 뱀, 독거미 등이 우글거린다. 또한 축축한 습기와 더위로 전염병이 유행하기에 안성맞춤인 조건을 갖고 있다. 왜 하필 이런 땅에 마야 문명이 번성했을까? |
에이드리언 길버트가 쓴 "마야의 예언, 시간의 종말"이라는 책 서문에(p.4)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고대 마야인들은 BC 3114년 8월 13일부터 시작된 '재규어의 시대(약 5,000년)'가 2012년 12월 21일에 끝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것은 마야인들이 정확한 천문학적 사실에 바탕을 두었다. 종말의 다음 날인 2012년 12월 22일 동지에는 태양이 은하수의 중간 지점인 '스타게이트'와 일치하게 될 것이다. 석기 시대에 바퀴조차 사용하지 못했던 고대 마야인들이 수천년 후에 일어날 일들을 어떻게 예언할 수 있었을까?" 작가는 이어서 언급하고 있다. "마야인들이 살아보지도 않은 기원전 3100년을 어떻게 언급했을까? 해답은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때 영국에서는 스톤 헨지라는 유적이 세워졌다. 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 왕국이 세워졌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쐐기 문자가 발명되었고, 아메리카에서는 옥수수가 처음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2012년 12월 22일에 이 지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5천년을 한 주기로 생각했고, 그 주기가 끝나면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우리는 종말론자들이 주장하는 세상의 종말 날짜를 여러 번, 아무 일도 없이 지내왔다.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모두 가벼운 복장과 가벼운 신발을 신고 대기하면서 하룻밤을 보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뉴스도 본 적이 있다. 세상의 종말은 예언자의 말대로 오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법칙에 따라 오든지 말든지 하는 것이지, 신관이나 예언자의 말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
<티칼 입구에 있는 '생명의 나무(?)': 광각 비디오 카메라로 찍었다.> <플로레스 시에 있는 플로레스 섬>
플로레스라는 도시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 페텐 이싸이다. 이 호수에 아주 작은 섬이 있는데, 그 섬이 바로 플로레스 섬이다. 우리는 과테말라에서의 마지막 밤을,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바로 이 플로레스 섬에서 보내게 되었다. 과테말라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모두들 기분이 들떠 있는 듯 했다. 밤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저녁에 호숫가에 있는 한적한 야외 식당에서 검게 구워진 닭고기에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뭔지 모를 허전함에 고개를 떨구고 터덜터덜 숙소로 향했다. 아쉬움을 달래려고 호텔에 와서 또 맥주를 마셨다. 바로 옆에 투숙하고 있는 영국에서 온 남자가 합세하여 몇 사람이 함께 술을 마셨다. 그 영국인은 아내와 아이와 함께 세 명이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인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전날 있었던 세묵 참페이로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과테말라 여행이 끝나면 호주로 여행을 계속한다고 했다. 그들은 몇 년 일하고, 그 돈을 모아 또 얼마 동안 여행을 하면서 그 돈을 쓴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이런 생활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본래 삶이 그런거라고 말하고는 겸연쩍게 웃었다. |
우리는 어떤 것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그저 보이는대로, 주관적으로만 볼 뿐이다. 주관에는 개인의 경험이 녹아있다. 즉 지금까지 경험에 의해 세상과 내 주위를 판단할 뿐이다. 나의 경험은 나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고, 거기에 근거해서 세상을 살아간다. 인간이 직접 경험이건 간접 경험이건, 그 경험에 의해 형성되고 또 그래서 그것을 근거로 행동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또 그만큼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우선 죽느냐 사느냐를 근거로 세상을 판단하면서 진화해 왔다. 생사의 문제가 해결되면, 그 다음 편하냐 편하지 않느냐를 생각하고, 이런 삶이면 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도다"를 읊으면서, 그래 그것이 인간의 삶이다, 라고 생각도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소수는 편안함을 무시하고, 이에 도전하며 모험을 거는, 그래서 불편을 찾아 헤매는 삶을 살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한 영국인의 생각과 삶이 여기에 속할 지도 모른다. |
어떤 사람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인생이 너무 즐겁다. 또 어떤 사람은 콜라 한 병에 피자 한판이면 행복하다. 어떤 사람은 참 이슬 한 병만 있어도 세상을 다 얻은 것만큼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복해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삼시 세끼 밥먹고 TV만 보면 남부러울 것이 없다. 창문을 여니 검은 하늘에 호숫물만 철석거린다. 나에게는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즐거움인가? 시간만 나면 이렇게 어디를 돌아다녀야 행복인가? 영어를 잊을까봐 억지로 영어책을 읽고, 중국을 여행하기 위해 중국어를 배운답시고 혀가 꼬이는 발음으로 구시렁대야만 행복한 것인가? 아니, 그러면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인가? 행복이 인생의 목표이고 목적인가?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목적인가? 마치 입에서 내뿜는 한 가닥 담배 연기처럼,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멀리 멀리 호수 위로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었다.
* 이 글 중 "티칼의 역사"에 관한 부분은 "로운리 플래닛" "마야의 예언" 그리고 몇몇 "인터넷 문서"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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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 산 루이트 호텔: 2인 1실 25,000원 11월 27일: 버스 렌트비: 1인당 약 20,000원 11월 28일: 숙박비: 2인 1실 25,000원(이 부분 불분명) 11월 28일: 버스 렌트비: 1인당 약 20,000원 =============================== (2015년 2월 14일 작성) |
첫댓글 티칼유적지을 보면서 몇년전에 다녀온 캄보디아의 앙코르왓트을 생각 했습니다.... 두 유적지가 많이 닮은것 같아요... 잘보고 갑니다.
정글 속에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겠죠.
마지막 문구가 여운이 남네요? 저도 여전히 고민입니다.^^
본래 인생이 그러한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민하지 마시길.
길을 찾지 못해 헤메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ㅎ
다시금 그때의 사진과 글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잘 읽고 갑니다^^
지내놓고 보면 모두 대단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아쉽기도 합니다. 삶과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귀하의 고견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내가 살아온 경험과 보고 들은 지식으로 만물을 평가하고 사람을 평가하고 세상을 비판하려하니
마찰이 생기는 것이겠지요. 여행하시면서 많은 어려움도 있으셨을텐데 이렇게 좋은 글과 사진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