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杜甫)나 이백(李白)처럼
백석
오늘은 정월(正月) 보름이다
대보름 명절인데
나는 멀리 고향을 나서 남의 나라 쓸쓸한 객고에 있는 신세로다
옛날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은 이 나라의 시인(詩人)도
먼 타관에 나서 이 날을 맞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고향의 내 집에 있는다면
새 옷을 입고 새 신도 신고 떡과 고기도 억병 먹고
일가친척들과 서로 모여 즐거이 웃음으로 지날 것이언만
나는 오늘 이 때 묻은 입던 옷에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혼자 외로이 앉아 이것저것 쓸쓸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옛날 그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같은 이 나라의 시인(詩人)도
이날 이렇게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외로이 쓸쓸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어느 먼 외진 거리에 한 고향 사람의 조고하한 가엽 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집에 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도 한 그릇 사 먹으리라 한다.
우리네 조상들이 먼먼 옛날로부터 대대로 이 날엔 으레이 그러하며 오듯이
먼 타관에 난 그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같은 이 나라의 시인(詩人)도
이 날은 그 어느 한 고향 사람의 주막이나 반관(飯館)을 찾아가서
그 조상들이 대대로 하던 본대로 원소(元宵)라는 떡을 입에 대며
스스로 마음을 느꾸어 위안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러면서 이 마음이 맑은 옛 시인(詩人)들은
먼 훗날 그들의 먼 훗자손들도
그들의 본을 따서 이 날에는 원소(元宵)를 먹을 것을
외로이 타관에 나서도 이 원소(元宵)를 먹을 것을 생각하며
그들이 으득하니 슬펐을 듯이
나도 떡국을 놓고 아득하니 슬플 것이로다
아, 이 정월(正月) 대보름 명절인데
거리에는 오독가 탕탕 터지고 호궁(胡弓) 소리 뻘뻘 높아서
내 쓸쓸한 마음엔 자꾸 이 나라의 옛 시인(詩人)들이 그들의 쓸쓸한 마음들이 생각난다.
내 쓸쓸한 마음은 아마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같은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를 것이다.
나무려나 이것은 옛투의 쓸쓸한 마음이다.
(『인문평론』 16호. 1941. 4)
[어휘풀이]
-가업 : 대대로 물려받은 집안의 생업. 여기에서는 장사하는 집
-반관 : 식당
-원소 : 중국에서 음력 정월 보름을 이르는 말. 원석(元夕). 여기서는 이 날 먹는 음식의
이름으로 쓰였음
-느꾸어 : 느껴워. 어떤 마음이 사무치게 일어나서
-오독도기 : 불꽅놀이에 쓰는 딱총의 하나.
-호궁 : 동양 현악기의 하나. 바이올린과 비슷한 악기로 네 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말총으로 맨 활로 탄다.
[작품해설]
이 시는 「국수」 · 「흰 바람벽이 있어」 등과 같이 북방 정서가 잘 나타나 있는 백석의 후기 시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시는 외로움과 상실감의 정도에서 보자면 「국수」와 「흰 바람벽이 있어」의 중간에 속하는 시적 자아의 감상(感傷)이 적절히 절제되어 있으면서 고향 의식까지 담고 있는 백석 시의 한 전형을 보여 준다.
시적 화자는 ‘멀리 고샹을 떠나 남의 나라’에서 정월 보름날 아침을 맞고 있다. 만약 자신이 고향에 있었다면 ‘새 옷을 입고 새 신도 신고 떡과 고기도 억병 먹고 / 일가친척들과 서로모여 즐거이’ 지내겠지만, 이 날은 ‘때 묻은 입던 옷에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대보름 명절을 맞는다. 객지 생활에서 가장 외롭고 적막할 때가 몸이 아풀 때나 홀로 명절 맞이할 때임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 법이어서 이 시의 화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화자는 ‘혼자 외로이 앉아 이것저것 쓸쓸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 생각은 멀리 중국 당나라의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에 까지 미친다. 당나라의 어지러운 정국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방황했던 두보와 이백 역시 자신처럼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외로이 쓸쓸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 역시 명절이면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명절을 즐기던 때를 그리워했을 것이라고 화자는 생각한다. 화자는 ‘어느 먼 외진 거리에 한 고향 사람의 조고마한 가업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 이 집에 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도 한 그릇 사먹으리라’고 생각한다. 화자는 두보와 이백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 고향 사람의 주막이나 반관을 찾아가서 / 그 조상들이 대대로 하던 본대로 원소라는 떡을’ 먹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찾는다. 그러나 아마도 두보나 이백은 ‘먼 훗날 그들의 먼 훗자손들도 / 그들의 본을 따서 이 날에는 원소를 먹’을 것을 생각하면서 슬퍼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화자도, 언젠가 자신의 후손들이 자신이 했던 것처럼 낯선 이국땅에서 떡국을 사 먹을 것을 생각하니 ‘아득하니 슬’픔을 느낀다. 이러한 화자의 슬픔은 ‘오독도기 탕탕 터지고 호궁소리 뻘뻘 높’은 이국의 흥청거리는 고독과 상실감을 비교적 냉정하게 형상화한다. 그러면서도 화자가 감상(感傷)에만 빠지지 않는 것은 화자 스스로 자신을 두보와 이백과 동일화시키면서 그러한 상실감을 시인의 자연스러운 정서탓으로 애써 객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 화자의 태도를 통하여 백석의 시인으로서의 애처로운 자긍심을 엿볼 수 있는 것 또한 이 시가 주는 감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소개]
백석(白石)
본명 : 백기행(白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29년 오산보고 졸업, 동경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영문학 공부
1934년 귀국 후 조선일보사 입사
1935년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등단.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
1942년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
1945년 해방 후 북한에서 문학 활동
1995년 사망
시집 : 『사슴』(1936), 『백석시전집』(1987), 『가즈랑집 할머니』(1988),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멧새소리』(1991), 『내가 생각하는 것은』(199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97), 『집게네 네 형제』(1997), 『백석전집』(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