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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資治通鑑)
11세기 중국 북송대의 정치가 사마광이 주체가 되어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 1065년부터 1084년까지 약 20년간 작업하였다.
'자치통감'이라는 제목은 '다스리는(治) 도리에 자료(資)가 되고 역대를 통하여(通) 거울(鑑)이 된다.'는 뜻이다. 원 제목은 통지(通志)였으나, 송영종이 사마광을 치하하며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2. 구성
총 294권, 우리 나라에서는 중앙대 명예교수 권중달 교수가 완역하고 주석을 단 역주본이 있는데 총 32권이나 된다. 역주본에 대해서는 아래 해당 항목 참조.
각 나라마다 분량 배분은 다음과 같이 하였다.
• 주기(周紀) 5권
• 진기(秦紀) 3권
• 한기(漢紀) 60권
• 위기(魏紀) 10권
• 진기(晉紀) 40권
• 송기(宋紀) 16권
• 제기(齊紀) 10권
• 양기(梁紀) 22권
• 진기(陳紀) 10권
• 수기(隋紀) 8권
• 당기(唐紀) 81권
• 후량기(後梁紀) 6권
• 후당기(後唐紀) 8권
• 후진기(後晉紀) 6권
• 후한기(後漢紀) 4권
• 후주기(後周紀) 5권
• 부록(附錄) 1권 : 신주자치통감서(新註資治通鑑序), 송신종자치통감서(宋神宗資治通鑑序), 진서표(進書表), 장유조서(獎諭詔書), 교감인성명(校勘人姓名)
400여년 통일 왕조를 이어간 한나라와 300년 통일 왕조를 이룩한 당나라의 분량이 가장 많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당나라가 한나라보다 더 적은 세월동안 통치했음에도 당나라 시기를 설명하는데 많은 비중을 투자함을 알 수 있다. 한당 두 왕조 7백여 년간을 서술한 분량은 총 141권으로 자치통감의 절반쯤 된다.
3. 편찬 배경
사마광 개인이 모두 편찬한 것은 아니다. 시대별로 나눠서 다른 학자들이 편찬하기도 했고, 북송의 영종도 편찬국까지 설립해 지원해주는 등 정부의 도움도 받았다. 기본적으로는 사마광이 지어 올렸던 통지 8권을 기초로 하여 구오대사를 따라서 춘추의 규범을 모방하였으며 춘추좌씨전의 서법을 따라서 완성했다. 많은 역사가들이 전문 분야를 맡아서 정리했다는 부분은 사서 편찬에 있어서 선구적인 방식으로서 한나라 파트는 유반, 삼국 시대 - 남북조 시대는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 유서가 맡고 당나라 파트는 사마광의 제자 범조우가 맡았다. 고군분투하여 사기를 저술했던 사마천보다는 훨씬 쾌적한 환경에서 저술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사마광 본인이 "내 정력을 이 책에 다 쏟았다." 할 정도로 내용에 열과 성의를 들였다. 자치통감은 삼국사기와 사기의 중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명역사서로 손꼽기에 손색이 없으며, 중국사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사기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필수자료이다.
영종이 그간 정리되었던 역사서들의 부족함에 아쉬움을 느껴 사마광에게 편찬을 명해, 1065년 통지 8권을 저술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1084년까지 19년에 걸쳐 전국시대(중국)의 시작인 주나라(周) 위열왕 23년(기원전 403년)에서 시작하여 송이 건국되기 바로 전에 존재했던 후주의 세종 6년(959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362년에 걸친 역사를 294권 분량의 편년체로 기록했다. 대개 동양 역사책 중 기전체의 대표는 사기, 편년체의 대표는 자치통감으로 통한다.
송 영종이 사마광에게 사서를 편찬하라고 명한 데에는 당시 지나치게 격화되어 있던 구법파와 신법파의 갈등을 완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구법파라고 보수적이고 꽉 막혔다고 볼 수 없고 신법파라고 검증된 확실한 방법을 내세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갈등이 격화되었다. 송 영종은 어느 한쪽을 완전히 척살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일단 구법파의 필두인 사마광에게 사서를 편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파의 신료들을 귀양 보내거나 사형에 처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정계에서 영예롭게 물러날 수 있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신법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다고 사서 편찬이 꼭 구법파에게 불리한 것만도 아니었다. 구법파가 사서를 통해 과거의 가치와 방법을 고수하자는 주장을 피력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자치통감은 전체적으로 과거의 가치ㆍ윤리ㆍ도덕ㆍ사회제도를 옹호하는 관점을 취하였다. 자치통감 편찬은 송 영종의 절묘한 정치적 타협안이었던 샘이다.
4. 특징
주요 사건들에 대해 '신광왈(臣光曰, 신 사마광은 말한다)'이라 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탈고한 후에도 스스로 '이건 따로 고증이 필요하겠는걸' 이라고 생각해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사료 고증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통감고이(通鑑考異) 30권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자치통감연표 30권도 존재하고 사마광 본인이 본편의 목록과 범례를 정리한 통감목록(通鑑目錄) 30권이나 통감석례(通鑑釋例) 1권도 있다. 계고록(稽古錄) 20권은 본편에서 사마광 본인이 '이 부분은 좀 부족하지?' 싶은 내용을 보충한 것이다.
삼국시대의 위를 정통으로 보지 않은 역사서라는 점에서 삼국지(삼국시대)를 다룬 사료에서는 특기할 만하다. 단지 연도를 세는 기준으로 위진의 연호를 채용했지만, 위만 정통으로 내세우고 촉와 오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위의 연호를 사용한 데서 알 수 있듯, 어느 정도 위 쪽에 기울어지긴 했지만... 사마광은 사마부의 자손이므로 완전히 공정할 수는 없었다. 사마광의 입장은 '무통설(無統說)'로 위 정통론과 촉한정통론의 대립을 어느 정도 일단락시켰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정사 삼국지 번역이 김원중역이 하도 안좋은지라. 그러나 이 책이 위 정통론을 주장한다고 착각하는 위빠 이들과, 이 책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떡밥론자들 때문에 퇴색된 감도 있다. 참고로 대략적으로 삼국지의 시대로 잡는 황건적의 난부터 삼국통일까지의 기간을 다루는 부분은 한기(漢紀) 부분인 58권 초반부터 진기(晉紀) 부분인 81권 초반까지 대략 23권쯤 되는 분량이다.
사마광은 본인부터가 이미 조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정치가였고 따라서 '자치통감'은 사마광 시대까지의 역사서를 단순 요약한 것이 아니라 옛 사료들을 정치적 이성으로 재해석하여 새롭게 편집한 역사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상산사호(商山四皓)'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는 장량이 유방이 얻지 못한 은거 선비들인 상산사호를 얻으면 태자의 위치가 확고해진다며 여후에게 권했고 유방이 그들이 태자를 따르는 것을 보고 태자를 바꾸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사마광은 유방이 폐태자하려다가 뜻을 바꾼 일에 대해 전설 같은 '상산사호' 이야기를 사료로 채택하지 않는다. 대신 성질이 사나운 유방이 은거 선비들 몇몇이 말린다고 뜻을 꺾었을 리 없으며, 당시 장량을 비롯한 조정의 세력 있는 대신들이 태자 편이었기 때문에 태자를 바꾸지 않았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 증명했다. 사마천의 사기가 '문학가가 지은 역사서'라면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정치가가 지은 역사서'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통해, 천하는 모두의 것이고(天下爲公)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以人爲本)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백성이 고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라는 맹자의 민귀군경(民貴君輕)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천하위공의 자세는 "대저 관직은 폐하의 관직이 아니라 천하의 관직입니다"란 말이 그 실체를 잘 말해준다. 이는 관직이란 현명하고 유능한 적임자에게 수여하여 사회와 국가를 함께 다스리는 공공 도구이지 위정자나 통치자가 사사롭게 총애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또 사마광은 역사의 여러 사례를 통해 문화와 교육을 통해 개인의 품성으로 내면화한 명분과 도의의 덕성은 부단한 수신 과정에서 일상 속의 자기절제력으로 승화되고, 더 나아가 매우 현실적인 검약과 겸양의 가풍으로 확장되며, 궁극적으로는 명분과 대의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 기풍으로 보편화하는 것을 역사를 통해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 기풍은 법이나 규제로 지탱되는 강제적 질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인 실천과 참여로 유지되는 느슨한 구속력이다. 하지만 이 느슨한 구속력은 명예와 염치와 도의를 중시하는 사회 전체 분위기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어떤 강제적 구속력보다 더 끈질기고 지속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사마광은 이처럼 기본적으로 '정치가'답게 중국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과거의 사례들을 돌이켜보면서 사료들을 엄밀히 선별하고 검증하여 자치통감이 명저가 되게 하였다.
이후의 역사서 편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자치통감 이후 자치통감을 전례를 따른 역사서가 많이 나왔지만, 자치통감 이상의 역사서는 나오지 않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 학자들은 물론 공부를 좋아하는 군왕들의 No.1 필독서이자 애독서였다. 주석 가운데는 송말 원초의 문인 호삼성의 주석인 이른바 '호주'가 가장 유명한데 본편의 기사를 보정하고 새로운 사료를 덧붙이는 등 훌륭한 주석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호삼성 본인의 평론은 다분히 흥망에 대한 감개가 많이 담겨 있다는 평가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중국으로 사신들이 떠날 때면 임금님들이 꼭 통감 한 질 챙겨오라고 당부하거나, 명나라 황제들이 조공의 답례품으로 쏘는 기사도 자주 보인다.
특히 세종대왕은 명실공히 통감 덕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애독하여 경연에서 자치통감을 강하게 했고 스스로 해설서를 붙여 간행하기도 했으나, 이 책의 분량이 분량인만큼 세종 대왕의 시력이 악화되는 원인이 되는 데도 일조했다. 집현전의 인재들을 총동원해 펴낸 이 주석서가 바로 '자치통감훈의'로, 이것을 간행하기 위해서 세종대왕은 전국을 수소문해 호삼성이 음주를 단 자치통감 일부를 간신히 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걸 바친 사람은 훗날 그 덕분에 연좌제에서 벗어나기도 했다.세종 17년 3월 5일
5. 편집본
5.1. 통감강목
과거에도 분량이 엄청난게 사실이라서 보통 주자가 정리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총 59권)이 더욱 퍼졌다. 약어로는 "강목." 야사에서 홍국영이 정조를 구하기 위해 영조의 아킬레스건인 책을 잘랐다니, 가렸다니 하는 책이 이 책. 편년체인 통감과는 달리 《춘추》의 체재에 따라 사실에 대해 큰 제목인 강(綱)을 따로 세우고, 사실의 목(目)으로 구별하여 강목체로 작성되었다. 지금 보기엔 강목도 분량이 엄청나고, 잘라먹은 부분도 꽤 되지만 원본을 읽은 사람들의 평으론 꽤나 성공적인 편집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처음 나온 남송 무렵엔 첨삭된 부분이 많다고 비판도 많았던 모양으로 이후 남송 말기부터 점점 중요시 되어 명나라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중요시 여겨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당대의 사마광조차도 자치통감 294권은 양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여 80여권 정도로 더 축약하려고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주자가 60권 이내로 자치통감을 축약했으니 주자가 사마광이 본래하고자 했던 일을 대신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주자 역시도 생전에 이 책의 완성을 보지 못했고, 그 문인 조사연(趙師淵)이 번천서원(樊川書院)에서 이어 편찬을 완료하였다고 한다. 이거 때문에 장태렴(章太炎)같은 사람은 " ≪강목≫은 ≪자치통감≫을 모본으로 하는데, 회암(晦庵, 주자)이 몸소 지은 것이 아니고 그 제자 조사연이 지은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춘추≫를 지으실 적에는 그 적을 것은 적으시고 뺄 것은 빼버리심에 자유(子游), 자하(子夏)의 무리가 감히 한 마디 보탤 수가 없었다. 회암은 곧 제자가 지은 것에 이름만 의탁한 셈이다."라고 까기까지 했다. 어쨌든 분량에 압도된 사람들은 이거라도 시도해보자. 다만 주자가 강목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춘추필법을 통해 오리지널 통감의 무 정통론을 까면서 촉한 정통론을 내세웠고, 결과적으로 주자학이 대세를 이룬 조선에서도 강목을 많이 접하면서 촉한에 동정적인 여론이 널리 퍼지는 결과가 나왔다.
이 역시 세종 대왕의 애독서로 세종은 강목에도 훈의를 달아 ≪자치통감강목훈의≫를 간행했다. 한편 청나라 시기 강희제는 강목에 대해서 비판했고 강희 46년(1707), 송락(宋犖) 등에게 명하여 사료를 거듭 새로 모아 편집한 것을 교각하여 ≪어비통감강목전서(御批通鑑綱目全書)≫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이는 총 190권이다. 기껏 축약했더니 다시 내용을 늘리시는 천고일제. 그만큼 강희제의 학문 수준과 통감에 대한 관심 수준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
5.2. 통감절요
한국에서는 고려 원 지배기 때 유입된 ≪소미가숙통감절요(小微家熟通鑑節要)≫, 약칭≪통감절요(通鑑節要)≫'가 조선 말기까지 더 많이 읽혔다. 이 책은 송나라 휘종 때 사람인 강지(江贄)가 집안 애들 전용 교재로 편집한 버전이었는데 편찬 자체는 주희의 통감강목보다 이전에 편찬되었지만 출간은 더 늦은 1237년에 간행되었다. 하지만 이 책이 간행되었을 때는 이미 강목이 퍼진 뒤라 중국에서는 인지도가 형편없었고 이후 명, 청대에 가면 이미 이 책에 대해 아는 사람은 멸종되어 자치통감의 다른 축약본들은 알아도 이 책은 이런 책이 있는지 존재조차 모르게 된다. 그에 비해 유독 조선에서는 통감과 강목을 처박아두고 이것만 읽는 선비들이 많아서 통감이라고 하면 자치통감 원본이나 통감강목보다 이 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학자 이덕무와 정약용은 원전을 놔두고 축약본에 매달리는 이런 세태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다만 조선 후기에 자치통감 원본보다 통감절요가 더 널리 읽히게 되는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재정 문제다. 양란 이후 조선의 문물이 초토화되면서 그 방대한 분량의 원전 자치통감과 강목을 인쇄할 만한 재정이 뒷받침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강목을 인쇄하는 데 소요된 종이의 양만 해도 959첩이라는 기사가 있는데, 16세기 기준 종이 한 첩이 20장이었으니 강목 한 질을 완간하는 데만 거의 2천 장이 소요된 셈이다. 물론 간행 과정에서 버려지는 양은 제외한 것. 편집본인 강목도 이 정도인데 전 294권이나 되는 원전 통감을 인쇄하는 데 드는 물자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또 하나 통감절요가 널리 읽힌 이유로는 서당이나 가숙에서 아동이 한문의 문리를 터득하는 기초 교과서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조선 시대 판 성문종합영어인 셈이다. 더구나 이런 경우 완질을 다 읽지 않고 제 7권 '양태부가의상소(梁太傅賈誼上疏)'까지만 읽히고 이때 문리가 트이면 재능이 있다고 여겨 다른 책으로 들어가고 여기까지 배우고도 문리가 트이지 못하면 가난한 집안 아이의 경우 공부에 재능이 없다고 여겨 공부를 중단했다. 그리고 문리가 트여도 통감절요를 더 읽지 않고 다른 경서로 넘어갔다. 어차피 축약이 심해 제대로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더 읽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6. 한국어 완역본
워낙 분량이 어마어마하기에 전권을 읽기 어려웠으나 중앙대학교 명예 교수 권중달 교수가 무려 14년에 걸쳐 완역하여 출판했다. 출판사가 힘들어져서 관둔 적도 있었으나 자치통감을 완역 출간하겠다는 열정이 엄청나, 끝내 자신의 사재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 후 받은 퇴직금을 털어 자치통감 하나만 출판하기 위한 출판사를 스스로 설립하고 2009년에 완간. 총 32권으로 삼화 출판사에서 출판 중이다. 총 32권의 정가가 90만 원에 육박하는 가격의 압박이 있으나 수십 년 노력과 집념이 깃든 완역본이라 그런지 권중달 교수 찬양글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북(eBook)으로도 나왔다. 총 295권. 종이책 한 권을 10권으로 나눈 듯. 가격은 리디북스 세트가 58만 원. 단권을 다사면 82만 원. 전자책이 출간되면서 일부 전자 도서관에서 대여해 볼 수 있으며, 앞으로 지원되는 도서관의 수를 늘려나갈 것이라고 한다. 지원된다면 이용해 보자.
참고로 자치통감 완역은 번역계의 선두주자인 일본도 아직 못 이뤄낸 일이라고 한다. 다만 통감 원문만을 완역했다는 것이지, 호삼성이나 세종대왕이 달아놓은 주석까지 번역한 것은 아니라서 약간은 아쉬움이 남는 편. 그래도 원문만으로도 분량이 만만치 않은데 이를 홀로 완역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호삼성 주석은 권중달 교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분에만 조금씩 달려있다.
사기는 완독한 사람들이 꽤 있는 편이지만, 자치통감은 식자층 중에서도 완독한 사람이 많지 않은 편이다. 분량도 사기보다 훨씬 방대하고 사기보다 번역 작업 및 대중화가 덜 된 측면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 10월에는 권중달 교수가 2009년 완간본을 보완한 '평설 자치통감'을 새로 출간하고 있다. 원문과 번역을 나란히 실어 바로 원문대조가 가능하도록 하고, 역사 지도와 권 교수의 평설을 함께 실었다고 한다. 현재 8권(진 시대)까지 출간 중. 평설자치통감의 경우 1권이 원본 1권과 같은 내용. 다 출간하려면 294권이 나와야 한다. ㅎㄷㄷ
여담으로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은 둘 다 성이 똑같고, 번역자인 권중달 교수의 이름인 중달은 사마광의 선조인 그 분의 자. 친척 같아보이지만 완전한 남남. 사마씨야 조상 하나에서 갈라지기는 하지만 사마천은 사마씨 시조의 첫째 아들 계통이고 사마광은 차남 계통이다. 하지만, 사마광은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부의 자손이라, 위진 쪽에 공정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자치통감의 요약본인 통감절요와 강목 역시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 중이다. 통감절요는 3가지 완역본이 존재하는데, 2015년 충북대 김정화 교수가 번역한 충북대 출판부 판본과 2006년 ~ 2010년 한학자인 성백효 선생이 번역한 전통 문화 연구회 판본, 1987년 고려대 철학과 김충렬 교수가 다른 다섯 명과 함께 공역한 삼성 출판사 판본이 있다. 김정화 판은 총 4권, 성백효 판은 총 9권, 김충렬 판은 총 3권이다.
통감강목은 2015년부터 전통 문화 연구회를 통해 '사정전훈희 자치통감강목'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고 있는데, 2016년 5월 15일 현재 5권까지 출판되었다. 1권, 2권은 성균관대 신승운 교수가 책임 번역자로 참여하였고, 3권 ~ 5권까지는 한학자 성백효 선생이 책임 번역으로 참여하였다. 참고로 사정전은 경복궁의 편전으로 바로 세종대왕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주석이 달린 강목의 국역본이라는 뜻.
7. 기타
마오쩌둥이 무려 17번이나 완독했다고 한다. 특히 자세한 뜻을 알기 위해서 고대어 사전을 여러 권 놓고 꼼꼼히 읽었다고.
중국의 한 다큐에선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충칭 회담을 진행 중 우연히 아침에 후원에 나와 책을 읽고 있던 장면을 보여주었다는데 서로를 발견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둘 다 들고서 읽고 있던 책을 내려 놓은 것을 클로즈업하니 그 책이 바로 똑같이 자치통감이더라는 의미심장한 연출을 보여 줬다고 한다. 자치통감이 동아시아 통치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책인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연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려 시대에는 이 책을 자리통감(資理通鑑)이라고 썼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고려의 제6대 임금인 성종의 휘가 치(治)였기 때문에 피휘를 했기 때문. 이는 삼국사기에서 중국의 기록을 인용한 부분의 원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말엽 급진 개화파의 리더로 유명한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암살 당하기 직전에 읽었던 책도 바로 이것. 김옥균은 방에서 자치통감을 읽고 있다가 홍종우에게 총탄 3발을 맞고 절명했다.
<속자치통감>이란 것도 있다. 송나라 때부터 원나라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2018년 2월부터 권중달 교수가 번역본을 출판한다고 한다.
우병우가 옥중에서 읽고 있다고 한다. 2018년 3월 20일 기준으로 한 번 완독하고 이제 2독(讀)째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