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장일기] 여기가(家), 탈시설!
2023년 5월 2일 336일 차 혜화역 선전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들은 2021년 12월 6일부터 혜화역 승강장 5-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면)에서 장애인권리예산·입법 쟁취를 위한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장연은 지난해 47차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하고, 141일 동안(3월 30일~12월 1일) 177명의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장애인권리예산은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국회에서는 고작 1.1%만 증액됐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 증액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은 올해 1월 2일, 48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교통공사·서울시의 ‘무정차’ 대응으로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장애인 권리를 무정차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전장연은 매일 아침 8시, 혜화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에게 권리예산과 입법을 알리는 선전전을 합니다. 비마이너는 꾸준한 매일의 투쟁을 꾸준하게 기록하고자 합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어제와 오늘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이규식의 휠체어. “장애인권리예산,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히 보장하라”는 스티커가 여기저기 찢기고 헤진 채 붙어있다. 사진 양유진
8시, 선전전 준비물이 담긴 수레가 도착한다.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서울장차연) 대표는 사람들이 있는 위치를 조정한다. 와중에 피켓이 “와그작” 하며 소리를 낸다.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다. 피켓이 부서졌을 뿐, 괜찮다.
연윤실 전장연 활동가, 5월부터 안식월에 들어가는 정다운 전장연 활동가, 임지영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활동가, 그리고 임지영과 함께 온 백승희 씨는 혜화역 종합안내도 근처에 모여 있다. 박미주 서울장차연 활동가는 앰프 옆에 서 있고, 조아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는 혜화역 승강장 이름이 크게 붙어있는 곳 근처에 있다. 그 사이에는 이수미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노들센터) 권익옹호활동가, 박지호 노들센터 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 노동자, 유진우 노들센터 활동가가 있다. 민아영 영상활동가는 영상을 찍고 있다.
조아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양유진
8시 5분, 이규식은 오늘이 중요한 날이라며, 조아라를 부른다. 조아라는 멋쩍은 웃음을 띠지만, 오늘은 매우 중요한 날이 맞다는 듯 앞으로 나온다. 그리고 말한다. “향유의 집이 언제 없어졌을까요? 2021년 4월 30일에 폐지되고, 그 건물을 허물고 시설 수용의 역사를 뒤로하고, 오늘은 그 자리에 새롭게 지원주택이 지어지는, 지어지겠다고, 아니 짓겠다고 선언하는 착공식 날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복지법인이 자발적으로 탈시설을 지향하면서 거주인들에 대한 탈시설 지원을 마친 후에 문을 닫은 최초의 사례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산하의 시설 향유의집 자리에 새롭게 만들어질 ‘장애인 자립지원 테마형 매입임대주택 여기가(家)’ 착공식이 있는 날이다. 시설을 허물고 ‘중증장애인이 살기 좋은 주택, 아이를 양육하기 좋은 주택, 따로 또 같이 함께 사는 주택’을 짓는다. 탈시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오늘 이곳에 찾아올 예정이라고 한다. 조아라는 보도자료의 일부를 읽은 후, 자리로 들어간다. 어느새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과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혜화역 승강장에 함께 있다.
8시 12분,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는지 이규식이 묻고, 연윤실은 답한다. “지금은 엘리베이터 없는 지하철 상상하기 어렵잖아요? 20년 안에 2만 8천 명이 지역사회로 나올 수 있다면, 그 변화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간다면….” 이형숙이 긴급히 외친다. “그때 되면 다 돌아가셔요. 그럼~” 연윤실은 ‘20년’을 ‘10년’으로 바꾸며, “지금 평균 나이가 50대, 평균 거주기간이 20년을 육박하고…. 큰일 났네. 그럼 지하철 선로를 막는 것처럼 거주시설 정문을 막는 싸움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요? 큰일 났네”라고 걱정한다. 걱정하는 것 치고는 유쾌한 표정과 목소리다. 이규식의 “탈시설이 뭐라고 생각해요?”라는 질문에 연윤실은 난감해하면서도 “시설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게 아니라 이동하고 교육하고 노동하면서 지역사회에서 함께 사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답한다.
‘탈시설 장애인’ 이수미 권익옹호활동가가 “시설 수용은 선택이 아니라 차별이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양유진
8시 21분, ‘탈시설 장애인’ 이수미가 말한다. “삶을 돌아보니,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어요. 그래서 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목소리가 떨린다. 잠시 쉬었다 이어간다. “지역사회에 살 수 있는 지원체계에 대해 정보를 알려줬으면 (시설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에요. 지역사회에 사는 것보다 시설에 사는 게 몇 배나 더 힘들어요. (피켓에) ‘시설 수용은 선택이 아니라 차별’이라고 되어있네요. 맞습니다. 지원체계가 안 되어있는데, 준비가 안 되어있는데 어떻게 혼자 살 수 있습니까? 시설에 ‘할 수 없이’ 들어가게 되는 거죠. 그게 차별이 아니라 뭡니까? 또 다른 시설에 있는 중증장애인들도 지역사회에서 함께 사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8시 29분, 이규식이 이번엔 ‘재가 장애인’을 찾는다. 유진우가 앞으로 나온다. 이규식이 묻는다. “재가 장애인이 어떻게 잘 배웠나?” 유진우가 답한다. “잘 배웠다고 하는데, 잘 배웠다기보다는 부모님이 어떻게든 배우게 한 것 같아요. 저는 학원도 가기 싫었고, 대학교도 가기 싫었어요. 부모님이 가라고 해서 간 것 같아요. 근데 사실 집에 살 때도 선택권이 없었거든요. 제가 뭐를 하고 싶다고 하면 ‘안 돼, 하지 마’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사회에 나와도 다른 사람과 비교되고, 위축되기도 하고. 장애인이 눈치가 빠르다고 하는데, 비장애인 중심 구조에서 장애인이 눈치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에요.”
이규식 대표와 유진우 활동가가 서로 바라본 채 웃고 있다. 사진 양유진
8시 31분, 이규식이 찾는 다음 존재는 ‘재가 비장애인’. 민푸름이 앞으로 나왔다. “(여기가家) 착공식 이야기를 듣고 조선총독부가 생각났어요. 경복궁 복원하면서 조선총독부를 폭파 할 거냐 말 거냐 하는 이야기가 있었잖아요. 일제강점기 과거를 청산하자는 이유로 폭파해야 한다고 했죠. 이 이야기가 왜 갑자기 생각이 났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시설은 물 좋고 공기 좋은 산속에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향유의집도 산 좋고 물 좋은, (도심에서) 떨어진 지역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시설이 폭파된 자리에 지어진 임대주택이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도 상징적이지만, 그 돈으로 김포시 한복판에, 지역사회 한복판에 들어갔다면 그것 또한 참 의미 있는 일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지역사회로 나가는 것뿐 아니라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 스며들고, 인식을 바꿔나가는 과정이라면, 시설이 모두 문을 닫고 다 함께 이웃으로 살아가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시설 수용은 선택이 아니라 차별이다”라는 피켓이 보이고, 그 옆을 어떤 한 사람이 유아차를 몰고 지나간다. 사진 양유진
8시 41분 이규식이 박지호를 부른다. 그리고 만약에 시설에 들어가면 어떨 것 같은지 묻는다. 박지호는 박지호만의 발음과 목소리로 말하고, 정다운이 옆에서 통역한다.
“시설은 감옥”
“감옥이라고!”
“인권도 없고”
“인권도 없고!”
승강장에는 열차가 들어오는 안내방송과 음악,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 문이 여닫히는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336일 차 선전전을 하는 사람들. 사진 양유진
박지호가 재가 장애인이 자립하면 어떤 지원이 있는지도 묻는다. 질문을 알아듣는 데에 승강장에 있는 모두가 힘을 합친다. 이규식은 “나도 모르지”라고 한다. 정다운이 다시 최종 정리한다. “시설에 들어가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감옥 같다, 인권이 없다. 그리고 ‘재가 장애인이 자립할 때 뭐가 지원되는지 궁금하다’고 질문하신 게 맞나요?” 박지호는 “네!”라고 답한다. 박지호가 박경석에게 답을 요청한다. 앞으로 나온 박경석이 활동지원도 필요하고, 장애인에게 맞춰진 구조의 집도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니 박지호가 집을 어떻게 지원받는지를 묻는다. 박경석이 시간을 확인한다. 8시 51분. 설명을 다 하기엔 부족한 시간이라, 노들센터에서 안내해 주기를 바란다는 요청을 한다.
가운데서 박지호 활동가가 활짝 웃고 있고, 박경석이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양유진
윤석열 정부 1주년인 5월 10일에는 혜화역이 아니라 대통령실이 있는 삼각지역에서 선전전을 할 예정이다. 박경석은 전장연 유튜브 ‘구독’과 ‘좋아요’를 독려한다. “전장연 유튜브 구독, 좋아요! 삼천칠백칠십팔 명이었는데, 아까 연윤이 두 명을 조직했어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좋아한다. “좋아만 하지 말고, 여기 사람들, 친구 한 명만 전도해서 구독, 좋아요를….” 박경석이 승강장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며 이미 숫자가 늘어난 것처럼 기쁜 표정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