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상수(100세)기념으로 당신의 평생 사진을 뒤져 딱 100장만 골라 제법 뽀다구나게 배열하는 등 편집을 하여 감사앨범을 만들었다. 조촐하게 총생들 40여명만 모여 축하노래를 부르는 등 상수연을 차려드렸다. 현장의 사진으로 별책부록을 만드는데, 소회 한 마디를 덧붙이려다 발견한 게 2007년에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쓴 '시 아닌 시'이다. 옮기는 까닭은 이제 우리 나이가 무엇이든 쉬이 잘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구들의 어머니이면 어떠한가? 어쩌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이 시 아닌 시라도 읽으며 기억을 해야 하는, '어머니'는 우리의 영원한 화두이기 때문이다. "어머니, 그냥 한번 불러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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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큼 봄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을 여지껏 본 적이 없다. “빨리 날이 풀려야 씬나락도 당구고 일을 헐틴디” 한 겨울을 나며 희수(77세)도 넘긴 어머니가 궁시렁거린다. 2년 동안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병원 문턱도 가보지 않았다. 손가락 반지와 목에 낀 목걸이가 평생 처음으로 빛난다. 딸내미들이 사위들과 몰려와 결혼환갑(회혼)을 축하한다며 비싼 외식 시켜주고 전주 코아백화점에서 사준 것이다.
그 어머니, 시방 눈구더에 묻힌 집에서 출렁출렁 소매통을 들고 비척비척 대문을 나선다. 집 앞 추자(호도)나무 밑에 붓는다. 소매통이 꽉 차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고 하신다. 내년에도 추자가 주렁주렁 열리고 탄저병 걸리지 않게 해주소서.
“너는 비켜라. 잘못허먼 양복에 오좀 묻는다”
그 어머니, 아침밥만 해드시곤 마을회관에 납신다.
할머니라고 해봤자 10명도 채 안되고
맨날 그 얼굴이 그얼들과 10원짜리 민화투를 친다.
돈은 무조건 딴다. 찬장 종이컵게 10원짜리가 가득하다.
화투실력까지 좋으신 모양이다.
젊어서부터 낫질 선수였다.
풀베기대회에서 조선낫을 상품으로 타오셨다.
나이 열일곱
진주강씨 의(義)자 선(善)자 2남7녀중 셋째딸이었다.
젊어 청상 시어머니에 29살 떠꺼머리 총각이 신랑이었다.
처음엔 공방(空房)이 들어 시어머니가 차라리 좋았다.
1947년 음력 12월 20일 해방됐다고, 단독정부 세운다고 시끄러웠다.
핵교 다니는 시동생은 오리쯤 떨어진 오류역에서 전주로 통학을 했다.
새벽별 보며 도시락을 싸야 했다. 시계도 없을 때였다.
웃대서 물려준 논이 그나마 꽤 있었다.
친정서 딸이라고 구박 꽤나 받았던 터라
나이 스물에 낳은 큰아들이 얼마나 예쁘던지
그 기쁨, 지금도 생생하다.
말띠, 그중에서도 백말 때답게
아예 최계 최가 ‘머슴’으로 나섰다.
새색시 석 달만에 지게를 지고 고샅을 나섰다.
아들 넷을 2, 3년 터울로 주루룩 낳더니
아래로 딸내미 셋을 놓았다.
낳지 않으려던 막내를 낳게 돼 ‘벌 것’이라고 불렀다.
줄줄줄 아이들도, 살림살이도 시어머니께 모두 맡겼다.
애를 키우는 잔재미를 나는 모른다.
하루 24시간이 짧다며 일벌레로 나섰다.
남편은 영명했다. 건강하고 일도 잘 했다.
무엇보다 줏대가 확실했다.
70년대 새마을운동때 경지정리한다고 야단법석이 났다.
15년도 넘게 동네일(이장)을 맡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온갖 물꼬 싸움 말리다 성대가 상해 말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수술을 하여 목소리를 회복했다.
아무리 동네일도 좋지만, 이장 고만허라고 채근을 했다.
함양조씨, 진양하씨 집성촌 마을에
최가, 타성이라고 설움도 많이 받았다.
그까짓 것이야 살림 불어나고 아이들 크는 재미에 문제없었다.
누라 뭐라든 그게 대수냐, 귀를 막았다.
살림이 늘어나는 만큼
일곱 아이들도 나무처럼 쑤우쑥 자라났다.
동네에서 중농이라해도 가르치는 일만큼은 벅찼다.
무엇이든 돈을 만들어야 했다. 누에도 치고 담배도 심고,
지긋지긋한 길쌈, 시어머니와 함께 허리 펼 날이 없었다.
하루 저녁에 삼베 한 필을 짰으니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가마니는 또 어떤가. 저녁내내 석장을 짜 오수장에 내다팔았다.
안지어본 농사가 없었고, 안 길러본 가축이 없었다.
아, 농삿일이라면 뼛속 깊이 이골이 나있었다.
새끼머슴 상머슴 일하는 꼴들을 보면 센찮기만 했다.
넷짼은 들에서 일하다 점심 챙기러 들어오다 낳았다(오시).
애기 낳고도 겨우 이틀이나 누웠을까. 끼니를 지어야 했다.
한 배에 돼지새끼 17마리도 낳았다. 아이들 등록금이었다.
달구(닭)새끼도 내 새끼였다. 달걀 모아 돈을 만들어야 했다.
송아치(소)새끼는 말할 것도 없다.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내 새끼는 일곱커녕 30명도 넘었다.
들바람에 찰랑찰랑, 누런 나락들도 내 새끼였다.
“어서 어서 잘 영글어라”쉼없이 말을 걸었다.
다행히 귀가 있어 내 발걸음소리와
간절한 혼잣소리를 알아들었던 모양이다.
나락도 남의 집보다 몇 배 더 소출이 됐다.
힘이 들수록 힘은 더 나고 재미가 오졌다.
돈은 만들어도 만들어도 택도 없이 부족했다.
쑥쑥 크는 아이들은 금세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이 되었다.
통학도 한두 명이고 하루이틀이이서
전주에 조그마한 오두막집을 샀다.
아이들을 맨날 보지 못해도 좋았다.
내 아들이 대학을 나와 선생이 될 것이라는 생각만 하면
힘든 지도 몰랐다. 선생님이 젤로 부러워 보였다.
시어머니도 손주들 밥 메겨 키우느라 혼났다.
나 몰래 보리쌀 팔아 복숭아를 사줬다.
그것 팔아 돈 만들어야는데, 아들 주념부리에 바쳤다고 대들었다.
남편은 하늘이 낸 효자였다. 묵묵히 일만 했다.
외가동네에서 홀어머니 모시고 동생 가르치며
아이들만은 손톱 밑에 흙 안묻히게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어머이, 아침 국은 머스러 끓일까요?”
새벽에 정한수 떠놓고 빈 후 어머니에게 여쭸다.
40년을 한결같이 그 마음으로 모셨다.
그 어머니, 다무락에 넝쿨장미 활짝 피던 날
79세로 마지막 대문을 나섰다. 장마비처럼 비가 쏟아졌다.
아이들이 상여를 붙잡고 못나가게 안간힘을 썼다.
남편은 상주 막대기로 “손놓으라”라며 아이들 등을 후려쳤다.
젊어서는 더더욱 아픈 줄을 몰랐다. 시방도 끄떡없다.
일할 생각에 신이 나 벌떡벌떡 일어났다.
초저녁에 잠깐 눈 부치면 그만이고,
새벽잠은 애시당초 없었기에 그 많은 일들을 해치웠다.
지금은 다 세상을 떴지만, 일 잘하던 동네어른들
“일꾼 났다”수군대던 소리, 지금도 들리는 것같다.
나는 모른다. 배우지 않아 가갸거겨 글조차 모른다.
시계 보는 법도 시집오니 남편이 가르쳐줬다.
오직 내 자슥들 안아프고 공부 잘해 출세하면 되얏제, 그뿐.
이제 와 가만히 생각하면 한바탕 긴 꿈을 꾼 것같다.
보따리, 보따리, 참 지긋지긋허게 싸댔다.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싶다가도 시방도 꿈에서 싼다.
품 밖에 있어도 자슥들만큼은 무조건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이렇게 쎄빠지게 일하다보니 아이들 가르치며 논도 샀다.
이런 집안이 오수면내에 또 있을까.
어머니-남편-나, 이렇게 셋이 똑같이 한마음 먹었다.
참말로 그 재미에 세월 가도 힘든 줄 몰랐다.
넘들은 대핵교 하나 갈치기도 힘든 판에 우리는 일곱을 다 가르쳤다.
동네방네 자랑치고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 일이었다.
큰애는 농업공무원이 되고, 둘째는 돈 만지는 은행원이 되고,
셋째는 큰신문을 판다고 했다. 아들 막동이 넷째는 신문사 기자가 됐다.
큰딸은 제철소 다니는 신랑을 만나고,
둘째딸은 초등학교 교감 사모님이 되었다.
아, 세상에 ‘벌 것’이라고 놀리기만 한 막내딸이
내 평생 소원 ‘자식 중 선생’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아이구 좋아라. 내 이제 무엇을 더 바랄 것이냐.
들으니, 나이 31세 돌아가신 시아버지는 7대 독자였다고 한다.
고독한 집안 시외삼촌 두 명이 유일한 친척이었다.
시어머니가 시동생을 낳지 않았으면
‘조그 아부지’(남편)이 군대 때문에 도망다닐 일은 없었을까.
손 귀한 집 아들딸 일곱 낳아준 공로만도 어디인가.
모두 다 제금(분가) 내놓으니
손주들이 최가나무에 야달(여덟)이 주렁주렁 달렸다.
일곱 자슥들도 예쁘지만, 외손지까지 열다섯 손주들도 예뼜다.
친정아부지가 딸 일곱도 부족하다며
장날만 되면 꼬까옷에 사탕을 사다준 생각에 눈물이 났다.
쌀 한 톨 못팔어 먹게 해야 하고
간장 고추장 된장도 일일이 담가워야 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내 손이 영판 못쓰기 전에
나는 또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 한다.
농삿일은 나의 취미이고 특기이자 유일한 오락이었다.
초벌 김매기, 길쌈질, 가마니 짜기, 고추 따기, 콩밭 매기,
보리 타작에 나락 노적봉 쌓기, 자갈밭 돌 고르기, 모내기,
새참내가기, 땔나무 하기, 누에 키우기, 소돼지 키우기…
베적삼이 흠뻑 젖어 벗길 수는 없어도
시어머니가, 적아부지가 해주는 초여름 등목(등멱)이
애들아,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구나.
지름내(기름냄새) 못맡아 차도 지긋지긋하게 못타는 내가
마이산 이갑룡처사 천지탑에 지성스럽게 공을 드렸다.
천지신명이시오, 내 자손들 안아프고 오래 살게만 해주시오.
“일성(늘) 조심히라이. 눈 감으면 코 비어간(베어간)는 대처서
살라믄 눈 똑바로 뜨고 헛지랄 허지 말고 돈도 애껴써라이잉.
나 돌란(달라는) 말 안헐팅개. 우리 둘이 죽을 돈 현금으로
너그 아부지가 엄청 모아놓았다. 긍개 너그들이나 성허니 있어라이.”
“우리는 시방 죽어도 원(소원) 항개도(하나도) 업승개.
너그들이나 펜히 살다오라”는 그 어머니,
올 겨울 당신 앞으로(명의로) 논 한 다랭이(3마지기) 해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등기권리증 손에 쥐고 어찌 눈물이 쏟아지지 않았을까.
평생 우리집 위해 머슴살이를 한 어머니 ‘욕심’에
아버지는 “마땅하고 또 마땅한 요구”라며 군소리 없었다한다.
십리 길 오수장 버스 타거나 빈 손으로 가본 적 없다.
이제 동네 어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겠다며 각오가 남다르다.
“이사갔다고, 새 집 샀다고, 오라고 허지 마라. 나는 그냥 이 집에서
너그 아부지와 살다가 죽을란다.”
평생 화장 한번 안하시고, 손발은 짐승의 그것같이 다 됐어도
어머니는 후회가 없다신다. 할 일이 있어 행복했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수양산이었다.
산그늘이 강동 삼천리라고 했다.
어머니는 대지였다.
우리의 뼈와 살을 채워주고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어머니는
우리의 위대한 사랑이었다.
어머니, 빌고 또 비는데 만수무강하소서.
2007년 2월 28일
불초 넷째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