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37
2월17일[연중 제6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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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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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njPJ8nIjSE
[서울대교구 박민준 가브리엘(월계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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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며 하늘에서 오는 표징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의 원하는 것은 보다 스케일이 큰 표징이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늘 그런 것 같습니다. 더 크고, 더 대단하고, 더 엄청난...예를 들면 이런 기적들이겠지요.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던 모세는 광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어 힘겨워하는 백성들을 위해 매일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이지 기이하고 신기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야는 나라 전체에 3년간의 가뭄이 들게 한 뒤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 대대적이고 엄청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도 만나의 기적이라든지 3년 가뭄 사건 같은 눈에 확 띄는 기적, 좀 더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제대로 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치유와 구마 활동, 죽은 이들에 대한 소생사건, 가난한 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뜨거운 사랑, 한없이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을 통해 그분의 신성, 그분의 메시아성은 충분히,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또다시 ‘이거다’하는 표징, 제대로 된 확실한 표징을 또 요구하는 것일까요?
바리사이들은 애초부터 예수님께 대한 신뢰심, 열정적이고 호의적인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례하게도 예수님께서 진지하게 열성적으로 전개해나가시는 인류구원사업을 흥미 어린 눈으로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예수님을 떠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오만방자하고 한심한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정말 크게 실망하십니다. 깊이 탄식하십니다. 여기서 보여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탄식은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 바리사이들의 가련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탄식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프셨던지 아주 슬픈 어조로 이렇게 외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오늘 우리도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사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통해 크신 하느님 자비와 우리 인간의 비참이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남부러울 것 없는 삶, 탄탄대로가 잘 보장된 삶을 뒤로 하고 세상 사람들 눈에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 봉헌 생활에 헌신하는 젊은이들의 삶,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그들과 함께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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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선거로 드러나는 나의 모습: 바리사이의 선택, 신앙인의 선택!>
저도 모르게 또 월요일 묵상을 했네요.
월요일 묵상은 다음 주부턴 꼭 쉴게요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그 세대를 두고 탄식하십니다. 왜 하느님을 믿기 위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그 이유는 이미 표징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당신이 아버지이시고 창조자이심을 보여주는데 이것만큼 큰 표징은 없습니다.
만약 아이가 “아빠, 우리 아빠 맞아? 맞으면 한 번 날아봐!”라고 한다면 황당할 것입니다. 이 말은 아빠가 아빠이기를 믿기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가를 시험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아빠는 필요없고 슈퍼맨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자신 안에 이 세상에서 아빠의 덕을 보며 능력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로보트 기요사키’는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 유명한 사업가입니다. 그는 물론 가난한 아빠도 사랑하겠지만 그보다는 부자 친구의 아빠가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어렸을 때부터 돈 버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키워준 아빠보다 부자 아빠를 따른 것을 더 잘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마음 안에는 아빠의 따듯한 애정도 좋지만, 이 세상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자신을 키워준 아빠도 사랑하겠지만, 책 내용만 보면 그는 아빠를 ‘능력’으로 평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그를 키워준 가난한 공무원이었던 아빠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도 하느님에게 능력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편의 승진을 위해, 아이의 성공을 위해, 집값의 상승을 위해 기도하고 그 기도가 성취되면 하느님을 믿겠다고 한다면 하느님은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버지’가 되시기를 원하는데, 우리는 이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챙겨줄 ‘슈퍼맨’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버지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능력이 없는 것을 볼 때는 가차 없이 버립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능력 있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하며 자신들이 부려먹을 힘 있는 황소와 같은 하느님을 바라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살과 피가 섞인 ‘양식’만큼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을 표징은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타락한 세대인지 아닌지는 ‘선거’ 때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자들은 각자 자신에게 어떠한 능력이 있는지 어필합니다. 이는 벌써 아버지와 같은 후보가 아닌 슈퍼맨과 같은 능력자를 원하고 있기에 우리 자체가 바리사이처럼 돈을 좋아하는 나라가 되었음을 드러나게 합니다.
지도자의 자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바로 ‘비전 – 통솔력 – 청렴함’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전입니다. 지도자는 마치 배의 선장과 같은데 길을 볼 줄 모르면 큰 사고가 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결단력 없는 선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 있는지 우리는 세월호 사고 때 깊이 체험했습니다. 비전 없는 지도자를 따라가는 것은 지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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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대에 가면 ‘사수와 부사수’가 있습니다. 사수는 오랜 경험과 능력을 갖춘 군인입니다. 사수는 이제 곧 제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부사수는 이제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배치된 신병입니다. 사수는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돌보듯이 부사수를 돌봐줍니다. 내무반 생활, 행정 업무, 외출과 외박에 대한 것을 알려줍니다. 사수가 있기에 다른 선임병들이 부사수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사수에게 업무를 배우면서 부사수는 가끔 생각합니다. ‘사수가 제대하면 내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사수가 제대하고 나면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당황하게 됩니다. 그렇게 몸으로 배우면서 부사수는 진정한 사수가 됩니다. 저도 사수가 되었을 때, 훈련을 마치고 전입온 부사수에게 업무를 가르쳤습니다. 간혹 사수 중에는 부사수를 괴롭히고, 업무를 잘 가르쳐주지 않는 사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사수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비극적인 형제 이야기,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카인은 아벨을 시기하여 들판에서 그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카인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 질문과 대답은 인간관계의 핵심을 묻습니다.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인가?" 이는 단순히 카인에게만 주어진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착좌 뒤 첫 방문지로 이탈리아 최남단의 람페두사를 찾았습니다. 람페두사는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중간 기착지와 같은 곳입니다. 교황님이 방문하기 전에 람페두사 해변에 한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교황님은 그 소식을 듣고 람페두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아)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이것은 인간 역사의 여명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신 두 가지 질문입니다. 동시에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지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세 번째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 여기 형제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이 (죽음의) 배를 탄 사람들을 위해 누가 울고 있습니까? 어린 것들을 안고 있는 이 젊은 엄마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 남자들을 위해서 누가?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를, 어떻게 연민을 경험해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고통’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우리의 무관심을 슬퍼하고, 세상과 우리 마음의 야만성을 슬퍼하며, 또한 지금과 같은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결정들을 용납하는 익명성의 야만에 슬퍼하는 은총을 주십사 주님께 청합시다. ‘누가 울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이 세상에서 누가 울고 있습니까?”
오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이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표징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 표징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표징입니다. 이미 표징은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여주신 ‘표징’에 감사드리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형제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 신앙 안에서 위로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필수적 삶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 아우는 어디에 있느냐?"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아파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는 제 형제와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형제애와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형제의 지킴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가 형제자매의 고통에 눈을 감지 않게 하소서.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당신의 자비를 전하며, 당신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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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인류의 첫 가정이 제2세대로 넘어오면서 죄의 모습은 더 복잡해지고 심각해집니다. 창세기의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왜 카인과 아벨을 차별하셨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카인이 “옳게 행동하지 않[았음]”(창세 4,7)을 암시할 뿐입니다.
창세기에서 주어진 첫 질문 “너 어디 있느냐?”(3,9)는 이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4,9)라는 물음으로 발전합니다. 하느님의 물음이 보여 주는 발전 과정은 자신에게서 형제에게로 건너가는 자아의 확장을 암시합니다.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아우를 죽인 것을 부인하고 오히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4,9) 하고 되묻습니다. 아우와 ‘상관없음’을 선언하고 형제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서 폭력으로 억울하게 고통받고 존재를 부정당하면서 사라진 수많은 아벨들의 피가 울부짖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은 교회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예표되었고 구약에서 오묘하게 준비되었으며, “‘의인 아벨부터 마지막 뽑힌 사람까지’ 아담 이래의 모든 의인이 보편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 앞에 모이게 될 것”(2항)이라고 말합니다.
카인의 이야기는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시면서도 죄인의 하소연을 들어주시고, 폭력으로 아우를 죽인 그를 또 다른 폭력에서 지키시고자 표를 찍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 끝납니다. 우리는 각자가 형제자매를 ‘지키는 사람’임을 기억하면서 서로 돌보고 책임지는 사랑을 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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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11-13: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빵의 기적이 있고 난 뒤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절) 예수님의 이 거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회개와 더불어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영적이고 내적인 변화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물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행위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정복하여 자신들이 타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현세적인 지상 왕국을 만들어내는 징표를 보이라는 것이다.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런 표징들이 일어나야 했지만(탈출 3-15장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께 다른 표징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세상의 구원을 향하여 가시고 계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적을 하느님께 청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내적인 회개와 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는지? 즉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의 변화라는 것이다. 내가 변할 때 세상도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분에게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삶이 없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상생활을 통해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며,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언제나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자 되도록, 그렇게 변화되는 기적을 늘 청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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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 8,11-13)
1)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다는 말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보라고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표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믿기 싫어서, 또는 안 믿었기 때문에 요구했음을 나타냅니다.(루카 11,16) <진짜 메시아가 아니니까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작정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더라도 그것을 기적으로(표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 요한복음 9장에 그런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요한 9,16-19)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정말로 놀라운 기적을 직접 보아도 믿으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것이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또는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모습을 자주 보는데, 그렇게 설명하려고 애를 써도 안 되면, ‘미스터리’ 라고 그냥 덮어버리고, 기적이라는 것을 끝끝내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깊이 탄식하신 것은, 바리사이들의 고집과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믿기를 거부하고, 자꾸만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가기만 하는 고집과 어리석음을......
3)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라는 말씀은, “이들은 왜 믿기를 거부하는가?”라는 뜻입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기적은 일으키지 않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끝까지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태오복음 16장을 보면,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4)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나의 부활 외에는 너희에게 보여 줄 표징이 없다.”, 또는 “내가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을 보게 되면, 너희가 나를 믿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했을 때, 그 증언을 믿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사도 2,41) <부활 자체를 안 믿은 사람들도 많았고......(사도 4,2)>
4) ‘표징’은 원래, 안 믿는 사람을 믿게 만들기 위한 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확증해 주는 일입니다. <표징보다 믿음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 표징과 믿음이 동시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일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신 ‘표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라는 말은, 예수님을 안 믿고 있다가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표징’을 보고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된 것이 옳은 일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르코복음의 끝부분에, ‘표징’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말이 나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
5) 그런데 예수님을 안 믿었던 사람이 어떤 놀라운 체험을 한 뒤에 믿게 되는 경우가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표징이 먼저 있었고 믿음이 나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 같기는 한데, 사실은 그런 사람은,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더라도, 마음속으로는 믿고 싶어 했고, 믿으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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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바라기>
마르코 8,11-13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님바라기>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님
곁에
계셔도
님
보지
못함은
나
닫은
탓인데
님
보고
싶다고
님
아닌
무엇을
나
님께
청하랴
님
보지
못해도
늘
함께
계시는
님
숨결
느끼니
나
마냥
기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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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 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은총도 그만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눈을 쌍꺼풀 해야 한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주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걸맞은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준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 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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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성경은 인류 첫 번째 형제인 카인과 아벨의 깊은 우애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질투와 시기로 시작된 감정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끔찍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형제 간의 갈등 원인은 하느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시고, 반대로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인이십니다. 카인의 제물이 아벨의 제물보다 정성이 없었습니까? 성경 본문 어디에서도 그런 내용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냥 그것은 하느님 마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번만큼은 하느님께서 잘못하셨고, 원인을 제공하신 것이라고.
그런데 창세기 저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왜 카인과 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는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눈은,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리면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카인에게 관심을 표현하시는 하느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벨보다 카인을 더 돌보아 주시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카인은 하느님의 말씀과 설득에도 한마디 대꾸도 없이, 들로 나가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하느님의 행동과 판단과 계획이 우리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고, 더 나아가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카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을 걱정하며 설득하십니다.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느님께서는 분노와 미움의 감정으로 가득한 우리를 오늘도 계속하여 설득하고 계십니다. 죄악을 다스릴지 아니면 죄악에 맡길지, 그 선택은 하느님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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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차장에서 일하는 소년이 열심히 차를 닦으며 광을 내고 있었습니다. 차 주인이 나타나자, 소년은 “진짜 좋은 차를 타시네요. 선생님 차가 맞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차 주인은 “내 형이 선물로 내게 주었단다.”라고 대답하자, 소년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좋을까?”
차 주인은 이 아이가 차를 사주는 형이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저도 그런 형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기가 받지 못함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받으려고만 하면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욕심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줄 것에 집중하면 그런 마음은 금세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받으려고만 할 때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지만, 주려고 할 때는 스스로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에 대해 반성해 볼 수 있습니다. 혹시 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받는 것에만 집중하는 욕심의 마음을 통해서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주는 것에 집중할 때 가능합니다. 그때 나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삶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지금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계속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받는 것만을 요구했던 그들이 과연 예수님을 알아봤을까요?
놀라운 표징을 직접 보고, 주님의 놀라운 말씀을 가까이서 들었음에도 믿지 못합니다. 주님을 통해서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만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웃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받을 것만을 요구하다가는 나의 변화 대신에 욕심과 이기심만을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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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에 대해 탄식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하늘의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무엇으로 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공기도 그렇고 여러 가지 미세한 것들도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생명과 직결되기도 합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많은 생명을 잃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성사’입니다. 성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사는 형식이 아닌 하느님 사랑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만능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동산과 부동산이 우리 삶의 가치 중 그 첫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그렇게 죽는 날까지 노력하다가 죽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허무하다.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위해 평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는 보이는 것보다 더 높습니다. 사랑이 그렇고 희망이 그렇습니다. 믿음이 그렇고 자비가 그렇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그대의 내일은 암흑일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대의 내일은 산 송장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기 전, 하느님을 믿음으로 고백하세요. 손에 쥐는 것을 찾아다니기 전, 이미 가슴에 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에 기뻐하십시오.
우리의 하루가 보이지 않는 것들로 따뜻하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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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코.8,11)
태양이 빙글빙글 돌거나 우주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고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빛나는 태양이 피조물을 비추고 끊임없이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는 만물의 근원이신 창조주의 위대하심과 오묘하심을 보고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초인적인 힘을 보고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약한 인간성을 함께 하시며,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고 절름발이가 성하게 걷도록 치유하시어 온전한 인간이 되어 살도록 해 주시는 주님을 보고 믿습니다.
삶이 어렵다고 상상 속에 빠져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면서 관념으로만 만나는 주님이 아니라, 삶의 가장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웃고 울며 공감하고 이해하는 가운데 체험하는 사랑의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의 표징은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가장 일상적이며 가까운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 주십니다. 우리 삶의 기쁨과 희망, 고통과 슬픔은 십자가의 고통과 부활을 드러내는 하늘의 표징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창조주의 신비와 오묘함을 드러내는 축제의 표징입니다. 서로의 삶을 경축하고 서로를 기꺼이 맞이하고 즐거워하도록 주어진 하늘의 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인간의 고통과 한계를 벗어난 초인적이고 초자연적인 표징을 주님께 요구하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고통과 한계를 공감하는 참으로 인간적인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사람과 세상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며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드러내도록 ‘초대받은 당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하늘에서 오는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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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1-13)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찾아가 율법에 대해 논쟁을 벌입니다. 그리고는 그분께서 정말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맞는지 시험해보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달라 요구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수많은 표징들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찾아오는 병자들을 치유해주셨고, 사람들을 붙들고 괴롭히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주셨으며, 적은 양의 음식으로도 수많은 이들을 배불리 먹이는 ‘빵의 기적’도 행하셨지요. 그런데도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이 놀랍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믿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해 기적 안에 숨은 참된 의미가 드러나는 게 표징인데, 애초에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질 않으니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신다한들 그들에게는 신기한 ‘쑈’에 불과했던 겁니다.
주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가 믿을만한 근거를 보여달라 요구하는 것은 참된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 가장 먼저 표징을 요구한 것은 ‘사탄’이었지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하실 때 그분을 찾아가서는, 그분을 시험하여 믿음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표징들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런저런 일들을 해보라는 식입니다. 그런 작은 일 하나 해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유혹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시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거라고, 하느님께서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이런 저런 청들을 들어주셔야 믿겠다는 식으로 그분을 시험하려 들어서는 안된다고...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아무런 표징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자기 종의 병이 나을 거라고 믿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 종의 병을 고쳐주셨고 그 일을 통해 백인대장의 믿음은 더 깊어졌지요. 시리아 페니키아에 살던 여인은 예수님께 아무런 표징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비천하고 죄 많은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지만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부스러기만으로도 자기 딸을 괴롭히는 마귀를 쫓아내기에 충분할 거라 믿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그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은총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렇듯 신앙은 믿을만한 근거가 있어야 믿는 게 아니라 온전한 믿음에서 시작하여 구원의 표징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적, 당신의 능력과 힘을 과시하기 위한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먼저 당신을 믿음으로써 당신께서 하시는 일 안에 숨은 참된 의미를 깨닫고 스스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셨지요. 중요한 건 기적을 많이 체험하는게 아니라 기적을 통해 깨달은 하느님의 뜻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 실천이 나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부터가 이미 기적입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소박한 기적들을 알아보고 감사할 수 있다면, 주님과 함께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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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마르코 복음 8장 11절-13절)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코 복음 8장 11절)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기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수아서 1장 12절-14절)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저의는 이러한 표징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마태오 복음 4장 3절)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코 복음 8장 12절) 이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표징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유와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도 밝혀줍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16장 3절-4절)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바로 앞 장면의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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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코 복음 8장 12절)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불신으로 왜곡된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마음을 뜨게 하소서.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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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라>
-존엄한 품위의 삶; 인내의 믿음과 회개♡
광기(狂氣)의 시대입니다. 역사의식, 시대정신, 상식의 회복과 공부가 절실합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사는 회개의 삶 또한 절실합니다. 지금 지옥은 텅 비어 있다는 언젠가 읽은 컬럼이 생각납니다. 악마들이 다 뛰쳐 나와 세상 곳곳에서 유혹하며 활개를 치고 있다 합니다. 정말 깨어 있어 악마들편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국내외 세상 돌아가는 뉴스를 봐도 실감하는 사실입니다. 극단의 이념이나 편견은 언제나 눈먼 맹목의 광기에 흐를 위험이 다분하기에 중용의 균형잡힌 상식적 삶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요즘 수도원 게시판을 보면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에 속한 외국 수도형제들의 부고 소식이 계속 줄을 잇고 있습니다. 생몰연대를 헤아려 보니 대부분 90세 전후입니다. 90을 넘는 분들이 극히 드뭅니다. 모두가 한생애 충실히 수도승답게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살았던 분들입니다. 새삼 기껏 살아야 15년 정도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충고와 더불어 ‘자비롭고 지혜롭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깨어 삶의 제자리에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옛 현자 다산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학문의 끝에 도달한 사람은 늘 일상에서 자신을 정비한다. ‘나는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며 나를 찾았다.’”
다산이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 듯 저 역시 매일 새벽마다 강론을 쓰며 저를 찾습니다.
“깊기만 하고 고립되고, 넓기만 하면 산만해지니, 어른이라면 겸험의 폭과 높이를 두루 갖춰야 한다.”
깊이와 넓이를 갖춘 전방위적 공부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얼마전 써놨던 소망을 밝히는 “당신은” 이란 시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깊고 넓은 바다예요.”<2025.2.12>
참으로 늘 거기 그 자리에서 바다처럼 깊고 넓은, 지혜롭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창세기 독서와 마르코 복음에서 우리는 죄에 손상된 무지에 눈먼 사람들을 만납니다. 오늘 창세기 카인과 아벨은 참 풍부한 묵상자료를 제공합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신비스런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해야함을 배웁니다. 악마의 유혹에 떨어져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죄가 만연되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첫째 번 카인에게 주어진 시험 상황이 엄중합니다.
‘세월이 흐르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삶의 신비, 하느님 섭리의 신비입니다. 누구나 카인의 질투와 분노에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감정을 최대한 인내하고 자제하며, “왜?”라는 의문을 접어둔채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지극한 인내의 믿음으로 참고 견뎌내며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켰어야 했습니다. 사실 이와 유사한 이해할 수 없는 불공정하다 싶은 ‘하느님의 신비(?)’스런 사건도 참 많이 일어나는 우리 일상의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한없는 인내와 순종의 믿음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다음 주님의 충고가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마지막 회개의 기회였는데, 비교하지 말고 하느님의 처분을 묵묵히 믿음으로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충분히 미풍으로 끝낼 수 있었을 상황인데, 카인은 악의 유혹에 빠져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급기야 미풍은 태풍이 되었고 수습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질투, 분열, 폭력, 죽임이 뒤따르는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카인의 후예도 됩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너 어디 있느냐?” 아담에 대한 물음을 연상케 합니다. 바로 이때가 회개의 마지막 기회였는데, 부전자전 아담처럼 카인의 반응도, 비겁하게 솔직하지 못하고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거짓말에 적반하장입니다.
이어 카인에게 주 하느님의 심판이 뒤따르자 정주의 삶은 끝났고 땅에서 축출되어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정처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계속되어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무지의 질투에 눈멀어 저지른 악행의 결과가 참혹합니다. 새롭게 부각되는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에 눈멀기는 마르코 복음의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다 보는 데 바리사이들만 보지 못합니다. 역설적으로 눈뜬 맹인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무지의 악'인 확증 편향, 편견에 눈멀어 있기 때문입니다. 눈만 열리면 예수님의 삶 전체가 하늘의 표징들이요 얼마전의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역시 빛나는 하늘의 표징인데 이를 까맣게 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나는 단호한 반응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말씀하신후 지체없이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집착없이 홀가분하게 자유로이 떠나는 뒷모습이 참 멋집니다. 오늘날도 무지의 인간 현실은 변함없이 반복됩니다. 카인과 바리사이들, 우리의 부정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끝까지 어떤 처지에서든 신비스런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고, 지극한 인내의 믿음으로 회개와 더불어 자신의 자리와 몫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키는 삶이 절실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무지의 치유에 결정적 도움이 되어 우리 모두 자비롭고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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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8,12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표징?>
오늘 복음(마르8,11-13)은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8,12)
예수님 시대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때였고, 메시아 사상이 팽배해 있던 때였습니다.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강한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정말로 자신들이 기다려온 메시아인지를 확인받고 싶었고, 그래서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깊이 탄식하시면서,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른 곳으로 떠나가십니다.
'오늘 복음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해 볼 수 있을까?'
먼저,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께 어떤 표징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묵상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표징을 보여주시면 더 잘 믿을텐데...' 하면서 '어떠한 표징, 곧 기적 같은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주기를 바라는 그런 신앙은 아닌지?'에 대한 묵상입니다.
다음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표징', 곧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표징'에 대한 묵상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내가 죄로부터 해방되는 회개의 표징'이라고 묵상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 세상과 나 자신을 바라보면, 참으로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들이 많다는 것을, 곧 감사해야 할 일들이 천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회개할 때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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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 12)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표징을 요구하다
사라지는
은총의
순간들입니다.
못난 우리들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은
표징을
먹고 자라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는
일상이라는
현존 속에서
자라납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심장보다
더 큰 표징은
없습니다.
욕심과 무례가
일상이라는
표징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심어린
반성과 감사가
표징을
만들어냅니다.
감사에서
더 깊어지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늘 하루가
새롭게
펼쳐집니다.
삶의 표징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영원하신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표징의 완성은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과 일상을
벗어난 표징은
욕심이며
예수님과의
만남보다
더 큰 표징은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면
함께하시는
일상이라는
표징이 보이고
자아가 무너지면
교만과 집착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으로
마음을 닦는
살아있는
감사의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감사도
진정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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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코 복음 8장 12절) 예수님 자체가 표징이며 기적이며 선물이다.
표징이 가야할 길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복음의 길이다. 마음이 없으면 표징도 보이지 않는다. 생명보다 더 큰 표징은 있을 수 없다. 표징을 결코 나의 틀에 가두어 둘 수 없다. 표징을 가둘 때 표징의 요구는 폭력이 된다. 표징은 순리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복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도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자신이다. 일상의 자리가 표징의 자리이 며복음의 자리이다. 표징은 우리 내부에 있다. 표징은 아픔을 껴안는다. 표징은 마음을 알아차린다. 표징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가 거쳐 온 수많은 표징들을 떠올려본다. 모두가 은총의 표징이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데 표징을 요구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이다. 우리가 집착하는 표징을 깨야 예수님 그 자체를 만난다. 그래서 우리일상이 표징이 되고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소통이 표징이 되는 것이다.
살리는 관계의 표징으로 나가야한다. 마음 없는 표징은 가짜이다. 사람이 표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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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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