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조재형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지순례 중에 ‘에게 해’ 연안에서 며칠 머물렀습니다. 잔잔한 바다와 빨간 지붕의 집들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제게 ‘에게 해’는 폴 모리아 악단이 연주했던 ‘에게 해의 진주’로 친숙했습니다. 순례를 안내하던 가이드는 ‘에게 해의 진주’는 원래 노래 제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제목은 ‘페넬로페(Penelope)’라고 합니다.
가이드는 페넬로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스파르타 지방의 왕이었던 이카리오스는 딸 페넬로페를 아주 사랑해서 딸이 오디세이와 결혼해서 떠나려 하자 같이 살자고 설득합니다. 남편 오디세이는 아내 페넬로페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베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남편을 따라가겠다는 뜻을 밝히고 이에 아빠 이카리오스는 딸과 사위를 보냈습니다. 오디세이가 전장으로 떠나면서 페넬로페에게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재혼하라고 했는데 그녀는 20년이 지나도 재혼하지 않고 오디세이를 기다렸습니다. 오디세이가 없는 사이 구혼자들의 청혼이 밀려오자 시아버지에게 드릴 수의가 완성되면 결혼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낮에는 옷을 만들고 밤에는 풀어버리는 식으로 시간을 벌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페넬로페의 베 짜기’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쉴 새 없이 하는데도 끝나지 않는 일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후에 오디세이가 돌아오자 페넬로페는 침대를 옮기라고 합니다. 오디세이가 그 말을 듣고 무슨 말이냐며, ‘이 침대는 옮길 수 없지 않소?’라고 말하자 진짜 신랑이 돌아온 것이 맞는다고 부부는 감격의 해후를 합니다. 오디세이와 페넬로페의 신혼 침대는 성안을 뚫고 자란 단단한 올리브 나무를 베지 않고 그 나무 중심으로 침실을 만든 둘만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에게 해의 바다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오늘은 며칠 전에 읽은 책의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공이 커지고, 목이 아픈 증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병원에 갔지만 의사들도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더 큰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신장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해서 약을 먹었습니다. 치아가 안 좋은 것 같다고 해서 잇몸 치료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몸은 더욱 나빠지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실망이 커진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여행이라도 다녀오려고 하였습니다. 여행을 위해서 새로이 옷을 맞추려고 양복점엘 갔습니다. 옷을 재단하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목 치수는 22인치로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오랫동안 19인치로 옷을 입었습니다. 22인치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재단사의 말을 듣고 22인치로 옷을 맞춰 입었습니다. 그랬더니 눈도 좋아졌고, 목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병은 신장 때문도 아니었고, 치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목에 꽉 끼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성공’이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야 믿습니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 주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런 모든 표징은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만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을 따르면 우리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와 같은 믿음을 아름답게 노래하셨습니다.
“그분이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음이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음이네.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네. 그분 자비는 세세 대대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 편하고 쉬운 승리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희생과 봉사의 길이었습니다. 나눔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신앙은 희생과 고난 속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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