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항구
- 작가의식의 대승적 전환
작가의 방은 고요하다. 그러나 그 고요는 종종 자기폐쇄의 성채가 되곤 한다. 내면의 상처를 핥고, 개인의 미세한 감정의 파문이나 감정의 잔해를 정교하게 세공하는 일—그것은 마치 소승불교의 수행자가 홀로 해탈을 향해 나아가듯, 구원(救園)의 시선을 자신과 아주 가까운 몇몇의 타인에게만 국한시킨다. 물론 그 내밀함의 고통을 아는 이라면 물을지 모른다. “내 심장의 파열을 감당하기도 버거운데, 어찌 세상의 고통을 품는단 말인가?”. 하지만 작가의 자리는 홀로 건너는 피안(彼岸)의 나룻배가 아니라, 모든 이들을 태우고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오디세우스의 선박이어야 한다.
소승적 문학은 정교하다. 상처의 단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묘사하고, 고립된 나(我)의 감정선을 팽팽하게 조율한다. 나의 상처가 유일한 진실이고, 내가 겪는 시대적 불행은 나를 전시하기 위한 배경화면이 되며, 타인은 나의 구원을 돕거나 방해하는 부수적 존재로 격하된다. 이러한 글쓰기는 독자에게 단기적 공감을 줄지언정, 거대한 역사와 타인의 비명 앞에 서면 무력하다. 그것은 '나 아프오'라는 훌륭한 독백일 뿐, 세상과 공명하는 대화가 아니다. 방 안의 촛불이 타오를수록 산소는 희박해지듯, 소승적 세계관에 갇힌 문장은 금새 숨이 막힌다. 과감하게 방문을 박차고 나와 대승의 바다로 나와야 한다.
작가에게 대승적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대승(大乘)은 모두를 태우고 함께 건너는 범선이다. 주인공인 나의 눈이 아니라, 학대받는 길고양이의 시선, 해고된 노동자의 거친 손등,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의 숨소리로 시야를 넓혀서 타인의 고통을 내 영혼의 부피만큼 확장하는 일이다. 작가에게는 이게 정말로 중요하다.
대승적 세계관은 내 글이 세상의 분열에 기름을 붓는가, 아니면 상처 난 유대(紐帶: 띠)를 꿰매는 실이 되는가를 묻는 가슴 깊은 영혼의 자각이다. 내밀한 상처의 정교한 세공(예: 마르셀 프루스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혹은 일상적 트라우마 문학 : 프루스트는 지극히 사적인 기억, 방 안에서 마신 홍차와 마들렌 조각의 맛, 내면의 미세한 감정 파문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집요하게 추적한 대표적인 내면 작가 ) 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미세 렌즈가 되어, 작가 내면의식의 깊이가 곧바로 외면의 넓이로 이어지는 역설에 의한 입체적 포용이 살아나야 대승적 세계로 부활한다. "나는 왜 아픈가"에서 "우리는 왜 함께 무너지는가"로 질문을 확장할 때, 문학은 비로소 개인적 구원을 넘어선 사회적 구원이 된다.
('내밀한 상처'나 트라우마는 보통 개인을 고립시키고 마음을 닫아걸게 만드는 뾰족한 파편입니다. 문학적 정교함을 통해 이 상처를 정밀하게 세공할 때, 그 상처는 단순한 개인의 불행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연약함의 증거"로 입체화됩니다. 타인의 고통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상처를 비추어 타인의 아픔을 고스란히 입체적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더 큰 포용력으로 거듭나게 하는 이게 부활입니다.)
작가는 시대의 어둠을 통과하며 타인의 체온을 감지하는 예민한 감각기관이다. 잠수함 속의 토끼라는 뜻과 같다. 토끼는 자신의 예민한 감각기관으로 잠수함 속의 모든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문학이 소승의 방을 뛰쳐나와 나와 대승의 광장(또는 바다)으로 걸어 나갈 때, 토끼 한 마리가 토해내는 문장의 중력은 어마하게 달라진다. 나의 상처는 유일무이한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거대한 파도의 흔적으로 재해석되며, 독자는 그 속에서 고립이 아닌 가슴 뜨거운 연대를 느낀다.
작가는 묻는 이가 아니라, 대지의 항구를 바라보며 노를 젓는 자다. 방울의 맑은소리에 만족하지 말고, 바다가 울부짖는 소리, 그 속에서 함께 침몰하고 함께 부활하는 뭇 생명(衆生)의 함성 속으로 자신을 던져 넣으라. 지금 당신의 문장이 닫힌 방의 촛불에 머물러 있다면 거대한 폭풍의 바다를 향해 비추는 꺼지지 않는 등대로 만들어라.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밑에
말을 매는 나그네야 해가 졌는냐
쉬지 말고 쉬지를 말고 달빛에 길을 물어
꿈에 어리는 꿈에 어리는 항구 찾아 가거라./<대지의 항구>
석양에 홀로 선 오디세우스의 기분이 이런 것이리라. (202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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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총 7권으로 이루어진 20세기 현대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데, 1906년에 첫문장을 쓴 후 1913년부터 1927년에 걸쳐 출간되었다하니 총 20년 이상 쓴 작품이다. 삶의 전반적 철학을 갖고서 천재적인 수준으로 사람과 장소에 대한 묘사들을 흩뿌려놓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명작이다.
이야기는 벨 에포크 시대에 프랑스 신흥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화자가 많은 일을 겪고 중년이 된 시점에서 시작된다. 우연히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한입 베어물면서 그 맛과 향기와 분위기에 일종의 데자뷰(이미 경험한 것처럼)를 느끼며 그 데자뷰를 통해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시점은 과거로 넘어가 자신이 아직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이후 점점 작중의 화자는 이야기 속에서 성장해가게 된다. 작가로서 살고 싶었던 주인공은 몇 년이 지나도록 자신이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나 7부 최후에 이르러 자신이 살아온 인생 그 자체가 드라마이며 최고의 글 소재임을 깨닫고 비로소 펜을 붙잡는다. 즉 집필에 들어가는 작품이 바로 독자가 지금껏 읽었던 주인공의 인생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책 그 자체인 것이다. 대세로 떠오른 신흥 부르주아 집단, 그리고 그런 부르주아들과 시대상황에 밀려 점점 몰락해가는 귀족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한 남자의 사랑과 이별을 통한 고뇌와 슬픔과 사랑 그 자체의 덧없음을 느끼게 해준다.(인터넷 나무위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