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약초나라 (yakchonara) 원문보기 글쓴이: 약수터
우리 한반도의 건국시조는 단군이지만, 북한에서의 시조는 살인마 원조 김일성(1912-94, 집권 1948-94)이라고 한다. 북한체제는 김영남은 북조선지방정부의 대표고, 남한의 대통령은 남조선지방정부대표고, 조폭 두목 김정은은 남북을 아우른 연방대통령이라고 해석한다.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북한의 사고체계다. 그리고 1991년 9월 18일 열린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하면서, 남한은 공식적으로 북한의 국가존재를 인정하게 되어, 6.25사변이나 6.25동란, 북의 민족해방전쟁 또는 중국의 항미원조전쟁, 외국의 한국전쟁이라고 하지 않고 ‘6.25전쟁’이라고 부른다. 이제 6.25전쟁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그 결과를 살펴보자.
I. 원인과 배경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재임 1933-1945)는 얄타회담(Yalta Conference, 1945)에서 소련의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에게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제의하여 오늘날 분단국으로 만든다. 남한은 미군이 진주해 직접 3년간 미군정을 실시하고, 소련은 북한에 진주해 김일성 정권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군정을 실시한다. 김구, 김규식등은 미군정이 시작될 때부터 남북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나 1949년 김구가 안두희에게 피살됨으로써 그 세력은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탈냉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남한과 공산주의의 북한이 서로 대치하고 있어 분단국이라는 냉전의 유산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6.25전쟁발발원인을 일반적으로 국제적 요인으로서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과 소련의 공산화 팽창주의정책, 그리고 국내적 요인으로서 남북한 적대 관계를 든다. 그리고 한국현대사전문가 커밍스(Bruce Cumings, 1943-) 시카고 대학의 석좌교수는 자신의 대표작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서 남침설과 북침설이 맞서온 한국전쟁연구를 뛰어넘어 제3자의 시각에서‘내전'을 제시하는 동시에 미국이 한반도분단의 책임자이며, 친미정권을 수립하여 반공의 보루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고 진단한다. 그는 6.25전쟁원인과 결과에 대한 새 시각의 해석 때문에 트루먼상과 미국 역사학회의 존 패어뱅크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할러데이도 우남 이승만(雩南李承晩, 1875-1965) 초대 대통령의 호전적인 북진통일론이 북한군의 남침을 초래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에 의하면 우남이 미국의 개입을 유도해 북한정권을 붕괴시키려는 목적으로 전쟁 도발을 일으켰다고 진단한다. 사실 1950년1월 14일 이승만은 미국에 북진을 위해 필요한 비행기·군함·탱크를 공급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 이외도 여러번 우남과 그 측근들이 북진통일론을 주장한다. 더욱이 우남은 전쟁 기간에도 정전 회담에 반대해 북진을 외치는가 하면 반공 포로를 석방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냉전이 해체된 90년 이후 옛 소련, 중국, 동구권의 새로운 문서자료가 발굴, 공개되었는데, 이들을 종합하여 분석하면, 커밍스의 분석이 그릇됨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문서에 의하면 6.25전쟁은 김일성이 제안하고 스탈린이 승인하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에게 책임전가 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마오쩌둥은 전쟁 후에 구소련과 맞장 뜨려고 김일성과 스탈린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이들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해 6.25는 발발한다.
6.25가 북한의 남침이었으며 소련이 북한을 직접지원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낸 인물로 러시아의 퇴역삼성장군이자 사학자였던 드미트리 볼코고노프(1928-1995)는 스탈린을 연구하다 그가 레닌의 사상을 왜곡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얼마나 죄를 저질렀는 지를 알게됐다고 술회한다. 그는 자신의 유작(遺作) '蘇 일곱 지도자 회랑'(2권)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한이 패주하던 1950년 10월초 스탈린은 3차세계대전의 발발도 불사한다는 뜻의 서신을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보냈다...미국은 전쟁을 확대해 중국까지 끌어넣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중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소련도 개입될 것이다. 이런 사태를 두려워 해야 할 것인가. 내 견해로는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소련과 중국)가 합치면 미국과 영국을 합친 것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유럽에는 독일을 제외하고는 미국을 도와줄 자본주의 국가가 없으며 독일은 현재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국에 도움을 줄 수 없다. 만약 전쟁(3차세계대전)이 불가피하다면 지금 현재가 좋을 것이다. 몇 년이 더 지나면 일본 군국주의가 미국의 동맹세력으로 다시 부상할 것이다...이후 중국은 한국전에 직접 개입할 것을 결정했고, 스탈린은 한 발 빠져 공중지원과 기술지원 등으로 개입을 제한할 수 있게 됐다."
소련과 중국이 6.25전쟁에 대한 책임회피를 독일 출생의 유대계 미국인 정치가이자 외교관, 현대사를 바꾼 1972년 미.중 국교정상화의 막후주역인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 1923)가 자신의 저서,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분석하면서 서방에 대한 중국의 외교정책사를 짚은 역저‘중국에 관하여’(On China)에서 이렇게 밝힌다. 후루시초프(Nikita Khrushchov, 1894-1971)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1960년 6월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서 중국 공산당 정치국 중앙위원 펑진을 만나 "마오가 남침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스탈린은 남침승인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중국측 책임론을 주장했고, 이에 펑진은 "마오는 전쟁을 반대했고, 남침에 동의한 것은 스탈린이었다"고 반박하며 논쟁을 벌였다고 전한다.
그러면 6.25전쟁발발에 대해서 살펴보자. 북한평양의 내각수상 김일성 사무실에 김일성을 비롯해 각료들과 공산당 중앙정치위원들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2-3시에 모여, 김일성이가 남한공격을 제안하자,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동일 새벽 4시경 소련제 T-34 전차로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하여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휴전협정이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되지만, 한국전쟁은 원칙적으로 존속되고 있다. 왜냐하면 북한이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인 4대 군사노선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한미군의 철수 및 자동개입 가능성이 배제될 경우 중소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자력으로 무력통일을 서슴지 않겠다는 정책이다. 이런 선군정치를 통한 강성대국 건설과 핵미사일 개발 등으로 남한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국지도발 및 무력충돌을 일으키고 있어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제 키신저를 통해 6.25전쟁원인과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자신의 역저‘중국에 관하여’에서 전통주의자들의 6.25전쟁기원의 해석을 지지한다. 그는 동일한 저서에서 1950년 6.25전쟁은 “미국 중국 소련의 3강국이 서로 상대에 대해 잘못된 전략적 판단과 계산이 뒤섞이면서 국제전 양상으로 전개됐다”고 진단한다. 스탈린과 김일성은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고,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남침 후 미국의 유엔군 파견결정과 중국-대만 양안 중립화를 위한 미 태평양 함대 파견을 "미국이 중국 본토와의 전면전을 고려한다"고 우려했으며, 미국은 “오랜 내전으로 지친 신생국 중국의 군사적 역량을 고려할 때 쉽게 6.25전쟁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잘못 예측하는 오류들이 이어졌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1950년 10월 미군이 38선 이북을 넘어 두만강으로 북진하자 그 때 마오가 참전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김일성의 남침 후 중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북한이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했고, 북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고 분석한다. 이것은 중국이 한반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를 통해 북한이 최근에 천안함 및 연평도사건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철저히 감싸는 이유를 대변한다.
키신저는 또한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처음에 허락하지 않다가 후에 허락한 이유를 북한과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해석한다. 마오가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는 양국 협상과정에서 스탈린에게 소련의 부동항 다롄항의 영유가 잠정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자, 스탈린도 머리를 재빨리 회전시켜 통일된 공산주의 한반도를 통해 부동항을 통한 해양문제를 해결하고자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한다. 게다가 김일성의 남침시 미국이 개입할 경우 중국은 자국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련에게 대규모 지원을 요구할 수 밖에 없다고 보며, 소련이 이에 응하지 않고 기다리면 중국의 도움을 기대한 김일성은 이에 크게 실망하여 자동적으로 소련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스탈린의 계산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6.25전쟁과 관련해서 ‘애치슨라인’(Acheson line)을 빼놓을 수 없다. 소련이 1949년 9월 원폭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원자무기독점시대를 종결시키고, 중국이 10월에는 공산화됨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외교문제를 책임진 미 국무장관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1893-1971)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정책에 골몰한다. 그래서 그는 1950년 1월 12일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에 있어서의 위기 -미국 정책의 시험대'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극동방위선을‘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애치슨라인’을 발표하여,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군사전략상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off shore island defense perimeter)전략(일본을 동북아지역의 자본주의체제의 중심국가로 성장시키는 동시에 중국을 소련과 분리시키고. 공산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을 채택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그 결과로 한국과 타이완, 인도차이나반도의 안보는 국제연합의 책임 아래 있게 되고 미국의 방위에서 배제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미 정부에 선언 취소를 강력히 항의하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것은 우남이 애치슨에게 왕따당했기 때문이다. 우남은 미국체류시 무국적 망명객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 국무부를 괴롭혔다. 그래서 당시 미국무차관이었던 애치슨은 우남의 한국귀국을 하지 못하도록 국무부에 압력을 행사한다.
여하간‘애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의 동년에 공교롭게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 선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등장하는데, 세개의 의견이 주류를 이룬다.
첫째, 북한이 전쟁 실행을 구체적으로 결정한 것이 1949년 말이므로 전쟁 발발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견해다.
둘째, 스탈린은 북한의 전쟁 수행 지원에 머뭇거렸는데, ‘애치슨 라인선언’때문에 남한의 공산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는 견해다.
셋째,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해 계획한 음모라는 견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공화당은‘애치슨 라인 선언’이 북한과 소련에 잘못된 시그널을 주었다고 비난한다. 미국 최고의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 중 한 사람이며 뉴저널리즘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핼버스탬(David Halberstam)도 '가장 추웠던 겨울: 미국과 한국전쟁‘(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이란 역저에서 '애치슨 선언'이 김일성과 소련으로 하여금 남침을 해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계산하여, 6.25전쟁의 기폭제가 됐다고 진단한다. 애치슨도 1971년 10월12일 세상을 떠나면서 “불행한 역사의 나라 한국에 ‘불안한 침묵’이 퍼져가고 있으며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을 남긴 것을 보아 둘째 번 해석이 타당하다고 본다.
윌리엄스(George Zur Williams, 1907-94)의‘해방공간’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의 부친 프랭크 윌리엄스(Frank E. C. Williams·1883~1962,)는 감리교 선교사로 1906년 공주에 영명(永明)학교(현 공주영명중고교 전신)를 세웠고, 한국명이 우리암(禹利巖)일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던 분이다. 윌리엄스도 인천에서 태어나 한국명은 우광복(禹光福)으로 불리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는 부친이 세운 영명학교 졸업 후, 조부모가 있는 미 콜로라도주 덴버로 가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마치고, 미 해군 군의관 생활을 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미군정책임자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중장(사령관)의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된다. 그 까닭은 그가 소년시절을 한국에서 보내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뒤 미 전쟁성(육군성)에서 근무하다가, 하지 장군의 보고서, 곧“10년 내로 북한과 전쟁을 할 것 같다. 전쟁을 막을 방책이 필요하다”는 건의서를 보았는데, 애치슨은 그 보고서를 읽지 않았을 뿐더러 무시했다고 밝힌다. 애치슨의 이승만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알 수 있는 단면일 뿐만 아니라 미국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의 효용가치(effective value)가 별 볼일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윌리엄스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국무부의 한국 데스크는 한국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해군 대위가 맡고 있어, 미국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1950년 북한이 남침했을 때 미국은 속수무책이었다”고 증언한다.
II. 결과
6.25전쟁이 남긴 상흔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 트라우마(trauma)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모든 삶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토의 초토화 및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과 희생,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그 존립의 근거마저 붕괴시키고 있는 민족분단의 비극 등으로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런데 6.25전쟁결과는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고 있다. 그것을 상고해보자.
(1) 세계강대국미국으로 버림받았던 한반도가 한미동맹체결로 말미암아 세계국가의 주역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중 장기집권을 위해 헌정유린은 다반사였고, 6.25전쟁 중엔 무지렁이에 불과했으며, 6.25전쟁 후엔 '반공'을 국시로 하여, 정적은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 척결한 인물이다. 그러면 그의 인명경시사상의 예를 들어보자.
6.25전쟁 중 인민군이 서울까지 진입하자 우남은 서울사수 방송을 통해 서울시민의 불안을 달랜다.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 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남은 국민을 배반하고 자기만 살겠다고 한강다리를 끊고 특별열차를 이용해 대전으로 피신한다. 제2의 이완용이 탄생한 것이다. 우봉이씨에서 전주이씨로 바뀌었을 뿐이다. 국방군 공병대는 북괴가 서울 근교까지 내려 왔던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에 피난을 가기위해 수천명의 사람들이 걷고 달리고 매달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차량 50여대가 지나가던 중인 한강철교를 폭파시킨다. 역사이래로 한반도지도층은 국민의 안전과 생명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 쓰레기 집단임이 다시 한 번 증명되는 순간이다. 피난가지 않는 시민들은 자신들을 우롱하는 우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그대로 주저앉아 인민군의 입성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우남 정부에 의해 빨갱이로 몰리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변질된다. 마치 조선시대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12-1637. 1월) 때 청나라로 끌려갔던 우리의 누이와 어머니가 돌아왔다고 해서 이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는데, 뙌놈들에게 절개를 잃었다고 남편이나 가정으로부터 버림받고 나선 '화냥년'이(adulteress)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던 처절한 여인들의 운명과 같다.
이렇듯 국민에 대한 안전과 생명에 대해선 관심초자 두지 않고, 오직 일평생 대통령병환자로 살았던 우남이 미국과 동맹을 체결한다. 사실 미국은 그동안 일본중심의 아시아정책을 펼치면서, 조선을 일제의 식민지배하도록 윤허하고, 해방 후엔 한반도를 미국의 방위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지역으로 배정하다가 결국 6.25전쟁을 불러 일으킬만큼 미국은 한반도를 가치가 전혀 앖는 지역으로 여겼다. 그런데 미국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여 세계정세를 꿰뚫고 있는 우남은 세계강대국미국의 도움 없이는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간파하고 미국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 재임1953.01 ~ 1961.01) 정부를 대상으로 반(半)공갈협박하여 '한미동맹'을 이끌어 낸다.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월 1일 워싱턴 DC에서 정식 조인되며, 양국 국회의 비준을 거쳐 1954년 11월 18일부로 발효된다. 이제 미국은 일본중시외교에서 벗어나 한반도에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미동맹체결로 무지렁이, 인권타압자, 철권통치자에 불과했던 우남은 건국대통령으로 명성을 날리고, 그 덕분에 일제시다바리의 죄악의 꼬리표를 뗀 후손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아 동상건립을 추진 중이다. 4.19혁명 당시와 비교하면 한마디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2)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의 공산사상이 아닌 엉터리 공산주의의 진목면을 볼 수 있게 되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좌우파개념이 구미선진국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짝퉁 이데올로기임을 깨닫게 해준다.
(3) 남한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활짝 꽃을 피우고, 세계를 리드하는 국가로 발돋움한다.
남북분단은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미국과 구소련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살인마 김일성의 남침으로 최종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인간말종 김일성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남한은 자본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정부를 세울 수 있게되었고, 이에 저항하는 자들을 색출하여 그 체제를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1987년 이전의 남한정부는 헌정유린과 인권탄압의 철권통치로 민주주의가 많이 퇴색되고 희석되었지만, 우리나라 건국이념이자, 교육이념인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사상을 기저로 하여 불교의 평등과 자비사상, 성리학의 '인'(仁)사상, 동학의 '시천주'(侍天主)사상, '사인여천'(事人如天)’사상, '인내천'(人乃天)사상,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정신이 결합하여 민주화를 이룸과 동시에 구미선진국으로부터 도움을 받다가, 아시아에선 두 번째로 도움을 주는 경제제선진화를 이룬, 위대한 대한민국이 되었다.
이제 한류로 전 세계가 흥분하고 있다. 문화강국으로 등극한 것이다. 구미선진국을 비롯해 모든 나라들이 시기할 정도로 대한민국을 찬탄의 눈으로 동경하며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여기까지가 Hegel의 '정반'(正反, thesis-antithesis)이다. 이제 '정반'을 종합(合, synthesis)한 '통일한반도'를 성취해야 한다. 이것에 온 국력을 기울여야 한다.
(4) 일제의 잔인한 인권탄압과 고문사건과 더불어 6.25전쟁의 살육사건은 반인륜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지금도 구타문제가 사회의 화두가 되었다.
(5) 반공이 국시로 등장함과 동시에 자기와 이념이 다르면 상대방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국제시대에 뒤떨어진 냉전적 사고가 한반도를 배회하여 다양한 사상의 꽃이 피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정신사에 역류하여 국운을 가로막고 있다. 정원에 다양한 꽃이 제각기 자태를 뽑내며 아름답고 탐스럽게 피어 있으면 보기 좋고, 그 향기도 제각기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과 사고를 풍요롭게 하는데 반해, 획일적으로 하나의 꽃으로 덮여있다면 지루하고 권태와 짜증만 날 것이다. 지금 단조로운 반공사상하나로 한국사회를 냉동시키려고 하되 애국심은 전혀 없는 쭉정이들이 너무 많다.
(6) 친일파척결이 영원히 무산된다. 이 때 최고의 수혜자는 박정희(正熙, 1917-1979) 전 대통령이다.
그는 일본인보다 일본패망을 더 가슴아파했던, 진정한 일본인으로 신분탈색을 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변신의 귀재였다. 그는 만주군관학교 졸업후 일본육군사관학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여 졸업, 만주 보병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지낸다. 일제가 패망하자 조선으로 돌아와 장교가 부족하였던 광복군이 당시 장교경험자들을 장교로 기용하는 정책에 의해 북경으로 건너가 광복군제3 지대에 편입하고, 여순반란시 남로당에 자진 입당해 공산주의자로 활동을 하다 적발되자 ‘남로당일망타진’에 기여한 공로로 살아남아, 1949년 1월 강제 예편된다. 1950년 6.25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고, 6.25전쟁후 반공주의자로 변신한다. 후에 그는 육군 소장이 되고 1961년 구테타에 성공하여, 대통령(제5대에서부터 시작으로 제9대)을 역임한다. 5.16군사정부부터 시작하여 도합 18년 5개월간 철권통치를 했는데, 그것이 유신체제와 긴급조치9호로 나타나고, 끝내 자신과 같은 고향 후배이며, 같은 육사 2기생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운명을 달리한다.
그는 자신의 콤플렉스, 쪽발이의 좀비, 빨갱이, 변절자, 5.16쿠테타로 인한 헌정질서유린자, 유신헌법에 의한 인권탄압자및 철권통치자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쇄신시킬 뿐만 아니라 인생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경제건설에 매진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재임기간 중 펼쳤던 '새마을운동'이 제3세계의 아이콘이 되었고, 그것 때문에 국내보단 국외에서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7) 6.25전쟁으로 한국정부가 경황이 없을 때 일본은 미국의 힘을 빌려 대마도를 자기네 영토로 편입시킴은 물론 독도도 거의 자기네 영토로 둔갑시켜 놓는다.
우남은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3일 뒤인 1948년 8월 18일, 첫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에게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다. 우남은 1949년 1월 8일 연두 회견에서 다시 한 번 대마도 반환문제를 강력히 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우남정부는 1951년 4월 27일 미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문서를 보낸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여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칭,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 그런데 6.25전쟁 중이라 대마도문제를 깔끔하게 해결짓지 못하고, 두 눈 부릅뜬 채 일본에게 빼앗긴다.
뿐만 아니라 6.25전쟁 중 한국이 배제된 채 1951년 9월 8일 일본과 연합국이 맺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 Treaty of Peace with Japan, San Francisco Peace Treaty)의 제2장 제2조(a)에 근거하여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Japan recognizing the independence of Korea, renounces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Korea, including the islands of Quelpart, Port Hamilton and Dagelet). 일본이 포기해야 할 섬으로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만 열거되어 있고, 독도는 빠졌기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이 독도문제의 영유권을 언급하지 않고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8) 쪽발이의 36년 조선식민지배를 미화시킨다.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북한, 중국, 구소련의 대륙세력과 미국, 일본, 남한의 해양세력으로 이분화되어, 일본은 일제의 36년한반도지배가 자신들이 러시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함, 곧 공산화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미화시킨다. 세계경제 제2위국으로 등장한 60년대 말 시바 료타로(馬遼太郞, 1923-1996)는‘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1968)이라는 소설에서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s 1904)을 조선이 러시아나 다른 서양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할 경우 일본마저 그들의 노예국가가 되기 때문에 이를 저지 하기 위한 조국방위전쟁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러일전쟁'은 공산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50, 60년에 형성된 구미선진국의 공산주의 도미노이론을 슬그머니 도용하여, 조선이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면 일본도 공산주의지배아래 있을 수 밖에 없어서 부득불 전쟁을 치렀다고 그럴듯하게 극화하여 사기친다. 구미선진국은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성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사상은 모르고 시바의 의 허구적인 자위론사상에 동조해 일제의 조선병탄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쪽발이들은 조선의 식민지지배는 자기들이 청나라나 러시아 또는 다른 서구열강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방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9) 제2차 세계대전에 패망한 일제가 6.25전쟁의 특수효과를 입어 경제선진강국으로 진입하는 계기가 된다.
일본의 전 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967)는 한국전쟁(6.25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이 우리 일본을 구하셨다”고 감격해하면서 만세삼창을 했고, 1954년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한 세미나에서 “한국이 우리를 구해 주었다”고 말했으며, 커밍스는 “뉴딜(New Deal)이 금세기 미국의 제1차 국가부흥의 계기였다면 한국전쟁은 제2차 국가부흥의 계기”였다고 평가하였다. 1953년 한국전쟁에 해군장교로 참전한, 일본정책연구소장을 지낸 동북아연구분야 대가, 미외교정책전문가인 미국경제학자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도 “일본에 있어 한국전쟁은 마셜플랜에 필적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고 진단한다.
(10) 자본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중국의 국교정상화를 체결하는 계기가 되는데 반해, 중국과 소련은 개와 고양이 관계가 된다.
키신저에 의하면 6.25전쟁을 통해 미국은 북한의 침공을 격퇴하고 남한을 지켜내는 성과를 거두지만, 전쟁수행과정에서 정치적, 군사적 목표를 조화시키지 못하고 국내적 논란을 초래함으로써 10년후 베트남전에서 비슷한 딜레마를 반복하고, 중국은 한반도를 미국으로부터 해방시키는데 실패했지만,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따라서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걷게 되어, 아시아공산주의화를 선도하는 역활을 하게 된다. 이와 반면에 소련은 관계 악화로 자신들과는 다른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 중국을 그대로 둘 수 밖에 없고, 후에 이런 중소관계로 말미암아, 79년 미중 국교정상화로 이어진다. 이렇듯 카신저는 미국과 중국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모두 있지만 최대의 패배자는 스탈린이라고 평가한다.
III. 나가는 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과 일본의 지도자들은 한반도의 불행은 자국의 행복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며 통쾌하게 여긴다. 이것이 보편적인 국제관계다. 특히 미국과 일본은 찰떡 궁합이다. 일본은 미국의 미사일방어(MD)협력체제의 공허함을 알고 있지만 이것에 참여함으로써 첨단군사기술을 축적하여 군사강국으로 거듭나려고 악전고투(惡戰苦鬪)하고 있다. 우린 이런 미일관계를 가만히 두어서는 안된다. 미국이 대한민국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모든 지혜를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며, 그러한 환경이 조성되지 안되도록 국제정세에 대한 혜안이 있어야 한다. 북한주민은 우리의 동포이기 때문에 끝까지 함께 가야할 운명의 공동체이지만, 6.25전쟁을 일으킨 조폭 두목, 살인마 김정은을 비롯한 그 핵심세력은 완전히 제거청산해야한다.
8.15해방은 하늘이 준 떡이라고 해석한 함석헌선생님은 6.25전쟁은 새시대를 위한 번제라고 한다. 그의 번제 신학적 해석을 들어보며 글을 마칠까 한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그 사람 중의 잘낸 것을 고르고 그 기계의 날카로운 것을 택하여 이 나라 강산을 두루 밟으며 3년을 어우러져 싸워 붉은 피를 붓고 한테 엎어져 묻히었다. 이 나라는 인류의 제단, 유엔의 제단, 민족의 연합의 제단이 되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잡아 제사를 드렸고, 그 아들로 민족의 조상들이 나왔듯이 이제 이 인류는 그 아들을 잡아 새시대, 새나라, 새 인종을 얻기 위한 제사(번제)를 드렸다. 이 한나라는 하나의 세계의 제단이 되었다. 겪어야 하는 고난을 다 겪고 당해야 하는 시련을 다 당한 후, 인류는 저들의 빛나는 후손을 이 세계의 모리아산 한 나라에 보내어 일찍이 자기네 조상의 피로부터 성별한 이 땅을 조물주 앞에 영원한 게티즈버그(Gettysburg)로 드리고 눈물과 감사로 기도하는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