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라는 말로 사람의 독특한 지위를 거듭 천명하며(사형 제도가 필요한 이유를 성경은 제시하고 있음), 인간의 생명은 특별히 보호되어야 하지만 짐승은 그렇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살인자에 대하여 사형을 주장하는 것은 피조물들 중에서 부여된 사람의 특별한 지위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 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생명을 보존할 책임은, 교회공동체의 본질적인 책임으로써 모든 인류에게 놓여 져 있습니다.
모든 공동체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정정치에 대한 거룩한 보존입니다.
이런 면에서 모든 공동체는 거룩한 교회를 지향합니다.
이 거룩한 공동체는 사회적인 요소를 가지고, 내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공동체가 또한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한 실천은 성경의 원래적인 가르침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언급(1:27)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최초의 명령으로 소급하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지개로 상징되는 그 언약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맺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사람과 짐승의 생명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입니다.
성경은 번성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또 다시 홍수로 인하여 실패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암시합니다.
임박한 홍수에 대한 경고인 창 6:17-18의 표현이, 이제부터는 영원한 안전에 대한 약속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창9:10에서 선언되고 있는 ‘세우다’(쿰)의 히필형은, 이미 체결된 법적인 협정들을 확증하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이때 과거형이 사용된 것은 그것이 창9:17에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창조 자체가 모든 언약을 함의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언약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바로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회복은 언제나 언약의 설정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언약은 언제나 축복이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살펴볼 때, 노아와 아브라함은 창세기에 기록된 사건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시작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인물은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과 언약의 선물로 대표됩니다.
창9:11의 ‘멸하다’는 불가해한 죽음을 나타내고 있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다시는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언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에게 여러 가지 조항을 부과하시기보다는 하나님 자신에게 스스로 조항을 부과하고 계십니다(하나님의 단독적인 사역).
그러나 이 언약은 택하심 혹은 계시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후에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나 그것에 근거한 다른 언약들과는 다름: 언약의 갱신과 발전이 나타난 것임).
여기서 홍수 기사는 마침내 승리에 찬 희망적인 종결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언약에 대한 증거를 보이고 계십니다.
창9:12에서 제시되고 있는 ‘증거’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는데, 기적들(신6:22; 사7:11)과 놀라운 성취들(출3:12)로부터 민족적 관습(출31:13)이나 옷의 품목들(신6:8) 등 다양한 것들이 그 도구가 됩니다.
언약은 단지 사람들과만 맺은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과 맺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증거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정해집니다.
이러한 표징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무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극히 이례적으로 무지개는, 사람에게는 보는 것이지만, 하나님에게 그 자신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Notice 1 :
11세기의 앗수르의 부조를 보면 구름 속에서 두 손이 뻗쳐 나와 있는데, 한 손은 복을 내려주고 다른 손은 활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 무지개에 해당되는 말은 무기를 나타내는 단어와 같은 단어이므로, 이것은 흥미로운 이미지임, 활은 고대 근동에서 종종 신성한 용사의 무기로 인식되었음,
히브리어 ‘케셰트’(무지개)는 ‘활’과 ‘무지개’ 모두를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인류와 홍수로 불화하지 않으리라는 표징으로 하나님의 활과 화살들을 하늘에 걸어 두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종종 제안되고 있음, 홍수의 폭풍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던지신 화살들이었다는 것임, 그러나 성경이 때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하기 위하여 이런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지만(예: 신 32:23, 42; 합3:9-11; 시18:14) 여기서는 이러한 방식을 취할 이유는 없음,
Notice 2 : 성경적 해석(델리취의 해석)
무지개는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임, 자연법칙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임, 무지개가 자연의 질서가 계속되리라는 약속이라는 사실은 바로 자연의 법칙에 일치하는 것임,
어두운 땅위에 빛나는 무지개는 분노의 어둠에 대한 사랑의 빛의 승리를 나타냄, 검은 구름에 미치는 태양의 영향으로 생기는 무지개는 지상을 관통하는 천상의 의지를 상징하고 있음,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포괄적인 보편성을 가리킴,
무지개는 고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여러 종류의 해석을 유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성경적 해석만큼 적절하지 못하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Notice 3 :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라는 문구는 저명한 신학자들로 하여금 홍수 이전에 무지개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음, 그러나 그것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지개가 그 때 형성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가 무지개에 새겨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
창세기는 무지개가 홍수 이후에 나타났다고 말하지 않음, 단지 그 때 이것이 ‘표징’, 즉 하나님의 선한 의지의 서약이 되었다는 것임,
어떤 표적이 갖는 기능은 그것에 부여된 의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할례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증거로 지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 및 그의 가족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있었던 관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