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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이주동 지음, 소나무, 2012)
책을 펴내며
중부 유럽의 도시 프라하에서 태어난 프란츠 카프카, 그는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작가이며 보험공사의 관리였다. (...) 그는 세계문학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편지를 남겼는데,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 친구들, 출판업자들,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대략 1,500통에 이른다. 원래 이 원고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태워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충실한 친구 막스 브로트는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카프카 작품에 대한 그의 존경심과 평가는 개인적인 양심을 훨씬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p.5)
카프카는 부모의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적 세계와 엄격한 통제와 감시 속에 이루어지는 주입식 교육제도, ‘주체성도 창의성도 행동의 자유도 없는’ 오직 ‘명령과 규율’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 왕국의 관료주의적 정치체제, 군주의 권력과 자본이 결탁한 초기 자본주의의 폐해, 힘과 기술의 각축장이 된 제1차 세계대전, 유럽 전체에 만연된 테러와 멸시를 동반한 반유대주의라는 공포와 절망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었다.
이렇듯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역사적.정치적,사회적 현실 속에서 카프카가 인식한 것은 자유롭고 주체적이고 개성적이어야 할 인간 존재가 권력과 욕망의 제도화된 메커니즘 속에서 물화되고 소외된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러한 부정적인 현실 세계를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그 세계의 숨겨진 진실을 밝히고 나아가 자신의 상실된 주체성과 정체성을 되찾고자 노력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이 가능한 문학적인 삶, 글쓰기에서뿐이었다. (p.7)
그의 실질적인 삶은 행복과 쾌락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일상적인 욕망의 삶이 아니라 꿈과 환상과 상상과 정신과 영혼을 양식으로 하고 있는 ‘고독하고 가난한’ 그러나 의미 있는 문학적인 삶이었다. 그는 자기실존을 위해 영과 육의 불꽃이 혼용되어 분출하는 작품을 썼고, 한순간도 ‘자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타인과의 사회적 소통을 위해 수많은 편지를 썼다. (p.8)
그는 남들이 잠든 밤에 홀로 깨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는 글을 쓴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 행복과 기쁨을 느꼈다. 그는 창작과정의 망아忘我적 순간이 주는 희열감에 취하곤 했다. 그의 성공적인 첫 단편 <선고>는 ’영혼과 육체‘, ’생각과 감정‘, ’직관적 체험‘, ’글쓰기와 삶‘이 하나가 된 여덟 시간의 ’無我境 상태‘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p.9)
그의 작품은 어떤 이념적 개념이나 형식적 논리로 포착하려는 종래의 해석학적 시도의 궤도를 벗어나 있다. 결국 그의 작품은 일종의 수수께끼와 같고 패러독스한 의미와 ‘꿈의 논리’로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카프카 작품의 난해성과 위대성을 낳게 하는 근본 요인이다. (p.9)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나아가 비술적이기까지 한 자신의 작품을 강조하듯 카프카는 미완의 단편인 <사냥꾼 그라쿠스>에서도 ”내가 여기에 쓰고 있는 것을 아무도 읽지 못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렇듯 비유적인 형상언어로 상상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는 어떤 일의적인 사회적.역사적인 객관성이 적용될 수도 통용될 수도 없다. 또한 그러한 허구 세계를 창조해내려는 그의 삶은 고독하고 처절하기까지 한 ’죽음과 같은‘ 삶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평상인의 삶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잠언에 “예술과 삶의 관점은 예술가 자신 안에서조차 다르다”라고 쓴 적이 있다. 그는 작가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생각했다. 하나는 사회 속에 군립하고 이끌어가는 작가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변방으로 밀려나 있지만 인간세계를 조감하고 통찰할 수 있는 작가이다. 스스로 후자이기를 원했던 카프카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를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낄 수 있었던 ‘탁월한 예지적 능력의 천재’ 작가였다. 그가 통찰하고 예지한 현대 세계는 불안과 부조리와 절망으로 가득 찬 ’허위의 세계‘였다. (p.11)
유년시절
이로써 세계는 저에게 세 가지로 분류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첫째로 제가 노예로서 살고 있는 세계인데, 저를 위해서만 고안된 법칙, 그러면서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전적으로 수긍할 수 없는, 그런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를 말합니다. 둘째는 제 자신의 세계와 무한히 동떨어져 있는 세계로, 그곳에서는 아버지께서 지배하고 명령하는, 그러나 따르지 않기 때문에 화를 내시며 사시는 곳입니다. 세 번째는 행복하고 자유롭게 명령과 복종으로부터 벗어나 살고 있는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저는 언제나 수치감 속에서 살았습니다. (카프카 일기 156)‘ (35)
독일 소년초등학교 시절
카프카가 입학한 독일 소년초등학교는 ’정육시장‘이라고 부르는 구시가 광장 뒤편의 음침하고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거리에 잡고 있었다. 예전에 정육점들이 모여 있던 이 ’정육시장‘에서는 이제 고기 대신 생선을 주로 팔고 있었다. 당시 카프카의 어머니는 임신한 상태였고, 카프카가 학교에 입학한 지 일주일 만에 첫딸인 엘리를 낳았다. 유아기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입학 첫날부터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었던 어린 카프카는 일 년간 매일 가정부의 손에 이끌려 등.하교를 했는데, 그는 그때 받았던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잊지 못했다. (40)
’모든 인간은 각자 고유하며, 그 고유성을 발휘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각자의 고유성에서 좋은 점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학교도 가정도 이 고유성을 지우려고만 노력한다. 그렇게 해야 교육이 수월해지고 아이의 삶도 수월해진다. 그러나 그에 앞서 아이들은 강요가 가져다주는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듯 나의 고유성은 인정되지 않았다. (일기2, 7)
이렇게 카프카는 자기 본위적인 부모의 교육과 아이들을 세상의 기준과 틀에 짜 맞추어 넣으려는 학교 교육 및 제도 모두를 어린아이의 자유로운 개성과 고유성을 억압하고 고착화시키려는 ”성인들이 만든 감옥“(339)으로 느꼈다. 그러므로 그는 가정과 학교라는 첫 사회생활을 통해 자신에게 맞서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46)
오스트리아 왕립 김나지움 시절
‘저는 초등학교 1학년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잘 해냈습니다. 더구나 상까지 받았습니다. 또한 김나지움 입학시험에서 틀림없이 낙방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성공했습니다. 또 김나지움 1학년 학년 말 시험에서도 이번에야말로 낙제하려니 했는데 떨어지지 않았고, 그 후로도 계속 진급할 수 있었습니다.(51) 그 반대였습니다. 제가 언제나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제가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결국에는 더욱더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종종 저는 마음속으로 무서운 교수회의를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흡사 제가 최상급 반을 통과했다면 그 아래 학급으로, 그 학급도 통과했다면 다시 그 아래 학급으로 내려가며 이 유례없는 수치스러운 사건, 즉 어떻게 저같이 가장 무능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이런 상급반까지 몰래 올라올 수 있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모인 교수회의 같은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저를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학급은 저를 뱉어낼 것이고, 이런 악몽에서 벗어난 죄 없는 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를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품고 산다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기2, 196)
감수성이 예민하고 소심한 카프카는 이처럼 늘 시험에 대해 견디기 힘든 불안감과 심적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 후기구조주의자의 한 사람인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밝혔듯이, ‘시험’은 사회체제가 그 ‘권력을 행사하는 데 가시적인 경제성’을 얻게 되는 하나의 통제 방법이다. 개인은 시험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자신이 고정된 위계질서에 속해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이로써 자유를 추구하는 개개 주체는 어쩔 수 없이 규격화되고 사회체제의 권력과 위계질서 속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52) 지식의 획득을 통해서 권력은 자의적이 아니라 규준이 되며, 사실에 근거한 규범 속에 확고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렇듯 규격화되고 통제된 교육제도와 그 속에 복속되어 있는 기성세대와의 갈등은 카프카뿐만 아니라 그이 세대 젊은이 모두가 비슷하게 겪어야 했던 상황으로 세기 전환기 문학의 공통된 주제의 하나이기도 했다. 또한 감수성이 가장 민감한 청춘 시절의 카프카는 주변 사회로부터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증오감을 몸소 느껴야 했다.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어린 카프카에게 ‘개인적인 무력감’과 ‘수치감’ ‘알수 없는 죄책감’ 같은 감정을 낳게 했던 것이다. (53) * 유대인의 재력, 상업적 지위는 체코의 독립주의와 독일인 모두로부터 경계심을 갖게 했다.
펠리스 바우어와의 만남과 글쓰기의 새로운 전환점인 단편 <선고>
1912년 7월 28일 휴가에서 돌아온 카프카는 에른스트 로볼트와 약속한 일에 매달렸다. 이미 잡지에 발표된 것 말고 다른 산문작품을 첨가해서 <관찰>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 실을 만한 작품이 없었고, 손볼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일기장에 써둔 일곱 편의 산문 소품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오래전에 써두었던 <어느 투쟁의 기록> 중에서 짤막한 산문 몇 편을 뽑아 수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선정한 작품을 읽어보니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카프카는 며칠 밤을 괴로워하며 자신의 글쓰기 능력에 대해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265)
카프카가 몸 상태도 좋지 않고 글쓰기에 대한 무능력을 자책하느라 우울한 얼굴을 한 채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눈치 빠른 막내 누이동생 오틀라가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괴테의 서정시 <눈물 속의 위로,> .. 등을 읽어주었다. 8월 20일에도 카프카는 또다시 일주일 전에 만났던 펠리스 바우어의 모습이 자꾸 머리에 떠올렸다. 그녀의 인상이 생생하게 그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270)
그가 아무런 육체적 결함이 없음에도 아이를 낳을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첫째는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강과 사회성이 자신에게는 결여되어 있고, 둘째는 무엇보다도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과 글쓰기는 병행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74)
후에 카프카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서 “나의 글쓰기는 바로 당신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이 글에서 아버님의 가슴에 하소연할 수 없었던 것을 하소연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했다. 또한 그 작품에서 카프카는 처음으로 개인적인 글쓰기와 텍스트의 주제, 인물, 줄거리를 여러 통로로 연결시키고 그를 통해 문학과 삶의 모순적인 관계를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로 <선고.의 완성으로 카프카만의 고유한 글쓰기 방식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친밀하고 주관적인 관점의 작품이 나오게 된 간접적인 동기로 이상하게 펠리스 바우어가 언급된다. <선고>가 완성된 1912년 9월 23일에는 아직 펠리스 바우어로부터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둘 사이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280) 하지만 카프카는 후에 일기에서 “<선고>에서 나온 결론은 나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그 이야기는 간접적으로는 그녀 덕분이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그 신부 때문에 몰락하고 만다”(일기 574)라고 쓰고 있다.
카프카는 곧 <선고>의 첫 인쇄판에 “f에게 바친다”는 헌정사를 써넣었다. 그것이 펠리스 바우어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증명해보이고 싶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281)
석면공장 일로 자살을 생각하다.
헤르만 카프카(아버지) 는 오래전부터 독립된 사업체를 하나 가지고 싶어 했다. 그것은 사회적 업적을 통한 신분 상승과 함께 더 큰 부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1911년 사업가 사위인 카를 헤르만과‘프라하 석면공장 헤르만 회사’를 건립했다. (286)
1911년 11월 석면공장은 25명의 노동자(주로 여성)와 함께 14개의 현대적 기계시설을 갖추고 생산에 들어갔다. (287)
내가 공장을 돌보지 않는다고 아버지가 정오에 나를 비난했다. 나는 이윤을 기대했기 때문에 참여하긴 했지만, 내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한 협조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계속 비난해댔고 나는 창가에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나 저녁 때 정오의 대화에 대해 생각하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현재의 위치에 매우 만족할 수 있고 문학을 위해 모든 시간을 얻어내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프카, 293) (287)
공장이 나에게 주는 고통, 사람들이 나에게 오후에는 그곳에서 일하도록 의무를 지웠을 때 어째서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을까? 아무도 나를 완력으로 강요하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비난으로, 카를은 침묵으로 나의 죄의식을 부추겨 강요한다. 나는 공장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서, 오늘 아침 일찍 주문받은 물건을 검사할 때 아무 하는 일 없이 그리고 매 맞은 놈처럼 기가 죽어 서 있었다. 나에게는 공장 운영의 모든 일을 일일이 간파할 능력이 없다. (...) 다른 한편으로는 공장에 들이는 쓸데없는 노력 때문에 나는 한두 시간의 오후 시간을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길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내 존재의 완전한 파괴를 낳게 될 게 틀림없다. (카프카, 327)
그뿐만 아니라 그가 직접 공장에 가서 보니 공장 노동자들은 말할 수 없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공장 안은 소음과 석면 먼지로 가득했고, 빛도 들어오지 않고 통풍도 잘되지 않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속에서 일하는 여공들은 봉두난발에 땀으로 얼룩져 더러워진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녀들은 자기가 맡은 일도 아닌 여러 가지 잡다한 일에 쉴 새 없이 이리저리 불려 다녔다. (288) 카프카는 그들이 처한 지옥 같은 노동환경과 비인간적인 대우에 매우 놀랐다. 그는 열악한 공장시설과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무계획적으로 일에 참여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공장은 경제적인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자본금도 빈약했을 뿐더러 당시 유럽의 경제난으로 판로를 찾기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를 헤르만이 공장일로 2주간 여행을 떠나서 공장을 비우게 되자 문제는 극에 도달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잡화상 일로 시간이 없었고, 기울어가는 공장을 믿을 수 없는 작업반장에게 맡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자간의 갈등으로 매일 집 안이 소란스러워지자 유일하게 카프카를 옹호해주던 막내 동생 오틀라마저 부모의 편을 들고 나섰다. 오틀라는 밤을 새워가며 소설을 쓰고 있는 오빠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어려움에 처한 공장 일에 단 2주일간의 협조마저 거부하는 카프카의 편을 들 수는 없었다. (289)
오틀라를 포함한 모든 가족의 비난과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글쓰기 사이에서 카프카는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이미 9월부터 군대식 ‘기동연습’이라고 부르는 엄격하게 짜인 시간표에 따라 시간을 쪼개 글을 써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공장 일 때문에 더 이상 소설 <실종자>를 계속 써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불안과 좌절감에 싸여 어두운 창가로 다가갔다. (...) 1912년 3월 8일 또다시 아버지에게 심한 욕을 들은 카프카는 “안락의자에 올라가 창문으로 뛰어내릴까 하고 한 시간 동안을 곰곰이 생각”(카프카,397)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책상에 앉아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이고 보호자나 다름없는 막스 브로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 순간 나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만 존재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깨달았네. 늘 하듯이 잠을 자고 나서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아니면, 다음 2주 동안 날마다 매제의 공장 사무실로 나가는 것 말일세. (...) 만일 내가 의지와 희망의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면, 2주일 후에 오늘 내가 중단한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계속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을 내게 남겨주었네.(290)
그래서 나는 뛰어내리지 않았고, 이것을 작별의 편지로 삼겠다는 유혹 또한 그렇게 강한 게 아니네. 나는 창가에 오랫동안 서 있다가 몸으로 유리창을 밀어보았네. 나의 추락으로 다리 위의 통행세 징수원을 놀라게 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네. 하지만 그 시간 내내 길바닥 위에 내 자신을 박살내려는 결심이 합당한 결정적 깊이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너무도 확고하게 느껴졌다네. 또한 죽음보다는 살아 있는 것이 나의 글쓰기를 덜 중단시킬 것처럼 보였네... 그리고 그 소설의 시작과 2주 동안의 진전 사이에서 공장에서도, 바로 흡족해하는 부모님을 대하면서도 어떻게든 내 소설의 가장 깊은 내면에 몰두하고 그 안에서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
가장 친애하는 막스, 내가 이 모든 것을 자네에게 공개하는 것은 판단을 구하기 위해서는 아닐 거야. 왜냐하면 자네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까 말이네. 그러나 내가 작별의 편지도 없이 뛰어내릴 결심을 굳혔었기 때문에-마지막을 앞두고는 누구나 지치게 되지 –그러나 나는 다시 거주자로서 내 방으로 퇴진해야 하고 그것을 위한 긴 재회의 편지를 자네에게 쓰고 싶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에 이 편지가 있는 거네 (291)
편지를 받은 막스 브로트는 깜짝 놀랐다. 지나치게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데다 문학만이 자기 존재의 전부이자 자기 자신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카프카에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막스 브로트는 즉시 카프카의 어머니 율리에에게 카프카가 쓴 편지 내용과 함께 글을 써 보냈다. (292)
그녀는 남편에게는 카프카가 매일 공장에 잘 나가고 있다고 속이고, 그 대신 사위인 카를 헤르만의 동생 파울 헤르만에게 공장 일을 보게 했다. 이로써 공장 문제로 인한 갈등은 얼마간 일단락된 듯했다. (293)
펠리스와 활발히 서신 왕래를 하다
9월 28일에 쓴 두 번째 편지에 그녀가 답장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초조해진 카프카는 10월 13일 페리스에게 회답을 재촉하는 편지를 썼다.(294)
카프카는 조피(막스의 누이동생)를 통해 펠리스가 자신의 두 번째 편지에 대한 답장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아직 그 편지를 받은 적이 없어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고, 펠리스도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10월 23일 카프카는 마침내 말린 장미꽃과 함께 보낸 펠리스의 두 번째 편지를 받았다. (295)
1912년 10월 31일 이래로 카프카와 펠리스는 거의 매일, 어떤 때는 하루에도 두세 차례 편지를 썼다. 그것은 종종 속달이나 등기로 보내졌고, 때로는 전보도 포함되었다. 1912년 9월에서 1917년 10월까지 카프카가 쓴 편지와 우편엽서는 모두 500통이 넘었고, 그중에서도 첫 1년 동안 보낸 편지는 전체의 반을 넘었다. 그리고 펠시스 바우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던 1912년 9월 25일 이후부터 1913년 1월 말까지 카프카의 일기는 공백으로 남아 있는데, 그것은 그녀에게 편지 쓰는 일이 일기 쓰는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펠리스에게 보낸 500통이 넘는 카프카의 편지는 언어의 예술적인 완성도와 깊은 자아 성찰에 대한 ”세계문학사상 유례없는 증명서“였다. 또한 그는 펠리스에게 독신자이자 구애자로서 때로는 여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쓰는 질투심 많은 남자이기도 하고 때로는 영원한 아들이며 성숙한 남자이기도 하고 또 작가이자 사랑에 빠진 평범한 남자이기도 했다. (297)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펠리스는 편지의 내용으로 그가 글쓰기를 위해 현실적인 것을 많이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시적 환상에 동조해 자신의 현실적 감각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카프카의 어머니처럼 그가 지금은 문학에 대해 낭만적인 생각에 젖어 있지만, 결혼해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을 꾸리게 되면, 더 이상 글 쓰는 일로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자신의 안정된 직업에 헌신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우선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절도 있게 생활하며 잠을 푹 자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11월 5일 펠리스가 보낸 편지에 대해 카프카는 자신의 문학적 실존방식에 대한 확고한 태도를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고 나섰다. (299)
저의 글쓰기에 대한 저의 태도를 그대는 좀 다르게 평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저에게 더 이상 ‘절도와 한계’를 충고하지 않겠지요. 인간의 나약함은 이미 ‘절도와 한계’를 충분히 정해놓고 있으니까요. 제가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모든 것을 다 걸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만일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전 얼마나 구제할 길 없는 바보이겠습니까? 저의 글쓰기가 무의미할 수 있습니만, 그렇다면 분명히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저의 존재 또한 철저히 무의미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제 몸을 아낀다면, 그것은 제 몸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오히려 저를 죽이는 것입니다. (300)
<변신> 해설
이미 수년 전에 쓴 미완성 소설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에서도 인간이 동물로의 변신을 바라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주인공 라반이 시골에서 결혼식을 앞두고 역으로 가는 도중에 결혼식에는 “옷을 걸친 몸”을 보내고 자신은 “커다란 딱정벌레”로 변한 채 침대에 누워 있기를 원하는 장면이다. (350)
카프카에게 동물의 메타포, 특히 그가 다루었던 ‘무용하고 낮은 동물’의 이미지 혹은 ‘고귀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동물의 이미지는 자기 실존을 나타내는 중심 메타포로 사용된다. <변신>을 시발점으로 카프카의 작품에는 말하고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많은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즉, 탐구하는 개, 욕망에 찬 자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굴을 파는 동물, 啓明계명된 원숭이, 노래하는 쥐 등은 모두 고유의 의지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카프카의 작품에 나오는 동물은 사회적 규범성과 구별되는 다른 것을 대표한다. 그러나 상이함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 권력과 폭력의 희생물이 된다. 그들은 동물이라는 인간과 같은 계보에 속하면서도 함께 살 수 없는,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의 모순점을 알고 있는 말 없는 증인이기도 하다. (351)
특히 아버지 헤르만은 음식 솜씨가 없는 식모를 “짐승 같은 것”으로, 폐결핵에 걸린 상점 점원을 “병든 개 같은 놈”으로, 식탁에서 흘리면서 먹는 아들을 “큰 돼지 같은 놈” 등으로 욕을 해대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들을 “생선처럼 찢어발길테다”라고 위협을 하기도 했으며, 카프카가 동구 유대 연극배우인 이차크 뢰비를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는 “개들과 잠자는 자는 빈대와 함께 일어난다”라고 모욕을 주기도 했다. (351)
이렇듯 카프카는 일찍부터 아버지의 욕지거리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아무 이유 없이 동물이 경멸과 무용성과 결합되는 것을 보아왔다. 인간 세계에서 동물로 존재한다는 것은 저주요 공포였다. (352)
그는 해충으로 변해가는 인간의 의식을 시각화해 우리 시대의 의식구조를 충격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그는 대상을 바라봄으로써 그 상황을 묘사하고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시각화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없는 숨겨진 내면세계를 이미지화하고 서술한다. 구스타프 야뉴흐와의 대화에서 볼 수 있듯이 카프카는 사진을 찍듯 눈에 보이는 ‘인간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오히려 그의 소설은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눈을 감음으로써” 볼 수 있는 이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카프카가 피카소의 그림을 “우리의 의식 속에 아직 들어오지 않은 기형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한 ‘데포르마시옹’ 기법과 같은 것으로 더욱 충격적이고 섬뜩하게 각인된다. (353)
<변신>이 출판되기 전, 볼프 출판사가 위임한 화가 오토마르 스타르케가 <변신>의 표지에 실제로 커다란 곤충의 모습을 그려 넣으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카프카는 출판사에 강한 반대 의사를 전했다.
지금 저는 작은 ... 걱정을 합니다. 스타르케는 실제로 삽화를 그리는 사람이니 그 곤충 자체를 그리려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기를. 제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그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당연히 그 이야기를 더 잘 알기에 부탁하려는 것입니다. 그 곤충 자체를 묘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메타포로서 표현되는 커다란 곤충은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자유를 갈망하는 한 개인의 자율적인 실존형식(예술가적 실존이나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자아)과 그것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로서, 이것은 고정된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인간사회에서는 무가치하고 해로우며 그러므로 낯설게 보일 수밖에 없다. 둘째로 한 인간이 사회의 경제적.기능적 존재로서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거나 그것을 원치 않을 때 그는 20세기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경제논리에서는 무용하고 열등하며 부정적인 해충과 같은 그로테스크한 존재로 보일 뿐만 아니라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이 시대의 충격적인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354)
인간사회의 평범한 그들은 누구인가? 그레고르의 희생적인 직장 생활에도 불구하고 몰래 작은 재산을 숨기는 아버지, 그레고르의 일거수일투족을 회사에 보고하면서 ‘사장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복종적인 대리, 회사에 속해 있으면서 사원의 건강을 챙기기는 일보다는 회사의 규칙을 따르는 기능인에 불과한 ‘비인도적인’ 의사 등이다. 그들은 경제적.사회적 권력기구와 질서체제에 완전히 복속되어 있는, 인간적인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더구나 그레고르의 변신 후 수입원을 잃은 가족은 완전히 생업에 매달린다. 어머니는 밤에 바느질을 하고, 누이동생은 낮에는 판매원으로 일하면서 저녁에는 보다 나은 자리를 얻기 위해 계속 교육을 받고, 아버지는 마치 일할 준비를 하고 상관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이 집에서도 유니폼을 입은 채 졸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권력체제의 속성에 따라 무능하고 무용한 자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자로 변한다. 그들에게 경제적.사회적 기능을 잃은 그레고를 잠자는 더 이상 아들도 오빠도 아닌 위협적인 ‘짐승’이나 무용한 ‘물건’일 뿐이다. 그레고르는 그들에 의해 가족의 영역에서 소외되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리게 된다. 특히 처음에 그레고르를 정성껏 돌보아주던 누이동생 그레테는 가장 극단적인 적대자로 돌변한다. “없어져야 해요. 아버지, 그 방법밖에 없어요. 저게 그레고르 오빠라는 생각은 집어치우세요”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로 깊은 상처를 입고 자기 방에 유폐된 채 죽음을 맞는다. (356)
그레고르처럼 초기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20세기 초의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오직 유용성의 원리에 지배당하고 있는 소외된 존재, 즉 권력체제에 함몰된 세인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랑과 휴머니즘으로 감싸주어야 할 가족도 비인간적인 경제논리에 그 존재가치를 상실해버리고 만 것이다. (356) 이 작품은 당시의 독자들에게 전혀 의식하고 있지 못했던 인간의 부조리한 현존 상태를 섬뜩한 충격으로 전해주었다. 이것은 바로 젊은 카프카가 1904년 1월 27일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던, 독자의 물화된 사고와 고착화된 세상사의 관습을 해체시키는 그런 작품인 것이다.
우리는 다만 우리를 깨물고 찌른 책을 읽어야 할 거야. 만일 우리가 읽은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재앙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에게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357)
펠리스와의 갈등과 구혼
밀물처럼 밀려오던 카프카의 창조적 영감은 1913년 2월에 들어서면서 점차 사라져갔다. 소설 <실종자>는 진척 없이 중단된 상태였고, <변신>도 마지막 부분이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 그대로였다. 게다가 그이 변덕스러운 감정 변화를 이해할 수 없는 펠리스 역시 침묵하고 있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던 막스 브로트도 2월 2일 에자 타우시히와 결혼한 후에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날 정도로 소원해졌다. 또한 막스 브로트를 비롯한 펠릭스 벨치, 후고 베르크만 등은 프라하에 시온주의 운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마르틴 부버의 영향으로 시온주의에 깊이 관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카프카는 유대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시온주의가 유럽의 민족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게 생각되었기 때문에 거리감을 두고 바라볼 뿐이었다. (358)
그는 마치 신이 그녀를 자신에게 맡긴 것처럼 그녀를 걱정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와 함께할 수 없는 자신의 소극적인 태도를 나폴레옹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시체에 관한 주목할 만한 해부 소견서”를 들어 해명하고 있다. 카프카가 읽었던 <죽어가는 나폴레옹>의 말미에 영국 군의관 윌리엄 헨리가 쓴 시체 해부 소견서가 있었는데, 나폴레옹의 ”성기 부분과 고환이 매우 작았고, 성기 전체는 죽은 자가 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동정이었음을 설명해주는 듯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카프카가 이 사실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김나지움의 급우였던 성병 전문의 후고 헤히트에게 왜소한 성기를 가진 사람은 성욕부진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카프카는 영웅 나폴레옹에 빗대어 자신의 결혼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을 은연중에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펠리스는 오히려 단둘이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배를린에서 만날 것을 청했고,... 카프카는 둘이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과 불안감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 (360)
4월 3일 카프카는 건강과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 프라하 북쪽의 근교 누슬레 지역에 있는 카를 드보르스키의 집을 찾았다. 나무와 꽃밭과 채소밭을 가꾸고 있는 원예농장 주인 드보르스키는 <변신>의 작가인 그를 기꺼이 환영했다. 카프카는 4월 7일부터 직장이 끝난 후 그곳에서 일을 했다. (365) 그는 꽃보다 채소 가꾸는 일을 더 좋아했고 자기 소유의 텃밭을 가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두 시간씩 이른 저녁에 그곳에서 원예 지도를 받았다. 그는 펠리스에게 채소밭을 가꾸는 목적에 대해 이렇게 썼다.
원래 주된 목적은 몇 시간 동안 나를 자기 학대에서 해방시키고,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끔찍한 업무-사무실은 정말이지 지옥과 다름없습니다. 다른 것은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와는 정반대로 우직하고 성실하며 유용하고 말이 필요 없으며 고독하고 건강하며 힘이 드는 작업을 해보려는 데 있습니다.... 나는 두 시간 동안 이 고통에서 벗어나 은근한 행복감 속에서 그대를 생각하고 밤에 약간의 숙면을 취할 수 있는 계기로 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장래에 내 자신의 텃밭을 갖고 싶고 그때를 대비해 조금이나마 정원 일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366)
카프카는 실제로 병은 없었으나 신체적으로는 건강하지 않아서 불면증과 두통, 잦은 소화불량과 피부발진 그리고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그것은 물론 밤을 지새우며 글을 쓰기 때문이었다. (...) 그의 능숙한 체코어와 수줍은 듯한 조용한 태도,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은 농부들에게도 호감과 신뢰감을 주었다. 그들은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일하고 있는 이 낯선 도시의 이방인에게 마음을 열었고 자신의 일상사를 허물없이 이야기했다. 정원 일을 하는 동안 그는 처음으로 행복감과 해방감을 느꼈고 밤에는 충분한 수면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펠리스가 언니의 일로 하노버에 머물기도 하고 회사의 전시회 일로 하노버에서 프랑크푸루트로 여행하느라 닷새 전부터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않자 카프카는 또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바쁘기도 했지만 우유부단한 그의 태도에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과연 이렇게 변덕이 심한 남자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녀는 일주일간 프랑크푸르트에 머물면서 그림엽서 한 장만 보냈고, 베를린으로 돌아간 후에도 간간이 안부 인사를 묻는 짧은 편지만 보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가 자신에 대해 결단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심 3주 후 성령강림절에는 결혼 확약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4월 14일, 닷새나 펠리스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카프카는 자신에 대한 그녀의 태도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글쓰기가 자신의 유일한 내적인 현존 가능성”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와 그것을 이해시키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편지를 썼다. (367)
5월 7일, 펠리스의 동생 약혼식에 대해 막스 브로트에게 뒤늦게 전해 들은 카프카는 약혼식에 게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여러 번 정한 후에야 경우 펠리스의 승낙을 얻어냈다. 그는 성령강림절인 5월 11일과 12일 베를린에서 펠리스와 그녀의 가족과 친척을 만날 수 있었다. 페르디난트와 그의 회사 사장 딸 리디아 하일브론의 약혼식 날, 펠리스의 부모와 친척은 처음 보는 그를 무뚝뚝하게 대했다. 그는 자신이 그들의 첫눈에 ‘추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369)
(...) 이와 같이 카프카는 청혼을 한 상태에서도 결혼과 글쓰기 사이에서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오틀라가 종종 자신과 펠리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고, 양가의 아버지들 또한 그들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태였다. 이제 그의 결심을 정식으로 알리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정하지 못한 그는 7월 1일 자신의 여러 가지 결점을 언급하면서 다시 한 번 결혼에 대한 그녀의 각오를 타진했다.
그대를 나의 사랑하는 신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아마도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지만, 우리의 미래와 공동생활에서 그대가 가장 먼저 당하게 될 불행에 엄청난 불안을 느낍니다. 그 불행은 완전히 내 성격과 책임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차갑고 이기적이며 감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완화시키기보다는 숨기려 하는 내 모든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913년 7월 3일, 그날은 그의 서른 번째 생일이었다. 그는 “결혼을 통한 실존의 확대와 고양. 설교의 금언. 그러나 나는 그것을 거의 예감할 수 없다”라고 일기에 썼다. 그는 결혼이 당사자의 삶을 넓혀주고 고양시켜 준다는 어느 주례사의 말을 기억하면서도 이를 실천할 자신이 없었다. (377)
그렇게 기다리던 결혼 승낙을 받은 카프카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카를 바우어(펠리스의 아버지)에게 새로 쓰던 편지를 완성해 펠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동봉하면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카프카는 그 편지에서 결혼을 허락한 카를 바우어에게 그동안 자기가 서신 교환을 통해 펠리스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결혼을 승낙했을 거라면서 펠리스에게 자신이 보낸 편지를 다시 꺼내 보게 해서라도 자신과의 결혼을 재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모든 존재는 문학을 향해 있으며“ 수많은 편지로 펠리스에게 사랑을 고백하긴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을 위한 사탕발림이었고 헤어질까 두려워 기만했을 뿐”이라고 적었다. 게다가 자신은 “말이 없고 비사교적이며 짜증을 잘 내고 이기적이며 우울증상을 보이고 실제로 병약할”뿐만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이방인보다 더 낯설게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니 결혼할 경우 펠리스는 “수도원 같은 삶을 견뎌내야 할 것”이라고 썼다. (383)
중재자 그레테 블로흐의 등장
침묵과 갈등을 더 참을 수 없게 된 펠리스는 막스 브로트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 그레테 블로흐를 중재자로 내세웠다. 그레테 블로흐는 1913년 4월 펠리스가 프랑크푸르트 광고 박람회에서 알게 도니 스물한 살의 젊은 처녀로 프랑크푸르트의 차이스 회사에서 속기타자수로 일하고 있었다. (...)1913년 10월 29일 카프카는 펠리스이 친구라는 그레테 블로흐에게 10월 30일 정오쯤에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392) 카프카는 그레테가 묵고 있는 슈바르체스 로스 호텔 로비로 찾아갔다. 펠리스와 비슷한 연배의 여성을 예상했던 그는 젊고 자그마한 체구에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활력 넘치는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 그녀는 펠리스가 부탁한 일을 설명하고, 펠리스가 그의 방문을 기대하는 듯하니 베를린으로 그녀를 직접 방문해달라고 설득했다. 카프카는 그녀의 당돌함과 침착함에 놀랐고 그녀의 붙임성과 여성적 매력에 끌렸다. 그들은 그날 오후 내내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393)
이들 두 사람은 서서히 서로에게 끌리고 있었다. 카프카에게 그레테는 착한 요정 같았고 자신의 고독한 마음을 나누고 괴로움을 토로할 수 있는 새로운 친구였다. 그녀 역시 아홉 살 많은 카프카를 박사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그는 그녀의 일고라 신상에 대해 자상하게 관심을 가져주었고 혼자 사는 여성의 불편한 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 어떤 책을 사고 어떤 작가를 읽어야 하는지 상세하게 이야기해주는 그는 그녀에게 자상한 아버지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 그때 카프카가 같은 날짜에 그레테와 펠리스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어보면, 그레테에게 보내는 편지의 행간에 더 깊은 사랑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395)
카프카도 협소하고 단조로운 프라하를 떠나고 싶었다. 그의 고향 프라하는 그에게 ”고향과는 전혀 다른 장소, 추억의 장소, 슬픔의 장소, 편협함과 수치심의 장소, 유혹의 장소, 권력 남용의 장소“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베를린에 있는 에른스트 바이스는 카프카에게 현실적인 것에 매달려 그의 영육을 지치게 하는 펠리스 바우어를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 충고했다. 그는 창조적인 호라동은 완전한 자유 속에서만 가능하다며 카프카에게 펠리스를 포기하고 프라하를 떠나라고 충고했다. 카프카 자신도 오래전부터 프라하를 떠나고 싶었고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직업을 포기하고 프라하를 떠나거나 아니면 적어도 봉급이 없더라도 긴 휴가를 얻어야겠다고 결심했다. (409)
1914년 2월부터 그는 <디 노이에 륜트샤우>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베른트 무질을 통해 그곳의 전속작가 자리를 알아보았고, 마르틴 부버와 에른스트 바이스를 만나 베를린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할 수 있을지 타진해보았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독립적인 작가로 활동하려면 우선적으로 작가로서의 명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411)
<소송>의 창작 과정과 해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카프카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카프카가 알고 있는 독일어권 문화계를 대표하는 문인들이 징집되거나 지원병으로 전자에 나감으로써 문학계는 황폐해졌다. (...) 프라하에는 묘하게도 카프카 친구들만 남았다. 병역 미필로 소집을 기다리고 있는 펠릭스 벨치, 장님인 오스카 바움, 척추병이 있는 막스 브로트, 허약한 체질로 보충역 판정으로 징집이 연기되어 있는 카프카만 프라하에 남아 있었다. (433)
그는 잠시 팔베개를 한 채 침대에 누워 베를린의 아스카니셔 호프 호텔에서 있었던 파혼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1914년 7월 23일 처음으로 그때의 일과 연관시켜 자신의 일기에 ‘법정’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했다. 그는 일기에 파혼 앞에선 자신을 “법정에 선 자신”으로, 파혼을 “판결”로, 파혼 장소를 “호텔 안의 법정”으로 묘사했으며, 7월 27일에는 작별 편지를 “형장에 대한 요구”로 명명했다. 그러고는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 글을 씀으로써 파혼으로 인한 좌절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구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7월 28일 그는 일기에 “글 쓰는 일로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면 나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썼다.
그는 즉각 다음 날 일기에 소설 <소송>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단편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소송>에 나오게 될 인물인 ‘요제프 K’와 ‘문지기’가 언급되었고 죄 없이 직장에서 퇴출당하는 고용인의 알 수 없는 죄와 처벌에 관한 이야기도 다루어진다. 이야기들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새로운 소설 구상을 위한 확실한 이미지로 그의 뇌리에 각인이되고 있었다. (435)
한 시골 남자가 법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법문 앞을 지키는 문지기는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다. 법 안으로 입장하는 것이 후에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시골 남자는 값진 물건을 뇌물로 써가며 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문지기가 하는 말은 언제나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시골 남자는 첫 번째 문지기의 무서운 모습에 질려 그의 허락만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죽고 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비유설화는 소설 <소송>과는 달리 카프카가 매우 만족했던 부분이다. 원래 카프카는 이 비유설화를 ‘성담聖譚’이라고 불렀다. 원래 성담이라는 장르는 ‘성인이나 현자’의 모범적인 삶을 통해 독자에게 삶의 ‘지혜’나 ‘성스러운 의미’를 일깨워주려는 교훈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나 계몽주의 시대의 고전 비유설화에서는 설화 전체가 지향하는 확실한 해결점이 있게 마련인데, 카프카의 비유설화에는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교훈을 주는 어떤 해결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카프카 연구가들의 의견처럼 이 ‘법 앞에서’는 전설적인 형식과 고도의 심미적 기능이 결합된 카프카 특유의 ‘움직이는 비유설화’의 유형으로서 고전 비유설화와는 달리 해결점이 없는 개방 형식의 ‘현대 비유설화’로 이해된다. (441)
여기서 독자는 카프카가 이 소설에서 사용하고 있는 ‘법원’ ‘법정’ ‘법’ 등의 메타포가 지니는 양가적 의미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는 절대적인 법의 세계로 우리가 알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그러나 모든 것 속에 편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세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적인 법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들 세계가 서로 혼재해 있어서 무엇이 현실이고 비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요제프 K나 시골 남자 모두 내적인 절대적 법(법원)을 현세적인 법(법원)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 모두 전자의 이해할 수 없고 입장할 수 없는 절대적인 법을 후자의 현실적인 실정법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접근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대성당에서> 끝부분에서 교도소 신부가 요제프 K에게 죄가 없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죄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류입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한다. (444) 그것은 현세의 실정법을 기준으로 한 대답이지 내적인 절대적 법에 의한 판단은 아니다. 사실 그는 실정법에 저촉되는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으므로 체포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자유롭게 평소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교도소 신부는 요제프 K의 대답에 “하지만 죄 있는 사람은 늘 그렇게 말하곤 하지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알 수 없는 법을 암시하는 듯한 의미심장한 말을 이어간다. “법원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오면 받아들이고 당신이 가면 내버려둘 뿐입니다.” 여기서 신부가 말하는 법(법원)은 요제프 K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법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을 달리 해석해보면, 현실적인 법(법원)이 그를 강제로 소환한 것이 아니라, 비유설화 ‘법 앞에서’의 시골 사람이 스스로 법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왔듯이 요제프 K도 자기 스스로 절대적인 내적인 법(법원)으로 다가간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어떤 죄의식이나 죄책감 때문에 무의식 상태에서 느꼈던 내적인 양심의 법을 잠에서 깨어 의식 상태가 되자 그것을 다시 현실적인 법으로 착각한다는 데 있다. 카프카는 이처럼 법이라는 메타포가 지니는 양가적 의미를 통해 소설의 다층적 구조를 형상화함으로써 주인공으로 하여금 그 미로 속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게 만든다. 그러므로 인물적 시점이 주가 되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 역시 요제프 K처럼 미로 속을 헤매게 되는 것이다. (445)
펠리스와의 재회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카프카가 일하는 노동자재해보험공사도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었다. 많은 기업과 공장이 자원과 노동력 부족으로 일시적으로 문을 닫거나 폐업하는 반면, 전장에서 돌아온 귀환병이 점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보험공사는 1915년부터 내무부로부터 ‘귀환병의 후생복지를 위한 보헤미안 왕립 지방본사’로 위임되어 상이군인, 전쟁증후군으로 생긴 신경쇠약증 환자, 폐결핵 환자 등을 위한 수용시설.치료시설.재교육시설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에 관한 일을 카프카가 담당하게 되었는데, 시설의 후생복지에 필요한 재원과 기부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직접 광고기획안이나 호소문을 작성해야 했다. 그는 정채진 자신의 업무 외에도 후생복지시설의 유치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의 여러 가지 제안과 발의에 주변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많은 기부금과 헌금이 모아졌고, 그 결과 1916년 10월 룸부르크에 전쟁 귀환병을 위한 신경치료소가 문을 열었다. (463)
그는 과로로 인해 편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가끔 심장신경증 현상도 일어났다. 그는 염감은커녕 글을 쓰겠다는 열의조차 잃어버린 듯했다. (464)
동구 유대인들, 프라하로 피난 오다
폴란드의 남동부와 우크라이나 북서부에 걸쳐 있는 갈리시아 지방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대혼란에 빠졌고, 그곳의 유대인은 프라하로 피난을 왔다. (...) 서유럽에 동화된 프라하의 유대인은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프라하의 저명한 유대 인사들은 적극적으로 후원사업에 참여했다. 원호위원회가 발족되고 이스라엘의 종교공동체가 예치한 후원금을 피난민에게 나누어주고 필요한 도움을 주었다.
예전에 렘베르크 출신의 극단을 통해 동유럽 유대인의 연극과 생활과 종교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카프카도 1914년 11월 정부에서 나온 첫 기금할당액을 가지고 투후마흐 거리의 피난민 수용소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막스 브로트의 부모가 주도해 조직된 유대 단체와 함께 구호품을 전달했다. (465)
게오르크 랑어는 카프카에게 그가 경험했던 동유럽 유대인의 소박하고 경건한 삶 그리고 하시디즘(내면성을 중시하는 경건주의 율법)의 신비주의적인 경향과 비유적이고 교훈적인 문학작품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고 토라의 율법과 게마라(미시나를 주석한 부분으로 <탈무드>의 제1부를 구성하고 있다.)에 들어 있는 주석을 설명해주기고 했다. (...) 1915년 6월 랑어의 자극을 받은 카프카는 알트-노이 유대교회당에서 미시나(2세기 말 팔레스티나의 유다 하나시가 편찬한 유대교 구전 율법집으로 <탈무드>의 기초가 되었다)에 관한 강연을 들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탈무드 학자인 이시도르 야이텔레스와 성서 해석의 “개별적인 논쟁 문제”를 논하기도 했다. (467)
카프카는 그들의 간소한 의복과 식사 그리고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태도에 동감하고 존경심을 느꼈지만, 종교적인 예식에서는 미신적인 느낌을 받기도 했다. (468)
특히 하시디즘의 비유적인 전설은 카프카의 비유설화의 서술 형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카프카는 특히 ‘유동적 비유설화’로 일컬어지는 그만의 변형된 독특한 작품 구조로 현대인의 고착된 사고와 인식의 한계성, 나아가 전통적 가치와 의미까지 해체시킨다. 이러한 현대 비유설화의 범례적인 작품으로는 그의 최초의 비유설화인 <나무들>을 비롯해서 <법 앞에서> <포기하라> <돌연한 출발> <귀향> <팽이> <이웃 마을> <황제의 칙명> <가장의 근심> 그리고 말년의 <비유에 대하여>등이 있다. 그의 비유설화는 특히 패러득스와 부정의 방식으로 독자의예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사고 전환을 꾀하는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소설이나 단편보다 더 충격적이고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471)
마리엔바트에 찾아온 행복
5월 13일에서 15일까지 카프카는 오틀라와 함께 카를스바트와 마리엔바트로 출장을 떠났다. 아름다운 전원 휴양지인 그곳에서 그는 오틀라와 오붓하게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전쟁과는 먼 조용한 도시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그는 한껏 취해 있었다. (488)
카프카의 작품 속에는 닫혀 있거나 열려 있는, 그러나 통과할 수 없는 문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비유설화 <법 앞에서>의 법문은 입장이 불가능하고, <황제의 칙명>에서는 죽어가는 황제의 칙명을 전달하고자 하는 칙사는 끝없이 펼쳐진 많은 궁궐과 성문 때문에 멀리서 그를 기다리는 ‘너’에게로 다가갈 수가 없다. 또한 산문 소품인 <마당 두드리기>에서는 단순히 건드리기만 해도 고문이나 죽음을 끌어들이는 문이 중요한 메타포로 나타난다. (...) 7월 3일 카프카가 마린엔바트에 도착했을 때 펠리스가 역에서 기쁘게 맞아주었다. 첫날은 앞마당에 지저분한 물건들이 널려 있는 형편없는 호텔 방에서 보내야 했다. 비바람마저 몹시 몰아쳐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다음 날, 그의 세른세 번째 생일이기도 한 7월 3일 그들은 벨모럴과 오스번 성이라는 고급 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그들의 방은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문과 문이 맞닿아 있고 열쇠가 양쪽에 있었다.” 혼자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 있는 그에게 방은 따로 쓰지만 펠리스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였는지 카프카는 여기에서도 계속 심한 두통과 불면증으로 시달렸다. 사흘째 되는 날 그의 일기에 벌써 “공동생활의 어려움” 이라는 문구가 보이는가 싶더니 7월 6일에는 아예 “불행한 밤. F와 산다는 것의 불가능성, 그 어느 누구와 함께 생활한다는 것의 참을 수 없음”이라고 적었다. (491)
그러나 며칠간 몰아치던 비바람이 물러가고 날씨가 쾌청해지자 그들은 마리엔바트 근교에 있는 마을 테플의 프레몽트레 수도원을 구경하고 들로 소풍을 나갔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그들의 관계도 놀랍도록 좋아져서 남은 5일간의 휴가는 행복한 나날이었다. (492)
1916년 7월 25일, 3주간의 휴가를 마치고 사무실에 출근한 카프카는 라이프치히의 볼프 출판사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에게 직장을 휴직하고 볼프 사의 원고 심사위원으로 와달라는 요청과 함께 새로 쓴 작품이 있으면 출판하자는 것이, 그리고 <선고> <변신> <유형지에서>를 하나로 묶어 ‘형벌’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내는 게 어떤지 카프카의 의사를 타진했다. “지금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리고 선고, 변신, 유형지에서를 한 권으로 묶어 ‘형벌’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하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반대 의사를 비쳤다. (495)
특히 그는 <선고>의 단행본 출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 그러던 중 전선에 있던 쿠르트 볼프가 볼프 출판사로 복귀했다. 그는 카프카에게 <선고>는 단행본으로 출판할 수 있으나, <유형지에서>는 너무 고통스러운 내용이어서 총서의 단행본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회답을 보냈다. (496)
카프카는 자신이 어째서 고통스러운 작품을 쓸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밝히면서 동시대인의 이해를 얻지 못하는 자신의 카산드라적 고뇌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편지에서) 그는 자기 시대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시대가 ‘고통과 상실의 시대’가 될 것임을 예지하고 있었고, 자기 자신이 겪고 있는 단말마적 고통이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전 유럽인, 아니 전 인류가 겪고 있고 또 겪게 될 고통이 되리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볼프가 비난한 <유형지에서>의 끔찍스런 고통이란 바로 새로운 기술 혁신에 따른 최신 무기의 실험장이 된 제1차 세계대전과 그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 속에서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가는 죄 없는 인간 그리고 결국 스스로 파국을 맞게 될 인류의 미래를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선지자적인 카프카의 고통이며 동시에 모든 인류의 고통인 것이다. 이 편지에서 카프카는 시대의 출판사를 표방하고 있는 출판업자가 그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일깨워주고 있다. 이로써 그는 <유형지에서>의 발간은 더 이상 추진하지 않았지만, 얼마 안 있어 그가 아끼던 <선고>가 볼프사의 총서 ‘최후의 심판의 날’의 제34권으로 출판될 수 있었다. (497)
그는 그녀(펠리스)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고 자신의 문학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뮌헨에서 있게 될 ‘신문학을 위한 낭독회의 밤’에 그녀를 초대했다. 카프카는 그녀가 보육원 일 외에도 조금씩 자신의 문학 활동에도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507)
뮌헨에서 <유형지에서>를 낭독하다
카프카는 우선 막스 브로트의 시 <코믹한 칸타타> 등 몇 편의 시를 대신 낭독한 후 <유형지에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 낭독회에는 방청객으로 오이겐 몬트, 코트프리트 퀠벨, 막스 풀버,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의 작가도 참석했는데, 스위스 작가로 당시 뮌헨서 활동하고 있던 막스 풀버는 카프카 사후 그가 당시 <유형지에서>를 낭독했을 때의 순간을 이렇게 기술했다. (...) 홀 안은 혼란이 일었다. 사람들이 실신한 숙녀를 데리고 나갔다. 그사이에도 낭독은 계속되었다. 그의 말들이 두 번이나 또 숙녀들을 실신시켰다. 일단의 방청객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작가의 비전이 그들을 압도해버릴 것 같은 마지막 순간에 많은 사람들이 도망치듯 사라졌다. 나는 구술된 말이 그토록 유사한 효과를 낸 적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한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지만 나는 끝까지 남아서 들었다.(512)
그는 그 결과에 실망했고 한탄했다. (...)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었던 것은, 릴케가 <화부>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는 오이겐 몬트의 이야기였다. (...) 저명한 시인 릴케는 당시 무명이나 다름없던 그의 작품을 빠짐없이 읽고 있었고 또 그를 높게 평가했던 것 같다. (514) 나중의 일이지만, 릴케가 카프카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은 1922년 2월 17일 그가 쿠르트 볼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증명되었다. 릴케는 “부디 카프카가 내놓는 모든 작품에 대해 항상 저를 위해 특별히 메모해 주십시오. 확신하건대, 나는 그이 최악의 독자가 아닙니다”라고 썼다.(513)
알히미스텐가쎄의 연금술사 집에서 글을 쓰다
(오틀라의 친구가 사용하려고 구했던 방을 잠시 빌리다.) 오틀라는 손수 페인트칠을 하고 대나무 가구도 들여놓고 벽에는 옷걸이도 걸었다. 그랬더니 그 작은 방은 아늑하고 조용한 방으로 변했다. 오틀라는 그 방을 선뜻 카프카에게 글 쓰는 방으로 내주었다. 카프카는 새로운 방을 구할 때까지 임시로 밤에는 그곳에서 글을 쓰고 식사는 부모의 집에서 해결하고 잠은 랑에 거리의 자기 방에서 자기로 했다.
오틀라는 원래 고집이 세고 반항적이었지만, 유독 오빠에게만은 다정다감했다. (518) 카프카는 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오히려 막내 여동생에게서 받는 기분이었다. 오틀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상점 일을 돕고 있었는데, 부모로부터 빨리 자립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그녀는 도시보다는 농촌에서의 생활을 소망하고 있었으므로 앞으로 보조원으로 농사를 배우거나 농업학교를 다닐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전쟁이 끝난 후 팔레스티나로 이주해 집단농장인 키부츠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랐다. (519)
12월 들어서면서 전쟁으로 인한 땔감 부족으로 밤에는 석탄 사용이 금지되었다. 연극, 영화, 걍연회 등도 중지되거나 취소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교통기관의 운행시간도 제한되었다. 카프카는 이 ‘어둡고 불행한 시대’ ‘얼음 같은 차가운 시대’를 수도원의 작은 골방 같은 그곳에서 추위와 싸우며 글 쓰는 일로 이겨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활에 더 없이 만족하고 있덨다. (522)
이때(1916~1917)가 바로 카프카에게 찾아온 세 번째의 왕성한 창작 시기이다. 특히 현대 비유설화적인 색채를 띤 뛰어난 작품과 메타문학적인 산문이 이 시기에 많이 나왔다. 1916년 12월과 1917년 1월에 <시골 의사> <다리> <싸구려 관람석에서> <이웃 마을> <양동이를 탄 사니아> <형제 살해>등을 썼고, 2월에는 <자칼과 아랍인>과 <신임 변호사>를, 3월에는 <낡은 종이쪽지>와 <열한 명의 아들>을, 4월에는 <가장의 근심> <광산의 방문객> <튀기>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썼다. (523) 그 밖에도 카프카는 이와 병행해 1917년 1월부터 4월까지 <사냥꾼 그라쿠스>를, 2월이나 3월에는 <이웃 > <마당 문두드리기> <만리장성의 축조> 등의 단편을 썼으며, 비유설화 <황제의 칙사>도 이때 완성되었다.
특히 <사냥꾼 그라쿠스>는 .. 사냥꾼 그라쿠스가 아주 먼 옛날 산양을 쫓다가 바위에서 굴러 떨어져 죽은 후 그가 돌아가기로 되어 있는 ‘아름다운 고향’에 이르지 못한 채 저승과 이승 사이의경계선상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사냥꾼 그라쿠스의 운명은 바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방황해야 하는 현대인의 ‘고향 상실’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주인공의 이름인 그라쿠스는 ‘까마귀’를 뜻하는 이탈리어어로, 체코어 카프카와 동의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카프카는 자신의 이름이기도 한 주인공 그라쿠스를 통해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 이승과 저승, 천상과 지상 사이의 중재를 위해 그 경계선상를 끊임없이 떠돌아야 하는 자신의 존재방식을 동시에 암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황제의 칙명>은 앞서 논했던 <법 앞에서>와 대비되는 비유설화이다. 후자에서 법 안으로 입장하기를 원하는 시골 사람이 여러 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입문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면, 전자에서는 죽어가는 황제의 칙명을 지닌 칙사가 막강한 힘과 권위의 표식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너’에게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524)
1917년 3월 2일 카프카는 새 집으로 이사했다. 구시가 클라인자이테 구역에 있는 쉔보른 팔레 3층의 방 두 개와 넓은 홀이 딸린 집이었다. 그는 펠리스와의 결혼 준비를 위해 그 집을 이미 1월에 보아두었는데, 멋진 정원이 딸려 있고 “거리가 내려다보이고 창밖엔 흐라드신 성이 인접해 있으며”, “쾌적하고 인간적이며 세간이 좀 더 수수하게 갖추어져”있었지만 “욕실과 부엌”이 없는 게 흠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글쓰기는 알히미스텐가쎄의 작은 골방에서 식사는 부모의 집에서 해결했고 그 집에서는 잠만 잤다. (525)
그즈음 프라하의 생활은 전쟁으로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식량과 땔감의 부족은 점점 더 심해졌고, 특히 민간인에게 석탄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사람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어야 했다. 비교적 부유했던 카프카 가족도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떤 때는 영하 20도의 강추위에도 석탄 없어 추위에 떨어야 했다. (526)
1917년 4월 미국이 공식적으로 연합군 측에 가담함으로써 전쟁의 결과는 확실해져 갔다. 오스트리아 군주국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하는 프라하의 체코인은 환호했지만 독일인은 반발했고, 그 사이에 낀 유대인은 더욱 불안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자칼과 아랍인>은 마르틴 부버(유대 잡지 <유대인> 편집장)의 기대와는 달리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유대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독일 문학에서 유대민족은 종종 ‘동물 메타포’로 사용되어 경멸당하고 무시당해왔다. 여기에서도 자칼도 이해될 수 있는 유대민족은 순수성을 고집하면서도 오히려 썩은 짐승의 시체를 집요하게 찾아다니는 쓰레기 활용자나 우스꽝스런 광대로 비쳐지고 있는 반면에, 아랍인은 유대인의 소동을 잠재우고 참고 견디는 우수한 종족으로 그려지고 있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도 이와 유사한 반유대적 해석이 가능했다. 이 작품은 인간의 폭력 앞에서 자신의 본성을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관습을 받아들이는 한 불행한 원숭이의 인간화를 그린 이야기이다. 무엇보다도 자연 속에서 무한한 본능적 자유를 누리고 있던 원숭이를 강압적으로 ‘평균시민’으로 길들이는 훈련 과정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인위적인 문명의 역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원숭이가 유대인을 나타내는 메타포라고 본다면, 이 작품에서 원숭이가 ‘평균적인 유럽 시민’ 문화에로 동화되어 가는 과정은 결국 서구화로 자신의 근원적인 정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서구 유대인의 모습을 비유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530)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가 <유대인>에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앞으로도 계속해서 부버와 좋은 관계를 맺으며 시온주의 표방하는 그의 잡지에 참여하고 협력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카프카는 오히려 마르틴 부버가 쓴 책을 읽고 “역겹고 불쾌한 책들”이라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그 책들이 키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와 마찬가지로 선택받은 자들의 종교적 우월감에서 나온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부버가 종교와 정치적 동기를 결합시키려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며, 시온주의 운동이나 동유럽 유대인의 경건한 신앙 양쪽 모두에게 어떤 정당성도 부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당대의 시온주의 문화 프로그램이 표방하는 ‘행복론’은 카프카에게 커다란 불신감을 불러일으켰다. 그에게 행복에 대한 기대감은 종교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로지 개인이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멀고 지난한 삶의 과정에서 도달할 수 있는 목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531)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탄생
1918년 10월 24일 오스트리아 군대는 이탈리아 군대에 대한 모든 저항을 포기했다. 오스트리아 군주국은 마지막 몰락의 길을 가고 있었다. 기 기회를 틈타 10월 28일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프라하의 체코인은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며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힘입어 프라하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가졌고, 새로 결성된 체코 국민위원회는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597)
유리 보리체크를 만나다
카프카는 어디서 4주 동안 요양할 것인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 셀레젠은 1902년 8월 카프카가족이리보흐에 채류했을 때 오스카 비움이 여름휴가를 보낸 곳으로 카프카도 그곳을 방문학 적이 있었다. (601)
카프카가 셀레젠에 온 지 약 2주가 지나서 또 다른 폐결핵 환자가 왔다. 그녀는 야위고 우울해 보였으나 꾸민이 없는 곱상하고 날씬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프라하 교외인 쾨니클리헤 바인베르게에서 온 율리 보리체크로 몇 주 후면 스물여덟 살이 되는 처녀였다. 보리체크는 가난한 유대인 구두장이이자 프라하 바인베르크 유대교회당의 사환으로 일하고 있는 에둘아르트 보리테크의 딸로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직장 특히 변호사 사무실을 전전했으며, 지금은 여동생인 푸체나가 경영하는 양장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605)
펜션에는 손님들이 모두 떠나가고 오직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외로운 그들의 마음은 서로를 끌어당겼다. 대화를 하다가 보리체크는 약혼자를 잃은 사람으로서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심과 자식도 바라지 않는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카프카 스스로도 펠리스와 헤어지면서 그녀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607)
카프카는 보리체크에게 그녀와 결혼하고 싶고 아이도 낳기를 원하는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보리체크는 몹시 당황한 듯했다. (...) 그녀는 순순히 그의 의견에 따라 9월 중순경 아무 증인도 없이 둘이서만 몰래 약혼을 했다. 그것은 카프카에게는 세 번째 약혼이었고, 보리체크에게는 두 번째 약혼이었다. 그리고 결혼은 11월에 하기로 약속했다. (...) 둘이서 약혼식을 올린 지 며칠이 지난 후 카프카는 부모와 식탁에 마주 앉아 처음으로 보리체크와의 약혼식 이야기를 꺼내며 그녀와 결혼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그의 급작스러운 통보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런 가난하고 비천한 여자와의 결혼에 동의할 수 없었다. 권위를 중시하는 그에게 그것은 가문의 수치이고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었다. (611)
거기에다 보리체크가 예전에 창녀 생활을 했다는 치명적인 소문도 들어있었다. 그것은 즉각 카프카의 부모에게 전해졌고, 그들은 카프카 몰래 흥신소를 통해 그 소문을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다. (612) 그는 자신의 느낌을 믿고 싶었다. 또한 설사 소문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는 과거를 문제 삼지 않겠다고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 부모와 친구들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그의 결심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카프카는 결혼 전 보리체크 가족에게 자신의 건강상태를 확인시켜주기 위해 9월에 프리델 피크에게 다시 한 번 철저한 건강검진을 받았다. 카프카는 체중을 늘린다는 조건으로 결혼생활을 해도 좋다는 의사의 진단서를 받아냈다. 613)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또다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계약한 집으로 이사하기 이틀 전에 그 집이 다른 사람에게 양도되었다는 소식을 받은 것이다. 카프카와 보리체크는 함께 살 집이 없이는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에 11월 1일에 있을 예정이던 결혼식은 무한정 연기되었다. 그의 소설 속 사건들처럼 카프카의 삶은 ‘지연과 유예’의 연속이 되어버린 것이다. (613)
카프카는 불행을 자신의 또 다른 정신적 패배로 받아들였다. 그는 예전 펠리스의 경우에서 처럼 사태의 근본 원인이 우연이 아닌 자신의 정신적인 무능력과 함께 운명적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너무 과신했다고 보리체크에게 고백했다. 그리고 펠리스에게 했던 것처럼 언니 케테에게 자신과의 결혼이 보리체크를 불행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암시의 글을 써 보냈다. 그것은 파혼 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614)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쓰다
막스 브로트가 떠나고 셀레젠에 홀로 남게 되자 카프카는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자문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특히 두 번에 걸친 결혼 실패로 자신을 정신적 패배자로 생각하고 있던 카프카는 이제 진정으로 무엇이 문제인가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숨겨진 성격상 결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나아가 자기 본래의 고유한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절실하게 물었다. (...) 카프카는 자신의 모든 문제점 그 저변에서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근본적인 갈등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이제 그는 아버지와의 문제를 철저히 파헤쳐 모든 것의 원인을 정확하게 짚어보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아버지와의 모든 갈등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자신을 알게 모르게 억눌러왔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616)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에도 거인인 아버지, 즉 최종심급인 아버지가 별 이유도 없이 나타나서 한밤중에 저를 침대에서 끌어내어 발코니로 데려갈 수도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제가 아버지에게 그처럼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상념이 되어 저를 괴롭혀왔습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카프카는 “마음 약하고 겁이 많으며, 결단성이 부족하고 불안한 인간”으로, 자신감을 상실한 “무가지치한 존재”로, “무한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나약한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카프카에게 순종보다는 오히려 반항심과 혐오감과 증오심을 유발했으며, 나아가 학교와 직장, 사회생활 등 모든 삶의 분야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그것은 카프카가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살아가며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자신감 있게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618)
제가 아는 한, 그것(유대교)은 실로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저 장난이었죠. 아니 장난도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나흘 정도 교회당에 가셨고, 거기 가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보다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무관심한 사람에 더 가까운 편이었습니다. 기도도 형식적으로 건성으로 끝냈습니다.
유대교 공동체를 통해 사회생활을 배워나가는 다른 유대인 아이들과 달리 교회 의식이 ‘희극적’인 장난으로까지 여겨질 정도로 ‘유대교 신앙이 전무한’ 가정에서 자란 어린 카프카는 외부 사회에 대해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태도를 가진 청소년으로 자라게 되었고, 그것은 성인 된 후에도 그의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619)
막스 브로트에 따르면, 카프카는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에게 그 편지를 전달할 생각이었는데, 그것을 직접 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니는 좋은 말로 다독여서 그것을 아들에게 되돌려주었고 그 후로 그 편지에 대해 언급이 없었다고 했다. (624)
메란으로 요양을 떠나다
카프카는 1919년 11월 말부터 다시 출근했다. (...) 카프카의 새로운 업무는 다른 분과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에 대한 법률적 평가, 외부로부터 전달되는 법률 사건에 대한 공사의 입장 표명, 그리고 공공 기관이나 기업체와의 공적인 서신 왕래 담당 등이었다. 직책의 중요성과 혼자 하는 일이라 업무량이 훨씬 줄어들었다. (626)
카프카는 병으로 1919년에 단지 7개월밖에 근무하지 않았지만, 국장은 그의 법률가로서의 경험과 전문지식을 누구보다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열이 나거나 잔기침을 했고, 보리체크와의 결혼이 수포로 돌아간 후 또다시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만성적인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그가 최근에 쓴 것이라고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가 전부였고, <젤프스트베어>의 편집을 맡고 있는 펠릭스 벨치와 넬리 엥겔의 부탁으로 두 개의 비유설화 <황제의 칙명>과 <가장의 근심>을 각각 9월호와 12월호에 개재했을 뿐이었다. 이 작품들은 1917년 봄에 쓴 것으로 작품 모음집 <시골 의사>에 포함되어 출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이처럼 그의 창작은 침체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독일어권 문화계는 계속 그의 글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627)
1920년 1월 초 카프카는 문학적 침체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간 건드리지 않고 있던 일기를 다시 썼다. 그리고 이 일기장에 1월 6일부터 2월 29일까지 또다시 새로운 형태의 성찰적 단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취라우에서 썼던 109개의 잠언과 같은 철학이나 종교에 관한 명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실존과 직결된 문제, 즉 투쟁, 처벌과 법정, 삶의 불안과 삶의 동경, 무력감, 외로움, 슬픔, 인간존재의 주조리성, 자신의 분리된 의식 등에 관한 문제가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일인칭이 아닌 삼인칭 ‘그’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자신을 개입시키지 않은 표현으로 제시된 판단과 인식에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628)
그러나 2월 20일경 계속되는 혹독한 추위 속에 카프카는 심한 고열과 계속되는 기침으로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 (...) 양쪽 폐첨에서 폐결핵 진행 증상이 포착되어 그는 3개월간 요양을 권유받았으나 우선 8주간의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629)
밀레나 폴락과 서신을 교환하다
메란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1920년 4월 초였다. 카프카는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발코니의 긴 의자에 누워 몇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빈에 살고 있는 은행원이자 문필가인 에른스트록락의 아내인 밀레나 폴락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저널리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려는 스물세 살의 그녀가 카프카에게 <화부>를 체코어로 옮기고 싶다며 허락해달라는 편지였다. 그는 체코독자에게 자신의 작품을 알릴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기꺼이 승낙했다. 그리고 그 일을 인연으로 1919년 10월 프라하의 카페 아르코에서 그녀를 잠깐 만났고 이후로도 그녀는 발간된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문제로 카프카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왔었다. (633)
그녀의 솔직 담백한 성격, 긍정적인 사고와 활달하면서도 깊이 있는 편지 내용은 카프카의 마음을 금방 사로잡았다. 이를 계기로 그들 사이의 서신 교환은 빈번해졌고, 그녀는 금방 카프카의 또 다른 ‘편지 연인’이 되고 있었다. (638)
카프카는 이미 개인적으로 에른스트 폴락을 알고 있었고, 신뢰감을 주는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카프카는 그가 극심한 생활고로 폐결핵에 걸린 아내를 모른 척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639)
카프카는 조금만 보호를 받는다면 그녀의 폐결핵은 곧 나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병 치료를 위해 돈을 빌려줄 테니 빈을 떠나 요양하지 않겠냐며 고통만 안겨주는 남편 곁을 떠날 것을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그러나 밀레나는 그토록 어렵게 얻어냈던 폴락과의 결혼생활(아버지-체코 학식있는 집안-한때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유대인과의 결혼을 인정하지 못해 그녀를 상속에서 제외시켰다.)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천재적인 작가적 역량을 가진 그리고 자신을 향한 진지한 사랑의 감정을 표시하고 있는 카프카에게도 깊이 끌리고 있었다.(640)
열정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젊은 그녀에게 편지는 뜨거운 사랑, 즉 정신적.육체적 결합을 위한 매개체에 불과했다. 그녀는 당장 빈에서 그를 보고 싶어 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제안에 당황한 카프카는 우선 병을 핑계로 이를 회피했다. (...) 그리고 밀레나는 카프카가 여전히 보리체크와 약혼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병을 핑계로 빈에 오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642)
카프카는 난처하긴 했지만 그녀의 질투가 싫지 않았다. 그러나 카프카는 빈으로 가는 것을 주저했다. 또다시 새로운 사랑의 모험을 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643)
카프카는 이미 많은 언론 보도 외에도 프라하 거리에서 벌어지는 유대인에 대한 멸시와 폭력행위를 직접 보아왔다. 유대인 작가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막스 브로트의 작품을 상연하던 뭰헨 극장에서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야유가 터져 나왔고, 카프카가 체류하고 있는 메란의 오토부르크 펜션에서까지도 유대인을 비난하고 경멸하는 폭언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646)
이러한 카프카의 불안이 가라앉은 것은 그들 사이에 3주 이상 20여 통의 편지가 오고 간 후였다. 그는 6월 23일 편지에서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면 그녀가 빈을 떠나야만 하며, 자신은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두 사람을 위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고 썼다. 그는 밀레나와 함께 살 생각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그녀가 폴락 곁을 떠날 수만 있다면 서로가 문학적 삶을 누구보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647)
밀레나와의 사랑은 절망적이던 그의 삶에 새로운 희망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러나 보리체크는 여러 차례 카프카를 찾아와서 ”그를 떠날 수 없다“고 압박했다. 그녀는 밀레나에게 쓴 편지를 가지고 와서 카프카에게 직접 보내라고 강요하기도 하고 그녀의 남편에게 알리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카프카는 그녀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자칫하면 삼각관계, 나아가 사각관계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밀레나에게 전보를 쳐서 긴박한 상황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밀레나의 이해와 현명한 대처로 보리체크와의 일은 별 탈 없이 끝날 수 있었다. (651) 카프카는 현실적인 무능력과 거기서 오는 절망으로 고통받는 자신에 비해 삶의 지혜와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을 감싸준 밀레나를 바라보며 그녀에게서 “스승”이나 “어머니 밀레나” 같은 모습을 보았다.(652)
에른스트 폴락은 그간 카프카를 생존하는 독일어 작가 중 최고 작가로 평가해왔는데 그런 카프카가 자신의 아내와 사랑한다는 것은 자의식이 강한 플레이보이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밀레나는 폴락이 자신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카프카를 직접 만날 것을 벼르고 있다고 알려왔다, 카프카는 몹시 놀랐지만 밀레나에게 세 사람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각각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주지시키고자 노력했다.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폴락은 결코 자신과 그녀의 사랑에 방해물이 될 수 없으며, 카프카 역시 그들 부부 사이의 방해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고자 했다. (653)
카프카의 건강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도 밀레나는 여전히 폴락과 카프카 사이에서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카프카는 기약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7월 15일은 사랑하는 오틀라와 요제프 다비트의 결혼식이었지만 카프카는 그들을 축할 기운조차 없었다. (655)
밀레나는 그때 결혼 후 처음으로 아버지 얀 에젠스키에게 편지를 받았다. 에른스트 폴락과의 결혼을 청산하고 프라하로 돌아오면 재정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화해의 편지였다. 밀레나는 순간 흔들렸다. 그녀는 폐결핵에 걸려 있었고, 생활은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며 두 남자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라하로 돌아가면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병든 남편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고 프라하에서 카프카와 함께 지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밀레나는 그 문제를 카프카와 상의하고 싶어서 빈으로 와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계속 거부의사를 밝혔다.
카프카는 밀레나가 프라하의 다른 유대인과 살기 위해 빈의 유대인을 떠난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더 큰 화를 자초할 수 있으니 밀레나다운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고 충고했다. (657)
카프카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자 의사는 폐결핵 전문 요양원으로 갈 것을 권했다. 하지만 카프카는 밀레나를 만나보는 것이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카프카와 밀레나는 8월 14일과 15일 주말을 이용해 그뮌트에서 만났다. 그들은 주변 숲을 거닐면서 귿르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밀레나의 아버지 문제에 대해서도 상의했다. 그리고 밤에는 같은 호텔에 묵었다. 두 사람은 모두 육체적 만족감도 정신적 위안이나 안정감도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의 사랑의 궤도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레나는 여전히 현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했고 카프카는 그녀가 무조건 폴락 곁을 떠나기를 원했다. (659)
밀레나는 병든 폴락과 몇 주간의 휴가를 보내기 위해 볼프강 호숫가의 도시 상트길겐으로 떠났다. 밀레나는 그곳에서도 가명으로 된 우체국 개인사서함을 이용해 남편 모르게 카프카와 서신 왕래를 계속했다. 프라하로 돌아온 카프카는 밀레나가 그의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나 있는 것에 질투심과 수치심을 느꼈다. 밀레나의 사랑 고백 모두가 거짓으로 느껴졌다.
카프카는 밀레나를 알게 됨으로써 원치 않았던 일상적인 일에 말려들었다. 그는 밀레나의 사적인 일로 그녀의 친구들인 스타샤나와 그 주변 인물의 조야한 일에 관여되거나 병든 몸을 이끌고 37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밀레나의 죽은 남동생 무덤을 찾아 꽃을 바치거나...낯설기만 한 모든 일은 그를 혼란에 빠뜨렸고 가뜩이나 건강하지 못한 그의 심신을 지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그들에게 밀레나의 다음에 올 ‘사랑의 계승자’로 비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에게는 조야하고 복잡한 일상적인 일에 계속 말려드는 것 자체가 심한 모욕과 고통으로 인식되었다. (660)
카프카는 이제 자기 본연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고유한 작가적 실존의 세계였고, 그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구원의 세계였다. 그러나 사랑의 실패에서 오는 고통은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카프카의 편지는 현저히 줄었지만 그녀에 대한 거부의 몸짓은 빈번해졌다.(665)
오빠의 병이 걱정된 오틀라는 그가 모르게 노동자재해보험공사의 오드슈트르칠 국장을 찾아가 또다시 병가를 신청했다. 국장은 그다음 날로 카프카를 불러 보험공사의 공의인 오들렌 고딤의 검사를 받도록 지시했다. 검사 결과 양쪽 폐첨에 결핵이 깊이 침투한 증상이 나타났다. (...) 의사는 빈 근처의 ‘빈 숲 요양원”을 추천했지만, 카프카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큰 요양원에서 행해지는 비인간적이니 치료를 전혀 원치 않았다. (667)
카프카는 지금까지 가명으로 사용했던 빈 우체국의 사서함을 이용하지 않고 그녀의 집으로 마지막 편지들을 보냈다.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이별의 시 포함 (670)
그러나 그들은 그 후에도 서로 끈끈한 우정을 이어갔다. 1921년 밀레나는 아버지와의 화해를 다시 추진했고 그해 마지막 3개월을 프라하에서 아버지와 함께 보냈다. 카프카는 당시 부모의 집에서 병으로 누워 있었고, 그녀는 네 번이나 그를 방문했다. 비록 병문안이거나 인사차 방문이었지만, 그때마다 카프카는 사랑이 주는 고통의 파고를 다시금 느껴야 했다. (672)
소설 <성>의 창작 과정과 해설
카프카의 소설 <성>은 1922년 1월 말 슈핀델뮐레 요양소에거 쓰기 시작해 1922년 8월 말이나 9월 초 프라나에서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슈핀델뮐레에서 3주간의 요양을 마친 카프카는 1922년 2월 17일 프라하에 돌아왔다 (...) 카프카는 <성>을 쓰는 일을 ‘가장 주요한 일’로 생각했다. 그는 최근 밀레나와의 사랑 때문에 괴로워했고 병으로 인해 여러 요양소를 전전해야 했으며 최근에는 정신착란 증세로 거의 절망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처음엔 자신이 늦은 밤 눈 덮인 마을 슈핀델뮐레에 도착하던 광경과 연관시켜 일인칭 시점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3장 헤렌호프 여관에서 측량사 K가 카운터에서 술을 팔고 있는 프리다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부터 삼인칭 서술로 바뀌었다. 일인칭 소설의 주인공이 작가 자신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사건에 대해 좀 더 자유로운 시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734)
마을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비서 ‘부르겔’의 에피소드가 담긴 23장까지 마무리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사건의 진척이 더뎠고 유연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병 때문에 프라하에 잠시 들렀던 것이 글의 흐름을 방해한 듯했다. 게다가 8월 마지막 주엔 정신착란 증세가 계속되는 통에 <성>을 쓰는 일을 중단해야 했다.
소설 <성>을 읽다 보면 특히 25장에 나오는 객실 하녀인 ‘페피’가 미국으로 이민 간 후 가족이 겪었던 비참했던 미국 생활을 길게 언급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이야기의 흐름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후에도 카프카는 여러 차례 그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시도했으나 그 어느 것에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카프카의 독특한 글쓰기 방법에도 기인한다. 카프카는 <성>을 쓰기 전에 “어떤 초안도 구상도 또 사전 기록도 없었다” 그는 아무런 사전 계획이나 구상 없이 단지 영감에 따라 “유령의 손에 이끌리듯” 소설을 써내려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줄거리가 어떤 결말로 흘러갈지는 그 스스로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성>은 결국 여기에서 중단된 채 결말 없이 끝나고 말았다.(736)
미완으로 끝난 카프카의 소설 <성>은 그가 죽은 후인 1926년 막스 브로트에 의해 라이프치히의 쿠르트 볼프 출판사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막스 브로트는 이 책의 편집 후기에서 소설의 줄거리가 어떻게 끝날 예정이었는지 그리고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혔다.
카프카는 마지막 장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어떻게 소설이 끝날 것인지 묻는 나의 질문에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자칭 토지측량사 K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내적 만족감을 얻는다. 그는 투쟁을 중단하지 않지만, 쇠약한 나머지 죽는다. 임종을 맞은 그의 침상 주위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바로 이때 성은 마을에 거주하겠다는 K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지만 어떤 부수적인 사정을 고려해서 그가 이 마을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것을 허가한다는 결정을 내려 보낸다...
소설 <소송>의 주인공이 불가시적이고 비밀스러운 당국에 의해 추적당하고 법정에 소환된다면 <성>에서는 바로 그러한 심급부로부터 거부당하는 것이 특징이다. ’요제프 카‘가 자신을 숨기고 도망친다면, K는 스스로 나서서 공격한다. 서로 방향은 다르지만 근본 감정은 동일하다. 이상한 서류들과 불가해한 관리들의 위계질서로, 변덕과 악의로 절대적인 존경심과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K가 결코 입장하지 못하는, 무슨 일인지 결코 재대로 접근할 수도 없는 이 ’성‘은 신학자들이 ’은총‘, 즉 인간 운명(마을)의 ’신적 조종‘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 그러므로 <소송>과 <성>에서는 (카발라의 의미로) 신성神性의 두 가지 현상형식인 ’법정‘과 ’은총‘이 묘사된다. (737)
K는 귀를 기울였다. 성이 그를 측량사로 임명했던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론 그에게 불리했다. 성이 그에 대해 필요한 것을 다 알고, 세력관계를 저울질해보고선 웃으면서 투쟁을 받아준 셈이기 때문이었다.
인용문에서 보듯, K가 측량사라는 것은 스스로 자칭한 것이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성은 그것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정해진 직업도 없이 오랫동안 방랑생활을 해온 낯선 이방인이 성과 마을의 “토지 상황과 소유 상황을 점검”하는 토지측량사를 사칭한다는 것은 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혁명적 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왜 K는 그런 무모한 희생과 도전을 자청한 것일까? 독자는 작품을 읽어가면서 K가 스스로 자신에게 어떤 확고한 정체성을 부여하고 정해진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갖게 된다. (739)
카프카는 일생 동안 일상적인 행복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비사회적인 작가로서 고독한 방랑자와 같은 고난에 찬 삶을 살아왔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의 삶은 소설 속의 주인공 K가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겪었던 오랜 방랑생활과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준다.
또한 이것과 연관해서 소설 <성>의 2장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자세히 읽어보면 방랑자 K가 그곳에 온 목표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유추해낼 수 있다. K는 여러 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다가갈 수 없는 언덕 위의 성 주위를 맴돌면서 계속해서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린다. 그의 고향 마을에는 오래된 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미끄럽고 높은 담‘이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그 담을 기어오르고 싶어 했지만 성공한 아이들은 단지 몇몇에 불과했다. 그는 노력 끝에 그 힘든 담을 넘어섬으로써 주위의 동료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고 높은 ’성취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러한 우월감과 성취감은 오랫동안 그의 삶에 내적인 근거를 마련해주었고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에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K는 그곳 마을 주민이 말없이 복종하고 있지만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저 알수 없는 강력한 권력과 권위를 지닌 어떤 심급부처럼 보이는 성에 도전함으로써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서 느꼈던 ’고양된 승리의 감정‘을 되살려보고 싶었고 마을 사람과는 다른 ’예외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싶었다. (740)
카프카 소설에 나오는 언덕 위의 성 역시 ’밤과 안개와 어두움‘에 싸여 있고 온통 공허한 눈으로 덮여 있으며 날씨마저 고약해서 으스스한 기분 나쁜 분위기를 자아낸다. 더군다나 카프카의 전형적인 서술방식이 소설의 시작부터 K에게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독자에게 K가 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두려운 시각과 비판적인 생각을 함께 느끼게 한다. (741)
프리다는 나중에서야 K가 자기중심적이고 오로지 자기 관점에 따라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며, 클람과 접촉하려고 자기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K를 비난한다.
그래서 당신은 내가 헤렌호프의 일자리를 잃어도, 브뤼켄호프마저 떠나야 하고 힘든 학교 소사 일을 하게 되어도 개의치 않지요. 정은커녕 당신은 내게 시간조차 내주지 않아요. 나를 조수들에게 내맡기고, 질투도 모르며, 당신에게 나의 유일한 가치는 내가 클람의 애인이었다는 것뿐이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클람의 애인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애쓰고 있지요. (746)
측량사 K가 자신이 생각하고 의도하고 있는 목적에 따라 사람을 자의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려는 근본적인 특성은, 미하엘 뮐러가 지적했듯이 “카프카가 자신의 작가적 실존적 특성을 연상케 한다. “글 쓰는 것이야말로.. 지상의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던 카프카는 문학이 아닌 모든 것을 부수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는 오직 문학을 위해 일반 사람이 누리고 있는 일상적인 “섹스, 음식, 술, 철학적 사고, 특히 음악이 주는 즐거움”까지도 포기했다. 자신의 부족한 힘을 모두 “글을 쓰는 목적”에 모으기 위해서였다.
카프카는 1922년 7월 5일 막스 브로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글쓰기가 지니고 있는 숙명적인 의미에 대해 썼다. ”글쓰기“는 알 수 없는 ”악마에 대한 봉사“이며 그 대가로서 ”달콤하고 신기한 보상“을 받게 되는데, 거기서 얻어지는 작가의 ”허영과 향락욕“이 일상의 진부함을 허락하지 않을뿐더러 주위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예외적 우월적‘인 존재로 남아 있기를 요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747)
그는 오로지 글을 씀으로써 폭력적인 권력에 저항할 수 있었고, 오로지 글을 씀으로써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었고, 오로지 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성찰할 수 있었으며, 오로지 글을 씀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 소설 <성>은 삶의 종말에 와 있는 카프카가 자신의 문학적 삶, 즉 글쓰기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카프카가 소설 <성>에서 K가 추구하고 도전하는 성이 무엇인지 소설의 마지막 순간까지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예의 열린 형식’, 이것이 20세기의 어떤 작가도 넘볼 수 없는 ’카프카적인 문학‘이 지닌 최고의 창조적 심미성이다. (753)
막스 브로트에게 두 번째 유언장을 쓰다
1922년 9월 18일 카프카는 거의 3개월 만에 플라나에서 오틀라와 함께 프라하로 돌아왔다. 건강상태는 점점 약화되고 있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부모의 집에서 있는 자기 방 안에서 지냈다. 그는 그런 상황를 ’체포된 생활‘이라고 표현했지만, 오틀라와 그녀의 가족이 같은 건물에 임대해 살고 있어서 큰 위로가 되었다. 그는 하루 종일 집에 머물게 되면서 처음으로 가족을 가깝게 느끼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수술을 받아 힘든 몸이었지만 아들을 사랑과 헌신으로 보살폈다. 그는 처음으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몸으로 느꼈고 또한 연로한 부모의 청에 못 이겨 같은 테이블에 앉아 저녁 카드놀이를 구경하기도 했다. (755)
10월 접어들면서 카프카의 작품이 여러 곳에서 발표되었다. (...) 이제 카프카의 작품은 멀리 미국의 독일 이민자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카프카 작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카프카의 부모도 그때만큼은 처음으로 자기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757)
카프카는 앞으로 헝거리어 번역권을 자신의 젊은 친구인 로베르트 클롭슈토크에게 일임해달라고 요청했다. 카프카는 그이 문학적 표현 능력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대학 생활에 재정적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758)
두 번째 유언장(막스 브로트에게 자기 작품들의 처리에 대한 두 번째 유언장을 썼다)은 자신이 쓴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불살라달고 했던 처음 유언장보다 사뭇 완화된 것이었다. 더 이상의 창작 활동이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처음 유언 때와는 달리 일 년 남짓 작품을 썼고 주변으로부터 작가로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카프카는 유언장도 친구에게 건네지 않고 자신의 책상 서랍에 보관해두었다.
카프카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막스 브로트가 그의 작품을 파기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카프카 자신도 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759)
이미 1920년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불 수 있듯이 카프카는 ”심리분석의 치료 부분“을 무력한 오류하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한 개인의 병리학적 정신질환으로 보려 하지 않았다. 심리분석은 카프카에게 그 당시 세대의 고통에 대한 부수적인 논평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다. (...) 카프카는 자신의 충실한 문학 친구인 베르펠이 당시의 유행하는 사회심학적 경향에 휩쓸려 그가 원래 표방하던 청춘의 강렬한 삶의 전형을 잃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762)
카프카의 의견에 따르면, 베르펠의 희곡 속 주인공인 겪고 있는 인간적 갈등과 고통은 한낱 개인이 주변 환경과 부딪히는 사회심리적 사건이 아니며, 당시 표현주의 작가들이 추구했던 대로 각 개인의 무의식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절대적 권력과의 투쟁이라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형상화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작품은 비로소 문학적인 보편성을 띨 수 있고, 베르펠은 당대의 표현주의 세대를 이끄는 인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763)
팔레스티나 행을 꿈꾸다
1927년 7월 말 막스 브로트와 펠릭스 벨치는 건강상태를 이유로 집에 칩거하다시피 하는 카프카를 그들의 시온주의 그룹에 끌어들이려고 마르틴 부버가 맡아왔던 <유대인>의 편집장 자기를 카프카에게 제한했다. 그러나 카프카는 자신이 사회적이지도 못하고 유대적인 바탕도 없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765)
말년에 이르러 카프카는 유대인의 운명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관심을 가졌다. 기대했던 전후의 사정이 전전보다 유대인에게 더 불리한 상황으로 돌아가자 자신이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을 증오하면서도 그는 그의 민족에 대한 애정의 솟구침과 생생한 유대감, 더 없이 강한 공감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 모두가 하나의 공통된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767)
그가 오래전부터 원예와 목공을 배운 것은 취미이자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팔레스티나 행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768)
1923년 봄 카프카는 정신착란 증세와 불면증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예전부터 마음속에 간직했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프라하를 떠나 어느 남쪽 나라에 가서 간단한 수공업 일을 하며 지내고 싶다는 오랜 소망을 실천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마침내 “팔레스티나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1922년 늦은 가을 프라하 유대인 사이에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예루살렘에서 온 열여덟 살 소녀 푸아 벤 토빔 때문이었다. (769) 그녀는 팔레스티나에서 태어나 자란 유대인 처녀로 성서 히브리어를 현대 구어체로 개혁한 신히브리어의 창립자 리처 벤 에후다에게 직접 현대 히브리어를 배웠다. (...)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후고 베르크만은 그녀를 프라하의 독일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도록 프라하 유대 대교회당의 율법학자인 보르디에게 추천서를 써주고. 자기 부모의 집에서 기거하도록 했다. (...) 푸고 베르크만 부모 집은 카프카의 집에서 두 불록쯤 떨어진 곳에 있었고 어머니들끼리도 친한 사이었다. 카프카는 베르크만의 어머니 소개로 푸아에게 히브리어 개인 교습을 받았다. (770)
뮈리츠에서 도라 디아만트를 만나다
뮈리츠는 멋진 해수욕장을 갖춘 휴양지였다. (...) 카프카는 해변 모래사장에서 등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조카들이 축구하는 모습과 모래톱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프카를 놀라게 한고 마음 설게게 한 것은 아름다운 해변의 풍광보다는 그들의 펜션 뒤편으로 50보쯤 떨어진 숲 속에 있는 동유럽 피난민 유대인의 아이들을 위한 ‘베를린 유대민족 보호소’의 휴양시설이었다. 그가 뒤편 발코니에 앉아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면 그곳에서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이디시어 노래나 하시디즘 신봉자들의 서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776)
그 보호소는 7년 전 그가 펠리스 바우어에게 참가하라고 권유했고 또 스스로 기부금을 냈던 보호소였으나 한 번도 직접 가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 보호시설의 어린아이들을 직접 보게 되니 감개무량하기도 하고 또 그 사실이 어떤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777)
7월 13일 저녁 카프카는 기도서를 주머니에 넣은 채 들뜬 마음으로 휴양소로 갔다. 일층 창문을 통해 부엌이 들여다보였는데, 반쯤 길고 숱이 많은 곱슬머리와 둥근 뺨과 도톰한 입술을 가진 젊은 여성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778) 그녀는 손에 칼을 들고 막 생선 비늘을 다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그 모습에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가 위를 올려다볼 때야 비로소 안으로 들어서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부드러운 손으로 이렇듯 피가 흐르는 일을 해야 하다니요” 그것이 바로 카프카와 그의 마지막 삶의 동반자가 된 도라 디아만트와의 운명적인 만남의 순간이었다. (779)
그러던 중 7월 엘제 베르크만이 팔레스티나로 돌아가기 직전 카프카에게 팔레스티나 이주에 대한 그의 결단을 묻는 서신을 보내왔다. 그러나 카프카는 건강도 좋지 않은 데다가 도라와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는 엘제 베르크만에게 자신의 건강상태로는 긴 여행이 불가능해 팔레스티나에 갈 수 없다고 고백했다. (781)
도라 디아만트와 베를린에서 생활하다
1923년 9월 23일 카프카는 “베르너 양의 위로를 받으면서, 페파의 근심어린 인사말을 들으면서, 아버지에게 애정이 담긴 잔소리를 들으면서, 어머니의 슬픈 시선을 느끼면서” 집을 나섰다. 그는 베를린 행 급행열차에 몸을 실은 후에야 비로소 10년 전 펠리스를 만났을 때 꿈꾸었던 소망을 비로소 이룬다고 생각했다. 프라하와 직장과 부모의 곁을 벗어나 자유 작가로서 베를린에 거주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가 프라하를 떠나고자 했을 때 늘 첫 번째로 떠오른 곳이 베를린이었다. (787)
카프카가 거주할 집은 베를린 외곽의 그린벨트 지역인 슈테클리츠의 미크벨슈트라세 8번지에 있었다. 방은 크고 아늑했으며, 가구 또한 잘 갖추어져 있었다. 작은 돌출창이 나 있고, 언제든지 집주인 모리츠 헤르만 부부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발코니도 딸려 있었다. 주변 환경도 훌륭해서 집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아름다운 정원들과 시골 전원풍의 빌라가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는 울창한 가로수 길이 나 있었다. (788)
카프카와 도라는 처음에는 같이 살지 않았다. 전쟁 후라 경제 사정이 나빠 아침이면 카프카는 우유 단지를 들고 줄을 서서 우유 배급을 기다려야 했고, 집주인 여자가 차려주는 식사를 했다. 멀리 떨어진 빈민 지역에 살고 있는 도라는 오전 중에 와서 카프카에게 필요한 일들을 돌보아주었다. 도라가 집안일을 하는 동안 카프카는 오후에 꼭 낮잠을 잤다. 저녁식사는 도라가 만들어주었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베를린 시내로 나가 프리드리히 거리에 있는 채식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했다.
그리고 날씨가 허락하는 한 함께 주변을 산책했고, 날씨가 좋지 않을 때에는 침대에 누워 있거나 도라의 도움을 받으며 토라와 히브리어로 된 소설책과 그리고 토라와 <탈무드>에 대한 <라쉬 주해서>를 읽었다. 또한 카프카는 그녀에게 그림 동화책이나 호프만의 환상적인 이야기,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클라이스트의 작품과 안데르센의 동화와 요한 페터 헤벨의 짧은 산문집 <라인 지방 가정의 벗, 작은 보석상자> 등을 읽어주었다. (789)
베를린의 경제적 대공황 상태는 좌.우파 간의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과 더불어 경제적 기반층인 유대인에 대한 적대 감정을 더욱 증폭시켰다. 프라하에서처럼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거나 뭇매를 가하고 그들의 상점과 쇼윈도 등을 부수었다. 한 번은 카프카 역시 여학생으로부터 씁쓸한 봉변을 당한 일도 있었다. (791)
카프카가 독일 최악의 인플레의 정점이었던 1923년 11월과 12월 사이에 집세도 내고 굶주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체코의 화폐 크로네가 독일 마르크에 비해 훨씬 안정되고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792) 또한 노동자 재해보험공사 도드슈트르칠 국장은 카프카가 베를린 교외의 지역에 체류하는 것을 요양소에 체류하는 것으로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카프카는 연금 외에도 얼마간의 부가비용을 더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카프카가 안정된 체코화로 상당한 금액의 연금을 타고 있는 박사 관료 출신 휴직자라는 사실을 안 여주인은 임대료와 난방비를 너무 자주 올려 이익을 챙기려 했다. 그 이로 여주인과 카프카 사이에 자주 언쟁이 벌어졌고 그는 11월 중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793)
새로 임대한 집은 두 개의 큰 방에 전기가 들어오고 중앙난방이었으며 임대료는 이전 집과 비슷하게 비쌌지만 더 이상 인상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붙였다. -도라가 계약하고 짐을 옮김
그때쯤 카프카와 그녀가 함께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794)
1월 28일부터 베를린에 머물던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1923년 11월부터 1294년 1월 말 사이에 쓴 <작은 여인>과 <굴>의 몇 군데를 읽어주었다. 1923년 11월 말에서 12월 말 사이에 쓴 <굴>은 카프카의 자서전적 색채가 짙게 드러나 있는 작품이있다. 일인칭 화자이자 주인공인 한 동물이 지하에 자신만을 위한 굴을 판다. 그는 전체 계획에 맞추어 건축물의 중심점인 ‘성의 광장’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위장된 입구를 비롯해서 열 개의 미로와 같은 복잡한 통로가 사방으로 연결된 굴을 완성한다. 이 굴은 단순한 거주 목적이 아닌 외부 세계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보호하고 삶을 구원하기” 위해 건설한 “자기 소유의 집”이다. 그러나 그는 외부의 적들로부터 이 굴이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을지 여전히 그 완벽성에 대해선 의심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협적인 적이 자신을 향해 파고들어오는 소음을 듣게 되면서 진원지를 밝혀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소음은 사방으로부터 들려올 뿐 진원지를 알 수가 없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중단된고 미완성으로 끝난다.(802)
이 작품의 주인공 동물과 그의 건축물인 굴의 관계를 기술하는 장면에서 카프카의 삶과 문학작품의 관계를 연상케 하는 많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굴은 문학작품으로, 굴을 파는 작업을 글쓰기로, 일인칭 화자인 동물을 작가 카프카로 환원시키면 그들 간에 상응되는 많은 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빨과 이마로 흙을 물로 부수고 짓찧고 다지는 해위는 피나는 노력 속에 행해지는 카프카의 글쓰기를 나타내며, 동물이 굴안에 파놓은 ‘리좀’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갱도는 카프카의 문학작품이 함의하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다양한 의미를 연상시켜, 또한 굴이 동물의 삶을 보호해주고 실존을 구제해 주듯이, 카프카의 글쓰기와 작품은 그의 삶의 위기로부터의 보호이고 구원이며 존재의 존립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작품 <굴>은 작가 프크카의 고통과 위기에 찬 문학적인 삶과 힘든 노력 끝에 얻어진 문학작품과 그 의미를 비유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803)
1930년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유고 발간을 위해 도라가 간직하고 있을 유고들을 요구하자 그녀는 거부의 입장을 밝혔다. (807)
도라는 카프카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상이 그의 작품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를 이해하는 척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카프카의 모든 것을 깊은 애정과 존경심으로 영원히 자신 곁에 간직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녀는 몇 년 후 세상에 대한 자신의 거부적인 태도가 어떤 손실을 가져오게 되었는가를 깨닫게 되면서 깊은 도덕적 딜레마에 빠졌다.
1933년 2월 나치가 프라하를 침공했을 때 그녀는 공산주의자 루트비히 라스크와 결혼해서 베를린에 살고 있었다. 1933년 3월 게슈타포는 그녀의 남편에 대한 증거물을 찾기 위해 그녀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그녀의 집을 샅샅이 뒤져 보관된 모든 책과 노트 기록물, 글자가 적힌 종이쪽지까지 압수해갔다. 그중에는 카프카가 그녀에게 썼던 대략 35편에 달하는 편지와 그녀가 비밀리에 간직해두었던 카프카의 노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희곡 한편과 ’오데사의 종교적 의식살인 소송‘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808)
도라는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한탄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막스 브로트는 당시 베를린 주재 체코 문정관이자 프라하 시인 카밀 호프만을 통해 카프카의 유고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흐프만은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게슈타포는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압수된 서류나 기록물 중에서 특정한 것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회답을 보내왔다. 그것으로 베를린에 남아 있던 카프카의 유고는 결국 빛을 보지 못한 채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809)
영원히 잠들다
프라하의 부모님 집으로 돌아온 카프카는 가족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위한 시도가 실패한 것에 깊은 좌절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처음에는 지크프리트 뢰비 외삼촌의 제안에 따라 가장 유명한 스위스의 다보스 요양원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3월 19일 노동자재해보험공사의 국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810)
카프카는 빈으로 떠나기 전에 클롭슈토크에게 자신의 병 상태를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M.하예크 교수의 대학병원으로 옮기네. 빈 IX라자렛 거리 14번지이네. 그러니까 후두가 너무 부어올라서 음식을 먹을 수가 없네. 신경에다 알코올 주사를 놔야 한다는구먼. 틀림없이 또 절제방식이겠지. 그러니 나는 몇 주간은 빈에 있게 될 거야... 자네의 코데인(아편 진통제)이 염려되네. 오직 코데인 0.03을 먹었는데, 오늘 그 작은 병을 다 써버렸네. “속 안이 어떤 모양일까요?” 하고 간호사에게 물었지. “마녀의 부엌 같겠지요.” 그 여자는 정직하게 말했네
다음 날 비너 발트 요양원은 그를 빈으로 보내야 했다. 그러나 마땅한 차편을 구할 수 없었던 병원 측이 찾아낸 것은 무개차였다. 카프카와 도라는 무개차를 타고 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으며 요양원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오르트만 역까지 가야 했다. (814)
펠릭스 벨치에게서 카프카의 상태에 대한 소식을 들은 오틀라가 5월 11일 카를 헤르만과 외삼촌 지크프리트 뢰비와 함께 키얼링 요양원을 방문했다. 그들은 카프카가 모르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키얼링에 온 이후 카프카는 후두를 안정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말을 적게 하고 속삭이는 어조로 의사소통을 하라는 의사의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카프카는 말 대신에 문자로 의사표시를 했다.
충실한 클롭슈토크는 그 대화 쪽지들을 하나하나 모았고 카프카 사후에 그것을 막스 브로트에게 넘겨 카프카의 다른 편지들과 함께 발간하도록 했다. (820)
카프카가 마지막 쓴 대화 기록은 도라와 클롭슈토크이 헌신적인 사랑과 눈물겨운 우정을 보여주고 있다. (...) 펠릭스 벨치와 엘리에게 카프카가 죽음에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막스 브로트는 5월 12일 키얼링으로 카프카를 방문했다. 그는 카프카가 자기 건강에 대해 의심하지 않도록 오전에 빈에서 강연이 있었기 때문에 오게 되었다고 둘러댔다. 그때 카프카는 왠지 실망한 듯 보였고 몹시 처연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막스는 도라로부터 카프카가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거절했기 때문에 그가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21) 이번으로 카프카는 세 번째 청혼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앞서의 두 경우와 달리 카프카가 스스로 결혼을 결정해서 청혼했고, 또한 카프카가 아닌 상대방 가족이 먼저 거부해온 것이다. 카프카는 슬펐지만 자신의 상황으로는 결혼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징표로 받아들였다.
도라와 클롭슈토크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의사들의 노력에도 후두의 코통은 더욱 자주 찾아왔고 점점 심해져갔다. 카프카는 이미 4년 전에 만약 자기가 더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게 될 경우 꼭 모르핀 주사를 놓아달라고 클롭슈토크에게 부탁해놓았었다. 그의 후두결핵은 의사들이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빨리 진행되었다. (822) 그는 점점 마실 수조차 없게 되어 갈증으로 괴로워했다.
도라와 클롭슈토크의 제지를 무릅쓰고 가족과 친구들이 보내주는 신문과 잡지를 조금씩이라도 읽었고, 슈미데 출판사에서 <어느 단시 광대>의 교정쇄가 나오기만 기다렸다. 그는 아직 의식이 있을 때 자기 손으로 직접 교정쇄를 수정하고 싶었다. 카프카의 뜻을 알아챈 막스 브로트가 출판사에 카프카의 위중함을 알리고 빨리 조판을 끝낼 것을 종용했다. (...)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카프카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상태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는 <어느 단식 광대>의 교정쇄를 하나하나 수정해나갔다. 교정쇄를 수정하는 동안 그의 두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823)
그는 5월 말 다시 도착한 조판 교정에 죽기 전날까지 매달렸다.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 인식능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고, 작가로서의 의연한 태도와 의지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 카프카는 고통을 줄이려고 매일 한두 번 맞는 강력한 알코올 주사와 진통 해열제인 파라미돈에 중독되어 자주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아들의 병세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은 헤르만과 율리에 카프카는 아들을 방문하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카프카는 죽기 하루 전인 6월 2일, 예전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을 안심시켜 그들의 방문을 막으려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824)
1024년 6월 2일 월요일이었다. (...) 옆에 있던 도라가 그의 손에서 쓰던 편지를 받아 그가 힘들게 부르는 대로 계속 써내려갔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도라가 눈을 들어 쳐바보았을 때 그는 기진맥진한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 편지 역시 카프카의 많은 작품처럼 그렇게 미완으로 끝나버렸다.
6월 3일 오전 4시경 도라는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깼다. (...) 카프카는 호흡곤란과 고통으로 축 늘어진 상태였다. 카프카는 혼수상태에서 클롭슈토크에게 화를 내며 약속했던 모르핀 주사를 놓아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826) “속이지 말게, 자네는 내게 해독제를 주고 있잖아!” 그러면서 “나를 죽여주게. 그렇지 않으면 자넨 살인자야”라고 외쳤다.
카프카는 1924년 6월 3일 정오경에 영면했다. 그의 나이 마흔 하고도 11개월이었다. (827)
출처
https://blog.naver.com/dehan1150/223605373180
[출처] <카프카 평전-실존과 구원의 글쓰기>|작성자 소요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