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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두 제자
요 1:35-42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 1:35-42 / [첫번째 제자들;마4:18-20,막1:16-18] 다음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 36)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37)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8)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선생님, 어디에 머물러 계십니까?' 하고 되묻자 39) 예수께서는 `와서 보라' 고 대답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머무르시는 곳에 함께 가서 오후 4시부터 밤까지 예수와 같이 있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였다. 41) 안드레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서 `우리가 ㄴ)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고 (ㄴ. 원문에는 `헬라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는 말이 들어가 있다) 42) 시몬을 데리고 예수께 갔다. 예수께서는 시몬을 유심히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그러나 이제 너를 ㄷ) 게바라고 부르겠다' (ㄷ. 원문에는 `헬라어로 번역하면 베드로이다'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이다)
본문은 갈릴리의 어부들이 어떻게 최초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두 제자(35-37) 예수님과 두 제자가 처음 대면하였을 때 두 사람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몰랐습니다. 그때에 세례 요한은 마치 중매자의 심정으로 예수님을 두 사람에게 소개하였습니다(요 3:29). 세례 요한은 자신이 받은 계시를 두 제자들에게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을 가르칠 권한을 자신에게서 예수님에게로 기쁘게 넘겨드렸습니다. 그로부터 두 제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따랐습니다. 두 제자 중 한 명은 안드레이며(40), 나머지 한 명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으로 추정됩니다.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했습니다(요 19:26). 이 구절에서 “따르거늘”이란 단어는 제자도(discipleship)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말씀을 들은 후 제 길로 돌아가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순교하였습니다.
와서 보라(38-39) 제자도가 무엇인지 “와서 보라”는 단어가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거처가 어디인지 물어보자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서 예수님 계신 곳을 보고 함께 거하였습니다. 그 때가 ‘열 시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로마식 시간으로서 늦은 오후를 뜻합니다. 이 때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휴식을 취할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인의 시간까지도 자신과 함께 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거하면서 주님의 삶과 인격을 배웠습니다. 제자란 주님을 가까이하고 주님의 삶과 인격을 배우는 자입니다. 훗날 제자들은 사역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삶과 인격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40-42) 형제 안드레의 소개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나와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으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게바(아람어), 곧 베드로(반석; 헬라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또한 제자도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신 것은 그의 삶에 대한 주권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었습니다. 훗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을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요구하셨습니다(요 21:18-19). 이처럼 제자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적용: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이 무엇인지 말해 보세요(참조 벧전 1:18, 19).
또한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께 나옵니다. 거친 바다에 뛰어난 어부였던 시몬이 하나님의 나라에 반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생활은 말씀의 생활로 이어져야 합니다. 말씀인 성경은 의로움뿐만 아니라 죄를 비춰주는 빛이며 거울입니다. 성경을 빛과 거울로 삼아 자신의 지나온 행위와 지금의 생활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거룩함을 이루려고 살아가야할 의무가 있는 사람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줄 아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능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있는 배려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참된 그리스도인을 이루어가는 한날한날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 설 교 >
The First Disciples of Jesus
김태환 목사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셨나요?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 속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일어납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두 사람이 처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한 사람은 안드레였고, 또 한 사람은 요한복음을 쓴 요한이었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본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요한의 말을 듣고 그 날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 35절이 무슨 말로 시작되는지, 조심해서 읽어 보십시오. “그 다음 날, 요한은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following day John was again standing with two of his disciples. As Jesus walked by, John looked at him and declared, ‘Look! There is the Lamb of God!’” 그 다음 날이라고 했으니까요. 그 전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다가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에게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 다음 날 요한은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자리에 서 있다가 자기에게 다가 오시는 예수님을 똑 같이 소개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때는 세례 요한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때였습니다. 요한의 말 한마디가 사회적으로 굉장한 힘을 가진 때였습니다. 웬 일인지 이 때부터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 주는 일보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에 더 열중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다가 오셨다기보다 요한이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완벽한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실제로 유명한 버나드 앤더슨 (Bernhard W. Anderson, 1916-2007) 같은 신학자는 “The Unfolding Drama of the Bible (펼쳐지는 성경의 드라마, 1957)”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보스턴 대학교 신학교에서도 가르쳤던 유명한 구약성서 학자입니다. 그가 쓴 “Understanding the Old Testament (구약성경 이해)”라는 책은 명저로 많은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는 “The Unfolding Drama of the Bible”이라는 책에서 신구약 성경 전체를 8개의 무대 (stages)로 구imagesCA3VHIIP.jpg 성된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 전에 세례 요한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것도 세례 요한의 영향력이 가장 컸을 때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요한은 자기 뒤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님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주변에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차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최초의 두 사람은 본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사실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경쟁이라는 사회 시스템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서로 제자가 많은 것을 자랑하고, 자기 세력이 큰 것을 자랑하고, 상대방의 세력이 크는 것을 견제하는 시스템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 스승 요한이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사람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어떻게 이런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어린양 제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한 사람이 제물이 되어 세상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생각해 보면 세례 요한의 말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말 아닙니까?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유대교의 제사 시스템을 부정하는 엄청난 말 아닙니까?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 사람 스스로 제물이 된다는 말 아닙니까?
두 사람은 세례 요한이 한 말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요한의 말과 인격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예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37절).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라 오는 두 사람에게 묻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겠다고요?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선생님, 어디서 머물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나를 따라 오십시오.” 이어지는 요한복음 저자의 나레이션이 재미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머무르시는 곳을 보았고, 그 날, 예수님과 함께 그 곳에서 지냈습니다 (39절).”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두 사람의 대화가 어딘가 어색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어딘가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어색합니다. 우리가 그 당시 문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배우려고 하면 학교에 가서 그 교수 밑에서 공부를 하거나, 그 사람이 가르치는 학원 같은데 등록을 해서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제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사회 제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배우려고 하면 그 사람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 밑으로 들어가서 같이 자고, 같이 먹으면서, 시간을 드려서 배웠습니다. 배우는 것도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사람 밑에서 깨우쳐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같이 지내면서 말씀도 듣고, 옆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목격하고, 예수님의 인격을 접하면서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머물고 있는 곳에 와서 보십시오.” 이 말은 영어 성경에 “Come and see!”라고 나와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Come and you will see"라고 나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께 원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을 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스승 요한의 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0에 보면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나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과 살아가는 방식과 삶의 목적, 그리고 나의 믿음과 인내와 사랑, 끊임없이 노력하는 나의 마음도 알고 있습니다 (But you, Timothy, certainly know what I teach, and how I live, and what my purpose in life is. You know my faith, my patience, my love, and my endurance).” 바울과 디모데가 처음 만난 곳은 소아시아의 루스드라 (Lystra)라는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제자로 삼아서 함께 선교 여행을 합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고난을 겪고,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디모데는 바울이라는 사람을 배우고 알아갑니다. 그의 가르침과 그의 삶의 방식, 삶의 목적, 그리고 바울의 믿음과 인내와 사랑, 복음을 위한 열정과 노력을 배웁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아는 데는 이와 같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외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과 두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이 머무는 곳에 가서 하루 저녁을 보냈습니다.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불과 5-6시간? 아니면 7-8시간? 길어야 10시간 못된 짧은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 InterVarsity Press 1998)”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상당히 명저로 평가 받는 책입니다만, 현대인들에게는 약간 지루하기도 한 책입니다. 우리 말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번역한 것은 그리 잘 된 번역 같지 않습니다. 차라리 “하나님 알기” 그렇게 번역하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패커가 사용한 단어는 knowing이라는 동명사입니다. knowledge라는 명사형이 아닙니다. knowledge라고 하면 우리는 금방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공부해서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해서 알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패커가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고 가정한다면 그 만남 자체로서 우리의 삶이 큰 변화가 일어난다.” 맞는 말입니다. 그럴 리는 없겠습니다만, 제가 오바마 (Barack Obama)를 만났다고 가정한다면 그 사실 자체가 나를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오바마를 만난 얘기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나누었던 얘기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싸인 해 준 책들을 자랑스럽게 보여 줄 것입니다. 오바마가 나에게 백악관을 방문한 기념으로 선물이라도 줬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면서 자랑할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오바마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사람들에게 자랑할 것입니다.
패커가 그 책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그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나의 생애 전체를 변화 시키지 않겠는가?” 아주 가슴 떨리는 말 아닙니까?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경험하고 비교할 수 없는 놀랍고 소중한 경험일 것입니다. 이 경험이 내 삶 전체를 변화 시킨다는 것입니다.
안드레와 요한,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을 아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함께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고,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에게서 신적인 무엇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있었습니다.....그분의 충만하신 것에서 우리 모두는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곁에 계시던 독생자이신 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4, 16-18)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서기 85-90년경이라고 합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한 것은 그 때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을 만났던 그 경험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은 그 때도 자기가 예수님을 만났던 그 때와 시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갔던 그 때는 오후 4시쯤이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t was about four o'clock in the afternoon when we went with him to the place where he was staying, and we remained with him the rest of the day (우리가 그와 함께 그가 머물고 있는 곳에 가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 그 때는 오후 4시쯤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두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 시켰습니다. 불과 하루 저녁 만에 두 사람은 놀랍게 변화 되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얘기를 더 이상 기록하지 않고, 안드레의 얘기를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안드레가 첫 번째 한 일은 그의 형 시몬을 찾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찾았어!”라고 말했습니다.”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 C. 287-212)가 했다는 유레카 (eureka)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유레카는 그리스 말로 “찾았다” “발견했다”라는 뜻입니다. 왕으로부터 자기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지 알아내라는 명령을 받은 아르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다가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원리를 발견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는 목욕을 하다가 “유레카” “유레카” 하면서 알몸으로 뛰어 나왔다고 합니다.
“형, 우리가 메시아를 찾았어!” 이 한마디 말에 시몬은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자기 형 시몬을 설득하려고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음성을 떨렸지만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똑 같은 말씀을 요한복음 4:28-30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는 마을에서 평이 좋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메시아를 만났다는 이 여자의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달려 갑니다. 이 여자의 얼굴과 눈, 이 여자의 음성이 진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마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여자의 말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요한복음 4:39)
요한은 자기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요한도 똑 같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 동생 야고보에게 가서 메시아를 만난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도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탄생했습니다. 이 제자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founder들이 됩니다. 기독교에 대한 혹심한 핍박 속에서도 이 제자들은 교회를 지켜냅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전파했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인 책임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지켜 내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수해야 합니다. 이 시대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에 우리 자신들을 기꺼이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가 원하는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세상을 바꿔 나가는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서!
김흥규 목사
꽤 오래 전에 어떤 정치인들이 국사를 돌봐야 할 시간에 카지노를 들락거리며 도박을 하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습니다. 연일 언론이 질타를 해대니까 당사자가 국민들 앞에서 사과를 했습니다. “부적절한 시간에 부적절한 장소엣 부적절한 행위를 해서 죄송합니다.” 뭐, 그런 사과였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굉장히 중요한 통찰력을 하나 얻었습니다. 국사를 돌봐야 할 국회의원이 카지노에서 도박을 한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지요. 도박하는 그 시간에 국회나 민생 현장에서 국사를 돌보는 것이 정상입니다.
죄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적절한 시간과 부적절한 장소에서 부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이지요. 오늘도 이와 같이 거룩한 주일에 가장 아름다운 행위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시간에 교회를 떠나 등산을 하거나, 동창회 모임에 가 앉아 있거나, 곗돈을 받기 위해 계모임에 가 앉아있는 것은 부적절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오늘 가장 좋은 시간과 가장 좋은 장소를 선택한 줄로 믿습니다!
■ 미국 연합감리교회에서 시무하는 Rosemary Brown이라는 여자 목사님이 쓴 글에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자마 재적 인원은 30명인데, 출석 인원은 18명 정도 되는 작은 시골교회에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3주 정도 지나 어떤 교인 한 분이 와서 특별 심방을 요청했습니다. 85세 된 자기 고모가 낙상해서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아직 교회를 나가지 않아 심방해줄 목사님이 없으니 로즈메리 목사님이 대신 심방을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목회를 시작한 뒤 처음 받는 심방 요청이기 때문에 로즈메리 목사님은 선뜻 수락했습니다. 결국 로즈메리 목사님은 약속된 날자와 시간에 맞춰 그 교인의 고모가 입원한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병원 5층의 한 병실에는 과연 교인의 고모로 추정되는 여자 노인이 붕대를 감은 다리를 침대 난간에 올린 채 누워 있었습니다. 목사라고 자기 소개를 하자 그 노인 환자는 굉장히 반가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떻게 넘어져서 엉덩이와 허리를 다치게 되었는지 죄다 목사님께 털어놓았고, 둘 사이에는 제법 친근감이 생겼습니다. 로즈메리 목사님은 신학교 때 첫 번째 방문일 경우에는 15분 이상을 넘기지 말라고 배웠는데, 이야기를 들어주다보니까 45분이 훌쩍 지났습니다. 이제는 병실을 떠날 때가 되었다 싶어서 로즈메리 목사님은 환자에게 기도해주고 싶은데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아주 좋아했습니다. 목사님이 환자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이 병상에 누워 계신 Morgan 할머니를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교인이 알려준 대로 Morgan이라는 할머니의 이름을 부르면서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데, 할머니가 손으로 목사님의 어깨를 툭툭 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목사님이 한 쪽 눈을 뜨고 할머니를 쳐다봤더니, 자기 이름이 Morgan이 아니라 Jones라고 교정을 해주었습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 목사님은 자신이 병실을 잘못 찾은 것을 알았습니다. 45분 동안 엉뚱한 환자와 대화를 나누었고, 엉뚱한 환자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하지만 그 Jones라는 할머니가 이러한 사실을 알면 실망할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별인사를 하고 병실을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간호사가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Jones 할머니를 찾아와 기도해주신 것 너무 감사합니다. 이 할머니가 병실에 입원한지가 벌써 2주째인데, 할머니 병문안을 오신 분은 목사님이 처음이랍니다.” 로즈메리 목사님은 시간은 맞았지만 장소를 잘못 찾는 바람에 이런 해프닝이 일어났지만, 오히려 이런 일로 인해 매일 그 Jones 할머니의 병실을 찾아와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Jones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장례식까지 도맡아 치러 주었다고 합니다.
<안드레 예수님을 만나다! Come & See!>
인생을 살다보면 전혀 뜻밖에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을 보면 안드레와 그의 형님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연을 소개합니다. 먼저 안드레는 예수님이 지나가실 바로 그 때,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서 있었습니다. 그 시간과 장소를 놓치지 않고 정확히 포착했을 때, 안드레는 적어도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안드레는 본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안드레와 또 한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제자가 스승인 요한을 따라 어느 지점에 서 있는데, 예수님이 지나가셨습니다. 바로 그 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은 유월절의 어린 양이 피 흘려 죽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하듯이,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해주신다는 의미였습니다.
놀랍게도 그동안 스승으로 받들어 모셨던 세례 요한의 이 말을 들은 안드레와 또 한 사람의 제자는 요한을 떠나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참 멋진 모습을 봅니다. 자기 제자들이 자기 품을 떠나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용납합니다. 단지 용납하는 정도가 아니라 흐뭇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세례 요한의 뒤를 따랐던 상당수의 제자들이 예수님 쪽으로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자기가 맡은 역할을 정확히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기는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원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터를 닦고,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기를 죄를 씻게 하는 물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성령세례를 베푼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흥하기 위해서 자기는 망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자기의 모든 제자들을 예수님께 기꺼이 넘겨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날처럼 같은 교회끼리 교인 쟁탈전을 벌이는 경쟁 시대에 세례 요한의 너그럽고 겸손한 마음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안드레를 비롯한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갔더니 예수께서 이들을 보시고 묻습니다. 38절에 보면 “무엇을 구하느냐?” 영어 성경을 보면 “What are you looking for?”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찾고 있느냐?” 돈, 명예, 부귀영화, 쾌락, 썩어질 것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마시고 또 마셔도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무상한 것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생명과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생명과 진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예수님께 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에 두 제자는 엉겁결에 예수님이 묶고 계시는 숙소가 어디냐고 묻습니다. 바로 이 때 예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39절에 보면 “Come & See!”, “와서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두 번 나옵니다. 요 1: 39절에서는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말씀하셨고, 요 1: 46절에는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이 말을 또 합니다.
이 “와서 보라”는 말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증거의 본질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고 믿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뿐 아니라, 한 번 와서 직접 보라고 초청해야 합니다. “와서 보라!”는 말은 내가 체험한 예수를 당신도 직접 체험해보라고 초청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어 사랑하는 모습을 직접 보라고 초청해야 합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모습을 직접 보라고 초청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크리스천이 된 아주 중요한 의무들 중에 하나가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고 초청하는 일인데, 이 초청이 점점 어려워져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식당이나 이발소, 미용실, 안경점, 병원, 학원이 있으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면서 당신도 한번 직접 와서 보라고 얼마나 소개를 하고 홍보를 합니까? 심지어 동창회, 계모임, 무슨 산악회, 동호회에 이르기까지 직접 “와서 보라!”고 광고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사적인 문제, 개인의 프라이버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크리스천으로 떳떳하게 살지 못하니 남에게 “와 보라!”고 말하기에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기쁨과 감격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대부분 형식적이거나 습관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냥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그냥 나 혼자 예수 잘 믿고 교회 잘 다니면 되지, 굳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권유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팽배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입니다! 교회는 죄 없는 사람이 오는 곳이 아닙니다. 완벽하기 때문에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나의 믿음이 아직 부족하고 인격에 흠이 있고, 생활과 윤리에 썩 자신이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 믿지 않는 이웃에게 “Come & See!” “와 보라!”고 초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과 상관없이 “Come & See!” “와 보라!”고 초청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증인으로 사는 생활의 특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안드레와 또 한 사람의 제자는 “와 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이 묶고 계시는 숙소로 가서 예수님과 함께 그 날을 함께 지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현장에 가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직접 목격한 안드레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를 믿고 제자가 된 것이지요! 안드레는 예수님을 영접하자마자 제일 먼저 자기 형 베드로를 찾아가 전도했습니다.
사실 안드레는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에서 눈에 띄는 제자가 결코 아닙니다. 안드레 이름 그 자체로만 나오지 않고 항상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1: 40; 6: 8)로 나옵니다. 그것도 요한복음에 베드로의 이름은 32번이나 나오는데, 안드레라는 이름은 네 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워낙 유명하고 출중했기 때문에 안드레는 언제나 형님인 베드로의 후광에 가려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로만 기억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안드레는 항상 예수님께 누군가를 데려오는 사람으로 기록됩니다. 안드레의 이름이 네 번 나오는데, 그 세 번은 모두 누군가를 예수님께 데려오는 전도자로 나옵니다! 안드레는 형님인 베드로에게 그 영향력이나 유명세에서는 못 미치나 전도하는 일에는 누구 못지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41절에서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하는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능동적 표현을 쓰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의 초청을 받고 예수님을 수동적으로 만나졌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와 보라!”는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여 주님에 의해 찾아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는 말이지요. 그러기에 예수님에 의해 찾아졌다는 고백 속에는 전혀 뜻밖의 놀라움과 감격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 유레카(Eureka), 영어로 “I have found it!”, 내가 발견했다는 말이지요. ‘유레카’ 하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떠오릅니다. 히에로 왕이 자신의 금관에 혹시라도 불순물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해서 아르키메데스에게 조사를 해보도록 명령했습니다. 왕관을 산산조각 내서 성분검사를 하면 좋을 텐데, 그러면 왕관을 쓸 수가 없으니 문제지요. 큰 고민에 빠져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아르키메데스는 기분전환을 위해 목욕탕에 들어갔는데, 욕탕 안에 뛰어들자마자 자기 몸무게만큼의 물이 밖으로 넘치는 것을 보고서는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진리를 발견했다는 탄성이지요. 이른바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던 것이지요. 물속에 물체를 넣으면 그 물체의 용량만큼의 물이 밖으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순금으로 만든 왕관보다 은이 섞인 왕관은 그만큼 무게도 무거워져서 부력도 커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즉시 왕관을 물에 넣고, 왕관과 꼭 같은 무게의 순금 금화를 다른 물그릇에 넣어 왕관의 순금 여부를 감정하기로 했습니다. 만일 은이 섞여 있을 경우 부피가 커져서 부력도 커지게 될 수밖에 없기에 넘치는 물의 양이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아르키메데스는 이 진리를 발견한 다음에 너무 기쁜 나머지 벌거벗은 몸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임금님께 달려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르키메데스는 전혀 뜻밖에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물론 여러 날 동안 고민하고 연구를 거듭했겠지만, 목욕탕에서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것은 전혀 뜻밖에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부력의 원리는 이 세상이 만들어진 이후 늘 그렇게 있어왔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가면 자기 몸무게만큼 물이 밖으로 넘친다는 사실도 목욕을 할 때마다 경험했던 일이지요. 그런데 이 날만큼은 달랐습니다. 부력의 원리라는 진리가 아르키메데스를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르키메데스가 이 진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 진리가 아르키메데스를 발견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안드레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라는 진리를 능동적으로 발견해낸 것이 아니라, “와 보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듣고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발견되어지고 찾아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렇게 보는 것이 신학적으로 더 정확할 것입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주님을 위하여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
안드레와 베드로를 찾으시는 예수님은 오늘 우리도 찾고 계십니다. 늘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예배를 드려왔는데, 전혀 돌발적으로 전혀 뜻밖에 우리를 찾으시는 주님에 의해 찾아짐을 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찾아짐을 당한다고 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이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 속담을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벌레를 둥지 속에 던져 놓지는 않으신다.”
옳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찾아진다고 해서 인간 편에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진리를 찾아내기 위하여 미친 듯이 고민하고 연구를 거듭했듯이, 안드레와 또 한 사람의 제자가 “와 보라!”는 예수님의 초청에 순종하여 예수님과 함께 동거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봤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생명과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과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은퇴 후에 안락한 생활을 하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또 모았습니다. 남들이 외식하고 여행 다닐 때 한 번도 따라 한 적이 없습니다. 행복한 노년을 준비하기 위해 이토록 구두쇠 같이 살아오던 사람이 정년 은퇴를 불과 여섯 달 앞두고 심장마미로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장례식 때 그 부인이 목사님께 말합니다. “우리 남편이 생전에 하와이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이제는 다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악착 같이 번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사야 55장 6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렇습니다. 적절한 시간과 적절한 장소에서 우리를 불러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면, 우리의 인생은 불행해집니다. 만날만한 시간과 장소에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안드레와 또 한 사람의 제자에게 “와서 보라!”고 초청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도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이 초청하시는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는 것, 그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초청해주심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한 일을 하다가 허무하게 일생을 마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이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와 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서, 가장 적절한 행위를 하는 분들인 것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와 보라!
이대성 목사
수년 전부터 젊은이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름하야 <라면신경>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기독교의 <사도신경>을 풍자해서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잠깐 소개해 드릴께요.
"구수하사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는 라면이시여, 라면님을 내가 믿사오며 그의 자매품 쇠고기 라면을 믿사오니, 이는 공장에서 생산되어 상인들의 손을 거쳐 식순이의 손에 들어가 고난을 당하사, 끓는 물에 죽으시고 끓은 지 3분 만에 상에 오르사, 유능하신 젓가락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시니라. 라면이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입 속에서 소화되는 것과 항문을 통해 거름되는 것을 영원히 믿사옵나이다. 라면."
저는 처음에 <라면신경>이라는 이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재미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짤막한 풍자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제 생각은 바뀌게 되었습니다.
재미는커녕, 안타까운 생각만 들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우리 교회가 얼마나 물질주의 성향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기에, 젊은이들 사이에 <라면신경>이 유행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음주일은 새생명 전도축제주일로 지킵니다. 그 동안 우리 한국교회가 외적인 교회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많은 사람을 데려오면 티코 자동차를 상품으로 준다, 하와이 부부동반 여행 티켓을 준다, 제주도 3박4일 여행 티켓을 준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도주일에 가장 부각되는 것이 티코 자동차였고, 하와이 여행티켓이나, 제주도 여행 티켓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핵심이 사라진 채, 물질이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티코 자동차입니까?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와이 왕복 티켓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교회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경륜과 세상의 지식입니까? 아닙니다. 천지만물은 없어져도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가 이 핵심을 놓치기 때문에 자꾸만 문제에 빠집니다. 성경의 기초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혼란이 발생됩니다.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핵심을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핵심의 중요성을 잘 아는 성도가 진정 건강한 성도요, 핵심의 중요성을 잘 아는 교회가 진정 건강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앙생활의 핵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38절을 보면, 두 제자가 등장합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41절에 따르면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본문 말씀을 기록한 사도 요한입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과거 그들의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첫째로,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무엇을 구하느냐?” 예수님께서 안드레와 요한에게 "무엇을 구하느냐?(38절)" 물으셨습니다. 이를 NIV 영어 번역으로 보면,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What do you want?"
여러분? 이 말은 결단코 꾸짖는 말이 아닙니다. 동기를 묻는 것입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먹을 떡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정복하게 되면 그 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아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다 달랐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따르고 있습니까? 현대의학으로 고치지 못하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입니까? 사업상 교회를 다니면 이득이 될 것 같아서 입니까?
아니면, 크리스챤이라는 그럴듯한 명예를 얻기 위해서입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사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떡을 위해서 예수님을 좇았다가, 기적과 이적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좇았다가, 한 자리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좇았다가, 나중에는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을 다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핵심을 놓친 채 곁가지를 따랐던 사람들은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진정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들이 예수님 당신을 좇는 이유에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 그 때 두 제자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38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여러분? 이 말은 언뜻 들으면 동문서답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 이렇게 질문을 하면 "예, 빵을 구합니다. 기적을 보고 싶습니다.". 또는 "아닙니다. 아무 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뭐, 이런 대답을 해야 하는데, 두 제자들은 갑자기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도리어 반문을 합니다.
언뜻 들으면 말도 안 되는 뚱단지 같은 소리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두 제자들은 "선생님,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알려주십시오. 그러면 조용한 시간에 저희들이 주님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교제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반문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이나 이적이나 치료 등을 목격하는 것보다도 주님과의 만남에 대해 더 큰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 소년이 수영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기 직전에 그 근처 농부의 아들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도움을 받은 그 소년은 청년이 된 다음, 그 농부의 아들을 찾아가 옛 일을 감사하며 희망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의 아들은 의학 공부를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청년의 부모들은 돈을 대어 그 농부의 아들을 공부시켰습니다. 농부의 아들은 의학공부를 해서 페니실린이라는 약을 발견하고, 나중에는 노벨 의학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대 정치가가 된 소년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폐렴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농부의 아들이 발견한 페니실린 덕분에 또 한번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정치가가 바로 윈스턴 처칠이요, 농부의 아들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이것을 두고 만남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평생 어떤 만남을 갖게 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좋은 친구, 좋은 교우,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진정 축복입니다.
여러분? 좋은 만남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이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각자가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만남이 진정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만남보다도 가장 좋은 만남은 주님과의 만남인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해답이 바로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만남보다도 가장 좋은 만남은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만남보다도 주님과의 만남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주님과 동행하는 일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믿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고 그 주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2장 26절에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무슨 말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사람, 주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사람을 우리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헌금 많이 내고 엄청난 봉사를 하는 사람보다도, 꼬박 꼬박 기도의 자리에 나오고, 예배 시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사람을 더 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는 당신과 동행하는 사람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두 제자들처럼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겠노라 열심을 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안드레와 요한에게 ‘와 보라!’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와 보라!”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와 요한이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 함께 동행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그들에게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39절 말씀 다같이 함께 읽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와 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안드레와 요한은 즉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때가 당시 시간으로 제 십시, 오늘날의 시간으로 오후 4시쯤으로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주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그들에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의 심령이 뜨거워졌습니다. 특별히 41절에서는 안드레의 모습을 자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를 만남으로, 역사상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어떻게 행동 합니까? 그가 얼마나 흥분했던지 날이 새자마자 자기 형제 베드로에게 달려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도는 복잡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드레가 전도하기 위해서 신학교를 다녔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으로부터 제자훈련을 받았습니까? 그도 아니면 전도에 대한 책을 읽었습니까?
안드레가 나중에는 3년 동안 제자훈련을 받았지만, 본문에서는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형제 베드로도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만나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며 복음을 증거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전도는 단순합니다. 전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는 자꾸 우리의 생각 속에 전도는 어렵다는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없는데, 무슨 전도를 한다고 해!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전도를 한다고 그래!" 사단은 자꾸만 어렵게 어렵게, 전도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전도는 어려워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들리지 않는 전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중세시대의 사제들처럼 이 강단에서 어려운 라틴어로 된 성경을 혼자서 죽 읽어 내려간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졸지 않으실 분들이 과연 몇 분이나 계실까요? 모르긴 몰라도 안쓰러워서 졸지 못하는 제 아내 이강선 사모만 빼고는 나머지 분들은 채 몇 분도 안 되어서 모두 다 입신에 들어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은혜를 받기는커녕, 신경질만 날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죄 없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발로 차면서 신경질을 낼지도 모릅니다. 사실 과거 중세시대가 그랬습니다. 사제들은 회중들에게 전혀 들리지 않는 어려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설교는 결단코 어려워서는 아니 됩니다. 감리교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어려운 용어와 문자를 써가면서 설교를 하는 다른 목사님들과는 달리, 광부들에게 일상적인 단어와 평범한 말투로 이해하기 쉬운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광부들이 그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목사님은 우리가 쓰고 있는 말로 설교를 하는구나. 아하,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여러분?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웨슬레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는 곳에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 증거는 쉽게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전도도 쉽게 해야 합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체험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전도요, 선교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전도는 쉽게 해야 합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체험한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전도요,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도훈련을 받으면 훈련받지 않은 사람보다 더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훈련받지 않았어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안드레처럼 하면 됩니다. "한번 와 보라. 한번 와서 내가 만난 주님을 만나보라." 여러분? 얼마나 쉽습니까? 따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짜는 말이 따로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 중매쟁이들이 중매를 할 때, 조금 모자란 신랑을 소개할 때에는 말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확실한 신랑감을 소개할 때에는 어떻게 말합니까? 두 말하면 잔소리입니다. 그냥 "한번 만나봐!" 더 이상 긴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긴가 민가 어렴풋하고 희미한 다른 종교와 기독교는 다릅니다.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복잡하게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한번 와 봐. 내가 만난 예수님, 너도 한번 만나봐!"라고 하면 됩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에게서 배운 방법을 그대로 사용해서 형제 베드로에게 "와 보라!" 단순하게 전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듣든지 아니 듣는지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전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디모데후서 4장 2절 말씀입니다.
어느 기독교 조사기관에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서 통계를 내었다고 합니다. 조사 결과, 한 사람이 예수를 믿기까지 평균 4명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고, 주변에 14명 이상의 사람들이 중보 기도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번 복음을 전했는데 전도의 열매가 없다고 여러분이 절대로 헛수고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전한 복음을 기초로 언젠가는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열매가 없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또 하나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43절 이하를 보면 당장은 복음 증거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후에 전도의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같이 찬양할까요?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셋째로, 빌립 또한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 말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와 보라!" 다같이 46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보라 하니라.” 아멘.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한 동네에 살던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나다나엘에게 증거 했습니다. 이 나다나엘은 다른 성경에 보면 바돌로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나다나엘이나 바돌로매는 같은 사람입니다.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만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45절 말씀을 읽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립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나다나엘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빌립의 말을 아예 무시했습니다.
나다나엘의 이 말은 그 당시에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은 이방인들이 많이 드나들던 교통의 중심지였고, 그러다 보니 이방문화가 많이 유입되어서 이방문화가 판을 치는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나다나엘은 "그 나사렛에서 무슨 인물이 나겠는가? 그곳에서 메시야는 무슨 메시야란 말인가!"라며 코웃음만 쳤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러한 자세가 복음 전하는 자의 진정한 자세인 줄로 믿습니다. 비록 상대방이 변화가 없다 할지라도, 복음을 거부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증거 하는 자세, 이 자세가 빌립의 자세입니다.
결국 나다나엘은 빌립의 권유로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49절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의심 많고 편견이 많았던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빌립이 편견의 사람 나다나엘에게 한번 복음을 증거하고 나서 그가 받아들이지 않자, 이내 포기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 전도하다가 상대방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로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을 쉽사리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언제까지든지 기다려 주십니다. 아직까지도 우리 가족 중에 주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까?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이 아직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십니까?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그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들이 아무리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할지라도,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고 전도한 빌립처럼 포기하지 마시고 담대히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보면 쉰들러가 받은 반지에 이런 말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 생명을 살린 사람은 우주를 살린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영혼을 건진 사람은 우주를 건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큰 명예, 큰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할지라도 전도해서 구원 받은 한 친구를 내 곁에 두고 살아간다면, 복음을 전해 구원 받은 한 이웃을 남겼다고 한다면 당신은 이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위해서 예수를 믿은 것이며, 이 일을 위해서 큰빛광성교회의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전도의 방법은 의외로 쉽고 명쾌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오는 주일 새 생명 전도축제를 위해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힘차게 외칠 한 마디도 바로 이 말입니다. “와 보라!” 따라합시다. “와 보라!”
그렇습니다. ‘와 보라! 예수께로 와 보라!’ 이는 내 심령이 예수와 그 분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비의 언어입니다. ‘와 보라! 큰빛광성교회로 와 보라!’ 이는 교회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의 언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증거 하지 않으면 누가 예수 복음을 증거 하겠습니까? 용역회사가 대신 해주겠습니까?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 대신 해주겠습니까? 아니면 점쟁이들이 대신 해주겠습니까? 예수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복음을 증거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전하는 자가 없이는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베드로에게 가서 "와 보라!" 전도한 안드레처럼, 친구 나다나엘에게 가서 “와 보라!” 전했던 빌립처럼,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가셔서 “와 보라!”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와 보라!” 비록 그들이 나다나엘처럼 냉담하게 반응한다 할지라도, 빌립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서 내가 만난 주님, 내가 체험한 주님을 있는 그대로 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반드시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저들의 손을 굳게 붙잡고 주님 전에 나아오는 기쁨과 감격을 맛보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사 저들이 진정 예수 믿고 구원받아 베드로처럼, 아니 나다나엘처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하는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 1:35-51 / 이동휘 목사
1. 세례 요한이 자신의 두 제자와 함께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하자, 그 두 제자가 그 자리에서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들 두 제자는 자기 스승이 소개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기 위해 일시적으로 따라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해 세례 요한과 결별하고, 이제부터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언뜻 세례 요한이 이를 보고 서운해 하거나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었겠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세례 요한은 그 두 제자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내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한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바로 그 분이 이스라엘이 그토록 고대했던 메시야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 두 제자는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를 따르자 예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들이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으려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인생이라면 삶에 대한 바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 삶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대부분 세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이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2:16)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가치와 숨겨진 보화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천국, 그 소망의 소중함을 깨닫는 자들은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 보화를 사게 될 것입니다.
(마13:44)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 두 제자들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요1:34)이시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 말씀의 뜻을 바로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직접 예수께 가 보니까 감추어진 보화를 찾은 것을 깨닫고 “랍비여” 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첫 제자가 된 안드레가 형제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며 그를 예수께서 데려갔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게바는 베드로의 다른 이름)”
‘시몬’이란 구약의 12지파 중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과 동일한 명칭입니다. 당시 시므온은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습니다.(창 34:25-31). 시몬 베드로 역시 그 조상과 마찬가지로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습니다(요18:10, 25-27;마 26:31-35;막 8:32, 33;14:27-31;눅 22:31-33).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예수는 시몬이 장차 ‘게바’로 불리울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게바’란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의 베드로의 성격이 변화될 것으로 예언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지만 장차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 하나님의 자녀로서 베드로가 변화될 것을 미리 꿰뚫어 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께서 이튿날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을 만나 제자삼으시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그 분이 나사렛 요셉의 아들이신데 바로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서 예언하신 메시야이심을 확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요1:45)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이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며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빌립이 ‘와 보라’며 그를 예수께서 데려갑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47)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을 한 번도 보신 적이 없는 예수께서 그의 성품과 인격을 통찰하고 계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나를 어떻게 아시나이까?” 하고 묻자, “(요1:48)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고 하십니다. 이는 빌립이 너를 만나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율법,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한 사람 나다나엘의 인물됨을 모두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께서 이미 나다나엘을 자신의 제자로 지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시는 신적인 권위에 압도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 즉 시몬을 만나 그가 장차 게바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 그리고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율법에 충실한 자로 그 됨됨이가 간사한 것이 전혀 없는 진실된 사람으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고 계시다는 것 등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그는 분명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139편입니다.
(시139:1-17)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여기 1절,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는 말씀은, 땅을 파헤쳐 모든 것을 드러내듯이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마음’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살펴 아시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2절,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는 말씀은, 인간의 삶의 모든 ‘행위’와 그리고 사람이 의도하고 계획하고 있는 것까지도 낱낱이 넉넉히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3절,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라는 말씀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껍질을 아무리 가꾸고 복잡하게 치장한다해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진심, 그 중심을 보시고 평가하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4절,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는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한 마디의 말도 아직 내 혀에 없을 때에 조차,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마음 속 깊은 생각까지도 꿰뚫어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보고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그 누구라도 하나님을 벗어나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는 말씀에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셨다.”는 것은, 성(城)을 완전히 포위하여 피할 길이 전혀 없이 막혀버린 진퇴양난의 상황처럼, 하나님께서 철저히 그리고 샅샅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장악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안수(按手)하셨나이다.”는 말씀처럼, 하나님 손 아래 거할 때,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 때만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축복하심을 받는 복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한낮의 가장 더운 시간에 자기 천막 입구에 앉았다가 맞은 편에 어느 세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직감에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알아채고 단번에 달려가 그들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하며 영접합니다.
(창18:3-5)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다면 주의 종을 그냥 지나가지 마소서. 물을 조금 가져올 테니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 쉬소서. 내가 먹을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이왕 종에게 오셨으니 음식을 잡수시고 힘을 얻으신 다음에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아브라함의 영접을 받아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연하고 살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요리해서 대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무 아래서 그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그들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곁에 서 있는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천막 안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내년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것이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사라는 그 뒤 천막 입구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는 갱년기도 지났기 때문에, 혼자 속으로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남편도 늙었는데 내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째서 사라가 웃으며 내가 늙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는가? 하고 중얼거리는가? 나 여호와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겠느냐? 내년 정한 때에 내가 너에게 돌아 올 것이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두려워서 자기가 한 말을 부정하며 “나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고 거짓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너는 웃었느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라가 하나님 말씀에 대해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 웃고, 속으로 말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속속들이 보고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속으로 웃거나 말거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시고 약속하신 말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는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 후 1년만에 독자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창21:1-6)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사라가 아들을 낳자, 사라는 ‘하나님께서 나를 웃게 하신다.’면서 비로소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약속 아래 살 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 때, 하나님께서 웃게 하시는 기쁨과 행복,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하나님께서 안수하시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어서, 하나님께서 안수하시는 복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의 안수 아래, 즉 하나님의 손 아래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는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생은 결코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7절,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는 말씀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시선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하늘에 올라가 숨어도 주는 거기 계시며 내가 지하세계에 가서 누워 숨어 있어도 주는 거기 계십니다.”
9절, “내가 새벽 날개를 타고 바다 저편 가장 먼 곳에 가서 살지라도 주는 거기서도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드실 것입니다.” 는 말씀에서, “새벽 날개를 타고 바다 저편 가장 먼 곳에 가서 살지라도”는 말씀은, 해가 뜰 때 순식간에 하늘을 향해 뻗치는 빛줄기처럼 아주 빠른 속도로 신속하게 멀리 지구 끝까지 달아난다 해도, 하나님께서 거기 계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돌보시며 권능의 손으로 붙들어 축복하신다는 뜻입니다.
11절, “내가 만일 ‘흑암이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이 밤이 되리라.’할지라도 주에게는 흑암이 어둡지 않을 것이며 밤도 대낮처럼 밝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어떠한 역경이나 곤경, 위경에 처한다 해도, 내가 빛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빛으로 둘러 보호하시고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기 때문에 ‘대낮같이 밝은 삶으로 나를 축복하시리라’는 뜻입니다.
13절에서 16절을 보겠습니다.
“주는 내 몸의 모든 기관을 만드시고 어머니의 태에서 나를 베 짜듯이 지으셨습니다. 내가 이처럼 놀랍고 신기하게 만들어졌으니 주를 찬양합니다. 주의 솜씨가 얼마나 훌륭한지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보이지 않는 어머니 태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그 때에도 주는 내 형체를 보고 계셨습니다. 주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보셨으며 나를 위해 작정된 날이 하루도 시작되기 전에 그 모든 날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내가 모태에서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나를 아시는 분이시므로 나의 오장육부(五臟六腑)는 물론, 나의 감성과 이성까지도, 아니 내 영혼의 깊은 곳까지도 만드시고 알고 계시는 나의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시작부터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하셨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아시고 그가 모태에서 자라가는 모든 과정, 그리고 태어나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인간사의 희노애락을 낱낱이 알고 계시며, 그 연약한 체질을 아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시인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그 깊고 높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은총의 생각들, 셀 수 없을 만큼, 해변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생각들을 이렇게 본문에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시139:17-18)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어쩌면 주는 그렇게도 많은 생각을 하십니까? 내가 만일 그 수를 헤아린다면 해변의 모래알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내가 깰 때에도 주는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십니다.
17절,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에서 “보배”라는 말의 히브리어 야카르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얼마나 ‘무거운지!’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인생들처럼 밥 먹듯 말을 쉽게 바꾸시지 않으십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아브라함의 자손, 약속의 자녀가 되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보배로우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 가운데 사는” 성도가 되시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약속의 자녀가 되시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하나님께서 보낸 일에 형통함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다음으로, 빌립의 전도, “와 보라”는 말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날 수 있겠느냐?”면서 일단 의심하고 거절하였지만 결국 행동으로 옮겨 예수께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참 이스라엘이라는 칭찬과 인정, 그리고 참 예수의 제자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에게로 나오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언약)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성취를 소망하는 사람으로서,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 마음을 의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은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마음이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마5:8). 바로 마음이 진실한, 청결한 나다나엘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보게 된 것입니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시32:2)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범사에 마음이 청결하고 진실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은혜, 더욱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청결’(Καθαρ??,카타로스) 은 두 가지 면에서 깨끗함을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함, 순결함을 뜻하고, 둘째는 육체적, 도덕적인 순결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아담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전인격을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게 지음받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기 전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나 금단의 열매를 먹는 죄를 범한 후로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창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감히 볼 수가 없어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이었습니다. 죄로 더러워진 인간은 하나님과 동산에서 함께 지낼 수 있는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죄악을 청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고 하십니다. 아담이 “(창3:10)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대답합니다. 죄를 범하기 전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했었습니다.
(창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몸과 마음, 전 인격이 모두 성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범죄하자 곧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감각적 충동과 욕망에 끌려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파괴한 결과, 그들의 정상적인 몸과 영혼, 그리고 인격이 파괴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3:11)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고 추궁하자 이렇게 변명합니다. “(창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 앞에 범한 죄를 자기 아내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는 비인격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하와 역시 “(창3:13) 하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고 물으시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며 그 책임을 뱀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그 인격이 파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 자기들이 범한 죄의 수치를 가려보고자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 자기들이 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로 그 지은 죄의 부끄러움과 수치, 그리고 파괴된 인격을 가려보고자 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과의 관계를 거룩하게 회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지으려면 동물이 희생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를 가리기 위해 동물이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희생이 없이는, 다시 말해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누군가가 희생되어 피 흘림이 있어야만 죄 사함을 받아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릴 때,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속죄의 제물, 어린 양으로 오셨고, 장차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실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신 것은 장차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예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자기 죄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희생되셨다고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얻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함께 하는 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하나님과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로마서3:25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예수 믿음을 통해 ‘청결’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이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행 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러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고, 하나님 말씀을 보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부분적이지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함께 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과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생활인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소망을 사도 바울을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고린도 전서13:12을 보겠습니다.
(고전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삶과 그 분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성령을 통해 부분적으로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성결하게 지켜 생활하게 되면 장차 하나님을 보며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성도 여러분, 장차 예수께서 약속하신대로 나타나시게 되면 그 계신대로 볼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성도 여러분은 항상 그 믿음과 생활을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요일3:2-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범사에 항상 진실되고 청결한 삶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더욱 더 큰 일, 즉 더욱 더 큰 은혜를 경험하시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물의 꿈을 가지라
이한규 목사
< 영혼 구원에 힘쓰라 >
한때 공산주의가 짧은 기간에 지구 절반을 삼켰었다. 왜 그것이 가능했는가?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학습의 힘이다. 학습은 히틀러도 위대한 영도자로 믿게 만들고 잘못된 이론도 진리로 믿게 만든다. 둘째, 조직의 힘이다. 조직은 확산의 근거다. 공산주의는 두 명이 있어도 조직을 만들어 거기에 사람을 담았다. 셋째, 활동의 힘이다. 만원이 한 사람의 호주머니에 가만히 있으면 만원의 가치로만 남지만 열 사람을 거쳐서 돌면 10만원의 가치를 낳는다. 얼마나 활동하느냐에 따라 파워가 커진다. 그 활동을 공산주의에서는 ‘투쟁’이란 용어로 표현한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도 사실상 그 3가지가 필요하다. 먼저 하나님 말씀을 학습시키고 그 다음으로 조직을 만든 후 열심히 활동해야 한다. 복음의 진리 안에서 활동하면 한 사람의 힘이 크게 증폭된다. 영혼 구원을 위해 직접 전도에도 힘쓰고 자기 분야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앞세워 간접 전도에도 힘쓰라. 내 재능과 시간과 물질을 힘써 활용하라. 관심과 전략을 가지고 서두르지는 말되 시간을 아껴 영혼 구원에 투자하고 사명적인 제자를 만드는데 일조하라.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이 첫 제자를 얻는 장면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첫째, 예수님의 공생애 첫 사역은 제자 삼는 사역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제자의 중요성을 잘 교훈한다. 주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교인으로 머물지 말고 늘 주님 안에 있는 신실한 성도가 되고 더 나아가 주님을 위해 활동하는 제자가 되라.
둘째, 예수님의 첫 두 제자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본문 35절에 나오는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는 표현을 보면 그 두 제자는 세례 요한의 핵심 제자였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첫 두 제자는 예수님 말씀을 듣기 전에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았다. 핵심 제자를 거리낌 없이 예수님의 제자로 보내는 장면에서 세례 요한의 위대성을 깨닫게 된다.
셋째, 두 제자는 주님을 좇으면서 주님 거처부터 물었다는 사실이다. 본문 38절을 보라.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그 질문을 통해 두 제자의 어떤 마음을 읽는가? 주님이 계신 곳으로 자신도 가겠다는 철저한 제자 의식을 읽는다. 결국 두 제자는 예수님을 만난 첫날부터 예수님과 함께 거했다(39절). 군소리나 변명이 없이 몸과 마음 전체를 던지는 그 모습을 보라.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아는 헌신적인 사람들이었다.
넷째, 예수님의 첫 두 제자 중 하나는 안드레라는 사실이다(40절). 안드레는 먼저 자기 형인 베드로를 찾아 전도했다. 결국 안드레를 통해 가장 위대한 스승과 가장 위대한 제자가 만나게 되었다(41절). 그 사실을 통해 유명한 ‘안드레 전도법’이 생겼다. ‘안드레 전도법’에는 3대 핵심 원리가 있다. “첫째,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전도한다. 둘째, 전도할 핵심 내용은 예수님이 구세주(메시야)라는 사실이다. 셋째, 나를 통해 위대한 제자가 만들어질 수 있다.”
< 안드레는 어떤 사람인가? >
안드레 전도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안드레란 인물 자체다. 사람들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로서 매력적인 캐릭터를 가진 베드로에 관심이 많지만 베드로가 베드로 되는데 공헌한 인물이 그의 동생인 안드레였다. 안드레란 이름은 ‘남자다운, 용감한’이란 뜻인데 그 이름처럼 그는 용감하게 살았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성경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작은 것을 살피는 사람
안드레와 베드로는 형제지만 성격은 많이 달랐다. 베드로는 활활 타는 휘발유 같다면 안드레는 타기는 어렵지만 꾸준히 타는 조개탄 같다. 성경에서 안드레가 처음 나오는 장면이 본문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역사상 최초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리고 개척자의 외로움을 해결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전도를 택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가장 먼저 형 베드로를 찾아 전도함으로 가족 전도의 최초 모델이 되었다.
특히 안드레의 전도는 한 사람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가르쳐준다. 그가 전도한 베드로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원했는가? 베드로를 통해 이뤄진 전도 열매의 상당한 공은 안드레 몫이다. 많은 영혼을 구원하지 못해도 한 영혼 구원이라도 힘쓰라. 대중을 향해 외치는 베드로도 소중하지만 한 영혼을 위해 구체적인 관심을 가진 안드레도 소중하다. 사람들은 대개 많은 것과 큰 것을 좋아하지만 한 사람을 향해 깊은 관심을 가진 안드레 같은 사람이 때로는 더 필요하다. 숫자가 적은 곳에서도 꾸준히 자리를 지키는 삶이 진실하고 복된 삶이다.
2. 겸손하고 속 깊은 사람
안드레는 최초의 신자이면서도 기득권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에 관한 기록이 성경에 12번 나오는데 대부분 시몬 베드로의 형제로 소개되어 나온다. 안드레가 그 기록을 봤다면 기분 나빴을지 모른다. 그는 주님이 가장 사랑했던 세 명의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룹에서도 빠졌지만 그 상황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희생을 덜했기에 이름이 덜 빛난 것이 아니다. 그의 이름이 덜 빛난 이유는 그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겉만 그럴듯한 사람이 아닌 속 깊은 사람이었다.
안드레는 진리의 실천에 힘썼고 예수님을 높이는 데는 관심이 많았지만 자신을 높이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님이 하셨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는 말씀을 가장 잘 실천했던 사람이 안드레였다. 사람들은 안드레보다 베드로가 큰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천국에 가면 그 순서가 바뀌어 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했다.
3. 희생할 줄 아는 사람
전설에 의하면 안드레는 나중에 러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지금도 러시아는 안드레를 수호성인으로 여긴다. 스코틀랜드와 그리스에서도 안드레를 제일 성인으로 친다. 안드레는 나중에 파트라 영주 아내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때 영주는 자기 아내가 예수님을 믿자 안드레를 십자가에 처형했다. 그때 십자가에서 안드레가 외쳤다. “죽는 모습이라도 예수님과 같지 않기를 원한다. 죽는 자세를 바꿔 달라.” 그 마지막 소원을 영주가 들어주어서 그는 엑스 자 형태로 기울어진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사람들은 옳은 것을 좋아해도 그것을 위해 희생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이익을 희생할 줄 알아야 더 유익을 얻는다. 신앙생활의 요체는 십자가의 희생이다. 십자가의 희생이 없이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역사도 없다. 늘 희생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좋은 선택을 위해 내놓을 줄 알라. 이기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크게 막는다. 복된 삶을 원하면 자꾸 주는 훈련을 하라. 진리를 위해 희생하면 희생한 것 이상의 것을 얻는다. 진리가 진리 되게 하려고 희생의 대가를 치를 때 진리가 참된 모습으로 다가온다.
< 인물의 꿈을 가지라 >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한 후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오자 예수님은 베드로의 가능성을 보고 장차 게바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고 말씀했다(42절).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헬라어로는 베드로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보고 하신 말씀은 위대한 인물을 낳게 하는 중요한 요소를 가르쳐준다. 그것은 바로 꿈이다. 누군가의 꿈을 이해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꿈을 이해하고 “너는 지금 갈대지만 나중에는 반석이 된다.”고 하셨다. 그 말씀대로 베드로는 반석과 같은 최고 제자가 되었다.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부터 열렬히 따랐는가? “이분은 내 꿈을 이해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완전한 작품 성도는 없다. 작품이 되어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라 현재는 부족하지만 더욱 나아지고 쓰임 받을 것이라는 꿈이 있기에 나온 것이다.
베드로는 초라한 자신에게 “네가 앞으로 작품이 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때부터 얼마나 가슴 벅찬 꿈을 가졌겠는가? 그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꿈과 가능성을 이해해주고 인정해주라. 현재의 모습만 보고 실망하면 사람에 대해 늘 실망하기 쉽다. 그러나 꿈과 꿈이 통하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면서 단점을 보는 눈은 닫히고 장점을 보는 눈이 열린다. 그때 마음의 문이 열리면 대화의 문도 열리고 동시에 축복의 문도 열린다.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지금도 내게 주시는 말씀이다. “아무개야! 네가 지금은 작품이 아니라도 장차 작품이 된다.” 그 말씀을 듣고 꿈을 새롭게 가지라. 자기 가능성을 낮게 보지 말고 믿음으로 고백하라. “나도 하나님의 큰일을 하는 거룩한 큰손이 될 수 있다. 꿈은 이뤄진다.” 그런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성공적인 삶을 추구하라. 믿음은 바라는 꿈의 실상이다. 믿음에 근거한 꿈을 가지면 조만간 믿음대로 된다.
어떤 꿈이 믿음에 근거한 꿈이고 어떤 꿈이 허황된 꿈인가? 꿈이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면 허황된 꿈이지만 꿈이 자신을 행동하게 만들고 사람답게 만들면 믿음에 근거한 꿈이다. 믿음에 근거한 구체적인 꿈을 가지라. 성도는 과거보다 미래가 더 좋게 된다. 하나님은 찬란한 꿈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나타나 만나주신다.
꿈을 가졌거든 그 꿈으로 남을 초청하라. 꿈이 내 안에서만 잠들게 하지 말라. 거룩한 꿈을 확산시키는 것이 전도다. 전도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영혼을 내가 구하겠다고 하면 부담이 커지고 전도가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단순히 복음을 들을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생각하면 전도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믿으라.”고 하는 것도 전도지만 “와 보라.”고 하는 것도 전도다. 본문 39절을 보면 예수님도 “와서 보라.”고 하셨다. 빌립이 나타나엘을 찾아 전도할 때도 “와서 보라.”고 했다(46절).
성경 진리로 잘 무장해 복음의 원리를 정교하게 잘 전하려고 하면 전도가 어렵지만 “와서 보라.”고 하면 어렵지 않다. 실제로 제자훈련 공부를 많이 한 사람보다 초신자가 더 전도를 잘한다는 통계가 있다. 전도는 성경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열의만 있으면 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말씀의 현장인 교회로 “와서 보라.”고 초청할 때 때가 맞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늘 거룩한 꿈을 품고 남의 꿈을 이해해주면서 힘써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늘나라의 귀한 초석이 되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
崔仁根 牧師
어떤 강사가 강의 도중에 지갑에서 곱게 간직하고 있던 100불짜리 지폐를 하나 꺼내더니 “여러분 가운데서 이 돈을 가지기를 원하는 분은 손을 들어봐 주세요.” 했더니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면서도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강사는 다시 그 100불짜리 지폐를 마구 구겨버리더니 다시 말했습니다. “지금 구겨진 이 돈도 받고 싶으신 분들은 손을 들어봐 주십시오.” 여전히 방청객들을 손을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구겨진 돈을 시멘트 바닥에 던지고는 발로 마구 밟고 뭉개버렸습니다. 바닥의 먼지와 함께 돈은 금세 더러운 휴지조각처럼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강사는 물었습니다. “이렇게 더러워진 돈일지라도 가지고 싶으신 분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역시 많은 방청객들은 손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100불짜리 지폐는 지갑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을 때나 구겨졌을 때나 심지어는 시멘트 바닥에서 밟혀 쓰레기처럼 더러워져도 여전히 100불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객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돈을 갖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때로는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상하고 찢기고 만신창이가 되어도 예수님의 보혈이 흐르는 예수님의 사람으로 영원히 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소중한 성도들입니다. 비록 돈이 없어도, 비록 몸이 지치고 병들어도, 배운 것도 잘난 것도 없어 그 어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바 된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것이라.”(사43:1)는 인정을 받고 보호를 받으며 끝내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천국을 상속 받을 수 있는 성도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이렇게 당당하게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들에게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된 계절이 바로 성탄의 계절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처럼 무명의 한 어부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어떻게 그 삶이 바뀌게 되었는가를 증거해 주는 소중한 진리로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베드로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 인생이 어떻게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도 베드로처럼 멋들어질 수 있도록 풍성한 도전과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난 남다른 간증이 있겠지만 시몬 베드로는 아주 특별하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동생 안드레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요1:41-42)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베드로가 탄생 되는 순간입니다. 전도라는 거룩한 방법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사람은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성도들이 일생을 통해 한 순간도 무관심할 수 없는 놀라운 사명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베드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달라집니다
괜찮은 사람 하나를 만나도 변합니다. 난폭하고 거칠고 사납던 조폭도 예쁜 여자 하나를 만나면 순한 양과 같이 변합니다. 말썽꾸러기 사춘기의 아들도 여자 친구를 만나면 다른 아이처럼 따뜻하게 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틀림없이 변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열 두 제자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베드로를 보아도 이와 같은 역사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너무나도 놀랍게 달라졌습니다. 자신이 생명처럼 귀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을 다 버렸기 때문입니다.
(눅5:1011)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그런 놀라운 결단을 베드로는 이렇게도 과감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생명 줄과 같은 배도 버리고 생명 그 자체인 가족들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던 것입니다. 이는 비단 베드로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도 잘 났던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중했던 그 모든 것들을 두 번 다시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배설물과 같이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이는 그가 친히 고백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부족하지만 이 종도 예수님 한 분을 얻기 위해 부모도 형제도 친척들도 친구들도 다 잃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종은 평생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분에 넘치도록 그 보상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도 이처럼 소중한 것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1년 중에서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계절이 바로 우리들을 만나시기 위해 하늘 보좌도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성탄의 계절입니다.
장로교 목사인 심프슨은 중년에 접어들 즈음에 건강을 잃고 크게 낙담하여 성직을 떠나려고 할 때에 우연히 한 단순한 흑인영가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예수께는 어렵지 않네. 아무도 그분처럼 일할 수 없네." 그 내용이 화살처럼 몸과 영혼을 위한 믿음과 소망과 생명을 싣고 그의 심령 속으로 날아들었습니다.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과만 보낸 한 계절 후 완쾌되어 힘차게 일어나 넘치는 기쁨으로 나아가서 그 이래로 세계에서 가장 큰 해외 선교 단체 중의 하나인 선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이와 같은 놀라운 만남 이후 35년 동안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며 비범하게 일하였습니다.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앙이 일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모든 힘을 제공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만나도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자산의 소중한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따를 만큼 예수님의 사람이 되고 제자까지 되었지만 그는 역시 완전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도 우리들과 똑 같이 버린 것에 대한 미련을 되새겼고 본전 생각을 했으며 그도 죽이려고 달려드는 잔인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급기야는 주님께서 주신 모든 사명까지도 다 던져버리고 원점으로 되돌아가 고깃배에 오르는 초라한 모습까지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그와 같은 적나라한 모습들을 다시 한 번 더 성경으로 돌아가 기록된 그대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26:69-74)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 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요 21:1-3)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 말씀들은 한결같이 베드로가 비록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나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며 완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성경의 증거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너 나 할 것 없이 완전하진 인생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동료들이 실족하거나 순간 잘 못된 길에 빠졌다 해서 비난하고 돌아서고 물리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한 순간 그렇게 잘못에 빠질 수 있는 것이 우리 부족한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실수하였다거나 잘못 하였다고 해서 떠나시거나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것은 죄인들이었지 예수님께서 친히 버리신 사람은 없었습니다. 미련한 이 종은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닫지 못해 지래짐작으로 판단하고 성도들을 버리거나 포기한 적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후회스럽고 안타깝습니다. 자신도 완전하지 못하면서 남은 완전하기를 원했던 어리석음이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보면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판단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면 우리들도 기다려야 한다는 진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제자라는 가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함께 찾아 본 베드로의 모습은 마치 구겨지고 짓밟혔던 100불짜리 지폐처럼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 된 가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가치를 꺾지 않으시고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요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 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무너지고 망가지고 깨져버렸던 베드로를 다시금 회복시켜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놀라운 모습입니다. 사람이 볼 때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부인하고 사명까지도 던져버리고 삶의 원점으로 되돌아가버린 그런 못난 제자였지만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시고 천하보다도 더 소중한 양을 먹이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참으로 눈물겹도록 감격스러운 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부족하고 연약하여 넘어지고 자빠지지만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더 강력하게 사용하실 수 있도록 회복하시고 강건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거룩한 보혈이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베드로를 끝까지 사용하시되 엄청난 능력으로 함께해 주셨던 것입니다.
(행2:37-41)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베드로의 말씀의 권능이 그 얼마나 대단하였으면 한 순간에 3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왔겠습니까?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순간에 일으켜 세우는 권세도 있었습니다.
(행 3:1-8)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연약하여 넘어지고 자빠지지만 하나님은 그렇다고 포기하고 돌아서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면 그 가치는 영원히 지속 되는 것입니다. 가치만 지속 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전파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거나 좌절하면 안 됩니다. 다만 더욱 하나님 만나기를 소망하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누리기 위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능력과 권세의 예수님을 만날 좋은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소중한 기회를 놓쳐버리지 않도록 이번 성탄의 달에는 베드로와 같이 능력을 회복 받고 베드로와 같이 사명을 감당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덧 성탄의 달 12월을 맞았습니다. 진심으로 성탄하신 우리 주님께서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과 함께 하시고 회복의 은총으로 충만케 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보다 우리들의 일생에 더 소중한 축복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을 우리들도 만나고 이웃들도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 예수님을 위해 우리들의 가장 소중한 그것이라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도 좋지만 예수님은 그 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노력하지만 부족하고 세상에 젖어서 주님과 교회를 소홀히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들을 한 순간도 버리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욱 불쌍히 여기시고 능력을 주시고 권세를 주셔서 끝끝내 주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을 정복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였으나 예수님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성탄의 귀한 축복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예수님을 가슴으로 모시고 그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정복하고 행복한 성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진정한 예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삶을 바꾸는 한 마디
오정호 목사
영화 슈퍼맨(Superman, 1978)의 주인공으로서 전 세계 어린이들의 꿈과 스타가 되었던 크리스토퍼 리브(Christopher Reeve)는 승마 중 낙마하면서 목이 부러져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장애자가 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가 어려운 형편에 빠진 그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저의 사랑하는 남편입니다. 그리고 난 당신을 변함없이 사랑해요” 라고 고백한 그의 아내 다나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통해 ‘희망과 재활의 메신저(messenger)’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재활에 힘써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마음이 병든 사람,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세우는 귀한 일들을 감당하다 지난주에(2004. 10. 10) 세상을 떠났습니다. 크리스토퍼 리브는 영화 속에서만 슈퍼맨으로 기억된 것이 아니라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우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격려하는 놀라운 기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슈퍼맨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말 한마디는 다른 사람의 정신을 장애우로 만들 수도 있고, 몸이 장애우인 사람을 다시 일으켜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선물 중 하나인 입술을 갖고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한마디의 말 때문에 인생이 새롭게 출발되고, 인생의 중심을 잡은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세례요한은 신앙고백(信仰告白)을 통해 제자들을 격려했습니다(35-36절).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5-36절).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예비하는 ‘사막에서 외치는 자, 광야의 소리’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의 다니심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두 제자에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용서를 위해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의미합니다(요한복음 1:29).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신앙고백을 통해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우리는 외모, 삶의 스타일, 예수 믿은 연수도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신앙 고백을 통해 표현됩니다. 우리는 신앙의 고백에 우리의 전존재를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고백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세울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도 세웁니다. 우리의 신앙을 주님 앞에 분명히 고백할 때 우리 자신이 삽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실 사람들을 살리고 주님께로 이끌 수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고백이 우리의 마음에 살아 움직일 뿐 아니라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고백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최근에 여러분의 신앙을 간증한 일이 있습니까? 어떤 내용의 고백으로 누구에게 이야기하였습니까? 진정한 고백 없이는 나를 얻을 수도 없고, 너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신랑은 신부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통해 신부를 얻습니다. 신부는 신랑에 대한 동일한 사랑의 고백을 통해 신랑을 얻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으로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주위에 우리의 신앙고백을 들어야할 이웃이 누구입니까?
둘째, 안드레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형제에게 전하였습니다(40-41절).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제자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40-41절).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는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서 “메시야를 만났다”고 고백합니다(41절). 여기에는 “우리가 죄를 용서하시고 삶을 책임지시는 구세주를 만났다. 형도 내가 만난 주님을 만나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진정한 남자다움은 근육질과 호기(豪氣) 부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확신과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거리낌 없이 전하는 데 있습니다. 안드레라는 이름은 ‘남자답다, 강건하다’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확신을 가지고 가장 가까운 형제 베드로에게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은 단순한 말이지만 그 속에는 담대함과 형제를 향한 눈물의 호소가 들어있습니다.
안드레가 하는 역할은 예수님께 나올 수 있도록 뒤에서 돕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수 년 동안 훈련받아서 전도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지식이 많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은 생명의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처럼 주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소박하지만 강력한 복음전도자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를 만난 사람답게 “메시야를 만났다”는 고백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중국의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를 찾아온 청년이 질문하였습니다. “저도 이제부터 세례도 받고, 본격적인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얼마나 읽어야 하고, 신앙의 연수는 얼마나 오래 되어야 합니까?” 허드슨 테일러는 그 청년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촛불은 언제부터 빛을 발합니까?” 청년이 대답하였습니다. “그야, 양초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 어떤 이는 성경을 잘 모른다는 핑계로 이웃에게 전도하기를 시도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직분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서 복음을 확산시키는 것을 손놓고 있습니다. 또 어떤 교우는 교회출석연도가 길지 않다고 말하면서 교회로 친구를 인도하지 않습니다. 성경지식의 유무보다, 교회안에서의 직분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은 우리의 구원과 복음을 알리는 일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복된 말씀을 통해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38-39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Come & See)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38-39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원하는 안드레와 요한을 보고 그 추구하는 목적(目的)을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안드레의 인도를 받아서 나온 베드로에 대해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세우십니다(42절). 지금은 아니지만 장차 주님께서 베드로를 반석처럼 들어 쓰시겠다는 용기와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을 부르실 때도 “나를 좇으라(Follow Me!)”고 단순하지만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영광스럽고 복된 말씀을 통하여 사도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말의 영향력에 대해 우리 스스로 과소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위대한 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서 한마디의 축복의 말 때문에 일어납니다. 세례요한, 안드레와 예수님의 일을 통해서 한마디의 격려의 말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말이 지닌 영향력은 무엇입니까?
① 말에는 흡인력(吸引力)이 있습니다. 말은 사람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합니다. 식당 종업원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사람들을 음식점으로 이끌어 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따뜻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의 언어가 따뜻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청년부와 대학부가 수많은 젊은이들의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비전 있는 말, 용기를 주는 말, 움직이는 말을 통용해야 합니다.
② 말에는 각인력(刻印力)이 있습니다. 말은 가슴에 새겨집니다. 부정적인 말로써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축복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③ 말에는 예언력(豫言力)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대로 살아가는 것이기에 말에 담긴 예언하는 능력을 과소평가해선 안 됩니다.
④ 말에는 성취력(成就力)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 때문에 삶이 변하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진리에 대한 말은 축복으로 남습니다.
팩스턴 후드(Paxton Hood)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 세상의 거의 모든 문제가 말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 말했습니다.
말의 축복된 영향력을 간파한 글입니다.
혀의 능력
혀는 해가 지날수록 새로운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혀는 평범한 사람을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으며
혀는 마음의 상처와 할퀸 자국을 치료할 수 있으며
혀는 흥분하여 성질부리는 것을 누그려 뜨릴 수 있으며
혀는 낙담한 영혼에게 소망의 등불을 켜게 하며
혀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작자 미상)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말을 누구에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 축복된 말 한마디를 누구에게 전해야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혀는 복음을 증거 하는 혀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35절), 안드레는 먼저 자기 형제 시몬에게(41절), 빌립은 한동네 이웃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44-45절).
이 시간도 베드로와 나다나엘 같이 우리의 복된 소식을 듣고 주님을 만나야 될 사람이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신앙 고백을 통해 우리 자신의 영혼을 세울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도 세웁시다.
담대한 확신과 형제사랑의 눈물을 가지고 복음의 진리를 전합시다.
삶을 바꾸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축복의 말을 통해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여 이 시대의 또 다른 안드레와 빌립을 일으켜 세웁시다.
아름다운 혀는 복음을 증거하는 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열린 증거
김영준 목사
중국 베이징에 가면 자금성이 있습니다. 자금성은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의 궁전입니다. ‘자’자는 자주색이라는 뜻이고 ‘금’자는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하면 forbidden city-금지된 도시라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당시 황제는 일반 사람은 일평생 한 번도 얼굴을 보기 어려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궁전에 들어갈 수 있는 관리들도 멀리서 황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접근할 수 없는 사람, 또 접근할 수 없는 자리, 여기에 힘과 권세를 겸하면 신비함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보면 나폴레옹의 군대의 군인으로 싸웠던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전투 중에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언덕에 혼자 서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황제가 위험에 처해있는 상황이에요. 만일 그 순간에 이 사람이 나폴레옹 곁에 달려가서 그를 보호했더라면 이후에 공로를 인정받아서 표창을 받았을 것인데 머뭇거리다가 그 기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 사람의 가족이 이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는 옛날에 그 부분을 읽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왜 톨스토이가 그런 이야기를 포함시켰을까 이해가 됩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로써 나폴레옹을 위해서 싸우고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나폴레옹을 가까이 볼 기회가 일평생 한번 있을까말까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독대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신화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신화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그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이 신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땠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의 이미지를 관리하셨을까. 그 당시 사람들 중에도 그야말로 일평생 단 한번 예수님을 볼까 말까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열 두해 혈루병 걸렸던 여인이 바로 그런 경우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그 여성에게는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는 것만도 대단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기적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심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뵙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하고 겉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기절하는 사람이 있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오픈하셨습니다. 요즘에 열린사회 ․ 열림 음악회 ․ 열린 예배 이런 식으로 오픈, 드러내는 것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당신의 삶을 오픈하셨습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와 보라는 말씀입니다. ‘랍비여 어디 거하시니이까’ 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고 ‘와 보라’, 아주 단순하게 초청하셨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려면, 내가 어디 거하는지 알려면 와 보라는 초청입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은 자금성의 황제처럼 또 나폴레옹처럼 멀리 있는 신화적인 인물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가까이에서 같이 살고 같이 삶을 나누고 그리고 제자들이 목격한 예수님에 대한 기록과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것은 멀리서 신화적으로 본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예수님과 함께 거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지내던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것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웬만한 인물은 멀리서 보면 영웅처럼 보일지라도 가까이서 오래 두고 보면 하찮은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 속담에도 ‘어떤 사람도 자기 하인에게는 영웅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가까이서 오래 지켜보면 모든 사람에게는 허물과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부러 사생활을 감추려고 합니다. 우리의 참모습을 감춥니다. 연기를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들도 강단에 섰을 때와 강단에서 내려왔을 때의 모습이 다른 경우가 많은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초청하셔서 ‘와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24시간, 365일을 함께 지내고 제자들뿐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원하면 와서 예수님과 같이 식사하고 대화하고 함께 예배드리고 같이 여행도 하고.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람들의 증언을 모아놓은 것이 신약성경이요 신약성경의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신약성경의 증언은 제자들의 신앙고백인 것뿐만이 아니고 제자들의 예수님 경험에 대한 결론이에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따른 게 아니고 예수님을 랍비로, 선생으로, 스승으로 따르다보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경험하고 결론적인 차원에서 내린 신앙고백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입장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는 결론부터 배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결론부터 배우고 그리고 그것을 납득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요구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마땅히 이런 분이 돼야 되고 저런 분이 돼야 되고 이런 속성이 있어야 되고 저런 조건이 있어야 되고 이런 식으로. 우리가 만나본 적이 없는 예수님에 대해서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은 성격도 성자 같아야 되고 인자해야 되고 화내면 안되고 당신의 의견이 불분명해야 되고 오늘날로 치면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 알 수도 없는 신화적인 불분명한 산신령 같은 분을 마음속에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생각하는 예수님은 잡수시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산신령처럼 늘 그러니라~ 저러니라~ 이런 분으로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천년 전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 예수 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 행적 ․ 삶을 가까이서 보고 내린 결론이 예수님은 정말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런 믿음을 더 확실하게 해 준 사건이 예수 부활사건인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은 오히려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납득하기가 쉽습니다. 상상하기가 쉽습니다. ‘아,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제자들을 설득시키셨겠구나.’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믿기가 쉬워진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는데
첫째는 인간의 일상적인 삶속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산신령처럼 사신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음식도 안 드시고 물도 안마시고 주무시지도 않고 감정을 표출하지도 않고 늘 기도만 한 게 아닙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같이 대화하시고 또 때로는 피곤해서 주무시고 또 사람들의 배반에 대해서 섭섭하게 생각하실 때도 있었고 목이 마르다고 하실 때도 있었어요. 예수님은 분을 품으실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시고 기도하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좋아했던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싫어한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을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고 배반한 사람들이 있었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실제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어요. 우리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에 대해서 너무 결벽증적으로 구별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찬송가는 거룩하고 가요는 속되고, 성극은 거룩하고 일반 영화는 속되고, 교회 안은 거룩하고 교회 밖은 세속적이고.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속된 존재라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와 보라고 초청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불완전한 인간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완벽한 분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완벽하셨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전에도 그랬고 오순절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은혜를 받는 경험이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많은 도움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혜 받는 것이 사람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닙니다. 그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게 되고 항상 죄의식을 갖고 살게 되고 그리고 연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임재를 만들어주는 건 아닙니다. 서로 연기한다고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가 생기는 게 아닙니다. 서로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고 우리가 더 믿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늘 죄의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경건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고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더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건 역설적인 것입니다. 안 그럴 것 같은데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더 불쌍히 여기십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서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우리가 완벽하다면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고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의인이라면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살 수 있다면 성령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살수 없기 때문에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인 진리이지만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것이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미국의 존 윈버 목사는 빈야드 운동을 시작한 창시자입니다. 또 많은 찬양곡을 작사 ․ 작곡한 사람입니다. 하루는 이분이 아들과 심한 말다툼을 했어요. 그래서 언짢은 마음으로 집을 나와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아주 안 좋았어요. 죄의식이 느껴졌어요.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내가 목사이고 믿음의 사람인데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그의 마음속에서 찬양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랍니다. 가사까지 덧붙여서. Isn''''t He beautiful, beautiful, Isn''''t He?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된 곡입니다. 삽시간에, 한 순간에 한 곡의 아름다운 찬양곡이 완성됐어요. 그 마음속에서. 지금 자기 가족과 싸워서 마음속에 불편함과 아픔과 죄의식을 갖고 가는 도중에 마음속에서 찬양곡이 우러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곡, 그 찬양곡이 어디서 흘러나왔습니까. 존 윈버가 완벽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찬양이 우러나옵니까. 아니에요. 완벽하지 못한 그리스도인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이 괴롭고 고달프고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는 순간에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부끄러운 것 천지지만 그 순간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 같은 인물을 예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 감사와 예배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건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가 누구보고 와 보라고 말할 때는 와서 나의 완벽한 모습을 보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와서 우리 교회가 얼마나 잘 돼 있는가를 보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불완전한 데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와서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이걸 확신하기 전에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나를 보여주는 건 아니에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말씀이 증거되는 곳에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 죄인들이 회개할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 또 죄인을 위하여 찾아오신 예수님, 연약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성령, 이것을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나도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믿었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또 그런 데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와서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둠 속에서 헤맬 때에도 주님은 함께 계셔. 내가 시험당하여 괴로울 때도 주님은 함께 계셔.’ 할렐루야!
무엇을 구하느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 어떻게 제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35-37절을 다시 보면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했습니다. “또 이튿날”이라 한 것은 본문 보다 앞선 29절에서 “이튿날”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더 거슬러 올라가서 19절부터 보면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자기에게 보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부터 “네가 누구냐?” 하는 질문을 받고는 자기 자신과 예수님의 존재에 관해 분명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곧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며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그 분이 곧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실 것인데 사실은 그가 이미 오셔서 무리 가운데 서계시지만 사람들이 아직 알아보지 못할 뿐이라 했습니다(요1:26-27).
그렇게 말한 그 다음날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요1:29-31) 하고는 또 증언하기를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요1:32-34) 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이튿날 세례 요한은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는 다시 말하기를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사흘 동안을 연속해서 예수님을 증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와 함께 있던 두 제자를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도록 보낸 것입니다. 본문의 저자는 그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안드레였다고 40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아마도 저자 자신 즉 요한이었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선생이 자기 제자를 다른 선생에게 보내는 일이나 제자가 여태까지 따르던 선생을 떠나 다른 선생에게로 가는 것은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세례 요한이나 그의 제자들이 아무런 주저함이나 고민함이 없이 그 일을 행한 것은 그들 모두가 갖고 있었던 공통된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생각이란 참으로 오셔야 할 그 분, 모두가 찾아야 할 그 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모든 사람에 앞서서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죄를 지시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어린 양이신데 세례 요한은 어제도 자기에게로 나아오셨고 또 오늘도 자기 앞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바로 그가 그 분이심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자기에게 제자들을 붙잡아둘 필요가 없어졌고 모두 예수님에게로 보내야 했으며, 그의 제자들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참 주님이 누구신지를 안 이상 세례 요한에게 머물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와서 당신을 따르는 두 제자를 보시고는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본문 38절)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왜 당신을 따르려고 하는지를 모르셔서 던지신 물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와 목적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게 하시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질문을 받고 두 사람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무엇을 구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고 되물은 것은 다소 엉뚱한 반응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거주환경을 먼저 확인한 후에 같이 살만 하면 그 때 왜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것인지 이유를 밝힐 것이며, 만일 도저히 같이 살만한 형편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니 예수님을 따라온 이유를 굳이 미리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는 뜻의 대답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아온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오실 이로 기다려오던 바로 그 분이심을 그들의 스승 세례 요한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오직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찾고 따라야 할 바로 그 분임이 분명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말고 다른 어떤 이유나 목적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스승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유대 광야에서 거하며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으로 음식을 삼던 사람이었습니다(마3:1, 4). 아무리 예수님의 거주환경이 나쁘다 해도 그보다 더 나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한 질문 속에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의 물질적 여건에 대한 궁금증이나 조금이라도 보다 나은 생활환경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그 질문의 의도는 “선생님, 저희들이 선생님께 나아오며 구하는 바에 대하여 드릴 말씀, 여쭐 말씀, 듣고 싶은 말씀이 많습니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선생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닐 것이니 두고두고 말씀을 나누도록 해주십시오. 선생님께서 어디에 머무시는지 말씀만 하십시오.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라는 뜻이 담긴 질문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의 대답에 만족해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답이나 질문이 잘못되었다 어떻다 말씀하지 않으시고는 그저 “와서 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예수님 계신 데로 갔으며 그 날부터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본문 39절). 그 두 사람이 예수님 계신 데를 가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아무런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저 그 두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확실한 반응은 그들이 그 날부터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그날로부터 예수님과 함께 거하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의 삶의 여건이 편안하고 풍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물질적 여건은 세례 요한의 그것보다 나을 바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사람에게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예수님을 만나 발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두 사람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여쭈었고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 하셨으며 그들이 가서 예수님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했다고 오늘 본문은 전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안정적인 거처 없이 돌아다니신 분입니다. 거할 곳이 없으셨던 분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떠나지 않게 만든 것이었겠습니까?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14:1-4).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길이시고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던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게 될 영원한 거처가 예비되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과 소망을 가진 이들에게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 환경은 중요하지도 문제가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한 두 사람이 곧바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 두 사람 중 하나였던 안드레가 제일 먼저 한 일을 본문의 저자는 41-42절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안드레가 한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자기의 형 시몬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린 일입니다. 둘째는 자기가 메시야를 만났음을 알린 것으로 그치지 않고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드레가 그의 이전 스승인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관해서 한 말들이 다 사실임을 예수님을 만나서 확신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을 만난 그날로부터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되었고, 너무나 확실한 그 놀라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어 형 시몬에게 전했으며, 전하는 것으로만 그칠 수 없어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많은 질문이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는 우리 또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도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물으실 터인데 우리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둘째는 우리도 주님께 “주님, 어디 계십니까?” 묻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우리 삶의 물질적 여건에 관한 궁금증에서 오는 질문인가, 아니면 그런 염려로부터 자유해진 마음의 증거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셋째는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로 확실히 믿고 있으며 그만이 우리가 찾고 따라야 할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하신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확신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진정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살게 될 영원한 거처가 우리에게 예비되었음을 굳게 믿고 기쁨과 평안함 가운데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넷째는 우리가 과연 전적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다섯째는 우리는 과연 안드레처럼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우리의 주변사람들에게 열심히 전하며 증언할 뿐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주님께 데리고 나오기를 힘쓰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음을 발견합니까?
우리 모두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주님을 멀리서 바라보는 자들의 제자로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모든 사람이 찾고 따라야 할 유일하신 분임을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방황하거나 머뭇거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유일하신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굳게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항상 기쁨과 감사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 거주할까? 어떤 집에서 살까?” 하는 등의 문제와 염려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항상 우리의 최우선의 관심사이고 우리의 모든 사고와 판단과 행동의 규범과 동기가 되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안드레처럼 예수님이 온 인류의 유일하신 구세주이심을 우리 주변사람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증언하며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를 힘쓰는 주의 일꾼들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 하시는 주님의 물으심에 바르게 응답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가장 귀중한 만남
김필곤 목사
■ 2003년 3월 29일 한국일보 사회면에 "한 여자 10년 등친 거머리"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어느 간호사의 이야기였습니다. 간호사로 병원에서 근무를 했는데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든 어느날 근무를 하는데 한 청년이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왔습니다. 준수하게 생긴 이 청년은 간호사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자신은 서울대학교 법대 나와 1차 시험에 합격한 고시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청년의 타고난 외모와 달변에 끌린 그녀는 그때부터 그 청년과 꿈 같은 연인생활을 시작했습니다.“고시만 붙으면 이까짓 돈이 문제냐, 판검사가 되면 결혼해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아보자”는 맹세를 믿고 박봉을 쪼개 꼬박 꼬박 생활비를 대었습니다. 좋은 혼처 다 뿌리치고 10년동안 뒷바라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사기꾼이었습니다.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살림까지 차리고, 고시 준비하라 준 돈을 생활비와 유흥비로 탕진하였습니다. 여대생 두 명에게도 똑같은 수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녀는 6000만원을 보상하라고 고소했지만 이미 마음도 몸도 인생도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젊은날 잘못된 만남은 인생은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배우자 뿐 아닙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부모를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 따라 대통령의 아들도 될 수 있고, 죄수의 딸도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친구, 어떤 스승, 어떤 책, 어떤 직업, 어떤 지도자, 어떤 교회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행복해 질 수도, 불행해 질 수도 있습니다. 보다 좋은 인생살이를 할 수도 있고 힘겨운 인생살이도 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빛의 자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만남이 어떻했든지 일시에 불행한 만남을 반전시키는 만남이 있습니다. 참으로 고귀한 만남입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어떤 만남을 통하여 지옥같은 인생을 살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면 천국같은 삶으로 변화됩니다. 아무리 괴로운 만남도, 아무리 슬픈 만남도, 아무리 풀리지 않는 만남도 예수님을 만나면 괴로움이 변하여 기쁨이되고 슬픔이 변하여 환호가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풀리지 않던 문제가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면 죽음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면 용서받고 용서하면서 살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진정 만나기만 하면 모든 불행한 만남을 일거에 변화시켜 버립니다. 아무리 부모를 잘못 만나 가난하게 산다고 하여도 예수님 만나면 일시에 천국의 부자 됩니다.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영적 부자가 됩니다. 아무리 좋지 못한 친구를 만나 방황한다하여도 예수님 만나면 희망찬 인생길이 펼쳐집니다. 아무리 좋지 못한 배우자를 만났다해도 예수님 만나면 배우자를 사랑하게 되고 가정이 천국으로 변화됩니다. 진정 예수님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만남은 우리 예수님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면 가난이 인생을 파멸로 이끌지 못합니다. 예수님 만나면 질병이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가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 만나면 어떤 악조건이라도 절망하지 않고 행복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모든 만남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찬미 예수 946장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 없네, 예수 보다 더좋은 친구없네 괴로울 때 다가와서 마음에 평화주는 신실하신 나의 참 친구 외로울 때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랑많은 나의 참 친구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우리나사 선교 초기 교인인 서상륜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13살 때 부모님을 여위었습니다. 좋은 부모 만나지 못했습니다. 가난합니다. 고아가 된 이 사람은 살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성에서 나는 고려인삼을 사 가지고 만주에 가서 팔았습니다. 인삼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장사를 하다 31살에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열이 오르고 쓰러지고, 헛소리를 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 돈있을 때 그 좋아하던 사람들 다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스코트랜드에서 파송된 메킨타이어 선교사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습니다. 죽어가는 그를 살렸습니다. 서상륜에게는 메킨타이어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선교사는 그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는 가장 고귀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일년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인생이 변했습니다. 이제 가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질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 번역인 로스 성경을 로스 선교사님과 함께 번역을 합니다. 황해도 장면에 있는 송천(솔내, 소래)에 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전합니다. 최초의 교회인 '송천교회'가 세워집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서울에 새문안 교회를 새웁니다. 처음 14명이 세례를 받습니다. 모두 서상륜이 전도한 사람들입니다. 황해도, 평안도 할 것 없이 부산까지라도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평생 평신도로 살며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의 집을 헌납하여 교회를 지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가난하였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 선교사님께서 그가 헌납한 집과 똑같은 기와집을 노년에 사주었다고도 합니다. 예수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가정이 바뀝니다. 사회가 바뀝니다.
왜 예수 만나는 것이 그렇게 가장 고귀한 만남입니까?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고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36,41)
대통령만 만나도 좋아하고 대통령 아들이 되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사장 아버지만 만나도, 대기업 아들 만나면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과의 만남은 보통 만남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분을 만났을 때 그가 고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안드레의 고백을 보십시오(41). 메시야이십니다. 예언된 메시아,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 전부를 맡기고 말씀을 듣고 좇을 만한 분입니다(35-37). 스승 요한의 말을 듣은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37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듣고(에쿠산)"라는 말은 단순한 들음이 아니라 듣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동의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좇았습니다. 듣고 좇아간 결과가 무엇입니까?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세주, 그리스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듣고 좇아가면 메시아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분이시고 진정 메시야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38년 동안 절망하면 병이 든자도 예수님을 만나면 그 질병에서 벗어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됩니다. 장례 행렬이 멈춥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면 용서를 받습니다. 도끼로 인간을 죽인 살인만도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절망과 실패 가운데 자살을 결심한 사람도 예수님 만나면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한센씨병 환자가, 혈루증 앓는 여인이, 앉은 뱅이가, 나인성 과부가 예수님 만나 새롭게 됩니다. 행복해집니다. 병든 아들, 죽은 아들 만나 지옥같은 인생살이었는데 천국으로 화하였습니다. 세상에 누구를 만난다고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주는 나의 구세주. 예수 예수)
인생의 모든 풍랑를 단번에 잠재울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교회만 다니지 말고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설교만 듣지 말고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성경공부만 하지 말고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봉사만 전도만 친교만 하지 말고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 만나지 못하면 헛된 것입니다. 예수 만나 봉사하고 전도하고 친교하여야 샘솟는 기쁨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구역 예배를 드리러 갔다고 합니다. 구역예배를 마치고 난 후에 목사님께 가지 않고 있으니까 구역원들이 "목사님, 바쁘실 텐데 가보시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역예배를 마치고 고스톱 판이 벌이기 위해서라고 했답니다. 이유는 처음 나온 교인들에게 취미를 붙여 주려고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 글을 보니까 저녁에 부부가 함께 모여 구역예배를 드리게 했다고 합니다. 잘 모이더니 어느날 부터인가 여자들은 나오지 말고 남자들끼리만 모이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부 예배 드리고 이부에는 술판을 벌이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나를 치료하시는 예수님, 나를 도우시는 예수님, 나를 위로하시는 예수님, 부활하셔서 지금도 말씀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어떤 경우든 우리를 받아 주시고 함께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38-39)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좇아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불렀습니까? 랍비여라고 합니다. 아람어로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이말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사장인데 과장님이라고 불르면, 대통령인데 아저씨라고 부르면, 집에 갔는데 자식이 아저씨라고 부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몇 년전 우리 교회 어린이 중에서 저를 보면 아저씨 하였습니다. 감정이 어떻겠습니까? 아줌마는 아니니까 아저씨라고 불러도 별 무리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 성도님이 저를 교회에서 목사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저씨라고 부르면 그것 듣기에 거북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그런데 선생님 합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은 그들을 받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어떤 경우든 우리를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하여 무관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좇아오는 제자들을 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다(데아오마이)"라는 말은 특별이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물어봅니까? "무엇을 구하느냐?" 이미 그들의 소원을 파악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만족 시켜 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신분도 몰랐고 행하고자 하는 일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들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어디 계시냐고 묻는 그들에게 와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나를 따라 오면 장차 그들이 찾는 궁극적인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명확한 약속을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시몬 베드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아십니다. 요한의 아들인 것을 아십니다. 시몬이라고 말합니다. 시므온 말의 본래의 뜻은 듣는다는 뜻입니다. 좋게 말하면 잘 듣는 사람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귀가 얇은 사람입니다. 이했다 저랬다하는 사람 쉽게 바꾸는 사람, 변덕이 심한 사람,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베드로가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우리도 귀가 얇습니다. 누가 한약 좋다하면 한약 먹고 양약 좋다하면 양약 먹는 사람들입니다. 가치관도, 세계관도, 인생관도, 내세관도 뚜렷하지 못합니다. 쉽게 흔들립니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의 연한점 다 아시면서도 받아 줍니다. 그리고 버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배신합니다. 저주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베드로 버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사용하십니다.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첫날부터 밤새 같이 있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10시는 유대 시간법에 따르면 오후 4시이지만 로마 시간 법에 따르면 오전 10시입니다. 아마 오전 열시였을 것입니다. "그날 함께 거하니" 볼 때 밤을 같이 세웟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함께 한 후 메시야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저 듣고 좇아감으로 되어지는 일도 있지만 우리의 성숙이나 능력있는 사역, 인격과 습관의 변화 등은 함께 있을 때 받을 수 있는 축복입니다. (찬송가 449장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 말아라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세상에서 이런 만남을 가질 수 있는 분이 어디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도둑과 함께 하면 잘해도 도둑입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하면 우리는 주님의 위대한 작품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쓸모 없는 돌같아도 예술가의 손에 들어가면 위대한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헐값인 악기도 위대한 음악가가 붙들면 최고급의 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이 보잘 것 없는 것 같지만 태양과 만나면 7곱 색깔 무지개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도. 래. 미. 파. 솔. 라. 시. 도가 하나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위대한 음악가의 손에 들어가면 감미로운 음악이 출산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인격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받아 주시고 함께하시는 예수님 만나면 안드레가 한시대 쓰임받았듯이 요한이, 베드로가 한시대 쓰임받았듯이 우리 인생에도 그런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3. 예수님은 누군가에게 소개해 주고 싶고 맡기고 싶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40-42).
그분들이 인생의 주인이시고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소개해 주시십니다. 어쩌면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나를 따르더니 좀 좋은 사람 나타났다고 예수님을 따라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소개하면 내가 데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좋기 때문에 훨씬 더 값진 인생이 펼쳐지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과감하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안드레를 보십시오. 다음날 오전 10시가 되어 그는 바로 누구에게 갔습니까? 형제 베드로에게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분입니다. 나와 가장 이해관계가 밀접한 분에게 소개하고 싶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만난 메시야는 금광이나 다이아 몬드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위대한 것을 만난 것입니다. 성격 급한 베드로는 즉각 예수님을 찾아 갑니다. 우리가 사람을 예수님께 소개하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시몬 흔들리는 그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몬 속에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 현재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잠재력, 그의 가능성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름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장차 베드로가 될 것을 말씀합니다.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끄는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충동적인 시몬이 요지 부동한 게바(아람어) 베드로(헬라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베드로를 훈련시켜 시대를 변화시키는 사람으로 사용하십니다. 어부입니다. 그저 어부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 세상을 변화시킨 사람, 세상에 참 행복의 길을 만들어 놓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누구든지 우리가 예수를 소개하여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그의 인생이 변화됩니다. 이 얼마나 소중한 만남입니까?
구 소련의 의사 콘필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범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의사를 치료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에 한 중환자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죽음이 인생의 종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생의 소망을 품고 있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신앙을 가지십시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의 간곡한 전도를 받고 신앙인이 되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로부터 한참 후 닥터 콘필드는 어느 한 암환자를 수술해주면서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밤 콘필드는 교도소에서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콘필드에게 수술을 받은 암환자는 극적으로 회생하여 독실한 크리스쳔이 되었습니다. 이 암환자의 이름이 바로 알렉산드르 이사비치 솔제니친입니다. 세계인이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계가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면 인생이 바뀝니다. 가정이, 세상이 직장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행복한 세상,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자 소아시아와 유럽이 복음화되었고, 이레니우스가 예수님을 만나자 프랑스가 복음화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건너온 보니페이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독일이 기독교 나라가 되었고 패트릭이라는 16살 난 포로 소년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아일랜드가 복음화되었고, 언더우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한국이 복음화되고, 아도니람 저드슨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미얀마가, 허드슨 테일러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중국이 복음화되었던 것입니다.
A.D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 했는데 그것은 그 어머니 헬레나의 신앙적 감화력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예수님을 만나 이름 모를 한 하녀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름 모를 하인도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나는 인생이야 말로 가장 값진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 중에 가장 귀중한 만남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예수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그랬듯이 안드레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2)"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만나고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12) 사람을 귀중히 여긴 안드레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에는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12번째 설교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데려온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몇몇 사람을 주님께로 데려온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안드레는 세례요한처럼 수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 오게 한 대중전도자는 아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 오게 한 개인전도자 였습니다. 안드레는 개인전도를 통해서 몇몇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을 통해서 놀라운 전도사역을 이루게 했습니다. 빌리 그레함 박사를 예수님에게 데려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비록 한 사람을 예수님에게 데려왔지만 빌리 그레함 한 사람을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돌아오게 했습니다.
대중전도도 중요하지만 개인전도는 더 중요합니다. 개인전도는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 집니다.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좋아하는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전도자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교회의 신명주 집사님이 이옥희 시어머니를 예수님에게 데려온 것은 두 사람의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 자랑을 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 자랑을 하는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척들로부터 아니 가까운 이웃들로부터 신뢰와 존중을 받지 못하면 개인전도는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안드레는 사람을 귀중히 여기며 좋아한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안드레가 예수님에게 데려온 세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인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안드레는 본래 세례요한의 제자였지만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는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즉시 예수님을 따른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안드레는 자기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완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열려 있는 사람이었고 유연한 사람이었고 순발력과 적응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안드레는 예수님을 따르는 처음 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으려면 미리 믿고 따르려면 미리 다르고 순종하려면 미리 순종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인 순발력이 있어야 합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자기의 형제인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안드레가 자기의 형제인 베드로를 즉시 예수님에게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은 형제간의 인격적 관계가 좋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형제가 서로 좋아하고 서로 신뢰하고 서로 존중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형제나 친척을 귀중히 여기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형제나 친척으로부터 신뢰나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개인전도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전도의 길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반석과 같은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욥바와 가이사랴와 마지막에는 로마에 있는 수 많은 이방인들을 예수님에게 데려오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안드레의 개인전도 때문에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들이 한 사람을 귀중히 여기며 한 사람을 예수님에게 인도할 때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안드레는 이름없는 한 아이를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요6:8,9을 읽습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어느날 5천명 이상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도 보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도 듣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떡을 구해서 그 무리들을 먹이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때 빌립은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떡도 없고 돈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열려있고 순발력이 있는 안드레는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떡을 구해보려고 시도했습니다. 떡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이사람 저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때 어린아이 하나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안드레 선생님, 여기 떡이 있어요. 엄마가 나 먹으라고 싸 주신 보리떡 다섯 개가 있어요.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도 있어요"
안드레는 본래 어린아이들을 좋아했을 것 같애요. 어린아이들을 귀중히 여겼을 것 같애요. 어린 아이들도 안드레 선생님을 좋아하며 따랐을 것 같애요. 그렇지 않다면 어린아이가 선뜻 안드레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행동에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돈으로 치면 별 가치가 없었지만 정성으로 치면 너무나 큰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결국 안드레는 어린아이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정성을 귀중하게 보셨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바친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그것을 축복하셨습니다. 그 오병이어로 5천명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사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오신 산 떡이심을 믿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먹으면 살고 예수님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사실을 믿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안나드레가 한 어린아이를 예수님에게 데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올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막10:14).
셋째, 안드레는 헬라 사람 몇을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요12:20에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 사람 몇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헬라 사람 몇이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안드레가 인간관계가 원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방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있는 반면 포용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안드레가 헬라 사람 몇을 만났습니다. 헬라 말로 인사를 주고 받았을 것입니다. 먼 길을 오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느냐는 대화도 했을 것입니다. 아마 점심 식사정도는 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도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결국 안드레는 헬라인 몇 명을 예수님에게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자마자 죽음과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죽어야 산다는 진리를 말씀했습니다. 헬라 철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죽음과 생명에 대한 진리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만난 헬라인 몇은 예수님으로부터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진리를 배워 가지고 헬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헬라로 돌아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에 가기 훨씬 이전에, 사도 바울이 아덴과 고린도에 가기 훨씬 이전에 그들은 헬라 곳곳에 다니며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헬라 복음화의 전령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까? 안드레가 헬라인 몇을 예수님에게로 데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안드레는 몇몇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개인 전도자였습니다. 그 몇몇 사람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까? 안드레의 원만한 인간적 관계에서 안드레의 원만한 인격적 관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사람을 좋아하는 인격적 관계에서 안드레의 개인전도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전도자를 신뢰하고 존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인격적 관계에서 안드레의 개인전도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안드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좋아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중을 받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1년 동안 아니 지난 10년 동안 몇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까?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좋아해야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1년에 세 사람이라도 아니 10년에 세 사람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는 오늘의 안드레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와 보라
엄기호 목사
요단강에 나타난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듣고 찾아온 새로운 구도자들은 그의 교훈에 의지하여 속속 예수님에게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무엇을 구하는냐?”, “무엇을 원하여 나에게로 나오느냐?”고 물어 보셨습니다.
이 질문은 내부에 사무쳐 있는 인간 고유의 욕구를 파헤친 질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유한한 피조물이면서도 천하를 다 가지고 싶어 하고,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해 몸부림치는 인생을 향하여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을 때 단 한 마디로 답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인간의 욕망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죽은 딸의 시체를 앞에 놓고 눈물을 짓는 회당장 야이로가 원하는 것은 사랑하는 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바라는 것은 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실체를 보지 못하고 살아온 소경이 원하는 것은 보는 것이었습니다.
옥에 갇힌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질문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로 “와 보라”(come and see)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구도자들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이 不如一見)이란 옛 말 그대로 천만 번의 설명보다도 단 한 번 가서 눈으로 보는 것이 더욱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어떤 인간의 이론이나 설명에 의하여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에 의하며 증명되는 것입니다. “와서 네 눈으로 보아라” 하는데, 거기 무슨 이론이나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와 보라”는 명령은 진실의 확증
기독교는 이론의 종교가 아니라 확인의 종교입니다. 실제로 와서 눈으로 보고 확인한 다음 그것을 신앙의 기점으로 하는 종교! 그것은 거짓이 없는 진리의 종교입니다.
인생이 진리의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많은 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세계에 친히 들어와서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체험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증명된 과학에 대한 지성적 신념 그 이상의 힘을 가진 것입니다. 귀로만 듣던 것을 보고 체험한 소신이란 어떤 경우도 약해지거나 시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도, 곤고도, 핍박도, 기근도, 적신도, 위험도, 무서운 칼날까지도 그리스도를 향한 신자의 믿음을 끊을 수 없다”고 단언한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친히 그리스도의 영광을 대면하고 그 눈으로 예수님의 권능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을 향하던 바울에게 친히 그 자신을 보여 주신 부활의 주님은 아나니아의 입을 통하여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행 22:15)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에게 가장 은혜롭고 복된 명령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오라”는 명령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신을 찾기 위하여 몸부림치다가 괴이한 환상에 빠져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을 향하여 “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아사야 1장 18절에 “…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오라”고 초청하시는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사랑의 하나님(고전 13:8)이시며, 아낌 없이 주시는 하나님(롬 8:32)이시며, 구원의 하나님(요 11:25-26)이십니다. “오라” 부르시는 그리스도는, 말씀이요, 빛이요, 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스라엘의 왕, 인자이십니다.
부름을 받은 우리 인간은 죄인이며(롬 3:9-12), 거짓되며 심히 부패(렘 17:9)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초청에 응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은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성경에는 인생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오라”는 음성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사람의 음성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기독교는 소명(召命)의 종교입니다. 옴으로서 인생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와야만 볼 수 있고, 오는 자에게 보여 주시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언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와 보라”는 “오라”는 명령과 “보라”는 명령을 합한 이중의 명령입니다. 와서 친히 눈으로 보고 확인하라는 말입니다.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닌, 체험적 선택에 의하여 와 보고 확인하고, 와 보고 선택하란 말입니다.
“와 보라”는 명령은 천국문을 개방해 주시는 언약선포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무나 함부로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습니다.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부정한 자나 불구자들, 천한 신분의 소유자들의 성전 출입은 엄격히 금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 보라”고 선언하신 이는 예수님입니다. 이 엄숙한 선언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마실 것이라고 선포한 구약성서의 언약을 성취한 것입니다(계 3:20; 요 10:9).
도드는 “그리스도는 문을 잠그는 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도피성은 불의의 범죄로 피신해야 할 죄인들을 위하여 언제나 그 문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우리 성령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는 항상 열려진 창문을 통해서 자유로운 왕래를 가져야 할 것이고, 또 남들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그 문을 열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와 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두 사람의 제자, 요한과 안드레는 그날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유하고 그다음 시간 자기 형제 베드로를 주께로 인도하고 그 이튿날 빌립을 인도했습니다.
빌립은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을 소개했으나,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때 빌립은 예수님이 하시던 말씀대로 “와 보라”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로 나왔다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와 보라”는 말의 힘은 요한, 안드레, 나다나엘을 체험의 신앙(와 보라), 확신 있는 신앙(사죄의 확신, 구원의 확신, 승리의 확신)으로 인도했습니다.
“와 보라”는 명령은 천국으로 초대하는 영원한 메아리
이 음성을 듣고 잃었던 삶의 좌표를 찾은 자가 수없이 많습니다. 병자, 소경, 절뚝발이를 막론하고 이 음성을 받아들인 자를 위하여 천국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메아리를 듣고도 외면하는 자는 가장 불행한 자리, 영원한 멸망의 자리에 처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허무한 것을 쫓다가 지쳐 절망하고 계십니까? 죽음의 고통, 육신의 고통, 생활의 고통, 물질의 고통, 자녀로 인한 고통, 남편과 아내로 인한 고통이 짓누르고 있습니까?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인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인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안개와 같이 금방 사라집니다. 따라서 삶의 허탄한 것에 노예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친지의 권유로, 가족의 권유로, 이웃의 권유로 교회에 나오신 여러분, 예수님께서 주신 천국의 열쇠를 꼭 쥐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메아리를 듣고 오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듣고 외면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와 보라”는 명령은 진실의 확증입니다. “와 보라”는 명령은 천국 문을 개방 언약 선포입니다. “와 보라”는 명령은 천국 문에 초대하는 영원한 메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