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 스님의 주련] 21. 함양 서암정사 대웅전
세파로 번뇌 쌓여도 마음은 같은 자리
진호석연 스님이 엮은 ‘석문의범
대예참례’에 실린 찬탄하는 게송
아와 인 분별만 넘어도 삼계초월
사바세계는 안주할 대상이 아냐
함양 서암정사 대웅전/글씨 원응구한(元應久閑, 1935~ 2018) 스님.
我人忘處超三界 大悟眞空證法身
아인망처초삼계 대오진공증법신
無影樹頭花爛漫 靑山依舊劫前春
무영수두화난만 청산의구겁전춘
아(我)와 인(人)을 몰록 잊은 자리는 삼계를 초월하여/ 진공의 이치를 크게 깨달아 법신을 증득하였으니/ 그림자 없는 나뭇가지마다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고/ 청산은 여전히 겁전(劫前)의 봄이로구나!
이 게송은 소백두타(小白頭陀)라고 칭송을 받았던 진호석연(震湖錫淵) 스님이 엮은 ‘석문의범-대예참례’ 가운데 29번째 ‘여러 조사에게 정례하고 공양 올리는 예문’ 가운데 찬탄으로 나오는 게송이다.
아인(我人)은 아(我)와 인(人)에 대한 분별이나 집착을 말함이다. 불교에서는 실체로서의 자아나 영혼을 인정하지 아니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와 인은 가장 근본적인 착각과 전도에 속하는 것이며 모든 집착의 근원이 된다. 여기서는 나와 너라는 이러한 분별상만 넘어서도 삼계를 초월한다고 했다. 삼계는 곧 우리가 사는 오탁악세를 말한다. 고로 사바세계는 벗어날 대상이지 안주할 대상은 아니다.
대오는 번뇌를 벗어나서 크게 깨닫는다는 표현인데 아인망처가 곧 대오이기에 사족이라고 한 것이다. 아인망처 견처에 이르기 위해선 대의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대혜보각록’에서는 “대의심이 있어야 반드시 대오가 있음”이라 했다.
진공은 진여실성을 말하며 모든 미혹한 생각을 여읜 상태다. 남방불교에서는 열반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미혹하면 법신이 그 어디에 있음이라고 착각한다. 법신은 자성신(自性身) 또는 진실신(眞實身)이라 하기도 한다. 이는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청정한 마음의 상태를 몸에 비유한 것이다. 고로 법신은 법계진여의 몸이 되는 것이다.
무영수는 ‘그림자 없는 나무’라는 뜻으로 아인이 사라진 경지를 가리킨다. 무영탑과 같은 의미다. 곧 마음을 말하므로 옛 선사들이 일찍이 사용하였던 표현이다. 이러한 사상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유가에까지 그 영향을 끼쳐서 격조 높고 고아한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무현금’에 비유하기도 했다.
청산은 풀과 나무가 무성한 산이다. 여기서 ‘푸르다’라는 의미의 청은 살아있음을 말한다. 산은 언제나 요지부동하므로 곧 마음자리를 말한다. 온갖 세파에 흔들려 번뇌가 켜켜이 쌓이고 망상이 집을 짓더라도 우리의 마음자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겁외춘에서 겁외는 겁전과 같은 표현이다. 단순하게 보면 나 태어나기 이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우주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시간의 개념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고 하여 성겁, 주겁, 괴겁, 공겁으로 나누는데 이러한 사겁을 벗어난 초연한 경지를 말하는 것을 ‘겁외’라고 한다. ‘시간의 한계를 벗어난 봄’이므로 상대의 차별을 넘어선 무차별의 세계를 말함이다. 마음은 겁 밖의 자리이므로 이는 곧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별천지이기에 춘이라 했다. 이를 노래로 나타내면 겁외가(劫外歌)라고 하며 이를 다시 선(禪)에 비유하면 격외선(格外禪)이라고 한다. 이러한 격외선의 도리는 선문에서는 이미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다만 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드물 뿐이다. 격외선의 가르침 한 토막을 살펴보자.
당나라 때 어떤 납자가 조주종심 선사에게 아주 진지하게 자신의 의문에 관해 물었다.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조주선사는 다짜고짜 말했다.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뜰 앞의 측백나무다.”
이러한 문답이 바로 격외선이다. 백수자는 측백나무를 말하지만, 우리나라 선종에서는 잣나무로 굳어지다시피 했다. 무슨 나무냐고 시비할 것까지는 없다. 측백나무, 잣나무가 엄연히 다르지만 이를 두고 시비가 된다면 이미 선문의 도리에서 어긋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