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38
2월18일[연중 제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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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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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Vqf47cJynWk
[작은형제회 신우창 임마누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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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할 때 마다 아스라이 옛생각이 떠오릅니다. 젊은 형제들의 선생 노릇을 할 때였습니다. 매일 수업만 하면 지루해하지 월 한번 씩 야외로 소풍을 다녔습니다.
보통 라면을 챙겨가 끓여먹고 오는데, 그날은 대축일인지라 삼겹살을 구워먹기로 했습니다. 형제들이 다들 잘 준비하는 것 같아 안심하고 소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가스버너를 안 챙겨왔더군요. 쫄쫄 굶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번 갈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각별히 당부도 했습니다. 다들 대답들은 시원시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이번에는 현관 앞에 둔 고기를 또 깜빡하고 안 가져왔더군요. 이번에는 라면만 잘 끓여 먹고 왔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배를 저어 호수 한 가운데로 나오고 나서야 빵을 안 가져온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수련장’인 예수님으로부터 야단맞을까봐 지레 겁부터 먹고 자기들끼리 이걸 어쩌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 순간 제자들은 ‘누룩이라! 스승님께서 빵 안 챙겨 온 것을 아셨구나. 이제 혼 좀 나게 생겼구나.’며 혼 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빵 담당자, 넌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정신 좀 차려라.”며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코믹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누룩과 관련된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을 부풀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요. 이 문맥상 ‘바리사이의 누룩’ ‘헤로데의 누룩’이란 말의 의미는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서 누룩은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등을 의미합니다. 빵과 관련된 말도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지니고 있는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속 빈 강정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미고 다녔지만 내면은 형편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쥐뿔도 아닌’ 사람들이었는데, 엄청 자신들을 부풀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외치고 다녔지만 실제 삶은 하느님 사랑과 반대되는 율법지상주의, 사악, 교만, 거짓, 죄로 얼룩져있었던 것입니다.
남은 빵조각을 모은 광주리 숫자처럼 일곱 광주리, 열두 광주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할나위 없이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깨우침의 길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일곱입니다, 열둘입니다,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잘 합니다만, 가르침의 핵심, 진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완고함 때문입니다. 수용성 부족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낮춰, 갈고 또 갈아,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열어, 최선을 다해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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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4Wd1qn43Z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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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공동체가 신적 존재의 증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배로 가져온 빵이 한 개밖에 없어서 그런 말씀 하시는가 보다.’라고 수군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5천 명, 4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 일곱 광주리가 남은 것을 보고도 당신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완고한 마음을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이 기적이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게 할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이기적 본성으로 태어납니다. 생존 욕구만을 지녀 나눌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족과 자기 것을 나누어 앞으로 먹을 것을 공동으로 비축하는 바이러스나, 기생충, 모기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이것들은 오로지 자기만 압니다.
그런 결과 이들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은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진정한 가족 공동체가 이뤄지려면 그 구성원이 자신의 것을 희생하면서 내어줄 수 있는 본성으로 탈바꿈돼야 합니다. 부모는 서로서로 자기 것을 나누고 자녀들도 그렇게 가르침으로써 가족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의 힘만으로는 가족보다 더 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어떤 커다란 공동체가 마치 가족과 같이 함께 나눌 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 그 속에서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더 큰 사랑의 존재를 발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소임을 하고 있을 때, 곤지암에서 온 안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혼자 묵주기도만 열심히 하고 수녀님이 와서 인사해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를 찾아오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수녀님은 그냥 할머니 옆에서 묵주기도 1단 함께 해 주고 자리를 뜨곤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일이 있어서 함께 할 수 없었는데 다음에 갔을 때는 “아니,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어딜 갈 땐 간다고 말을 하고 갔었어야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사랑을 충분히 받아보지 않아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었지만 그래도 사랑받고 있음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시집을 가서 29세 때 자식 없이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과부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했습니다. 친정집도 가난해서 연락이 끊겼고 형제들도 다 죽었습니다. 할머니는 머리에 비단을 이고 장사하셨습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계실 땐 힘들어서 짜증도 났지만 혼자 되니 너무 적막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대세를 받았고 그때 할머니도 안나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집에 성모상을 놓고 기도를 드리는데 외로움이 사라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시어머니처럼 대하며 살았습니다. 밥도 한 그릇 더 차려놓고 대화하고, 비단을 팔아서 번 돈을 반반으로 나누어 반은 성모상 밑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둑이 들어서 자기 돈과 비단을 모조리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상 밑의 돈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니, 집 잘 보라고 했더니 자기 돈만 지키고 내 돈은 가져가게 내버려 뒀어요?”라며 성모님께 호통을 치셨습니다. 뉘어놓고 매도 때렸습니다.
며칠 뒤 한 청년이 비단과 돈을 가져와 무릎을 꿇고 “제가 아무리 이곳을 벗어나려 해도 계속 이 집 문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할머니는 청년이 딱해서 취직도 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79세에 방광암이 들어 이렇게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하며 검사를 받으러 병실을 비울 때는 수녀님에게 작은 보따리를 맡겼습니다. 그 보따리 안에는 통장과 폐물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수녀님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고 몇 번을 권해드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자신이 평생 모은 돈인데 왜 남에게 주느냐며 수녀님을 “도둑년”이라고 소문을 냈습니다.
수녀님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되는 줄 알고 하느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할머니가 마음을 열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할머니는 며칠 뒤 눈물을 흘리며 꿈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친정어머니인지, 큰언니인지 모르겠지만 참 나를 사랑해주는 여자가 왔다 가셨어. 갑자기 내 손을 잡고서는 ‘안나야 놀러 가자.’라고 하시는 거야. 놀러 가는 집들은 내가 살아오면서 나에게 도움을 줬던 집들이었어. 집안에 알곡으로 가득 차 있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집으로 들어왔는데 알곡은 없고 짚단 하나만 달랑 있는 거야. 내가 왜 우리 집만 이러냐고 따졌는데 그 여인이 ‘넌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한테 다 얻어먹고 살았지. 그런데 네가 남들에게 베푼 것은 짚단 하나밖에 없더구나.’
‘짚단은 뭐지?’ 내가 한참을 생각해보니 기억이 났어. 내가 어렸을 때 앞집 송아지가 하도 울기에 우리 집 짚단을 준 기억이 난 거야. 수녀야, 어쩌면 좋냐! 난 베푼 게 없어. 우짤꼬!”
수녀님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정말 줄 사람이 없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양자가 한 명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집에 들어와 비단과 돈을 훔쳤던 그 청년이었습니다. 이후 청년을 양자로 삼았었고 6년을 함께 살다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자주 찾아오지만 자기 시부모처럼 그 아이에게 짐이 될까 봐 알리지 않고 병원에 들어온 것입니다. 당시 핸드폰도 없을 때라 양아들도 연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수녀님은 그 아들에게 전화했고 온 가족이 할머니를 보러 왔습니다. 아들은 보자마자 울면서 6개월 동안 팔방으로 찾아다녔다고, 이러신 줄 몰라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당신 유산을 아들에게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묵주를 수녀님에게도 주며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게 이렇게 마음이 꽉 차고 기쁜지 몰랐어.”
그러며 “우리 엄마 같기도 하고 큰언니 같기도 한 그 여인이 성모님이셨던 것 같아.”라고 말씀하시며 숨을 거두셨고, 양아들 가족도 할머니의 유지에 따라 모두 세례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안나 할머니는 어머니와 언니에게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남편의 사랑도 받았고 어쩌면 시부모의 사랑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죽으면 썩어버릴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가족 아닌 이에게 내어줄 만큼의 사랑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사랑이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모기 안에서 무슨 사랑이 솟아나서 서로 나누겠습니까? 분명 우리 부모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으로 우리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수천, 수만 명이 되는 커다란 공동체가 그렇게 서로 나누며 배불리 먹고도 음식이 많이 남을 정도로 나눌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사랑을 넘어서는 엄청난 사랑이 그 공동체에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나눔의 공동체 자체가 사랑의 하느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의 가족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모가 있다는 증거인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작은 가족 공동체의 창조자이고 하느님은 교회 공동체의 창조자이십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당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수많은 부모도 포함됩니다.
제가 오산 성당에서 주임 신부를 할 때 첫 주일 헌금은 무조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때 신자들은 다른 어떤 주일보다 더 많은 돈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나누어줄 돈이 흘러넘쳤습니다.
각자 사는 것이 빠듯하지만 이웃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이는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힘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있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가족이 부모가 존재하고 그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나눔의 공동체인 교회 자체가 바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사랑 자체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도 또 다른 표징을 보이라면 이는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닌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가족을 사랑하게 될 수 없고, 하느님 없이 가족 아닌 사람들과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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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5년의 일입니다. 저는 우체국장 하는 형제님의 권유로 우체국 보험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담이 되었지만, 우체국 보험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2년 후인 1997년에 IMF가 시작되었습니다. 형님의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제게 부모님을 모셔야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저는 급한 대로 교구 신협에서 대출을 받아, 부모님이 거처할 집을 마련했습니다. 우체국 보험이 만기가 되어 대출금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달라스 성당에 와서도 은행 계좌를 보았습니다. 입출금 계좌를 적금 계좌로 변경했습니다. 1년이 지나면서 적금 계좌에서 수익이 발생했습니다. 예전에 본당 신부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우들이 정성껏 봉헌한 교무금과 헌금을 잘 관리하는 것도 사목자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 관리를 잘한 종은 주인에게 칭찬받고 더 많은 달란트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사막에 방주를 만드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는 일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는 노아와 가족 그리고 노아가 데리고 들어간 동물을 살리는 구원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노아의 방주는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는 ‘인간관계’라고 생각합니다. 함석헌 선생님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의 방주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갈 수 있었는데 억울함을 풀어준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가 구원의 방주입니다. 둘째는 ‘재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준은 ‘돈’입니다. 돈이 있으면 집을 살 수 있고, 돈이 있으면 여행도 가고, 돈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도 도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목적도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건강’입니다. 인간관계가 좋아도, 재물이 많아도 건강하지 못하면 인간관계와 재물이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나빠져도, 재물을 잃어도 건강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은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구원의 방주는 무엇일까요? 노아의 방주는 단순히 커다란 배가 아닙니다. 방주는 구원의 도구이며, 공동체의 상징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밖에 남은 자들은 홍수에 휩쓸려갔습니다. 이 방주는 오늘날 우리에게 교회를 떠올리게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죄와 혼란 속에서도 신자들이 머물며 구원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은 방주를 세례와 연결하여 말합니다. "방주 안에서 물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세례를 상징합니다." 방주의 물은 세례의 물과 같습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죄에서 깨끗해지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며, 구원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 방주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경고를 받고 경외심으로 방주를 준비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때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 세상의 눈에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며 실천하는 것이 구원의 방주입니다.
홍수가 끝난 후,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무지개를 통해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이 언약은 단순히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구원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이 구원의 언약을 계속해서 새롭게 합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4장에서 "노아 때와 같이 인자의 때도 그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시대처럼, 종말의 날도 우리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올 것입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기 전에 준비된 자들만이 구원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방주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과 삶은 정말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방주, 곧 교회와 믿음의 삶 안에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기도 생활, 성사 참여,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 바로 우리의 방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방주를 준비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는 그 방주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구원을 향한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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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누룩은 지금은 매우 작고 감추어져 있지만 나중에 큰 효과를 내는 어떤 것의 비유입니다. 작은 밀가루 반죽 속에 숨어 그 반죽을 서서히 부풀려 커다란 빵을 만드는 효모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은 그들이 각각 대표하는 악, 곧 위선과 교만, 권력욕과 포악함 등으로, 그것들이 제자들 안에도 감추어 있지는 않는지 살피도록 경고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깊은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외적인 차원에서만 빵을 이야기합니다. 배 안에 빵이 하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걱정에 붙들려서 누룩의 의미도, 조금 전에 목격한 사건 곧 예수님께서 수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의 의미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여전히 수군거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설명하시며,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하십니다.
영성 생활에서는 일어난 일의 외적이고 일차적인 뜻보다는 숨은 의미, 영적인 의미를 알아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제자들에게는 빵 하나로 충분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빵이신 분을 배 안에 모시고 있었으니까요.
노아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실 만큼 죄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던 세대의 누룩이었습니다. 우리도 저마다 또는 공동체로서 가끔 불의와 악이 지배하는 듯 보이는 우리 세대의 누룩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안에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이 감추어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고 없애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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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14-21: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15절). 유다인들에게 누룩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악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조심하라는 누룩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방해되는 인간성의 병폐, 부패의 요소들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이란, 예수님께 어제 복음에서 요구한 메시아적인 징표이다. 그것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현세적인 태평성대를 바라는 것이다. 헤로데의 누룩이란 권력과 부귀를 통한 자신의 영달을 말한다. 지상에서의 권세와 재력과 무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현세적인 승리, 현세적인 안락이었다. 이러한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이것도 모르고 제자들은 빵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만을 생각하면서 그 빵이 없으면 굶주린다는 생각밖에 못 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쳐 주신다. 몇 번이나 빵의 기적을 상기시켜 주신다. 당신과 함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것을 여러 가지 행적으로 보여주셨으나 백성도(6,14-15), 종교와 정계의 지도자들도(2,6.16.24; 3,6.22; 6,16; 7,5) 친척들도(3,21.31-35), 고향 사람들도(6,1-6), 그리고 제자들도(4,13.40; 6,52; 7,18; 8,17-21) 이해하지 못하였다. 모두 눈먼 소경들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뜻으로 베싸이다의 소경을 고쳐주신다.(8,22-26) 소경처럼 시력을 되찾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된다(8,27-30).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욕을 가지고 현세적인 누룩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떠한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있음을 깊이 느끼며,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켜나가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의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악표양의 누룩을 모두 버리고 진정으로 삶의 질을 높여갈 수 있는 누룩의 모습을 갖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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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걱정한다고 비웃지 말고, 사랑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14-21)
1) 여기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뜻합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부유함을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복이라고 생각한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자들’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죄인들, 하느님의 벌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은 아주 잘못된 사고방식이니 그런 사고방식에 물들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2) 예수님께서 ‘재물’에 관해 가르치셨을 때,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는 말이 루카복음에 있습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루카 16,13-14)
그런데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고, 사도들도 그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마르 10,23-26)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제자들의 말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되는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뜻이고, 사도들도 그 당시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 같은 오늘날에는 그런 사고방식이 더욱 심하게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와 부귀영화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결코 ‘하느님의 복’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복’이 아니면 무엇인가? 어떤 경우에는 ‘사탄의 장난’인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전부 다 ‘사탄의 장난’이라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어떻든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3)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라는 말은, 빵이 없다고 제자들이 걱정했다는 뜻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순서와는 다르게 제자들이 걱정한 일이 먼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14절의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라는 말에서, ‘배 안에 있는 빵 한 개’를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일차적으로는 ‘빵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위해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셨지만, 제자들만을 위해서는 그런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건 일은(마태 12,1-2), 예수님과 제자들의 평소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제자들이 빵이 없다고 걱정한 것에 대해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고달팠을까?”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가난한 이들’을 함부로 비웃거나 꾸짖으면 안 됩니다. 남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랑 없음’은 ‘죄’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이웃이, 또는 형제가 그런 문제로 걱정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4) 제자들의 걱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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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러려니>
마르코 8,14-21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때에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려니>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마르 8,19)
가지려니
한 옴큼이요
나누려니
온 누리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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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기적과도 같았던 하루하루를 마감하며>
+찬미예수님!
처음 청담동성당에 부임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몇몇 신자분들이 기억납니다.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어떤 할머니 신자분께서 저에게 다가와서는 제 얼굴을 한창 흘겨보셨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가야 돼”
막 부임한 저에게 어디론가 가야한다는 그 말씀이 다소 오묘하게 들렸습니다. 회합에 들어가야 할 시간인데 잊어버린 것이 있는지 떠올려 봤지만 아무런 일정이 없었습니다. 어리둥절한 저를 계속해서 뚫어지게 쳐다보시던 그 할머니 신자분은 혀를 끌끌 차고는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가야 돼”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반복하시자 저는 마치 현인에게 지혜를 구하는 중생과 같은 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합니까?”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어디긴 어디야, 신학교지! 본당에 있으면 여러 가지 유혹도 많고 위험하니 빨리 신학교로 가셔야 돼, 거기가 본당보다 훨씬 안전해!”
그렇게 약 2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신학교 발령이 난 뒤, 얼마 전 받은 주일학교 학부형의 문자도 생각납니다. 그 문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이 다른 본당에 가서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고 사랑하게 된다면 배가 아팠을 텐데, 신학교에 가셔서 참 다행이에요. 신학교에 계속 계셨으면 좋겠어요.”
곧이어 같은 분의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저는 그 문자를 보고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는데, 거기에는 단 세 글자만 적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영.원.히.”
한 마디로, 앞으로 본당에 나오지 말고 시커먼 신학생들이나 잘 교육시키면서 청담동성당을 평생 그리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젊은 사제가 혹시라도 유혹에 빠질까 고민하는 할머니 신자분의 마음, 평생 신학교에서 자신의 자녀를 그리워하기를 바라는 젊은 어머니의 마음. 이 마음의 공통점을 꼽자면 아마도 흔히들 “사랑”이라고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또 다른 단어로 요약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적”입니다.
기적. 우리가 하느님께 줄곧 청하고 바래왔던 그 기적 말입니다. 기적의 사전적 뜻은, “인간이 증명할 수 있는 자연, 과학 법칙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놀라운 사건” 혹은 “상상을 초월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제가 지난 시간을 “기적”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신자분들로부터, 그리고 주일학교 아이들로부터 받았던 사랑은 저의 이성으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한 것이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다시금 제가 체험했던 기적에 대해 떠올려 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보다 스스로가 잘 살기 바쁜 이 시기. 저 같은 젊은 사제의 사소한 말들을 기억하며 아이에게 신앙을 알려주고자 하는 젊은 부모의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일 나이, 저와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어린 아이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기적 아니겠습니까?
학업을 비롯해 여러 가지 바쁜 이 시기, 마음 한 편에 스스로를 응원하는 하느님을 소유하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높이는 청소년이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실천한 사랑에 비해 무한한 사랑을 받았을 때, 마음 한 켠에 그 따스한 온기를 품고 앞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성당 한 켠에 앉아 있는 저 젊은 교리 교사들을 보십시오. 제 뒤편에 앉아있는, 그리고 미사에 참석한 저 많은 어린 복사 아이들을 바라보십시오. 저 같은 부족한 사제를 사랑하며 함께 하는 우리의 이 시간을 “기적”이라는 단어 말고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저는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 모두를 경험한 저의 삶 하루하루가 바로 기적이었음을 말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해 본 바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무심코 성당에 왔는데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지치고 힘든, 그리고 메마른 삶 중에 문득 성당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철부지 같은 자녀가 복사를 하고 싶다고 새벽 미사를 나서고 첫영성체를 하겠다고 본당을 나서면, 신부님을 사랑한다고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져 온 것이며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근간인 셈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이 기적들을 기억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잊어버립니다.
빵 다섯 개를 오천명에게 떼어 주신 예수님의 기적을, 빵 일곱 개를 사천명에게 떼어주신 기적과 같은 순간들을 경험했음에도 그 기억을 잊어버리고 또 다른 새로운 기적을 요구하곤 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날카롭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이 질문을 마음에 새기며 다시금 모든 신자분들과 아이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선물과도 같은 시간을 깨달으며 저에게 기적의 하루하루를 남겨준 모든 분들에게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한 시간들을 기억하며 모든 분들이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시는 기적의 하루하루를 나날이 체험하시길 진심으로 응원하고 기억하겠습니다. 저 또한 이를 기억하며 제가 받은 사랑을 앞으로 돌려드리고자 애쓰겠습니다.
그러다보면 또 다른 기적같은 하루하루가 저에게 다가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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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의 누룩을 챙겨라>
누룩은 부풀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트나 베이킹 파우더와 같은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그래서 빵과 술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13,33). 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누룩이 좋은 것에 들어가서 부풀리면 그만큼 좋은 것으로 부풀려질 것이고, 반대로 나쁜 것에 부풀려지면, 나쁜 것이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누룩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마태23장 참조)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율법준수에만 구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하고 자녀가 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들은 선해 보이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엄격함은 하느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온순함이 선물입니다. 선함, 너그러움, 용서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구원을 소유와 지배, 권력의 화려함 속에서 찾았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 사고방식, 행태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먹게 해 주셨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빵의 기적을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참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필리피서 3장 7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린 바오로 사도가 부럽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나의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꼭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하고 있는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바리사이, 헤로데의 누룩이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삶의 자세, 잘못에 대해 벌주시고 나를 감시하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시각, 재물에 대한 욕심, 부귀영화에 대한 동경,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차에 십자가나 묵주를 매달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려니 생각하는 태도, 허영, 가식 등등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누룩은 버리고 하느님 말씀의 누룩을 부풀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결국에는 빵의 기적에 관한 얘기를 상기시키시면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21)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느냐?” 아니면 “때가 되면 알리라.” 어떻게 받아들이든 능력의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근심, 걱정에 싸여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으니 우리와 주님 사이의 통교는 오죽하겠습니까? 주님과 깊은 만남에 이르는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오늘 한 발 주님께로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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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창세기 홍수 이야기의 도입 부분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는 것과,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인류의 첫 번째 범죄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사건이었고, 둘째는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사건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제 인간의 죄악을 일일이 나열할 수 없기에 ‘악이 세상에 많아졌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참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하여 악이 세상에 들어오고, 악은 점점 많아지고, 참 좋았던 세상이 악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를 1장부터 읽어 온 독자라면 참 좋은 세상이 악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의 확장성이 독서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우리 자신도 이러한 죄의 확장성을 이미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죄는 단 한 번, 딱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한 번의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한 또 다른 거짓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다시 다른 거짓말을 하도록 만듭니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죄악이 가진 위험성과 무서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가들은 ‘죄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요. ‘죄의 뿌리’를 뽑는 것은, 아예 첫걸음을 내딛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작은 합리화는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우리를 창조하셨음을 후회하시어 마음 아파하시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참 좋았다.”(창세기 1장 31절)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 때문에 하느님께서 후회하시고 마음 아파하시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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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하늘과 땅>
스승 예수님, 우둔한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저희들의 관심사는 언제나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이고 저급합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무엇을 마시며 입을 것인지, 어디에 몸을 뉘일 것인지 따위가 저희들의 관심사입니다.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사는 동안 늘 그럴 것입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굽어보시어 본능적이고 일차적인 문제에 매몰되어 땅만 뒤지며 살지 않도록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인간의 인간다움은 무엇을 얼마나 지녔는지, 얼마나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서 향락을 누릴 수 있는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비록 높은 학식과 지위로 자신을 과시誇示하고 값비싼 명품 옷가지와 장신구로 제 몸을 치장하고 있다하더라도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올리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인간다움을 상실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인간은 두 발을 땅에 딛고 머리를 하늘 향해 곧추서는 존재입니다. 땅은 인간이 하늘을 향해 오를 수 있는 발판입니다. 인간이 땅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하늘을 향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하늘과 땅은 맞닿아있고 하늘을 바라보며 땅에 충실한 사람이 하늘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맞닿아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하늘은 너무나 멀고 또 먼 훗날의 현실이라 생각하면서 눈앞의 땅에 집착하면 하늘을 잃게 됩니다.
하늘 없이 땅은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땅에 충실하지 않으면 하늘에 오를 수 없습니다. 天地는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하늘만을 고집하거나 땅만을 바라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십시오. 慾望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하늘을 외면하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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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대학 교수가 자기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간단한 테스트를 한다면서 시험지를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시험지에는 빨간 점 하나만 찍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교수는 종이에 뭐가 보이는 지를 적는 것이 테스트라고 말했습니다.
30분이 지난 뒤, 교수는 시험지를 걷어갔습니다. 교수는 곧바로 시험지를 보면서 학생들이 쓴 글을 읽어주셨습니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시험지 중앙에 찍힌 빨간 점에 관해 서술했습니다. 점과 종이의 비율, 가운데 찍힌 점의 위치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교수는 이 모두를 읽어준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오로지 빨간 점에만 집중했습니다. 주변의 하얀 종이에 관심을 둔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지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얀 종이와도 같지요. 우리의 삶은 이 안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부분인 빨간 점에 자기를 가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무궁무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를 빨간 점이라는 아주 작은 부분에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자기 삶을 확장해야 합니다. 특히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함께한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에서 계속 확장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립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악’을 말합니다. 악이란 것은 눈에 훤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이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제자들은 빵이 없다는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앞서 교수님이 나눠 준 시험지의 경우와 똑같은 것 같습니다. 하얀 여백이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아주 작은 부분인 빨간 점에만 바라보는 학생들처럼, 제자들은 눈앞의 문제만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하면서 들었던 말씀, 또 보았던 기적들을 보면서, 자기 삶을 확장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빵의 기적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에 매여서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했을 때의 기쁨과 희망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을 확장해야 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문제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통해 자기 삶을 분명히 확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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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노아가 만들었던 방주가 얼마나 컸을까요? 수많은 동물과 그 동물의 식량을 넣을 배를 만들자면…. 아마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배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의 주인공은 노아가 아닙니다. 다만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라고만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보고 듣는 것을 ‘기억’이라고 합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지금까지 무엇을 듣고 계셨습니까? 무엇을 보셨습니까?
복음속 제자들은 주님의 기적을 직접 보았습니다.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였으니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2000년 전의 제자들이 본 것을 제자들 스스로가 증언하고 있는 성경을 잃으면서도 우리는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노아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냥 그분의 음성에 발맞추어 살았던 것입니다. 제자들 또한 주님의 말씀에서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 신앙과 삶이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미사에 참여하고, 레지오를 하고, 구역 모임을 하고, 성체 조배를 하고, 함께 성당에서 청소하고, 이 모두를 우리는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신앙과 우리의 생활이 분리된 것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제자들은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신앙생활입니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닌 주님을 따라 사는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 보시기에 온전한 신앙생활이 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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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마르코.8,15)
청소년들은 다투면 친구의 편을 듭니다. 누가 옳고 그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편이면 무조건 정의로 생각합니다. 청소년은 분별력이 모자라서 그렇다지만 어른이 그렇게하면 사회나 공동체에는 정의가 사라집니다. 미숙한 어른의 분별력은 ‘바리사이의 누룩’과 같습니다.
내 자녀과 남의 자녀가 서로 다투면 어른들은 공정하게 판단하여 자녀의 미숙함을 일깨워 주어야 하지만, 부모들은 내 자녀여서 무조건 옳다고 편을 들기 쉽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불공정하게 판단하도록 가르칠 때, 이 또한 ‘헤로데의 누룩’과 같습니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커서 이 사회에서 크고 작은 일에 공정하고 정의로운 식별력에 기초한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편파적이고 정실적인 판단을 합니다. 편파적이고 정실적인 판단은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과 같습니다.
힘이 있는 곳에 기생하려는 나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헤로데의 누룩’과 같은 파벌과 줄서기, 편파적이고 정실적인 판단은 항상 매력적입니다. 진실과 공정과 정의를 심고자 하늘의 누룩이 되셨던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삶보다 훨씬 편리합니다.
편파적이고 정실적인 미숙한 청소년의 ‘또래 문화’가 ‘바리사이의 누룩’ 곰팡이처럼 퍼져 성숙한 분별력을 필요로 하는 사회나 공동체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 ‘누룩’은 국가나 공동체마저 희생시킵니다. 땅에 사는 자신을 위해서 때로는 많은 국민마저 희생시킵니다.
무분별하고 해로운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처럼 사는 삶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보다 그런 ‘누룩’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와 공동체에 진실과 공정과 정의가 춤을 추는 하늘 나라를 부풀게 하는 누룩이 되도록 초대받은 사람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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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달마누타지방에서 바리사이들과 표징에 대한 논쟁이 있은 후에, 배를 타고 벳사이다로 건너가던 중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마르 8,14-16)
그러나 분명,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마르 8,14) 있었습니다.
그 한 개의 빵은 대체 어떤 빵인가? 사실, 그 빵은 마르타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직 필요한 하나인 빵’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전부인 하나인 빵’ 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하더라도 이 ‘하나’를 가지지 못하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고 마는, 이 “한 개”만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되는, 그런 ‘빵’입니다.
여기서, ‘배’가 교회의 표상이라면, ‘빵’은 바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
대체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란 무엇인가? 그들의 삶의 방식, 곧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행동하며,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바리사이들의 삶의 방식과 소유와 권력과 화려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헤로데의 삶의 방식입니다. 바로 이러한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녀야 할 누룩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는가? 비록 씨앗으로 뿌려지지만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그 ‘말씀의 누룩’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모든 삶을 부풀리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누룩인 말씀의 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 8,17)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닫다”(σινιετε)라는 단어는 ‘나란히 서다’, ‘함께(같이) 서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개의 빵”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이신 우리 주님, 그리스도 곁에’ ‘나란히 함께’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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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마르 8,14)
주님!
실상 필요한 빵은 한 개면 충분합니다.
제게는 이미 당신이 있고,
당신만이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진정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당신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오니,
오로지 제게는 당신만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저의 임,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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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류의 타락>
-하느님의 좌절, 후회와 아픔-
공부중의 공부가, 평생공부가 사람되는, 참사람되는 공부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공부입니다. 둘 같지만 결국은 하나입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공부에 큰 도움이 됩니다.
“공부는 나를 깨달아 알아감으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과정이다. 함께 하는 이가 있으면 공부가 더욱 즐거워진다.”<다산>
날로 새로워지고 순수해지고 자유로워지는,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는, 깨달아 알아가는 깨달음의 인생 여정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벗이 먼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으면 그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논어의 공자>
논어 맨처음 시작되는 공자의 인생 삼락의 말씀입니다.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모든 삶의 장이 공부의 대상이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인생학교의 영원한 현역의 학인임을 깨닫습니다.
더구나 오늘 창세기와 마르꼬 복음의 무지의 악에 눈먼 이들을 대하면 더욱 공부의 절대적 필요성을 느낍니다. 주님의 이런 사람들에 대한 좌절, 후회와 아픔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이건 일부 특수한 사람들이 아닌 인간 대부분의 보편적 현실임을 깨달을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흔히 회자되는 “기계는 고쳐쓸 수 있어도 사람은 고쳐쓸 수 없다”라는 또, “원판불변의 법칙”이란 말마디도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고 낙관적 전망을 어렵게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저런 물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답은 회개와 깨달음의 선택, 그리고 훈련과 습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서두부터 말씀이 작금의 극심한 분열과 혼란, 부패하고 변질된 현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같아 섬뜻한 느낌도 됩니다. 흡사 온몸에 퍼져가는 암세포같은 세상 악의 현실을 보면 더욱 이런 느낌이요, 날로 심화되는 기후위기에 중병을 앓고 있는 공동의 집인 하나뿐인 지구를 보면 과연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는지 묻게 됩니다. 그대로 오늘의 현실을 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단숨에 읽히는, 공감이 가는 제1독서 창세기 말씀 전반부 대부분을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보시고,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 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섭게 마음에 와닿는 오늘의 현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같지 않습니까? 여전히 반복되는 악의 현실에 과연 인간에게 희망을 둘 수 있는가 묻게 됩니다. 위 내용만 보면 성악설이 맞고, 앞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기사를 보면 성선설이 맞고 또 둘 다 해당되는 역설적 인간 존재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저절로 고백하는 엊그제 인용했던 ‘산앞에 서면’ 이란 자작 애송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반부는 세상 피조물들을 홍수로 쓸어버리는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에 앞서 노아에게 하달되는 명령이요, 노아는 하느님께서는 명령하신 그대로 다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롤모델로, 하느님의 희망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노아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심기일전 분발하여 회개와 깨달음의 여정에 따라, 하느님 마음에 드는 노아처럼 한 번 의롭고 흠없이 살아보라는 주님의 원의를 감지합니다. 노아 ‘그는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라는, 히브리어 직역인 영어-“He walked with God”- 가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발로 걸을 때 늘 ‘영원한 동반자’이자 길벗 도반인 주님과 함께 걷고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어제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에 대해 탄식하며 좌절감을 표현했던 주님은 오늘 제자들의 눈먼 현실에 그대로 좌절감을 표현합니다. 얼마전 있었던 빵의 기적을 까맣게 잊고 빵이 없다고 걱정하는 정말 대책없는 무지에 눈먼 제자들이요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부정적 현실입니다. 이 또한 우리를 향한 질책처럼 들립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는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치 제가 받는 질책처럼 부끄러운 생각도 듭니다. 새삼 우리 인생 여정은 회개와 더불어 깨달아 나를 알아가며 주님을 닮아 순수해지고 자유로워져,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져 참나가 되어가는 “회개와 깨달음이 여정”임을 알게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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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
<두 누룩의 참의미!>
오늘 복음(마르 8,14-21)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은 누룩의 참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빵의 의미로 깨닫고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수군거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기적'과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이 배불리 먹고 일곱 광주리가 남은 기적'을 상기시켜주시면서, 누룩의 참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누룩'은 빵과 관련된 것으로, '빵을 만들 때 반죽을 부풀리게 하는 재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은 그들의 사상과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에 현혹되거나 따라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은 '바리사이들의 거짓과 위선'입니다. 하느님을 참되게 믿지 않고, 하느님을 진실되게 전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의 거짓과 위선에 대한 지적이며, 이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헤로데의 누룩'은 '권력욕'입니다.
세상이 권력욕에 빠져 혼란스러우면 거짓과 위선이 활개를 칩니다. 권력을 유지하거나 권력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포장된 위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금의 우리나라의 모습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하신 '누룩을 조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삶의 자리에서 이러한 가짜뉴스와 위선에 현혹되지 말고, 그것을 따라가지 말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점점 더 거짓과 위선에 빠져들면, 창조주 하느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내가 사람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창세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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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 15)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모순의
누룩들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누룩을 알아야
지나친 욕망의
누룩에
우리가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누룩을
조심하고
누룩을
없애는 것이
건강한
신앙인의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삶의 현실에서
우리가
제대로
닦는 것이
깨달음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허황하게
떠벌린
누룩은
깨달음의
은총을
결코
맛볼 수
없습니다.
누룩의 흐름에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흐름에
거역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흐르는
삶입니다.
누룩 안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참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참모습을
회복하는 길이
누룩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그 길을 삶으로
보여주십니다.
헤로데의
누룩이 아니라
복음의 자유를
만끽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우리의 생활이
누룩이 아니라
복음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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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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