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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Neo-Confucian Thought in Action)
-杜維明 지음/권미숙 옮김
-해제 : 陽明根本義(도올 金容沃)
[저자 뚜 웨이밍 서문]
왕양명(1472~1528)은 중국전통에 있어서 가장 역동적인 사상가의 한사람으로서 동아시아 지성계에 수 세대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중국 전역에 퍼진 그의 철학은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지성계를 지배하였다. 일본에서는 요메이가꾸(陽明學)으로 알려진 양명의 가르침이 나카에 오오쥬(中江藤樹,1608~1648),쿠마자와 반잔(熊沢蕃山,1619~1691),사쿠마 쇼오잔(佐久間象山,1811~1864)과 같은 탁월한 사상가들에 의해서 해설되었으며, 일본지성계에 있어서 강력한 전통으로 인지되어왔다. 양명사상의 영향은 중국과 일본에서 아직까지도 분명히 남아있다. 1970년 11월 문단에 충격을 주었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儀式的인 자살은 새삼 말할 것도 없거니와 쑨얏센(孫逸仙 즉 孫文,1866~1925)의 행동의 지침, 시옹 스리(熊十力,1885~1968)의 심리철학, 마오 쩌뚱(毛澤東)의 실천이론 등은 전적으로, 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양명사상의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
양명 사상의 힘은 그의 철학적 통찰과 인격, 이 두가지 역동적 특질에 있다. 생전에 그는 농부, 상인, 지방양반으로부터 士大夫(지방장관, 검열관, 존경받는 학자들 포함)에 이르기까지 수백명의 학생들을 매혹시켰다. 그들은 양명의 고향인 양쯔강유역에서 뿐만 아니라 멀리 廣東, 湖廣, 江西에서도 몰려들었다. 지식과 행동은 하나다라는 그의 획기적인 이론으로부터 발전한 내적지식에 관한 가르침으로 유명한 양명은 유가사상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였다. 자기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열중한 양명은 修身을 통한 경전의 체험적 이해가 책을 통한 배움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새로운 가르침을 말로써보다 자신의 행동으로 본을 보였다. 그의 영향으로 유학의 길은 더 이상 인텔리의 특권적인 길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이 원래 의도했던 바대로 유학은 모두에게 있어서 인간이 되는 길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볼 때 양명이 유학에 기여한 바는 마르틴 루터가 기독교에 기여한 바 못지 않게 심원한 것이었다고 말해도 억지는 아닐 것이다.
양명이 유학을 변형시킨 것은 또한 사람들을 성실한 목적과 확고한 행위로 고무시키는 그의 능력에 의해서도 잘 드러났다. 궁중정치의 현실에 직접 대면했던 경험과 행정가, 판사, 장관 및 통치자로서 공직에 복무했던 경험이,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사상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그의 천직에 새로운 차원을 보태주었다. 그는 중국 역사상 사고의 독창성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군사적 전략, 사회조직, 지방정치의 행정에 창조적으로 응용했다는 점에서 유례없이 빛나는 유가의 대가였다. 그는 변경지대의 도적떼를 평정하는 데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고, 명나라 중엽에 있었던 가장 지독한 반란 중의 하나인 어떤 반란의 주모자를 교묘한 방법으로 사로잡았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明朝에 있어서 탁월한 학자-장군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물론 양명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명나라 중엽의 사회에 대한 이해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우리가 보겠지만, 이것은 자신의 철학을 명확하게 구성하려는 양명의 첫 번째 시도를 서술하는 데 특히 해당되는 이야기다.
명조 중엽으로 알려진 16세기 초의 중국에 있어서 국가와 사회의 안정은 위로는 심화되어가는 전제적인 지배와 아래로부터는 고조되는 불안정으로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사대부들은 임박한 위기를 통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 위기는 조정에 있어서는 환관의 세력, 관료주의의 과정에 있어서는 족벌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깊은 불안감으로 특징지워졌다. 개인으로 하여금 유교의 과거제도를 통해 사회적 상향이동을 꾀하라는 전통적인 요구는, 극도로 제한된 인원수를 두고 경쟁하려는 자격을 갖춘 응시자들이 대폭 늘어남으로써 충족시키기가 점점 어렵게 되었고, 따라서 젊은 학생들은 도교와 불교로 정의될 만한 삶의 다른 양식에 쉽사리 현혹되었다. 양명과 그의 동시대인들, 그리고 유교의 상징주의 영향하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이 문제를 자아와 사회간의 갈등이 아니라 인간이 되고자 하는 투쟁으로 감지하였는데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그 두 가지(철학적 통찰과 인격)가 다 포함되어야 했다. 그들은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다양한 세력의 와중에서, 고립된 개성이라기보다는 관계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자신의 “인간적 위상”(personal locus)에 진실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물었다.
연구의 결과, 나는 양명의 사상이 형성된 수년동안 가장 중요하며 지속적인 그의 유일한 관심은 유교적 상징주의란 말로 정의되는 聖人에 대한 탐구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이 연구는 ‘聖人’이란 말로 양명이 의미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검토하는 데 주된 초점이 맺혀진다. 유교는 사회적 관계와 공적인 봉사를 특히 강조하기 때문에, 이른바 내적 자아의 완성을 추구하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는 교과서적 설명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은 관심이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 서양의 중국역사 해석가들 중 많은 이들이, 전통적 중국에 있어서 전형적인 유가는 사회에서의 주된 기능이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정부를 보조하는 사대부라는 인상을 심어왔다. 유가는 세계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이 목적달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정치적 강제보다는 시민적 봉사와 교육을 통한 도덕적 설득의 이용을 더 좋아하였다. 그 결과, 관료적 일상사에 관여함으로써 유가의 정신적 추구의 범위는 극도로 제한되었으며, 대개 그들은 정부의 실용적인 공무원이 되고 말았다. 개중에 어떤 유가는 재능있는 예술가나 창조적인 시인, 또는 정신적인 지도자인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 사회적・정치적으로 규정된 역할수행에 전적으로 몰두하기 때문에 다른 행위들은 주변적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聖人의 추구는 종종 내적 자유를 지향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 추구는 필연적으로 기존 사회의 규범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고 여겨진다. 사회가 알맹이 없는 순응만을 요구할 때, 자기실현을 위해 개인은 그에게 부과된 숨막히는 경직된 규율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자아와 사회와의 갈등은 불가피하며, 자기실현은 사회의 강제에 대항하는 끊임없는 투쟁이란 말로 규정되어야 한다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어떻게 사대부가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동시에 聖人을 진지하게 추구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 하나 우리를 혼란시키는 어려움이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가정으로부터 생겨난다. 즉, 聖人이란 반성과 내적인 성찰을 통해 얻은 지혜의 형태를 의미하므로 성인은 근본적으로 명상적인 삶의 양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가정이다. 당연히 儒家 聖人의 통속적인 이미지는 德性과 智慧의 인물인 동시에 또한 年老한 인물일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와 같은 개념이 양명과 같이 젊은 행동가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몹시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성인의 완성을 야심 만만한 사대부와 관련짓는다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다. 실제로, 유교적 설득이 사회의 가장 강력한 지적 힘이라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명나라 중엽의 중국에서, 유가 관리나 문인과 마찬가지로 유가 장군과 사상가를 발견하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성인을 靜的인 인격적 이상형으로 보는 뿌리깊은 우리의 습관에 있는 것 같다. 성인이 자기변형의 力動的인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렵다. 성인의 의미가 그것이 추구되는 방식에서 확정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성인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는가도 포함된다.
실제로, 유가의 상징주의에서 성인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나 추상적인 규범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감화의 표준으로 간주된다. 성인의 길은 유가가 스스로를 인간화해서 자기 주변의 세계 또한 인간화될 수 있게끔 인도하는 하나의 지향점이다. 그래서 그 길은 언제나 인간적 관계의 맥락에서 추구되며, 그럼으로써 유가로 하여금 사회와 정치에 있어서 능동적인 역할을 떠맡을 수 있도록 하고, 때로는 떠맡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무엇보다도 윤리적-종교적 이상형이기 때문에, 성인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사회적 명망이나 정치적 세력과는 의미가 판이하게 다른 일련의 가치에 기초하며, 성인의 추구는 종종 현존하는 사회정치적 질서와의 갈등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유가는 그의 정신적 자기 결단이 현존하는 가치체계와 불가피하게 충돌한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고 있을지라도, 사회를 통한 그의 길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유가의 성인이란 의미에 내적 자유의 지속적인 추구를 포함하는 심오한 자기인식이 수반된다 하더라도, 성인의 길은 인간 세계로부터 결코 떨어져 있지 않다. 유가에는 기독교의 교회나 불교의 절과 비교할만한 聖所가 없다. 내세의 관념, 초자연적인 존재, 초월적인 실재는 그의 궁극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사실, 그가 추구하는 인간적인 진실이 그의 사회참여와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참된 유가라면 결코 은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유가는 성인을 세상에서 가장 참되고 성실한 인간성의 구현으로 본다. 따라서, 유가에게 있어서 내적 자유와 사회적 참여의 二分은 의미있는 하나의 선택으로서 제시되지 않는다. 인간이 되는 길은 그 두 가지가 실제로 하나인 것처럼 추구되어야 한다. 허버트 휭가렛(Hebert Fingarette)의 말을 빌린다면, “聖으로서의 俗”이 유가 가르침의 결정적인 특징이다. 결과적으로, 성인에의 길은 성찰적인 존재양식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수행되는 자기변혁의 역동적 과정이다.
자기변혁의 역동적 과정으로서의 성인의 추구는 확실히 광범위한 심리학적 의미를 싣고 있다. 양명의 젊은 날의 모험을 우리가 심리역사적 틀에 의해 기술하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가 어떻게 자신의 심리적인 긴장을 창조적으로 대처해나갔는지의 문제는 여기에서 배경으로서만 제시된다. 이 연구는 양명이 自己定義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꺼내드는 일종의 상징적인 자료와, 이 자료들을 그가 지적으로 자기화함으로써 잘 확립된 사유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낸 방법과의 交互작용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이 연구의 특징은 성인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양명사상의 최초의 結晶을 분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독자가 이미 명나라의 지성사에 관한 상당한 양의 일반적 지식과, 양명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이 유교전통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이므로, 나는 이 작업이 아시아사상과 비교종교분야의 학자들에게 얼마간의 관심을 유발시키리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 1972년 3월, 뉴욕에서 있었던 아시아연구협회의 연례모임에서 왕양명 탄생 500주기를 기념하는 특별분과가 조직되었다. 같은 해 6월에 동서철학자회의 주최로 국제연구세미나가 그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하와이 대학에서 개최되었다. 그 이래로 왕양명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상당한 양의 새로운 해석이 영어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내 작업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지적 움직임에 적절한 기여를 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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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明根本義(金容沃)
(요약)
朱子의 爲聖작업에는 바로 佛敎의 초윤리적 패러다임을 윤리적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키고, 개인주의적 패러다임을 사회주의적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佛敎가 가지고 있었던 매우 긍정적인 보편성, 즉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휴매니즘을 상실. 양명의 가장 핵심적 문제의식은 바로 朱子의 사회주의나 윤리주의를 고수하면서 어떻게 인간평등의 보편주의를 확립하는가 하는 문제로 집중. 陽明에 있어서 사회주의(앞에서 규정한 관계주의의 맥락)와 평등주의의 결합은 결국 知行合一이라는 實踐主義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陽明을 朱子와 대립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陽明자신이 『朱子晩年定論』을 시도한 것만 보아도 이미 陽明當代에 양명자신이 朱子와의 대적적 관계에 대한 인위적 설정에 고민하고 그것을 풀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양명자신도 자신의 생각이 결코 주희의 근본이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양명을 朱子學계열에서 異端으로 규정하고 대적적 관계로 설정한 것은 양명의 배움과 주희의 배움의 이론적 구조 그 자체에서 기인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러한 학문적 論理外的 요소, 즉 종교적・사회적・역사적 이해관계의 제반측면에서 기인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墨翟(묵적)이 孔丘를 심하게 비난한다해서 墨家와 儒家를 대적적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墨家의 철학은 그 철학을 잉태시킨 사상집단의 특수한 성격으로 인해 매우 과격한 평등사상이나 儀禮에 대한 매우 反儒家的 생각을 품고 있지만 그 兼愛의 본질은 역시 孔丘의 仁에 대한 생각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며 그것이 비록 유가의 패밀리즘(familism)을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할지라도 그 궁극은 역시 유가사상의 보편화(普遍化)・대중화(大衆化)과정의 한 계기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孔丘의 적통임을 자임했던 孟軻가 그다지도 墨을 대적시했던 것은 當然之勢라 할 것이지만 문제는 軻가 墨을 이해하고 있었던 그 이해구조의 한계를 우리는 더 명확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朱子의 철학과 陽明의 철학을 대적적 관계로 파악하기 보다는 문명의 동일한 패러다임 축상의 전환의 계기로서 파악해야 마땅하다. 생각의 스케일이나 폭, 그리고 디테일의 知的 표현에 있어서 陽明은 朱子에 도저히 미칠 수도 없을 뿐아니라, 또 朱子만큼 오리지날하지도 않다. 文明의 패러다임의 변환은 이미 朱子에게서 이루어진 것이요 陽明은 朱子와 대등한 입장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축을 동아시아문명권에 도입한 그러한 인물로 간주될 수는 없다. 陽明은 어디까지나 朱子가 새롭게 이룩해놓은 新儒學의 패러다임 內에서의 어느 특정한 문제의식을 새롭게 인식하고 새롭게 형성해 나간 사상가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조선조에서는 朱子를 정통으로 삼았기 때문에 양명을 극히 이단시하고 양명철학사상의 流入을 극히 꺼렸다고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양명사상이 적극 수용되었다할지라도 그리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조선조의 유생들이 양명학의 유입을 그다지도 꺼려했는가(실제적으로는 널리 유포되었고 또 간접적으로 유포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는 것은 나의 논지의 전개에 따라 명료해질 것이다.
묵가를 유가의 대중화로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 역사적 패턴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이와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양명은 朱子의 대중화과정의 결정적 계기다.” 혹자는 이런 말을, 매우 粗野하지만 일리가 있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朱子가 隋唐佛學이라는 외래적 패러다임에 대한 반동의 계기로 성립했다고 한다면 陽明은 다시 朱子의 패러다임에서 佛學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잉태한 것이다.
이러한 도식은 皮相的으로 그리고 圖式的으로 사상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으로 정확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아마도 피상적 역사의 흐름에 따라 우리 조선조사상사를 이해한다면, 개국공신 정도전의 排佛로 시작된 朱子정통주의의 조류 속에서 조선조사상가들이 애써 양명을 이단시하고 공격하려고 했던 일차적 이유가 바로 이러한 도식에서 명료하게 드러날 수 있다.
陽明學은 朱子學이 주장하는 格物의 rigorism(엄격/엄숙주의)의 해체과정에서 잉태된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키로 陽明學과 朱子學이 分岐되는 그 분기의 기준을 反佛이냐? 歸佛이냐?로 설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陽明學의 근본이념이 朱子學보다는 분명 佛敎이념에 더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朱子는 佛學을 애써 의식하며 그것을 자신의 언설 속에서 배제시킬려고 노력하지만 陽明은 그런 문제의식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뚜 웨이밍교수가 그리고 있는 양명의 삶의 역정에서도 역력히 드러나듯이 양명은 자신의 문제의식 자체를 老(道)・佛에 함입하여 그 속에서 반사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자신은 구태여 道・佛의 bocabulary 렛델(용어?)을 자신이 언설에 붙일려고 노력하지 않지만 타인이 그런 렛델을 붙여놓는다고 해서 그리 신경쓸 건덕지가 없는 것이다. 그의 문제의식 자체가 그러한 학설의 족보규정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조선조사상사기술의 편협한 편견 때문에 너무도 학파나 종파의 根本義를 묻지 않은 채 그것의 계보적 규정이나 상호배타관계에 의하여 인간존재나 사상의 모습을 규정해버리는데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중국철학사상의 흐름도 그러한 사고패턴속에서만 바라보는 오류를 종종 범하고 있다. 宋・明사상사의 흐름에 있어서 과연 佛이라는게 무엇인가? 佛이란 무엇인가? 佛敎가 과연 무엇이라는 게냐?
이러한 문제에 답하는 것을 많은 蒙昧한 學人들이 佛敎學개론서를 들척거려 대답하거나 『반야심경』을 분석하거나하여 대답할려한다. 참으로 가소로운 짓이다. 지금 사상사에서 문제가 되는 佛이라는 것은 佛자체의 번쇄한 이론구조나 그 산스크릿트語 원의규명이 아니다. 當代의 인간들이 삶속에서 인식하고 기억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부여하고 있었던 어떤 실제적 의미구조(semantic relations)를 말하는 것이다.
佛이란 이미 중국인들에게서 일천여년의 경험을 통하여 친숙해진, 서양역사에 비교하여 말한다면 中世기독교문명에 비유될 수 있는 그러한 깊숙한 체험이다. 일・이년의 외래사상의 설법이 아닌 천년의 신존화과정에서 축적된 체험의 체계인 것이다. 朱子가 제아무리 反佛・排佛을 외쳤다고 하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논리구성에 의하여 불교의 논리가 비판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불교가 구체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실제적 삶의 의미가 朱子로 인하여 일시에 中國의 광대한 대륙에서 증발해버린 것인냥 사상사를 기술하고 있는 어리석은 역사적 오류야말로 증발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佛敎의 실제적 의미는 “修養”이며 “養心”이다. 수양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그것이 修身이든 修心이든지를 불문하고 개인적인 것이다. 개인의 수양에 관한한 나는 그 의미부여에 있어서나 구체적 방법론에 있어서 불교만큼 광대하고 섬세하며 완벽한 이론과 실천의 체계를 제공한 종교나 철학사상은 이 지구상에 있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 수양을 나 개인존재 내면의 고립된 방식을 취하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성취하는 개방된 방식을 취하든 그것은 사실 수양의 방법상의 문제일 뿐이며 궁극적인 문제의식은 現存在의 부정에서 現存在의 完成으로 나아가는 어떤 高揚이나 解脫의 충동일 뿐이다. 이러한 해탈의 충동을 불교처럼 전문적으로 의식화시키고 그 의식화된 의식의 상태를 단계적으로 이끌어가는 방법을 제공하는 그러한 수양의 철학은 지구상의 인류문명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미 이러한 불교의 수양론, 그리고 禪이나 요가 등의 도인호흡기술에 천년동안 익숙해왔다는 사실을 그들의 삶의 根底로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朱子는 이러한 수양의 문제를 신유학(새로운 유학의 패러다임이라는 뜻으로 쓰는 것으로 전통적 논의의 진부한 규정에 얽매여 “新儒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아니다)의 새로운 과제로 받아들였지만 朱子에게 있어서의 수양론은 理氣論的 世界觀의 틀속에서 주어지는 格物致知論으로 요약되었기 때문에 다분히 主知主義的 성향을 띠고 있었다. 허나 陽明은 朱子의 이런 주지주의적 측면을 철저히 실존적 체험의 결단으로 순화시킬려고 노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확실히 양명은 주자보다 더 불교적이라면 불교적일 수 있다. 양명이 物이라는 外面보다 心이라는 內面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그러한 추론의 정당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헤겔이 이성주의적 어휘의 질곡 속에서 絶對精神의 正反合이라고 하는 自己顯現의 논리 속에서 모든 인간과 세계의 문제를 형식화해나간데 反해, 그러한 주지주의적 극단에 대한 反動으로서 生哲學이나 實存哲學이 인간의 논리화될 수 없는 非合理的 삶의 현실을 철학의 일차적 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면, 정확하게 朱子와 陽明의 관계는 그러한 패턴 속에서 了解될 수 있다. 그 類比의 정확성을 문제삼는다 하더래도, 누구든지 朱子의 格物論이 헤겔의 주지주의적 성향의 가능성을 內包하고 또 理・氣라는 糾合개념이 신유학의 모든 문제를 틀지우는 만능적 형식으로 형식화해간데 반한다면 知行合一을 지향하는 양명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모종의 실존적 轉向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陽明을 佛의 전통과 관련지어 朱子의 反動으로서 다 만족될 수 없었던 당시 지적 에너지에 대한 새로운 충족으로서 이해한다면 그 실제적 의미, 즉 佛이라는 의미체에서 양명이 살리고자한 것은 앞서 말한 수양론 이외로 인간평등에 대한 심각한 반성 내지 통찰을 들 수 있다. 양명이 龍場에서 원주민인 야만족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확립한 이야기는 단지 관리로서의 정책적 배려에서 나온 인도주의적 제스츄어로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格物의 의미와 聖人의 가능성에 대한 근원적인 깨달음, 어떤 극적인 解悟의 체험 이후의 사건이라는 사실, 즉 그러한 해오의 실현으로서의 그의 실천의지, 그리고 知行合一의 현실구현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만 할 성질의 것이라는 것이 명확히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成佛”과 “爲聖”의 가장 큰 차이는 成佛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일 수 있는데 反해 爲聖은 철저히 사회주의적일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란 칼 맑스류의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도덕적 실현이 인간관계를 통하여(더불어)만 구현된다고 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成佛은 초윤리적일 수 있는데 反해 爲聖은 철저히 윤리적이라는데 그 특성이 엇갈린다. 따라서 爲聖의 작업은 인간관계속에서 구현되어가는 사회의 완성과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데 반해 成佛은 사회적 제관계가 절단된 상황에서도 어떤 신비적 체험을 통한 내 몸의 合一상황으로서 認可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爲聖으로서 자신의 깨달음을 규정할 때 부닥치는 난제는 爲聖의 과정은 반드시 사회적 제관계를 포섭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은 일시적일 수 없고 과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절대적일 수 없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제현실로부터 단절적일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현실을 현존재 내에 포섭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실존에 다가오는 사회적 현실은 항상 불안하고 불만스러우며 불완전한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현실은 인간의 제관계로 얽혀있는 것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조직과 그 조직을 구성하는 하이어라키(계층/계급)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하이어라키는 도덕의 구현에 있어서 조차도 “삼강오륜”과 같은 도덕적 하이어라키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朱子는 그 철학적 結構의 대상을 주로 士大夫로 삼았기 때문에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사대부의 지도이념으로서의 도덕성을 원초적인 인간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그의 仁義禮智적 보편주의는 사회계층적 전제가 없는 개개 인간의 적나라한 보편주의에 도달하고 있질 않다. 따라서 朱子의 爲聖작업에는 바로 佛敎의 초윤리적 패러다임을 윤리적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키고, 개인주의적 패러다임을 사회주의적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佛敎가 가지고 있었던 매우 긍정적인 보편성, 즉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휴매니즘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朱子學의 전반적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실제적 의미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양명의 가장 핵심적 문제의식은 바로 朱子의 사회주의나 윤리주의를 고수하면서 어떻게 인간평등의 보편주의를 확립하는가 하는 문제로 집중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적 전개라기보다는 宋사회에서 明사회로의 사회변환, 즉 宋의 사회계층과 明의 사회계층의 어떤 본질적 변화를 전제로 해서 생각되어야 할 문제며, 양명이 대상으로 한 사회계층이 요구한 이데올로기적 경향성이 근원적으로 朱子가 대상으로 한 사회계층의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것이었다는 것을 전제로해서 생각해야할 문제라는 것이다. 아마도 조선조의 유자들이 주자학을 신봉하면서 양명을 이단으로 배척하려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계층적(나는 맑스의 특수한 개념인 “계급”이라는 용어를 함부로 쓰지 않는다) 이해관계와 얽혀있었을 것이다. 즉 주자학을 신봉한 계층의 이해관계에서 본다면 양명학의 경향성은 그들의 존재기반을 허무는 어떤 인간평등론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다 극단적으로 해석해 들어간다면 길거리에 가득찬 것이 모두 聖人이라고 외치는 양명의 街頭哲學적 보편주의는 사대부의 도덕적 위계질서를 무시하는 아나키즘의 전형으로 이해되기에 충분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명의 아나키즘적 국면이 바로 二王으로부터 李卓吾에 이르는 明代思想史의 洪流를 형성한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 도올은 개인적으로 삶의 목표를 爲聖으로 생각할지언정 成佛을 希求하지는 않는다. 좀 쉽게 비근한 예를 들어 얘기해보자. 가야산에 어느 고승이 있어 成佛을 이룩하고 거창하고 화려한 다비식의 화염에 휩싸여 모든 사람의 존경과 懇望 속에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如如의 세계로 化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고승이 남긴 成佛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그 고승의 삶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피눈물나는 苦行의 삶이며 성불의 수행이다. 십년이 넘도록 등을 바닥에 대지 않고 앉은 채로 수면을 취해 살았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動物의 生理의 최대욕구를 거부한 치열한 정진이었음에 異見이 있을 리 없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고행의 의미가 무엇일까? 많은 수행자들에게 본을 보이고 자긍심을 주며 극한상황에서 生存하는 인간의 영력을 과시하는 것일까?
그러한 成佛이 되기 위한 苦行의 구극적 의미가 인간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의 나의 몸의 욕구와의 克己의 투쟁이라면 그것은 결국 남이 못하는 짓을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과시와 그 과시를 통해 너도 할 수 있다는 희망내지 격려, 그 이상의 의미를 나는 발견할 수가 없다. 양명의 陽明洞에서의 자각의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이러한 成佛의 自己欺瞞的 측면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아무리 가야산고승이 화려하고 장대한 다비속에서 成佛의 위대성을 과시했다하더라도 그의 成佛이 남기는 사회적(대승적) 의미는 실상 그를 추모하는 몇몇 제자들의 추억속에나 가물가물 남아있을까, 조계종의 분규나 사회정화에 아무런 영향(impact)이 없다. 그의 화려한 삶의 고행은 가야산이라는 엄연한 세속적 집단의 조직 속에 고립되어 이루어진 특수한 행위일 뿐, 그 행위가 그가 살고있던 당대의 사회와 교섭하면서 같이 이루어진 고행이 아니라는데 그의 爲佛(부처님됨)의 기만성이 내재한다. 만약 그가 등을 한 번 방바닥에 안대고 잘 수 있었던 그러한 엄청난 수행의 狂的 熱情을 그가 살고 있었던 인간과 사회와 역사와 우주에 대한 명확한 통찰로 轉化시키고 그러한 轉化된 교섭속에서 그가 살고 있었던 세계와 투쟁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사리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 보다 평범한 “사람”으로(산이 산이고 물이 물인 것처럼 사람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 喜怒哀樂의 굴레를 굴렀다면, 아마 그의 成佛의 의미는 “화려한 초개죽음”이상의 심오한 영향이나 진실한 모범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을 것이다. 成佛의 欺瞞性을 극복하고자 하는 爲聖의 유가적 노력은 바로 이러한 反省, 즉 가장 비근한 人間(문자 그대로 “사람사이”)의 感情의 자연스러운 발로를 거부할 수 없다는 反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발로의 가장 원초적 마당은 유가에게 있어서는 “家”(Family)라는 것이며, 이 家의 도덕이 인간의 도덕적 완성의 기초라고 보는 것이다. 허나 인간의 도덕적 완성이 이 家라는 테두리와 위계에 갇혀질 때 또다시 그것은 爲聖이 노리고자했던 어떤 보편주의를 상실한다는데 유가철학의 아이러니가 내재하는 것이다. 양명은 바로 이러한 유가철학의 인간관계론을 보존하면서 그 관계를 패밀리즘의 국한성에서 탈출시켜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가능성으로 확충시키려는 것을 바로 그의 實踐主義의 진수로 삼는 것이다.
조선사상사의 종착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 東武 이제마(李濟馬, 1838~1900)는 이러한 논의의 핵심을 그의 『東醫壽世保元』에서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기술하고 있다.
聖人之無慾云者, 非淸淨寂滅如老佛之無慾也. 聖人之心, 深憂天下之不治, 故非但無慾也, 亦未暇及於一己之慾也. 深憂天下之不治而未暇及於一己之慾者, 必學不厭而敎不倦也. 學不厭而敎不倦者, 卽聖人之無慾也. 毫有一己之慾, 則非堯舜之心也 ; 暫無天下之憂, 則非孔孟之心也.
성인의 마음에 욕심이 없다고 내가 앞서 말한 것은 그 마음이 청정하고 적멸하여 老佛에서 말하는 바 마음이 비워지는 무욕과 같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성인의 마음이란 그러한 도가나 불가의 해탈과는 달라, 일차적으로 자기가 살고있는 세계가 질서있게 되지 않는 것을 깊게 우려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단지 욕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 일개인의 욕심에 미칠 수 있는 단 일순간의 여가도 없다. 자기가 살고있는 세계가 어지러운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자기 일신의 욕심에 미칠 수 있는 틈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끊임없이 배우게 되고 끊임없이 가르치게 된다. 끊임없이 배우고 끊임없이 가르치는 자야말로 곧 성인이며 욕심없는 마음을 가진 자다. 터럭만큼이라도 일개인의 욕심에 사로잡혀있으면 요・순의 마음이 아니다. 잠시라도 세계에 대한 근심이 없으면 그것은 공자・맹자의 마음이 아니다.
내가 어느날 시험을 보느라고 원광대학교 총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하도 갑갑하길래 대운동장을 몇바퀴 죠깅을 할려고 캠퍼스를 걸어가던 참이었다. 매우 총기있게 보이는 한 학생이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선생님, 저는 동종과(교학대학 동양종교학과)학생입니다. 평소 선생님의 책을 열심히 읽는데 거니는 모습을 뵈옵고 몇말씀 여쭤보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
“저는 한때 라즈니쇠의 책을 탐독했고 또 심취했습니다. 그러던중 우연히 선생님을 해우하게되면서 라즈니쉬를 버렸습니다. 선생님 속에 더 크고 진실한 무엇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은 혹시 라즈니쉬를 읽으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당신 자신의 세계와 라즈니쉬와의 차이에 대해서 느끼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라즈니쉬와 나를 비교해서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것은 잘못된 비교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라즈니쉬의 전모를 파악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나의 그에 대한 생각이 그의 정확한 평가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그와 나의 가장 큰 차이는 그는 그가 깨달은 궁극적 진리를 너무 쉽게 그러니까 너무 값싸게 세인에게 내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깨달은 진리를 끝까지 부정하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깨달은 진리가 아무리 구극적인 것일지라도 끝까지 다시 부정하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 그만큼 나는 불완전한 나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 그결과 그는 覺者처럼 보이고 나는 아주 보통사람처럼 보일뿐아니라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저는 샌스크릿트어와 희랍어를 열심히 공부해 불교와 기독교를 회통시킬 수 있는 어떤 이론을 완성해 보고자 하는 것이 저의 삶의 꿈입니다. 이것은 가능한 것이며 또 가치있는 것입니까?”
“물론 가능하며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네가 왜 그것을 묻는지 모르겠다.”
“그런 이론이 완성되면 기독교와 불교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네가 학인으로서 그러한 회통이론을 만든다고 해서 기독교광신자와 불교광신자가 화해하고 회통되리라는 기대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제네의 노고는 망망한 대해에 모래 한 알 던지는 파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자네와 같은 사상가가 수만명이 똑같은 방향으로 노력하면 천 년 지나 그런 노력이 혹 결실을 맺게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정도 이상의 기대는 가지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럼 선생님은 선생님이 하시는 작업이 망망한 대해에 모래알 하나의 파문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위선자이십니다. 선생님은 인간세에 어떤 희망과 용기를 주고 계신 분입니다. 그렇게도 치열하게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무엇인가 구체적인 목적을 향해 정진하고 있는 모습으로 항상 비쳐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같은 후학에게는 살아가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의 결실이 고작 모래알 하나의 파문의 수준이라면 그것은 너무 우리 후학에게 절망감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네같은 젊은이들과 대화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의 고민은 젊은이들끼리 같이 부댓끼며 풀어가는 것이 좋다. 나같은 늙은이의 결론을 먼저 물어 들어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방법상의 하자가 있다. 나는 자네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그 이상의 어떤 진리도 내 인생에서 발견치 못했다. 나는 정직하게 말했을 뿐이다.”
“선생님은 무엇인가 삶에서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비젼이나 경지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없다.”
“참으로 없습니까?”
“없다.”
그 학생은 너무도 너무도 실망한 모습으로 눈물까지 흘리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너무도 깊은 절망감을 안겨주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한마디를 첨가했다.
“왜 그대는 그대의 삶이 절대적이어야 한다고만 생각하는가? 인생에 절대적 목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네를 지배해 온 언어가 자네를 속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그대는 실망할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말고 빨리 나에게서 떠나가는 것이 좋다.”
그랬더니 그 학생은 머뭇거리며 한마디를 어렵게 추가했다.
“더 고민스러운 문제가 생기면 편지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편지라도 해야되겠다는 그 마음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그것은 자네의 존재에 하등의 위로도 되지 않는다. 나에게 편지하는 마음조차 갖지 말고 자네의 문제를 끝까지 자네가 해결해보아라.”
최근 나는 너무도 피곤하게 살았다. 나의 소원은 爲聖이나 成佛이 아니요 단지 몇일간만 아무 생각없이 편하게 잠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本3동학들이 홍도로 졸업여행을 떠났다. 나는 이 여가를 이용해서 솜니에서 멀지 않은 邊山 月明庵 밑에 있는 圓光禪院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런 곳에 왔으면 天地와 더불어 人世의 煩事를 다 떨쳐버려야하는 것이언만 워낙 爲人이 못나 또다시 이 여가를 이용해 붓을 듣고 있는 것이다. 엊그제였다. 전주에서 온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비를 피해 선원 午飯을 들었다. 그 중 한 청년이 때아닌 나의 모습을 보고 마당을 건너와 경의를 표했다.
“저는 수년전에 원광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87년에 선생님께서 원광대학교 강당에 오셔서 대강연을 하셨을 때 그 수많은 군중의 한사람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지금 구체적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 거대한 그 무엇에 충격을 받은 듯 했습니다.”
“그래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공부를 하고 있나?”
“...........”
“어느 대학원이라도 다니고 있나?”
“왜 선생님같으신 분이 그런 체제 속에서의 공부만 공부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도닦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도닦는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우선 생활이나 충실하게 하게, 우선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먹고는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어찌하든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습니다. 허나 체제와 타협해 버리면 끝없는 반복이 있을 뿐입니다. 선생님이야말로 상궤를 벗어난 것으로 이름난 분입니다. 어찌 선생님께서 평범한 말씀만 하십니까?”
“내 궤도를 다 추적해보게. 나는 궤도를 벗어난 적이 없네.”
“선생님이나 저나 압중한 콘크리트벽에 도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도 벽이 두껍습니다. 궤도에 올라타면 그 벽밑에 깔려죽을 뿐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없습니다.”
“함부로 비유를 하지말게, 눈에 보이는 두터운 콘크리트벽과 역사의 콘크리트벽은 너무도 달라. 보이는 작은 지혜로써 보이지 않는 복잡하고 거대한 세계를 속단하지 말게. 우선 자네가 도전한다고 하는 역사의 콘크리트벽이 과연 무엇인지, 과연 그런게 있는 것인지를 검토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궤변은 또 하나의 타협을 낳을 뿐입니다.”
“허나 자신의 문제의식 자체를 끊임없이 검토해보는 것은 필요해.”
“그럼 수도생활을 하지 말라는 겁니까?”
“자네가 생각하는 修道는 또 하나의 욕심일세. 평범하게 생활하면서 수도하는 것이 좋아. 자네같이 수도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결실이라곤 종교를 하나 개창하는 것밖에는 없네.”
“종교를 하나 개창하는 것도 꼭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아야만 할까요? 신흥종교라도 민중의 새로운 열망을 담을 수 있다면 가치있는 사회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중은 그런 식으로 역사를 개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운동은 사회운동으로 족해. 왜 종교를 만드나? 종교란 지가 터득한 진리에 모든 사람한테 복속하라는 대자대비를 위장한 자기욕심에 불과해. 나는 어떤 종교의 개창자도 존경하지 않아. 왜 그런 업을 지을 생각을 하나? 어떻게 감당할려구. 종교는 이미 있는 것으로 족하고도 남아.”
“저의 문제의식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기존의 방법과 타협하면 도저히 그 방법을 독점하고 있는 기존의 대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길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우리 동네에 아주 흉악한 놈이 있었는데 태권도 4단짜리였습니다. 그 놈은 막강했고 우리 동네에서 아무도 감히 그에게 덤빌 자가 없었습니다. 그놈은 폭군이었죠. 그놈은 절대적 아성이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한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낫을 들고 휘둘렀죠. 그놈은 형편없이 무너졌습니다. 논두렁으로 머리를 박고 꼬꾸라졌고 그놈은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그뒤로 그놈은 영원히 이전의 권위를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만약 대항자가 태권도 도복을 입고 그와 용감하게 게임을 벌렸더라면 무참히 당했을 뿐일 것입니다. 기존의 방법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친들 기득세력을 이길 방도가 없습니다. 이 체험은 지금까지도 저를 깊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네의 사고는 바로 화이트헤드가 지적한 대로 誤置(오치)의 誤謬(오류)를 범하고 있어. 어찌 자네 동네의 사건과 인류의 역사적 사건을 동일한 평면에서 같은 논리로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네의 논리와 가치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래도 문제는 그 ‘낫’이야. 태권도 4단은 헛간의 낫을 드는 용기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지만, 역사의 ‘낫’이란 결코 그렇게 간단하게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닐세. 좋아, 자네의 논리를 수긍하지. 허나 자네는 역사의 대세를 뒤바꿀 수 있는 낫을 어디서 구하며 어떻게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사람이 그 낫을 준비하기 위하여 이렇게 나처럼 처절하게 고생하며 사는 것일세. 내가 말은 안하지만 자네와 같이 그 낫이 도닦는 것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그런 황당한 인간들 때문에 역사의 진실은 항상 은폐되었고 개벽될 수 있는 기회를 유실해 온 것이야. 거대한 세력과 싸울려면 참으로 거대한 실력이 있어야되. 기존의 방법이 아닌, 기존의 방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새로운 ‘낫’을 손에 쥔다는 것이 참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것도 모르고 철부지처럼 날뛰며 역사에 업만 짓고 사라진 무책임한 도사들을 나는 존경할 수 없네. 역사를 대적적으로만 파악하지 말고 내 품 속에 그것을 안고 보다 깊은 고민을 해보게. 역사에 대해 너무 황당한 욕심을 가지지 말고 참으로 그 낫이 주어질 때까지 자기 가치관을 흐트리지 않고 지조를 지킨다는 것처럼 어려운 修道가 없다는 것을 좀 깨달아주게.”
그 청년은 내말을 듣고 大悟하는 듯했다. 자기의 좁은 소견이 부끄럽게 생각된다고 고백했다. 오늘 큰선생님을 만나 큰가르침을 얻었다고 했다. 너무도 확신을 가지고 믿어온 자신의 논리에 분명한 허점이 보인다고 독백했다.
이러한 대화는 참으로 내가 일상적으로 뇌까리는 贅言(췌언)에 불과하다. 허나 내가 이런 잡담을 여기 나열하는 이유는 실제적으로 이런 평범한 대화 속에서야말로 陽明이나 朱子의 문제의식의 원형이 보다 정확하게 파악되기 때문이다.
陽明에 있어서 사회주의(앞에서 규정한 관계주의의 맥락)와 평등주의의 결합은 결국 知行合一이라는 實踐主義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 知行合一의 궁극적 논리구조는 合一에 있다할지라도 이 발설의 근본의도는 知보다는 역시 行에 있다. 知行合一의 근본의도는 行을 거치지 않은 知, 혹은 行을 수반하지 않는 知는 知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물론 朱子의 格致(=格物致知)가 협애한 독서주의의 스콜라티시즘(학문)의 질곡에 윤락하게 된 현실, 과거시험의 기준이 되는 官學으로서의 권위를 획득함과 동시에 그 哲學의 원래적 삶의 의미와 무관하게 死板化되어가는 主知主義 경향으로부터 主行主義로 이행시킴으로써 세속화된 朱子철학의 병폐를 匡正하자는 데 그 근본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唯識論의 번쇄한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禪宗이 외치고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理氣論의 번쇄한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陽明心學의 계기로 꾀하고자 했던 것은 어찌보면 中國思想史에 내재하는 욕구의 분출이었다.
본서의 246 페이지에 보면 앎(知)과 함(行)의 통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陽明의 언급이 실려있다 : “아름다운 색을 보는 것은 앎과 관련이 있다. 반면에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는 것은 함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색을 보았을 때 곧 그는 이미 그 색을 사랑한다. 먼저 그것을 보고 그 다음에 좋아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하여 明末淸初의 巨儒 王夫之는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好好色”이 물론 好色을 知하고 나서 그 知를 분석한 결과로서 好(좋아한다)하는 行위를 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陽明이 생각하는 知行合一의 수준이 고작해야 好好色의 수준의 合一을 말한다면 그따위 合一은 본능인데 누군들 못하겠느냐고 코웃음친다. 양명철학의 최대표어인 知行合一이 저 화단의 아름다운 꽃을 보는 동시에 좋아하는 수준의 合一이라고 한다면 그따위 合一이 도대체 어떻게 도덕적 리고리즘(엄격/엄숙)의 명제들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양명의 知行合一論은 본능적 관념론의 수준에 머무르고 하는 것이며 그따위 合一로는 관념으로 해결될 수 없는 복잡한 社會의 객관적 제문제가 인간의 실존 앞에 山積해 있다는 것이다. 王夫之의 이러한 지적은 양명학에 내재하는 취약점을 매우 날카롭게 지적한 명언이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조선의 마지막 巨儒 이제마(李濟馬, 1838~1900)는 매우 명료하게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혼동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단안을 내린다.
東武는 陽明이 말하는 好好와 惡惡의 문제는 王夫之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본능적 필연에 속하는 문제로서 근본적으로 心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好好(善)와 惡惡는 도덕적 善・惡이 개재될 수 없는 필연적 세계며 그것은 도덕이 아닌 生理의 문제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好好와 惡惡는 耳・目・口・鼻와・肺・脾・肝・腎이라는 四端의 레벨에서 결정되는 몸의 필연이다. 도덕에는 반드시 자유의지가 전제됨으로서만 결단이 가능케되며, 이 결단이 가능함으로서만 선・악이 도덕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好好・惡惡의 레벨에서는 知와 行을 논할 수 없다. 그것은 매우 기초적 메타볼리즘(新陳代謝)과 관련되는 몸의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知・行의 필연의 세계 아닌 자유의 세계에서 논구되어야 하는데 그 자유의 세계란 東武에게 있어선 頷・臆・臍・服과 頭・肩・腰・臀이라는 몸의 사회(Societies of Mom)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東武의 논리는 『東醫壽世保元』을 통달한 자가 아니면 깨달을 수가 없다. 東武에게 있어서 知란 天機요 行이란 人事다. 천기와 인사는 人體에서 통일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知는 性에 관련되는 것이며 行은 命에 관련되는 것이다. 性이란 과거 유자들이 말하는 도덕의 선천적 근거로서의 本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경향성 내지는 능력을 말한다. 命이란 존재의 존엄한 근거로서의 天命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삶의 모습을 결정해가는 후천적 운명을 뜻한다. 이 知와 行을 통합하는 것이 바로 心이며 이 心은 五臟 중에서 肺・脾・肝・腎에 高出하는 것으로 그것은 存在의 太極이며 自由의 세계에 속한다. 聖人과 衆人이 나뉘는 것은 好善・惡惡하는 四端의 레벨에서 나뉘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旁通의 관계다) 바로 知와 行을 통합하는 心의 레벨에서 차별지어지게 되는 것이다.
본서의 237 페이지에 보면 「傳習錄」 3:23에 실려 있는 그 유명한 “대나무격물”(窮格竹子的道理)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朱子가 말하는 格物窮理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대나무 앞에 靜坐하고 대나무(物)의 원리를 궁구(格)하려고 노력하다가 7일째 되는 날 너무도 열심히 생각한 덕분에 그만 병이 나고 말았다는 유명한 얘기가 있다. 그 체험의 결과로 본래 세상의 사물은 궁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格物之功은 단지 心身上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선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本書의 格物에 功이 없다할지라도 나의 몸의 工夫만 이룩하면 곧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陽明은 聖人의 보편가능성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된 것이다.
朱熹를 원천적으로 漸의 세계에 비유한다면 陽明이라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頓의 세계에 비유될 수가 있다. 漸은 難하고 頓은 易하다. 그런데 이 漸頓難易(점돈난이)는 통합되고 회통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대나무 앞에 정좌하고 앉아 대나무를 꿰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몸에 병이 나도록 그 이치를 궁구하고 있는 청년 왕양명의 狂的 정열을 매우 존경스럽게 관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 그는 우매하다. 그가 도달한 결론도 우매하고 물론 그 우매한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었던 방법도 우매하다.
한마디로 양명이 이해한 “格物”의 실제적 의미의 몽매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당대의 보편적 인식구조를 반영한다는 것을 더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格物의 대상으로서 대나무의 道理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바이올로지(生物學)의 두툼한 텍스트나 세포학의 복잡다단한 同化・異化작용에 관한 순환법칙을 궁구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나의 언급은 시대적 상황의 상대성을 무시한 매우 몽매한 언급으로 들릴 수 있다. 하나 나의 이러한 지적은 결코 沒時間的 이해방식에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양명에 대한 매우 정확하고도 건강한 비판의 언급인 것이다.
朱子學이 동아시아문명에 새로운 에포크(時代)를 달성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理와 氣라는 言說의 도입으로 가능케 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理와 氣는 超越과 內在의 문제다. 허나 문제는 理의 초월성에 있다. 朱子가 되었든 양명이 되었든 이 세계가 氣로써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氣一元論的 세계관에는 異論의 여지가 없다. 이 세계, 끊임없이 변하는 음・양의 이 우주는 모두 이 氣 하나로 설명되는 것이며, 理와 氣가 데카르트에게 있어서처럼 이 세계를 구성하는 두 실체로서의 정신(Mind)과 물체(Matter)와 같이 兩分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陰陽是氣. 纔有此理, 便有此氣. 纔有此氣, 便有此理.) 理는 氣가 없이는 掛搭處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理는 氣에서 독립된 一物로 간주될 수가 없다. (理又非別爲一物, 卽存乎是氣之中. 無是氣, 則是理亦無掛搭處.) 그렇다면 理는 氣라는 공간과 시간의 현상 속에 內在하는 法則的 세계며 그 法則的 세계는 情意도 없고 計度(계탁)도 없으며 造作도 없는 無形迹의 세계다. (理却無情意, 無計度, 無造作.) (若理則只是箇淨潔空闊底世界, 無形迹.) (太極無方所, 無形體, 無地位可頓放.)
『朱子語類』를 읽는 자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호상 상충되는 언급들이다. 논리적으로 명백하게 위배되는 명제들이, 오늘날의 서양 분석철학의 형식논리의 공식에 따라 분석한다면 모두 F로 계산되고 말 명백한 모순명제들이 버젓하게 竝列되어 있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은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朱子는 理의 內在性과 超越性을 동시에 확보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理의 氣內在性만 강조한다면 理는 氣의 현상질서에 완벽히 종속되고 말것이며 그 현상질서를 뛰어넘는 어떤 독자성을 확보할 수가 없다. 朱子에게 있어서 自然현상과 인간의 도덕세계는 엄밀하게 二元化되어 있질 않다. 그것을 二元化시켜버리고 만다면 이 우주는 비도덕적 세계가 되어버릴 것이며 그러한 우주에는 인간이 介在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천지자연의 경영자로서 존귀한 위치를 확보한 유가적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과 도덕을 하나의 一元的 유기적 세계로 보는 세계관 속에서의 理는 物理的 法則만을 의미할 수가 없다. 理 속에는 물리적 법칙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세의 법칙이 포괄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또 이러한 모든 법칙이 나 存在의 몸속에서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氣 에 종속되는 비천한 지위로 전락할 수가 없는 것이다. 理에 독자성이나 초월성이나 절대성이 없이 氣의 현상에만 끌리어 다니는 수동적 무작위성만 인정되고 말 때에는 적극적 도덕성을 인간이나 우주에 대해 주장할 근거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朱熹에게 있어서, 理는 氣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든가, 理는 氣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天地가 生하기도 전부터 있었고 天地가 滅한 후에도 있다든가 하는 상호 모순되는 발언이 공존하게 되는 것이다. 理와 氣를 合해서 말할 때는 理는 氣內在的이 되지만 理와 氣를 離해서 말할 때는 理는 超越的 絶對性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氣는 理가 없이는 그 능동적・법칙적 근거를 마련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朱子哲學에 있어서의 진정한 과제는 무엇인가? 무엇이 참으로 문제인가?
나는 朱子의 理가 초월적이어도 氣內在的이라도 다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다 의미를 가지는 대사상가로서의 주도면밀한 그의 설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朱子의 理가 氣內在的인 一面만을 강조해 들어갔다고 한다면 아마도 중국철학은 그 나름대로의 어떠한 새로운 경험과학의 체계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理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物理的・科學的 법칙의 능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서가 아니라 너무도 인간적인, 너무도 도덕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理의 절대성이나 독자성이 지향하는 최종의 목표는 “存天理去人欲”이라고 하는 도덕적 명제의 정당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格物致知의 窮理(理를 탐구함)가 결국 인간적인 도덕적 理의 발견에 국한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格物의 실제내용이 객관적 物事에 대한 窮格이 아니라 讀書를 통한 修養의 理致의 터득에 불과한 書生主知主義의 협애한 窮格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양명이 대나무 앞에 7일 동안 앉아서 窮格을 시도했다는 것은 朱子의 格物이 書面上의 궁격에 불과한 현실을 초극하여 실제로 客觀的 物事에 접근해 보려는 매우 창조적인 노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그가 「傳習錄」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晦翁(朱子)의 원의에 접근하려는 창조적인 시도였던 것이다. (Return to Chu Hsi!)
허나 우리가 참으로 양명에게서 우매하다고 여기고 또 안타깝다고 느끼는 것은, 도대체 대나무 앞에 정좌하고 앉아 대나무를 꿰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대나무의 道理를 窮格한다(to investigate the laws of the bamboo)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미친 짓인가 하는 것이다. 7일만에 병이나서 보따리싸들고 철수했기에망정이지 그러한 식으로 궁격을 해보았자 결과되는 것은 고귀한 신체의 파멸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우매한 방법으로 깨달은 爲聖之道라는 것의 한계 또한 너무도 명확한 것이다.
그가 참으로 대나무를 궁격하고자 했다면, 하다못해 멘델이 수도원의 뜰에 콩을 색색으로 뿌려 그 결실맺는 것을 보아 “유전의 법칙”(이것은 분명 氣에 대한 理=법칙을 말하는 것이다)을 발견했듯이, 최소한 대나무라는 物(존재)의 생존원리 즉 그 순환이치를 캐물을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방법들을 선행시켰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한 방법론이 없이, 대나무를 들여다볼 렌즈와 같은 도구도 없이, 그냥 앉아서 대나무의 도리를 궁격한다함이 도대체 무슨 무지한 짓인가? 여기서 우리는 명백한 朱子學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門生 김석근박사가 번역한 야마다 케이지의 『朱子의 自然學』 一書가 과시하고 있듯이, 朱子는 역시 대사상가였으며 天文學的 지식이라든가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도 범인의 상식을 능가하는 깊은 그리고 전문적인 통찰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허나 朱子이후의 사상가들에게 전달된 朱子의 실제의미는 그러한 측면은 증발되고 오직 선험적 도덕적 일면만이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양명이 대나무 앞에서 대나무의 도리를 궁격한다했을 때 과연 그 도리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애초로부터 대나무 자체의 理法이 아니라 대나무로부터 인간적인 도덕성의 원리를 탐구하고자했던 것이다. 즉 대나무를 쳐다보면서 爲聖의 길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말한다. 만약 양명이 대나무를 쳐다보면서 대나무가 나의 몸을 구성하는 것과 동일한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세포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동일한 법칙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대나무의 세포의 핵으로부터 DNA와 같은 핵산의 원리를 추출해내는데 성공했더라면, 그리고 대나무로부터 인간까지의 기나긴 진화의 과정을 유추해내는 우주론적 사고를 진행시킬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대나무의 생명의 원리와 내 몸의 생명의 원리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줄 알았더라면, 양명은 분명 7일만에 병이 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의 爲聖之道에 대한 생각도 근원적인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陽明이 格物에 있어서 內・外를 가른 것은 양명의 무지요, 朱子의 한계요, 동아시아문명의 불행이다. 聖人은 物이라는 外를 무시하고 나의 心이라는 內를 통하여 달성되는 그런 시시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수준의 성인은 길거리에 가득찬게 성인이라 한 말 그대로 길거리에 가득차 있는 것이다. 聖人은 반드시 內・外를 통합하여 內・外의 理致를 통달함으로서만 달성되는 全人的 太極이다. 太極은 본래 理・氣를 가리지 않는 渾然之一體인 것이다. 바로 양명의 대나무궁격에서 우리가 목격한 우매성이 동양문명이 서구문명에 두손들고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최대 이유다. 오늘날까지도 저 거대한 중국대륙이 서양 앞에 文物을 구걸하고 개발을 의존하는 비굴한 자태를 보이고 있는 바로 그 이유다.
古典은 고전이 아니다. 고전은 바로 우리 삶의 모습의 현존태이다. 고전을 읽을 때, 우리는 바로 우리의 모습의 결함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가야산의 고승이 화려한 다비식 속에서 공허하게 열반했어야만 했던 이유도 양명의 대나무격물의 몽매성과 과히 거리가 멀지 않는 것이다.
本書의 235 페이지에 보면 格物의 格자에 대해 3가지 주된 해석이 있다하고 捍, 至, 正을 들고 있으나 이는 모두가 틀린 해석이며, 매우 국부적 발상에서 기인한 오류에 불과한 것이다. 『禮記』전체를 전관할 능력이 부족한 인간들의 부족한 소견에 불과한 것이다. 格致에 관한한 朱子의 해석도 二程의 해석도 陽明의 해석도 司馬光의 해석도 모두 정곡을 얻지 못한 것이다. 너무도 명백한 문자의 의미를 애써 난해하게 만들려는 좁은 소견에서 비롯된 학인들의 玩弄에 불과하다.
格物의 格은 물론 동사며 物은 格이라는 동사의 목적이 되는 대상이다. 동양적 세계관에 있어서는 물론 物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인문과학이 대상으로 하는 모든 物로서 天・人을 모두 망라한다. 格은 가장 흔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나라 전통문짝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는 “格子”다. 즉 문짝을 구성하는 그 네모진 틀을 말하는 것이다. 格이란 쉽게 말해서 “틀”이다. 格物이란 혼돈의 氣의 구성체에 대하여 格子를 부여하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언어를 빌리면 감각소여(내용)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혼돈의 氣에 格子라는 형식을 찍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格物의 格은 物에 理(=格子)를 부여하는 인간의 행위다. 따라서 格物의 결과 우리는 지식(=知)에 도달(=致)하게 되는 것이다. “格物致知”라는 『大學』의 名句에는 이미 실천이성과 순수이성의 대상을 포괄하는 바의 知識의 성립과정을 명료하게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朱子가 格物致知를 새로운 학문의 주제로 아필시키고 새로운 학풍(신유학)을 개척해간 것은 바로 이러한 『大學』의 새로운 해석으로 가능케 된 것이었고 따라서 朱子學에서는 四書 중에서도 항상 『大學』第一主義가 전제되어 있다. 허나 朱子學의 명백한 한계는 格致의 格의 구체성과 포괄성을 확정하지 못한 채 결국 금욕주의적 형이상학으로 꼴인한데 있다. 중국의 지성인들이 개화기에 이르러 뒤늦게 朱子의 格致를 서양의 싸이언스(Science)의 번역으로 대응시켜 그 兩者를 결합시킬려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分道揚鑣(분도양표-제각기 제 갈길을 감)한 이후의 사건인지라 진정한 會通이 불가능했다.
나는 格致를 논한다면 東洋이 西洋에게 과시할 내용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동양의 지성인들이 정직해야할 것이면서도 정직하지 못한 어저쩡한 대목이다. 따라서 대나무의 窮格은 陽明 式으로는 영원히 재현되어서는 안 되며 또 陽明 式의 爲聖之道를 지금 새삼 주장하는 어리석은 사고를 현시해서도 안 된다. 道通을 인생의 지고의 목적인냥 생각하는 이땅의 젊은이들이 아직도 百이면 百, 陽明의 아류적 수준에도 못미치는 사고에 침윤되어 허덕이고 있는 불행한 현실을 개탄한다.
자아! 이제 우리의 최후의 결론으로 진입한다. 朱子에서 陽明으로 오는 모든 格物의 眞義가 그릇된 인식 위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그럼 지금와서 朱子學은 왜 공부해야하며 도대체 陽明은 왜 읽어야 하는가? 도올 당신은 왜 杜교수의 陽明 전기를 읽으라고 권유하면서 이런 序文을 휘갈기고 있는가?
格物致知의 최후의 산물인 이 知의 궁극적 의미를 서양인들은 희랍철학으로부터 근세철학에 이르기까지 진리(Truth)의 추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데 비해 동양인들은 知를 聖人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진리의 추구는 과학을 낳았고 과학적 지식의 내용은 格物致知에 있어서 인류문명의 지혜의 눈부신 발현을 이룩하였다. 서구인의 과학적 지식이 발현시킨 理의 세계는 朱子나 陽明의 생각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理氣의 세계를 탐색해 놓았다. 陽明의 전기를 대할 때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와닿는 그의 삶의 역정의 의미는 역시 성인에 대한 열정과 충동이다. 그렇다면 陽明의 성인에 대한 열정은 그릇된 격물관에서 비롯된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朱子의 패러다임의 최대의 특질은 理法的 세계의 객관성을 존중하면서도 그러한 理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구극적으로 聖人이 되고자 하는 갈망, 즉 나의 삶의 궁극적 모습의 도덕성으로부터 격리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서양의 과학적 지식이 인간과 우주에 관하여 어마어마한 理의 세계를 면밀하게 검토하였고 그 理의 운용이 氣의 세계의 구성원리를 지배해버렸다 할지라도, 그 理・氣의 모든 문제가 결국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 그리고 그 삶의 모습은 성인이라는 도덕체에 접근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오늘날 우리의 現存에 가장 절실하게 자각되어야 할 요청인 것이다.
陽明이 대나무 앞에서 靜坐하고 대나무를 궁격한 것은 참으로 우매한 짓이다. 오늘날의 생물학자나 식물학자, 분자생물학자는 대나무를 궁격하는데 있어서 양명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道理의 실마리들을 무난히 펼쳐내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생물학자는 자신이 궁격하고 있는 竹子의 道理가 궁극적으로 聖人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허나 오늘 양명이나 주희를 읽는 우리가 생물학자들에게 분명히 얘기해주어야 할 것은 대나무의 궁격이 곧 爲聖의 길이라고 여겼던 陽明의 정열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열정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DNA의 헬릭스(螺線)의 구조의 인식이 곧 나를 성인으로 만들게 하는 길이라는 이 엄청난 진리를 그들에게 설파해 주어야 한는 것이다. 헬릭스의 신비가 단지 電子顯微鏡上의 事實이 아니라 우주전체의 모습과 연결되어 있다는 그 철학적 의미가 곧 그를 도덕적으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이 인류의 21세기 가치관으로 정립되지 않는 한 인류의 미래는 없으며, 인류의 문명은 天地를 멸절시키고야 말 것이다! 오호라! 어찌하여 인간은 이다지도 몽매할까! 오호라! 어찌하여 인간은 이다지도 하나만을 알고 둘을 깨닫지 못할손가!
지구상의 인간의 모든 지식은 그것이 學일진대, 그것이 格物(Discovery of Law)일진대, 그것이 배움(Learning)일진대, 그것이 진정한 앎(Science)일진대, 결국은 삶을 위한 것이다. 삶은 삶(Living)이다. 삶은 건강이며 건강은 나의 몸의 건강이다. 나의 몸의 건강은 곧 천지의 건강이다. 知를 궁극적으로 爲聖之學이라고 생각하는 朱子學-陽明學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객관성이나 가치중립적이라는 위장아래 주어지는 知의 중간단계나 독립성이 보장될 길이 없다. 그렇다면 결국 知는 行과 일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知와 行의 일치로부터 인간은 탈출할 길이 없다. 성인이 되고자 하는 한! 이것이 곧 양명의 根本義가 아니고 무엇이랴!
과학의 발전이 인간에게 성인이 되고자하는 충동을 근원적으로 앗아가 버리고 인간을 국부적 지식에 얽매인, 윤리적으로 타락해버린 속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現世에서, 성인이 되고자하는 충동, 대나무의 격물을 통하여 도덕적이고자 하는 陽明의 충동은 참으로 萬世에 스러질 수 없는 고귀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서구문명이 애써 밝혀놓은 과학적 理의 세계나 朱子가 애써 통합할려했던 理・氣의 세계나 退溪나 高峯이 논쟁의 골을 깊게 팠던 四端七情의 문제가 모두 하나의 格物이라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한 인류는 제아무리 유위적 과학문명을 현란하게 성취해나간다 할지라도 환경적 재앙으로부터 인간을 지킬 길이 없을 것이다. 人間은 聖人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존재다. 聖人이 될 수밖에 없다 함은 인간은 곧 自然이기 때문이다. 自然은 곧 天地요, 天地는 곧 음양이요, 음양은 곧 氣요, 氣는 곧 理요, 理・氣의 통합은 곧 聖人이다. 화인만의 『피직스-물리학』이나 가이톤의 『피지올로지-생리학』은 주희의 『語類』와 통합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聖人의 과제를 발견하는 것이다.
본서의 저자 뚜 웨이밍 교수는 중국인으로서 영어문화권에서 중국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각방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벌리고 있는 정예로운 학자로서 탁월한 영어와 중국어를 구사하는 석학이다. 한국에도 수차 왕래하였고 이미 斯界에 지명이 높은지라 나의 소개를 필요로 하지 않고 또 많은 사람에게 친숙하리라고 믿는다. 내가 하바드에서 수학하고 있을 때 버클리대학에서 하바드대학으로 초빙되어 왔고, 그는 나의 논문의 최종지도교수의 한사람이 되었다. 뚜 웨이밍교수는 나와 나이도 그렇게 차이는 나지 않지만 나는 그에게 선생으로서 깊은 존경심을 지키고 있다. 뚜 웨이밍이라는 인간에게서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운 것은 지칠 줄 모르는 학문에의 정열과 모든 격식을 초월한 소신에의 전념이다. 요즈음 나는 뚜교수와 왕래가 별로 없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뚜교수가 추구하는 아카데미즘의 길과 너무도 간섭되지 않은 한가로운 외길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의 서문과 뚜교수의 본문을 비교해보면 문장의 내음새에서 풍기는 사고의 격리감을 독자들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속칭 학문적 연구자라는 사람들의 담론의 격식을 일탈해버렸다. 허나 언젠가 뚜교수와 다시 만나 今後인류의 미래의 대세에 관하여 격론을 벌릴 날이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뚜교수의 양명전기에서 조선의 후학들은 고전을 해독하고 그것을 소화된 언어로 풀어내는 성숙된 학자의 모습을 배우기 바라며 우리나라 옛사상가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격조의 전기(biography)가 많이 쓰여지기를 갈구한다. 에머슨의 한 말을 기억하자 : “역사는 전기일 뿐이다”(History is nothing but biographies.)
출처 : 뚜 웨이밍 교수 著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 청년 王陽明